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7:53

검술

1. 개요2. 역사3. 교육
3.1. 교습 방식3.2. 검술은 배우기 어려운가?
4. 검술의 입지
4.1. 군사적 입지4.2. 무술적 입지4.3. 사회적 입지
5. 실제 검술과 대중문화 속 검술의 차이
5.1. 실제 검술과 스포츠화된 검술의 차이5.2. 실제 검술과 창작물 속 검술의 차이
6. 관련 문서

1. 개요

검술(, swordsmanship)이란 도검을 쓰는 방법과 기술 등을 포함한 무술 및 무기술을 말한다.

이를 전문적으로 연마한 중세 당시의 전문직을 검사 혹은 검객이라고 불렀으며, 달인의 수준으로 연마한 인간을 흔히 검성 혹은 소드마스터라고 칭했다.

2. 역사

검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자주 쓰인 무기이기 때문에 정확한 기원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단검을 구석기시대부터 만들어 썼으니 이 때부터 단검술이 있다고 짐작만 할 수 있다. 청동기 초기부터 이미 구리나 청동으로 만든 금속제 단검이 있었으며, 구리와 주석의 배합 비율 조절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중국 진(秦)나라에서는 120cm에 달하는 양손 청동검까지 만들어졌다. 또한 일리아드 등에서도 영웅들이 특유의 요령과 기술로 검을 사용하는 묘사가 나오므로, 단순히 휘둘러 베는 것을 넘어 꽤 체계적이었다고 짐작된다.

검술에 대한 묘사는 여러 매체에서 꾸준히 찾아볼 수 있다. 로마시대에 쓰여진 병법서인 베게티우스의 《 군사학 논고De Re Militari》에서는 고대 로마군의 글라디우스 검술 훈련 시스템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롤랑의 노래>를 비롯한 여러 중세 무훈시나 북구의 영웅담인 Saga 등에서도 상대의 무기를 막고 공격하거나 속임수를 걸고 공격하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검술 묘사가 다수 있다. 이것만으로 정확하게 파악은 힘들지만, 꽤 정교하고 체계적인 검술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각 문화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검술의 체계가 일부나마 문서로 남거나 검술을 교습하는 무술학교와 같은 시스템이 등장한 것은 13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대는 소드&버클러술을 기록한 유럽의 I.33문서(1280)가 존재하고, 일본에서는 넨류(念流)가 이 시대에 창시되었다고 주장한다. 본격적으로 무술 교습이 활기를 띠며 문서가 많이 남기 시작한 시점은 15세기부터인데, 서양 검술의 수많은 문서가 이 시대부터 다량 등장하기 시작하고, 일본에서는 논란의 여지 없이 최초의 유파로 인정받는 가토리신토류가 창시(1447)된 시점이기도 하다. 16세기에 들어서는 돈을 받고 검술을 비롯한 무술을 교습하는 fechtschule, 마치도죠(町道場)와 같은 무술학교 시스템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 시대에는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검술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크게 대중화되었다. 검술의 수준도 이 시대에 정점을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 이후로 검술은 쇠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근대가 오래도록 지속된 비유럽권에서는 비교적 덜하거나 그렇지 않지만, 유럽권에서는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화승총의 등장을 비롯한 무기와 전술의 변화로 칼싸움의 비중이 줄어들어 더 이상 힘들여 검술을 배워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특히 변화무쌍한 운용으로 무술적 가치가 큰 롱소드와 같은 양손으로 사용하는 도검류가 퇴출된 것 또한 검술의 퇴보에 큰 역할을 했다. 18세기가 되면 그러한 검술의 단순화를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으며, 이러한 내용은 사브르 검술항목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동양권은 화기로 대표되는 신식무장의 보급이 늦어져 전반적으로 냉병기 위주의 구식 전술이 보다 오래 지속되었고, 사회적 요인[1]으로 의해 검술의 쇠퇴가 상당히 늦추어졌다. 일찍부터 화기를 운용해온 대표적 지역인 중국은 전통적인 숭문억무 사상에, 후대로 갈수록 병기분야에서의 기술이 정체되면서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여전히 구식화기와 냉병기를 운용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2] 인도는 대포와 총을 운용하고 자체적으로 플레이트 아머를 생산할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업화의 부족과 경직된 사회구조를 비롯한 내부적인 요인으로 갑옷과 방패, 칼이라는 전근대적인 무기의 비율도 만만치 않았고,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곳은 전술과 무기수준의 극심한 낙후 이외에도 부족적 생활상의 유지와 험악한 치안으로 인해 칼리 아르니스라는 다양한 날붙이와 봉을 사용하는 무술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도 전술과 무기수준의 낙후가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며 거기에 더해 지배계급인 무사의 정장으로 칼 두 자루를 반드시 착용하도록 하였으며 무술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출세하기도 좋았던 관계로 유파라 불리는 무술학교 시스템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배경이 되었으며, 근대화 이후에도 국민 정서로 인해 그러한 사회상의 일부가 살아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양권 국가들도 근대화를 거치며 검술이 급격히 소멸하거나 입지를 잃었고, 유럽과 동일한 퇴보의 길을 걷거나 무형문화재화되어 개념화되는 길을 걸었다. 동양권에 유독 검술이 많이 살아남은 것은 전근대적 군사문화가 백여 년 전[3]까지 유지되던 것에 기인하며, 달리 실용성이 있어서는 아니다. 현대에 있어서는 일종의 전통 문화의 향유라는 개념이 검술 수련의 이유 중 하나가 되어 있으며, 상당한 검술 시스템이 이러한 수요 덕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4] 그러한 이유로 유럽에서는 과거에 소멸했던 중세 검술이나 르네상스 검술 등의 복원이 진행 중이다.

3. 교육

3.1. 교습 방식

검술은 주로 다음과 같은 교습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 군대의 군사훈련 : 군대에서 가르치는 검술은 기본적으로 병사들을 빨리 훈련시켜 바로 전쟁터로 내보내기 위한 것으로, 기초적인 것만 가르친다. 무기의 기본적인 사용법, 실전에서의 몇 가지 사례를 간략화하여 숙달시키도록 하는 것 정도로 끝난다. 《De Re Militari》에서 등장하는 훈련 내용이 그렇고, 일본군이 발행한 군도의 조법 등이 그러한 경우이며 세이버 검술 시스템도 병사용으로 간략화하여 가르친 바 있다. 그러나 간략하고 기초적이라 하여 그 내용까지 폄훼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훈련 시스템은 뛰어난 실력의 고수들이나 고참 군인들이 연구하여 구성 하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 혈연 관계의 무인 집단(가문, 문중)에서 구성원들에게만 가르침 : 근대 이전에는 가문, 문중에서 가족 구성원, 혹은 그에 해당되는 수준의 사람에게만 가르쳤는데[5], 타인에게 기술이 유출될 경우 자신들의 우위가 상실되므로 믿을 수 있는 자들에게만 가르치는 것이다.[6] 물론 외부인들에게도 가르치는 경우가 왕왕 있었지만 소위 비전이나 오의 같은것들은 적통 후계자에게만 전수 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 군대에서 교범이나 미사일, 대공포의 위치 및 발사 코드 등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은 양가창법이라든가 태극권 등에서 진식, 손식 등 전수되는 가문의 성씨를 따서 구분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 도제 관계의 무인 집단(문파, 유파, 길드)에서 구성원들에게만 가르침 : 문파란 중국의 무술 연구, 전수 집단이다. 일본에선 이런 집단을 유파라 불렀으며, 중세 유럽에선 길드라고 했다. 이러한 집단은 자신들의 검술을 보존하고 이것을 수단으로 삼아 희망자들에게 검술을 가르쳤으며, 유명한 검술 길드인 마르크스브뤼더(Marxbrüder)나 페더페히터(Federfechter) 같은 경우는 독자적인 검술과 높은 수준을 바탕으로 도시나 왕에게 인가장을 받아 정식으로 공인되어 권위를 가지기도 했다. 검술 교실이 속속 대중화되던 16세기에도 검술 교실을 여는 데 철저한 실력 검증을 하여 그렇지 않으면 길드의 이름으로 교실을 열 수 없게 하는 등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썼다. 일본의 고류 검술 유파들도 길드와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물론 별로 실력도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수박 겉 핥기로만 배워 도장을 여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며, 17세기의 이탈리아 검술이 특히 그랬다. 당시 이탈리아 검술은 실전성으로 명성이 높아 유럽 여기저기에 도장이 생기는 등 세가 대단했다. 영국의 마스터 조지 실버는 영국에 들어온 레이피어와 이탈리아 검술을 아주 싫어했으며 여러 차례 현피를 떠서 박살을 내기도 했다. 그의 이런 정서는 그러한 세태에 대한 반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건 현대도 다를 바 없다.
  • 공개된 학원에서 돈을 내고 배우는 것 : 16세기 유럽에선 기존의 가문과 길드, 군사기관에서 양성된 무인들이 일반인들을 상대로 호신용 검술을 가르쳤다. 많은 사람에게 최대한 많은 돈을 받으며 가르쳤기 때문에 교육의 질은 떨어졌다. 또한 이 시기는 정통 무관 귀족들의 권력이 상인 출신 재력가들에게로 서서히 옮겨가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무인과 검술에 대한 인식도 좋지는 못했다. 검과 방패를 들고다니는 스워시버클러의 다른 뜻이 건달패였던 시기다.

이는 비단 검술뿐만이 아니라 모든 무술에도 적용되는 항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2. 검술은 배우기 어려운가?

롱소드 물체베기 체험교육

야규신카게류 일반인 체험지도

관점에 따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꼭 그렇지는 않다. 검술이 배우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바람에 검을 써서 뭘 베거나 쓸 수 있으려면 몇 년 이상의 상당한 숙련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현대인들에게 많이 퍼져 있지만, 기본적인 것만 가르치는 데에는 결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며 빠르면 일주일 안으로 다 배울 수 있다.

특히 군대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에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단시간 내에 숙련시키도록 하였는데, 근현대에서 예시로 들 만한 것이 바로 구 일본 육군 군도의 조법이다. 군도의 조법은 국민개병제 이후 이루어진 구 일본 육군에서, 검술을 모르는 장교와 부사관 및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빠르고 간단하게 군용 도(刀)를 사용하는 법을 교육하는 속성 시스템이다. 기본적인 머리 베기와 대각선 좌우 내려 베기, 찌르기라는 4개의 공격법과 함께 발도 7본을 통해 공격의 이어짐을 학습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훈련 계획표가 예시로 존재하는데 하루 한 시간 반, 일주일 교육으로 군도 사용법을 마칠 수 있는 것을 교육 범례 상의 목표로 하였다. 이처럼 기본 사용법만 교육하는 데에는 결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즉, 검이라는 '도구'를 기본적으로 다룰 수 있고 파지 할 수 있게끔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다수의 고류 유파 출신 고수들이 참전했던 서남전쟁 시절과는 다르게,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에는 검술의 숙련자나 고수가 거의 없었다.

반면에 다수를 빨리 훈련시켜서 전장에 내보내야 하는 군사 훈련용이 아닌, 동서양의 전문적인 전사 계층이 배웠던 검술은 거의 평생 배운다고 해도 무방하다. 군사 훈련용 검술은 정신없고 급박한 전장에서 일단 칼을 뽑는 방법을 알고 상대방을 향해 휘두를 줄만 알면 되는 식이였다. 가령 당장의 공격은 할 줄 아니까 적어도 병사로서 최소한의 1인분은 할 수 있는 상태다. 그래서 상대의 대처까지 신경 쓰기보다는 단체로 돌진해서 일단 칼을 휘두를 줄만 알게 하는 식이기에 비교적 단기간에 익힐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공격 각을 잡고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해야 하는 일대일 결투의 경우, 단순히 칼을 휘두를 줄 아는 것을 넘어 고도의 거리싸움, 수싸움, 타이밍, 빌드업, 셋업 능력, 방어능력 등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평생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능력은 한, 두 달로는 어림도 없고 최소 3년은 강도 높은 대련을 병행하며 수련해야 배양되는 것들이다.[7]

일대일 대결에선 무지성으로 크게 휘두를 줄만 아는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 이는 복싱 같은 맨손 격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잽, 원투, 훅, 어퍼 같은 동작들을 몸으로 실행할 줄만 아는 단계에서는 시합이나 실전에서 쓰기 어렵다. 스파링을 병행하면서 실전에 맞는 스텝, 셋업, 방어, 거리 조절 같은 능력을 익혀야 비로소 써먹을 수 있게 된다. 미트, 샌드백만 치는 사람이랑 링 위에서 스파링까지 하는 사람이랑 싸우면 당연히 후자가 이긴다.

보통 일대일에서의 검술 대결은 상대가 반응하기 힘들게끔 칼을 최소한의 궤도로 운용하기 때문에, 기법에 있어서 동작이 작아지는 경향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처럼 크게 들어 베는 동작들은 상대 입장에서 뻔히 눈으로 보여서 대처하기 쉽기 때문이다.[8]

검술이란 보편적으로 상하좌우, 각 대각선으로 8방향의 베기가 존재하며, 양날로 되어 있는 롱소드 검술의 경우 베고 그대로 들어 올리는 방식의 베기를 포함하여 총 16방향의 베기가 존재한다. 물론 그에 따라 8개 이상의 방어가 존재하며, 여기에 스텝과 카운터 어택을 비롯하여 페인트 및 패링 등의 고급 기술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것을 모두 배우는 데에 몇 년 이상씩 걸리고 10년 넘게 배워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검술이란 건 바로 이런 개념들을 의미한다.[9]

총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방아쇠를 당기면 화약의 힘으로 나가는 총과는 달리 검은 오직 본인의 힘으로 써야 한다. 총은 반복 훈련을 통해 목표를 향해 정확히 쏠 수만 있으면 그 자체로 실전성이 일정수준 꽤나 보장되지만, 검은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 그 자체만으로는 실전성이 아주 보장되진 않는다. 왜냐면 공방이란 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총알을 일단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조준해서 발사한 순간 막거나 피할 수는 없다. 허나 검은 방어, 패링, 리포 짓 등등 여러 공방이 가능하다.

총: 총을 자유자재로 목표를 향해 쏠 수 있는 능력.

검: 검을 자유자재로 목표를 향해 휘두를 수 있는 능력 + 실전적인 대련 능력까지 필요.

그래서 수련기간이 더 길수밖에 없고 전문 전사 계급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잘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는 총의 발전이 가능하게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10] 예시로 든답시고 비교인용한 저 이라는 것도 사용개념이 몹시 전문화된 현대에선 저격, 급작사격, CQB, SUT 등 다양한 전술의 대두로 인해 단순히 총만 쏠줄 아는 보병과 과거 전문 전사 계급에 해당하는 특수부대라는 사람들로 그 전투력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나는 마당에, 검술이란건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검술은 배우기 어려운가에 대한 답은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 겠지만, 필요에 따라 기본적인 것만 가르치느냐, 상위의 고급 개념과 기술까지 다 배우느냐의 원론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즉, 다수의 불특정 양민이 존재하는 전장에서는 한 달만 배워도 그럭저럭 1인분 할 수 있었지만[11], 결투 문화가 있었고 심지어 전장에서 중갑을 입고 여러명을 상대하는 일도 잦았던 상위 전사 계급에선 전문적으로 수련해야 했다. 역사적 사료에서도 플레이트 아머 등으로 중무장한 소드마스터들이 괜히 일반 병사 수십명을 도륙냈다는 소리가 나오는게 아니다.

4. 검술의 입지

역사적으로 봤을때 군대용 검술과 무술 관점의 검술은 좀 다르다. 군인들이 글라디우스, 스파타[12]로 훈련했던 검술이나 총검술 등은 상대적으로 배우기 쉽게 만든다. 너무 어려워서 기초만 배우는데 3년이 걸린다면 바로 바로 모집해서 짧은 시간 훈련시켜 써먹어야 하는 군인들의 기술로는 매우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고류 검술 유파들이 창시되고 민간 도장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에서는 소림사의 무술과 명나라 군대의 기술이 서적으로 간행되는 등 전문화 되었다. 16세기 이후 검은 일상속에서의 호신용 측면이 강해진 것이다.[13]

4.1. 군사적 입지

4.2. 무술적 입지

중세 유럽과 일본에서 검술은 모든 무술의 근본이라는 주장이 나타났다. 검술이 다른 무기들에 필요한 움직임과 운용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검술의 원리는 모든 무술과 통하며, 검술을 배워두면 그 이치에 따라 다른 무기들도 쉽게 쓸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가령 창의 경우 찌르기와 내려치기 정도가 기본 용법이고, 폴암의 경우 찌르기와 베기, 종류에 따라 걸기나 찍기 정도가 가능하며, 무기가 크고 거대하여 자세나 궤도에 제한이 있다. 그러나 검은 크기가 적당하고 찌르기와 베기가 모두 가능하며 검술을 통해 지렛대의 원리와 카운터, 기본적인 몸의 움직임을 배울 수 있다. 즉, 검이라는 무기의 융통성 때문에 훨씬 많은 움직임과 운용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에, 창이나 폴암을 먼저 배운다면 배우지 못할 여러 요소들을 다 배우게 되므로 검술이 모든 무기술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중세 유럽의 비리 공무원 파울루스 헥터 마이어가 수집한 장서에는 낫술, 몽둥이술이 나오는데, 중세 롱소드 검술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봉도 롱소드처럼 다루고, 쯔바이핸더 같은 대형 무기도 롱소드처럼 다루는 것이라고 하며 달리 다른 검술서가 없다. [14] 또한 한 손으로 사용하는 아밍 소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롱소드 검술과 동일한 방식으로 운용한다.

중근세 이탈리아에서 검술을 바탕으로 창작된 스탠딩 유술인 Abrazzre가 존재하거나 이탈리아 출신의 영국 마스터 빈첸티오 사비올로가 자신의 저서에서 검술을 바탕으로 한 권법을 수록하기도 했다. 칼리 아르니스의 맨손 기술(Empty hands)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무기술에서 파생된 권법의 특징은 마치 무기 싸움을 하듯이 상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팔을 이용해 상대의 팔이나 다리를 차단하고 너클파트뿐만 아니라 손바닥이나 손등까지 이용하여 자유롭게 타격하는 것이 특징. 무기술의 전투법이 맨손에서도 적용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무기 전투와 맨몸 전투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현대의 종합격투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단, 무기술을 수련하면서 얻은 센스와 무기가 없는 상황에 대비하다 보니 부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이는 중국권법을 포함한 여러 전통무술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일본의 경우 가시마 신류는 검술 유파이나 면허개전을 받게 되면 창술을 가르치는데, 자기 유파의 검술 이치를 그대로 창술에 적용하여 다른 창술과 달리 오른손이 앞으로 가고, 창끝을 앞이 아니라 자기 측면 아래로 두어 비스듬히 대각선을 그리게 된다. 이것은 가시마 신류의 검술 자세인 "오또나시노 카마에"를 창에 똑같이 적용하는 것이며, 상대가 창을 찔러오면 강하게 때려서 놓치게 하고 찌르는 것을 메인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가시마 신류의 검리와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외에 오와리관류 창술의 경우 검술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야규신음류의 검술 체계인 <토노모노 타치:外のもの太刀>를 가져와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무기술은 아니지만 유술 또한 검술에서 파생돼 나온 것이었다. 원래 유술은 검술을 봉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검술이 먼저 있었고, 그것을 봉인하기 위한 유술이며 검술과 유술은 표리일체의 관계였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검술을 취하지 않고 유술을 습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유술에는 검술의 움직임이 그대로 활용되고 있었고, 검술을 배우는 것이 유술의 향상에도 기여했다고 한다. 현재 유도는 맨손으로 싸우는 것이 기본이지만, 강도관 유도의 선조라 볼 수 있는 가노 지고로는 유술의 정의에 대해 "맨손 혹은 무기가 있는 적을 공격 또는 방어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했다. 즉, 가노 지고로가 생각한 이상적인 유술(유도)은 맨손만이 아니라, 칼이나 창 등의 무기를 포함한 것이었으며, 이렇듯이 유술과 검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경우 양손으로 검을 운용하는 검술이 대세가 된 지역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유럽과 일본 모두 양손으로 검을 운용하는 검술로 유명한 곳이며 이는 한 손으로 운용하는 검술로는 알 수 없는 다양한 운용의 방식이 파생되는 점이 그러한 인식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국무술 같은 경우는 무술의 기본을 봉술이나 창술로 보는 경향이 강했으며, 현재 남아있는 권법은 봉술이나 창술을 응용해 만들어낸 것들이 많다. 에 집착한 조선도 무술의 근본만큼은 곤방으로 본다. 따라서 실제로 검술이 무기술의 근본이고 가장 중요하다기보다는 그렇게 보는 관점이 과거 유럽과 일본에 존재했다는 말이 정확하다.

4.3. 사회적 입지

현대인들은 전근대 전술과 전쟁에 대한 이해가 없고 영화나 만화, 소설 같은 서브컬쳐에 의존하므로 검과 검술에 대해 과대평가하거나 그에 대한 반발로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무협지나 판타지를 비롯한 여러 서브컬쳐에서는 검이 주력 무기로 나오는 경우가 매우 많으며 검으로 수많은 병사를 베어넘기거나 하는 묘사가 많으므로, 일반인들도 이러한 내용에 따라 검술도 그만큼 중요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고도로 발전된 검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은 대규모 전장보다는 국지전이 많았으며, 또한 결투와 호신용도에서였다. 수백 수천명이 함께 싸우는 전쟁터에선 개개인의 검술 실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반면 소규모 국지전이나 범죄자와 여행자 수준의 소규모 전투에선 개개인의 실력이 매우 큰 영향을 끼쳤으며, 경찰 조직이 발달하기 이전 르네상스 시대까지는 치안이 매우 좋지 않아 개개인이 병기를 휴대하고 무술을 단련해야 했다. 그런데 폴암, 대형 방패, 갑옷 같은 중병기들은 상시 소지하기도 힘드니, 자연스럽게 가벼운 검과 버클러, 나무봉, 두꺼운 천 옷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최초의 중세 검술문서인 I.33문서가 이 맨몸 소드 & 버클러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검술의 유용성과 필요성 때문에, 메서(Messer)와 나무봉을 이용한 민간인 호신검술이 발전했다. 지금도 관련 교범들이 현존하며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교범을 보존하는데 큰 공헌을 한 파울루스 헥터 마이어[15]의 문서들에 의해 나무몽둥이술, 낫술, 대낫술, 도리깨술이 존재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16세기부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무술도장이라든가 민간인들의 검술 수요는 이러한 배경을 두고 볼 수 있다. 16세기에는 과거 기사와 직업군인, 검술 길드의 전유물이었던 Sword를 사용하는 장검술이 민간에게도 오픈되어 롱소드검술이 맨몸 전투에서의 유리함이나 높은 검술적 수준에 의해 큰 인기를 끌었으며, 좁아터진 당시의 시가지 내에서의 우발적인 싸움을 위해 레이피어라는 도검까지 등장하고 대세를 차지할 정도이니, 당시 민간인들의 검술 수요와 사용률이 매우 높고 주류 검술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과 함께, 민간계에서야말로 검과 검술의 위치가 드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부터는 도검이 실전용이 아니라 성인 남성의 정장의 필수 악세사리로 취급되어 장식성이 강한 스몰 소드가 주류가 되었으나 가볍고 약한 장식검임에도 이것을 이용해 결투나 호신을 하는 수요가 생기면서 검술 도장이 성행하였다. 18세기까지는 칼뺏기나 드롭킥 등 호신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기술은 다 쓰는 실전적인 검술이었으며, 덤으로 세이버와 같은 군용 도검, 짧은 외날도인 헌팅 소드나 쌍두 단창인 예거 스톡을 사용하는 기법도 교육되기도 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스몰소드가 정장의 필수 요소에서 탈락하고 지팡이가 장식 도구를 대체하면서 스몰소드 검술은 크게 쇠퇴하고 귀족의 교양으로써 형식화되어 엄격한 룰과 예절을 따르는 형식화의 길을 걸었다.

다만 민간인이 총을 가지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본의 경우는 막부 말과 같은 치안 불안에 민간인의 검술 수요가 폭증하여 유럽의 16~17세기를 연상케 하는 도장 문화의 전성기가 일시적으로 도래하기도 했다.

5. 실제 검술과 대중문화 속 검술의 차이

5.1. 실제 검술과 스포츠화된 검술의 차이

현재는 치안이나 사회분위기상 검과 검이 실제로 대결하는 상황은 거의 없으며, 스포츠로 남아있는 검술 경기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스포츠 경기가 실제 검술과 갖는 차이점은 아래와 같다.
  • 검도 경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상대가 저항하지 못할 만큼의 확실하고 깔끔한 공격으로 득점을 가하면 한판을 인정해주지만, 그렇지 않고 서로 공격이 겹쳐서 맞췄을 경우 상격이라고 하여 득점이 인정되지 않거나, 공격이 겹쳤지만 시간상 먼저 유효타를 친쪽에게 득점을 준다. 펜싱 경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 공격이 겹치거나, 먼저 상대방를 공격하여 득점하였지만, 이후 저항하는 상대의 칼에 찔리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진검일 경우 서로 맞추는 상격의 상황에서 먼저 쳤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차이가 그리 크지 않거나, 혹은 선공을 하였지만 반사적으로 계속해서 움직이는 상대방을 저지하지 못하고 치명적인 반격을 허용하게 되면 공격자와 반격자 둘 다 죽을 수도 있다. 더불어 시합에서는 득점이나 무효 처리 이후에도 경기가 재개되지만, 진검승부라면 확실한 득점이 아니더라도 칼로 인하여 신체는 손상되므로 체력과 신체가 제대로 유지되지 않고, 또 서로가 그런 상황을 두려워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공방의 횟수가 줄어들 수도 있고 대결의 진행도 경기만큼 원활하게 되기 어렵다.
  • 같은 이유로 실제 진검 대결은 그 횟수가 매우 적다. 진검 대결에서 패자는 불구가 되거나 그대로 사망할 확률이 높으며, 승자라도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면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역사상 이름난 검호라고 해도 진검으로 겨룬 횟수는 의외로 많지 않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60회, 이토 잇토사이가 33회라고 하지만 둘의 전적 모두 교차검증이 안되어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고, 그나마 상대의 생몰이 정확히 기록되어 신빙성있는 것이 츠카하라 보쿠덴의 진검대결 17회인데, 그정도의 횟수만으로도 보쿠텐은 천하 제일의 검성으로 대우받았다.
    • 당시 일본에서는 보통 진검승부를 5번 이상 이겼으면 상당히 많이 이긴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는 연간 평균적으로 3,4회의 시합을 하는데 대체로 1년이내에 죽는 편이었고 운이 좋아야 3년 가량을 버티는 편이었다.[16]

  • 진검일 때 살상력이 거의 없는 공격이 경기에서는 득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날붙이라도 길이가 짧아 휘두를 공간이 충분한 나이프와 다르게, 길이가 긴 검은 충분한 공간내에서 정확한 자세로 확실히 쳐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아무 무게감 없이 툭치는 것으로도 위험이야 하겠지만, 이정도로는 상대방을 저지하기에 위력이 충분치 않다. 그러나 경기 여건에 따라서는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공격지점에 닿기만 해도 득점으로 처리해버리는 경우(오심)가 종종 있다.
  • 진검을 사용할 때에도 코등이 싸움이 생기지만, 검도경기에서와 같이 코등이 싸움만 오래 교착되기는 어렵다. 날이나 코등이끼리 마주하게 되면, 칼날이 어깨나 머리, 몸에 맞닿아서 조금만 힘을 주면 깊게 베일 수도 있고, 상대도 얌전히 있어주지 않으므로, 교착상황을 오래두지 않고 재빨리 공격을 하거나, 자기방어를 위해 반격이나 방어등의 다음행동을 취하게 된다. 상황별 대처요령은 무술마다 다르다.
  • 진검과 다른 수련도구간에 차이가 있다. 목검, 죽도의 경우 무게가 같은 부피의 철검 일본도의 절반이며, 모양과 무게중심이 다르다. 수련량과 기간이 충분하다면, 진검으로도 동일한 속도와 위력을 갖출 수 있지만, 소모되는 체력의 량이 다르고 도구적 특성이 다르다보니 운용방법에서도 어느정도 차이가 있다. 더불어 같은 철검이라도 날을 연마한 진검과, 날을 죽인 진가검 소위 블런트를 썼을 때도 차이가 있는데, 블런트는 칼날끼리 맞닿은 후에도 마찰이 없어서 다음기술을 넣거나 그상태에서 상대방의 검을 흘리기가 비교적 쉬우나, 진검끼리는 연마한 날끼리의 마찰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5.2. 실제 검술과 창작물 속 검술의 차이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연출된 격투 액션 장면을 '스테이지 컴뱃stage combat' 이라고 한다. 스테이지 검뱃에는 검술 뿐만 아니라 특수부대 격투기, 중국권법 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프로레슬링과 레슬링의 관계처럼 스테이지 검뱃 검술은 실제 검술과 큰 차이를 보인다. 스테이지 검술의 토대는 1930년대에 마련되었는데, 이때는 검술액션이 전성기를 누리던 헐리웃 여명기로, 특히 당시 최고 액션스타였던 에롤 플린(1909년 ~ 1959)이 화려한 검술 액션으로 은막을 누볐다. 이때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만들어졌다.
  • 양손검보단 한손검(레이피어, 스몰소드, 커틀러스, 세이버)을 사용한다. 한손검은 가벼워서 화려하고 역동적으로 연출하기 유리하다.
    • 롱소드와 카타나 같은 양손검도 한손으로 운용한다. 실전 검술에도 양손검을 한손으로 운용하는 기법이 있기는 하지만 양손 검술의 보조적인 용도일 뿐이다. 양손검은 기본적으로 한손검보다 무겁고 길어서 한손으로 사용하면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피로만 쌓인다. 그러나 스테이지 검술에선 양손검을 가벼운 소재로 제작하여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한손으로 휘두른다.
    • 한손검임에도 방패를 들지 않는다. 방패술과 한손검술을 제대로 묘사하는 작품은 정말 드물다. 방패가 배우의 얼굴을 가리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투구도 등장하지 않는다.
  • 상대 몸에 닿지 않는 거리에서 검날을 검날로 막는 패링을 느릿느릿 여러 차례 주고 받으며 싸움을 길게 끈다. 검술로 유명한 영화에서도 실제 사람이 토막나서 죽는 장면은 드물고 대부분 애매하게 연출된다. 스타워즈에서도 라이트세이버로 허구언날 로봇들만 잘려나가고 사람 목이 잘리는 장면은 드물다.
    실제 검객들은 서로의 급소를 노려서 공격하고 반격하기 때문에 합을 주고 받는게 영화 처럼 길지 않다. 오늘날 검도 펜싱에서도 먼거리에서 견제하다가 상대의 빈틈을 포착하고 빠르게 치고들어가 결판을 낸다.
    • 총격전이나 격투싸움과 달리 무기를 든 백병전은 맞아주는 사람의 부상 연출과 폭력 수위 연출이 어렵기 때문이다. 액션씬에서 제일 중요한건 기술을 거는 사람이 아니라 맞아주는 사람이다. 맞아주는 사람이 부상을 입으면서 고통스러워하며 죽지 않으면 아무리 주역 배우가 열연을 펼쳐도 강해 보이지 않는다.
      격투기라면 피격당한 스턴트맨이 낙법을 쓰면서 바닥에 퍼지고 온몸비틀기하고 화장품으로 멍자국만 리얼하게 만들면 된다. 총기 액션도 총포의 격발음과 밝은 섬광만 제대로 만들면 피격 당하는 배우는 피를 뿜으며 쓰러지면 된다.
      그러나 무기를 든 백병전 연출에선 CG를 떡칠하지 않는 이상 배우의 골통을 부수거나 목을 베는 장면을 넣을 수 없다. 칼에 스쳐서 억억 하면서 죽거나 칼이 찔리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피만 뿌리는 식으로 애매하게 넘어가야 한다. 이렇게 맞는 사람이 얼마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지 눈에 확 들어오지 않으니 배우들이 아무리 열연해도 허공에 칼춤추는걸로 보인다.
  • 빈 틈을 노출하는 크고 비효율적인 동작이 많다. 화려하고 멋지게 보여야하기 때문에 팔을 좌우로 펼친 상태로 공격 동작도 크고, 또 회전 공격도 더러 나온다. 그러나 실제 검술에서 이렇게 큰 동작은 없다. 상대가 동작을 읽고 반격하기 쉽기 때문이다. 스포츠 경기에서도 빠르고 효율적인 동작으로 점수를 낸다.
  • 극도로 숙련된 검객도 최대 3~4명만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 1:10은 가볍게 찍는 영화와는 달리 실제 검술에선 매우 실력있는 소드마스터도 최대 3~4명만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똑같이 검술을 배운 검사를 상대한다는 가정이고, 이들이 중갑을 입고 소작농 출신 병사 여러명을 상대한다면 말이 다르다.

6. 관련 문서




[1] 일본에서 신분의 상징으로써 도검 패용을 강제시켰던 것 등. [2] 명조 말, 청조 초까지의 중국의 군사기술의 발전은 홍이포라는 자체 컬버린 포의 개발, 신식 화승총의 보급 등 같은 시기의 유럽 국가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여러 방면으로 발전을 이루었지만, 평화기의 지속과 더불어 내부혼란이 본격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한 중엽 이후로는 명백하게 뒤쳐지게 되었다. [3] 검술을 구결이나 불확실한 그림이 아닌, 실제 사진 자료로 남길 수 있게 된 시대 [4]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본의 고류나 중국무술, 태국의 크라비 크라봉 등에서 역사와 국적을 빼내어 본다고 생각해 보자. 그 매력은 크게 감소한다. 당장 어중이떠중이가 불쑥 나타나서 검술이랍시고 휘두른다고 생각하면 명확해진다. 누가 배우겠는가? [5] 보통 가전 무술이라고 부르고 일인전승 하는 경우도 있다. [6] 중세시대는 '모르면 죽어야지' 시대였다. 기술이 유출 됐다는건 그 만큼 다른 사람들이 대처법을 고안할수 있게 되기 때문에 정보의 비대칭 이점이 상실된다. [7] 대련 없이 짚단베기만 주야장천 하는 건 전혀 실전성이 없고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벽돌 격파 같은 행위 [8] 큰 동작으로 공격하는 것은 상대 입장에서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히려 상대방에게 다 알게 하면서 기세로 짓눌리게 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큰 동작으로 강하게 치는 것은 위력이 강한 데다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히려 다 보여주면서 겁을 주는 것이 싸움에서는 큰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진검 검술을 목표로 한다면 보호구 끼고 안전한 대련만 할게 아니라, 평상시 공포심을 느끼고 거기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병행해줘야 한다. [9] 단순히 검이라는 도구를 휘두를 줄 아는 것을 넘어, 공격을 파훼하고 방어와 동시에 반격하고, 또 거기에 반격하는 예술에 가까운 검술에 통달하려면 수년이 걸릴 것이다. [10] 근대 영국에서는 검을 사용한 결투보다 피스톨을 사용한 결투가 훨씬 더 신사적이라고 보았다. 신사란 모름지기 결투에 있어서 최대한 공정한 조건으로 임해야하는데, 검술은 실력 편차가 너무 커서 공정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 [11] 연장 들고 농사짓던 과거 농민들이 현대인에 비해 더 잘 배우긴 했다. [12] 이후에 유사한 형태인 바이킹 소드, 아밍 소드가 생겨냈다. [13] 물론 검 자체가 19세기 까지 귀족이 갖춰야할 사회적인 기본 복장이였던 이유도 있다. [14] 골라이어스라는 쯔바이핸더 검술서가 있기는 하나, 내용상 단직의 검술서의 구성을 똑같이 따라하고 있어 쯔바이핸더만의 독특한 내용이 아닌 롱소드 검술서 짝퉁의 의혹을 받고 있다. [15] 회계공무원이자 검사, 무술문서 수집가였다. 엄청난 수의 장서를 수집한지라 서양검술 복원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지만, 풀컬러 검술서를 편찬하면서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시 재정을 횡령한 사실이 적발돼서 사형당했다. [16] 너무 적지 않나 싶겠지만 현대의 전문 검사 격인 특수부대 오퍼레이터들도 저격 분야에서 그 확인된 킬카운트가 수십단위면 기록에 남을정도로 굉장한 엘리트로 불리며, 마찬가지로 현대의 기사라고 할 수 있을 전투조종사들은 격추수 5대만 기록해도 에이스로 떠받들여지는데 고중세의 전장이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든, 중세든, 근대든, 현대든, 전장에서 수십~수백명을 죽이는 사람들은 정말 기록에 남을 수준으로 인외 수준의 굉장한 재능과 신체능력, 정신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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