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생체실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로 오른쪽 인물이 지크문트 라셔다. |
1. 개요
지크문트 라셔 (Sigmund Rascher)( 1909년 2월 12일 ~ 1945년 4월 26일, 향년 36세)
지크문트는 뮌헨에서 의사를 하던 한스 아우구스트 라셔의 셋째 아들로 1909년 모나코에서 태어났다. 콘스탄츠 및 뮌헨의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지크문트는 뮌헨에 있던 1933년에 나치당에 입당했고 그 후 이혼한 아버지와 함께 스위스의 바젤로 이주한 후 스위스군에서 일한 지크문트는 1934년에 뮌헨으로 돌아와 의학 공부를 재개했다. 1936년에 의사 자격을 취득한 후 돌격대에 배속된 지크문트는 뮌헨의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암 연구에 매진했고 1939년에 친위대로 이적한 지크문트는 독일 공군에 군의로도 입대했다. 그는 유명한 가수이던 니니 딜과 결혼했는데, 니니는 지크문트보다 연상이었지만 친위대 전국지도자이던 힘러가 아끼던 애인 중 한 명이어서 이 결혼으로 지크문트는 힘러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1944년에는 스트라스부르고에서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지크문트는 친위대 내부에서 큰 권력을 쥐게 되었고 스스로 암의 연구를 위해 인간을 실험체로 사용하는 의견을 하인리히 힘러에게 제안하여 이를 승낙 받은 후, 다하우 수용소에서 인체실험용 시설을 만들게 되었다.
2. 생체 실험
2.1. 감압 실험
1942년 초에 지크문트는 공군 군의대위 신분으로 다양한 실험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실험이 바로 감압 실험이다. 일명 초고도 실험이라고도 불리며 또는 저기압 실험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실험은 전투기 조종사가 고도의 저기압에 어느정도 견딜 수 있는가를 조사하기 위해 시작된 실험이다.당시에 지크문트 박사를 보좌한 사람의 증언을 보면 당시에 실험 대상자들은 감압실에 발가벗은 채로 갇혔고 실험 대상들은 점차 압력이 감소해가자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거나 유리창과 벽을 들이받거나 또는 자신의 몸을 할퀴거나 물어뜯었고. 이 실험은 몇 시간 후 종료되었다고 한다. 또한 실험자에게 일부러 손목에 상처를 낸 후에 시행된 압력실험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손목이나 다른 부위에 상처가 있을 때 외부압력을 받으면 그 상처를 통하여 피가 얼마나 쏟아져 나오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지크문트가 압력실의 압력을 높이기 시작하자, 실험 대상자는 처음에는 심한 경련을 보이더니 압력을 더욱 높아지기 시작하자 코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했고, 입술 사이에서도 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처음에는 손목의 상처 부위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았는데, 그러다 갑자기 상처가 난 손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서 실험장이 피 범벅이 되었고, 실험자는 끔찍하게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렇게 다하우에 감금되었던 유대인, 폴란드인, 소련군 포로 등 약 80여명이 저기압 실험실에서 실험에 사용된 후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2.2. 저체온 실험
초고도 실험에 이어 저체온 실험도 악명이 높다. 이른바 한랭 실험이라는 이 실험은 극한의 바다에 떨어진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실험이었다.
당시에 실험을 참가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이 실험에는 포로로 잡힌 2명의 소련 장교들이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찬 물에 벗은 채로 들어갔고 시간은 흘러갔다. 두 장교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정신을 잃지 않으려 했지만 너무도 고통스러운 실험이었기에 당시 한 소련 장교는 다른 장교에게 실험을 주관하는 박사와 장교들을 가리키며 '동무. 저 독일 장교에게 차라리 총살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떨까?' 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장교는 '저 개같은 파시스트 놈들이 그런 자비를 주진 않을 거 같네.' 라고 말했으며 결국 두 소련 장교는 서로 "잘 가게. 동무." 라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실험이 끝나기까지는 약 5시간[1]은 넘게 흘렀다.
그 외에 가온 실험도 실시했는데, 이 실험의 의도는 용감한 독일 조종사와 해군 선원들이 북극해 부근처럼 추운 곳에 실종되었을 때 그들을 구하기 위한 빠른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지크문트는 1명의 여자와 2명의 여자를 놓고 실험을 하였는데, 실험의 결론은 바다에서 2명이 있으면 일종의 도덕적 자제력이 생겨 1명이 있을 때보다 체온 상승이 낮았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최종 결론은 '극히 어렵고 힘들다. 차라리 온열 찜질을 하는 게 훨씬 좋다.'였다 도표나 확률도 없이 그냥 이렇게 적은 것만 봐도 제대로 된 의학자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실험에서 약 90명 정도의 수형자들이 실험에 끌려나가 동사했다고 한다. 라펜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에서 이송되어 온 4명의 집시 여인 중 2명을 동사시킨 후 다른 두명의 여성을 발가벗긴 후에 껴안게 하여 덥힌다[2]는 광기 어린 실험도 실시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자신을 아우슈비츠로 전출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그 이유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매우 넓어서 일하는 동안 사람들의 주의를 덜 끌 수 있을 것이다. 실험 대상들이 몸이 얼 때 너무 소리를 지른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지크문트의 이런 악행은 곧 끝나게 된다.
3. 최후
지크문트의 아내 니니는 48세가 된 후에 아이 셋을 낳았기에 힘러는 라셔 일가를 인구 증가 목적의 선전에 이용했다. 당시에 40세가 넘었어도 아이를 계속 가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으므로 당시 독일인들을 그들의 출산을 놀라워했다. 그러나 니니가 네번째 아이를 임신했다고 밝혔을 때 그녀가 아이를 유괴하다가 체포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이 때 니니는 실제로 임신한 것이 아니었고, 지크문트와 공모해 몰래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일정 간격으로 교묘하게 빼돌려서 데려온 것이었으며, 세번째 아기도 유괴 및 매수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지크문트는 힘러의 눈 밖에 났고 1944년 4월 지크문트 부부는 게슈타포에 의해 아동 유괴 혐의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뇌물을 받은 혐의와 부하 살해, 사기 혐의로 기소된 라셔 부부는 사형 판결을 받았고, 독일의 패전 직전인 1945년 4월 26일에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으로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