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5 00:57:38

빌리 파울 헤롤트

파일:헤롤트.jpg
이름 Willy Paul "Willi" Herold
빌리 파울 '빌리' 헤롤트
출생 1925년 9월 11일, 작센 룬체나우
사망 1946년 11월 14일, 연합군 점령하 독일 볼펜뷔텔
복무 독일 국방군 공군 (1943년 ~ 1945년)
최종계급 공군 공수 일병
주요 참전 이탈리아 전선
몬테카시노 전투
서부전선
주요 서훈 1급 철십자장
1. 개요2. 생애
2.1. 성장기2.2. 군 복무2.3. 장교 사칭 및 범죄 행각2.4. 체포 및 처형
3. 의의4.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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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군인이자 전쟁범죄이다.

2. 생애

2.1. 성장기

1925년 9월 11일 작센의 룬체나우(Lunzenau)에서 태어났으며 청소년기에는 굴뚝 청소부 교육을 받기도 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도 히틀러유겐트에 가입했는데 이후 몇 가지 필수 과정의 이수를 거부하여 1936년에 제적되었고 대신 국가노동봉사단(Reichsarbeitsdienst, RAD)에 배치되었다.

2.2. 군 복무

1943년 9월 30일 18세가 된 그는 입대를 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 루프트바페 팔시름예거(Fallschirmjäger, 공수부대)에 지원했다. 그가가 배치된 공수 연대 공군 제1공수 사단 예하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됐고 그는 몬테카시노 전투와 살레르노 전투를 겪으며 영국 육군 전차 2대를 격파하는 등 용맹하게 싸워 1급 철십자장 신분으로 받는 등 나름대로 모범적인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1945년 3월 서부전선으로 재배치된 그의 부대는 연합군의 공격에 계속 후퇴했고 한 달 뒤인 4월 초에 일병이었던 그는 부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탈영하였다. 도망다니던 와중에 그로나우와 바드 벤트하임 근처에서 그는 1대의 유기된 공군 승용차를 발견했는데 여기에서 공군 공수 특기 대위 계급장과 각종 훈장(1급 철십자장, 공수부대휘장, 나르비크 전투 크레타 전투 참전장 등)이 달린 군복 한 세트를 입수한다. 이 때부터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공군 비행복[1]을 벗어 버리고 대위의 근무복 정모, 코트를 착용하고 다니며 장교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공군에서 1년 반 가량을, 그것도 제복의 주인과 같은 공군 공수부대원으로 근무해 봤던 그로선 장교 흉내를 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2.3. 장교 사칭 및 범죄 행각

단순히 장교임을 사칭하면서 여기저기 도망다니거나 하는 정도였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대위 행세를 하면서 주변에 돌아다니던 다른 공군 탈영병들 및 낙오병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길로 가기 시작했다. 당시엔 탈영뿐 아니라 단순 낙오 등도 헌병(Feldjäggerkommando)들이 탈영으로 간주해 즉결처분하는 게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장교를 사칭하는 그의 곁에 있으면 안전이 보장될 것이라 여긴 그들은 두말않고 그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모은 병력으로 자칭 아돌프 히틀러 총통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는 특수 임무부대 "헤롤트 특임대"를 사칭하던 그는 4월 11일에 아셴도르퍼모어(Aschendorfermoor) 범죄자 수용소에 도착했다. 이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대부분 독일 육군의 탈영병 등이었고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전쟁범죄를 질렀는데 바로 90명의 수감자를 총통의 특명을 사칭하여 살해한 것이다.

얼마 뒤 연합군의 공습으로 수용소가 파괴되어 수감자와 헤롤트 특임대원들 일부는 사망하거나 도주했다. 그는 이 공습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았고 남아 있던 부하들을 모음과 동시에 일부 수감자도 자기 권한으로 석방해 자기 부하로 편입시켜 수용소를 버리고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몇몇 마을을 돌아다니며 백기를 걸었다는 이유로 농부 교수형에 처하고 다섯 명의 네덜란드인을 스파이라는 이유로 처형하는 등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그러다가 결국 정체가 들통나 아우리히(Aurich)의 현지 육군 지휘관에게 체포되었고 그가 장교를 사칭했음을 자백하여 관할 지역인 노르덴의 해군 군사법원으로 압송되었지만 종전을 앞둔 와중의 혼란 덕에 어이없게도 석방되었다.[2]

2.4. 체포 및 처형

그는 항구 도시이자 해군 주둔지인 빌헬름스하펜으로 향했고 입대 전 생업으로 삼기 위해 교육 받았던 굴뚝 청소부 일을 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5월 23일 을 훔치던 중 군정을 실시하기 위해 주둔 중이던 영국 해군 체포되었고 수사 과정에서 그가 앞서 언급한 학살극을 지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국 육군 헌병에 인계된 그는 1946년 2월 1일 12명의 부하 탈영병들과 함께 자신이 최초로 학살을 저질렀던 아셴도르퍼모어 수용소 부지로 이송되어 그 곳에서 학살한 이들의 유해를 도로 파내는 작업에 동원됐는데 이 과정에서 195구의 유해가 발굴되었고 올덴부르크로 다시 이송된 그와 부하들은 H. 브라운 영국 육군 대령에게 재판을 받았다.

8월 29일 최종적으로 기소된 그와 6명의 부하들(카를 하게발트(Karl Hagewald), 베른하르트 마이어(Bernhard Meyer), 카를 쉬테(Karl Schütte), 요제프 오일러(Josef Euler), 헤르만 브란트(Hermann Brandt), 오토 파엘러(Otto Paeller)) 중 1명을 제외한 헤롤트 외 5명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해 11월 29일 볼펜뷔텔(Wolfenbüttel) 교도소에서 단두대 참수형에 처해졌는데 처형 당시 불과 21세였다.

3. 의의

범죄 역사상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상당히 황당하면서 특이한 범죄 이력을 갖고 있다. 헤롤트 본인은 어려서부터 사고를 치거나 전과가 있는 몸도 아니었고 공군에 입대해서는 병 신분으로 받기 힘든 1급 철십자장을 받는 등 꽤 모범적으로 군생활을 했다는 점[3]에서 평범한 인물이 "제복 효과"로 인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전쟁의 광기와 결합되면 얼마나 큰 비극을 낳는지를 보여주는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4.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1] 당시 독일 공군은 비행복으로 고안된 이 피복을 일반 전투복으로도 지급했다. [2] 영화 더 캡틴에서는 해군 군법무관들이 국방군에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오히려 군 기강을 확립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호의적으로 보다가 아예 대놓고 알아서 도망가라는 듯 허술하게 감시되는 감방에 수감해 뒀다. [3] 전쟁 말기에 1급 철십자장은 마구 뿌려진 훈장이라 모범적인 군생활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렇게 뿌려진 1급 철십자장도 수훈자의 수가 수십만으로, 전쟁 내내 천만명에 근접한 병력을 운용한 독일 국방군 인원 중엔 정말 소수에 해당하는 나름대로 받기 힘든 훈장이다. 게다가 헤롤트는 하사관도 아닌 신분으로 이걸 받았으며 아무리 공로가 높아도 군 복무 태도가 불량하단 이유로 서훈이 반려 혹은 강등되는 일이 흔한 것이 독일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