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2:45:00

신센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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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8fb0><colcolor=#ffffff> 신센구미
[ruby(新, ruby=しん)][ruby(選, ruby=せん)][ruby(組, ruby=ぐみ)]
파일:신센구미 깃발.svg
설립 1863년 (분큐 3년)
해체 1869년 ( 메이지 2년)
소속 파일:도쿠가와 가몬.svg 에도 막부
파일:아이즈 번.png 아이즈 번
지도자 곤도 이사미 (국장)
병력 발족 당시 24명
최대 230여명
주요 사건 이케다야 사건
금문의 변
보신 전쟁
1. 개요2. 역사3. 정체성 논란4. 이미지와 실제5. 관련 인물6. 검술 실력7. 국중법도(局中法度)8. 여담9. 신센구미를 소재로 만든 작품

[clearfix]

1. 개요

에도 막부 말기에 막부 휘하에서 활동한 치안 및 준군사조직 중 하나.[1] 한자로는 '新選組' 또는 '新撰組'.

한국에는 신선조(新選組)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일본어에서 '選'(가릴 선)과 '撰'(지을 찬, 가릴 선)은 같은 한자이다. '撰'은 한국어에서 '지을 찬'의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일본 한자음에서는 '選'의 동자(同字)로 거의 'せん(센)'[2]으로만 음독한다. 이 점을 고려하면 '新組' 또한 신찬조가 아닌 '신조'로 번역하는 것이 더 원어 쪽에 가깝고, 실제로 현재 일본에서도 新選組와 新撰組를 같이 사용하지만 모두 '신구미'일 뿐이다.[3]

별명으로 전신인 미부로시([ruby(壬生浪士,ruby=みぶろうし)]) 시절부터 불렸다는 미부의 늑대([ruby(壬生狼,ruby=みぶろう)])가 유명하지만, 실제론 미부의 낭인([ruby(壬生浪,ruby=みぶろう)])으로 불리거나 허름한 행색 때문에 멸칭으로 'みぼろ(미보로)'라 불렸다고 한다.[4] 미부의 늑대는 창작물에서 나온 것이 유명해지다 보니 실제 별명으로 오해하게 된 거라고 한다.

2. 역사

신선조 연구는 일본 사학계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시작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역적 살인자 집단 취급이라 사학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1960년대에 시바 료타로가 소설에서 그린 허구성이 강한 영웅담의 인물상이 인기를 얻고 재평가를 받은 경우라 워낙 전설과 낭설이 많아서 기존의 이야기는 믿고 싶은 사람만 믿고, 아니면 그냥 흘려들어도 된다.

널리 민간에 알려진 신센구미는 막부를 철저히 보호하는 치안 및 준군사조직으로 좌막파([ruby(佐幕派,ruby=さばくは)])[5]이며, 주로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당시에는 한참 교토를 노리고 존황양이[6] 유신 지사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걸핏하면 좌막파 인사를 참살하는 등 정치 테러를 일삼았기 때문에 치안강화의 필요성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신센구미가 그 자리를 채우고 들어갔다.

원래는 제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고메이 덴노의 부름으로 천황이 사는 쿄(京)로 상경해서 '양이'를 맹세하러 갔을 때 그 호위를 명목으로 신분을 구별하지 않고 모은 낭인 집단 로시구미([ruby(浪士組,ruby=ろうしぐみ)], 낭사조)가 그 유래이다. 문제는 로시구미를 창설한 쇼나이 번사 키요카와 하치로가 존황양이파였다. 그는 쿄(京)에 입성하자마자 존황양이를 주장했고 쇼군이 아니라 천황의 병사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미마와리구미(견회조)의 사사키 타다사부로에 의해 살해당하며 로시구미는 와해되고 만다. 와해된 뒤 쇼군에게 충성심이 강한 교토의 미부에 남은 24명이 스스로를 미부로시구미([ruby(壬生浪士組,ruby=みぶろうしぐみ)], 임생낭사조)라 자처했고, 이것이 후에 교토의 치안을 담당한(교토 수호직) 아이즈 번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예하에 들어가서 신센구미(신선조)로 발전하게 된다. 에도의 시위관이라는 검술 도장에서 천연이심류를 함께 수행하던 곤도 이사미( 국장), 히지카타 토시조(부국장), 오키타 소지(1번 대장)의 3인과 식객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고, 그 인원은 점점 늘어나 최종 234명이 되었다.

행동부대는 1번대부터 10번대까지 총 10개 부대로 나눠져 있었다. 단, 이들 부대가 신센구미 후기 전쟁을 대비한 준군사조직으로 조직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서류화된 것이며, 실제 교토에서의 활동은 이보다 적은 수의 부대로 이루어졌다는 학설도 있다.

앞서 로시구미의 와해는 결국 좌막을 자처하고 조직을 만든 자가 갑자기 조직을 자기 멋대로 도막파의 정치운동에 동원하려고 하니 막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모여든 조직원들 사이에서 반발이 생겨서인데, 문제는 미부로시구미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세리자와 카모도 존황양이의 대표격인 미토 번사이며 과격한 존황양이 운동을 하다 죽을 뻔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조직의 내부에 불안과 갈등을 껴안은데다가 신분을 따지지 않고 구성원을 모았기 때문에,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히지카타 토시조가 선택한 방법이 가차없는 피의 숙청. 신센구미는 적에게 죽은 사람보다 내부 숙청으로 죽거나 쫓겨난 사람이 더 많을 정도이며, 초대 국장 세리자와 카모도 예외는 아니었다.[7]

심지어 곤도 이사미, 야마나미 케이스케 등 곤도파에 속하는 간부들조차도 이케다야 사건 시기까지도 강한 양이론자였으며, 단지 좌막 성향이 강해 존황양이 중 '존황'보다 막부를 우선시한 것 뿐이었다. 애초에 이들이 상경한 목적부터가 쇼군 호위 임무 이후에는 조정으로부터 양이의 칙명을 내려받은 막부를 도와 양이 운동에 참가하려는 것이었으며 교토 치안 유지는 이들의 본의가 아니었다. 세리자와 암살 직후 시점의 곤도는 아이즈 번이 정식으로 녹봉을 지급하고 무사 신분을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대신 자유롭게 양이에 나서고 싶다는 건백서를 제출할 정도로 열성 양이론자였다. 하지만 막부 상층부는 양이를 공무합체를 위한 명분으로 내세웠을 뿐 실제로는 전혀 적극적이지 않았다. 1864년 초 참예회의가 와해되고 양이론이 다시 흐지부지되자 곤도는 신센구미 해산 요청서를 아이즈 번에 제출하지만, 신센구미는 이미 교토 치안 유지에 필수적인 조직이 된 상태였고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요청서를 반려한다.

이후 이케다야 사건에서 조슈 번사들의 음모를 미리 파악해 막아낸 활약으로 일약 유명해지고 막부의 확실한 인정과 지원을 받게 되며, 교토에 있는 과격파 존황양이론자들을 색출했다. 곤도의 경우 이케다야 이후 교토의 좌막 세력의 중진으로서 일정한 정치적 발언권을 갖게 되며, 비슷한 시기에 서서히 양이의 불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일반 대사들 사이에서는 양이 여론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센구미 조직 내부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들이 쫓던 사람 중 한 명이 사카모토 료마로, 오미야 사건에서 료마가 암살당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센구미가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피해자인 나가오카 신타로부터가 죽어가던 자리에서 범인이 신센구미라고 고했을 정도이다. 특히 료마가 속한 도사 번 지사들이 신센구미에 큰 원한을 갖게 되어 이후 곤도 이사미 처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현대의 연구에 의하면 신센구미는 료마 암살과 무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후 도막파와의 전운이 고조되자 신센구미는 군사조직으로 전환을 시도하며 여러 전시 편제나 군중법도 제정, 총기 훈련 등을 실시했다. 하지만 보신 전쟁의 첫 싸움인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의 일원으로 싸웠다가 크게 패했다.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로는 에도로 도망친 쇼군 요시노부를 뒤따랐다. 가쓰 가이슈 등 막부 공순파는 주전파로서 에도 개성 협상에 방해였던 신센구미를 갑양진무대라는 이름으로 코슈(현 야마나시현) 지방으로 파견했다. 갑양진무대는 곤도의 어설픈 지휘 등으로 인해 신정부 도사 번군의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에게 크게 패하며, 패전 이후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등 일부 간부 및 대원들이 곤도 휘하에서 이탈했다.

이후 간토 지방까지 쳐들어온 신정부군과 맞서지만 신정부군의 기습으로 지휘부가 주전력과 떨어져 단숨에 포로로 잡혀 신식 무기 대부분을 몰수당하는 실태를 보였다. 이 때 곤도 이사미 또한 포로가 되었고, 처음에는 가명을 대며 정체를 숨겼지만 신센구미 국장인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 금방 들통났고 우여곡절 끝에 처형당했다. 한편 항복한 신센구미 대사들은 이후 따로 재집결하여 히지카타 토시조, 사이토 하지메 등의 지휘 아래 아이즈 전선까지 싸웠다. 아이즈에서도 패색이 짙어진 뒤 히지카타는 에노모토 다케아키 함대와 함께 홋카이도로 떠나는 것을 선택했지만, 사이토 등 일부 대원들은 최후까지 아이즈와 함께 싸우는 것을 선택하여 이탈했다. 이후 신센구미는 구와나, 마쓰야마 등 옛 좌막파 번의 번사들을 대원으로 받아들이며 에노모토군 내의 한 부대로 기능했지만, 하코다테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대항해 싸우다가 항복하고 소멸한다.

오키타 소지는 젊어서 병으로 죽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고[8] 히지카타 토시조는 끝까지 막부 측에서 싸우다 전사했지만, 곤도 이사미는 항복 후 참수[9]당했기 때문에 왠지 평가가 좋지 않다. 단순 살인귀라고 왜곡되던 시절도 있을 정도.

비슷한 조직으로는 '교토 미마와리구미(京都見廻組)'가 있다. 이 쪽도 업무는 비슷하나 그 출신이 막부의 직속 가신들. 즉 사족 중에서도 엘리트들로 이루어져 있고, 담당구역도 홍등가나 시장판 등을 관할한 신센구미와 달리 니조성이나 궁 주변의 관청들이 있는 거리였다.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가끔 신센구미 창작물에 나올 땐 계급부심에 쩔어서 어깨에 힘주며 건방떨고 다니는 재수없는 조직으로 나오며 실제로도 그랬다고 한다. 이케다야 사건에서도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조가 지원을 기다리지 않고 무리하게 신센구미 병력만으로 출동한 것도 미마와리구미에게 공을 뺏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다른 곳으로 출동하였다가 뒤늦게 이케다야로 도착한 히지카타 토시조는 전투보다 외부 조직이 이 사건에 끼어드는 것을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신선조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조직으로는 신징조(新徴組)가 있다. 이쪽은 에도에서 치안유지 활동을 했으며 쇼나이 번(현재 야마가타현 서부)의 후원을 받았다.

3. 정체성 논란

한국에서는 2000년대 중후반 몇몇 블로그 글들을 통해 신센구미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절 이정재 패거리와 비슷한 정치깡패 집단이라는 인식이 흔히 퍼져 있다. 이것은 신센구미를 기존 권력체계를 폭력으로 유지하려 한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메이지 정부는 사쓰마 번 조슈 번의, 이른바 ' 삿초 동맹' 세력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낸 신정부이다. 이들이 교토에서 활동할 때 가장 큰 훼방꾼이 바로 신센구미였으며, 신센구미가 임무를 명목으로 수많은 유신지사들을 죽였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막부의 개들'이라 불리며 신센구미에게 온갖 악역 이미지가 집중된 면도 있다. 실제로도 메이지 유신 이후 상당 기간 신센구미는 그 시대를 다룬 사극이나 역사소설에서 악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신센구미 구성원들의 신분이 낮았던 것도 대부분 사족, 화족으로 구성된 유신지사들과 대비되어 거칠게 묘사되는 데도 한몫했다.[10]

하지만 신센구미는 교토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조직된 막부 공인단체였다. 애당초 메인 스폰서가 교토 슈고쇼쿠[11]를 맡았던 아이즈 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다. 신센구미에게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곧 교토 쇼고쇼쿠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였고, 나아가서는 당시 천황보다 강한 권력을 가진 실권자이던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였다. 애초에 당시 천황이었던 고메이 덴노 본인도 카타모리나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그리고 막부 실권자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존중하고 요시노부의 정국 운영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위 존왕양이, 유신지사를 칭한 이들도 별별 인물이나 세력이 뒤섞여 있었다. 일부 과격파들이 교토에서 벌인 행각을 보면, 존황사상을 주장하며 정작 왕궁에 총포를 쏘아대고 돌격하는 등 야만적 전투행위 천황을 납치하고 교토를 불바다로 만드는 대방화 계획을 모의하는 테러리스트들도 있었는데,[12] 이런 집단을 상대로 신센구미도 무력 없이는 치안을 유지할 수 없었다.

참고로 신센구미 대원들은 대부분 사족 출신이 아니라 평범한 집안 출신들이었다. 대장인 곤도 이사미는 농민 출신으로 곤도 가에 양자로 들어가 천연이심류를 이어받았고, 부대장인 히지카타 도시조도 이시다 산약이라는 약을 팔던 농민 출신. 2번대장인 나가쿠라 신파치, 3번대장인 사이토 하지메와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탈번무사 출신이다. 그리고 10번대장 하라다 사노스케는 무가의 하인의 자식이었다. '최후의 무사-신센구미'에 실린 표에 의하면 전체적으로 탈번무사 출신들이 가장 많고(28명), 평민 계층들의 수(20명)를 다 합치면 번듯한 번사 자제들(15명)보다 많다.

그런 신센구미의 임무는 대부분 치안유지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방첩활동이었고, 실제로 이 시절 신센구미 말고도 이른바 '구미' 상당수의 활동들은 막부 지지파의 의용군이 정식으로 번주의 스폰서를 받아서 한 활동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직 내부에서 피바람이 벌어지는 것 때문에 다소 수상쩍어 보이는 요소가 있지만, 이는 조직 내에 침투해 분열을 획책하는 존황양이파( 이토 카시타로)나 조직을 정말 깡패 수준으로 만드는 수준 이하의 대원(세리자와 카모)을 비교적 정당하게 숙청한 거라 볼 여지도 있다. 게다가 조직원의 비행은 가차없이 처벌하거나, 비행을 일삼는 조직의 리더를 숙청하는 등 상당히 청렴한 자세를 견지했다.

또한 대부분 구성원들이 나고 자란 부슈[13]는 막부 직할령으로, 당대 백성들에게 자신들은 쇼군의 백성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있었으며 그들의 눈에는 조정보다 막부가 더 높게 보였기 때문에 막부 측이었다는 게 이상하거나 잘못된 일인 것도 아니다. 특히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 에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기에 여차하면 즉시 징집이 가능하도록 관에서도 은연중에 상무정신을 강조하던 고장이었고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검술도장이 많았다는 부분도 있다.[14] 게다가 애초에 13대 쇼군 이에사다 대까지는 막부-조정 간 의전에서 막부 쪽이 우세하였다.

실제로도 신센구미에 대한 악평이 주류였던 시절에도 코단[15]에서는 꾸준히 신센구미를 주인공으로 삼는 등 민간에서의 인기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 막부를 타도한 조슈와 사쓰마는 상당히 구석진 지방이었기 때문에 일본 문화의 주류를 이루는 교토 및 에도(도쿄) 등 대다수 민중은 막부를 동정하거나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구석이 있었고, 특히나 주 임무가 테러행위를 저지르는 유신 세력들을 저지하는 치안 유지였고 역사의 한켠으로 비장하게 사라진 신센구미는 동정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호간비이키라고 하여 패자를 동정하고 영웅시하는 풍조가 있는 데다[16], 그 패자가 하필 민중에게 인기가 많고 몹시 폼나는 데다 근대화의 물결 사이에서 분투하는 라스트 사무라이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17][18]

또한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세워진 정부도 백성의 의견을 많이 반영하는 정부는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을 바쿠한 체제에서 법치주의 등에 입각한 서구식 입헌국가로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인간사가 어디나 그러하듯 지도층에도 여러 입장과 인물이 뒤섞여있었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강경 엘리트 지도층의 온갖 오판이 쌓여 벌어진 태평양 전쟁과 패전 후유증, 유례없는 원폭 응징까지 겪은 현대 일본인들은 평민 출신들로 나름 끝까지 막부에 대해 신념을 지키려 애쓴 신센구미를 보다 호의적, 동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19]

물론 이건 주로 사실에 대한 가치 판단이 아니라 단순히 이미지의 문제이다. 대중은 그것이 설혹 틀렸을지라도 '상대적으로 강한 상대방에게 억압받으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우직할 정도로 노력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세력이나 인물에 감정이입하여 그들을 어떻게든 좋게 봐주려고 노력하거나 '그 억압하는' 세력이나 인물을 증오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중들이 동정했으니 옳다는 말은 불쌍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말만큼이나 한심한 얘기니 대중이 동정했다는 것은 단지 그뿐이다.

그리고 신센구미의 내부 숙청이 항상 정당한 동기로 벌어졌던 것은 아니며, 곤도 일파가 신센구미의 전권을 쥐기 위한 정치투쟁의 성격도 있었다고 평가된다. 비행을 근거로 세리자와를 암살한 곤도 본인도 나가쿠라 등 간부들에게 여러 죄목으로 상부에 고소당한 적이 있는 등, 신센구미라는 조직 역시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청렴결백한 집단은 아니다. 실제로도 신센구미가 없어질 때까지 일치단결한 것도 아니다. 유명한 간부들 여럿도 신센구미 조직에 환멸을 느끼고 중간에 이탈했을 정도였다. 즉 검증된 자들만을 모은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주장마저 제멋대로라 조직 결속은 상당히 불안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수단도 거듭 쓴 걸로 추정된다.

다만 신선조를 어찌 평가하던 간에 한동안 신선조 낭만화에 반발해서 나온 '정치깡패' 운운하는 주장은 옳지 않다. 신센구미의 과격성과는 별개로 신센구미 자체는 당시에 일본에서 정통성 있던 정권인 도쿠가와 막부에서, 그리고 덴노의 조정에서도 인정한 국가에서 공인한 치안기관이고 흔히 정치깡패라고 불리는 조직들이 그러듯이 유신지사들이 평화시위 하고 있는데 신선조가 정당성도 없이 막 죽이고 다닌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무슨 되도않은 20세기 한국의 경험을 투영하면서 '민주화 투사 유신지사 때려잡는 막부 일본의 백골단' 수준으로 치환해서 보면 안 된다는 것. 애초에 당대에 일본 유신지사들 중에서는 존황양이를 내세우며 친막부 인사들이나 개국파, 외국인들을 암살하는 것조차 서슴치 않는 위험인물들이 많았다. 당장 막부말 역사만 하더라도 태반의 폭력사태, 상황의 급격화는 특히 조슈번 중심의 유신지사들이 먼저 도발하는 입장이었고 그 방식도 방화에, 백주대낮에 난도질, 외국인 습격 등 진짜 전형적인 사회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안 지는 테러리스트들의 방식이었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토막세력이 역사의 승리자라서 고평가받는거지 혹시나마 막부가 당시 패권 경쟁에서 승리했거나, 그 정도까지 가지도 않고 메이지 신정부의 주류 구성 세력만 조금만 달랐어도[20] 후대의 평가가 상당히 나빴을 것이다.[21]

따라서 당시 사회정치적 문맥에서 유신지사를 토벌하는데는 막부 자체와 좌막파 번들이 힘을 합쳐 똑같은 무사인 신선조 같은 집단을 창설한건 구조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런 '구미'들은 유신지사 측이 먼저 막부 인사들 상대로 암살을 일삼아서 방어적으로 만든 조직이며 막부가 이 시기의 통치주체였고 그 막부 밑의 번주가 스폰서로 공식적으로 치안유지 권한을 부여한 집단이니 공무원 축에는 든다. 이런 저런 폄하나 미화를 제외하고 보면 오늘날로 따지면 신분으로 인해 출셋길이 막막했던 사람들 특채로 뽑아 조직한 지방직 경찰 특수부대 공무원+역사적으로 이런저런 난세에 등장하는 정치경찰이라 볼수 있다.[22] 그러나 하필 막부 말기라는 시대상이 워낙 막장이라 당시엔 테러리스트들이었던 유신지사들과 싸우느라 유명해진 케이스라고 보면 되겠다. 중기 이후로는 에도 막부에 정식 소속된 군대가 되기도 했다. 괜히 현대 패러디 매체에서 신센구미를 '경찰' 취급하는 게 아니다.

정리하자면, '악질 정치 깡패'라는 평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이 망할때까지 유신정부의 반대축이었던 이들을 죄다 역적으로 취급해 몰아간 것 뿐이지만, 그렇다고 대중문화 속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센구미가 마냥 낭만 속의 완전무결 청렴결백한 검객 집단이었던 것도 아니다. 어느 집단이나 모두가 한 방향을 보고 일치단결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미디어를 통해 비쳐진 '신센구미'의 모습은 상당히 미화된 측면이 분명히 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고 경찰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청렴하고 정의감 넘치는 경찰만 있는게 아니듯이 신센구미를 비롯한 막부 말기의 구미 조직들도 그랬던 것이다. 다만 정치깡패란 폄하는 당장 사실관계 자체가 틀린 폄하일 뿐이다. 그 역사적인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신선조는 어쨌든 당시 관에서 공인한 치안유지 공권력이었고, 사실 정치깡패는 신선조가 적대했던 유신지사들에게 훨씬 더 적합한 멸칭이다.

4. 이미지와 실제

흔히 보신 전쟁 시기 총으로 무장한 신정부군에 대해 칼 들고 닥돌했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신선조도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히지카타 토시조 항목에 나오는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신선조는 상당히 서구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 신정부군의 전법과 화력을 직접 목격한 히지카타는 이후로 서양식 전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고슈 가츠누마 전투 때에는 "대포가 제일 중요하며 창, 칼을 쓸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또한 당시 기록을 보면 신선조도 상당히 많은 수의 총을 구입하고 있었고 곤도 이사미가 체포됐을 당시 많은 수의 총을 압수당했다.[23][24]

구체적으로 국내에도 출간된 '최후의 무사 - 신센구미'를 토대로 보자면, 최강의 검술집단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신센구미도 총과 대포를 위주로 싸우는 중대급 전투단으로 변화된 것 같다. 1인당 1정 정도로 소총이 분배되기도 하고, 사실상 대장이었던 히지카타 도시조가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에 검의 시대는 끝났다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도바-후시미 전투 초입에 주둔지가 포격에 시달리자, 히지카타 토시조가 나가쿠라 신파치에게 칼을 들고 돌격을 명했는데, 포탄만 두들겨맞다가 구사일생으로 담을 넘어 다시 주둔지로 도망왔다는 기록도 있다.

정말로 칼만 들고 돌격했다 전멸한 것은 상기했듯 막부 직속 무사집단인 미마와리구미이다.

그리고 신선조를 위계질서가 잡힌 무사단으로 만들려 한 곤도 이사미와 동향 출신 무사집단의 정체성을 지키려 한 나가쿠라 신파치 등과의 갈등도 노출되는 등, 실제 대중들이 기억하는 낭만적인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해 초기 창단멤버들 중에서도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도시조 등의 천연이심류 멤버들을 제외한 외부 멤버들 중 신센구미와 마무리가 괜찮은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초대 국장을 맡자마자 숙청을 당한 세리자와 카모와 니미 니시키 등의 그의 추종자들을 필두로 야마나미 케이스케는 이탈했다가 할복했고 토도 헤이스케는 고료에지에 가입했다가 동료들에게 참살당했으며, 사이토 하지메,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는 패주 와중에 조직을 이탈했다. 신센구미를 다룬 미디어에서는 잘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지만, 계속되는 내부 숙청 와중에 창단멤버들 중에서도 가장 주축이었던 천연이심류 멤버들과 그 다음으로 세를 이루었던 북진일도류[25] 등 멤버들 사이의 관계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이후 북진일도류 유파는 의견 차이로 신센구미를 이탈.

또한 부대의 규율유지를 위해서 마련된 국중법도에 따라 부대의 대원들을 숙청하는 마코토(誠, 진심)의 방기라든지, 입고 있는 '옅은 청색의 톱니무늬 하오리'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 톱니무늬의 청색 하오리는 실제로는 창설과 첫 출동 때 단체로 맞춰 입었고[26] 그 후로는 사복과 혼용되다 몇번 안 가서 아무도 입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선조의 주업무가 교토 밤거리를 헤집고 다니면서 사람 죽이는 일인데, 저 따위로 눈에 확 띄는 옷을 입으면 옷만 보고도 숨어버리기 때문에 비효율성이 판명되어 입지 않게 되었다. 사실 신선조를 주연으로 묘사하는 각종 매체만 봐도, 신선조가 저 옷을 입고 뜨는 순간 벌써부터 "신선조다!!!" 하며 튀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사복 형사가 경찰차 타고 사이렌 울리며 나오는 것과 동일한 수준. 여하튼 이렇게 임팩트 하나는 세고 비주얼도 살기 때문에 창작물에서는 잠복 근무 빼고는 반드시 이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리고 임무 현장에 들이닥치면 십중팔구 "御用改めである(공무가 있어 왔노라!)"를 외친다. 그때 양이 지사들은 "신센구미?!"라며 당황하다가 촛불을 끄고 도망가든가 숨어있든가 싸울 준비를 한다. 실제 이케다야에서 촛불을 끈 어둠 속에서 싸웠다는 것이 반영된 것인데 그 후로 신센구미의 출동 장면에선 거의 클리셰 수준으로 자주 나오는 장면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Shinsengumi-Uniformen.jpg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 수많은 매체에서 미화되고 있으며, 일본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인기있는 문화 키워드 중 하나이다. 패자를 동정하는 '판관편애' 정서와, 훌륭한 사람들은 다 싸우다가 죽어버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를 구성한 유신지사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막장이었던 일본 정부에 대한 실망이 맞물려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 미화의 시초는 일단 시바 료타로이지만 신센구미의 재평가에 대한 계기를 만든 것은 시모자와 칸이다. 기자 시절 사회면의 기사를 쓰다가 곤도 이사미에 대한 자료를 모으게 된 시모자와는 곤도 이사미가 실제로는 그 때까지 알려져 있던 피에 굶주린 살인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역사가 등을 찾아다니며 쓴 것이 '신센구미시마츠키( 新選組始末記)(1928)'이고 시바 료타로는 이것을 읽고 이대로는 시모자와 칸의 저작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서 시모자와에게 가르침을 청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신센구미시마츠키는 사료보다는 목격이나 증언 등을 통하여 정보를 입수했고 역사서보다는 오락소설적인 측면을 위주로 서술되었다. 이러한 점은 시바 료타로도 흉내내어 시바 료타로의 신센구미 혈풍록(1962)이나 타올라라 검이여(1962-64) 등도 강한 허구성을 지니게 된다.

4.1. 정한론자들과 대적하니 우리편?

과거 일본 제국은 메이지 정부에 반대하고 에도 막부 편에 선 신센구미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리 만무했기 때문에 신센구미를 깎아내려 헐뜯었다. 반면 에도 막부는 조선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에도 막부에 충성하고 유신정부와 적대시하는 신센구미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식민지 조선인들은 그들에게 충의지사라는 식으로 호의적인 시각을 가졌다고 한다. 실제로 신센구미 손에 죽은 자들 상당수가 정한론자들이었으며, 정한론자들이 신센구미를 적대시한 건 역사적 사실이다. 게다가 초기에 정한론을 반대하던 인물이라도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침탈에 앞장선 경우가 많은데 신센구미 출신들은 거의 다 살해당하고 생존자들도 극소수를 제외하고 낮은 신분과 괘씸죄 때문에 등용되지 못해서 국가적인 사업에서 배제되었다. 그래서 일제의 전범행위에 대한 책임에서는 자유로운 편이다.

물론 이는 극소수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이나 관심 가진 이야기고 대다수 조선인들은 신센구미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왜놈들은 다 그놈이 그놈처럼 여겨진지라 대부분 적대시하고 신센구미가 뭔지 관심조차 가지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90년대 후반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등 몇몇 일본 만화를 통해서 신센구미가 국내에 알려졌을 때 독자들은 그냥 "아, 옛날 일본에 이런 조직이 있었구나"하는 수준이었고 이후엔 넷상에서 '이놈들은 정치깡패였다'라는 이미지가 들어와서 '바람의 검심이 깡패 조직 미화했네!' 수준의 인식이었다. 2000년대 고이즈미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가 심해지고 가고시마현 등 정한론의 발상지가 성지화 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신센구미에 대해 좋게 평가하는 국내 네티즌들이 많아졌다. 이는 도호쿠 대지진 이후 더욱 우경화로 치닫는 아베 정권에 의해 더 심해졌다. 신센구미가 선한 역할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악역으로 나오는 만화들이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신센구미가 정한론자들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신센구미를 바라보니까 정한론자들을 칼로 베어 죽이는 신센구미들은 한국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27][28]

결론적으로 당시까지 신센구미가 정한론자들, 또는 미래의 정한론자들과 맞서싸웠던 조직인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센구미 활동 당시 정한론은 당장 정치적으로 쟁점이 된 주제는 아니었고[29], 신센구미와 조선 사이에 직접적인 접점은 없는 만큼 이렇다하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이 사람들은 규모 있는 정치세력이 아니라 200명도 안되는 치안 방첩 조직이었다. 자신들이 무슨 정책이나 이념을 내놓는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만약 막부가 승리했다 해도 막부의 정책이 친조선적이든, 정한론이든 상관없이 따라야 하는 입장이다. 당장 유신지사들 중에서도 정한론 찬성에서 반대로, 또는 반대에서 찬성으로 전향하거나 조건부 정한론자 등 애매한 사례가 많은데 아무런 근거 자료도 없이 신센구미를 정한론의 관점에서 평가하기는 힘들다.

정리하자면 유신지사 -> 훗날의 제국주의자 -> 따라서 좌막파는 한국인 입장에선 적의 적이란 공식 자체는 틀린건 아닌데 딱히 여기 한국인으로서 감정이입하기에는 더 이상의 구체적인 근거나 의미 있는 사실이 없다. 크게 보면 사실 메이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원형은 보신 전쟁 이후 패배한 아이즈번 같은 좌막파 번에 대한 보복 + 홋카이도 개척 정책에서 나온거나 이 역사적 과정을 공부해 본 한국인 입장에서 주로 일본에서도 차별받는 동북지방 중심의 좌막파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지는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메이지 신정부에서도 정부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적이었던 좌막파들도 많이 등용했고, 이중에는 한때 유신세력에 반대했어도 메이지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제국주의, 팽창주의 같은 정책에 동참하여 호의호식한 자들도 많다. 결국 1850-60년대의 좌막파 일반을 한국 관련해서 무조건 낭만적인 시선으로 보는건 곤란하다.

5.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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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센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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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 국장 보조
<colbgcolor=#068fb0><colcolor=#fff> 국장 곤도 이사미
총장 야마나미 케이스케 <colbgcolor=#068fb0><colcolor=#fff> 참모 이토 카시타로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 군사 타케다 간류사이
조장
1번대 오키타 소지 6번대 이노우에 겐자부로
2번대 나가쿠라 신파치 7번대 타니 산쥬로
3번대 사이토 하지메 8번대 토도 헤이스케
4번대 마츠바라 츄지 9번대 스즈키 미키사부로
5번대 타케다 간류사이 10번대 하라다 사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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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간부를 '부장보좌'라고 칭했지만 이케다야 사건 이후로 간부 호칭이 '조장, 오장, 감찰, 무예 사범' 등으로 바뀌었다. 각 조에는 '조장'이 있고, 부조장 격인 '오장(伍長)'이 한명씩 있어서 돌격대장 역할을 했다. 또한 훈련을 위해 격검(검술), 유술(유도), 문학(학문), 포술(총포술), 마술(기마술), 창술 사범을 복수로 두었다. 무술 사범은 조장급, 오장급, 평대원급 등으로 개개인별로 대우가 달랐다. 감찰부 대원은 오장 보다 한단계 위의 대우를 받았다.

6. 검술 실력

신센구미의 목적 자체가 낭인과 존황파 지사의 수색 및 체포와 순찰, 경비 등의 경찰 활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대원들의 검술실력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화기가 널리 퍼진 시기에 1:1 대결에서나 어울릴 정통적인 검술 수련을 했던 것은 당시 무사들은 기본 복식으로 길거리에서 일본도를 차고 다녔기 때문.

미디어의 영향으로 일단 베고 보는 인상이 강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경찰과 유사하게 체포가 목적인 경우가 많았다. 범인이 저항하거나 체포가 힘들 경우 살해로 넘어갔다. 이케다야 사건에서도 7명을 죽이고 4명을 부상, 23명을 체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선조= 천연이심류'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실제 신선조는 천연이심류는 소수고 북진일도류 신도무념류 등의 유명 검술의 목록, 면허자가 상당수 포진되어 있었다. 검술 사범만 해도 7명 중에서 천연이심류는 오키타 소지 한 명뿐이다. 신선조 창립의 주요 간부들이 천연이심류라서 마치 천연이심류가 신선조를 대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온갖 다양한 유파들이 다 들어가 있다. 단, 야마나미, 나가쿠라, 사이토, 토도, 하라다 등 초기 간부 중 상당수는 무술 유파는 다르더라도 시위관 도장 자체와는 긴 인연을 가졌다는 증거도 남아 있다. 이는 시위관이 당시 '감자 도장'이라 불리는 시골 도장으로서 지금으로 따지면 마을 청년회 같은 느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젊은이들이 몰려와서 교류하고 숙식도 하면서 대련하고 마을의 큰 일이 있을 때는 나서는 곳이기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은 유파를 가리지 않고 머물렀던 것.

최근에는 미디어의 영향으로 유명해졌지만 검호에 들어가는 인물은 그다지 없다. 원래 시절 자체가 이미지와는 다르게 칼질하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

다만 예외적으로 교토 등지에서는 암살같은 게 일어났는데 이런 사람들을 검호라고 부르기는 무리가 있었고, 당시 유명 유파의 검객들은 그냥 도장 운영하고 타류 시합이나 하면서 이름 날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카츠라 코고로 같은 경우도 에도 3대 도장인 신도무념류 연병관에서 면허를 획득한 검사이기는 하지만 시합으로 유명세를 떨쳐 검호라 불리고, 검사의 객관적인 실력은 1:1로 결투를 하지 않는 이상은 누가 강한지 판별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문제는 신선조가 1:1로 싸운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 상식적으로 치안유지가 목적인 신선조 입장에서는 다수로 소수를 제압하는 건 전술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30] 이렇게 기준을 잡기 어렵다보니 당시 실력을 평가하는 주된 기준 중 하나는 죽도 시합이 되었다. 그런데 죽도 시합의 경우 실전과의 괴리가 있고 죽도 수련을 안 하던 유파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유명한 히토기리들도 주로 암살을 하다보니까 죽도시합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보니 죽도에 대비되는 실전 검술이란 인식이 있는데 암살이나 집단 린치는 그 자체로 전술적 우위를 담보해 주기 때문에 이걸 기준으로 검술 실력이 마냥 우위라고 보기도 힘들다. 당대에는 격검과 타류시합이 유행했기 때문에 거기서 실력을 보이면 잘쳐주긴 했는데, 현대에 와서는 검도가 스포츠화된 것도 있고 상대적으로 고류를 좀 더 실전적으로 쳐주는 분위기라서 죽도 대련에 따라 누가 강했냐 약했냐고 하면 현대인들의 경우 못 받아들이는 면이 있다.

사실 현대인들이 유희적으로 실력 비교하기를 좋아해서 그렇지 이런 연유로 그 당시 누가 더 강했나는 데이터도 없을 뿐더러[31], 당시 검으로 사람을 벤 무사들 중 이름이 남은 것은 신센구미나 일부 히토기리로 유명한 인물들 외엔 거의 없을 정도로 진검으로 죽고 죽인 것 자체가 일부 사례일 뿐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신세구미나 시현류가 강한 평가를 받긴 하는데, 시현류도 ## 여기서 보듯 현대의 유명세로 퍼지게 된 서남전쟁의 상황도 매우 특이한 경우고, 교토 칼부림 또한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일어난 예외적 상황으로 이들이 무슨 1:1 시합을 한 게 아니다.

일본 검술 유파가 700개 가까이 되었다고 하지만 대체로 병법 3대 원류에서 나와서 자기들끼리 섞이고 개량되고 했기 때문에 족보로 보면 다 형제뻘이다. 시골 검술이라 무시받던 천연이심류도 가시마 신토류가 그 기원이고.

사실 일본 검술사에서 보자면 독보적인 인물이나 유파들은 따로 있다.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야규 무네노리, 츠카하라 보쿠덴 등. 이들은 전부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도한 것으로 유명한 검객들이다. 중앙정권 차원에서 인정된 사람들인 것.

한마디로 누가 더 객관적으로 강했냐는 명확하게 답이 없는 상태. 그래서 신선조 전원이 마치 그 당시 최강의 달인이었다고 하는 주장은 무리가 있고, 또 1:1로 싸우지 않았거나 주류 검사들이 아니어서 별로였단 것도 맞지 않다.

신선조의 검술은 다수의 대원이 유명 유파의 면허, 하다못해 목록은 소지하고 있었고 당시 치안 유지를 하려면 검술 실력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수준급에 오른 검사가 많았다 정도로 볼 수 있다.

동료끼리의 진검승부는 누군가가 조직을 빠져나와 맞부딪히지 않는 한은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대련 등의 요소로 실력을 미루어보면, 가장 유명한 것이 1번대 대장 오키타 소지이다. '죽도 대련시에, 부장인 히지카타 토시조나 총장 야마나미 케이스케, 같은 대장인 이노우에 겐자부로, 토도 헤이스케를 어린애 취급할 정도이며, 실전에서 부딪히면 스승인 곤도 이사미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의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나가쿠라 신파치가 평했다고 한다. 조직원 모두가 난다긴다 하는 신센구미, 그중에서도 대장급들까지 어린애 취급할 정도였다는 건 과장이 섞여 있기는 하겠지만, 실력 자체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였던 듯 하다. 3단 찌르기로 유명하다.

오키타 소지가 너무도 유명하여 다른 실력자들이 묻히는 감이 있기는 하지만,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으로 스타덤에 오른 내부숙청과 암살을 맡은 전문살수인 3번대 대장 사이토 하지메가 있다. '아돌'의 모델이 되었을 '좌편수일본돌(左片手一本突き 왼 한손 찌르기)'가 유명한데, 나가쿠라 신파치는 '오키타(소지)는 맹자(달인)의 검, 사이토(하지메)는 무적의 검'이라 평했다고.

위에서 다른 이들의 칭찬만 해대는 2번대 대장 나가쿠라 신파치 또한 실제로는 엄청난 실력자였는데, 신센구미 대원이자 훗날 신센구미에 대한 기록을 책으로 낸 아베 쥬로(阿部十郎)는 '(검술실력은) 으뜸이 나가쿠라(신파치)요, 버금이 오키타(소지), 세 번째가 사이토(하지메)였다(一に永倉、二に沖田、三に斎藤の順)'라고 평했다. 나가쿠라는 용비검(龍飛剣)이라고 이름 붙인 기술[32]을 특히 잘 썼다고 한다.

아베 쥬로는 감찰이자 암살임무를 주로 맡았던 오오이시 쿠와지로[33]에 대해서도, '신센구미에서 최고로 위협적인 검객'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별명 또한 '살인귀 쿠와지로'로, 이토 카시타로를 위시한 수많은 암살 및 살해 임무를 맡기도 했다.

또한, 신센구미 편성 초기의 강자인 핫토리 타케오는 검술, 유술, 창술 등 무술 전반의 달인이며 이도류를 사용했다고 한다. '국중 최강(局中最強)'이라 일컬어졌다고 하나 이토 카시타로와 함께 조직을 나간 후, 아부라노코우지사건(油小路事件)에서 이토 카시타로가 신센구미에 의해 암살되고 유해가 방치[34]되자 이를 찾으러 갔다가 신센구미 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분전 후 살해당했다. 함정임을 알면서도 상사의 유해를 찾으러 갔고, 결국 그 함정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최강의 사나이.

이케다여관 사건에서 극소수의 기습으로 2층에서의 초기전투를 주도하였던 국장 콘도 이사미의 검술 역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이 밖에 소설 미부기시덴(壬生義士伝)으로 유명해진 요시무라 칸이치로가 있다. 북진일도류 면허에 격검사범이긴 하지만, 소설과 영화에서의 모습은 각색이 가해진 것이고, 실제 자료가 희박하여 근거가 부족하다.

7. 국중법도(局中法度)

부대의 규율유지를 위해서 마련된 규칙. 어길 시 할복해야 한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빡빡한 규율과 극단적인 형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빡빡한 규율, 자결이라는 형벌을 내야 했던 이유는 두 가지로 예상되는데, 첫째는 대원들의 품행이나 인격적 자질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시작부터가 위태롭고 막부에서 맡은 일이 맡은 일이니만큼 알아서 조심했다는 것이다. 보통 신선조를 중심으로 다루는 창작물은,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를 이유로 삼는다.

히지카타 토시조를 비롯한 리더들의 천재적 조직관리 비결이라는 해석도 있다. 보통 사설조직의 한계에 부딪쳐 통제가 풀어진 깡패로 타락하기 일쑤인 자경단의 수준을 높게 유지하였고, 마침내 공로를 인정받아 막부의 공인을 받아냈을 뿐 아니라 후세에까지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잔인할 정도로 철저한 법규와 도덕성의 엄수라는 것이다.

이렇게 엄격한 규율을 실행한 것은 본래 사무라이 계급이 아닌, 농민 출신이 많은 신센구미의 '정체성' 문제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즉, 혈통 자체가 사무라이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무사보다 더 무사도에 광적으로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으로서 컴플렉스를 메꾸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신센구미 자체 역량의 한계나 시대적 배경상 탈주자들을 모두 붙잡지는 못했고, 오히려 안전하게 생존한 탈주자들의 수가 붙잡힌 인원들보다 훨씬 많았다. 신센구미 측에서도 탈주자들을 붙잡는 데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낭비되는 이상 교토, 오사카 등 신센구미의 본거지 근처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수색하지는 않았고, 예외적으로 야마나미 등 거물급의 탈주나 돈 문제가 관련된 상황 한정으로 수십 명 이상의 인원을 파견하여 체포에 임했다.

또한 신센구미가 아예 정식으로 이탈이 불가능한 조직은 아니어서, 상관인 아이즈 번의 허락이나 다른 거물급 무사들의 청원, 국장의 허가가 있을 경우 신센구미를 떠나는 것이 가능했다. 유명한 숙청 사례로 여겨지는 이토 카시타로조차도 신센구미를 나갈 당시에는 천황의 능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곤도의 정식 허가를 얻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고 평대원 입장에서 아무렇게나 나갈 수 있는 조직은 아니어서 들키면 죽음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신센구미를 정식으로 탈퇴한 이후에도 신센구미와 대놓고 대립하는 입장을 취할 경우 가차없이 보복했다.
一、士道ニ背キ間敷事
하나. 사도(무사의 도)를 등지지 말 것.

一、局ヲ脱スルヲ不許
하나. 국(조직)에서 나가지 말것.

一、勝手ニ金策致不可
하나. 자기 마음대로 돈을 빌리거나 갈취하지 말 것.[35]

一、勝手ニ訴訟取扱不可
하나. 자기 마음대로 송사를 처리하지 말 것.[36]

一、私ノ闘争ヲ不許
하나. 사투(개인적 싸움)을 하지 말 것.

右条々相背候者切腹申付ベク候也
이상[37]의 것에 등을 돌린 자(규율을 어긴 자)는 切腹(할복)으로 갚아야 한다.

8. 여담

2019년에 일본에 세워진 정당 레이와 신센구미는 이 신센구미의 이름에서 따왔다. 당을 결성한 야마모토 타로에 따르면 "새로운 시대에 새로이 선택받는 정당이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 레이와 신센구미 창당 기사)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정치성향적으로나 별 관계는 없다.[38]

9. 신센구미를 소재로 만든 작품

일본에 발매된 작품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작품만 기재.

[1] 창설 당시에는 치안, 순찰을 담당하는 조직이었으나 보신 전쟁 때 부터 보직이나 편성에 변경 없이 그대로 군대에 편제되었다. [2] 사전을 찾아보면 'さん(산)'이라는 음독도 있기는 하나 대부분 せん(센)이라고 발음한다. [3] 개그로 쓰이면 가끔식 가운데의 선 자를 鮮(고울 선)으로 바꿔서 '新鮮組(신센구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Fresh club이니까 그야말로 개그(…). [4] 身(み):몸, ぼろぼろ:너덜너덜. [5] 막부를 옹호 & 지지한 파벌. 반대 세력은 도막파(倒幕派) [6] 천황을 받들며 외국 세력을 격퇴해야 한다는 사상. [7] 단, 세리자와의 경우 사상적인 면으로 숙청되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난폭한 행실 문제였는지는 불확실하다. [8] 그래서 전혀 미남이라는 근거가 없는데 병약 미남, 미소년으로 각색되는 경우가 많다. [9] 게다가 당당하게 이름을 밝힌 게 아니라 정체를 숨기려다가 들통이 났다. [10] 그리고 역사적 인식이 얼마나 뜬금없이 형성되는지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지만, 신선조를 다루는 대중매체가 한국에 대대로 들어온 시점이 2000년대 초반, 즉 야인시대 열풍이 한창 불고나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조폭코미디와 전반적으로 조폭물, 의협물에 대한 역풍이 불고 있던 시대적 문맥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면에선 애초에 신선조를 막부에서 인가받은 공무원 경찰이 아니라 유신지사들과 구별이 애매할 정도로 낭만유협 내지는 사적 폭력 조직스럽게 묘사한 애니메이션, 만화들의 책임도 있다. [11] 京都守護職. 막부가 임명한 교토의 치안책임자. [12] 유신지사를 칭하며 일반 서민들에게서 금품을 강탈하고 스스로 무사라면서 거리에서 인명을 마구 살상하는 일도 흔했다. 게다가 존양파 토막세력은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며 이같이 민간에 대한 테러도 공공연히 옹호하기도 했다. 초대 국장 세리자와 카모가 존양파인데 그가 거리에서 양민을 상대로 이런 짓들을 하다 숙청당한 것이 생각해 볼 대목이다. [13] 무사시, 현 도쿄도. [14]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신선조 핵심인물들을 배출한 시위관이다. [15] 책상에 앉아서 부채를 휘두르며 이야기를 하는 일본 전통 예술 중 하나. [16] 호간비이키에서 호간은 그 유명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가리킨다. 요시츠네가 당시 천황으로부터 판관(호간) 벼슬을 받았기 때문. 그리고 이 때문에 요시츠네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요시츠네의 형이자 당대의 쇼군이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직접 정부로부터 벼슬을 받는 것을 금했기 때문. [17] 그런데 정작 신센구미는 일반 농민 출신이 많아서 그런가 근대화된 전술 및 무기에 그닥 편견이 없었고 준군사조직이 되면서부터는 총을 주무기로 삼았다. 대중문화와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칼을 주무장으로 삼는 무사집단인 것처럼 묘사되는 것이다. [18] 한국도 비슷한데 폐위된 광해군, 사도세자 등도 동정하고 영웅화되어 그려진다. [19] 어쩌면 "그래도 역시 우리가 완전히 지지는 않았어"라는 자위적이면서도 소소한 반발심이 일어난 까닭으로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이런 심리가 드러난 가장 이해가 쉬운 작품이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이다. 양심적인 유신지사 켄신은 시종일관 과격한 동료 지사들을 좋게 평가하지 않고 적이던 신센구미에게 오히려 더 큰 공감을 가진다. 신센구미 멤버였던 사이토 하지메는 유신 이후에도 치안 유지와 민중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으로 남았다. [20] 과격화된 변방세력이었던 조슈, 사쓰마가 아니라 주류에 좀 더 가까웠지만 사상적으론 존황론의 고향이었던 미토 번이라던가... [21] 당장 현실에서도 이 시대를 다루는 작품치고 막상 진짜 역사의 승리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같은 인물들을 그냥 곧이곧대로 추켜새우면서 영웅시하는 대중문화 작품은 적어도 2020년대 현대에 들어가선 진짜 보기 힘들다. 막부 말을 다루는 현대 창작물은 애초에 태반은 주역을 신선조나 아이즈번, 오우에쓰 열번 동맹 같은 시대의 패자였던 좌막파인게 더 많거나, 유신지사 측이 주인공이라도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여전히 일본인 테이스트에 맞는 영웅적인 패자나 사카모토 료마, 타카스기 신사쿠처럼 꼰대 관료로 늙기 전에 요절한 청춘 풍운아 혁명가들을 좋아하고, 끝까지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오쿠보 도시미치 계열의 조슈 관료들은 예나 지금에나 대중문화에선 역사의 승리자지만 지사시절땐 폭력적이었고, 유신 이후엔 탐욕스럽고 고압적인 인물상으로 나오는게 태반이다. 그리고 이건 기본적으로 어느 사회에서나 대중문화는 늙어서 추한 모습을 보인 사회의 주류 꼰대보다 드라마틱한 패자, 청춘스타를 좋아하는 점도 있지만, 사회적으론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도 일본 서민들에겐 전혀 살기 좋은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2] 이런식으로 분석하면 사실 현대 사회에서 신선조랑 가장 비슷한 조직은 막상 아시아에는 없고, 치안유지와 공안 사태에 특화된 준군사화된 경찰조직이란 점에서 유럽 국가들에 있는 각국의 헌병대랑 비슷하다. [23] 토탈 워: 쇼군2의 확장팩 사무라이의 몰락에서는 이 점에 주목해, 신센구미 치안대라는 총기로 무장한 신센구미가 등장한다. 아예 카테고리도 전열보병. 그와 함께 바로 아래 문단에 소개되는 히지카타 토시조의 발언도 게임상에서 등장한다. [24] 신선조와 정반대파인 존왕양이파 토사근왕당의 오카다 이조 또한 칼잡이로 유명하고 여러 매체에서 칼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실제론 권총을 갖고 다녔다. 이래저래 대하드라마나 소설에서 미친 영향이 양쪽 다 크다. [25] 사실 신센구미의 창설 당시 천연이심류 출신들이 요직을 장악해서 그렇지 당시 일본 검술계에선 북진일도류 쪽이 훨씬 명망높은 엘리트였다. 현대 사회로 비교하자면 도쿄대와 지방사립대의 차이 정도. [26] 참고로 그 옷의 사연이 참 웃긴데 평소 아코 낭사( 츄신구라) 이야기를 좋아했던 국장인 콘도 이사미가 다같이 하오리를 맞춰 입는다면 그 이야기에 나온것처럼 스타일을 갖추고 싶다 해서 다른 의견이 딱히 없었던 간부진들이 할말도 없고 곧바로 수긍해버린것. 이게 대하드라마 신센구미에선 좀 더 생생하게 나오는데 콘도 이사미의 의견에 질색을 하는 대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7] 실제로 어떤 만화에서 신센구미가 주인공의 적으로 나왔을 때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주인공 동료가 신센구미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에서 안타까워하다가 나중에 그 죽은 동료가 실제 역사에서 정한론자였다는 걸 알고 멘붕했다는 독자도 있다. 만화에서 주인공이든 뭐든 신센구미 손에 죽거나 크게 당하는 캐릭터들이 나오면 설령 주인공과 동료들이라도 "저 놈들은 분명 정한론자들일 거야!" 이러며 오히려 무조건 신센구미를 응원하는 독자들도 있다고 한다. [28] 우리나라에서 삼국지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로 유명한 코에이에서 발매한 유신의 폭풍 막말지사전이 일겜 마니아들 사이에 암암리에 한국에 소개되었을 무렵 신센구미를 골라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도전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할 정도. [29] 물론 사상적으로는 이미 유신지사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존황양이 논쟁, 도막/좌막 논쟁에 비하면 당장 급한 문제는 아니었다. 거기다 당장 조선 정벌 어쩌고 이전에 지네가 정권을 잡든가 죽든가의 기로에 있었던지라 이 시점에서는 그런 주장을 진지하게 내뱉는 유신지사가 있다 해도 탁상공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30] 산조제찰 사건에선 8인의 적을 상대로 34명을 준비했고, 내부 숙청인 고료에지 사건에서도 7명을 상대로 40~50명이 대기했다. 집단 다구리만 잘하고 실제 실력은 별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주된 원인. 하지만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경찰이 동원되는건 지금 시대에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당시 시대를 산 증언과 훨씬 적은 수로도 전과를 올린 경우가 있어서 딱히 검술 실력을 폄하할 근거는 없다. [31] 일본에서 있었던 무사시 논쟁에서 무사시를 옹호하던 키쿠치 간이 "도쿠가와 시대에 5회, 10회라도 진검시합을 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했을 정도로 무사시나 이토 잇토사이 노부쓰나 등의 몇몇 사례를 빼면 진검 대결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무사시나 이토 잇토사이의 경우에도 이들의 진검시합이 진짜로 있었는지에 대한 교차검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현실. [32] 하단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위로 상대방의 검을 튕겨 올리면서 아래로 베는 기술. [33] 사카모토 료마 암살의 죄목으로 참수당했다. [34] 실은, 이토 세력을 전멸시키려는 신센구미의 함정. [35] 신센구미는 운영을 위해 조직의 이름으로 오사카, 교토 상인들에게서 돈을 빌리고 떼먹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조직이 아닌 대사 개인이 빌리거나, 심지어 타인이 신센구미를 사칭하고 돈을 떼먹는 경우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처벌했다. [36] 신센구미는 치안유지 조직이었기에 교토 인근에서 제한적으로 사법 관련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민간인들 사이의 이해관계 문제를 처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신센구미를 매수하거나 사적으로 청탁하여 유리한 판결이나 중재를 얻어낼 가능성이 존재했다. [37] 원문은 '오른쪽'인데, 우종서로 쓰였기 때문이다. [38] 야마모토 타로 본인이 NHK 대하드라마 신센구미! 하라다 사노스케 역으로 출연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고도의 네이밍 센스인셈. [39] 다만 여기서는 토도 헤이스케 빼고 전부 전멸했다. 해당 애니는 신센구미의 대역이 되어 싸우는 자들의 이야기. [40] 신센구미가 주 배경이 아니지만 사이토 하지메의 역할이 크므로 추가함. 이후 홋카이도편에서 본격적으로 신센구미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41] 여담으로 켄신의 회상에 등장하는 신센구미 멤버는 앞줄 하라다 사노스케, 곤도 이사미, 오키타 소지며 뒷줄은 다케다 간류사이, 야마자키 스스무, 이노우에 겐자부로, 하지카타 토시조, 나카쿠라 신파치, 사이토 하지메, 시마다 카이 [42] 한국에선 이 작품으로 인해 신선조를 알게 된 사람이 많다. [43] 수도에서 주인공의 동조자들에게 가장 큰 적인 야랑조가 신선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망해가는 정권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보수적인 가치에 따라 무자비하게 혁명파들을 처단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사람에 따라서는 작품 자체가 에도 막부 말기를 모티브로 보기도 한다. [44] 사건의 중심소재로 신센구미에서 따왔다. [45] 정확히는 히지카타 토시조가 무진전쟁에서 안 죽고 살아 남아 나가쿠라 신파치와 함께 패거리를 모아서 에조를 독립국가로 만들려고 금을 찾아다닌다. [46] 주인공 진영인 철화단의 모티브가 신센구미라고 한다. [47] 애니메이션화 치루란 2분의 1. [48] 2005년 세가에서 PS2로 발매한 검격 액션 게임.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시리즈의 원작자 와츠키 노부히로가 캐릭터 디자인을 담당해 주인공 오키타 소지를 비롯한 모든 캐릭터들의 디자인과 모델링이 검심스럽다. 무쌍시리즈 스타일의 버튼만 연타하며 썰어대는 게임이 아니라 '간파' 시스템이라는게 있어서, 적의 공격을 커맨드 입력을 통해 순간회피한 뒤 공격이 들어가야 제대로 된 대미지가 나오는 등, 당시 기준으로는 꽤 시대를 앞서간 게임이다. [49] 사카모토 료마 사이토 하지메가 동일 인물이라는 설정의 용과 같이 시리즈 중 한 작품. 여기서도 은근히 현실은 시궁창스러운 묘사다. 신센구미 내부의 파벌 다툼도 드러나고, 토도 헤이스케의 "이런 미친 법도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미친 시대를 버텨 낼 수 있었던 거다"라는 대사, 살인에 익숙해진 집단이라 그런지 내부 배신자가 썰리자 아무렇지도 않게 슬슬 퇴근하자고 하면서 머릿수가 줄었으니 우리 월급도 늘어나겠구만 같은 대사를 하는 등. 덤으로 실제 역사와 한참 다르게 이 작품에선 아예 곤도 이사미가 교토 방화를 막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교토 방화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거나. 주인공의 설득으로 곤도는 방화계획을 취소하려다가 배신자에게 살해당하고, 진짜 오키타 소지가 치졸하게 음모 꾸미다 역관광당하고 신분까지 뺏겼다거나 심지어 천연이심류가 다른 검술(미토텐구류)의 이름만 바꾼 거라는 등 충격과 공포스러운 설정이 많다. [50] 막부측의 전열보병과 요원으로 신센구미가 있다. [51] 요원일 때는 치안유지와 방첩을, 군 유닛일 때는 전열보병처럼 전투하면서도 근접하면 무서운 공격력의 발도 돌격을 감행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요원으로 고용되는 신센구미는 초기의 신센구미, 군 유닛으로 양성되는 신센구미는 후기 보신 전쟁의 잔류 신센구미로 볼 수 있다. [52] 2004년에 플레이스테이션 2로 나온 검술 액션게임이며 겐키가 제작했다. 신선조 결성~아부라코지의 변까지 스토리가 진행된다. [53] 2005년 작품으로 풍운 신선조의 후속작. 전작보다 스케일이 방대하게 커져서 막부를 지키려는 신선조인 좌막파와 새로운 세상의 일본을 꿈꾸려는 양이론자(유신지사) 집단인 도막파의 두가지 스토리 모드를 선택할수 있다. 또한 그 당시의 사건들을 역사 사전 모드 형식으로 수록했다. [54] 신센구미의 대표적인 사건들을 보여주지만, 히로인이 남자, 즉 게이가 히로인이다. [55] 상기 언급했던 톱니바퀴 하오리에 대한 나름의 고증인지, 톱니바퀴 하오리를 거의 입지않는다. # [56] 영화 고하토의 원작이기도 하며, 1963년작 영화, 1965년, 1998년에 테레비 아사히에서 드라마화, 2011년에는 NHK에서 드라마로 나왔다. 1998년작에서 곤도 이사미역을 맡은 배우는 와타리 테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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