율리아 마마이아 Julia Mama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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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 |
왕조 |
세베루스 왕조 (the Severan dynasty) |
전임 아우구스타 |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
공동 아우구스타 |
율리아 마이사(222–224)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226–227) |
신상 정보 | |
이름 |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Julia Avita Mamaea) |
통치 칭호[1] |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아우구스타 Julia Avita Mamaea Augusta |
통치 추가 칭호 |
마테르 아우구스티 노스트리 에트 카스트로룸 에트 세나투스 에트 파트리아이 mater augusti nostri et castrorum et senatus et patriae (번역: 황제, 군대, 원로원, 국가의 어머니) |
마테르 유니베르시 게네리스 휴마니 mater universi generis humani (번역: 전(全) 인류의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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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서기 182-192년(불확실) 8월 14일/8월 29일 로마제국 시리아 에메사 |
사망 |
서기 235년 로마제국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비쿠스 브리타니쿠스(오늘날의 독일 브레트첸하임) |
배우자 |
이름 미상의 남편(첫 번째 남편)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두번째 남편) |
자녀 |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테오킬리아 |
아버지 |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 |
어머니 | 율리아 마이사 |
자매 |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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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아우구스타. 일부 서적, 논문 등에는 율리아 마메아로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아우구스타 시절, 개인적으로 제호를 모방해 취한 공적 이름은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아우구스타'로, 처형 직후 원로원의 만장일치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져 의미없는 이름이 됐다. 세베루스 왕조의 소위 '시리아 여제(女帝)' 4인방 중 마지막 인물로, 당대부터 '여자 도미티아누스'로 평가받았다.
율리아 마이사의 차녀이자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여동생으로, 외사촌 카라칼라가 게타를 존속살해한 직후 이모 율리아 돔나와 외사촌 카라칼라에게 공식으로 세베루스 가문 황녀로 인정받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아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황위에 오른 뒤 황제의 어머니, 세베루스 황가의 황녀 자격으로 아들의 정통성 근거를 내세워 일찍부터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공할 만한 사실상 여제인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 생전에는 내정 개입을 자제했지만, 223년 말 혹은 224년 초 율리아 마이사가 죽고 난 직후부터 과거 율리아 돔나의 통치 칭호 선포와 추가 통치 칭호를 선례 삼아 스스로를 아들의 공동황제 격으로 격상시키고, 울피아누스의 도움 아래 로마 여성 중 최초로 세계와 인류 전체의 어머니라는 거창한 칭호를 받아낸 다음 이를 남용해 사용했다.
아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정부를 지키고, 울피아누스를 돕겠다는 거창한 명분과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명분 아래 정치에 직접 개입해 황제에 버금가는 힘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에게 지나친 간섭을 일삼고, 여러 원로원 의원들을 견제해 정국을 위태롭게 했고, 통치 자금 확보 등을 위해 무리하게 반대파를 추방하고, 며느리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를 숙청하면서 사돈이던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를 반역죄로 죽였다. 또 정적을 처벌할 때마다 무자비하게 그들 재산을 자신 소유로 넣어, 이 점에서 아들 알렉산데르까지 우려를 표했다. 이런 결과, 228년 그녀의 노력에도 울피아누스가 프라이토리아니의 궁중 정변으로 암살됐고, 이때부터 군대 장악에도 실패하면서 아들의 치세에 먹구름을 일게 했다. 이런 까닭에 235년경 로마군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아들과 함께 피살됐다.
사후 원로원에게 패악을 저지른 악녀의 대명사로 단죄돼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사후 3년만에 완전히 신원복구된 아들과 달리,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몰락 이후에도 사후 복권되지 못했으며 이후 로마의 아우구스타들에게 최악의 아우구스타, 반면교사의 예시로 많이 언급됐다.
2. 생애
2.1. 가계와 초기 생애
시리아의 주요 도시인 에메사에서 부친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와 모친 율리아 마이사의 차녀로 태어났다. 생일은 8월 14일 또는 8월 29일로 여겨지지만,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다. 언니 소아이미아스가 180년에 태어났으니, 180년 이후 몇년 사이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은 로마의 기사계급 출신이었으며, 모친은 태양신 '헬리오가발루스'를 섬기는 대사제 율리우스 바시아누스의 딸이었다.마마이아의 첫번째 남편은 전직 집정관이라고 알려졌지만, 그 외의 정보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후에 자신이 "메텔루스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데, 혹자는 이를 근거로 첫번째 남편이 메텔루스가의 일원이며, 세베루스는 첫남편의 아들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학계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그의 형제 자매 모두 명백한 시리아 혈통에서 내려온 이름을 사용하였다는 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마마이아는 첫번째 남편이 사망한 뒤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했다. 마르키아누스는 시리아 에메사 태생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서기 193년경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뒤 원로원 의원으로 발탁되었다. 마마이아는 208년 10월 1일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낳았고[2], 뒤이어 딸 테오클리아와 막내 아들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를 낳았다.
서기 217년, 카라칼라 황제가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세베루스 왕조는 무너졌고, 마마이아는 어머니와 언니 등 가족과 함께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이에 율리아 마이사는 왕조를 복구시키기로 결심하고, 장녀 소아이미아스가 낳은 엘라가발루스를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로 내세웠다. 카라칼라 황제를 그리워한 데다, 마크리누스가 파르티아와 굴욕적인 협상을 맺은 것에 반감을 품고 있던 3군단 갈리카는 그녀의 말을 믿기로 마음먹고, 서기 218년 5월 16일 엘라가발루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이후 새 황제의 군대는 안티오키아 인근에서 마크리누스의 군대와 격돌해 완승을 거두었고, 마크리누스는 로마로 가서 지원군을 규합하려고 북쪽으로 달아났으나 칼케돈에서 체포되었고, 카파도키아의 아르켈라이스에서 백인대장에게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새 황제는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군주가 되었고, 세베루스 왕조를 복구하겠다는 마이사의 계획은 성공했다. 어머니가 이렇듯 종횡무진 활약하는 동안 마마이아가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어머니와 행보를 함께 했을 것으로 보인다.
새 황제가 된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에서 온갖 기행을 저지르며 민심을 잃었다. 급기야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인 아내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와 이혼하고 은퇴 전까지 순결을 끝까지 지킬 의무가 있는 베스타 여사제 아퀼리아 세베라와 결혼하기까지 하면서, 로마인들의 반감은 극에 이르렀다. 마이사는 이대로 가다가는 민중이 봉기하거나 야심가가 반란을 일으켜 겨우 복구한 왕조가 또 다시 무너지고, 자신과 가문의 입지마저 위태로워질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구제불능이 된 외손자를 대체할 새 인물을 세우기로 마음 먹고, 221년 여름 엘라가발루스를 설득하여 마마이아의 아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카이사르에 지명하게 했다.
그러나 민심이 알렉산데르에게 급격하게 쏠리자, 엘라가발루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엘라가발루스는 알렉산데르를 제거하려 했고, 222년 초 부터는 아예 알렉산드르와 함께 대중 앞에 함께 서지 않았다. 마이사와 마마이아는 이에 맞서 원로원과 함께 알렉산데르를 지지했다. 222년 3월 11일 또는 12일, 엘라가발루스는 근위대장에게 알렉산데르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근위대는 알렉산데르 지지를 천명하고, 엘라가발루스와 어머니 소아이미아스, 총신 히에로클레스를 살해했다. 세 명의 시신은 온 로마 시내에 질질 끌려나다니다가 난도질당한 뒤, 머리는 사라지고 몸통은 티베리스 강 하수구에 버려졌다. 이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황위에 오르면서, 마마이아는 황제의 어머니가 되었다.
2.2. 황제의 어머니
로마 원로원은 알렉산데르를 새 황제로 추인했지만, 원로원 내부에 설치되었던 세나쿨룸을 폐지하여 황실의 여인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의 실정으로 인해 민심이 무척 안 좋아서 원로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세나쿨룸 폐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새 황제 알렉산드르 세베루스의 초상화를 새긴 동전에는 다음 글귀가 적혀 있었다.Juliae Mamaeae Aug(ustae) filio Juliae Maesae Aug(ustae) nepote
율리아 마마이아 아우구스타의 아들이자 율리아 마이사 아우구스타의 손자
율리아 마마이아 아우구스타의 아들이자 율리아 마이사 아우구스타의 손자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 때처럼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황제에게 조언하고 행정부의 업무를 통제하기 위해 선택된 16명의 평의회에 영향력을 일정부분 행사했다. 이때 마마이아는 자신과 친분이 두터웠던, 법학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를 아들의 보호자, 스승, 오른팔로 점찍고 16명 자문회의(평의회) 멤버 중 유일하게 임페리움(통솔권)을 내려주도록 힘을 썼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어머니 마이사가 세베루스 왕조 재건을 위해 힘을 쏟으면서, 마마이아의 의견을 많이 들어준 것이 컸다. 다행히 마마이아는 엘라가발루스 치세 4년 내내 꾸준히 힘을 기르며, 더 큰 권한 행사를 위해 잠자코 있어서 큰 소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이사가 사망한 뒤, 마마이아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학자들의 추측처럼 그녀가 무척 믿고 있던 울피아누스가 서기 228년 초 팔라티노 황궁 한복판에서 암살된 이후, 그녀가 분신처럼 여긴 아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지키기 위해 노골적으로 힘을 기른 것 일 수도 있다. 마마이아는 근위대 병사들의 불만을 알고 울피아누스를 지키기 위해, 손수 황제 경호인력을 붙일 정도로 울피아누스 보호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대낮에 황궁 집무실에서 그가 살해당하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consors imperii"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이것은 '황제의 동업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녀가 사실상 공동 황제라는 걸 상징했다. 또한 224년에는 "Mater Castrorum(군대의 어머니)"를 받았고, 226년에는 "Mater Senatus(원로원의 어머니)"를 받았다. 그녀는 이렇듯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데 집착했고,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녀는 아들 알렉산데르를 일일이 간섭하다 못해 사생활까지 침해했다.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가 본인만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은 것에 심하게 질투했고, 그녀의 출신 가문과 장인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가 가진 명예와 권력도 질투했다.
결국 알렉산데르의 장인은 마마이아의 농간에 의해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고, 오르비아나는 227년 북아프리카 속주로 유배되었다. 또한 부유한 귀족들이 재산을 탐낸 마마이아에 의해 살해되었다. 알렉산데르는 어머니의 전횡에 큰 불만을 느꼈지만, 감히 어머니의 의사를 거역하지 못했다. 마마이아는 급기야 " senatus et patriae(온 국민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받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런 마마이아의 행동은 그렇지 않아도 불만 투성이였던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를 자극해,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근위대장들을 무시하고 황제 모자를 비이냥대는 이유가 됐다. 하지만 울피아누스 피살 당시부터 마마이아 모자는 군율조차 서지 않는 근위대 병사, 장교들을 통제도 못하고 그들을 처벌해도 솜방망이 수준으로 형식상 징계만 한 뒤, 눈치를 보다가 풀어주는 일을 반복했다. 따라서 이를 직접 본 동시대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이런 황제와 모후의 행동에 경악하며, "근위대와 각 군대, 황제 경호대까지 군율이 서지 않고 세상에서 황제를 우습게 본다"고 이를 기술하거나, "군율이 형편없고 병사들은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불평을 터트렸다"고 이를 평했다.
2.3. 몰락과 사후 이야기
231년 봄, 알렉산데르는 로마를 떠나 도나우 방어선 일대의 최정예군을 규합한 뒤 늦여름에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이때 마마이아도 아들의 원정에 동행했다. 이후 알렉산데르의 로마군은 국경을 번번이 침범하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교전했다. 로마군은 3로로 나눠서 진격하였는데, 그중 한 부대는 큰 타격을 받고 패주했고, 다른 두 부대는 페르시아 영역 깊숙이 진격하여 타격을 입혔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철수했다.233년 로마로 귀환한 알렉산데르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라인강 일대의 게르만 부족들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라인강 국경을 돌파해 요새들을 파괴하고 이 일대의 로마 영내를 유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알렉산데르는 제국 동부 일대의 군단에서 병력을 차출한 뒤 전선으로 향했다. 물론 마마이아도 아들과 함께 갔다.
전선에 도착한 뒤, 로마군은 게르만족을 라인강 너머로 격퇴하였고, 부교를 만든 뒤 라인강을 도하하여 게르마니아에 산재한 부족들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그런데 알렉산데르는 돌연 전쟁을 그만두고 게르만족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 평화를 이루려 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어머니 마마이아의 견해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로마군 장병들은 "전쟁은 이제 시작되었고, 지금 승기를 잡았는데 어째서 전쟁을 멈추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돌아갈 하사금을 어째서 게르만 놈들에게 줘야 하느냐?"라며 강한 불만을 품었다.
결국 235년 3월 21일, 라인강 전선의 병사들이 게르마니아 내 모군티아쿰(오늘날 독일 마인츠) 병영에서 반란을 일으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알렉산데르와 마마이아 모자를 황제 막사 안에서 살해했다. 당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알렉산데르는 처형되기 전에 온갖 일에 개입해 논란을 일으킨 어머니를 원망하면서, 그녀에게 죽기 전까지 모든 불만을 쏟아냈다고 한다. 원로원은 소식을 접한 뒤 알렉산데르가 부당하게 살해됐다고 보고 일단 신격화만 보류한 뒤 제대로 장례를 치러줬고 그마저도 정적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죽은 238년 곧바로 신격화도 단행하여 정식으로 복권하였으나, 마마이아는 아들에게 온갖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여 국가를 망쳤다는 점을 들어 기록말살형에 처했다.[3]
3. 평가
그는 완전히 어머니의 지배를 받아, 그녀가 하라는 대로만 했다. 지나치게 온순하고, 정도 이상으로 어머니를 존중해, 자신이 찬성하지 않은 문제들도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그가 비난받을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헤로디아누스, 6.1
헤로디아누스, 6.1
율리아 마마이아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상반된 두 가지 견해가 함께 공존 중이다.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낀 나머지 그 정도가 지나쳤다는 평가가 첫번째였다. 두번째는 평가절하됐음에도 불구하고, 권모술수가 난무한 세베루스 왕조 아래의 로마 제국에서도 손 꼽히는 권모술수의 대가인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 못지 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오만하고 거만한데다 권력욕이 지나쳐, 결함이 뚜렷했고, 이 단점이 모든 장점을 가렸다는 평가이다.
따라서 그녀에 대한 평가는 입체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더해 율리아 마마이아는 재평가 뒤에도, 고대와 현대 모두의 시각에서 악녀라는 평가 속에서 자신의 종말을 비극적인 여주인공이 아닌 파멸하는 악녀였다고 이야기를 듣는다. 왜냐하면 분명한 태생적, 정치적 결점에도 자신의 존재와 지위를 과대평가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대부터 여자 도미티아누스라고 암암리에 평가받았고, 그녀가 정적이나 예비 정적을 제거한 뒤엔 도미티아누스처럼 꼭 그들 재산을 자신의 호주머니로 전부 집어 삼킨 부분은 아들 알렉산데르가 처형 직전 울분을 토할 정도로 손가락질 받는 제1 원인이 됐다.
하지만 율리아 마마이아는 모성애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치세를 13년 동안 평균 이상으로 훌륭히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비꼬는 말로 여자 도미티아누스로 불린다거나, 아들과 한 사람으로 묶여 알렉산데르 마마이아라고 조롱받더라도, 율리아 마마이아는 카라칼라 암살 이후 끊긴 정통성, 엘라가발루스의 악몽 같은 4년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율리아 마이사 다음의 실력을 이모 율리아 돔나처럼 확실히 보여준 여걸이었다.
그렇지만 율리아 마마이아의 두드러진 존재는 그녀가 태생적으로 가진 외척 출신 방계 황족이라는 한계, 아들의 첫 아내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를 제거한 과정 속에서 보인 행동은 잡음을 수없이 불러 일으켰다. 더해 그녀는 영악함을 넘어 교활하고 비양심적이었던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와 달리, 이모 율리아 돔나처럼 똑똑하고 권모술수에는 능했지만, 비양심적이지 못했고, 자신의 능력이 뛰어남을 과신한 결점이 뚜렷했다. 그 결과, 그녀는 이모 돔나가 아들 카라칼라 몰락 직후 허무하게 무너진 것 그대로 결국 몰락이라는 종말로 모든 것이 무너졌다. 40년 전의 율리아 돔나가 남편 세베루스와 함께 공들여 만든 세베루스 왕조의 막강한 권세 종말이라는 측면 역시 율리아 마마이아의 지나친 개입으로 인해, 네로의 모후 소 아그리피나의 권력 조종이 부활했다고 평가받았을 정도였다.
세베루스 왕조가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후 줄줄이 어린 황제 또는 약점이 뚜렷한 통치자가 연달아 등장한 상황 속에서, 권모술수가 판을 친 원로원을 상대로 정권과 왕조에 대한 모든 비판과 아들 치세 안정을 위해 노력하면서 벌인 온갖 더러운 일을 자신이 하면서 그 비판을 오롯이 황제가 아닌 모후인 본인이 끌어 안고 간 것은 그래도 근대 이후 재평가가 된 비결이 됐다.
근대 이후부터의 평가를 보면, 율리아 마마이아는 평균 이상의 통치자였다고 분류된다. 자신이 생전 롤모델로 무척 존경하고 따른 이모 율리아 돔나와 버금이 갈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항상 따라 다닌다. 더해 율리아 마마이아는 권력욕이 지나쳤고, 돈 욕심이 많았다고 비판 받더라도, 아들 사랑이 대단했고, 놀라울 정도로 사생활이 깨끗했다.[4] 따라서 이 점에서는 당대부터 "악녀였어도, 음탕하거나 난잡하지 않았다."고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즉, 악명 높은 아우구스타로 어쩌면 당대부터 정적들 사이에서 나온 여성 도미티아누스라는 평가가 딱 어울렸던 셈이다. 물론, 마마이아가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던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절제력이 대단하고 아들 알렉산데르처럼 정적인 위엄을 중시했음에도 말이다.
4. 여담
기독교측 기록에 따르면, 마마이아는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지도자인 오리게네스에게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
본인 스스로 로마 황제의 제호처럼 만들어,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 사후, 아들과 울피아누스의 이름 아래 선포해 사용했다.
[2]
출생 당시의 이름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이다.
[3]
다만 그녀의 악행이 그대로 기록에 엄청나게 많이 남은 걸 보면 엘라가발루스와 마찬가지로 선고만 하고 실제 말살조치는 행해지지 않은 듯 싶다. 애초에 선고만으로도 당사자가 사람같지 않게 살았다는 증명은 되기 때문.
[4]
많이 비교된 이모 율리아 돔나와 비교해, 율리아 마마이아는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처럼 놀라울 정도로 남자애인을 두지 않았고, 함께 업무를 한 관료들과는 부적절하거나 의심을 살 행동을 하지 않아, 이 점에서는 보수적인 로마 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