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21:13:51

빈센트 지간테

<colbgcolor=#000><colcolor=#fff> 빈센트 지간테
Vincent Gigante
파일:Gigante.jpg
이름 Vincent Louis Gigante
빈센트 루이스 지간테
출생 1928년 3월 29일
미국 뉴욕주 뉴욕시
사망 2005년 12월 19일 (향년 77세)
미국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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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마피아
신체 183cm
배우자 올림피아 지간테 (사진) (1950년 ~ 2005년)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별명2.2. 1930~50년대
2.2.1. 비토 제노비스와의 만남2.2.2. 권투 선수에서 마피아로2.2.3. 마피아 정식 입단과 결혼2.2.4. 마피아 두목 암살 시도2.2.5. 수감
2.3. 1960~70년대
2.3.1. 출소2.3.2. 정신질환자 행세와 행동대장 승진2.3.3.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2.3.4. 에볼리 형제 제거2.3.5. 제2차 콜롬보 항쟁 개입2.3.6. 마약 규율 위반자 처단과 상담역 승진2.3.7. 지방검사 출신 변호사, 지미 호파 실종사건과 연관되어 살해
2.4. 1980년대
2.4.1. 필라델피아 패밀리 내부 항쟁 진압2.4.2. 행동대원 제라드 파파 보복 승인2.4.3.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됨2.4.4. 첫 번째 처형: 행동대원 카를로 디피에트로2.4.5. 폴 카스텔라노와의 담판: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 프랭크 피콜로 처형2.4.6. 콘크리트 클럽2.4.7. 도청에 대한 대응: 이름 언급 금지령2.4.8. 계속되는 정신질환자 행세2.4.9. 행동대원 조지 자폴라 처형2.4.10. 추종세력 네이선 마셀리, 노동부장관과 연관된 의심만으로 처형2.4.11. 세기의 재판, 마피아 위원회 재판 이후 위원회 장악2.4.12. 존 고티 암살 지령: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프랭크 데치코 처형2.4.13. 정계와의 연계, 아마데오 에스포지토2.4.14. FBI-NYPD 합동 조직범죄전담반 소속 수사관 살해2.4.15. 러시아계 레드 마피아와의 협력: 휘발유 밀매 사업2.4.16. 창문 사업 전개2.4.17. 언론을 속임2.4.18. 마피아 위원회 재판 유죄판결과 연방검사장 암살 논의2.4.19. 사업가 어윈 쉬프 살해와 행동대장 존 디질리오 처형2.4.20. 빈센트 지간테의 영향력2.4.21. 후계자 양성과 알 샤프턴 계좌사건2.4.22. 행동대원 안토니오 디로렌조 처형2.4.23. FBI,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 피터 사비노 회유 성공
2.5. 1990년대
2.5.1. 마피아 창문 재판 시작2.5.2. 존 고티와의 대립으로 인한 제3차 콜롬보 항쟁 발발2.5.3. 존 고티 구속 기소와 그에 대한 마지막 보복: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 에드워드 리노와 행동대원 바르톨로뮤 보리엘로 처형2.5.4. 추종세력 랄프 데시몬, 의심만으로 처형2.5.5. 피터 사비노 암살 지령2.5.6. 추종세력 안젤로 상지올로 처형2.5.7. 마피아 창문 재판 최종 판결: 피고인 8명 중 3명 유죄2.5.8. 제3차 콜롬보 항쟁 종결2.5.9. 조셉 멀리노를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실권자로 인정2.5.10. 재판 중인 부하들의 '유죄인정' 행위를 인정2.5.11. 정신건강이 재판에 적합하다는 판단과 두 번째 심장수술2.5.12. 뉴욕동부지구 연방지방법원에서 1심 공판 시작2.5.13. 1심 판결: 6건의 살인교사 무죄, 3건의 살인공모와 부당이득 유죄2.5.14. 1심 선고: 2건의 살인공모 면소, 징역 12년 벌금 125만 달러2.5.15. 미국 탐사보도 프로그램 '60분', 빈센트 지간테 회차 방영2.5.16. 행동대장 대행 랄프 코폴라 처형2.5.17. 2심에서 원심판결을 유지
2.6. 2000년대
2.6.1. 3심에서 원심판결을 확정2.6.2. 수감 이후 대리인들2.6.3. 수감 중에도 실질적 두목이었던 증거들2.6.4. 사법방해로 추가 기소, 이후 정신질환자 연기 인정2.6.5. 행동대장 아돌포 브루노 처형2.6.6. FBI 잠입 요원 호아킨 가르시아에 현상금2.6.7. 마지막 처형: 행동대장 대행 로렌스 리치2.6.8. 몸 상태 급격히 악화, 이후 사망
3. 여담
3.1. 대중매체 관련3.2. 사생활 및 가족 관련3.3. 마피아 활동 관련3.4. 수감생활 관련
4. 어록5. 평판 및 평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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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투 선수 출신으로 미국 뉴욕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이 된 인물.

일명 턱(Chin), 괴상한 대부(Oddfather), 목욕 가운을 입은 수수께끼의 인물(Enigma in the Bathrobe), 가운(Robe), 뉴욕의 진정한 두목(Real Boss of New York)

목욕 가운을 입은 정신질환자 행세로 법망을 피한 마피아 두목이자 카를로 감비노 이후 20세기 후반의 미국 조직범죄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인물로 여겨진다.

2. 생애

2.1. 출생과 별명

1928년 3월 29일 빈센트 지간테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미국 뉴욕 시로 이민 온 시계공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사이에서 난 다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지간테를 상징하는 별명은 '턱(Chin)'이었는데,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사랑을 담아 부른 친지노(Chinzeeno)란 애칭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그의 가톨릭 세례명인 빈첸시오(Vincenzo)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며 그가 권투 시합 때 사용한 빌리 친(Billy Chin)이란 링네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2.2. 1930~50년대

2.2.1. 비토 제노비스와의 만남

빈센트 지간테는 전설의 마피아 두목(Boss) 러키 루치아노의 부하 비토 제노비스 (사진)의 제자가 되어 암흑가에 발을 들였다. 지간테의 부모님과 제노비스 모두 나폴리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어린 지간테는 시칠리아에서 미국으로 이어진 이탈리아계 마피아 조직 라 코사 노스트라(La Cosa Nostra•우리의 것)와 조직에 소속된 구성원이라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침묵의 계율 오메르타에 대해 배움과 동시에 학교 친구들을 대상으로 25~50센트 사이의 보호비를 갈취하는 등 전형적인 폭력배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이 시기 후견인 제노비스는 가난했던 지간테 어머니의 수술비를 대신 지불해 주었는데, 당시 그녀는 혈액 중독에 의한 감염으로 생존이 힘들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수술 후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이 사건은 지간테가 제노비스에게 평생 충성을 바치는 계기가 되었다.

2.2.2. 권투 선수에서 마피아로

맨해튼 섬유고등학교를 중퇴한 빈센트 지간테는 1944년부터 약 3년간 라이트헤비급 프로권투 선수 활동을 했다.
파일:Boxer Gigante.jpg
권투 선수 시절 빈센트 지간테의 모습
그의 권투 경력 역시 마피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당시 지간테의 매니저는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 고위 간부 토마스 에볼리 (사진)였다. 미국 권투의 성지인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4번의 시합을 가지는 등 25전 21승 4패 13KO의 최종 성적표를 받아든 19세의 지간테는 권투 선수를 은퇴한 뒤 루치아노 패밀리의 추종세력(Associate)이 되어 본격적으로 마피아 세계에 투신했다.[1][2]
파일:Young Chin Gigante.jpg
마피아 하급 조직원 시절 빈센트 지간테의 모습

2.2.3. 마피아 정식 입단과 결혼

빈센트 지간테는 17~25세 사이에 폭행, 자동차 절도 및 방화, 마권업, 무기 소지 등에 이르는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대부분 기각되었고 보호관찰 1번과 징역 2개월 처분을 받는데 그쳤다. 이 시기 여러 마피아 살인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알려진 그는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되어 비토 제노비스 (사진)의 운전기사를 맡았으며 표면적으로 모자 제조업체인 스콧 노블티사(Scott Novelty Co.)에 소속되어 연간 8천~1만 5천 달러의 봉급을 받는 영업사원 행세를 했다.[3]

1950년 빈센트 지간테는 올림피아 지간테 (사진)와 혼인했다. 훗날 그들은 2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둔다.
파일:Gigante Wedding.jpg
지간테 부부의 결혼식 모습

2.2.4. 마피아 두목 암살 시도

1957년 비토 제노비스 (사진)는 부하들에게 러키 루치아노의 후계자이자 암흑가의 수상이라 불리었던 당대 최고의 미국 마피아 두목(Boss) 프랭크 코스텔로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뒤 토마스 에볼리 (사진), 빈센트 지간테, 도미닉 알론지 (사진)로 구성된 작업조가 코스텔로의 자택으로 파견되었고 지간테가 발사한 38구경 권총 탄환이 코스텔로의 머리를 스쳤다. 총격을 당한 코스텔로는 사망하진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뒤 마피아 세계에서 은퇴했다.[4][5]

얼마 뒤 목격자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빈센트 지간테는 수배를 피해 잠적했지만 몇 개월 뒤 자수하여 프랭크 코스텔로 총격사건에 대해 재판을 받았다.
살인미수 혐의로 연행되는 빈센트 지간테의 모습
당시 코스텔로는 지간테가 자신을 쏘지 않았다고 증언하여 결국 무죄판결이 내려졌고 이후 지간테의 후견인 비토 제노비스가 은퇴한 코스텔로를 밀어내고 미국 제일의 범죄조직인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되었다.[6]

2.2.5. 수감

1959년 비토 제노비스 (사진)는 자신의 후계자 프랭크 코스텔로를 은퇴시킨 것에 격분한 러키 루치아노의 계략에 빠져 국제마약사범으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아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당시 빈센트 지간테도 12명이 넘는 다른 마피아들과 함께 기소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7] 하지만 사건의 배후 루치아노는 추방되어 이탈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제노비스는 통제력을 유지했고 그가 임명한 대리인들이 차례로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아 변함없이 패밀리 사업을 감독했다.

2.3. 1960~70년대

2.3.1. 출소

1964년 펜실베이니아 주 루이스버그 연방교도소에서 약 5년간 복역한 뒤 출소한 빈센트 지간테는 프랭크 코스텔로를 은퇴시킨 장본인으로 암흑가에서 큰 명성을 떨쳤다. 이 시기 지간테는 수감 중인 두목(Boss) 비토 제노비스 (사진)의 눈과 귀가 되는 방법으로 그를 보좌했다.

2.3.2. 정신질환자 행세와 행동대장 승진

1960년대 중반 빈센트 지간테는 자신을 둘러싼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스스로 정신병원에 등록한 뒤 정신질환자 행세를 시작했다. 1969년 지간테는 5명으로 구성된 뉴저지 주의 1개 경찰팀 전체를 매수하려는 시도로 기소되었지만 자신에게 정신적인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며 재판에서 승소했고 이런 기만행위는 향후에도 계속된다. 같은 해 교정시설에서 패밀리를 관리하던 비토 제노비스 (사진)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사망했다. 이후 제노비스 부재 기간 동안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아 일상적인 조직 관리를 해온 필립 롬바르도 (사진)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새로운 두목(Boss)이 되었다.

1960년대 중후반 혹은 1970년대 초반 빈센트 지간테는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를 거점으로 한 제노비스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이 되었다. 아지트에 들어가는 지간테의 모습(gif). 이 시기 지간테는 표면적으로 P&G 자동차 화물운송사(P&G Motor Freight Company)에 소속된 자문위원 행세를 했다.

2.3.3.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

1971년 마피아의 나이트클럽 인수 시도를 수사하던 NYPD 조직범죄수사관 조셉 코피 (사진)는 도청을 통해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빈센트 리조가 수상한 독일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리조가 뉴욕 시 쇼어 뷰 아파트에서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빈센트 지간테와 자주 접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그는 상부의 허가를 얻어 리조의 뒤를 쫓아 독일로 향했다. 유럽에서도 감청과 감시를 이어간 코피는 미국의 제노비스 패밀리와 버팔로 패밀리가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결탁하여 바티칸은행에 9억 5000만 달러 상당의 위조 채권을 매각하려 한다는 충격적인 계획을 입수했다. 이후 마피아 측은 5회에 걸쳐 6억 5000만 달러 상당의 위조 채권을 매각했고 고위 성직자 측은 1억 5000만 달러 상당의 불법 리베이트를 받았다. # 이 시기 이탈리아인 은행가 미켈레 신도나 (사진)는 자신이 통제하는 은행을 이용해 제노비스 패밀리의 역외(off-shore) 주식이나 채권을 세탁하여 합법적인 자금으로 전환시키곤 했다. 그 이듬해인 1972년 12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 마테오 디로렌조 (사진)와 상술한 행동대원 리조 외 23명의 관계자가 살인미수, 증권 사기, 마약 유통, 갈취, 고리대금업 등의 혐의로 기소된다. 리조는 1800만 달러 규모의 증권 사기와 코카인 밀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지만 그의 직속 행동대장인 디로렌조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8] 당시 바티칸은행장은 미국 출신의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였는데, 그 역시 미 연방검찰의 조사를 받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은 기밀이라고 밝히며 묵비권을 행사했고 수사관들이 바티칸은행을 상대로 압수수색 절차를 진행할 권한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불기소 처분이 내려진다. 여러 정황상 필립 롬바르도 (사진), 디로렌조, 지간테 같은 미국 마피아 고위 간부들과 주세페 칼로 (사진) 같은 시칠리아 마피아 고위 간부들도 당대 바티칸은행 비리에 깊이 연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들은 모두 법망을 피했다.[9] [바티칸은행_비리_의혹_후일담][조셉_코피]

2.3.4. 에볼리 형제 제거

1972년 빈센트 지간테의 권투 선수 시절 매니저이자 제노비스 패밀리의 거리 책임자(Street Boss)인 토마스 에볼리 (사진)가 애인의 아파트 앞에서 살해되었다. 이후 토마스 에볼리가 주관하던 모든 고리대금 사업권을 지간테가 장악한다. 훗날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조셉 부오난노는 동업자로 위장한 FBI 측 정보원에게 "당시 상부의 지시를 받은 지간테가 살인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범행 현장을 방문하여 토마스 에볼리의 신원을 확인했다."라고 얘기한다. [토마스_에볼리_살인사건]

그로부터 수년 뒤 토마스 에볼리의 아들 하비에르 에볼리는 자신의 삼촌이자 제노비스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이었던 파스칼레 에볼리마저 실종되자 빈센트 지간테를 찾아가 왜 우리 아버지와 같은 지위의 사람이 온전히 은퇴하지 못하고 살해되었냐고 물었는데, 지간테로부터 "자네는 숙모나 사촌들과는 달리 찾아갈 무덤이라도 있어 다행이야. 그들은 찾아갈 무덤조차 없어.(Be glad that you have a grave to go to, not like your aunt and your cousins. They don't have a grave to go to.)"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 실제로 파스칼레 에볼리는 실종된 뒤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2.3.5. 제2차 콜롬보 항쟁 개입

1974년 마피아 위원회는 뉴욕의 두목(Boss) 중 하나인 조셉 콜롬보 (사진)가 저격되어 식물인간이 된 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조셉 갈로 (사진)가 살해되는 등 점점 격화하고 있는 제2차 콜롬보 항쟁에 개입해 양측을 중재했다.[13][14] 당시 갈로 파벌은 훗날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이 되는 행동대장(Caporegime) 시절의 아니엘로 델라크로체 (사진)를 심하게 폭행하여 중상을 입힐 정도로 거칠 것이 없었는데[15] 결국 위원회는 그런 갈로 파벌과 콜롬보 패밀리의 내부 갈등을 봉합하고 항쟁을 종결시킨 뒤 살해된 조셉 갈로의 동생 앨버트 갈로 (사진)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을 콜롬보 패밀리에서 제노비스 패밀리로 이적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파일:Gallo Crew Meeting at the Dormitory.jpg
앨버트 갈로(가운데)를 위시로 한 갈로 파벌의 모습
이후 갈로 파벌은 빈센트 지간테가 이끄는 그리니치 빌리지 행동대(Crew)에 소속되었는데, 지간테는 어느 누구도 길들일 수 없었던 갈로 파벌을 통제하는데 성공하여 제노비스 패밀리의 규율에 복종시켰다. 한편, 위원회의 결정에 반기를 든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존 커트론과 추종세력(Associate) 게리 바시아노는 1976년에 평화협정을 무시하고 갈로 파벌 소속 스티븐 보리엘로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혔다. 지간테는 자신의 부하가 다친 것에 격분했고 제노비스 패밀리는 즉각 콜롬보 패밀리 측에 후속처리를 요구했다. 얼마 뒤 커트론과 바시아노 모두 살해되었는데, 이 사건 이후 갈로 파벌에 해묵은 감정을 갖고 있었던 콜롬보 패밀리의 어느 누구도 감히 그들을 공격할 수 없었다. [갈로_파벌]

2.3.6. 마약 규율 위반자 처단과 상담역 승진

1970년대 마피아 위원회는 허가받지 않고 마약을 유통한 조직원들을 살해하는 임무를 빈센트 지간테에게 맡겼다. 당시 마약 유통 혐의로 체포되거나 유죄판결을 받은 대부분의 마피아는 지간테와 관련 있는 인물로부터 호출되었는데, 이는 곧 호출 대상자의 마지막 모습이 되곤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75년에 대규모 헤로인 재판을 받는 중이었던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카마인 콘살보가 24층 건물 옥상에서 던져져 살해되었고 3개월 뒤 그의 형제 프랭크 콘살보가 5층 건물 옥상에서 던져져 살해되었다. 이 사건들은 일명 하늘을 나는 콘살보 형제(Flying Consalvos)로 묘사되며 마약 규율을 어긴 마피아 정규조직원의 최후에 대한 상징적인 사례들로 평가받았는데, 이런 뒷세계 해결사로서의 평판은 지간테를 더욱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런 평판에 힘입어 1970년대 중반 제노비스 패밀리의 상담역(Consigliere)이 되어 조직 수뇌부에 발을 들인다.[17]

2.3.7. 지방검사 출신 변호사, 지미 호파 실종사건과 연관되어 살해

1977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제사건 중 하나인 노조위원장 지미 호파 실종사건과 관련된 증언을 하기로 되어있었던 지방검사 출신 변호사 지노 갈리나가 8발의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살해되던 시점의 그는 제노비스 패밀리를 포함한 수많은 조직범죄 인사를 의뢰인으로 두고 있었다. 당시 사법당국에선 마피아 위원회가 자신들이 연루된 호파 실종사건의 내막을 폭로하려 한 갈리나를 제거하기 위해 산하의 22구경 작업조(22 Caliber Hitters)를 시켜 그를 살해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22구경_작업조] 당시 FBI에선 22구경 작업조의 핵심 인물로 추정되는 4명의 마피아를 지목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빈센트 지간테였다.[19] 상술했듯 지간테는 당대 위원회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마약을 유통한 마피아들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22구경 작업조와의 연관성을 미루어 보면 FBI 측 정보원들에 대한 처단도 함께 주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2.4. 1980년대

2.4.1. 필라델피아 패밀리 내부 항쟁 진압

1980년 필라델피아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안토니오 카포니그로 (사진)와 행동대장(Caporegime) 프랭크 신돈 (사진) 마피아 위원회의 허가 없이 자신들의 두목(Boss) 안젤로 브루노 (사진)를 살해한 대가로 제거되었다. 비록 대체 이론이 존재하긴 하지만 카포니그로는 빈센트 지간테의 직속 부하들에게 납치된 뒤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뉴욕 시에 주차된 자동차 트렁크에서 나체로 발견된 그의 시신은 14발의 총상과 더불어 온몸이 칼로 난자되어 있었고 탐욕을 상징하는 지폐가 입과 항문에 꽂혀 있었다.[20]
파일:Caponigro_dead.webp
안토니오 카포니그로의 시신을 순화하여 재현한 모습
사실 카포니그로와 신돈은 사전에 제노비스 패밀리의 허가를 받고 브루노를 살해했지만 자신들이 뉴욕 마피아와 필라델피아 마피아 간 애틀랜틱시티 카지노 이권 다툼 과정에서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21]

2.4.2. 행동대원 제라드 파파 보복 승인

1980년 필라델피아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안토니오 카포니그로 (사진) 제거로부터 약 3개월 뒤 빈센트 지간테는 상부의 허가 없이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토마스 스페로 (사진)를 살해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제라드 파파 (사진)에 대한 보복이 승인되었다는 사실을 관계자들에게 전달했다. 이후 콜롬보 패밀리가 행동에 나섰고 파파는 산탄총에 맞아 머리가 터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4.3.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됨

1981년 70대 고령의 필립 롬바르도 (사진)가 은퇴하면서 53세의 빈센트 지간테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이 됨과 동시에 마피아 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 시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두목 롬바르도는 뉴욕대학교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뇌졸중을 겪은 부두목(Underboss) 앤서니 살레르노도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본래 살레르노는 상담역(Consigliere) 지간테와 더불어 유력한 차기 두목 후보였으나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아 그 뜻을 단념했다. 당시 지간테는 패밀리 내 유력 행동대장(Caporegime)인 사베리오 산토라 (사진), 루이스 만나 (사진)와 함께 그들의 병문안을 갔고 그곳에서 공식적인 승계가 이루어졌다. 두목이 된 지간테는 산토라를 서열 2위인 부두목, 만나를 서열 3위인 상담역으로 임명했다.[22] 살레르노는 서열 1.5위 격인 거리 책임자(Street Boss)를 맡아 지간테의 승계를 대외적으로 위장했다.[23] [마피아_위원회_회합_승계설]

약 36년 동안 조직 생활을 하며 온갖 수라장을 헤쳐온 뒤 비로소 암흑가의 정점에 오른 빈센트 지간테는 음산한 분위기와 위협적인 기질로 악명 높았고 극단적인 폭력과 기만으로 무장한 무자비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매서운 시선은 담판에서 상대를 위협하는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범죄활동을 조력하는 4명의 형제가 있었다. 형 마리오 지간테 (사진)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간부로, 조직 내에서 동생을 보좌했다. [마리오_지간테]
빈센트 지간테를 수행하는 마리오 지간테를 다룬 뉴스

큰형 파스칼레 지간테 (사진)와 동생 랄프 지간테 (사진) 역시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두목이 된 형제를 보좌했다. [파스칼레_지간테와_랄프_지간테] 막냇동생 루이스 지간테 신부 (사진) 연방하원의원 선거에도 출마한 뉴욕시의원으로, 자신의 형에게 광범위한 종교 및 정치적 후광을 안겨줄 수 있었다.[27] 지간테 신부는 빈곤층을 위한 공공아파트 건설 사업을 주도하는 브롱스남동부공동체조직(South East Bronx Community Organization 이하 SEBCO)이란 단체를 결성했고 SEBCO는 지간테 가문의 프런트회사 겸 돈세탁 창구가 되었다.[28] 다섯 형제 중 유일하게 마피아 세계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지간테 신부는 언론에 빈센트 지간테의 입장을 전달할 일이 생기면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다. # 그 외에도 빈센트 지간테에겐 일명 ‘4인의 돔(Four Doms)’이라 불린 심복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도미닉이란 이름을 가진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간부들이었는데, ‘대머리 돔’ 도미닉 칸테리노 (사진), ‘과묵한 돔’ 도미닉 시릴로, ‘뱃사람 돔’ 도미닉 디콰르토 (사진), ‘뚱뚱한 돔’ 도미닉 알론지 (사진)가 그들이다.

2.4.4. 첫 번째 처형: 행동대원 카를로 디피에트로

1981년 여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카를로 디피에트로 (사진)가 실종되었다. 비록 범인은 검거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패밀리의 두목(Boss)이 된 빈센트 지간테가 처음으로 승인한 조직 내 처형으로 여겨진다. #

2.4.5. 폴 카스텔라노와의 담판: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 프랭크 피콜로 처형

1981년 9월 빈센트 지간테는 감비노 패밀리 두목(Boss) 폴 카스텔라노와 담판을 가졌다. 지간테는 코네티컷 주에서 활동하는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프랭크 피콜로 (사진)가 자신들의 건설 사업을 침해한 것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고 결국 카스텔라노로부터 피콜로 제거 허가를 얻어냈다.[29] 얼마 뒤 피콜로는 브리지포트에 위치한 전화 부스 밖에서 총격을 당해 살해되었다. 당시 감비노 패밀리 소속 행동대원(Soldier)이었던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는 훗날 "카스텔라노가 지간테를 달래기 위해 정규조직원(Made Member)을 제물로 바친 것을 본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은 크게 동요했다. 난 그 소식을 들은 뒤 카스텔라노에 대한 존경심을 잃었지만 지간테는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결코 카스텔라노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지간테를 상대로 장난칠 수 없었다. 그는 군함의 함장처럼 질서를 통제했다."라고 얘기한다.

2.4.6. 콘크리트 클럽

이 시기 빈센트 지간테는 마피아 위원회가 통제하는 노동조합, 납품업체, 도급업체, 하청업체들을 규합한 콘크리트 클럽(Concrete Club)에 가담했다. 이 클럽은 당대 위원회에 의석을 가진 두목(Boss)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뉴욕 대도시권 일대에서 진행되는 200만 달러 규모 이상의 모든 건설 공사에 사용될 콘크리트의 입찰을 조작하고 500만 달러 규모 이상의 모든 건설 공사에 사용될 콘크리트를 독점했으며 관련된 모든 회사와 노동자로부터 2%의 불법 리베이트를 받았다. 이 규칙에 저항하는 일부 관계자들은 노조를 움직여 공사를 중단시키겠다는 마피아 측의 협박에 시달리다 결국 타협했고 끝내 타협하지 않은 자들은 살해되거나 상해를 입거나 자신의 사업체 혹은 직장을 잃게 되었다.
제노비스 패밀리의 협조 요구를 거절한 대가로 직원 2명이 살해되고 사업체 16곳에 방화가 일어난 A&P사를 다룬 뉴스

이렇듯 위원회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맨해튼에 건설되는 모든 대형 건물에 관여했는데, 실제로 그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사업이었다. 당대 콘크리트 클럽의 월권행위를 잘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1984년 훗날 대통령이 되는 부동산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 애틀랜틱시티에 플라자 호텔 & 카지노 건설을 추진하던 시기의 비화가 있다. 당시 트럼프 측은 사망한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 필립 테스타 (사진)의 아들이자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인 살바토레 테스타에게 굳이 당시 시가의 2배인 110만 달러를 지불해가며 건설 부지를 매입했다. 특히 호텔을 철강으로 짓는 게 더 저렴하고 트렌디했음에도 콘크리트로 지었는데, 당시 호텔을 짓는데 쓰인 모든 콘크리트는 빈센트 지간테의 부하인 앤서니 살레르노의 S&A 콘크리트사에서 정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트럼프 측에 공급했다.[30] 당시 FBI 요원들은 건설업계 내 드라이월, 창문 같은 다른 분야에도 이와 유사한 마피아 클럽들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일부는 그 실체가 드러났다. [드라이월_클럽]

2.4.7. 도청에 대한 대응: 이름 언급 금지령

두목(Boss)이 된 빈센트 지간테는 FBI의 도청을 경계한 탓에 직접 소리 내어 말하는 걸 꺼리는 등 더욱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면 바로 앞에 있는 사람과 대화할 때도 노트에 글씨를 써 의사소통을 했고 사용한 종이는 즉시 찢어 불에 태웠는데, 반드시 말할 필요가 있을 때조차 귓속말을 사용했으며 각종 지시는 자신의 심복들을 통해서만 하달했다. 지간테는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은 그 즉시 살해될 것이고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다른 패밀리 소속 조직원도 가혹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공표했다.

실제로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조셉 고르곤은 건설 사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빈센트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하다 FBI 도청기에 포착되었는데, 만약 지간테가 기소될 경우 그 대가로 살해될 것이란 경고를 받았고 루케시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조 피오레는 슬롯머신 매매 과정에서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하다 적발되어 3명의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으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었다. 마피아 조직원들은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하는 걸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에 굳이 그를 거론할 필요가 있을 땐 자신들의 턱을 만지거나 가리켰고 손가락으로 Chin(턱)의 머리글자인 알파벳 C를 만드는 등 여러 수신호를 사용했다. 다큐멘터리에서 지간테 수신호를 재연하는 전직 마피아 조직원의 모습(gif).[32]
마이클 프란지스 채즈 팰민테리[33]가 빈센트 지간테 수신호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

특히 자신을 만나고 싶은 부하가 있으면 기꺼이 만나주었던 감비노 패밀리의 존 고티와 달리 빈센트 지간테의 곁엔 직급이 낮은 부하들이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지간테를 만나러 온 6명의 부하 조직원 중 간부급 1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실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실외에서 보초를 서는 모습(gif). 더욱이 다른 패밀리 소속 조직원은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입단하고 난 뒤에야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지간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비록 그의 정체를 모르는 말단 추종세력이나 다른 뒷세계 인사들도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인물이 전설적인 마피아라는 사실만큼은 잘 알았기 때문에 존경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전임 두목 필립 롬바르도 (사진)만큼 용의주도했던 지간테는 가장 강력한 패밀리의 두목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업을 논의하는 형태의 마피아 위원회 회합은 수사기관의 감시에 상당히 취약하다고 생각하여 정기적인 위원회 회합에 본인 대신 거리 책임자(Street Boss) 앤서니 살레르노를 참석시켰다.[34]

2.4.8. 계속되는 정신질환자 행세

상술했듯 빈센트 지간테는 자신을 수사하는 FBI 요원들을 기만하기 위해 정신질환자 행세를 했는데, 미국 내 대대적인 조직범죄와의 전쟁 시기인 1980~90년대에 마피아 두목(Boss)으로 재직하면서도 무려 16년 동안이나 법망을 피했다. 그가 처음으로 정신적 결함을 주장하며 재판에서 승소했던 1969년부터 계산하면 약 28년 동안, 마지막으로 출소했던 1964년부터 계산하면 약 33년 동안 법망을 피한 셈이다. 지간테는 자신의 IQ가 69라고 주장했고 1년에 한 번은 정신병원을 방문했으며 미국 최고의 부촌인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에 거주하는 본인의 상류층 생활과 대비되는 자그마한 카페 운영자 행세를 했다.[35]
파일:Gigante leaves the hospital.png
휠체어를 타고 수행원들과 함께 병원을 나서는 빈센트 지간테의 모습
일상 속에서 지간테와 우연히 마주치는 일반 시민들은 그 허름한 차림의 괴상한 남자가 암흑가의 제왕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를 짚는 지간테의 모습(gif).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동차 뒷좌석에 탑승하는 지간테의 모습(gif). 부하들과 정상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지간테의 모습(gif).
목욕 가운을 입고 수행원과 함께 거리를 걷는 빈센트 지간테의 모습
이에 FBI는 거의 비지 않았던 지간테의 집이 비어있는 순간을 노려 도청장치를 설치하는데 성공했지만 누군가의 제보로 정보가 새어나가 금세 발각되기 일쑤였고 지간테는 자신이 발견한 도청장치에 대고 휘파람을 불며 수사기관을 조롱했다. 연방정부는 이런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재판에 회부시키기 가장 어려운 1980~90년대 마피아 지도자로 지간테를 꼽았다. 당시 FBI 뉴욕지국 제노비스 패밀리 담당팀장 존 프리처드 3세 (사진)는 지간테에 대해 "그는 제가 본 가장 영리한 조직범죄자일 겁니다."라고 말했다. [존_프리처드_3세]

2.4.9. 행동대원 조지 자폴라 처형

1982년 2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조지 자폴라는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를 살해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정보는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로버트 스카르파치에 의해 그라바노 측에 전달되었다. 이후 자신의 상사에게 이 사실을 전한 그라바노는 빈센트 지간테와 만나게 되었다. 당시 그라바노는 자폴라에게 보복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고 빈센트 지간테 역시 보고 체계를 어긴 스카르파치를 처벌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얼마 뒤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리오 지간테 (사진)의 호출을 받은 자폴라는 그라바노 제거 계획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았지만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같은 해 6월 22일 자폴라는 실종되었는데, 8일 후 그의 오른손이 롱아일랜드 노스포트 해변으로 씻겨 내려왔고 다음 날 3발의 총상을 입은 그의 머리가 롱아일랜드 베이빌 근처 뭍으로 올라왔다. 자폴라의 신원 확인은 치과 기록과 지문을 통해 이루어졌고 법의학자들은 범인들이 자폴라를 총으로 살해한 뒤 톱으로 머리를 절단하여 바다에 유기한 것으로 추정했다.

2.4.10. 추종세력 네이선 마셀리, 노동부장관과 연관된 의심만으로 처형

1982년 5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윌리엄 마셀리 (사진)의 아들이자 제노비스 패밀리의 추종세력(Associate)인 네이선 마셀리는 노동부장관 레이먼드 도노번 (사진)의 조직범죄 연루 혐의를 다루는 대배심 증언대에 섰다. 그로부터 약 3개월 뒤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필립 부오노 (사진)가 제노비스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사베리오 산토라 (사진)를 찾아와 네이선 마셀리가 FBI 측 정보원이라는 문서를 제시하며 그가 살해되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이에 산토라는 "내가 해결하지 '턱'을 만나봐야겠어."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가 있고 얼마 뒤 네이선 마셀리는 뉴욕 시 브롱스에서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후 부오노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살바토레 오디에르노와 함께 검거되어 네이선 마셀리 살인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지만 도노번 장관은 숱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조직범죄 연루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판 내내 도노번 장관을 지지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그가 무죄판결을 받자 "도노번을 항상 청렴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신뢰를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발언했다. 훗날 정부 측 증인이 되어 내막을 폭로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빈센트 카파로는 네이선 마셀리 살인사건의 본질은 빈센트 지간테가 도노번 장관을 보호하기 위해 정보원을 처형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당대 도노번 장관 수사를 이끈 레온 실버맨 특별검사는 "수많은 언론 보도와 달리 네이선 마셀리는 정보원이 아니었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네이선 마셀리가 실제로 정보원이었는지와 관계없이 자신과 조직에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는 걸 원치 않았던 지간테가 그를 처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37]
네이선 마셀리 살인사건과 빈센트 지간테와의 연관성을 다룬 뉴스

2.4.11. 세기의 재판, 마피아 위원회 재판 이후 위원회 장악

1985년 상술한 콘크리트 클럽(Concrete Club)을 겨냥하여 일명 세기의 재판(Case of Cases)이라 불린 마피아 위원회 재판(Mafia Commission Trial)에서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으로 지목되어 실제 두목인 빈센트 지간테를 대신해 기소된 인물은 거리 책임자(Street Boss)를 맡고 있던 앤서니 살레르노였다. 당시 지간테는 기소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입원해 일주일을 머물렀다. 위원회 재판의 총책임자였던 루돌프 줄리아니 연방검사장은 기자회견장에서 "자기가 기소될 줄 알고 병원에 입원한 마피아 둘이 있는데, 정작 공소장엔 이름도 없었어요."라는 농담을 하며 지간테의 입원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사실 FBI는 수사 과정에서 살레르노가 "왕(지간테)과 논쟁할 순 없어.(You can't argue with the king.)"라고 말하는 육성이나 # "이번 일은 두목(지간테)에게 맡겨야겠다.(I'll leave this up to the boss.)"라고 말하는 육성을 포착한 바 있는데, 이 발언들은 그가 패밀리의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라는 분명한 신호였다. 즉, 연방검찰은 살레르노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아님을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간테를 기소할 수단이 없어 살레르노가 두목이라고 언론에 공표하고 그를 기소한 것이다. 얼마 뒤 연방정부는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빈센트 카파로의 증언을 통해 위원회 재판에서 자신들의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 살레르노가 단지 지간테의 앞잡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한다.[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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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에서 묘사한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도 속 정점에 위치한 빈센트 지간테

빈센트 지간테는 1985년과 1986년 두 차례에 걸쳐 비밀회의를 가졌다. 그 자리엔 훗날 하이핀신용조합(Hyfin Credit Union 이하 HCU)에서 거금을 사취한 혐의를 받게 되는 관계자가 참석했다. 이후 각종 부정부패가 드러난 HCU는 결국 파산했고 얼마 뒤 시립신용조합(Municipal Credit Union 이하 MCU)에 합병되고 만다. [MCU] 당시 연방정부는 4000만 달러 이상의 HCU 예금자 기금이 유용되거나 오용된 것으로 파악했고 1200만 달러 이상이 끝내 회수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특히 이 사건을 연방보험에 가입한 지방신용조합과 관련된 모든 사기 및 횡령 범죄 중 가장 큰 건으로 정의 내렸다. 결국 HCU의 전 부조합장, 회계담당자, 수석변호사 같은 관계자들이 줄줄이 법정에 섰고 처벌을 받았지만 그들과 함께 연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 지간테는 법망을 피했다.

1986년 마피아 위원회 재판이 치러지는 도중 대통령 자문위원회에 제출된 조직범죄 보고서는 미국 내 모든 범죄 사업의 연간 총수익을 GNP의 1.1%에 해당하는 500억 달러로 추산했다.[41][42] 당시 대통령 자문위원회 보고서가 제시한 500억 달러라는 수치는 미국의 철, 철강, 구리, 알루미늄 제조업의 총수익을 합친 것보다 컸다. 아울러 보고서는 조직범죄의 경제 장악이 공정한 경쟁을 억누르고 산업자본을 빼돌리며 일자리 41만 4천 개 감소, 총생산 182억 달러 감소, 1인당 국민소득 77.2달러 감소, 소비자물가 0.3% 증가라는 악영향을 준다고 설명했다. 특히 범죄조직원들의 탈세로 인한 선량한 시민들의 세금 부담 규모가 65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빈센트 지간테는 이 시기에 국가에서 가장 주도적인 조직범죄자로 손꼽혔다.

마피아 위원회 재판을 피해 간 빈센트 지간테는 새로이 재편된 위원회의 의장이 되었고 제노비스 패밀리는 감비노 패밀리를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파벌이 되었다.[43] 당대 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지간테는 뉴욕 5대 패밀리 전체 구성원 수천 명을 직간접적으로 거느렸다. 연방정부는 이 시기의 제노비스 패밀리를 약 300명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 약 1000명의 추종세력(Associate), 약 20개의 행동대(Crew)로 구성되어 수뇌부의 지휘 아래 불법과 합법을 넘나들며 매년 수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다국적거대범죄기업(Multinational Huge Crime Operation)으로 정의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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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정부에서 파악한 1980년대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도

2.4.12. 존 고티 암살 지령: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프랭크 데치코 처형

1985년 12월 16일 존 고티 마피아 위원회 재판(Mafia Commission Trial)으로 기소된 폴 카스텔라노를 제거하고 감비노 패밀리의 정점에 올랐다.
영화 고티(1996)에서 묘사한 폴 카스텔라노 살인사건 폴 카스텔라노 살인사건을 다룬 뉴스

1986년 4월 마피아 위원회의 허가를 받지 않은 존 고티의 하극상에 분노한 빈센트 지간테는 신임 감비노 패밀리 두목(Boss) 고티와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데치코 (사진)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44] 얼마 뒤 두 사람을 노린 폭탄 공격이 있었지만 고티는 살아남았고 데치코는 사망했다. 영화 고티(2018)에서 묘사한 데치코 살인사건(gif). [존_고티_살인미수_및_프랭크_데치코_살인사건]
프랭크 데치코 살인사건을 다룬 뉴스

이듬해 4월엔 존 고티를 노린 총격사건이 발생했지만 오히려 습격을 가한 총잡이가 6~10명에 달하는 고티 측 수행원에 의해 폭행당하고 납치되어 5발의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46] 이렇듯 고티를 살해하는데 실패한 마피아 위원회는 감비노 패밀리에 대한 그의 통제권을 인정한 뒤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 지간테와 고티는 서로를 제거하는 계획을 비밀리에 계속 추진했다.[47]

2.4.13. 정계와의 연계, 아마데오 에스포지토

1980년대 FBI는 빈센트 지간테 휘하의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페데리코 지오바넬리 (사진)가 당대 뉴욕시장 에드 카치의 측근이자 뉴욕 시의 그림자 시장(Shadow Mayor)이라 불린 정계 거물인 민주당 브루클린 지역위원장 아마데오 에스포지토 (사진)와 회동을 가지는 모습을 포착했다. 당시 도청을 경계한 마피아 조직원들은 에스포지토 같은 정치인과 대화할 땐 지간테를 줄리아 이모(Aunt Julia)라는 암호명으로 부르곤 했다. [아마데오_에스포지토] 마피아 조직원과 거물 정치인의 회동을 보고 부패 혐의를 감지한 FBI 요원들은 에스포지토의 전화기를 도청하는 등 관련 수사를 진행하여 약 3년 뒤 민주당 소속 연방하원의원 마리오 비아지 (사진)의 징역형 유죄판결을 이끌어냈다. 비슷한 시기 에스포지토도 징역형의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벌금 50만 달러를 선고받았다.[49]

2.4.14. FBI-NYPD 합동 조직범죄전담반 소속 수사관 살해

1986년 1월 상술한 정계 거물 아마데오 에스포지토 (사진)와의 관계가 포착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페데리코 지오바넬리 (사진)를 미행하던 FBI- NYPD 합동 조직범죄전담반 소속 수사관 앤서니 벤디티와 캐슬린 버크가 총격을 당해 벤디티가 살해되고 버크가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묘사한 벤디티 살인 및 버크 살인미수 사건(gif). [앤서니_벤디티]
파일:Vendetti & Burke.png
앤서니 벤디티와 캐슬린 버크의 증명사진

사건 다음날 분노한 FBI 뉴욕지국 제노비스 패밀리 담당팀장 존 프리처드 3세 (사진)가 부하 요원 1명과 함께 제노비스 패밀리의 아지트인 트라이앵글 사교클럽 (사진)을 방문했다. 당시 프리처드 3세는 빈센트 지간테에게 "나가서 대화합시다."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는데, 야외에서 FBI 팀장의 거센 항의를 받은 지간테는 정신질환자 연기를 일절 하지 않으면서 수사관들이 살해되고 중상을 입은 사실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지만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법적 책임도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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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클럽 밖에서 목욕 가운을 입고 수행원들과 함께 흡연을 하는 빈센트 지간테의 모습
며칠 뒤 FBI 조사를 받게 된 제노비스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이자 페데리코 지오바넬리의 직속 상사인 도미닉 칸테리노 (사진)는 FBI가 본인의 두목(Boss)을 대한 태도에 분노를 표시하며 만약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영장을 소지하지 않은 요원들의 아지트 내부 진입을 막았을 것이라고 얘기함과 동시에 지간테가 늙고 병든 사람임을 강조했다. 한편, 수사 과정에서 마피아와 집안 간 혼인으로 맺어진 NYPD 수사관이 앤서니 벤디티의 업무용 차량번호를 조회한 사실이 밝혀지는 등 사건은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는 듯했다.
앤서니 벤디티 살인사건과 페데리코 지오바넬리와의 연관성을 다룬 뉴스
하지만 이후 치러진 4번의 재판에서 생존한 수사관 캐슬린 버크가 지오바넬리와 2명의 부하 조직원을 총격범으로 지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진술은 다른 목격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만 입증되었다.

페데리코 지오바넬리 측에선 자신들을 강탈하려고 시도한 2인조 강도가 있었는데, 마침 앤서니 벤디티와 캐슬린 버크가 현장에 나타나 강도들을 방해했으며 그들이 서로 총격전을 벌인 끝에 벤디티가 살해되고 버크가 중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버크가 총격범은 분명히 마피아들이었다고 항변했지만 총에 맞아 생사를 오갔던 사람의 기억력이 정확하냐는 변호인의 지적이 돌아왔다. 결정적으로 마피아 측에 불리한 증언을 했던 목격자 프랭크 시몬이 자신은 수사기관의 강압에 의해 증언한 것이었다고 입장을 번복하면서 끝내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당시 판결이 선고되자 격분한 앤서니 벤디티의 어머니가 페데리코 지오바넬리를 향해 "창녀의 자식!"이라고 쏘아붙였고 이에 지오바넬리도 언성을 높여 법정 소란 사태가 발생했다. 벤디티의 아내는 다른 피고인에게 왜 자신의 남편을 살해했냐고 물었지만 그는 자리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편, 마피아 측에 불리한 증언을 했던 목격자 프랭크 시몬은 증언을 번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측 증인에 대한 경고를 상징하는 썩은 물고기들과 함께 머리에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프랭크_시몬_살인사건][페데리코_지오바넬리][캐슬린_버크] 훗날 존 프리처드 3세는 벤디티 살인사건의 배후에 제노비스 패밀리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하면서 당시 수사관이 살해되어 두목이 항의 방문을 받는 일이 발생하자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 차원에서도 사안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2.4.15. 러시아계 레드 마피아와의 협력: 휘발유 밀매 사업

1980년대에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계 마피아는 러시아계 레드 마피아와 함께 휘발유 밀매 사업을 전개했다. 그들은 뉴욕 대도시권 일대에 유통되는 전체 휘발유의 3분의 1에서 2분의 1을 공급하며 일주일에 최대 800만 달러 상당의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다. 당시 휘발유 밀매 사업의 지배권을 노린 빈센트 지간테는 프란지스를 제노비스 패밀리로 영입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6년 3월에 프란지스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자 지간테는 휘하 행동대장 도미닉 시릴로 산하의 행동대원(Soldier) 다니엘 파가노 (사진)로 하여금 휘발유 밀매 사업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54][55] 당시 프란지스의 뒤를 이어 마피아와 레드 마피아가 제휴한 휘발유 밀매 사업 협회의 핵심 인물이 된 다니엘 파가노는 약 10년 넘게 제노비스 패밀리의 사업 이익을 대변했다.[56] 한편, 프란지스와 함께 휘발유 밀매 사업을 한 레드 마피아 수괴들의 최후는 좋지 않았는데, 정부 측 증인이 되어 마피아 측에 불리한 증언을 한 마이클 마르코위츠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자신의 롤스로이스 자동차 안에서 총격을 당해 살해되었고 레브 퍼시츠 역시 비슷한 시기에 총격을 당해 영구적인 장애인이 되었으며 데이비드 보가틴의 경우 해외로 도피하는데 성공했지만 끝내 폴란드에서 체포된 뒤 미국으로 송환되어 약 6년의 수감생활을 겪었다.[57]

2.4.16. 창문 사업 전개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으로 재직하던 빈센트 지간테는 창문 사업에서 발생하는 이권을 두고 신임 루케시 패밀리 두목 비토리오 아무소 (사진)와 마찰을 빚었지만 담판 끝에 그를 굴복시켰다. 또 FBI 요원이 조직에 잠입한 도니 브래스코 작전의 여파로 마피아 위원회에서 퇴출되었던 보난노 패밀리의 위원회 재진입 시도를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훗날 콜롬보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비토리오 오레나 (사진)는 지간테의 내부 간섭이 심하다는 불만을 루케시 패밀리 두목 대행 알폰스 다르코 (사진)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한편, 제노비스 패밀리는 위원회에서 뉴욕 주, 펜실베이니아 주, 미시간 주, 뉴저지 주, 오하이오 주, 매사추세츠 주, 코네티컷 주, 로드아일랜드 주, 버몬트 주, 메인 주, 뉴햄프셔 주, 루이지애나 주에 위치한 군소 조직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형 조직이고 그들의 두목인 지간테는 위원회의 의장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영향력이 뉴욕 시 밖에서도 강력했다. 그는 상술한 필라델피아 패밀리 내부 항쟁에 개입한 건 물론이고 뉴잉글랜드 지방 페트리아카 패밀리의 신임 두목을 논의하는 자리에도 대리인을 보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위원회에서 클리블랜드 시카고 마피아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하는 등 # 전국적인 실력행사를 했다.

2.4.17. 언론을 속임

당시 빈센트 지간테의 교활한 전략은 언론을 완벽하게 속였다. 1986년 미국의 유명 경제지 포춘에서 국가 최고의 폭력배 순위를 선정했는데, 지간테는 19위에 불과했지만 지간테의 간판으로 마피아 위원회 재판(Mafia Commission Trial)을 받는 중이었던 앤서니 살레르노는 1위였다. 당시 18위로 선정된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는 훗날 정부 측 증인이 된 뒤 영상을 통해 "지간테는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였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나보다 아래 순위에 올릴 수 있나?"라고 말하며 포춘지의 순위를 비판한다. #

2.4.18. 마피아 위원회 재판 유죄판결과 연방검사장 암살 논의

1986년 11월 마피아 위원회 재판(Mafia Commission Trial)은 유죄판결로 끝났다. 이후 두목(Boss)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업을 논의하는 정기적인 위원회 회합이 폐지되었고 각 패밀리는 전령을 통해 의사를 교환하며 사업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당대 뉴욕 마피아 두목들은 위원회 재판을 주도한 루돌프 줄리아니 연방검사장을 노리는 암살 계획을 논의했다. # 당시 존 고티는 찬성표를 던졌지만 빈센트 지간테는 사업에 좋지 않다며 반대표를 던졌다. 결국 빈센트 지간테의 의사가 결정타가 되어 암살 계획은 3 대 2로 기각되었다.[58] 빈센트 지간테는 이 시기를 전후로 거리 책임자(Street Boss), 전령(Messenger) 같은 직책에 자신의 심복들을 새로 임명했고 그들로 하여금 앤서니 살레르노를 대신했다.

한편, 콜롬보 패밀리는 루돌프 줄리아니 암살 계획이 기각되자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여 과거 마피아 수사를 주도했던 연방검사 출신 변호사 윌리엄 아론왈드의 아버지 조지 아론왈드 지방판사를 보복 살해했다. 이는 원래 윌리엄 아론왈드를 노린 작업이었으나 일선 해결사들의 착오로 조지 아론왈드가 잘못 살해된 것인데, 이후 2명의 해결사는 실수의 대가로 처형되었다.

2.4.19. 사업가 어윈 쉬프 살해와 행동대장 존 디질리오 처형

1987년 마피아와 연관된 사업가 어윈 쉬프 (사진) 맨해튼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여성과 데이트를 하던 중 머리에 2발의 총상을 입고 살해되었다. 당시 사법당국은 쉬프가 빈센트 지간테의 제노비스 패밀리에서 진행한 2500만 달러 규모의 돈세탁 과정에서 일부 금액을 횡령한 대가로 살해되었다고 추정했다. [어윈_쉬프]

1988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존 디질리오 (사진)는 자신의 재판 과정에서 기존 변호인을 해임하고 본인이 직접 변호를 맡는가 하면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록키 그라지아노, 제이크 라모타 같은 유명 권투 선수들을 법원 방청석에 초대하여 자신에 대한 지지를 구하는 등 눈에 띄는 행동으로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제노비스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베네로 망가노 (사진)를 험담하는 육성이 공개된 디질리오는 무죄판결을 받긴 했지만 이미 눈에 띄는 행동과 부두목 험담으로 빈센트 지간테를 포함한 패밀리 수뇌부의 심기를 건드린 뒤였다. 결국 그로부터 약 1개월 뒤 디질리오는 뉴욕 주 뉴저지 주에 걸쳐 있는 해컨색강에서 5발의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된다.[60] [존_디질리오]
어윈 쉬프 및 존 디질리오 살인사건을 다룬 뉴스

2.4.20. 빈센트 지간테의 영향력

존 고티 등 당대 다른 마피아 두목(Boss)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나 빈센트 지간테의 부패한 영향력은 갈취, 사취, 절도, 강탈, 고리대금, 도박, 매춘, 밀수, 밀매, 사기, 포르노, 화폐 위조, 마약 유통 같은 범죄조직의 전통적인 사업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는 여러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노동 공갈을 통해 재개발, 건설, 철거, 유통, 유흥, 폐기물관리, 인테리어, 보안, 의류, 운수, 항만하역, 연예, 요식, 스포츠, 자동판매기 등 합법적인 영역에 속한 사업체들의 실질적인 통제권을 직간접적으로 휘두르며 각종 불법 리베이트를 받았고 수억 달러에 달하는 연방정부와 뉴욕시정부의 공공입찰을 조작하여 부당이득을 취하는 등 공적인 영역까지 개입했다. 지간테는 시세 변동을 노린 부동산 투기에도 관심이 많아 방대한 부동산을 브롱스남동부공동체조직이란 단체를 이용하여 차명(借名)으로 보유했고 영화 대부에 등장하는 리틀 이탈리아의 산 제나로 축제, 대형 전시장 제이콥 재비츠 센터, 부둣가의 풀턴 어시장 같은 뉴욕 시의 상징적인 행사와 명소들도 갈취 대상으로 삼았으며 상술한 아마데오 에스포지토 (사진) 관련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정계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1988년 연방정부는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매년 1억 달러 이상에 달하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범죄수익 중 일부가 정기적으로 지간테 측에 상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범죄조직의_수입에_대해] 훗날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래리 맥셰인은 제노비스 패밀리의 사업이 여느 포춘 500대 기업 못지않게 성공적이었다고 묘사한다.[63]

2.4.21. 후계자 양성과 알 샤프턴 계좌사건

1988년 빈센트 지간테는 사법당국의 높아지는 관심 속 자신의 젊은 심복인 리보리오 벨로모를 거리 책임자(Street Boss)로 임명한 뒤 조직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다. 훗날 언론은 지간테의 후계자로 떠오른 벨로모를 건설에서 금융에 이르는 10억 달러 규모의 제국을 다스리는 마피아의 미래(Future of the Mafia)로 묘사한다. 같은 해 범죄 사업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된 5명의 피고인은 자신들의 범죄수익을 세탁하기 위해 유명 민권운동가이자 개신교 목사인 알 샤프턴의 전미청년운동(National Youth Movement 이하 NYM) 명의 계좌를 사용하려 했다. [NYM] 당시 검찰 측 공소장엔 지간테의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으로서의 역할이 적시되어 있었다. 한편, 마피아와의 관계가 꾸준히 지적되어 오면서도 종종 FBI의 조직범죄 수사를 돕는 등 이중생활을 이어오던 샤프턴은 이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고 이후 자신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마피아 수사에 적극 협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_샤프턴]

2.4.22. 행동대원 안토니오 디로렌조 처형

1988년 11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안토니오 디로렌조가 잠재적인 FBI 측 정보원으로 의심되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빈센트 지간테의 후계자가 되는 리보리오 벨로모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66]

2.4.23. FBI,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 피터 사비노 회유 성공

끈질기게 빈센트 지간테를 추적하던 연방정부는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 피터 사비노 (사진)를 수사하여 알아낸 범죄 혐의를 구실로 그를 FBI 측 정보원으로 회유시키는데 성공했다. 사비노는 패밀리 내에서 단순 추종세력(Associate) 신분이었지만 뉴욕시주택공사가 주관하는 창문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부두목(Underboss) 베네로 망가노 (사진)와 독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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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거리를 걷는 베네로 망가노와 피터 사비노의 모습
당시 FBI는 사비노를 이용해 망가노를 노렸는데, 패밀리 서열 2위인 망가노는 지간테와 독대할 수 있었고 많은 범죄 사업을 함께 공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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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 가운을 입은 빈센트 지간테와 의자에 앉아있는 베네로 망가노의 모습[67]
정보원이 된 사비노는 도청기를 차고 여러 마피아가 범죄를 논의하는 대화들을 비밀리에 녹음하여 수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얼마 뒤 동료들은 피터 사비노가 소유한 건물 지하실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체포되지도, 강도 높은 조사를 받지도 않는 모습을 보고 수사기관과 협력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빈센트 지간테는 사비노가 정보원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처형하지 않았다. 얼마 뒤 다른 패밀리의 주요 지도자들도 사비노를 의심하여 베네로 망가노에게 우려를 표했다. 이에 망가노가 "나도 그놈을 좋아하지 않지만 '턱'은 그놈을 좋아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답했다. 이후 사비노는 망가노와 대화하며 패밀리의 금기를 어기고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하기에 이른다.
사비노: 유니실 회사 기억하세요.
(Remember UNISEAL.)
망가노: 그래.
(Okay.)
사비노: 빈센트가 할 때가 됐다고 말했어요.
(Vincent had said when it came time to.)
망가노: 그 사람 언급하지 마.
(Don't mention that guy.)
사비노: 알겠어요 그분 언급 안 할게요. 좋아요. 아 그분이 그 일을 입찰하라고 말했어요.
(Okay, I won't mention him. Alright. Ah, he, had said to go out and bid the work.)
당시 망가노는 지간테의 이름이 언급되자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부두목인 그마저 지간테를 두려워한다는 정황을 나타내고 있었다.[68] 얼마 뒤 사비노가 진짜 정보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간테는 법원 증인석에 서지 못하도록 그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연방정부는 피터 사비노를 보호하기 위해 작전에서 철수시킨 뒤 가족들과 분리하여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적용했다. 이후 사비노의 아내에게 협박전화가 걸려왔는데, 상대방은 사비노를 밀고자로 부르며 그녀와 6살 아들의 목숨을 위협했고 "운전을 조심해라."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전화를 끊자마자 아들을 데리러 가기 위해 자신의 자동차로 달려갔지만 앞좌석에서 폭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뒤 수사기관에 이를 신고했다. 연방정부는 범인들이 전화를 걸어 미리 언질을 준 점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위치에 폭탄을 설치한 점으로 보아 범행 목적을 보복살인이 아닌 단순 위협으로 추정했는데, 당시 폭탄을 제거한 정부 측 관계자에 의하면 범인들은 사비노의 아내가 전화를 받고 있을 때 폭탄을 폭발시켜 자동차를 날려버리려고 했지만 도화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결국 미수에 그친 것으로 결론 내렸다.[69] 비록 폭탄은 터지지 않았지만 사비노의 아내를 위협한다는 마피아 측의 목적은 달성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 이후 사비노의 가족들도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적용받아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오랜 세월 살아온 뉴욕을 떠나야만 했다.

2.5. 1990년대

2.5.1. 마피아 창문 재판 시작

1990년 5월 상술한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피터 사비노 (사진)의 증언을 기반으로 마피아 창문 재판(Mafia Windows Case)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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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 요원들에 의해 연행되는 빈센트 지간테의 모습
하지만 1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낸 빈센트 지간테는 금세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고 당대 최고의 변호사인 제임스 라로사, 배리 스롤트닉 등을 변호인으로 선임한 뒤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장애를 주장하며 재판을 회피했다.

당시 연방정부는 하버드 대학의 토마스 구틸, 컬럼비아 대학의 도널드 클라인, 텍사스 대학의 윌리엄 리드, 코넬 대학의 윌포드 반 고프, 뉴욕 대학의 스탠리 포트노어, 뉴욕의과대학의 아브라함 할퍼른을 포함한 수많은 정신과의사에게 빈센트 지간테를 검사하게 했다. 그들은 지간테가 재판을 받거나 형을 받을 능력이 없다고 보증해 주었다. 정부의 요청으로 지간테를 검사한 정신과의사 중 한 명인 조너선 브로디에 의하면 "미국의 대통령이 누구입니까?"라는 간단한 질문을 받은 지간테는 머리를 긁적이며 "알아야 하는데... 정말로 답을 알아야 하는데..."라고 중얼대다 한참 뒤 " 부시! 조지 부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과로에 시달린 검찰 측 대표 찰스 로즈 (사진) 연방검사가 훗날 건강 악화를 이유로 퇴직한다. 결국 지간테를 정점으로 하는 마피아 창문 재판의 피고인은 모두 15명이었지만 정작 지간테는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장애를 이유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도미닉 칸테리노 (사진)는 심장질환을 이유로 각각 재판에서 배제되었다.[70] 그 이듬해 마피아 창문 재판의 피고인 중 하나인 노조 간부 존 모리시는 그가 정부 측 증인이 될 것을 우려한 마피아 측에 살해되어 뉴저지 주 주택 단지에 암매장된 시신으로 발견된다.

2.5.2. 존 고티와의 대립으로 인한 제3차 콜롬보 항쟁 발발

폴 카스텔라노 제거 하극상에 대한 외압을 극복하고 감비노 패밀리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받은 존 고티는 1990년을 전후로 마피아 위원회 주도권을 두고 빈센트 지간테와 대립했다. 당시 고티는 루케시 패밀리를 자신의 편으로 확보한 지간테에 대항하여 도니 브래스코 작전의 여파를 수습하고 위원회에 재진입한 보난노 패밀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2:2 상황에서 위원회의 캐스팅보트를 쥔 조직은 콜롬보 패밀리였는데, 콜롬보 패밀리 두목(Boss) 카마인 페르시코 (사진)는 예전부터 고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에 고티는 콜롬보 패밀리를 확실한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콜롬보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비토리오 오레나 (사진)로 하여금 당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페르시코를 끌어내리고 두목이 되라고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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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고티와 비토리오 오레나의 회동 모습[71]
이후 오레나의 콜롬보 패밀리 두목 등극 여부를 결정하는 위원회 안건은 고티의 계획을 간파한 지간테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이후 위원회를 설득해야 될 필요성을 느낀 오레나는 콜롬보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카마인 세사에게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두목 등극 지지 여부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세사는 오레나가 지시한 조사를 하는 대신 그의 하극상 계획을 수감 중인 두목에게 보고했고 격분한 페르시코는 오레나 제거를 지시했다. 이후 1991년 6월 21일 오레나가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자신의 자택 앞에 대기 중인 작업조를 발견한 뒤 도주한 사건을 시작으로 콜롬보 패밀리는 페르시코를 따르는 파벌과 오레나를 따르는 파벌로 분열되어 서로를 몰살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대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지간테와 고티의 위원회 주도권 대립을 원인으로 약 2년 동안 12명이 살해되고 18명이 실종되며 반대 파벌 구성원과 사업체를 향해 수많은 폭행, 손괴, 방화 등 폭력행위가 벌어지는 제3차 콜롬보 항쟁이 발발한다.[72]

2.5.3. 존 고티 구속 기소와 그에 대한 마지막 보복: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 에드워드 리노와 행동대원 바르톨로뮤 보리엘로 처형

1990년 12월 존 고티 보석 없이 구속 기소되자 그의 아들 존 고티 주니어 (사진)가 아버지의 대리인이 되어 감비노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았다. 당시 빈센트 지간테는 풋내기에 불과했던 고티 주니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이 거리 책임자(Street Boss)로 임명한 리보리오 벨로모 등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간부들에게 고티 주니어와 직접 만나 사업을 논의하는 자리를 최소화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지간테는 고티 구속을 전후로 마피아 위원회의 허가 없이 실행된 폴 카스텔라노 제거에 대한 그의 마지막 복수이자 그가 고티에게 가한 마지막 타격으로 여겨지는 지시를 내린다. 이후 카스텔라노를 살해한 총잡이 중 한 명이었던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에드워드 리노 (사진)와 고티의 운전기사였던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바르톨로뮤 보리엘로 (사진)가 살해되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보리엘로는 카스텔라노 제거 계획의 설계자였던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데치코 (사진)가 살해된 날인 1986년 4월 13일로부터 정확히 5년 뒤인 1991년 4월 13일에 살해되었는데, 당시 고티는 아끼던 부하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영화 고티(2018)에서 묘사한 리노와 보리엘로 살인사건(gif). [에드워드_리노_살인사건과_바르톨로뮤_보리엘로_살인사건]
바르톨로뮤 보리엘로 살인사건을 다룬 뉴스

2.5.4. 추종세력 랄프 데시몬, 의심만으로 처형

1991년 6월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랄프 데시몬이 FBI 측 정보원으로 의심되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빈센트 지간테의 후계자가 되는 리보리오 벨로모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74]

2.5.5. 피터 사비노 암살 지령

빈센트 지간테는 제노비스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제임스 아이다 (사진)에게 루케시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알폰스 다르코 (사진)와 협력하여 배신자 피터 사비노 (사진)를 1991년 7월까지 하와이에서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 하지만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적용받아 연방정부의 엄중한 보호를 받고 있던 사비노를 살해하는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2.5.6. 추종세력 안젤로 상지올로 처형

1992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앤서니 팔룸보 (사진)가 빈센트 지간테에게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안젤로 상지올로가 도박 사업의 수익을 횡령하고 있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이후 상지올로의 사촌이자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인 안젤로 프리스코 (사진)의 부하들이 브롱스에 위치한 사교클럽으로 상지올로를 유인한 뒤 그를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75][76]

2.5.7. 마피아 창문 재판 최종 판결: 피고인 8명 중 3명 유죄

1993년 마피아 창문 재판(Mafia Windows Case)의 최종 판결까지 간 8명의 피고인 중 제노비스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베네로 망가노 (사진)가 포함된 3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나머지 5명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얼마 뒤 망가노는 징역 15년 8개월과 벌금 10만 달러를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이 재판 이후 마피아와 결탁한 창문회사 소유주들과 미국 최대 노동조합 연맹인 AFL–CIO 소속 철강노조 간부들도 장기징역형이 선고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하지만 빈센트 지간테의 창문 사업 혐의를 다루는 재판이 시작될 조짐은 아직 없었다. [베네로_망가노의_대리인]

당시 조직범죄와의 전쟁 캠페인을 수행하던 뉴욕동부지구 연방지방검찰청은 뉴욕시주택공사에서 주관한 1억 4200만 달러~1억 9100만 달러 사이의 방대한 공공입찰을 약 12년 동안 조작하여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의 1990년 마피아 창문 재판과 감비노 패밀리 두목(Boss) 존 고티가 포함된 3건의 살인을 공모하였고 필라델피아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안토니오 카포니그로 (사진)가 포함된 6건의 살인을 지시한 혐의의 1993년 살인공모 및 살인교사 재판 등 여러 혐의로 빈센트 지간테를 겨냥하고 있었다.[78]

2.5.8. 제3차 콜롬보 항쟁 종결

1994년 빈센트 지간테는 마피아 위원회 회합에 본인 대신 제노비스 패밀리 거리 책임자(Street Boss) 리보리오 벨로모를 참석시켰다. 그 회합에서 벨로모를 위시로 한 당대 마피아 지도자들은 1990년대 초반을 강타한 제3차 콜롬보 항쟁을 종결시키고 카마인 페르시코 (사진)의 콜롬보 패밀리 통제권을 인정했다. 그 회합의 또 다른 참석자였던 보난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비탈레는 훗날 정부 측 증인이 된 뒤 "당대 위원회는 제노비스 패밀리, 특히 벨로모가 지배했다."라고 회상한다.

2.5.9. 조셉 멀리노를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실권자로 인정

1995년 빈센트 지간테는 제노비스 패밀리 거리 책임자(Street Boss) 리보리오 벨로모에게 당대 필라델피아 패밀리 내부 항쟁에서 승리하여 조직의 실질적인 주도권을 쥐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케시 패밀리의 반대에 부딪혀 마피아 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조셉 멀리노의 지위를 인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제노비스 패밀리의 지원을 등에 업은 멀리노는 명실상부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실권자가 될 수 있었다. #

2.5.10. 재판 중인 부하들의 '유죄인정' 행위를 인정

빈센트 지간테는 유죄인정을 적극 활용하여 1980~90년대 조직범죄와의 전쟁 시기에 기소된 부하 조직원들의 형량을 축소시켰다. 대표적으로 당대 제노비스 패밀리 거리 책임자(Street Boss) 리보리오 벨로모는 유죄인정 전략을 채택하여 다소 감형된 형량을 선고받았는데, 이를 본 제노비스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제임스 아이다 (사진)가 지간테에게 벨로모 처형을 건의했지만 지간테가 아이다의 요청을 기각하면서 벨로모의 손을 들어준 사례가 있다.[79] 이러한 지간테의 모습은 일체의 사법거래를 금지하여 기소된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을 장기징역형에 직면시킨 존 고티와 대비된다.

2.5.11. 정신건강이 재판에 적합하다는 판단과 두 번째 심장수술

1996년 8월 뉴욕동부지구 연방지방법원은 최초 기소로부터 무려 6년 만에 빈센트 지간테의 정신건강이 재판을 받기에 적합한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1960년대부터 수십여 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법망을 피해온 지간테는 언론에 의해 미국 마피아계 두목들의 두목(Boss of all Bosses in American Mafia)으로 묘사되었고 연방정부는 그를 미국 암흑가의 정점인 마피아 위원회 의장(Chairman of the Mob’s Commission)으로 지목했다.
빈센트 지간테 재판을 다룬 뉴스

하지만 12월에 빈센트 지간테가 두 번째 심장수술을 받으면서 재판은 그 이듬해로 또 연기되었다.[80] 이런 장외 공방이 약 7년 넘게 벌어지는 동안 지간테는 자유인 신분으로 변함없이 패밀리를 관리했다.

2.5.12. 뉴욕동부지구 연방지방법원에서 1심 공판 시작

1997년 6월 25일 뉴욕동부지구 연방지방법원에서 빈센트 지간테 재판의 1심 공판절차가 시작되었다. 재판관은 잭 와인스타인 연방판사 (사진)였고 검찰 측 대표는 앤드루 와이스먼 연방검사 (사진)였으며 지간테 측 변호인단의 대표는 마이클 마리나치오 변호사 (사진)였다. 배심원단은 남성 4명과 여성 8명으로 구성되었고 그들의 신원은 신변 안전과 매수 방지를 위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이에 지간테는 재판을 조작하기 위해 배심원들의 신원을 알아낼 사람을 고용했지만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파일:Gigante Trial.jpg
빈센트 지간테 재판을 묘사한 그림

당시 검찰 측에선 자신들이 수집한 250개가 넘는 증거와 마피아를 배신한 내부 증인단으로 맞섰다. 첫 번째 증인은 마피아 창문 재판(Mafia Windows Case)과 관련해 조직으로부터 처형 대상이 되어 12발의 총격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피터 치오도 (사진)였다. 그는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 마피아 생활을 청산하고 정부 측 증인이 되었는데, 이후 침묵의 계율 오메르타를 어긴 것에 대한 마피아 측의 보복으로 여동생이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고 삼촌이 살해되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꿋꿋이 법원에 출석하여 자신은 빈센트 지간테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으로 언급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증언했지만 지간테와 직접 사업을 논의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두 번째 증인은 징역 45년 판결의 감형을 위해 마피아 생활을 청산하고 정부 측 증인이 된 필라델피아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필립 레오네티 (사진)였다. 그는 과거 패밀리의 두목이었던 본인의 삼촌 니코데모 스카르포 (사진)가 중요한 의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간테를 만난 사실이 있다고 증언했다. 레오네티는 당시 마피아 위원회를 대표하는 지간테가 1980~81년에 벌어진 필라델피아 패밀리 내부 항쟁과 관련된 책임 있는 모든 사람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본인의 삼촌이 이를 수용해 여러 관계자가 처형되었다고 밝혔다.[81] 하지만 레오네티 역시 지간테를 직접 만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필립 레오네티의 빈센트 지간테 재판 증언을 다룬 뉴스

세 번째 증인은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와의 불화로 마피아 생활을 청산하고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였다.
헬기를 타고 빈센트 지간테 재판에 출석하는 살바토레 그라바노의 모습
그라바노는 정부 측 증인 중 유일하게 지간테와 직접 사업을 논의한 인물이었지만 지간테 측 변호인단의 심문 전략에 말려들어 진술 신빙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네 번째 증인은 루케시 패밀리 두목 비토리오 아무소 (사진)로부터 처형 대상이 된 뒤 마피아 생활을 청산하고 정부 측 증인이 된 루케시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알폰스 다르코 (사진)였다. 그 역시 지간테의 정신질환이 연기라고 증언했지만 자신과 지간테가 직접 사업을 논의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다섯 번째 증인은 살인 혐의의 감형을 위해 마피아 생활을 청산하고 정부 측 증인이 된 필라델피아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유진 밀라노였다. 그는 필라델피아 패밀리 내부 항쟁과 관련된 증언을 했지만 지간테와 그 항쟁을 연관 짓는 정보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빈센트 지간테 재판이 진행되면 될수록 정부 측 증인단의 증언들은 신빙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간테 재판의 가장 중요한 증인은 앞서 소개한 피터 사비노였다. 상술했듯 그는 고위 간부는커녕 정규조직원(Made Member)도 아니었지만 제노비스 패밀리 출신이라 내부 사정에 밝았으며 무엇보다 도청기를 차고 여러 범죄 공모를 직접 녹음한 당사자였다. 건강이 좋지 않아 다른 지역의 비밀 장소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유선상으로 증언대에 선 여섯 번째 증인 사비노는 패밀리의 입찰담합과 갈취 계획이 얽힌 방대한 네트워크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특히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제라드 파파 (사진) 살인사건의 내막과 더불어 마피아가 뉴욕시주택공사에서 주관한 창문 교체 계약을 통해 수백만 달러 상당의 불법 리베이트를 받은 내막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직접 녹음한 마피아 간 대화들을 재생했다. 한편, 지간테는 재판 내내 머리를 흔드는 등 정신질환자 연기를 멈추지 않았고 정부 측 증인들의 증언이 이루어지는 동안 때때로 그들을 노려보았지만 이내 관심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아 잠을 잤다.

피터 사비노 (사진)의 증언이 종료된 뒤 일곱 번째 증인으로 제노비스 패밀리 부두목 베네로 망가노 (사진)가 법정에 소환되었다. 그는 빈센트 지간테 재판의 다른 정부 측 증인들과 달리 마피아를 배신하지 않은 인물로 상술했듯 1993년에 징역 15년 8개월을 선고받고 연방교도소에 복역 중이었다. 망가노는 협력하면 감형을 해주겠다는 연방정부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심문하는 연방검사를 향해 "(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명시된) 수정헌법 제5조에 의거해 증언을 거부하겠소."라는 답변만 반복했다. 그는 이후에도 비슷한 심문을 계속하는 검찰 측에 "뭘 원하는 거요? 차라리 날 총으로 쏘시오! 어떤 심문에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수작들은 이제 지겨워.(What do you want to do? shoot me! but I'm not going to answer any questions. I'm tired of these charades.)"라고 대답하며 끝까지 오메르타를 지켰다. 한편, 망가노가 협조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있던 검찰 측에서는 그가 보여주는 충성심이 바로 지간테가 범죄조직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잘 나타낸다고 역설했다.

검찰 측 주장에 맞선 지간테 측 변호인단은 자신들의 의뢰인이 정신질환 때문에 뇌물을 받거나 입찰 조작을 하거나 살인을 지시하는 등의 정교한 계획을 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마피아 행동대원들에게 어떠한 명령도 내릴 수 없다고 변론했다. 나아가 정부 측 증인들은 사이코패스와 거짓말쟁이들이며 정부에게 호의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꾸며낸 것뿐이라고 비난했다. 실제로 검찰 측이 증거로 제출한 도청 자료 중엔 지간테가 범죄를 논의하는 육성이 없었다. 거기엔 딸을 뉴욕 대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불평이나 애인과 나누는 파스타 이야기가 전부였다. FBI는 수십 년간 지간테를 감시했지만 단 한차례도 그가 범죄 사업에 대해 얘기하는 순간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론에 빈센트 지간테의 입장을 전달하는 루이스 지간테 신부의 모습

2.5.13. 1심 판결: 6건의 살인교사 무죄, 3건의 살인공모와 부당이득 유죄

1997년 7월 빈센트 지간테 재판의 모든 공판절차가 종료되자 익명의 배심원단은 3일 동안 16시간의 심리를 거친 끝에 필라델피아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안토니오 카포니그로 (사진)가 포함된 6건의 살인교사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지만 감비노 패밀리 두목(Boss) 존 고티,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진 고티 (사진), FBI 측 정보원 피터 사비노 (사진)에 대한 살인을 공모한 혐의와 뉴욕시주택공사에서 주관한 방대한 공공입찰을 조작하여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에 대해선 유죄판결을 내렸다. 평결 직후 배심원단은 연방보안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급히 법원을 떠났다. 5년 전 두목의 유죄판결에 분노한 마피아 정규조직원(Made Member)과 추종세력(Associate)들의 폭동이 일어났던 존 고티 재판과 달리 지간테 재판은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1심 유죄판결로 신변이 확보된 지간테는 우수한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버트너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어 12월에 있을 형량 선고를 기다렸다.[82] 한편, 지간테를 2개월 동안 진찰한 버트너 연방교도소 의료진들은 그를 일반 교정시설이 아닌 전문 의료시설에 수감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얼마 뒤 말기 암 환자였던 사비노는 증언이 있은지 불과 3개월 만에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는데, 이를 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지간테가 4개월만 더 시간을 끌었더라면 전체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2.5.14. 1심 선고: 2건의 살인공모 면소, 징역 12년 벌금 125만 달러

1997년 12월 18일 잭 와인스타인 연방판사 (사진)는 법원에 운동복 바지를 입고 온 빈센트 지간테에게 "부적절한 의복을 입고 온 피고인들을 위해 비치해놓은 옷 저장소가 있으니 가서 정장을 꺼내 입기 바랍니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지간테가 말뜻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며 "좋은 아침입니다.(Good morning.)"라고 대답하자 어쩔 수 없이 선고를 진행했다. 이후 와인스타인 연방판사는 고티 형제 살인을 공모한 혐의의 공소시효가 도과한 점을 지적하며 기존 유죄판결을 기각한 뒤 지간테가 앓고 있는 심장질환과 고혈압 등 건강 문제를 고려했다고 밝히며 징역 12년과 벌금 125만 달러를 선고했다.[83] 당시 이 판결은 선고 지침에 명시된 징역 22~27년이나 연방검찰이 구형한 징역 30년에 비해 훨씬 가벼운 것이었다. 판결 직후 와인스타인 연방판사는 "마침내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악랄한 범죄의 폭정 끝에 피고인은 인생의 황혼기에 궁지에 몰렸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지간테의 석방 예정일은 10년 동안 성실히 복역하면 출소한다는 단서 조항에 따라 79세가 되는 2007년으로 정해졌다.[84] 재판관의 선고를 듣는 지간테는 음침하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고 1심 공판절차에서 법정에 설치된 CCTV를 통해 피터 사비노 (사진)의 증언이 이루어진 사실은 피고인과 증인의 직접적인 대면(Face-to-Face Confrontation)이 불발된 것이며 이는 수정헌법 제6조 「자신에게 불리한 증인과 대질할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는 이유 등으로 제2순회 연방항소법원에 항소를 제기했다. 원래 지간테 재판의 검찰 측 대표였던 찰스 로즈 (사진) 연방검사는 지간테 유죄판결이라는 숙원을 이루고 얼마 뒤 사망했다. [앤드루_와이스먼]
빈센트 지간테 유죄판결을 다룬 뉴스

형량을 선고받은 빈센트 지간테는 사법당국의 엄중한 계호를 받으며 텍사스 주 포트워스 연방교정의료센터 등으로 대표되는 전문 의료시설에 수감되었다. 제복공무원들의 계호하에 수행원들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지간테의 모습(gif). 지간테가 대부분의 형기를 복역한 연방교정의료센터들은 다른 교정시설에 비해 처우가 자유로운 곳이었는데, 매달 평일 9회 혹은 평일 1회 및 주말 4회 접견이 보장되었고 모든 접견은 몇 시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다. 여기에 매달 300분의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으며 편지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지간테는 이런 환경에서 자신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변호인이나 주치의를 통해 본인의 지시를 외부 대리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변함없이 패밀리를 관리했다.[86][87] 한편, 지간테는 FBI와 교정당국의 집중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에 특별구역(Special observation section)에 수감되었고 동료 수용자들은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기며 숭배했다. 특히 담당 교도관의 증언에 의하면 지간테는 가끔 정신질환자 연기를 중단하고 자신의 이부자리를 직접 깔거나 전직 권투 선수답게 70대 고령의 나이에도 섀도 복싱을 연습했다고 한다.[88] 하루는 담당 교도관이 "다른 수용자들이 당신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하거나 부탁을 들어달라고 할까 봐 걱정됩니까?"라고 지간테에게 묻자 정신질환자 연기를 중단한 그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고 또렷하게 대답했다.[89]

2.5.15. 미국 탐사보도 프로그램 '60분', 빈센트 지간테 회차 방영

1998년 미국을 대표하는 탐사보도 프로그램 CBS 60분에서 빈센트 지간테를 다룬 회차를 방영했다. 같은 해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지간테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빈센트 지간테 다큐멘터리[90]

2.5.16. 행동대장 대행 랄프 코폴라 처형

1998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 대행(Acting Caporegime) 랄프 코폴라 (사진)가 실종되었다. 당시 실종사건과 빈센트 지간테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을 제거하는 데에는 당연히 패밀리의 정점인 지간테의 승인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훗날 지간테의 후계자가 되는 리보리오 벨로모가 코폴라 살인교사 혐의로 기소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랄프_코폴라_실종사건]

2.5.17. 2심에서 원심판결을 유지

1999년 빈센트 지간테 재판의 2심을 맡은 제2순회 연방항소법원은 지간테 측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판결을 유지했다. 이에 지간테 측은 연방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했다.

2.6. 2000년대

2.6.1. 3심에서 원심판결을 확정

2000년 빈센트 지간테 재판의 3심을 맡은 연방대법원은 지간테 측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같은 해 지간테의 가족들은 그를 뉴욕 시로 이송해 주치의가 실시하는 외부건강검진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검찰 측에선 지간테가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받고 있는 치료는 지난 30여 년간 그의 주치의로부터 받아온 치료보다 더욱 우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대 의견을 냈다. 결국 지간테 측의 요청이 기각되면서 외부건강검진은 무산되었다.

2.6.2. 수감 이후 대리인들

빈센트 지간테가 수감된 뒤 그의 심복 도미닉 시릴로, 상담역(Consigliere) 로렌스 덴티코 (사진), 형 마리오 지간테 (사진) 같은 대리인들이 차례로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으며 많은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여전히 빈센트 지간테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이자 최고의사결정자(Top Decision Maker)였다.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조지 바론은 빈센트 지간테 같은 마피아 두목이 교정시설에서도 패밀리를 관리할 수 있냐는 질문을 받자 "가능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빈센트 지간테는 죽는 날까지 패밀리의 두목이자 두려움의 대상이고 성직자 동생을 통해 자신의 지시를 외부에 전달한다."라고 대답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조지 아나스타시아는 "빈센트 지간테가 누리는 교정시설 내 처우는 그가 패밀리를 관리하는 데 있어 충분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물론 일상적인 조직 관리는 지정된 대리인이 맡고 있겠지만 몇몇 중요한 사안은 두목 대행 보다 더 상부인 최고위 인사(빈센트 지간테)가 결정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는 대기업의 CEO와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빈센트 지간테의 아들 앤드루 지간테 (사진)는 정기적으로 라과디아 공항에서 댈러스-포트워스 국제공항까지 가는 항공기를 타고 가 아버지를 접견했다. 당시 마피아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아닌 일반인 신분이었던 그는 전과가 없었기 때문에 접견 제한 대상이 아니었고 조직 계보에 올라와 있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욱 은밀하게 아버지의 각종 지시를 패밀리 측에 전달할 수 있었다. [빈센트_지간테의_대리인들]

빈센트 지간테의 옥중경영으로 인한 두목 대행 체제로 21세기를 맞은 제노비스 패밀리는 노동 공갈 같은 기존의 전통적인 범죄 사업을 유지함과 동시에 새로운 범죄 수법들을 성공적으로 도입했다. 대표적으로 1998년에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2명이 러시아 레드 마피아계 최고 거물인 셰묜 모길레비치 (사진)의 한 측근과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 미국에서 발생한 유독성 폐기물을 러시아에 무단으로 투기하는 국제범죄 계획을 공모했고 바카라 스포츠 배팅 같은 도박업의 영역을 중남미 해외 사이트를 이용한 온라인 공간으로 확장시켰으며 기존에 시칠리아 마피아와 함께하던 국제 마약 사업을 점차 은드랑게타 같은 본토 조직과의 연계로 대체했다. 여기에 도시의 일부 지역에서 새롭게 생겨난 대마초 시장을 통제했고 수백만~수천만 달러 상당의 펌프 앤드 덤프(Pump and Dump) 주가 조작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잘 알려진 신종 모기지저당증권 사기 같은 금융범죄도 적극 활용했으며 라틴 킹스 같은 스트리트 갱스터들과 화폐 위조 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패밀리가 이러한 사업들을 통해 벌어들인 모든 범죄수익의 일부는 변함없이 지간테 측에 상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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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94]

2.6.3. 수감 중에도 실질적 두목이었던 증거들

빈센트 지간테가 수감 중에도 실질적으로 패밀리를 관리했다는 사실은 1998년 다른 마피아 정규조직원(Made Member)을 자신의 재판에 증인으로 요청했다고 알려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로사리오 갠지 (사진)를 지간테가 살해하라고 지시한 일화를 통해 잘 알 수 있다.[95] 당시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간부들이 갠지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적극적으로 해명하여 지간테의 오해가 풀린 뒤에야 처형 명령이 취소되었다.

특히 2000년 수사 과정에서 수집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앨런 롱고 (사진)의 녹취된 육성을 보면 "비토 (제노비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빈센트 (지간테)는 존재한다. 우리가 여기 있음으로써."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다.[96] 동시기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 살바토레 아파로 (사진)는 치명적인 폭력을 행사하라는 지시는 모두 두목(Boss)인 지간테로부터 내려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항상 두목을 위해 하는 거야. 자네가 누굴 죽이든 상관없어. 그건 두목으로부터 내려온 지시니까."라고 얘기했다.

또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폴 제라시는 조직원으로 위장한 FBI 측 정보원에게 "여전히 서피코(제노비스 패밀리 거리 책임자 'Frank Serpico')가 있긴 하지만 그분이 결정권자는 아니야. (턱을 만지며) 이분이 결정권자지."라고 얘기했다. 동시에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파스칼레 팔세티 (사진)는 "아들(앤드루 지간테)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그건 (턱을 만지며) 이분의 말이야. 누가 도전하겠나?"라고 얘기했다.

2001년 익명의 FBI 요원은 "우리가 다른 말을 들을 때까지 그(빈센트 지간테)는 여전히 두목입니다."라고 얘기했다.
2001년에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조지 바론이 밝히길, 플로리다 항구에서 패밀리 사업을 하던 자신은 빈센트 지간테의 아들 앤드루 지간테 (사진)와 마찰이 있었고 결국 자신이 선반 위에 올라갔다(Put on the shelf)고 얘기했다. 그 말은 마피아 세계에서 영원히 제명되진 않되, 일정 기간 권력이 박탈되고 기존 사업에서 배제된다는 뜻이다.[97] 그렇게 조직으로부터 파문된 바론에게 예전에 빌려준 돈을 받으러 뉴욕 시로 돌아오라는 의심스러울 만큼 자상한 패밀리의 제안이 있었다. 그 제안은 바론의 오랜 친구인 노조 간부 지미 캐신을 통해 전달되었는데, 이는 가까운 사람을 통해 처형 대상자를 유인하는 전형적인 마피아 수법이었다. 실제로 바론을 아꼈던 캐신은 "오지 말게 자넬 죽일 거야. 모두가 알고 있어."라고 경고했다. 얼마 뒤 같은 메시지가 옛 친구의 아들에 의해 재차 전달되었다. 바론은 지인들의 경고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FBI에 갈취 혐의로 체포되었다. 심사숙고를 거친 그는 조직 세계에 더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정부 측 증인이 되어 본인이 아는 범죄 정보들을 수사기관에 제공한 뒤 보호를 받았다. 이후 "난 살고 싶었다.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싶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겼다.[98] 이 일화들은 빈센트 지간테가 수감 중에도 제노비스 패밀리의 상징적인 두목이자 최고의사결정자(Top Decision Maker)였음을 보여준다.

2.6.4. 사법방해로 추가 기소, 이후 정신질환자 연기 인정

2002년 빈센트 지간테는 상술한 마피아 변절자 조지 바론이 제공한 정보 등을 토대로 정신질환을 가장한 사법방해 및 공갈 혐의로 추가 기소되었다. 이듬해 그는 자신의 정신질환자 행세가 모두 거짓이었음을 인정한다. 상술했듯 빈센트 지간테의 아들 앤드루 지간테 (사진)는 마피아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아님에도 아버지의 각종 지시를 패밀리 측에 전달하다 범죄 사업에 깊이 연루되어 다른 조직원들과 함께 기소된 상태였는데, 재판에서 패소할 경우 최대 징역 20년까지 선고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빈센트 지간테가 아들의 형량 축소를 위해 유죄를 인정하면서 약 34년 동안의 정신질환자 연기가 막을 내렸다. 더불어 이 재판을 통해 수감 중인 지간테가 대도시해양관리도급업자협회(Metropolitan Marine Maintenance Contractors Association 이하 MMMCA)를 조종하여 미 동부지방의 부둣가를 암암리에 통제하는 등 최소 3000만 달러 상당의 범죄수익을 창출한 사실도 밝혀졌다. # [MMMCA]

당시 빈센트 지간테는 연방검찰과의 협상을 통해 정신질환을 가장한 사법방해 혐의를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공갈 혐의와 아내, 애인, 막냇동생의 사법방해 혐의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받아냈다. 이 수지맞는 사법거래를 두고 뉴욕 타임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셀윈 랍은 '보통 유죄인정을 고려조차 하지 않는 마피아 두목(Boss)으로서는 전례 없는 항복'이라고 평했다. 지간테 측 변호인단의 대표 벤자민 브리프만 변호사 (사진)는 "모두가 그렇듯 제 의뢰인 역시 인생의 어느 지점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너무 늙고 아프고 지쳐서 싸울 수 없는 지점 말입니다."라고 얘기했다. [벤자민_브리프만]

사건을 담당한 뉴욕동부지구 연방지방검찰청의 로슬린 마우스코프 연방검사장 (사진)은 "빈센트 지간테는 교활한 사기꾼이었고 우리 중 몇몇은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연기는 수십 년 동안 행해졌지만 오늘 끝났습니다."라고 얘기했다. [로슬린_마우스코프] 당시 검찰 측에선 공판절차에 대비해 빈센트 지간테가 교정시설에서 비밀스럽게 범죄 사업을 관리하는 여러 육성과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다양한 영상을 증거로 제출할 예정이었지만 사법거래 때문에 사용할 일은 없었다. 예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파란색 수의를 입은 수척한 모습으로 고향 법정에 들어선 빈센트 지간테는 더 이상 정신질환자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아들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가족들에게 손키스를 날렸고 자신을 도와준 변호인들과 악수를 했으며 재판관 레오 글래서 (사진) 연방판사에겐 "신의 가호를 빕니다.(God bless you.)"라는 덕담을 건넸다. 결국 빈센트 지간테는 3년의 형량이 추가되었고 같은 날 유죄를 인정한 앤드루 지간테는 최대 형량 보다 훨씬 낮은 징역 2년과 몰수 200만 달러를 선고받았다. 훗날 빈센트 지간테의 딸 리타 지간테는 거짓의 짐을 내려놓은 아버지가 '좋아 이제 난 쉴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는 소감을 밝힌다. 하지만 재판 결과와 별개로 빈센트 지간테는 교정시설에서의 정신질환자 연기를 완전히 중단하진 않았고 대리인을 통해 패밀리를 관리하는 것 또한 변함없었다.

2.6.5. 행동대장 아돌포 브루노 처형

2003년 11월 뉴잉글랜드 지방의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아돌포 브루노 (사진)가 살해되었다. 당시 살인사건과 빈센트 지간테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패밀리의 간부인 행동대장을 처형하는 데에는 당연히 패밀리의 정점인 지간테의 승인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돌포_브루노_살인사건]

2.6.6. FBI 잠입 요원 호아킨 가르시아에 현상금

2005년 8월 FBI는 뉴욕 마피아가 자신들의 직원인 호아킨 가르시아의 목에 25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는 첩보를 확인했다. 가르시아는 2002~05년경 잭 팔콘이란 가명으로 감비노 패밀리 내부에 약 3년간 잠입하여 당대 패밀리 수뇌부가 포함된 32명의 마피아를 기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요원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FBI는 뉴욕 5대 패밀리의 두목(Boss) 및 수뇌급 인사 전원에 요원들을 파견하여 만약 가르시아를 살해할 경우 그 당사자는 사형선고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경고를 전했다. 당시 FBI가 방문한 감비노 패밀리 수뇌부는 니콜라스 (사진) & 조셉 (사진) 코로조 형제였고 제노비스 패밀리 수뇌부는 수감 중인 두목 빈센트 지간테를 필두로 그의 심복들인 마리오 지간테 (사진), 도미닉 시릴로, 매튜 이아니엘로 (사진)였다. 한편, 감비노 패밀리의 두 사람과 제노비스 패밀리의 네 사람을 비롯하여 FBI의 방문을 받은 12명의 뉴욕 마피아 수뇌부 대부분은 "우리가 그런 짓(요원을 살해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 않소.(You know we don’t do that sort of thing.)"라고 말하며 첩보 내용을 부인했지만 그중 한 사람은 1990년대 마피아 창문 재판(Mafia Windows Case) 당시 정부 측 증인이 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피터 치오도 (사진)의 여동생이 보복 당한 사례를 괜스레 언급하며 요원들을 위협했다고 한다. #[103]

2.6.7. 마지막 처형: 행동대장 대행 로렌스 리치

2005년 10월 7일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 대행(Acting Caporegime) 로렌스 리치 (사진)가 실종되었다. 다음 달 리치는 약 6주 동안 방치된 자동차 트렁크에서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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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리치의 시신이 발견된 현장을 살펴보는 수사기관 관계자들의 모습
비록 범인은 검거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빈센트 지간테가 마지막으로 승인한 조직 내 처형으로 여겨진다. 당시 갈취 및 송금 사기 혐의로 기소된 리치는 유죄인정을 통한 징역형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는데, 그 과정에서 패밀리 수뇌부와 마찰을 빚다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을 제거하는 데에는 당연히 패밀리의 정점인 지간테의 승인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조지 바론은 리치가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정보원으로 변절하여 패밀리 수뇌부와 그 가족들이 연루된 항만노조의 부패를 자세히 증언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처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104] 리치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 피고인 소재불명 때문에 궐석재판으로 치러진 선고공판에서 그와 2명의 공동피고인은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리치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105] 당시 한 FBI 관계자는 "제노비스 패밀리는 우리더러 찾으라는 듯 재판 중인 피고인을 자동차 트렁크에 던져놓은 뒤 '이제 어떻게 나올 거야?'라고 묻습니다. 2005년인데 아직도 자동차 트렁크에서 시신이 발견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106] [로렌스_리치_살인사건]

2.6.8. 몸 상태 급격히 악화, 이후 사망

2005년 11월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복역하던 빈센트 지간테는 갑자기 호흡 곤란과 산소 부족을 호소했고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에 텍사스 주 집중간호시설로 이송된 그는 약 1개월 동안 전문 의료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건강을 회복한 뒤 원래 있던 연방교정의료센터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일 뒤인 2005년 12월 19일 새벽 5시 15분에 교정시설 직원들이 생체반응이 없는 상태의 지간테를 발견하고 즉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노쇠한 마피아 두목(Boss)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108][109] 뉴욕 타임스 매거진은 77세를 일기로 사망한 지간테의 소식을 전하며 금세기 최후의 위대한 마피아(Last great mafioso of the century)로 고인을 묘사했다. 국내 제도권 언론사 중엔 세계일보에서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마피아 대부 옥사」라는 제목으로 사망 소식을 전했다. #
빈센트 지간테 사망을 다룬 뉴스
지간테는 2010년 6월 28일에 82세의 나이로 석방될 예정이었지만 고질적인 심장질환을 앓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던 탓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찍이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제리 카피시는 지간테가 장수할 것으로 예상해 "'턱'은 다시 거리로 돌아와 패밀리를 관리할 것입니다."라는 발언을 했지만 이 예상은 결국 빗나갔다.

빈센트 지간테의 장례식은 뉴욕 타임스에서 취재했다. # 라이벌 존 고티의 장례식은 부하 조직원들이 총출동하여 100대가 넘는 자동차가 동원되는 등 아주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빈센트 지간테의 장례식은 생전의 그가 추구한 익명성에 걸맞게 운구차 1대와 리무진 3대만 동원되었고 비교적 간소하게 치러졌다. 빈센트 지간테를 추모하기 위해 뉴욕 시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당을 거의 가득 메운 조문객들은 그의 가족, 친척, 지인 등 일반인이 대다수였고 제노비스 패밀리 측에선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아온 형 마리오 지간테 (사진)를 필두로 고인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몇몇 원로 조직원만 참석했다. 그 밖에 다른 폭력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생전의 빈센트 지간테가 마피아는 드러나게 행세하면 안 되는 비밀결사라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FBI는 두목의 장례식이 제노비스 패밀리의 계보를 파악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믿었지만 이러한 비밀주의 때문에 새로 입수할 정보가 거의 없었다. 빈센트 지간테의 장례미사는 막냇동생 루이스 지간테 신부 (사진)가 집전했다.[110] 장례 절차가 끝난 뒤 빈센트 지간테의 시신은 그린우드 묘지에서 화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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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지간테 장례식의 모습

빈센트 지간테는 17세 때 범죄조직에 입문한 뒤 사망하기 전까지 약 60년을 마피아로 살며 수많은 폭력 사태를 지휘했고 공포를 수반한 공갈과 협박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총 세 차례에 걸쳐 약 13년의 수감생활을 했고 나머지 47년은 자유를 누렸다. 지간테는 거리에서 16년, 교정시설에서 8년 도합 24년 동안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으로 군림했으며 이는 패밀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직한 기록이었다. 약 12년 동안 마피아 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한 그는 본문에서 소개한 수십 건 외에도 수많은 암흑가 살인사건의 배후로 추정되지만 살인죄로는 단 1건의 유죄판결도 받지 않는 등 조직범죄에 가해지는 연방정부의 압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패밀리를 책임지며 사법당국의 추적을 뿌리쳤다.[111] 수사기관 관계자들은 지간테가 자신의 범죄조직을 안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법 집행을 저지하는 다양한 방법도 개발한 유능한 상사라고 묘사했다. 그가 패밀리의 두목으로 재직하며 내린 빈틈없는 결정들은 본인이 하급 조직원이었을 때 저지른 다양한 실수와 극명하게 대조되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생전의 지간테는 낡은 목욕 가운을 입고 면도도 하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뉴욕 시내 거리를 배회했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암흑가를 공포로 지배한 무시무시한 마피아 두목이었다. 지간테의 사망 이후 정신질환자 행세로 법망을 피한 그의 이야기는 법정신의학(Forensic Psychiatry) 교과서에 전례 없는 사례로 추가되었다. #

빈센트 지간테가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대리인을 맡고 있었던 마리오 지간테는 동생이 사망하자 두목 대행 직책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조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패밀리 고위 간부 다니엘 레오 (사진)가 두목 대행을 맡아 집단지도체제의 임시 지도자가 되어 조직을 재정비했다. 2006년에 부두목(Underboss) 베네로 망가노 (사진)가 약 13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고 2008년엔 전 거리 책임자(Street Boss) 리보리오 벨로모가 약 12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 같은 해 빈센트 지간테의 첫 번째 대리인이었던 도미닉 시릴로가 약 3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 그 이듬해 빈센트 지간테의 두 번째 대리인이었던 상담역(Consigliere) 로렌스 덴티코 (사진)가 약 4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고 유력 행동대장(Caporegime) 매튜 이아니엘로 (사진)도 약 2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112] 여기에 약 10년 넘게 부두목 대행(Acting Underboss)을 잘 수행한 마이클 제네로소 (사진)는 물론이고 어니스트 무스카렐라 (사진), 티노 피우마라 (사진) 같은 고위 간부들도 있었다. 외부에 자신들의 두목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하지 않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그 특성상 열거한 후보자들 중 누가 빈센트 지간테의 뒤를 이었는지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패밀리가 여전히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FBI에서 잠입 요원 투입 같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빈센트 지간테의 후계자로 벨로모가 추대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113]

2016년 빈센트 지간테의 생애를 다룬 전기 턱: 마피아 두목 빈센트 지간테의 삶과 범죄가 출간되었다.

3. 여담

3.1. 대중매체 관련

  • 법망을 피하기 위해 정신질환자 행세를 한 빈센트 지간테의 이야기는 영화 애널라이즈 댓 속 마피아 두목(Boss) 폴 비티 캐릭터, 드라마 Law&Order 속 마피아 두목 알베르토 나폴리 캐릭터, 드라마 소프라노스 속 마피아 두목 코라도 소프라노 캐릭터 등 여러 할리우드 작품에 영감을 제공했다.[114]
영화 고티(2018) 속 빈센트 지간테- 존 고티 담판 장면
  • 빈센트 지간테는 우-탱 클랜 소속 미국 래퍼 고스트페이스 킬라가 2006년에 발표한 노래 Alex (Stolen Script)에서 "I gotta ill Gotti-Gigante connect.(난 고티와 지간테를 잘 알지.)"라는 가사로 언급된다.
Ghostface Killah - Alex (Stolen Script)
  • 2021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말하지 못한 이야기: 죄와 벌 그리고 하키는 200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드라마 소프라노스 속 토니 소프라노 캐릭터의 실존 모델이자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추종세력(High-level Associate)으로서 총 1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25개 폐기물관리 업체를 운영한 사업가 제임스 갈란테와 그가 소유한 아이스하키 구단 댄버리 트래셔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118] 본 다큐멘터리엔 빈센트 지간테의 심복이자 FBI 뉴헤이븐지국으로부터 당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으로 지목된 매튜 이아니엘로 (사진)가 등장하며 마피아와 연루된 코네티컷 주 상원의원과 워터베리시장 같은 정치인의 사례도 소개된다. #[119]

3.2. 사생활 및 가족 관련

  • 시계공이었던 빈센트 지간테의 아버지는 1979년에 사망했다.
  • 빈센트 지간테의 서명은 2개의 X자를 휘갈긴 모양이었다.
  • 빈센트 지간테의 한창때 체중은 약 104kg 정도였다.
  • 빈센트 지간테는 두 집 살림을 했다. 아내 올림피아 지간테 (사진)와는 앤드루 지간테 (사진), 살바토레 지간테, 욜란다 지간테, 로젠 지간테, 리타 지간테까지 총 2남 3녀를 두었고 뉴저지 주에 위치한 교외 주택에 거주했다. 빈센트 지간테 교외 주택의 모습. 1970년대 지간테 부부의 모습. 애인 올림피아 에스포지토와는 빈센트 에스포지토 (사진), 루시아 에스포지토, 카멜라 에스포지토까지 총 1남 2녀를 두었고 뉴욕 시에 위치한 (2018년 기준) 1200만 달러 상당의 고급 연립주택에 거주했다. 빈센트 지간테 연립주택의 모습.[120] 빈센트 지간테의 전기를 쓴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래리 맥셰인은, 이탈리아계 마피아는 조직원의 두 집 살림을 금지하지만 빈센트 지간테에겐 그러한 규율이 적용되지 않았고 이는 그가 누린 권력과 암흑가에서 받은 존경을 동시에 나타낸다고 말했다. 특히 빈센트 지간테와 애인이 함께 거주한 연립주택은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은 뉴욕 시내 최고의 부촌이자 미국의 상류층과 유명 인사들이 대거 거주하는 곳이며 드라마 가십걸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요 배경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121] 1983년 연예기획사 사장 모리스 레비 (사진)가 49만 달러에 연립주택을 매입한 후 이유는 불명이나 빈센트 지간테의 애인에게 단 돈 1만 6천 달러라는 헐값에 매각했다. [모리스_레비] 여기에 빈센트 지간테는 어머니가 거주하는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의 오래된 아파트에도 자주 머물렀다. 빈센트 지간테 아파트의 모습. 사실 그의 어린 시절을 포함해 성인이 된 뒤에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이곳인데, 1995년 뉴욕지(New York Magazine)는 허름한 아파트의 외관을 찍은 뒤 「정말로 이 저층 아파트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두목의 집인가?」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 어느 날 빈센트 지간테는 자신을 알고 있음에도 따로 인사를 하거나 경의를 표하지 않은 어떤 사람에 대한 불평을 애인 올림피아 에스포지토에게 얘기했다. 당시 FBI는 그들의 대화를 도청하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지간테의 정신건강이 멀쩡하다는 증거가 되고 그의 육성이 대중에 공개된 몇 안 되는 자료로 남아있다. #
  • 빈센트 지간테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행동대원(Soldier)이었던 시절부터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키웠다. 그중 불릿이라는 이름의 개는 사람을 공격하는 아주 나쁜 습관이 있었는데, 결국 세 번이나 행인을 습격하는 사건을 일으키자 당국으로부터 안락사를 당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에 지간테는 당대 최고의 변호사 중 하나인 배리 스롤트닉을 찾아가 그를 변호인으로 선임하며 만약 자신의 개를 풀어주지 못하면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스롤트닉은 "안심하세요. 제가 풀어드리겠습니다.(Relax. I’ll get him out.)"라고 대답했다. 이후 스롤트닉은 불릿의 안락사를 결정하는 재판에서 그와 똑닮은 개 두 마리를 들여와 피해 여성에게 세 마리의 셰퍼드 중 누가 불릿인지 맞춰보라고 요구했다. 결국 그 여성은 맞추지 못했고 안락사를 면한 불릿은 주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지간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스롤트닉을 크게 신뢰하게 되었고 훗날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이 된 뒤에도 그를 변호인으로 선임하는 등 오랫동안 이어지는 관계를 맺는다.
  • 1989년 뉴욕 시의 타블로이드 신문이자 미국 최초의 대안신문(Alternative Newsweekly)인 빌리지 보이스가 빈센트 지간테의 막냇동생 루이스 지간테 신부 (사진)에 대한 심층취재를 했다. 지간테 신부는 처음 사제 서품을 받은 뒤 푸에르토리코의 한 교구에 배정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스페인어를 배우며 빈민가 성직자의 이미지를 쌓았다. 지간테 신부는 중남미에서 약 2년간 사목한 뒤 고향인 뉴욕 교구로 돌아왔고 훗날 연방대법관이 되는 소니아 소토마요르를 비롯한 여러 신도들의 성직자로 활동하며 1970년 연방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지만 1973년 뉴욕시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후 재선에 성공했다. 일찍이 지간테 신부는 빈곤층이 대다수인 자신의 교구민들을 위한 도시재생 사업에 관심이 많아 1968년부터 브롱스남동부공동체조직(South East Bronx Community Organization 이하 SEBCO)을 결성하여 공공아파트 건설 사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들이 순전히 공익만을 위한 건 아니었는데, SEBCO를 위한 공적 자금조달은 지간테 신부의 형제들이 몸담고 있는 범죄조직에 5000만 달러 상당의 사업 기회를 제공했다. 실제로 지간테 신부의 교구민들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크고 작은 아파트들은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간부들이 소유하거나 소속된 건설사들에 의해 지어졌다. 여기에 SEBCO를 통한 제노비스 패밀리의 돈세탁 규모 역시 상당할 것으로 추정되었다.[123] 관련 문서 수천 쪽을 입수한 빌리지 보이스는 마피아와 관련된 도급업자들이 연방정부와 주정부에서 주관하는 8000만 달러 이상의 건설 계약을 받은 사실을 추가로 확인했다. 여기에 지간테 신부는 7000만 달러 상당의 추가 건설 계약도 확보하고 있었다. 당시 빌리지 보이스는 자신들이 파악한 SEBCO의 공공공사 계약 규모가 약 2억 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특히 SEBCO는 건설 프로젝트가 끝나도 부동산 관리를 통해 매년 45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고 모든 관리는 지간테 신부와 관련 있는 회사들이 맡았다. 더욱이 FBI 요원들은 SEBCO가 관여하지도 않는 브롱스의 건설 사업을 논의하는 사업가들이 "(지간테) 신부가 우리 사업을 허락해야 돼."라고 말하는 육성을 포착했다. 이는 지간테 신부를 거치지 않으면 브롱스에서 건설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그의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물론 대부분의 수사기관 관계자와 기자들은 지간테 신부가 행사하는 모든 권력이 마피아 두목(Boss)인 형 빈센트 지간테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지간테 신부는 공공아파트 건설 사업을 통해 지역 내에서 성자의 반열에 올랐고 존 오코너 추기경 (사진)은 지간테 신부를 가톨릭 교회의 건축 장인(Master Builder)으로 묘사했다.[124] 에드 카치 뉴욕시장은 지간테 신부의 조언과 지지를 구했고 연방주택도시개발부 산하 연방주택청과 뉴욕시주택공사 소속 고위 간부들도 지간테 신부를 자주 방문했다. 한편, 대부분의 교구민은 빈곤층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지간테 신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1989년 시점의 그는 브롱스에서 4시간 거리에 위치한 고급 주택에 거주했고 푸에르토리코에 위치한 고급 리조트, 맨해튼에 위치한 2개의 협동조합, 캐딜락이 포함된 6대의 자동차와 6개가 넘는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간테 신부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지인에게 "사람들은 내가 공짜로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바로 그들의 문제야."라고 말했다. 또 본인을 '통제받지 않는(Non-order)' 성직자로 묘사했는데, 자신은 예수회처럼 엄격한 재정적 한계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여러 마피아 조직원의 장례미사를 집전해온 지간테 신부는 자신의 가문이 '이탈리아인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박해를 받아왔으며 사실 마피아라는 이탈리아계 범죄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니치 빌리지를 산책하는 빈센트 지간테와 지간테 신부의 모습. 휠체어를 탄 빈센트 지간테를 수행하는 지간테 신부의 모습. 시간이 흘러 2004년 시점의 SEBCO엔 6개의 비영리단체와 12개의 영리회사를 포함한 18개 사업체가 등록되어 있었다. "내가 온 동네를 지었다!"라며 본인의 업적을 자랑스러워하는 지간테 신부는 연봉 15만 달러를 받으며 5개 회사의 CEO 및 비영리단체 대부분의 회장이 되어있었다. 브롱스 성당 앞에 세워진 지간테 신부 동상의 모습. SEBCO의 비영리단체들은 5000만 달러 상당의 부동산을 자체적으로 보유했고 3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했다. 영리회사 중 하나인 센트리 보안회사(Sentry Security)는 SEBCO가 지은 아파트 일대의 치안 유지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보안회사의 서비스가 그다지 좋지 않아 동네를 활보하는 마약중독자와 매춘부들 때문에 주민들이 불안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늘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적이 있다.[125] 지간테 신부의 뒤를 이어 SEBCO를 장악할 후계자는 빈센트 지간테의 차남 살바토레 지간테로 알려져 있다.[126] [살바토레_지간테][빈센트_디나폴리] 한편, 빈센트 지간테가 사망한 뒤 지간테 신부는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래리 맥셰인과의 인터뷰에서 "제 형이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었냐고요? 맞습니다. 비토 제노비스 (사진)에 의해 특별히 선택받았죠."라고 얘기하며 오랫동안 숨겨온 진실을 고백했다.
  • 빈센트 지간테의 1967년생 딸 리타 지간테는 가부장적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어도 자신이 마피아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지간테 부녀의 화목한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년 시절 기억 속 선명한 공포의 흔적은 그녀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그 기억은 5살의 리타가 할머니 집 책상 밑에 숨어있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녀는 크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반지를 낀 주먹으로 누군가를 가격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윽고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후 아버지는 폭행당해 실신한 남자를 치우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고 그 남자의 몸이 들려나갈 때까지 딸이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유년기에 그러한 공포를 경험한 리타는 성장기에 지속적인 불안증, 우울증, 강박장애를 겪었다. 이후 그녀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분리불안장애를 극복하지 못해 학교에 거의 갈 수 없어 수업에 뒤처졌지만 아버지의 영향력으로 단 한차례도 유급하지 않았다. 한편, 아버지의 행동이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리타는 언니로부터 아버지가 망상조현병(Paranoid Schizophrenia) 환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간이 흘러 16살이 된 리타는 갓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자신을 마피아 공주(Mafia Princess)라고 부르며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는 티나라는 여학생의 소식을 접했다. 참다못한 리타는 그녀를 찾아갔는데, 당시 티나는 2명의 친구와 함께 있었지만 분노한 마피아 두목(Boss)의 딸을 대면한 그녀는 공포에 질렸고 몸이 굳었다. 리타가 티나의 친구들을 향해 화장실에서 나가라고 명령하자 그녀들은 티나를 두고 달아났다. 이윽고 리타는 티나의 머리를 화장실 싱크대에 처박고 얼굴을 구타했다. "다신 우리 가족에 대해 얘기하지 마."라고 쏘아붙인 뒤 쓰러져 울고 있는 티나를 걷어찬 리타는 결국 교장실에 불려가 혼이 났지만 그때만 해도 티나가 정신질환자인 자신의 아버지를 놀린 줄로만 알았다. 학교를 마친 리타는 티나의 피가 옷에 묻었지만 곧장 집에 가지 않고 어렸을 때부터 가족끼리 가까웠던 친구 알레산드라의 집을 찾아가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리타: 학교에서 우리 아버지에 관한 이상한 이야기를 다 듣고 있는데 진실을 알아야겠어.
(I'm hearing all this shit at school about my father, and I need to know the truth.)
알레산드라: 리타 네가 알고 싶은 게 뭐야?
(What do you want to know, Rita?)
리타: 우리 아버지는 정확히 무슨 일을 해?
(What exactly does my dad do?)
알레산드라: 잠깐만 (현관문이 잠겨 있는지 확인한 뒤) 너희 아버지가 누군지랑 손이 어디까지 닿는지 몰라?
(Just a minute, You don't know who he is or how far his hand reaches?)
리타: 응? 세상에... 그냥...
(What? Oh for God's sake... just...)
알레산드라: 좋아. (의자를 더 가까이하고 목소리를 낮추며) 리타 너 뉴욕 조직범죄계의 5대 패밀리를 알아?
(All right. Rita, you know how there are five families in organized crime in New York?)
리타: 아니.
(No.)
알레산드라: (루케시, 제노비스, 감비노, 보난노, 콜롬보 패밀리를 설명한 뒤) 내가 듣기로 너희 아버지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야.
(From what I've been told, your father is the boss of the Genovese crime family.)
리타: (입이 벌어지며) 두목?
(The boss?)
알레산드라: 그게 다가 아니야. 너희 아버지는 단순한 패밀리의 수장이 아니라 위원회의 수장일지도 몰라.
(And that's not all. He's not just head of the family, He might be the head of the commission.)
리타: 그게 무슨 뜻이야?
(What does that mean?)
알레산드라: 위원회의 수장은 5대 패밀리 모두의 두목이야. 그건 전체 조직에 권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해. 만약 큰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너희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할 거야. 리타 넌 아무한테도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 안 돼. 알겠지?
(The head of the commission is the boss of all five families. It means he'd have power over the entire organization. If anyone wants to do anything big, they'd need your father's permission. Rita, you are never to repeat these words to anyone-ever. You understand?)
리타: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아픈데 어떻게 그 모든 걸 할 수 있어? 망상조현병은 어쩌고?
(But how does he do all this when he's so sick? His delusions, his schizophrenia?)
알레산드라: (한숨을 쉬며 동정 어린 눈으로) 리타네 아버지는 오랫동안 정신질환을 가장해왔어.
(Rita, he's been faking the mental illness all these years.) #
  • 대화를 마친 리타는 그제서야 가문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평상시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이미지는 하얀 티셔츠에 하얀 반바지를 입고 식탁에 앉아 시리얼을 먹는 환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런 아버지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범죄조직의 두목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이상했던 일들이 함께 떠올랐는데, 생각해 보면 리타의 친구들은 결코 집에 놀러 올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절대로 전화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타인이 전화기를 사용할 때에도 멀찍이 떨어졌다. 가족들이 자주 시간을 보냈지만 너무 어두웠던 탓에 그녀가 지하감옥(Dungeon)이라 부른 할머니 집안의 커튼은 항상 드리워져있었으며 굳이 아버지가 말을 할 때는 (도청을 경계한 탓에) 반드시 TV나 라디오의 음량을 크게 키웠다. 매일 덩치 큰 남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아버지의 귀에 속삭였고 그들은 아버지를 왕처럼 숭배했다. 특히 아버지와 그들이 비밀스레 쪽지를 주고받던 모습도 기억났다. 그 밖에 거리에서 아버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공포와 감탄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던 일, 뉴욕 시내 주차요원들이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요금을 받지 않았던 일, 가족 외식 때 대기손님이 잔뜩 늘어선 레스토랑에 불시에 방문해도 즉시 테이블이 세팅되었던 일, 아버지로부터 받는 성탄절 선물은 항상 고무줄로 싸인 (미성년자가 쓰기엔 너무도 많은 양의) 지폐 뭉치였던 일 등이 떠올랐다. 특히 유년 시절 동네 불량배가 자신을 부적절하게 건드렸을 때 어머니는 절대로 그 이야기를 아버지한테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 적이 있었다.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그녀는 어머니의 결정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아버지가 알았다면 그 불량배의 신변이 위태로워졌을 거란 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어머니의 결정이 옳았다. 어쨌든 유년 시절의 리타는 가족들이 받는 모든 특혜가 단순히 아버지가 아프기 때문에 받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레산드라와의 대화를 기점으로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눈에 띄게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고 어느 순간 아버지도 막내딸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때부터 빈센트 지간테는 자신의 산책에 리타를 동참시켰다. 훗날 그녀는 이 시점을 '내가 거대한 연극의 조연배우가 된 순간'으로 묘사한다. 리타는 아버지를 부축하고 산책에 나설 때면 자동차 안에서 자신들을 감시하는 FBI 요원들의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바닥에 두고 걸었고 종종 아버지가 주차요금기와 대화를 시도할 때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썼다. 한편, 어린 시절부터 본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던 그녀는 11살 때 아버지를 뺀 다른 가족들에게 자신의 성적 취향을 고백했다가 분노한 오빠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19살 땐 용기를 내 마피아 두목이자 엄격한 가톨릭 신자인 아버지에게까지 커밍아웃을 했다. 고백이 끝나자 아버지는 "넌 성장과정을 겪는 거야 네 나이대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런 일을 겪고 있어. 걱정하지 마.(You're going through a phase, Most kids your age go through this. Don't worry about it.)"라고 얘기하며 의외로 화를 내진 않았지만 이내 곧 동성친구들과의 만남을 금지시키며 딸의 성적 취향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훗날 아버지가 수감되고 병에 걸려 약해지자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에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전해야겠다고 생각 한 리타는 '아버지가 원하는 모습의 딸이 되지 못해 죄송하고 아버지 역시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지만 이제 모든 걸 용서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녀는 편지를 쓸 때만 해도 어떠한 종류의 회신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편지를 읽은 아버지는 곧장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딸의 진심에 대해 감격했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른 뒤 리타가 회고록을 써 가문의 비밀을 출판하려 하자 오빠들과 이복형제들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이 아닐 거라며 반대했지만 어머니와 언니들은 지지해 주었다. 이후 대부의 딸: 사랑, 치유, 구원에 관한 뜻밖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간한 그녀는 2013년에 동성 연인과 혼인했다.[129]
리타 지간테 인터뷰
  • 비록 관계자의 공개 증언이나 검증받은 언론 보도 등으로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상단에 링크된 리타 지간테 인터뷰 영상에서 Rocco D.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쓴 댓글을 보면 과거 그의 아버지가 몰던 자동차( 폭스바겐 비틀)가 도난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경찰이 아닌 빈센트 지간테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하루나 이틀 뒤 아버지의 자동차가 돌아왔고 이후에도 빈센트 지간테는 그 일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 리타 지간테는 아버지의 정체를 친구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던 1983년의 감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마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 같았어요. 저는 오랫동안 아버지가 모자가게나 과자가게를 운영한다는 의심스러운 이야기를 들었었죠.[130] 사실을 알고 나니 처음엔 아무도 우리 가족을 해코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다음엔 연방정부가 두려워졌습니다. 마침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다는 안도감도 있었죠. 그분은 모든 뉴욕 마피아의 수장이었고 매우 강력하고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He was the head of all the New York families, a very powerful and dangerous man.) 전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다 받아들였죠. 그분은 제가 알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우리 부녀는 단 한 번도 그 주제에 대해 대화해 본 적 없습니다."
  • 리타 지간테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 부활절에 거대한 초콜릿 토끼를 사 왔던 일과 수두(Chickenpox)에 걸린 자녀들을 위로하기 위해 살아있는 병아리를 사 왔던 일, 아버지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Jailhouse Rock을 따라 부르며 춤을 추던 모습과 영화 대부 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보며 넋을 잃던 모습 같은 자상하고 평범했던 순간들을 꼽았다.[131] 특히 아버지는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 내 빈곤한 노인들을 위해 무상으로 집세와 식비를 제공하는 등 자선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반면 가장 싫어하는 기억으론 아버지가 애인과 두 집 살림을 하며 그 사이에서 난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던 때를 꼽았다. 그녀는 그 순간을 고통스러운 배신(Painful Betrayal)으로 묘사했다.
  • 상술한 리타 지간테의 증언을 통해 빈센트 지간테가 영화 대부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부는 세계 영화사에서 첫손에 꼽는 기념비적인 갱스터 영화라는 것 외에도, 당대 미국 마피아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마피아를 비장하고 낭만적으로 그린 대부가 흥행하면서 마피아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동경은 작품의 유명세와 비례해 상승했고 영화에서 다루는 뉴욕 시의 5대 패밀리는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처럼 행동하는 조직원들의 수도 늘어갔다. 이러한 변화들은 마피아 조직 입장에서 결코 좋지 않은 현상이었고 실제로 존 고티라는 무비스타 같은 두목(Boss)이 등장하기도 했다. 반면 빈센트 지간테의 경우, 그 역시 대부의 작품성에 매료되었을지언정 영화와 실생활을 엄격히 구분했다. 제노비스 패밀리는 빈센트 지간테 같은 뛰어난 두목이 재직한 덕분에 내부의 기강 해이와 연방정부의 대대적인 기소로 미국 마피아가 큰 타격을 입은 1980~90년대를 거친 21세기에도 조직범죄계의 아이비리그(Ivy League of Organized Crime)로 남아있다. 실제로 NYPD 조직범죄전담반장 조셉 코피 (사진)는 1990년 인터뷰에서 "제노비스 패밀리의 경우, 우리는 생채기도 내지 못했습니다."라고 시인했다. #
  • 빈센트 지간테의 어머니 욜론다 지간테는 그녀의 셋째 아들이 마피아 두목(Boss)일 수도 있다는 기자의 말에 "두목? 걔는 화장실의 두목이야!(Boss? He’s boss of the toilet!)"라고 버럭 소리칠 정도의 여장부였다. 욜론다 지간테와 빈센트 지간테의 화목한 모습. 1996년 94세의 욜론다 지간테는 뉴욕시의원 출신 막내아들 루이스 지간테 신부 (사진)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던 중 윌리엄 킹이란 할렘 사람에게 지갑을 강탈당했다. 당시 범인은 몇 구역을 못 벗어나 경찰관에 현행범으로 검거되었는데, 이를 두고 뉴욕 시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한낱 거리의 잡범이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범죄조직 두목 어머니의 지갑을 훔친 것도 모자라 경찰에 즉시 붙잡힌 점을 꼬집으며 세계에서 가장 멍청한 강도(The World’s Dumbest Mugger)로 풍자했다. 실제로 범인을 검거한 로버트 맥케나 경관은 그를 경찰차에 태운 뒤 "당신은 세계 최악의 강도야 지금 누구를 강도질했는지 아나?(You are the world's worst mugger, Do you know who you mugged?)"라고 경고했다. 당시 맥케나 경관은 90달러가 든 욜론다 지간테의 지갑을 돌려주었는데, 그녀는 거의 울듯이 감격하며 지갑 속 가족사진에 입을 맞췄다고 한다. 한편, 지간테 신부는 빈센트 지간테가 사건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자고 있었는데 제가 굳이 깨워서 그 사실을 알려야 합니까?"라고 대답했다. 이후 징역 1년 6개월~3년의 부정기형을 선고받은 범인은 법정에서 지간테 가문을 향해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사건 이듬해인 1997년 5월 욜론다 지간테는 빈센트 지간테의 재판이 열리기 약 1개월 전에 사망한다.
  • 빈센트 지간테의 딸 리타 지간테는 아버지의 1997년 재판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분은 법정에서도 정신질환자 연기를 계속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지는 목욕 가운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들어왔고 우리 자녀들은 방청석에 앉아 있었죠. 그분은 고개를 돌려 저희를 바라봤는데 마치 '너희들이 보여'라고 말하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습니다. '사랑해 난 괜찮아' 같은 느낌으로요. 마음이 아팠어요."
  • FBI 문서에 따르면 빈센트 지간테는 자신이 교도소에 수감될 경우 동성애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부 측 증인이 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존 페니시는 증언을 한 정보원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해당 보고서의 내용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 하지만 빈센트 지간테의 큰형 파스칼레 지간테 (사진)와 막내딸 리타 지간테가 동성애자였고 그 사실을 빈센트 지간테도 잘 알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해당 보고서의 내용을 마냥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할 순 없다. 본래 가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한 이탈리아계 마피아 조직은 동성애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1992년에 뉴저지 주 데카발칸테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존 다마토가 자신의 동성애 행각이 발각되어 조직으로부터 처형된 사례가 있다. 훗날 정부 측 증인이 된 데카발칸테 패밀리 행동대원 앤서니 카포는 다마토가 처형된 이유에 대해 " 게이 동성애자 두목이 라 코사 노스트라 사업을 논의한다면 아무도 우리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Nobody's going to respect us if we have a gay homosexual boss sitting down discussing La Cosa Nostra business.)"라고 말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미국 마피아를 총괄하는 위원회의 의장인 빈센트 지간테의 입장에서 자신의 가족력이 얽힌 동성애 관련 고민은 충분히 현실적인 고민이었을 것이며 그러한 속내를 측근에게 털어놓았다가 FBI에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빈센트 지간테의 형 마리오 지간테 (사진)의 아들 살바토레 지간테 (사진)는 일찍이 제노비스 패밀리에 정규조직원으로 입단했다. 그는 1996년 폐기물관리업계를 갈취한 혐의로 아버지와 함께 기소되어 약 3년간 복역하고 1999년에 출소했다. 이후에도 조직생활을 이어간 살바토레 지간테는 아버지가 은퇴한 뒤 그의 행동대장(Caporegime) 직책을 계승했다고 알려져 있다.
  • 어느 날 존 고티가 빈센트 지간테에게 자신의 아들을 감비노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입단시켰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이에 빈센트 지간테는 "이런 그거 유감이군.(Jeez, I'm sorry to hear that.)"이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빈센트 지간테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반대로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남 앤드루 지간테 (사진)는 2003년에 마피아 사업과 깊이 연루되어 약 2년간 복역한 사실이 있다. 당시 가택연금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그는 유죄판결이 확실시되자 정부의 허가를 얻어 아내와 4명의 자녀를 데리고 디즈니 월드에 다녀온 뒤 수감되었다. 이에 조직범죄 전문가 하워드 아바딘스키 교수는 마피아 사업과 아들을 연루시키지 않는다고 말해놓고 연루시킨 빈센트 지간테는 위선자가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것은 그의 위반행위 중 가장 사소한 것입니다. 살인자, 갈취자, 거짓말쟁이인 그가 아들을 두고 한 말을 왜 믿어야 합니까?"라고 대답했다.
  • 정부 측 증인이 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존 페니시에 의하면 빈센트 지간테의 장남 앤드루 지간테 (사진)와 사생아 빈센트 에스포지토 (사진)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이 되었다고 한다.
  • 본인을 빈센트 지간테의 사촌이라고 밝힌 사람이 지간테에 대해 짧게 얘기하는 2009년도 영상이 있다. # 영상 속 남자는 과거 지간테의 아지트였지만 지금은 폐쇄된 트라이앵글 사교클럽 (사진) 건물을 방문하고 1980~90년대에 제노비스 패밀리와 지간테가 누렸던 막강한 권력과 부하 조직원들이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할 수 없어 자신들의 턱을 만졌던 일화 등을 얘기하고 있다.
  • 의외로 빈센트 지간테에 대한 이웃 주민들의 평판은 좋은 편이었다. 한 여인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매우 화려한 사람이었어요. 거리에서 지간테와 마주치면 그가 먼저 모자를 기울여 저한테 인사하곤 했지요."라는 증언을 남겼다. 특히 지간테의 아지트였던 트라이앵글 사교클럽 (사진)을 타인이 인수하여 2011년에 찻집으로 재개장하자 이런 변화를 반기지 않는 주민도 있었다.[132] 뉴욕 포스트와의 인터뷰에 응한 어느 시민은 "원래 그곳은 마피아 영화에서 갓 튀어나온듯한 장소였어요. 이제 바질을 파는 꽃집을 보니 좀 우스꽝스럽네요. 저는 그들(마피아들)이 그리워요. 그 사교클럽을 드나들던 건장한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모두 마피아 영화 속 배우 같았죠."라고 증언했다. # 실제로 고리대금, 도박 등 마피아가 일상적으로 관장하는 범죄 사업이나 그들이 행하는 불법 리베이트, 입찰 조작, 파업 조종 등은 주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이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다. 거기다 마피아는 그 나름대로 무분별한 스트리트 범죄를 억제하는 일종의 질서 악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가까운 주민들은 마피아가 진정한 거악이라는 인식을 잘 못하는 편이다.
  • 2011년 취재에 따르면 지간테 가문 구성원들은 빈센트 지간테의 생전 영향력으로 여전히 뉴저지 주 항구에 위치한 여러 합법적인 항만하역사 및 항만노조에 소속되어 근무하면서 억대 연봉들을 받고 있는데, 도합 200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 지간테의 사위와 조카는 각각 40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있으며 지간테 가문 구성원 11명의 평균 연봉은 17만 5천 달러라고 알려졌다.
  • 2013년 빈센트 지간테가 입었던 목욕 가운이 뉴욕 시에 위치한 미국 폭력배 박물관(Museum of the American Gangster)에 전시되었다. #
  • 2015년 빈센트 지간테의 아내 올림피아 지간테 (사진)가 사망했다.
  • 2015년 빈센트 지간테의 손자 필립 지간테가 뉴욕 주에 위치한 소도시 에어몬트의 군수로 당선되었다. # 대부분의 유권자가 지간테 가문의 내력을 알았음에도 그에게 투표했다.[133]
  • 빈센트 지간테의 사생아 빈센트 에스포지토 (사진)는 과거 아버지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포착되었다. 그는 2018년에 4명의 제노비스 패밀리 정규조직원(Made Member) 및 추종세력(Associate)과 함께 노동 공갈 혐의로 기소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FBI가 에스포지토의 자택을 압수수색할 때 황동 너클, 불법 권총 2정, 현금 380만 달러, 수기로 쓴 마피아 정규조직원 명부가 발견되었다. # FBI는 압수수색 때 발견된 현금 380만 달러를 제노비스 패밀리가 관리하는 고리대금업 자금 및 구금된 조직원들의 변호사 비용과 영치금으로 쓰이는 비자금의 일부로 파악했다. 조직범죄 전문가들은 에스포지토가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고 정규조직원 명부를 소유하고 있으며 수감 중인 전 상담역(Consigliere)의 법정대리인을 위한 자금 지원 방안을 논의해온 점으로 보아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134] 당시 검찰 측 공소장엔 에스포지토가 1200만 달러 상당의 고급 연립주택, 500만 달러 상당의 할렘 부동산, 주소를 밝히지 않은 다수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적시되어 있었다. 재판관은 판결에 앞서, 재판 도중 45명의 지지자가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탄원서를 받은 뒤 피고인의 열렬한 인물상(Glowing Portrait)을 느꼈지만 피고인이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식품노조로부터 금전을 갈취한 사실이 인정되어 유죄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얘기했다.[135] 10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불구속 재판을 받은 에스포지토는 압수수색 과정에서 발견된 현금 380만 달러가 범죄 사업으로 얻은 재화임을 인정하고 몰수에 동의한 뒤 2019년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여담으로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디레오나르도는 에스포지토의 집에서 발견된 불법 권총과 어마어마한 액수의 현금을 보고 놀랐다고 밝혔는데, 마피아들은 수색에 대비해 불법 무기나 범죄수익금을 절대로 자택에 보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고 과거 자신은 유사시 사용할 합법적인 산탄총 한 자루와 외출 시 착용할 시계나 보석을 제외하면 그 어떤 물건도 집에 두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빈센트 지간테의 손자 빈센트 파이프는 다른 지간테 가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1995년에 할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식품•상업노동자연합(United Food and Commercial Workers) 이하 UFCW 내에서 주류업을 담당하는 간부가 되었다. 6년 뒤 그는 연봉 35만 달러를 받으며 1500여 명의 노조원을 이끄는 지역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한편, 제노비스 패밀리 내 UFCW 갈취 계획의 선두주자로서 매달 노조 간부들에게 상납금을 받는다고 알려진 행동대장(Caporegime) 존 바르바토 (사진)는 파이프와 상당히 가까웠는데, 실제로 FBI는 바르바토의 운전기사인 레이먼드 파팔로가 UFCW 간부 존 파지오와 함께 회동을 가지는 모습을 여러 차례 포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이프는 자신보다 고작 6살 많은 삼촌 빈센트 에스포지토 (사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매년 1만 달러의 상납금을 삼촌에게 지급해왔지만 이 상황을 상당히 못마땅해 했고 2015년경에는 상납금을 받으러 온 인물에게 "(만약 돈을 내지 않으면) 내가 살해당하나? 총을 맞나? 작업을 당하나?"라고 따져 물었다. 당시 파견된 인물이 "그들은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끝내 상납금을 받아 갔지만 이 사건 이후 삼촌에 대한 파이프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결국 어느 시점에 범죄행위가 발각된 파이프는 FBI 측 정보원이 되었고 2019년에 에스포지토가 노동 공갈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을 때 결정적인 증거와 증언을 제공했다. 물론 당시 파이프의 비위사실도 함께 발각되었기 때문에 그는 노조 지역위원장 직책을 잃었고 향후 노조와 관련된 그 어떤 취업도 제한당했다. 이후 주류 판매로 연간 5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브레이크스루 음료그룹의 회장 찰스 메리노프가 자신이 파이프를 고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136]
  • 빈센트 지간테는 뉴욕 시 맨해튼에 위치한 유명 레스토랑 일 물리노의 단골이었다. 이곳은 2009년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만찬을 즐긴 레스토랑이기도 하다.[137] 한편, 빈센트 지간테의 조카 루이스 지간테는 뉴욕 주 웨체스터에 위치한 물리노스라는 레스토랑의 주인이다. 이곳은 상술한 일 물리노와 이름만 유사할 뿐 아무 관계가 없다. 지간테 가문에서 운영하는 물리노스는 운치 있는 폭포를 보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으로 유명하고 시장, 주 상원의원, 주 대법관 등 지역 내 정관계 인사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스 지간테는 지간테 레스토랑 & 바라는 레스토랑 역시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의 요리를 책임지는 셰프 한국계 미국인 사무엘 킴(Samuel Kim)으로 알려져 있다. 2022년 1월에는 빈센트 지간테의 후계자 리보리오 벨로모가 자신의 생일을 맞아 지간테 레스토랑 & 바에서 제노비스 패밀리 고위 간부들과 회동을 가지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 수감 중인 빈센트 지간테를 대신해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았던 그의 형 마리오 지간테 (사진)와 뉴욕시의원 신분으로 빈센트 지간테를 도왔던 그의 막냇동생 루이스 지간테 신부 (사진)는 2020년에도 생존해있다. 마리오 지간테와 루이스 지간테 형제의 모습.[138] 85세가 넘도록 정정한 두 사람의 모습은 생전 심장질환에 시달리다 결국 77세에 사망한 빈센트 지간테와 대비된다. 한편, 2021년엔 과거 지간테 신부가 성경공부를 하는 소년에게 지속적으로 성적인 학대를 가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 2022년 3월엔 마리오 지간테가 9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같은 해 10월 지간테 신부가 90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지간테 형제 모두 고인이 되었다. 한편, 지간테 신부는 약 700만 달러의 유산을 32세의 아들 루이지노 지간테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루이지노 지간테에 의하면 자신의 존재는 비밀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애써 숨기진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지간테 신부는 가톨릭 뉴욕 대교구의 추궁을 받자 아들의 존재를 당당히 인정했다고 한다. 이 주장대로면 뉴욕 대교구는 지간테 신부의 위반행위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력을 감안해 사제직을 박탈하기는커녕 어떠한 불이익 처분도 내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성립돼 많은 대중들이 비판을 가했다. #

3.3. 마피아 활동 관련

  • 빈센트 지간테를 배출한 제노비스 패밀리 그리니치 빌리지 행동대(Crew)는 그가 두목(Boss)이 된 1980년대 이후 명실상부 패밀리 내 최대 계파가 되었다. 일찍이 빈센트 지간테는 패밀리 수뇌부에 진입한 뒤 자신의 후임 행동대장(Caporegime)으로 도미닉 칸테리노 (사진)를 지명했는데, 1990년에 칸테리노가 사망하자 그리니치 빌리지 행동대는 각각 마리오 지간테 (사진), 도미닉 시릴로, 로렌스 덴티코 (사진), 안젤로 프리스코 (사진)가 이끄는 4개의 행동대로 분할되었다. 이후 전통의 116번가 행동대가 다시 제노비스 패밀리 내 최대 계파가 된다. [116번가_행동대]
  • 빈센트 지간테는 자신의 동네인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마약을 엄격히 통제했다고 한다. 실제로 지간테는 한 아이가 마약에 중독되자 그 아이를 집에서 내쫓고 부모와 격리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
  •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조셉 부오난노는 동업자로 위장한 FBI 측 정보원에게 빈센트 지간테가 연예기획사 사장 모리스 레비 (사진)의 사업을 어떻게 지배하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레비는 여러 차례 제노비스 패밀리와의 관계를 끊으려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했다고 한다. 당시 부오난노는 마피아-레비 관계의 끝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140] 여기에 부오난노는 지간테가 문맹이며 이탈리아 혈통이 아닌 모든 사람을 증오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지간테가 노트에 글씨를 써가며 부하들과 의사소통을 한 사실을 감안하면 그가 문맹이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다.[141]
  • 1970년대 초반 연예업계 주도권을 놓고 제노비스 패밀리와 감비노 패밀리 간 항쟁이 발발하여 연예업계 관계자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늘어나자 빈센트 지간테와 연관된 연예기획사 사장 모리스 레비 (사진)는 산하에 있던 가수들에게 혹시 범죄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니 뉴욕을 떠나 마피아의 손이 닿지 않는 안전한 지역으로 잠시 피신하라고 조언했다. 당시 레비의 조언을 받아들인 가수 중에는 토미 제임스가 있었다. 그는 한적한 테네시 주 내슈빌로 피신했는데, 거기서 만난 지역 내 컨트리 뮤직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얻은 경험이 훗날 컨트리 록 앨범을 내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훗날 제임스는 마피아 등 과거 연예업계와 관련 있는 인물들이 모두 사망한 2010년에 나, 마피아, 그리고 음악:토미 제임스 & 더 숀델스와 함께 하는 헬루바 라이드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한다.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폭력배와 연예인의 유착관계는 쉽게 관찰된다. 물론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할리우드 유명 연예인과 친분을 가진 거물급 마피아의 사례들이 잘 알려져 있다.[142] 다만 빈센트 지간테의 경우 모리스 레비 (사진) 같은 연예업계 사업가와는 관계를 맺었지만 연예인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이는 그가 자신의 정신질환자 연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연예인과의 친분을 즐길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지간테의 부하들은 일부 연예인과의 관계가 노출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가수 마이클 잭슨의 누나 라토야 잭슨은 뉴욕을 방문할 때마다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을 경호원으로 고용하는 대가로 매달 1000달러를 지불하고 있었고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조셉 파가노 (사진)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같은 유명 가수들을 관리하는 등 직접적으로 연예인을 상대했으며 2000년에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앤서니 시코네 (사진)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고 갈취를 당한 배우 스티븐 시걸은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 안젤로 프리스코 (사진)가 복역 중인 주립교도소를 찾아가 그에게 1만 달러를 지불하면서 자신과 시코네와의 갈등을 잘 중재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밖에도 지간테의 몇몇 부하들은 유명 배우나 유명 연예기획사 사장과 사진을 찍는 등 자신들의 연예계 인맥을 과시해왔다. 배우 알 파치노와 마피아 조직원들의 모습. 영국 연예기획사 사장 윌프 파인과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
  • 별명이 달걀(Benny Eggs)인 제노비스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베네로 망가노 (사진)는 별명이 소시지(Johnny Sausage)인 자신의 운전기사 존 바르바토 (사진)와 함께 매일 아침 빈센트 지간테를 만나 여러 사항을 보고했다. 이를 감시한 FBI 요원들은 '지간테는 매일 아침식사로 소시지와 달걀을 먹는다'라고 표현했다.
  • 빈센트 지간테를 감시하던 FBI 요원들의 진술을 통해 그의 생활패턴을 잘 알 수 있다. 매일같이 어머니가 거주하는 아파트에 머물고 있었던 빈센트 지간테는 오후 즈음 자신의 아지트인 트라이앵글 사교클럽 (사진)으로 가서 부하들과 트럼프 카드 피노클을 하며 사업을 논의했다. [트라이앵글_사교클럽] 그들은 사교클럽이 도청되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중요한 대화는 라디오 음량을 키운 채 하거나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틀어놓고 했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노트에 글씨를 써 의사소통을 했고 사용한 종이는 즉시 찢어 불에 태우거나 변기에 흘려보냈으며 아예 사교클럽 밖으로 나가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었다. 밤 11시가 되면 빈센트 지간테를 맨해튼의 고급 연립주택까지 태우러 갈 자동차가 도착했고 조직원들은 뒷좌석 문을 열고 두목(Boss)의 탑승을 도왔다. 이후 자정이 넘도록 근처 옥상에서 빈센트 지간테를 감시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집까지 동행한 부하들과 대화를 이어나가며 신문을 읽거나 TV를 시청했다고 한다. 다음날 오전 9~10시에 어머니가 기다리는 아파트로 돌아가는 게 일과의 전부였는데, 특히 빈센트 지간테의 딸 리타 지간테에 의하면 비행기 탑승을 싫어한 그녀의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신혼여행을 제외하면 평생 휴가를 떠난 적도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해 뉴욕 주 조직범죄전담반장 로널드 골드스톡은 "그가 마피아 두목으로 지내며 어떤 즐거움을 얻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의 유일한 쾌락은 자신이 행사한 권력 그 자체인 것 같았습니다.(It was hard to understand what enjoyment he got out of being a mob boss, his only pleasure appeared to be the pure power he exercised.)"라고 밝혔다. 한편, 뉴욕동부지구 연방검사 그레고리 오코넬은 "빈센트 지간테는 행동대장(Caporegime)과 행동대원(Soldier)들에게 많은 돈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하들이 그를 매우 좋아했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도 "빈센트 지간테는 돈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미 많은 돈을 갖고 있었다. 그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어디에 숨기느냐였다. 그는 대부분의 행동대장으로부터 돈을 상납 받지 않았다."라고 얘기했다. 전 감비노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루이스 페란테 역시 자신의 저서에 "빈센트 지간테는 행동대장들이 상납금을 가로채도 그냥 내버려 뒀다. 범죄활동 자체를 사랑해 정작 물질에는 초연해진 것이다."라고 썼다. 물론 조직에서 주관하는 도박 사업의 돈을 훔치다 적발되어 처형된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 안젤로 상지올로의 사례가 있긴 하지만 보통 빈센트 지간테는 검은 돈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는 수뇌부 회의가 열리면 짜증부터 냈다. 그는 고위급 조직원들이 참석하는 회의장에선 돈이나 헤아릴 게 아니라 거시적인 평화 유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마피아 수뇌부라면 전체 조직을 위한 정책을 정의하고 규율을 집행하는 데 보다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빈센트 지간테를 근거리에서 수행하는 부하 조직원들을 도청한 FBI에 따르면 그들은 매일 자정까지 사교클럽에서 두목(Boss)과 피노클을 한 뒤 이른 아침만 되면 자신들이 또 사교클럽을 열어 놓아야만 해 힘들다는 불만을 다른 조직원들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더욱이 지간테는 악명 높은 타짜로 유명한데, 조직원들은 그의 사기도박을 알면서도 감히 지적할 수 없었다. 특히 지간테와 자주 피노클을 한 제노비스 패밀리의 페데리코 지오바넬리 (사진)는 자신이 본 최고의 카드 기술자로 지간테를 꼽았다. 심지어 다른 조직원은 지간테가 카드게임에서 지는 걸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밝혔는데, 진 게임도 그가 이겼다고 선언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44]
  • 빈센트 지간테의 정신질환자 연기는 이러했다. 그는 연방정부로부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감시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주차요금기에 말을 걸거나, 뒷골목에 노상방뇨를 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뒤 테이블에 발을 올려놓고 발톱을 깎곤 했다. 한 번은 소환영장을 집행하는 공무원이 방문할 사실을 미리 알고 욕실에서 우산을 쓴 채 샤워를 하며 영장을 받았다. 그야말로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이라면 웬만한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수준의 연기였다. 여기에 더해 지간테가 높은 수준의 타짜였다는 사실을 종합해보면 그는 극단적인 기만자형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지간테는 자신을 감시하는 수사기관과 온 세상을 속이며 상당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 역시 자서전에 "지간테는 자신의 얼간이 행동을 통해 연방정부를 얼간이로 만들면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라고 썼다.[145] 한편, 그라바노는 지간테의 우산 일화를 언급하며 그의 연기가 다소 과한 측면이 있었다는 견해를 밝혔는데, 만약 자신이 지간테였고 그 정도로 교도소를 피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그동안 마피아 생활을 하며 모은 전 재산을 챙긴 뒤 조직 생활을 청산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 빈센트 지간테의 정신질환자 연기는 한 번씩 허점을 노출했다. 수사기관이 찍은 사진 중에는 목욕 가운을 입은 지간테가 수행원들과 함께 흡연을 하는 사진이 있다. 아주 맑은 정신을 가진 걸로 보이는 사진 속 그의 모습은 정신질환자는커녕 보통사람 이상의 강렬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무서운 남자로 보인다. 이러한 사진들의 대부분은 FBI- NYPD 합동 조직범죄전담반 소속 수사관 톰 브루노가 촬영했다. 그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을 때의 지간테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밝혔는데, 한 번은 자신의 아들이 자동차를 몰고 동네로 들어오면서 경적을 크게 울리자 마침 길가에 서 있던 지간테가 "야! 뭐가 그리 급해?(Hey! what are you in a rush?)"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자신을 감시하는 수사관을 발견하자마자 다시 정신질환자 연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자택에 있는 지간테를 감시하던 FBI 요원 역시 집에서의 그는 돈을 세는 등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고 샤워 후를 제외하면 가운 따위는 입지 않았다고 밝혔다. 특히 실내에서 지간테가 입은 가운은 야외에서 정신질환자 연기를 위해 입는 허름하고 낡은 제품이 아닌 브룩스 브라더스 스타일의 명품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FBI 요원은 임무 수행 중 지간테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기회가 있었는데, 자동차 뒷좌석에 탄 그가 허름하고 낡은 가운을 벗으니 교활하게도 넥타이를 맨 고급 정장이 드러났다고 한다.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한 지간테의 사진.
  • 뉴욕 타임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셀윈 랍은 1980년대에 빈센트 지간테를 직접 인터뷰하기 위해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에 위치한 제노비스 패밀리의 아지트 트라이앵글 사교클럽 (사진)을 찾아갔다. 때마침 지간테는 2명의 수행원과 함께 사교클럽 밖에 있었고 용감한 랍은 그들에게 접근해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지간테는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수행원들은 거칠게 반응하며 랍을 쫓아냈다.
  • 정부 측 증인이 된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는 영상 인터뷰에서 "빈센트 지간테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패밀리 내 어떤 직책을 가졌는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라고 얘기했다. 이윽고 1980년대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는데, 마이클 프란지스가 콜롬보 패밀리 두목(Boss) 카마인 페르시코 (사진)와 사업상 마찰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간테는 자신의 부하 페데리코 지오바넬리 (사진)를 시켜 그를 호출했다. 당시 지간테는 마이클 프란지스의 아버지이자 콜롬보 패밀리의 부두목(Underboss)인 존 프란지스 (사진)의 안부를 묻는 등 비교적 평범한 대화를 하다 이내 곧 "뒷감당 걱정은 하지 말고 소속을 제노비스 패밀리로 옮기라."라는 다소 무리한 제안을 했지만 마이클 프란지스가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146]
  • 1980년대 뉴욕 5대 패밀리는 매년 조직원들끼리 성탄절을 기념하며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대규모 파티를 개최했다. 감비노 패밀리는 존 고티 등 당대 수뇌부가 총집결했고 루케시 패밀리도 200여 명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한자리에 모였으며 콜롬보 패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런 대대적인 행사는 당시 조직범죄와의 전쟁 캠페인을 수행하던 수사기관의 감시에 상당히 취약했다. 반면 제노비스 패밀리는 비밀주의를 내세운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의 영향으로 이런 대규모 파티를 개최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동태 파악이 어려웠다. 마찬가지 보난노 패밀리도 대규모 파티를 개최하지 않았는데, 과거 FBI 요원이 조직에 잠입했던 도니 브래스코 작전 이후 비밀주의가 한층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 마이크 타이슨, 조지 포먼, 에반더 홀리필드,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 로이 존스 주니어, 마르코 안토니오 바레라 등의 프로모터로 유명한 돈 킹 (사진)은 빈센트 지간테가 두목(Boss)이 되기 전과 그가 두목이 된 후에도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추종세력(High-level Associate)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당대 프로권투업계 내 마피아의 영향력을 파헤친 크라운 로열 수사를 주도한 FBI 요원 조셉 스피넬리에 의하면 1982년 10월 2일에 킹과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매튜 이아니엘로 (사진)가 함께 스테이크를 먹으며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고 한다. 특히 빅토르 퀸타나란 가명을 쓰고 라틴아메리카 출신 거물 마약상으로 위장한 뒤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 마이클 프란지스를 통해 킹과의 접촉을 시도한 FBI 요원은 프란지스로부터 "킹은 우리 패밀리와 함께 있지 않다. 그는 다른 패밀리(제노비스 패밀리)와 함께 있다. 당신을 킹에게 소개하려면 사전에 그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크라운 로열 수사는 메인 타깃인 킹을 기소하지 못한 용두사미로 끝났는데, 수사가 엎어진 결정적인 원인으로 1982년 11월에 발생한 한국 권투 선수 김득구 사망사건이 꼽힌다. 당시 스피넬리는 사건을 접으라는 상부의 지시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권투 선수가 경기 중 사망해서 난리 난 이 시국에 FBI가 권투 프로모션에 관여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라는 질책이었다. 그렇게 수사가 종결되고 약 2개월 뒤 상술한 FBI 요원 퀸타나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다니엘 파가노 (사진)로부터 "왜 콜롬보 패밀리와 접촉했어? 킹은 우리 패밀리와 함께 있는데."라는 씁쓸한 말을 들었다. 훗날 스피넬리는 약 4년 동안의 수사 과정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으로 1981년에 헤비급 권투 세계챔피언 래리 홈즈를 만난 날을 꼽는다. 당시 스피넬리가 '권투 선수들을 이용해 부정하게 돈을 번 킹을 수사하는 데 도움을 달라'라고 부탁했지만 홈즈는 눈물을 글썽이며 "킹은 나쁜 친구들이 많습니다. 전 생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전 가정이 있습니다. 제 가족 때문에 두렵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절 해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스피넬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인 헤비급 권투 세계챔피언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남자보다 두렵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회상하며 스포츠 팬으로서 기분이 매우 착잡했다고 한다.
  •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치로 페론 (사진)은 빈센트 지간테의 심복 중 하나인 매튜 이아니엘로 (사진)의 오른팔로 알려진 인물로, 이아니엘로의 총애를 받아 그의 부재 시 행동대장 대행(Acting Caporegime)을 맡기도 했다. 페론은 1966년~85년까지 약 19년 동안 FBI 측 정보원으로 활동해온 사실이 드러나 1988년에 마피아 측의 보복으로 살해되는 감비노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윌프레드 존슨 (사진)의 생명을 구한 과거가 있는데, FBI는 2005년 수사 과정에서 페론 본인이 직접 그 사건을 얘기하는 육성을 포착했다. 페론에 의하면 1960년대 당시 머리에 총상을 입은 존슨이 비틀거리며 자신의 레스토랑으로 들어오자 그를 뒤편으로 데려가 지혈한 뒤 소독을 마친 칼로 존슨의 머리에 박힌 총알을 도려내려 했지만 그가 비명을 지르며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에 페론은 함께 있던 자신의 형제로 하여금 존슨을 병원으로 데려가게 했다고 말하며 "그 개자식이 밀고자가 될 줄 알았으면 총알을 빼는 게 아니라 (칼로 찔러) 죽여버리는 건데."라고 덧붙였다.
  • FBI는 마피아를 수사하면서 때로 비열한 모습을 연출하곤 했다. 1984년 ‘4인의 돔(Four Doms)’이라 불린 빈센트 지간테의 심복들 중 한 명이자 제노비스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인 ‘대머리 돔’ 도미닉 칸테리노 (사진)를 수사하던 FBI는 그의 캐딜락 승용차에 도청기 설치 작전을 전개했다. 목욕 가운을 입은 지간테와 함께 걷는 칸테리노의 모습. 하지만 현장 요원의 실수로 자동차에 불이 붙었고 이내 곧 차량이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후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자동차를 잃은 칸테리노는 보험사로부터 2만 7천26달러의 보험금을 수령했고 새로운 자동차를 구입했다. 2년 뒤 연방정부는 자신들이 자동차에 불을 질렀으면서도 칸테리노가 보험금을 수령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동차에 불을 질렀다고 주장하며 그를 보험 사기 혐의로 기소하지만 결국 무죄판결이 내려진다.[147]
  • 세계 최대의 프로레슬링 단체인 WWE 빈스 맥마흔 시니어가 회사의 수장이었던 시절부터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노동조합과 뉴욕주 체육위원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노비스 패밀리에 사업 수익을 상납했다고 알려져 있다. # 아버지의 뒤를 이은 빈스 맥마흔 역시 제노비스 패밀리에 사업 수익을 상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는 1985년에 WWE 최초의 대형 이벤트인 레슬매니아 I을 개최하면서 입장 수익만 125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큰 성공을 거둔다. 일설에 의하면 빈스 맥마흔은 레슬매니아가 끝난 뒤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인 빈센트 지간테에게 사업 수익을 상납하면서 평소와 똑같은 금액을 지불하여 평소보다 높은 금액을 기대한 지간테의 분노를 샀다고 한다. # 훗날 빈스 맥마흔의 딸 스테파니 맥마흔은 아버지가 공격적인 사업 확장을 이유로 폭력배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은 적 있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는 등 가문의 프로레슬링 사업과 암흑가와의 연관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
  • 1981~85년 사이 마피아 위원회 회합에 제노비스 패밀리를 대표해 참석했던 인물은 빈센트 지간테의 앞잡이로 거리 책임자(Street Boss)를 맡고 있었던 앤서니 살레르노였다.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빈센트 카파로에 의하면 이 4년 동안 지간테가 직접 위원회 회합에 참석한 건 딱 1번뿐이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 회합은 야외에 FBI 요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발견되어 급하게 마무리되었는데, 당시 지간테를 포함한 모든 참석자들이 창문으로 탈출했으며 뚱뚱한 살레르노는 몸이 끼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148]
  • 1980년대 중반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 니콜라스 아우레타 (사진) 폴 카스텔라노로부터 약 450만 달러에 매입한 부동산을 다른 사람에게 700만~900만 달러 사이에 매각하여 약 250만~450만 달러 사이의 시세차익을 냈다. 이후 아우레타의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가 부동산 판매 수익의 300만 달러를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했고 동시기 카스텔라노를 살해하고 감비노 패밀리의 새로운 두목이 된 존 고티도 부동산 판매 수익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했다. 결국 1986년 10월 뉴욕 시 3번가 900번지 파라마운트 빌딩 내 변호사 사무실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 마피아 패밀리 간 담판이 벌어졌다. 당시 제노비스 패밀리 측에선 부두목(Underboss) 사베리오 산토라 (사진), 행동대장(Caporegime) 빈센트 디나폴리 (사진), 행동대장 리보리오 벨로모, 행동대원(Soldier) 루이스 디나폴리 (사진), 행동대원 빈센트 카파로가 담판에 참석했다. 양측의 치열한 논쟁 끝에 지간테와 고티 모두 부동산 판매 수익에 대한 권리가 없고 전 제노비스 패밀리 거리 책임자(Street Boss) 앤서니 살레르노가 부동산 판매 수익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결론이 내려졌다.[149]
  • 빈센트 지간테는 주요 목표였던 존 고티는 살아남고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데치코 (사진)만 살해된 1986년 폭탄 공격과 존 고티를 습격한 총잡이가 그의 수행원들에게 역으로 납치되어 살해된 1987년 총기 공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존 고티 제거 계획을 추진했다. 마피아는 철저한 비밀결사라는 생각을 가졌던 빈센트 지간테는 연예인 기질이 충만해 대중들의 큰 관심을 끈 존 고티를 경멸했고 나아가 자신이 소속된 마피아 위원회의 허가 없이 실행된 폴 카스텔라노 제거에 대한 처벌의 일환으로 존 고티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철저한 엘리트 코스를 밟고 패밀리의 두목(Boss)이 된 빈센트 지간테의 눈에 비친 존 고티의 퀸스 오존 파크 조직은 마피아 주류 세력에서 한참 벗어난 비주류 세력에 불과했기에 쉽사리 자신들의 사업 파트너로 인정하기 어려웠다. 당시 빈센트 지간테는 존 고티를 제거한 뒤 카를로 감비노 운전기사 출신의 제임스 파일라를 새 두목으로 지명할 계획이었다. 이렇듯 존 고티 제거 계획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1987~88년 사이 FBI가 제노비스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루이스 만나 (사진)를 도청한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당시 빈센트 지간테의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나는 존 고티의 사교클럽 근처에서 그를 살해하는 계획을 부하에게 설명하며 "위장을 해라 거긴 공개된 장소니까.(Wear a disguise, It's an open place.)"라고 얘기했다. FBI는 도청 내용을 토대로 입수한 정보를 존 고티 측에 전달할 법적•도덕적 의무가 있어 그에게 알렸다. 당시 존 고티에게 정보를 전달한 FBI 요원은 "당신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있습니다. 난 그들이 성공하길 바랍니다.(There's plot to kill you. I hope they succeed.)"라고 경고했는데, 그 요원에 의하면 제노비스 패밀리가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존 고티의 얼굴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Face dropped)고 한다. 이후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의 대화를 도청한 기록에 따르면 한 조직원이 "존 고티가 우리를 알아챘어.(John Gotti knows we.)"라고 얘기한다. 며칠 뒤 FBI는 만나와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제임스 나폴리 (사진)의 대화를 도청했다.
나폴리: 언제 작업합니까?
(When are you gonna hit him?)
만나: (존 고티의 동생) 진 고티는 죽은 목숨이야.
(Gene Gotti's dead.)
나폴리: 아시다시피 우리는 남은 평생 동안 이 대가를 치를 겁니다.
(We're gonna be paying for this, you know, for the rest of our lives.) [제임스_나폴리]
  • 한편, 제노비스 패밀리가 자신을 살해하는 음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존 고티는 빈센트 지간테에게 담판을 제안했다. 두목들의 만남에 앞서 존 고티의 안전에 관한 사항은 그의 동생 진 고티 (사진)가 확인했고 빈센트 지간테의 안전에 관한 사항은 그의 심복 도미닉 시릴로가 확인했다. 빈센트 지간테는 이 담판에서 존 고티에 대한 부하들의 음모를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며 만약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자신이 만나를 살해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뉴저지주경찰청장 클린턴 파가노가 "'턱'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의 승인 없이는 일이 진행될 수 없습니다."라고 지적했듯 다른 패밀리의 두목을 제거하는 중대한 계획을 부하들이 독자적으로 기획했다는 빈센트 지간테의 주장은 믿기 힘든 변명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볼키스를 나누며 표면적인 화해를 이루어냈다. 이후 빈센트 지간테의 속내를 알게 된 존 고티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만나와 그의 수하들을 잘 감시하라는 지시를 부하들에게 내렸다. 얼마 뒤 존 고티도 빈센트 지간테를 살해하고 자신과 가까운 알폰스 말랑곤 (사진)을 제노비스 패밀리의 새로운 두목으로 추대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FBI는 이 정보를 빈센트 지간테의 형 마리오 지간테 (사진)와 막냇동생 루이스 지간테 신부 (사진)에게 알렸다. 이후 빈센트 지간테의 아지트 트라이앵글 사교클럽 (사진) 일대 경비가 더 삼엄해졌고 빈센트 지간테의 자택 앞은 그의 운전기사 비토 팔미에리가 항시 지켰다.[151] 하지만 빈센트 지간테를 노리는 존 고티의 계획은 다른 패밀리들, 특히 루케시 패밀리의 지지를 받지 못해 실행할 수 없었다. 얼마 뒤 빈센트 지간테와 만나 갈등을 해결한 존 고티는 말랑곤을 호출해 "만약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턱'이 알게 되면 뭐라고 얘기할까? 자네가 말한 내용을 그가 알게 된다면?"이라고 위협하며 입단속을 시켰다. 훗날 빈센트 지간테의 전기를 쓴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래리 맥셰인은 ‘존 고티는 빈센트 지간테를 두려워했다’라는 이야기를 여러 수사기관 관계자와 전직 마피아로부터 들었다고 밝힌다. 대표적으로 FBI 뉴욕지국 감비노 패밀리 담당팀장 브루스 모우가 "존 고티는 빈센트 지간테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제노비스 패밀리가 가장 강력하고 억세며 악랄한 조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얘기했고 뉴욕동부지구 연방검사 그레고리 오코넬 역시 "반면 빈센트 지간테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그 의견에 동의했다. FBI의 대표적인 마피아 전문가 리처드 로스는 "여러분들은 존 고티가 두목들의 두목(Boss of all Bosses)이라는 헛소리를 듣고 계시지만 언제나 제노비스 패밀리가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범죄조직이었습니다."라고 얘기했다. 뉴욕 주 조직범죄전담반장 로널드 골드스톡도 "존 고티는 가장 신뢰하는 부하 조직원과 함께 있을 때조차 자신이 폴 카스텔라노를 살해한 배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자신의 위반 행동을 시인하면 그 소식이 어떤 식으로든 빈센트 지간테의 귀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정부 측 증인이 된 필라델피아 패밀리 부두목 필립 레오네티 (사진)는 "존 고티는 빈센트 지간테가 가진 권력을 자신은 절대로 누리지 못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을 것이다. 내 말은, 신문과 언론에서 존 고티를 말쑥한 두목으로 만들었지만 암흑가 사람들은 뉴욕의 진정한 권력자가 빈센트 지간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존 고티는 목욕 가운을 입은 그 남자를 결코 이길 수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마이클 비스콘티는 "'웨스트사이드(제노비스 패밀리)'는 감비노 패밀리와 달랐다. 존 고티는 자신이 두목이라고 말하는 듯한 정장을 입었다. 반면 우리 조직원들은 구멍 난 스웨터를 입었지만 아파트에 현금 5000만 달러를 갖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 빈센트 지간테는 가장 강력한 패밀리의 두목(Boss)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업을 논의하는 형태의 마피아 위원회 회합이 수사기관의 감시에 상당히 취약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위원회 재판 이후인 1986년부터 두목들의 정기적인 회동이 폐지되었는데, 1988년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와 루케시 패밀리 두목 비토리오 아무소 (사진)는 모처럼의 두목 간 회동을 추진했다. 지간테는 전령을 통해 의사를 교환하자며 계속 거부했지만 신임 콜롬보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의 위원회 참여를 다루는 중대한 문제는 만나서 논의해야 한다는 그들의 설득에 마지못해 동의하는 대신 회동을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프랭크 다폴리토 형의 아파트에서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지간테가 그 아파트를 약속 장소로 정한 진짜 이유는 자신의 친척이 같은 건물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회동 전날 친척 집에 잔 뒤 회동 당일 목욕 가운을 입고 부두목(Underboss) 베네로 망가노 (사진)와 함께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즉, 지간테는 자신이 회동에 참석하는 모습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그 아파트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다. 회동을 마친 뒤 고티는 부두목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에게 지간테의 교활함을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는 자신이 존 고티를 배신한 이유 중 하나로 고티에게 빈센트 지간테 살해 지시를 받은 일화를 꼽았다. 그라바노에 의하면 고티는 자신을 제거하고 싶어 했지만 마땅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지간테를 살해하라는 무리한 지시를 내렸고 만약 자신이 그 지시를 수행했다면 반드시 제노비스 패밀리의 보복으로 살해되어 결과적으로 고티의 뜻대로 되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
  • 미국 연방법원 문서에 따르면 1989년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앤서니 토르토렐로 (사진)가 사석에서 빈센트 지간테의 아내 혹은 애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아마 지간테의 두 집 살림을 겨냥한 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상술했듯 이탈리아계 마피아는 조직원의 두 집 살림을 금지하지만 지간테에겐 그러한 규율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토르토렐로는 행동대원(Soldier) 시절의 지간테가 1959년에 마약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실을 지적하며 그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이 된 뒤 특정 부하들에게 마약 사업을 허가한 채 그들로부터 막대한 범죄수익을 상납 받으면서 대다수의 다른 정규조직원들에겐 마약 사업을 금지하는 모습이 위선적이라고 말했다.[152] 이후 토르토렐로의 험담 소식을 들은 지간테는 격분했고 루케시 패밀리 두목 비토리오 아무소 (사진)에게 그를 살해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아무소는 자신의 행동대장을 그렇게 쉽게 죽일 순 없다고 말하며 지간테의 요구를 거절하는 대신 토르토렐로에게 가하는 폭행을 허가했다. 이후 루케시 패밀리 수뇌부의 귀띔을 받은 토르토렐로는 자신이 폭행당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한동안 깁스를 하고 뉴욕 시내를 돌아다녔다. 이 모습을 본 지간테는 토르토렐로가 충분한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흡족해했다고 한다. #
  • 1990년 뉴욕 시 맨해튼 헴슬리 팰리스 호텔에서 열린 존 고티의 아들 존 고티 주니어 (사진)의 결혼식엔 약 38만 달러의 축의금이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들은 모두 5000달러 이상의 축의금을 전달했고 다른 뉴욕 5대 패밀리 뉴저지 주 데카발칸테 패밀리 수뇌부도 축의금을 전달했지만 평소 고티를 경멸해온 빈센트 지간테를 위시로 한 제노비스 패밀리 수뇌부는 아무도 축의금을 전달하지 않았다.[153] 다음은 FBI가 파악한 주요 축의금 전달 명단이다. #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살바토레 그라바노 - 7500달러
상담역 프랭크 로카시오 - 2000달러
행동대장 존 다미코 - 1만 달러
행동대장 진 고티(수감 중) - 5000달러
고위 추종세력 조셉 왓츠 - 9300달러

루케시 패밀리
두목 비토리오 아무소
부두목 앤서니 카소
행동대장 피터 치오도
- 도합 1만 달러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 - 0달러
부두목 베네로 망가노 - 0달러
상담역 제임스 아이다 - 0달러
행동대장 알폰스 말랑곤 - 5000달러
행동대장 살바토레 롬바르디 - 1000달러
행동대원 조셉 갈리지아 - 1000달러

보난노 패밀리
두목 조셉 마시노(수감 중) - 1000달러
부두목 살바토레 비탈레 - 4000달러
상담역 앤서니 스페로 - 4000달러

콜롬보 패밀리
두목 카마인 페르시코(수감 중) - 1000달러
두목 대행 비토리오 오레나 - 6000달러
부두목 조셉 스코포 - 5000달러
상담역 빈센트 알로이 - 1000달러

데카발칸테 패밀리
두목 지오바니 리지 - 3000달러
  • 빈센트 지간테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기에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살바토레 프로파치의 사돈인 살바토레 아베나 변호사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추종세력(High-level Associate)이자 1억 달러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폐기물관리업계의 거물 카마인 프랑코 (사진)와 분쟁이 있어 그를 고소했다. 이후 프로파치가 아베나를 찾아와 고소 취하를 종용했는데, 뉴욕의 두목들이 법정이 아닌 '명예의 법정'에서 갈등을 해결하길 원하며 프랑코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최고소득자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이에 아베나는 자신의 금전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에 고소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며 항변했지만 프로파치로부터 "그건 사업에 해롭습니다. 제노비스 패밀리는 너무 강력해서 우리 모두 다칠 겁니다. 우리 집단은 서로 고소하지 않습니다. 우리 집단은 서로 죽입니다.(It’s bad for business. The Genovese Family is too big, we’re all gonna get hurt from this. Goodfellas don't sue Goodfellas. Goodfellas kill Goodfellas.)"라는 대답을 들었다. 얼마 안 가 고소는 취하되었고 아베나와 프랑코는 법정 밖에서 합의를 보았다. 이후에도 프랑코는 뉴욕 대도시권 일대의 폐기물관리업계를 장악하기 위한 부정한 계획을 세운 혐의 등으로 약 1년의 수감생활을 겪기도 하는 등 마피아와의 관계를 이어오다 2020년에 85세로 사망했다.
폐기물관리업계와 마피아의 관계 및 카마인 프랑코를 다룬 뉴스
  • 상술한 안토니오 카포니그로 (사진) 제거 일화에서 알 수 있듯 빈센트 지간테는 1980년대 초반 필라델피아 패밀리 내부 항쟁에 개입했다. 한편, 2000년에 정부 측 증인이 된 필라델피아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피터 카프리오에 의하면 당시 수감 중이었던 지간테가 1999~2000년에도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수뇌부를 제거하는 대담한 계획을 승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카프리오는 1990년대 필라델피아 마피아 항쟁의 최종 승자가 되어 필라델피아 패밀리를 장악한 두목(Boss) 조셉 멀리노를 축출하는 뉴욕 마피아의 계획에 자신이 가담했다고 밝혔는데, 그는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 앤서니 프로토 (사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로렌스 리치 (사진)와 공모하여 당대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조셉 리감비 (사진)가 포함된 멀리노의 심복 3명을 한꺼번에 살해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지간테와 존 고티를 위시로 한 뉴욕 마피아 수뇌부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얼마 뒤 필라델피아의 슬롯머신 사업을 노리는 뉴욕 마피아의 계획이 리감비에 의해 좌절되자 뉴욕 마피아 수뇌부에선 기존에 수립한 3인 제거 계획을 재추진하기 시작했고 계획이 시행되기 직전에 카프리오가 다른 범죄 혐의로 FBI에 체포되면서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카프리오는 만약 계획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면 자신이 멀리노의 세력을 축출하거나 흡수한 뒤 뉴욕 마피아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새로운 두목이 될 예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리감비 등 자신이 살해할 예정이었던 대상자들에 대해 "그들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그게 마피아의 방식이니까.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다."라고 얘기했다.
  • 뉴욕 포스트에 의해 '우리 도시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곳 중 하나'로 묘사된 레스토랑 레오's 빌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같은 유명 인사들의 단골집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러키 루치아노, 존 고티 같은 거물 마피아들의 단골집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레오's 측이 낸 광고 중에는 '지금까지 오직 성공한 남자들만(원문으로 Made Men, 마피아 정규조직원을 뜻함) 우리 레스토랑의 테이블을 잡을 수 있었다'라는 문구가 있다. 즉, 레스토랑 측에서도 의도적으로 마피아 이미지를 홍보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레오's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마피아 고위 간부와 노동조합 고위 간부의 모습. 과연 이런 명소이다 보니 이곳의 지정석을 두고 거물급 마피아 간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오랫동안 레오's에 주말 지정석을 갖고 있었던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앤서니 바라타 (사진)는 1993년에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된 뒤에도 자신의 권리를 잃지 않아 그의 대리인과 지인들이 계속 지정석을 사용했다. 하지만 2001년에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 존 아르디토 (사진)가 바라타의 지정석을 뺏기 위해 제노비스 패밀리 고위 간부 3명 어니스트 무스카렐라 (사진), 도미닉 시릴로, 리보리오 벨로모의 지지를 구해오라고 피터 펠루소 변호사에게 지시했다. 당시 수감 중이었던 벨로모는 연방교도소 접견장에서 만난 펠루소가 아르디토의 지정석 분쟁을 언급하자 어디 그런 사소한 문제에 자신을 끌어들이느냐며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교정시설에서 제노비스 패밀리를 관리하던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가 이런 작은 분쟁에도 개입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런 동생을 대신해 일상적인 조직 관리를 맡고 있었던 두목 대행(Acting Boss) 마리오 지간테 (사진)가 분쟁에 개입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중재자가 된 마리오 지간테는 자기 패밀리 소속인 아르디토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 대신 바라타의 지정석을 약 2개월 뒤 출소하는 다른 루케시 패밀리 고위 간부에게 이만 양도하라는 비교적 균형 잡힌 결론을 내림으로써 양측의 분쟁을 원만히 해결했다.[154]
  • 2001년 FBI는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이 저녁식사 자리에서 전•현직 패밀리 지도자들인 필립 롬바르도 (사진), 앤서니 살레르노, 빈센트 지간테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를 도청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90세의 행동대원(Soldier) 앨버트 파치아노 (사진)도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의 대화는 살인을 암시하는 심각한 주제로 이어졌는데, 고령의 파치아노가 자신이 직접 살인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고위 간부 조셉 지토 (사진)가 위험한 작업은 젊은 조직원들에게 맡기라고 하며 만류했지만 파치아노는 전혀 굴하지 않고 "은퇴는 없소. 오늘 당장이라도 패밀리를 위해 살인을 저지를 거니까."라고 대답했다. [앨버트_파치아노]
  • 2004년 마피아 수사를 하던 FBI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패밀리(제노비스 패밀리)는 다르다.'라고 생각한다. 여러모로 그들 생각이 맞다. /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두목(빈센트 지간테)뿐이다. 반면 이 사람들(감비노 패밀리)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체 조직원들이 다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안젤로 프리스코 (사진)의 육성을 포착했다. # 시간이 흘러 2008년 프리스코는 연방교도소에서 FBI 요원들과의 면담 도중 '제노비스 패밀리의 진정한 두목(빈센트 지간테)은 단 한 명이었지만 그는 이제 죽었고 현재 혹은 이전의 두목들은 모두 대행(Acting)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
  • 2005년 연매출 1억 8600만 달러를 달성한 워스건설사(Worth Construction)가 수십 년 전부터 빈센트 지간테의 제노비스 패밀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지적이 나왔다. #
  • 2014년 2번의 산업재해를 겪고 영구적인 장애인이 된 토마스 케니란 노동자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 그는 과거 어머니의 애인이었던 빈센트 지간테를 그리워하며 "만약 지금 그가 제 주변에 있었으면 누군가가 저를 방문했을 것이고 저는 누군가로부터 '케니 씨, 우리가 당신을 위해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전화를 받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케니는 1970년 9월에 기계공으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연금을 받을 자격이 되기 전인 1989년에 산업재해를 겪고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고는 그의 코를 재건하고 뼈와 턱의 일부를 확인하는 3번의 성형수술로 이어졌다. 이후 케니는 아내와 뇌전증을 앓고 있는 아들을 부양하면서 혈액희석제와 진통제뿐만 아니라 항불안제와 항발작제를 포함한 다양한 처방약을 매일 복용하며 목발을 짚고 다닐 만큼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매달 보상금과 사회보장급여를 합친 1600달러로 생활하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그는 1970년대에 지간테에게 이틀간 자동차를 빌려준 대가로 무려 500달러라는 큰 액수를 받았다고 밝히며 마피아와 비교해 뉴욕 노동자보상위원회를 평가절하했다.[156]
  • 2018년에 정부 측 증인이 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존 페니시에 의하면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은 빈센트 지간테의 이름 언급 금지령을 그가 사망한 뒤에도 준수하고 있다고 한다. 페니시는 지간테가 사망한지 한참 지난 2010년대에도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이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자신들의 턱을 만지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밝혔다. #
  • 2021년 정부 측 증인 출신의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는 과거 빈센트 지간테와 있었던 일화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했다.[157]
마이클 프란지스가 회고하는 빈센트 지간테

3.4. 수감생활 관련

  • 1997년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된 빈센트 지간테의 수용자 번호는 26071-037이었다.
  • 빈센트 지간테가 수감되어 있었던 연방교도소 내 특별구역(Special observation section) 담당 교도관 크리스토퍼 색스턴은 지간테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저는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와 가족에 관한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그는 자신의 맨해튼 연립주택에 저를 초대하면서 그곳을 방문하면 자신의 가족들이 저를 환대해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설 내에서 그는 매우 카리스마 있었고 정중했으며 감수성이 예민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교도관을 괴롭힌 한 수용자에 대해 매우 화가 나 교도관의 안전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당신을 돕기 위해 감방을 나오고 싶었지만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라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는 교도소 수용자들의 지도자였지만 일반 수용자들과 함께 있는 걸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불필요하게 어울려야 하고 수용자들은 항상 이야기를 지어내기 때문에 그런 거짓말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접견실에서 다른 수용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는 즉시 그 수용자를 향해 "쉿!"이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는 마피아를 배신한 살바토레 그라바노를 '빌어먹을 쥐새끼에 쓸모없는 인간쓰레기(Fucking rat, worthless piece of shit)'로 묘사했고 자신의 후견인 비토 제노비스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그는 의료과장님이 순시를 도는 모습을 보고 "저 망할 계집이 이곳의 책임자요?(The fucking broad that runs this joint?)"라고 물어 저를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시설로 이송을 가면 FBI 요원들이 저를 찾아와 자신이 이곳에서 보인 행동들에 대해 질문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 빈센트 지간테가 수감되어 있었던 연방교도소의 간호사 샤론 브라운은 지간테의 시설 내 영향력을 보여주는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금지된 물건을 가지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문제 수용자가 있었습니다. 그 수용자는 주간이고 야간이고 할 것 없이 소란을 피우며 직원들의 근무와 다른 수용자들의 생활을 방해했습니다. 어느 날 지간테 씨가 저와의 면담을 마치고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수용자의 감방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소란을 피우는 모습을 본 지간테 씨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수용자는 즉시 소란을 멈추고 "제 이름은 조르지오 로즈베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지간테 씨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매우 강압적으로 "입 좀 닥치게 신경에 거슬리니까.(You need to shut up, you are getting on my nerves.)"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수용자가 "예?(Huh?)"라고 대답하자 지간테 씨는 다시 한번 "입 좀 닥치라고 신경에 거슬리니까.(You need to shut up, you are getting on my nerves.)"라고 얘기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그 수용자는 두 번 다시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 빈센트 지간테의 담당 교도관 크리스토퍼 색스턴과 담당 간호사 샤론 브라운이 얘기했듯 교정시설에서의 지간테는 일반 직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매우 활동적이었다. 반면 정신과의사의 진찰을 받을 때면 스스로 고립되려 했으며 몇몇 의사들의 조사에 적대적이었다. 실제로 지간테의 정신질환자 연기를 2년 동안 관찰한 교정시설의 정신과의사는 "지간테 씨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수년간 '미치광이 연기'를 지속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스스로를 가장 교활한 범죄자 대열에 올려놓습니다.(Mr. Gigante's case is truly fascinating, his ability to sustain his 'crazy act' over many years places Gigante in the ranks of the most cunning of criminals.)"라고 말했다. 교정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지간테는 처음 수감된 1997년 8월에 "전 미치지 않았습니다 의사선생님."이라고 멀쩡히 얘기했지만 12일 뒤 태도를 바꿔 "밤중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뮤지컬을 공연하러 저를 찾아왔습니다."라고 정신 나간 듯 얘기했다. 1998년 4월엔 "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하느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나쁜 사람이 하는 나쁜 말도 가끔 듣습니다."라고 정신 나간 듯 얘기했다. 1999년엔 "외람되게도 전 당신들을 매우 좋아하지만 어떤 대화도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심리검사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전 여전히 형기를 채워야 하니까요."라고 멀쩡히 얘기했고 휴가에서 돌아온 간호사에게 "안녕하세요 마샤 씨. 어떻게 지냈어요?"라고 친근하고 멀쩡하게 말을 걸었지만 얼마 뒤 태도를 바꿔 샤워와 면도를 거부하고 자신을 고문하고 학대한 혐의로 교정당국을 고소했다. 2002년엔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느 누구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전 누구에게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웃으며 얘기했다. 이에 정신과의사가 그의 전과를 지적하자 "그것이 무엇이든 전 결백합니다."라고 멀쩡히 대답했다. 2003년엔 " 사탄의 야간 방문으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라고 정신 나간 듯 얘기했다. 그로부터 약 5개월 뒤 지간테는 연방법원에서 자신의 정신질환자 행세가 모두 거짓이었다고 인정하지만 그 후에도 그의 오랜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년의 지간테는 교정시설 내 의사를 비롯한 직원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었는데, 주로 각자 가족들의 안부를 묻거나 자식(손자) 교육에 관한 견해를 나누었다.
  • 연방교도소에 수감될 당시 고질적인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던 빈센트 지간테는 교정시설에 비치된 전화기로 아내와 통화하며 의사에게 진료받은 이야기와 처방받은 약 이야기를 주로 하곤 했다. 그는 자신의 담당의가 최고의 의사는 아닐지언정 그럭저럭 괜찮은 의사이며 본인에게 상당히 친절하다고 말하는 등 의사소통을 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지간테의 변호인이었던 벤자민 브리프만 변호사 (사진)는 본인의 또 다른 의뢰인이자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에게 자신이 텍사스 주 포트워스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지간테를 접견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해 깜짝 놀랐다고 밝힌 바 있다.
  • 2001년 4월 30일 연방정부는 빈센트 지간테가 교정시설에서 아내와 통화하며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질환자 연기를 하면서도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수준 높은 농담을 구사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지간테: 내가 TV에 나왔다던데?
(Somebody says I was on TV?)
아내: 맞아.
(Yes, you are.)
지간테: 무슨 주제로?
(About what?)
아내: 난 못 봤어. 몰라.
(I haven't seen it. I don't know.)
지간테: 그놈들이 뭐래?
(What'd they say?)
아내: 당신 소식은 짧고 아주 빠르게 지나가서...
(They said that you were on briefly, very quickly but that...)
지간테: 내가 어떤 혐의로 기소됐다던데.
(But they says I'm indicted on something.)
아내: 내가 아는 거라곤 몇몇 사람들이 체포된 거야. TV에선 그 사람들이 패밀리에 속해있고 당신이 텍사스 주에서 (패밀리를) 관리했대.
(All I know is, they said some men were arrested. They said they were with a family and you were running it from Texas.)
지간테: 내가 (패밀리를) 관리한다고?
(I'm running it?)
아내: 응.
(Yeah.)
지간테: 난 (교도소) 운동장을 뛰고 있는데.
(I'm running around the park.)
  • 2001년 9월 빈센트 지간테는 교정시설 TV를 통해 9.11 테러 소식을 접하자마자 자신의 사생아인 빈센트 에스포지토 (사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그는 "몇 명이 죽었어?", "안에 아이들이 있었나?", "맙소사.", "그들을 위해 기도할게.",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의 안전을 확보해."와 같은 말들을 남겼다. 이는 지간테가 수감된 후 처음으로 정신질환자 연기를 일절 하지 않고 가족과 통화를 한순간인데, 훗날 연방정부는 이 일화를 통해 지간테의 정신건강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 연방교도소에서 빈센트 지간테와 친분을 쌓은 시카고의 젊은 마약왕 제임스 킨(지미 킨)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시카고 경찰서장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생 때까지 우수한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지만 결국 대학 진학에 실패하여 암흑가에 투신했다. 단기간에 거물 마약상이 된 킨은 연간 1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등 시카고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독자적인 마약왕이 되었다. 하지만 1996년에 불과 17살의 나이로 DEA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2년 뒤 그를 기소했던 연방검사가 찾아와 20명이 넘는 소녀를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래리 홀의 신뢰를 얻어 그의 자백을 이끌어내면 형량을 감형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당시 연방검사는 홀에게 제기한 1건의 살인 혐의를 입증하는데 성공하여 그를 구속해놓은 상황이지만 물증이 부족해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고민하던 킨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비밀 임무를 위한 위장 신분으로 홀이 수감 중인 연방교정의료센터로 이송을 갔다.[158] 새 시설로 이송된 킨은 자신의 비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홀의 주위를 맴돌며 그와 가까워질 기회를 노렸고 때때로 경호원처럼 보이는 부하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었던 마피아 두목(Boss) 지간테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간테의 부하들이 킨을 찾아와 그를 지간테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이윽고 킨을 대면한 지간테는 대뜸 "질문 하나 하지 자네는 왜 영아살해범 따위와 어울리나?(Lemme ask you a question, Why you hangin’ around with them Baby Killers?)"라고 물었다. 이에 당황한 킨은 홀이 영아살해범인지 몰랐다고 변명했다. 이후 킨이 3/4 이탈리아 혈통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간테는 그를 부하로 거두어주며 아침식사, 카드게임, 보체 등을 그와 함께했다. 한편,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과의 친밀한 관계는 킨의 시설 내 위상을 드높이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정작 홀의 자백을 이끌어내야 하는 그의 비밀 임무에는 큰 지장을 주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일과시간 동안 지간테의 곁에 머물러야 했던 킨은 홀 같은 저급한 범죄자들과의 접촉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임무 완수를 위해선 일과가 종료된 뒤에야 잠시 시간을 내 서로의 감방에서 짧은 대화를 나누며 정보를 수집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끈질기게 홀의 자백을 이끌어낸 킨은 비록 피해자들의 시신을 찾는덴 실패했지만 수사기관에 큰 공헌을 한 사실이 인정되어 약 17개월의 복역을 마치고 1999년에 출소할 수 있었다. 그는 2010년에 악마와 함께: 타락한 영웅, 연쇄살인범, 그리고 구원을 위한 위험한 거래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간했고 이 책을 원작으로 2022년에 Apple TV+ 드라마 블랙 버드가 제작되었다.[159]

4. 어록

이건 당신을 위한 겁니다 프랭크!
This is for you, Frank!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프랭크 코스텔로에게 총격을 가하면서 한 말. #
아니 당신 미친 소리를 하는군.
Nah, you're crazy.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프랭크 코스텔로를 저격한 뒤 보복이 두려워 자수를 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
고맙게 됐습니다 프랭크.
Thanks, Frank.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프랭크 코스텔로 총격사건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코스텔로와 악수하며 한 말. #[160]
이 회합은 결국 모두를 감옥에 가두게 될 거요. 위원회는 오직 누구를 죽일지 살릴지 결정할 때에만 소집되어야 해.
These meetings would end up putting everyone in prison. The Commission should only meet to take a life or save a life.
사소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마피아 위원회 회합에서 한 말. #
안젤로 브루노 살인에 가담한 모든 사람을 죽이시오. 한 명도 남김없이!
Kill everyone involved in the killing of Angelo Bruno. Everybody!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Boss) 니코데모 스카르포에게 마피아 위원회의 허가 없이 전임 두목 안젤로 브루노를 살해한 조직 내 하극상을 정리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한 말. #
이 장례식장을 살아서 나가려면 운이 좋아야 할 거요.
Lucky to leave this wake alive.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의 장례식장에서 루케시 패밀리 두목(Boss) 비토리오 아무소와 창문 사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 말. #[161]
우리 조직은 강등 처분 같은 건 안 해 그냥 죽이지.
We don't break our capos, we kill them.
마피아 위원회의 허가 없이 마약을 유통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의 처벌 수위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위원회 회합에서 한 말. #[162]
만약 자네가 나와 함께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환영일세. 우리 패밀리로 옮겨올 수 있도록 내가 준비해놓겠네. 이건 공식 제안이야.
If you ever want to come and be with me, you can be with me. I’ll work it out, I’ll move you to my family. That’s an open offer to you.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에게 이적을 제의하며 한 말. #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내가 미쳤다고 말하게 자네도 내가 미쳤다는 걸 알고 있잖아 안 그런가?
Don't be afraid to tell people I'm crazy, because you know I'm crazy, don't you?
부하에게 자신이 미쳤다는 이야기를 널리 퍼트리라고 지시하며 한 말. #
판사...?
Judge...?
마피아 창문 재판(Mafia Windows Case)으로 체포된 뒤 연방판사의 보석허가 결정에 따라 불구속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FBI 요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며 한 말. #
정말 멋진 결혼식이군.
What a nice wedding.
마피아 창문 재판(Mafia Windows Case) 당시 혼잡한 법정을 둘러보며 한 말. #
어느 누구도 내겐 개기지 않소.
Nobody fucks with me.
다른 수용자들이 괴롭히거나 귀찮게 하거나 부탁을 들어달라고 할까 봐 걱정되냐는 교도관의 질문에 대한 답변. #
난 (교도소) 운동장을 뛰고 있는데.
I'm running around the (prison) park.
연방교도소에서 아내와 통화하며 교정시설에서 제노비스 패밀리를 관리(running)했냐는 질문에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답변. #

5. 평판 및 평가

빈센트 '턱' 지간테는 의심의 여지 없이 20세기 후반의 가장 강력하고 흥미로우며 부유한 마피아 두목이었습니다. / 마피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고 두려우며 교활하고 폭압적인 지도자는 빈센트 '턱' 지간테였습니다. 여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Vincent 'Chin' Gigante was unquestionably the most powerful, most intriguing and wealthiest mob boss of the late 20th century. / Inside the mafia the most respected, feared, cunning and tyrannical leader was Vincent 'Chin' Gigante. No question about it.
뉴욕 타임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셀윈 랍 # #
저는 그와 같은 마피아 내력을 가진 사람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비토 제노비스의 제자이자 (프랭크) 코스텔로를 살해할 뻔했으며 결국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두목이 된 사람을. / 마피아는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사람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I can't think of anyone with a mob pedigree like his: Protégé of Vito Genovese, would-be killer of (Frank) Costello, and ultimately the most powerful mob boss in the United States. / The mob will never see his like again.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래리 맥셰인 #
저는 (빈센트 지간테가) 미래 마피아 조직의 롤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I think (Vincent Gigante is) the role model of the future in the mob organization.
포덤 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아브라함 아브라모프스키 #
무슨 위원회? 위원회는 곧 그 사람이다.
What Commission? The Commission was him.
루케시 패밀리 두목(Boss) 앤서니 코랄로 #[163]
그는 여우처럼 교활하다.
He's crazy like a fox.
감비노 패밀리 두목(Boss) 존 고티 #
우리 세계에 대해 '턱' 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 만약 그가 잡히면 망할 정신병원에서 보낸 그 모든 세월은 전부 헛수고가 될 것이다. / 그는 그곳(트라이앵글 사교클럽)에서 독재자처럼 군림한다.
Nobody knows more about this thing than 'Chin' does. / If he gets pinched, all those years in the fucking asylum would be for nothing. / He stays there(Triangle Social Club) like a dictator.
제노비스 패밀리 거리 책임자(Street Boss) 앤서니 살레르노 # # #
'턱'은 '뚱뚱한 토니(앤서니 살레르노)' 보다 5배는 더 악랄했고 모든 면에서 더 똑똑했으며 더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 난 마피아 전체를 통틀어 그에게 엿 먹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1초 이내에 당신을 죽일 것이다. 그는 모든 부하들의 사랑을 받았고 단단한 패밀리를 관리했다. / '턱'의 곁에는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만약) '지간테'란 이름을 언급한 콜롬보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이 있다면 (아마) 그는 그 조직원을 호출한 뒤 자신의 이름을 언급한 죄를 물어 죽였을 것이다.
'Chin' was five times more vicious, smarter in every way, and had a bigger following than 'Fat Tony(Anthony Salerno).' / I don't know anybody in the mafia who would have said fuck him. (if you say so) He will kill you in a second flat, no hesitation whatever. Everybody under him loved him, and he had run a tight family. / 'Chin' didn't have, nobody comes near him. (if) There was a made guy in the Colombo Family who used his name 'Gigante' (probably) he had him called, then he to get killed because he used his name.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 # # #
삼촌은 어느 누구도 존경하지 않았지만 '턱'은 존경했다.
My uncle didn't respect anybody, but he respected 'Chin.'
정부 측 증인이 된 필라델피아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필립 레오네티 #[164]
그(폴 카스텔라노)와 '턱'은 정규조직원이 마약 혐의로 체포되거나 마약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들을 죽이는 협정을 맺었다. 수뇌부 회의도 담판도 아무것도 없이 그냥 죽일 것이다.
Him(Paul Castellano) and 'Chin' made a pact, any friend of ours that gets pinched for junk, or that they hear of anything about junk, they kill them. No administration, no meeting, no nothing, just gonna kill him.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안젤로 루지에로 #
당시 '턱'은 뉴욕 시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보통 가졌다. / 당시 그는 거리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그랬다. / (아버지께서는) 항상 "뉴욕의 진정한 권력자가 '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라."라고 말씀하셨다.
'Chin' was the most powerful guy in New York City at that point. So he wanted something, most of the time he was going to get it. / He really was the most powerful guy on the street at that point in time. He really was. / (my father) Said, "Just remember who the real power in New York is, and that's 'Chin.'" It's always said that.
정부 측 증인이 된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 # # #[165]
우리 조직(보르가타)에 대해 말씀드리면 현재 '턱' 지간테는 거리에서 명확한 두목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간테는 외부인들에겐 기괴하고 미친 행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그는 빈틈없고 경험 많은 패밀리 구성원이자 행동대원에서 행동대장을 거쳐 두목이 된 인물입니다. 그가 미쳤다는 것을 외부에 암시하는 그의 이상한 행동은 그를 사법당국으로부터 격리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새뮤얼 넌 연방상원의원 : 당신은 그가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겁니까?)
저는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As for our own brugad(borgata), 'Chin' Gigante is now clearly recognized on the streets as the boss. To the outside world, Gigante is known for his sometimes bizarre and crazy behavior. In truth, he is a shrewd and experienced family member, who has risen through the ranks from: soldier to capo to boss. His strange behavior, suggesting to the outside world that he is crazy, helps to further insulate him from the authorities.
(U.S. Senator Samuel Nunn : You are saying he is not crazy?)
I do not think so.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빈센트 카파로의 연방상원의회 증언 #
의심의 여지 없이 빈센트 '턱' 지간테는 우리 세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파란만장한 마피아 두목 중 하나였다. 조직 세계에서 일명 '웨스트사이드'로 알려진 제노비스 패밀리의 이 악명 높은 두목은 기이한 행동으로 '괴상한 대부'란 별명이 붙었다. 그는 면도를 하지 않고 헝클어진 머리에 목욕 가운만 걸친 채 뉴욕 시 그리니치 빌리지 보도를 터벅터벅 걸었다. 주차요금기에 말을 걸거나 소변을 보았다. 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국을 전통적인 공포로 통치한 교활하고 전설적인 두목이었다. 마피아 규율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위반하는 어느 누구라도 죽였다. 예를 들면 당신은 겨우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었다.
Unquestionably, Vincent 'Chin' Gigante was one of the most memorable and colorful mob bosses of our century. Notorious boss of the Genovese Crime Family, known as the 'West Side' amongst the guys in the life. Dubbed the 'Oddfather' for his bizarre behavior. Trudging along the sidewalks of Greenwich Village, New York unshaven, hair uncombed attired in only a bathrobe. Striking up a conversation with a parking meter or perhaps urinating on one. Dropping to his knees in mid stride to kneel and pray. Nevertheless, a legendary and cunning boss who ruled his empire the old fashioned way – by fear. Enforcing mob rules by killing anyone who violated them. An example of that was the mere mentioning of his name could be your death sentence.
정부 측 증인이 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존 페니시 #
그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하들이 아무도 살인에 나서려 하지 않았을 때 그 부하들 중 하나를 죽이라고 지시했다.
He was no pushover. When he hadn't one of his guys to go out and kill, he ordered one of his guys to get killed.
익명의 콜롬보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166]
(빈센트 지간테와 존 고티는) 스타일이 다릅니다. 결국 누군가가 누군가를 살해할 것이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제압할 것입니다. / 제 의견이요? 지간테는 살아남을 겁니다. 고티는 그렇지 못할 것이고.
(Vincent Gigante and John Gotti are) The styles don't match. That means somebody's going to kill somebody, that means somebody's going to overpower the other. / My opinion? Gigante will survive. Gotti will not.
뉴저지주경찰청장 클린턴 파가노 # #[167]
피고인은 10대에 깡패가 되어 1980년대까지 제노비스 패밀리의 수뇌부로 빠르게 올라가 미국 북동부 지역 마피아 활동을 조정하는 마피아 지도자들의 위원회를 통제했다. / 다른 범죄조직 두목들이 재판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는 동안 피고인은 거리 책임자들을 임명해 배후에 숨었으며 정신적 무능을 가장함으로써 자신의 범죄에 대한 기소를 피했다. / 제노비스 패밀리는 풀턴 어시장, 의류지구 내 사업체, 나이트클럽과 카지노, 콘크리트 및 창문 산업을 포함한 합법적인 경제 주체들을 통제하는 재량권을 휘둘렀다. 이러한 활동의 그 어느 것도 두목인 피고인의 승인 없이 일어나지 않았다. / 피고인은 거대한 범죄기업의 일상적인 사업을 꼼꼼하고 세심하게 통제했다. 이는 대기업 임원 수준의 재능과 지적 능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 지간테 씨는 범죄지도자였고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다른 범죄지도자들과 달리 뛰어난 솜씨로 자신의 흔적을 숨겼다.
He became a thug in his teens, quickly moving into leadership of the Genovese Crime Family by the 1980's and control of a Commission of mob leaders coordinating mafia activities in the Northeast of the United States. / By appointing street bosses to hide behind, and feigning mental incapacity, the defendant avoided prosecution for his crimes while other gang leaders were tried and sent to prison. / The Genovese Family had a hand in controlling legitimate economic entities, including the Fulton Fish Market, garment district companies, night clubs and casinos, and the concrete and windows industry. None of these activities occurred, without the permission of the boss, the defendant. / He exercised meticulous and detailed control of the day-to-day operations of a huge criminal enterprise. Required was the ability and intellectual capacity equivalent to that of the Executive Officer of a large conglomerate corporation. / Mr. Gigante was, and acted the role of, a criminal lord. But, unlike some other criminal leaders, he carefully covered his tracks with great skill.
뉴욕동부지구 연방판사 잭 와인스타인의 판결문 #
그는 모두가 응답해야 했던 두목들의 두목이었습니다. / 최고의 FBI 요원들이 약 20년 동안 노력한 결과 마침내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He was the Capo Di Tutti Capi the one they all had to answer to. / There are two decades of efforts by some of the best FBI agents that we had that ultimately succeeded in taking him down off his throne.
뉴욕동부지구 연방검사 그레고리 오코넬 # #
우리는 제노비스 패밀리를 다른 패밀리들과 같은 광범위한 혼란에 빠트린 적이 없습니다. 지간테의 비밀주의가 각 계층에 스며들었고 그것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만약 제노비스 패밀리의 누군가가 실수를 한다면 그들은 당신이 알아채기도 전에 살해될 것입니다.
We haven’t had widespread disruption of the Genoveses like we had with the other families. Gigante’s secrecy permeated the ranks — and it still exists. If someone in the Genovese family slips up, they’re dead before you know it.
FBI 뉴욕지국 조직범죄전담반장 데이비드 셰이퍼 #
그는 제가 본 가장 영리한 조직범죄자일 겁니다. / 그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에게 실수를 했다면 그에겐 그 실수가 당신을 살해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우리가 지간테를 무너트릴 수 있었던 것이 기분 좋습니다.
He was probably the most clever organized-crime figure I have ever seen. / He engendered so much fear in people. Because if you made a mistake, that would be enough for him to eliminate you. I feel personally good that we were able to take Gigante and take him down.
FBI 뉴욕지국 제노비스 패밀리 담당팀장 존 프리처드 3세 # #
존 고티는 지간테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제노비스 패밀리가 가장 강력하고 억세며 악랄한 패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John Gotti was terrified of Gigante. He knew that the Genovese were the most powerful family, very tough, a vicious family.
FBI 뉴욕지국 감비노 패밀리 담당팀장 브루스 모우 #
은퇴했든 안 했든 우리 업계 사람들은 비니(빈센트) 지간테를 존경한다고 말할 겁니다. / 고티와 지간테 모두 옛 집단에 대한 규율과 존경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일을 했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 그는 마지막 정통파 두목이었습니다.
People in my business, retired or not, will tell you they have respect for Vinnie(Vincent) Gigante. / Whether it be Gotti or Gigante, there was discipline and respect with the old crowd. They did their thing and we did our thing. But we give them respect. / He was the last of the old-school bosses.
NYPD 조직범죄전담반장 조셉 코피 # #
뉴욕 시에서 가장 강력한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범죄지도자 빈센트 지간테. (그분이) 제 아버지였습니다.
Vincent Gigante, although the most powerful crime boss in New York City, maybe even the world. (he) Was my dad.
딸 리타 지간테 #

6. 관련 문서



[1] 지간테가 시합을 가진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1925년에 개장한 3기 구장이다. 이 구장은 1968년에 리모델링 후 재개장하면서 4기 구장 시대를 열었다. [2] 지간테가 치른 대부분의 권투 시합은 마피아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3] 회사로부터 일정한 봉급을 받으며 실적에 따라 수수료까지 수령하는 영업사원은 마피아들이 아주 선호하는 직업이다. 이들은 결코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영업을 할 때도 은근한 공갈과 협박을 곁들이는 등 일반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4] 마피아의 역사를 다룬 국내 모(某) 카페 게시물에서 지간테가 22구경 권총을 사용했기 때문에 코스텔로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지지 않았다고 했지만 #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지간테는 38구경 권총을 사용했다. [5] 보통 마피아 세계에서 대상을 살해하는데 실패한 경우 처형과 같은 혹독한 처벌이 뒤따르지만 제노비스의 총애를 받던 지간테는 아무런 처분도 받지 않았다. 이에 대해 콜롬보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존 프란지스 (사진)는 애초에 지간테의 코스텔로 저격은 살해가 아닌 경고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 [6] 당시 코스텔로는 무죄판결을 받은 지간테를 자택으로 초대한 뒤 그를 용서하고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고 한다. [7] 당시 재판관에게 그리니치 빌리지와 리틀 이탈리아의 주민들이 쓴 탄원서가 쇄도했다. 그 탄원서엔 지간테가 지역 내 청소년들을 위해 한 선행과 봉사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재판관은 지간테의 형량을 결정할 때 이점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8] 이 건으로 수감된 리조는 약 8년간 복역한 뒤 1981년에 출소한다. [9]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은 1990년에 개봉한 영화 대부 3편 각본에 영감을 제공했다. (영화 속 길데이 대주교 캐릭터의 모티브가 마르친쿠스 대주교다.) [바티칸은행_비리_의혹_후일담] 1978년 바티칸의 개혁을 추구한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즉위한 지 약 1개월 만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훗날 본인을 콜롬보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출신으로 소개한 러키 루치아노의 조카 앤서니 레이몬디가 자신이 바티칸은행 내 비리를 밝히려는 교황을 독살하는 데 가담했다고 고백한다. # (하지만 이 사람의 말이 신빙성이 있는지 없는지,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1979년 마피아-마르친쿠스 대주교-바티칸은행의 수상한 관계를 취재하던 이탈리아 기자가 살해된다. 1982년엔 바티칸은행 비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암브리시아노 은행장 로베르토 칼비 (사진) 런던에서 목을 맨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일명 신의 은행가(God's Banker)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칼비는 누군가에게 교살되어 숨이 끊어진 뒤 목이 매달린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를 살해한 범인은 검거되지 않았다. 이 살인사건의 유력한 배후로 상술한 시칠리아 마피아 고위 간부 칼로가 꼽힌다. [조셉_코피] 뉴욕 시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마로 알려진 데이비드 버코위츠를 최초로 심문했고 무하마드 알리의 지지단체인 네이션 오브 이슬람 회원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은 권투 선수 조 프레이저의 경호를 담당한 것으로도 유명한 코피는 운수노조원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노조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 아버지를 향해 총격을 가하는 마피아 조직원들을 목격한 뒤 충격에 빠진 그는 성인이 되어 경찰관이 되었고 NYPD에서 시작해 뉴욕 주 조직범죄전담반으로 자리를 옮겨 경력을 이어간 전설적인 마피아 수사관으로 성장했다. 1982년엔 마피아가 연루된 바티칸은행 비리 수사를 진행했던 자신의 경험과 기록을 바티칸 커넥션: 가톨릭 교회와 마피아 사이의 10억 달러 음모 실화(The Vatican Connection: The True Story of a Billion-Dollar Conspiracy Between the Catholic Church and the Mafia)라는 책으로 출간해 에드거상을 수상했다. (링크 속 책은 2018년 재판본이다.) 영부인 낸시 레이건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행사장에서 함께 춤을 출 파트너로 코피를 지목한 일화에서 잘 알 수 있듯 미국 국민들, 특히 뉴욕 시민들의 눈에 비친 그의 이미지는 법 집행에 단호하면서도 어딘가 여심을 흔드는 매력을 갖춘 아일랜드계 경찰관의 표본과 같았다. 한편, 마피아 수사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뉴욕 주 조직범죄전담반에서 정보계장을 지내기도 한 코피는 "가장 똑똑하고 교활하며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조직은 제노비스 패밀리였습니다."라고 평가했고 "제가 살면서 만난 가장 무서운 사람은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아니엘로 델라크로체 (사진)였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연방상원 법사위원회에서 뉴욕 5대 패밀리의 조직도를 설명하는 코피의 모습. 감비노 패밀리 두목(Boss) 폴 카스텔라노를 연행하는 코피의 모습. 제노비스 패밀리 거리 책임자(Street Boss) 프랭크 티에리를 연행하는 코피의 모습. [토마스_에볼리_살인사건] 1970년대 초반 제노비스 패밀리의 거리 책임자로 재직하던 토마스 에볼리는 자신이 패밀리의 두목(Boss)이 되길 원했고 그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감비노 패밀리 두목 카를로 감비노에게 약 400만 달러를 빌려 마약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의 사업은 수사기관에 의해 적발되었고 이후 감비노에게 빌린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하게 된 토마스 에볼리는 그 대가로 살해되었다. 여기엔 감비노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권력자를 자신과 가까운 프랭크 티에리 (사진)로 대체하기 위해 모든 사건을 설계했다는 대체 이론도 존재한다. 이후 치러진 토마스 에볼리의 장례식에는 그의 가족과 수사기관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13] 두 사건 모두 영화 아이리시맨에 등장한다. [14] 제2차 콜롬보 항쟁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마피아/국가/미국 문서의 뉴욕 5대 마피아 문단 콜롬보 패밀리 부분 참고. [15] 델라크로체 폭행의 주도자 래리 카르나는 사건 3개월 뒤 보복성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다. [갈로_파벌] 1962년 앨버트 갈로와 5명의 부하 조직원은 불이 난 아파트에 뛰어들어가 6명의 어린아이를 구조한 사례가 있다. 1966년 갈로 형제는 뉴욕시정부로부터 고용되어 백인 및 흑인 청년들 사이의 인종 간 긴장을 낮추는 업무를 맡았다. 당시 인종차별 욕설을 한 백인 청년을 앨버트 갈로가 때려눕히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본 아론 코타 지방검사가 마피아를 고용한 뉴욕시정부의 정책을 지적했지만 존 린지 뉴욕시장이 이를 두둔했다. 한편, 1974년에 부하들을 데리고 제노비스 패밀리로 이적한 앨버트 갈로는 시간이 흐른 뒤 행동대장 자리에 올랐고 2021년에도 생존해있다. 또 다른 갈로 파벌의 유력자이자 제2차 콜롬보 항쟁 과정에서 오른쪽 어깨에 총격을 당하기도 한 프랭크 일리아노 (사진) 역시 제노비스 패밀리에서 행동대장 자리에 올랐고 2014년에 사망했다. 의외로 한평생을 마피아로 살며 죽고 죽이는 항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두 사람이 생전에 경험한 가장 긴 형기는 고작 폭행죄로 복역한 6개월에 불과하다. 특히 앨버트 갈로와 일리아노를 위시로 한 갈로 파벌 구성원들은 끝까지 제노비스 패밀리와 지간테에게 충성을 바쳤다. [17] 훗날 정부 측 증인이 되는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는 자신이 지간테를 처음 만난 1976년 당시 본인의 직책은 행동대원이었고 지간테의 직책은 상담역이었다고 증언한다. [22구경_작업조] 22구경 작업조는 1970년대에 위원회의 지시를 받아 소음기가 장착된 22구경 권총으로 6명의 FBI 측 정보원이 포함된 20명을 살해했다고 알려진 집단이다. 공교롭게도 21번째 희생자로 알려진 갈리나는 38구경 권총으로 살해되었다. 아마 수사기관과 언론에서 22구경 권총을 주목하기 시작하자 무기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19] 지간테와 더불어 22구경 작업조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이들은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존 디질리오 (사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살바토레 브리굴리오 (사진),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 토마스 프린시페다. 당시 고위 간부였던 지간테가 감독자 역할을 하고 행동대원이었던 디질리오, 브리굴리오, 프린시페가 총잡이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브리굴리오는 제노비스 패밀리를 위해 50명 이상을 살해하고 일부 피해자를 고문하기까지 한 해결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호파를 다룬 영화 아이리시맨에도 등장한다. [20] 마피아 세계에서 자동차 트렁크에 시신을 유기하는 행위는 희생자가 자신의 범죄활동과 관련된 이유로 살해되었다는 상징이다. [21] 브루노 살인사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마피아/국가/미국 문서의 뉴욕 마피아 주요 인물 문단 필립 롬바르도 (사진) 부분 참고. [22] 부두목 산토라는 1987년에 사망하여 베네로 망가노 (사진)가 그 뒤를 이었다. 상담역 만나는 1989년에 2건의 살인교사, 2건의 살인공모, 공갈 혐의로 징역 80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제임스 아이다 (사진)가 그 뒤를 이었다. 아이다 역시 1997년에 여러 살인교사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그 뒤를 로렌스 덴티코 (사진)가 이었다. [23] 본래 살레르노는 병원에서 퇴원한 뒤 은퇴를 선언하고 뉴욕 주에 위치한 자신의 말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한평생 음지의 권력을 휘두르며 살아온 그에게 전원생활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따분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심복인 빈센트 카파로를 뉴욕 시로 보내 지간테에게 자신의 복귀를 허가받으라고 지시했다. 이후 지간테가 살레르노의 복귀를 허가했고 그를 거리 책임자로 활용한다. 당시 지간테는 카파로에게 만약 살레르노가 패밀리의 실권을 장악하려는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즉시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마피아_위원회_회합_승계설] 상술한 뉴욕대학교병원 승계설은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빈센트 카파로의 증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는 살레르노의 심복으로 활동하며 1980년대 패밀리 내 권력 투쟁을 생생히 지켜본 산증인이었다. 그런 까닭에 카파로의 증언은 가장 설득력이 높다고 평가받으며 2016년에 출간된 지간테의 전기에도 뉴욕대학교병원 승계설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는 알려진 것과 다소 차이가 있는 마피아 위원회 회합 승계설을 주장했다. 그라바노에 의하면 살레르노를 후계자로 지명한 제노비스 패밀리의 전임 두목이 살레르노보다 훨씬 세력이 강한 지간테가 무력으로 패밀리를 장악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지간테에게 살레르노를 살해하지 말 것을 부탁하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두목 자리를 승계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얼마 뒤 행동대원 신분의 그라바노가 마피아 수뇌부의 경호를 위해 참석한 위원회 회합에서 지간테가 공개적으로 살레르노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 살레르노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승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두 가설을 절충하면 제노비스 패밀리 내부에서 승계가 이루어진 장소는 뉴욕대학교병원이 맞으나 대외적으로 승계를 공식화 한 장소는 위원회 회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살레르노는 지간테보다 17살이나 더 많은 연장자이자 마피아 세계의 선배였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나마 살레르노가 지간테에게 두목 자리를 승계하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위원회가 소집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리오_지간테] 1950년대 중반에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된 마리오 지간테는 소싯적 빈센트 지간테와 함께 여러 마피아 살인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마리오 지간테는 1957년 프랭크 코스텔로 총격사건 다음 날 유력 용의자인 빈센트 지간테의 형이라는 이유로 그의 몸을 수색하려 한 NYPD 수사관을 폭행하여 벌금 25달러를 선고받는 등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유명했으며 능숙한 강도 솜씨로 일명 그림자(Shadow)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마리오 지간테는 1970년대에 연간 110만 보루 이상의 담배를 밀수했다거나 연간 5000만 달러 규모의 스포츠도박 사업을 관리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재판에서 모두 승소했다. 특히 폐기물관리업계에 깊이 관여한 그는 1970년대 후반에 행동대장이 되었고 1981년에 동생이 패밀리의 두목이 되자 조직 내 최고소득자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1983년에 대규모 고리대금업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공화당 소속 연방상원의원 알 다마토 루돌프 줄리아니 연방검사장에게 마리오 지간테의 형량이 무겁다는 항의 전화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년 뒤 마리오 지간테의 형량은 6년으로 감형되었는데, 당시 열성적인 변호인 측과 대조적으로 검찰 측에선 특별한 의견 표명을 하지 않는 등 감형을 수수방관하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훗날 마리오 지간테의 변호인 로이 콘이 형량을 줄이기 위해 줄리아니와 재판관에게 로비를 했다는 구체적인 의혹이 제기된다. 이에 한 관계자는 줄리아니가 마리오 지간테의 감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밝히며 법원에 항소가 계류 중이던 1984년 9월부터 1985년 1월 15일까지 줄리아니와 콘이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1984년 9월 이전에 두 사람이 만난 적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답변을 회피했다. # 당시 두목의 형인 마리오 지간테를 구제한 대가로 콘에게 17만 5천 달러를 전달했다고 주장한 마피아 변절자 빈센트 카파로의 증언으로 로비 혐의를 조사했으나 이렇다 할 정식 기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편, 빈센트 지간테는 자신의 심복들 중에서도 혈연관계인 마리오 지간테를 가장 신뢰했고 훗날 부재중인 자신을 대신해 패밀리 사업을 감독하는 두목 대행(Acting Boss) 직책을 그에게 맡긴다. [파스칼레_지간테와_랄프_지간테]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 출신의 파스칼레 지간테는 1983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14전 9승 3패 2무의 전적을 가진 웰터급 권투 선수 출신의 랄프 지간테는 1994년에 에이즈로 사망한다. 빈센트 지간테와 랄프 지간테의 모습. [27] 상술한 1970년대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에 제노비스 패밀리가 개입한 게 사실이라면 당시 두목 필립 롬바르도 (사진)의 입장에서 성직자 동생이 있는 빈센트 지간테를 사업을 관여시키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28] 지간테 신부와 SEBCO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문서 하단 여담 문단의 사생활 및 가족 관련 부분 참고. [29] 사진 속 시가를 문 인물이 피콜로. [30] 이 호텔은 실적 부진을 이유로 37년 만인 2021년에 철거되었다. # [드라이월_클럽] 드라이월 클럽의 핵심 인물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 빈센트 디나폴리 (사진)가 꼽힌다. 그는 1988년에 비위행위가 인정되어 징역 24년을 선고받지만 1991년 항소심 재판에서 이례적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32] 그나마 존 고티 같은 다른 패밀리의 수뇌부나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간부들은 지간테를 지칭할 때 ‘턱(Chin)’이란 별명을 언급하곤 했다. [33] 본인은 마피아가 아닌 평범한 배우지만, 브롱스에서 태어난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라 어릴 때부터 마피아를 옆에서 많이 보며 자랐고, 마피아와 접점이 없기가 힘든 클럽 바운서로도 일한 바 있다. 9살 때 동네에서 마피아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도 경찰에겐 아무것도 못 봤다고 증언해서 마피아들도 그를 꽤 좋아했다고 한다. 각종 영화에서 역사 속 실제 마피아들의 역할을 많이 맡기까지 해서, 하여튼 마피아에 대해서는 빠삭할 것이다. [34] 롬바르도 역시 위원회 회합에 본인 대신 프랭크 티에리 (사진) 같은 거리 책임자를 참석시키곤 했다. [35] 지간테의 카페는 일반 손님을 받지 않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아지트 트라이앵글 사교클럽 (사진)이었다. [존_프리처드_3세] 프리처드 3세는 훗날 빌 클린턴 대통령 탄핵 소추 사건의 도화선인 르윈스키 스캔들 수사를 지휘하게 되는 FBI 국장 루이스 프리, 초대 뉴욕주감찰관이 되는 조셉 스피넬리와 함께 FBI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들의 수사를 맡았다. 그들은 프로권투업계 내 마피아의 영향력을 파헤친 크라운 로열 수사를 주도했고 연방상원의원 1명과 연방하원의원 7명의 유죄판결을 이끌어낸 앱스캠 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애틀랜타의 연쇄살인마 웨인 윌리엄스 검거에 일조했다. 여기에 공무원 20명의 유죄판결을 이끌어낸 웨드텍 스캔들 수사도 주도했다. 특히 프리처드 3세는 1983년부터 1988년까지 FBI 뉴욕지국에서 제노비스 패밀리 담당팀장을 맡는 동안 지간테로 대표되는 이탈리아계 마피아를 직접 상대했다. 이후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NYPD의 2인자인 선임경찰부위원장(First Deputy Commissioner)을 지내는 등 성공적인 공직생활을 이어갔다. [37] 네이선 마셀리가 정보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노비스 패밀리 측에서 몰랐던 가장 큰 이유는 미국 사법 체계상 대배심 재판은 공개주의가 적용되는 다른 절차와 달리 비밀주의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38] 카파로는 "살레르노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라고 밝혔다. [39] 흥미롭게도 줄리아니 연방검사장은 자신이 지간테에게 속아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을 잘못 기소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탓인지 1980년대에 지간테의 패밀리 내 서열은 8위에 불과했으며 그의 정신질환도 연기가 아니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사법당국 관계자는 줄리아니가 유일한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본 문서에서 소개한 증거와 관계자들의 증언만 참고해도 지간테가 제노비스 패밀리를 넘어 당대 미국 암흑가의 최고 실세였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애초에 줄리아니의 주장대로 지간테의 패밀리 내 서열이 8위였고 정신질환도 연기가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에 살해되었을 것이다. 일찍이 제노비스 패밀리의 전신인 루치아노 패밀리는 매독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게 된 부두목(Underboss) 윌리 모레티를 신뢰할 수 없게 되자 그를 제거한 전례가 있다. 무엇보다 줄리아니는 당대 검찰 측 수장으로서 위원회 재판의 총책임자였을지언정 마피아 수사에 깊이 관여한 인물은 아니었다. 미국의 형사소송법은 수사와 공소유지의 영역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으며 수사에 관여한 검사는 공소유지를 담당할 수 없다. 즉, 마피아에 대해선 수사 실무를 담당한 FBI 요원들의 증언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 역시 지간테에 대한 줄리아니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영상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 종합하면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일종의 확증 편향에 빠진 줄리아니가 지간테의 실체에 대한 객관적 증거를 애써 무시하면서 제기하는 주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MCU] (2018년 기준) 뉴욕에서 가장 큰 신용조합인 MCU는 약 42만 5천 명의 조합원과 18개의 지사를 갖고 있으며 보유 자산은 약 26억 8000만 달러에 달한다. [41] 보고서를 작성한 워튼경제연구소는 고리대금, 도박, 매춘, 마약 유통 같은 전통적인 범죄 사업만 계산했고 합법적인 사업에서의 조직범죄 활동은 제외했다. [42] 이 보고서가 나오기 20여 년 전인 1960년대 연방정부 분석에선 (다른 범죄조직을 제외한) 미국 내 20여 개 마피아 패밀리의 연간 총수익을 70억 달러로 추산했다. [43] 상술했듯 제노비스 패밀리의 전신인 루치아노 패밀리가 1890년대 미국 마피아 태동기 때부터 가장 강력한 파벌이었지만 내부 항쟁을 겪고 조직이 혼란스러워지면서 1950년대 후반 즈음 카를로 감비노가 두목으로 재직하던 감비노 패밀리에 역전되었는데, 그 상황을 1980년대 중반에 지간테가 다시 뒤집은 것이다. [44] 당시 루케시 패밀리 두목 앤서니 코랄로 (사진)가 지간테와 함께 고티 제거 계획을 논의했고 이들과 마찬가지로 폴 카스텔라노와 가까웠던 시칠리아 마피아 두목 살바토레 리이나도 독자적으로 고티 암살 지령을 내렸다고 알려져 있다. (리이나의 고티 암살 지령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존 고티 문서 참고.) [존_고티_살인미수_및_프랭크_데치코_살인사건] 보통 미국 마피아는 작업에 총을 사용한다. 폭탄을 사용할 경우 수사기관과 대중, 언론의 관심을 불러오는 데다 자칫 일반인이 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고 치밀한 성격으로 유명한 지간테가 폭탄을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부터 위원회에 대항한 고티를 일종의 본보기로 삼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간테의 의지는 미국 마피아 역사에서 가장 소름 끼치고 폭발적인 살인사건으로 이어졌다. 사건 당일 제노비스 패밀리 해결사는 데치코가 차명(借名)으로 타고 다닌 뷰익 엘렉트라 하부에 폭탄을 설치한 뒤 근처에 주차해놓은 자신의 자동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원래 고티와 데치코는 같은 차량에 타기로 되어 있었으나 계획이 변경되면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프랭크 벨리노가 데치코와 함께 사교클럽을 나왔다. 기폭장치를 들고 사교클럽 앞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해결사는 벨리노를 고티로 착각했고 데치코가 조수석 문을 열자마자 폭탄을 폭발시켰다. 이윽고 충격과 굉음이 울리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당시 사교클럽 안에 있던 50~60명의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은 폭발 소리를 듣자마자 모두 뛰쳐나왔지만 데치코는 즉사했고 벨리노는 3도 화상에 왼쪽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 당시 마피아의 보복이 두려워 익명을 요구한 부상당한 행인은 "집이 흔들렸다."라고 폭발 상황을 묘사했다.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감비노 패밀리 소속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는 훗날 끔찍했던 폭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 "난 데치코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걸 봤다. 그 직후 자동차가 다시 폭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를 끌어내려 했다. 내가 데치코의 다리를 잡고 끌어당겼지만 어째선지 그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다리가 절단되어 있었고 한쪽 팔도 잘려 있었다. (데치코를 들어서 옮기기 위해) 몸 밑으로 손을 넣자 내 손가락이 피부를 뚫고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엉덩이와 모든 것이 사라져있었다. 난 흰 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피가 하나도 묻지 않았다. 폭발의 위력이 데치코 몸속의 모든 액체를 증발시켰기 때문이다." 훗날 정부 측 증인이 되는 루케시 패밀리 부두목 앤서니 카소 (사진)는 1997년 인터뷰에서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허버트 페이트가 고티와 데치코를 살해하기 위해 폭탄을 터트렸다."라고 증언한다. 카소는 페이트가 해결사로 선택된 이유는 감비노 패밀리와 아무런 연고가 없었기 때문이고 총이 아닌 폭탄을 사용한 이유는 감비노 패밀리로 하여금 시칠리아 마피아 혹은 존 감비노 (사진) 같은 감비노 패밀리 내 시칠리아 파벌의 소행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실제로 사건 발생 직후 그라바노는 공격의 배후로 지간테를 지목했지만 고티가 "아니, '턱'은 폭탄을 사용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그라바노의 말을 부정했다고 한다. (이때 데치코가 사망하면서 훗날 그라바노가 부두목이 된다.) 한편, 유력한 용의자인 페이트는 데치코 사건을 전후로 재판이 진행 중이었고 사기, 탈세,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그는 약 10년의 복역을 마치고 1996년에 출소했고 데치코 살인 혐의로는 결코 기소되지 않았다. [46] 당시 고티를 습격한 총잡이는 이탈리아 혈통을 가진 37세의 윌리엄 시코네로 밝혀졌다. 그를 살해한 범인들은 검거되지 않았다. [47] 지간테와 고티의 경쟁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문서 하단 여담 문단의 마피아 활동 관련 부분 참고. [아마데오_에스포지토] 에스포지토는 언론 부호들의 힘으로 법원을 장악한 중세 국왕(Medieval King holding court with his barons by sections of the press),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지도자 중 한 명(One of the finest leaders in the country) 같은 수식어가 붙을 정도의 정계 거물이었다. 그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지오바넬리 외에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노동부장관 후보자로 지목한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앤서니 스코토 (사진), 영화 좋은 친구들 속 폴 시서로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는 루케시 패밀리 고위 간부 폴 바라오 (사진) 같은 유력 마피아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에스포지토는 암흑가 스타일의 사람 관리, 협박 전술, 조직범죄와의 연관성 등으로 주위의 존경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았다. [49] 교도소행을 피한 에스포지토는 1993년에 사망했다. 반면 임기 2년인 연방하원의원직을 약 19년째 지켜오던 비아지는 이 사건으로 공직을 내려놓아야 했고 약 3년간 수감되기까지 했다. 그는 2015년에 사망할 때까지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없었지만 2019년에 손녀가 뉴욕주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한편, 비아지는 마리오 푸조의 소설 대부를 영화로 제작하는 과정을 담은 2022년 드라마 디 오퍼에서 마피아와 연관된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앤서니_벤디티] NYPD에서 처음 근무한 14년 동안 무려 17개의 훈장을 수여받은 벤디티는 아내와 전원 5살 이하인 4명의 딸을 남겨두고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건이 벌어지던 날 벤디티의 파트너 버크는 지오바넬리 일행이 앉아있는 식당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벤디티가 "저 사람은 OC(Organized Crime•조직범죄자)야. 마피아는 절대로 수사관을 공격하지 않아."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벤디티는 사망한 뒤 뉴욕 경찰관 최고의 영예인 NYPD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고 그의 장례식엔 5000여 명의 경찰관이 참석해 애도를 표했으며 뉴욕 주에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생겼다. [프랭크_시몬_살인사건]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던 시몬은 마약 중독과 알코올 중독 문제가 있었던 점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범한 요리사였다. 가족과 친척들이 조직범죄와 연루되어 있었던 그는 첫 번째 재판에서 마피아 측에 불리한 증언을 했지만 두 번째 재판에서 이를 번복했고 세 번째 재판에서는 아예 마피아 측에 유리한 증언을 했다가 마지막 네 번째 재판이 열리기 전 페리 포인트 공원 가장자리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 공원은 마피아가 희생자들을 유기하는 장소로 애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시몬의 시신 주위를 장식한 썩은 물고기들은 마피아 세계에서 '희생자는 물고기와 함께 잠들었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영화 대부에도 나오는 유명한 상징이다. [페데리코_지오바넬리] 상술했듯 정계 거물 아마데오 에스포지토 (사진)와 직접 소통하는 등 제노비스 패밀리의 실력자였던 지오바넬리는 1982년에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의 접선 장소를 FBI가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수사에 큰 혼선을 주었다. 1986년엔 NYPD 조직범죄수사관 벤디티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고 1989년엔 공갈, 고리대금업, 도박업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약 7년간 복역했다. 1996년에 출소한 지오바넬리는 어느덧 행동대장이 되었고 2년 뒤 현직 NYPD 경찰관이 연루된 연간 5000만 달러 규모의 도박 사업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적발된 가석방 규정 위반 혐의로 재차 9개월을 복역했다. 그는 2004년 5월에도 뉴저지 주 데카발칸테 패밀리의 일부 조직원이 기소될 거라는 연방검찰의 1999년 내부 정보를 빼돌린 혐의가 인정되어 범행 5년 만에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렇게 약 6년간 복역한 뒤 2011년 1월에 출소한 지오바넬리는 비교적 편안한 여생을 보내다 2018년에 사망했다. 연방정부는 마피아였던 그가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 내부 정보를 알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끝내 밝히지 못했다. [캐슬린_버크] 경찰 지망생 시절의 버크는 여성 경찰관의 최소 신장에 도달하기 위해 척추를 곧게 펴려고 1년 동안 나무 바닥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꿈을 이룬 그녀는 NYPD의 모든 경찰관을 통틀어 키가 가장 작았다. 이후 23년 경력을 이어오며 NYPD 역사상 가장 높은 훈장을 수여받은 여성 수사관이 되는 등 실력을 인정받은 버크는 벤디티의 원래 파트너인 브라이언 포드가 휴가차 도시를 떠나있는 동안 그의 임시 파트너가 되었다. 이후 벤디티가 살해되자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여성이 파트너였기 때문에 사건이 벌어진 것이라는 NYPD 내부의 조롱과 멸시, 유족들의 원망을 받은 그녀는 난소암에 걸려 1991년에 수사관을 은퇴했다. (사건 당시 범인들에게 총격을 당한 버크는 쓰러지며 권총을 5번 발사했는데 모두 허공을 갈랐다.) 이후 그녀는 임무 수행 중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리거나 불구가 되는 등의 부상을 입은 경찰관들을 위한 NYPD 자활단체의 상담가가 되었다. 버크는 2006년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마피아가 4개의 벤디티 살인사건 재판 중 3개의 재판에서 경찰의 수사와 검찰의 공소유지를 방해했고 증인과 배심원들을 위협하는 방법으로 정당한 사법 절차를 훼손하고 부패시켰다고 적었다. 특히 자신은 몸 앞부분에 총을 맞았기 때문에 마피아들에게서 도망치다 총을 맞은 게 아니라고 항변했다. [54] 마피아 세계를 떠난 프란지스는 약 3년 만인 1989년에 가석방되지만 2년 뒤 가석방 규정 위반으로 재수감되었고 도합 7년의 수감생활을 마친 1994년에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 [55] 다니엘 파가노는 연예업계에서 활동하다 1989년에 사망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조셉 파가노 (사진)의 아들이다. 훗날 다니엘 파가노는 아버지와 달리 패밀리의 행동대장이 된다. [56] 다니엘 파가노는 휘발유 밀매 사업을 이어가다 1999년에 7700만 달러에 달하는 자동차 유류세를 탈루한 혐의가 입증되어 약 8년간 복역한다. [57] 훗날 프란지스는 마르코위츠와 퍼시츠를 습격한 배후가 콜롬보 패밀리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58] 당대 미국 마피아 수사를 최전선에서 주도했던 줄리아니가 정작 빈센트 지간테를 기소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꼬집으며 두 사람이 동맹관계(Allies)였다고 추정하는 매체가 존재한다. # 특히 문서 상단 마리오 지간테 (사진) 각주를 참고하면 제노비스 패밀리의 사주를 받은 연방상원의원과 변호사가 빈센트 지간테의 형 마리오 지간테의 형량을 줄이기 위한 로비를 줄리아니에게 했고 실제로 마리오 지간테의 형량이 2년 감형되었다는 의혹도 존재한다. 더욱이 문서 상단 윌리 모레티 일화를 소개한 각주에서도 상술했듯 줄리아니는 위원회 재판에서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으로 빈센트 지간테를 지목하지 않은 자신의 명백한 실수도 인정한 적이 없다. [어윈_쉬프] 권투, 연예, 영화, 건설 등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한 수완 좋은 유대인 사업가로 알려진 쉬프는 체중이 160kg에 달하는 거구였다. 당시 여러 호텔, 카지노, 클럽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표면적으로 금융자문가 행세를 하던 쉬프는 주위에 여자가 끊이질 않는 플레이보이였는데,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한 월세 1만 3천 달러짜리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면서 운전기사가 모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뉴욕 시내를 돌아다녔고 라스베이거스 애틀랜틱시티의 대형 카지노에서 거액의 도박을 하는 등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고 다녔다. 당대 권투 프로모터 행크 슈워츠는 "쉬프는 늘 돈이 많았지만 아무도 그 돈의 출처를 몰랐다."라고 증언했는데, 사법당국에선 그런 쉬프를 마피아와 연계된 고리대금업자로 파악했다. 이후 쉬프 제거로부터 약 2년이 지난 1989년에 제노비스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루이스 만나 (사진)가 쉬프 살인교사를 비롯한 다수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는다. [60] 디질리오 제거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98년에 이미 다른 혐의로 수감 중이었던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루이스 오리키오 (사진)가 자신이 상부의 지시를 받고 디질리오를 살해한 장본인이었다고 자백한다. 그는 영화 대부 파울리 가또 처형 장면처럼 자동차 뒷좌석에서 앞좌석에 앉은 디질리오의 머리를 쏘았다고 밝혔다. 오리키오는 16년이 넘는 복역을 마치고 2010년에 출소했고 행동대장 대행(Acting Caporegime)을 맡는 등 조직 생활을 이어가다 2021년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오리키오는 제109대 뉴저지주상원의장 존 A. 린치 주니어의 처남이기도 했다. [존_디질리오] 디질리오는 38전 28승 10패 9KO의 전적을 가진 웰터급•라이트급 권투 선수 출신의 악명 높은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이었다. 권투 선수 시절 디질리오의 모습. 훗날 정부 측 증인이 되는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는 살해되기 직전의 디질리오가 눈에 띄는 행동을 자제하라는 지간테의 지시를 전달하러 온 다른 조직원에게 "엿이나 먹어라."라고 응수했고 결국 이 행동이 그의 명을 재촉했다고 영상을 통해 밝힌다. # [범죄조직의_수입에_대해] 상술했듯 1억 달러라는 수치는 연방정부에서 상당히 보수적으로 추정한 제노비스 패밀리의 연수입인데, 뉴욕 시 브루클린 지방검사장 찰스 하인즈는 1991년 기준으로 자신의 관할구역 내에서 전개되는 스포츠도박 사업이 연간 120억 달러 규모라고 설명하면서 마피아는 그중에서 약 10%인 10억 달러 정도를 가져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동시에 그는 일부 전문가들이 범죄조직의 수입을 추산하려 노력하지만 사실 그들의 정확한 수입을 가늠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70~80년대 뉴욕 마피아를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공포 도시: 마피아와의 전쟁(Fear City: New York vs The Mafia)을 보면 ‘연방당국에 따르면 마피아의 연간 수입은 600억에서 1000억 달러에 달한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렇듯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마피아의 연수입이 과장되고 들쑥날쑥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멕시코 콜롬비아에서 활동하는 대형 마약 카르텔 조직들이 연간 수백억~수천억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추산 역시 실제에 비해 과장되었을 확률이 높다. [63] 1988년 포춘 500대 기업 명단의 끝자리를 장식한 M.A. 한나의 연매출이 4억 9500만 달러였다. [NYM] NYM은 마약을 퇴치하고 빈곤 청소년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목적으로 1971년에 샤프턴이 설립한 단체다. [알_샤프턴] 샤프턴은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조셉 파가노 (사진)에게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와 그의 대리인들을 소개해 주었다고 밝혔다. 현재 샤프턴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토크쇼로 잘 알려져 있고 2004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66] 디로렌조 살인사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리보리오 벨로모 문서 참고. [67] 뒷모습 인물은 신원을 알 수 없고 제일 오른쪽 인물은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비토 팔미에리다. 사법당국에 따르면 팔미에리는 지간테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이자 그의 운전기사였으며 평소에 말을 거의 하지 않았던 지간테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이었다고 한다. 특히 팔미에리는 포뮬러 1 4회 챔피언 수준의 운전 실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훗날 FBI 요원 찰스 보두인은 팔미에리가 지간테를 태우고 운전하는 자동차를 따라붙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고 밝힌다. 지간테를 수행하는 팔미에리의 모습. [68] 이 녹취는 미래에 있을 재판에서 증거로 제출된다. [69] 사비노의 아내를 협박하고 자동차에 폭탄을 설치한 범인들은 끝내 검거되지 않았다. [70]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칸테리노는 마피아 창문 재판이 시작되고 약 1개월 뒤인 1990년 6월에 6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71]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고티, 네 번째가 오레나. [72] 항쟁은 페르시코 파벌이 승리한다. 제3차 콜롬보 항쟁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마피아/국가/미국 문서의 뉴욕 5대 마피아 문단 콜롬보 패밀리 부분 참고. [에드워드_리노_살인사건과_바르톨로뮤_보리엘로_살인사건] 두 살인사건 모두 루케시 패밀리 부두목 앤서니 카소 (사진)의 지시를 받은 NYPD 수사관 루이스 에폴리토와 스티븐 카라카파가 관여했다. 그들은 9발의 총격을 가해 리노를 직접 살해했고 경찰 내부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보리엘로 살인 작업에 일조했다. 당시 에폴리토와 카라카파 같은 부패한 경찰관들은 시민과 마피아라는 두 주인을 섬겼다. (에폴리토와 카라카파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마피아/기타 문서의 정관계와의 관계 문단 참고.) 한편, 상술한 데치코 살인사건과 마찬가지로 카소를 이용해 리노와 보리엘로를 제거한 진짜 흑막은 지간테로 여겨진다. 실제로 보리엘로가 살해되자 감비노 패밀리는 제노비스 패밀리를 그 배후로 의심해 각 조직의 두목 대행 간 담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담판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리보리오 벨로모 문서 참고.) [74] 데시몬 살인사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리보리오 벨로모 문서 참고. [75] 프리스코는 상지올로 제거로부터 약 6년 뒤 방화 혐의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주립교도소에 수감되지만 약 4년간 복역하고 2002년에 가석방된다. 당시 가석방위원회 의장이 폭로하길, 제52대 뉴저지 주 주지사 제임스 맥그리비 (사진)의 보좌관이 프리스코의 가석방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후 주지사와 보좌관은 즉각 혐의를 부인했다. 이에 뉴저지 주 검찰총장이 사건을 조사했지만 정식 기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76] 프리스코는 상지올로 제거로부터 약 17년이 지난 2009년에 상지올로 살인교사 및 다수의 범죄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팔룸보 역시 2011년에 상지올로 살인공모 혐의 등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는다. # 이후 프리스코는 2017년에 플로리다 주 콜먼 연방교도소 의무실에서 사망했다. [베네로_망가노의_대리인] 망가노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마이클 제네로소 (사진)가 부두목 대행(Acting Underboss)을 맡았다. 그는 러키 루치아노 시대 때 패밀리에 입단한 뒤 한평생을 마피아로 살았는데, 약 70년이 넘는 활동 기간 동안 1997년에 공갈 혐의로 약 15개월간 복역한 걸 제외하면 별다른 수감 기록이 없다. (망가노는 제네로소의 15개월 공백기 동안 조셉 지토 (사진)에게 부두목 대행을 맡기며 앞으론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제네로소와 거리 책임자(Street Boss) 리보리오 벨로모가 함께 찍힌 FBI 감시 사진과 제네로소와 다른 조직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존재한다. 두 번째 사진에서 제네로소 옆에 앉아있는 인물은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앤서니 페데리치 (사진)다. 제네로소는 2006년에 망가노가 출소한 뒤에도 패밀리의 고위 간부로 활동하다 2015년에 사망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미국 마피아 권력의 핵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망을 잘 피했기 때문에 뉴욕의 숨겨진 대부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다. 여담으로 제네로소의 외손녀 장 마리 그라지아노는 변호사가 되었다. [78] 미국 전역에 90개가 넘는 연방지방검찰청 중에서도 뉴욕동부지구 연방지방검찰청과 뉴욕남부지구 연방지방검찰청이 양대산맥으로 꼽힌다. 둘 다 마피아 등 조직범죄 수사로 유명하지만 특히 뉴욕남부지구 연방지방검찰청은 거물 정치인이 얽힌 권력형 비리 및 월가로 대표되는 금융범죄 수사로도 잘 알려져 있어 월가의 보안관(Sheriff of Wall Street)이란 별명이 붙었다. [79] 벨로모-아이다 분쟁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리보리오 벨로모 문서 참고. [80] 첫 번째 심장수술은 1988년에 있었다. [81] 레오네티가 증언한 희생자 중엔 상술한 안토니오 카포니그로 (사진)와 프랭크 신돈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 [82] 당시 지간테는 교정시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기에게 손키스를 날렸다고 전해진다. [83] 재판부는 지간테가 고티 형제에 대한 살인을 공모한 시점을 1988년 1월로 결론 내렸다. 이에 따르면 1993년 1월까지는 고티 형제 살인공모 혐의에 대한 공소가 제기되었어야 했는데, 지간테가 고티 형제 살인공모 혐의로 기소된 시점은 1993년 6월 10일이었다. 즉, 공소시효 5개월 도과로 면소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하지만 피터 사비노 (사진) 살인공모 혐의는 공소시효가 도과되지 않아 그대로 인정되었다. [84] 한국과 달리 미국의 사법 제도는 선시제도와 감형 등 징역형 집행방식의 변경이 흔한 편이라 선고 형량 보다 적은 형기를 복역하는 경우가 많다. [앤드루_와이스먼] 건강 악화로 1994년에 퇴직한 로즈의 뒤를 이어 지간테 재판의 검찰 측 대표를 맡은 앤드루 와이스먼 연방검사 (사진)는 2002년 엔론 사태 수사팀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등 공직 세계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2011년에 FBI 법무자문위원(General Counse)을 맡았고 2015년에 법무부 범죄사기국장을 맡았으며 2017년엔 러시아 게이트를 수사하는 로버트 뮬러 특검팀에 2인자로 합류했다. (와이스먼의 선배인 뮬러는 1992년에 존 고티의 유죄판결을 이끌어냈고 약 12년 동안 FBI 국장을 지냈다.) 특검팀에서 활약한 와이스먼은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뮬러의 핏불'이란 평가를 받았다. 2019년 법무부 국장직을 끝으로 민간으로 돌아간 그는 뉴욕 대학교에서 공익사업을 할 것이란 추측이 있었지만 MSNBC 방송사에 법률고문으로 취직했다. [86] 변호인이나 주치의의 접견은 교도관이 입회하여 감시할 수 없기 때문에 대화 내용이 녹음되지 않고 서류 열람과 필기도 가능해 외부와의 비밀 소통에 적합하다. 실제로 2005년에 유죄판결을 받은 변호사 피터 펠루소의 판결문을 보면 '펠루소가 마피아 조직원들을 도와 범죄를 저지르는 방법 중 하나는 수감된 조직원들과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받기 위해 자신의 변호사 지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은 펠루소의 변호사로서의 지위 덕분에 이러한 소통이 수사기관의 감시 대상이 될 가능성이 낮다고 믿었다.'라고 적혀있다. [87]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복역한 지간테의 수감생활은 1992년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대부분의 형기를 일리노이 주의 슈퍼맥스급 교도소에서 복역한 존 고티와 대비된다. 고티 역시 교정시설 내에서 대리인을 통해 패밀리를 관리했지만 그는 법원 명령으로 하루 23시간 독방 감금 등 유독 엄격한 처우 제한을 받아야만 했다. 고티가 수감되었던 마리온 연방교도소는 그가 사망한 뒤인 2006년에 중간계호급 교도소(Medium-Security Prison)로 하향 조정되었지만 여전히 중경비시설로 분류되는 곳이다. [88] 마피아 고위 간부처럼 암흑가에서 두루 존경받는 인물들은 교도소 내 다른 수용자가 그들의 이부자리를 대신 깔아주거나 빨래와 설거지를 대신해 주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로 2011년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제노비스 패밀리 고위 간부 아서 나이그로 (사진)를 담당한 교도관의 증언이 있다. [89] 교정시설 내 지간테의 생활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문서 하단 여담 문단의 수감생활 관련 부분 참고. [90] 본 디스커버리 채널 다큐멘터리는 1998년 11월 3일에 방영되었지만 링크 속 영상은 2003년 이야기가 추가된 편집본이다. 이 외에도 지간테를 다룬 여러 다큐멘터리를 유튜브에서 시청할 수 있다. # # # [랄프_코폴라_실종사건] 코폴라 실종사건은 1993년 제3차 콜롬보 항쟁 과정에서 비토리오 오레나 (사진) 파벌 부두목 대행(Acting Underboss) 조셉 스코포가 살해된 이후 수사기관과 언론의 불필요한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 미국 마피아의 지배기구이자 지간테가 주도한 마피아 위원회가 시행했던 5년 동안의 살인 유예 조치 기간을 지간테의 제노비스 패밀리가 스스로 해제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평가받는다. 한편, 코폴라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는데, 당시 사법당국에서는 코폴라의 시신이 다른 마피아들에 대한 경고 차원으로 눈에 보이는 장소에 버려지지 않고 증발해버린 것이 의외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암흑가 소식통은 "그들이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는 대상은 전체 대중이 아니다. 그 남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마피아 그 자체가 대상이다.(The people they're looking to send a message to is not the entire public. It's the mob itself, which totally understands that the guy is gone.)"라고 설명했다. 이후 뉴욕주경찰청은 2018년에도 코폴라의 소재를 알고 있는 사람의 제보를 받고 있다. # [빈센트_지간테의_대리인들] 1997~98년: 도미닉 시릴로→1998~2005년: 매튜 이아니엘로 (사진)→2005년~: 다니엘 레오 (사진) 일반적으로 영문 위키피디아를 포함해서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2004년 뉴저지 주 조사위원회(State of New Jersey Commission of Investigation)는 빈센트 지간테가 수감된 이래 제노비스 패밀리의 일상적인 사업을 감독해온 두목 대행으로 그의 형 마리오 지간테 (사진)와 패밀리의 상담역 로렌스 덴티코 (사진)를 지목했다. 특히 조사위원회는 마리오 지간테를 '조직의 관리인(Caretaker of the Organization)'으로 묘사했다. 아마 1997~2001년 까지는 시릴로나 덴티코 같은 심복들이 두목 대행을 맡았고 2001년부터는 형 마리오 지간테가 두목 대행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정부 측 증인이 된 보난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비탈레는 2000년 마피아 위원회 회합에서 제노비스 패밀리를 대표하여 참석했던 인물이 덴티코였다고 밝혔으며 NYPD 조직범죄전담반장 조셉 코피 (사진)는 덴티코를 '정통파에 품격을 갖춘 정상급 폭력배(He is an old-line, classy, top-shelf gangster)'로 묘사했다. 한편, 2005년에 익명의 수사기관 관계자는 폐기물관리업계에 대한 공갈 및 갈취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된 뒤 약 4년의 복역을 마치고 2001년에 출소한 마리오 지간테를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대행으로 지목하며 "마리오 (지간테)는 자신의 권리를 가진 폭력배입니다. 그는 '턱'과 혈연관계입니다.(Mario is gangster in his own right. He’s Chin’s blood-family connection.)"라고 설명했다. [93] 굳이 두목이 아니더라도 마피아 같은 범죄조직의 고위 간부가 수감 중에도 상납금을 전달받는 건 흔한 일인데, 실제로 제노비스 패밀리 상담역 루이스 만나 (사진)에게 상납금을 전달하던 마피아 정규조직원(Made Member)과 추종세력(Associate)들은 그가 1989년에 징역 80년을 선고받고 수감된 뒤에도 수십 년 동안 루이스 만나의 아내 아이다 만나에게 상납금을 전달했다. [94]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앤서니 팔룸보 (사진)다. [95] 여러 마피아 조직원이 오메르타를 지키기 위해 정부로부터 요구받은 대배심 증언을 거부하여 1~3년의 징역형을 감내하는 마당에 어느 마피아가 다른 마피아에게 자신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결백을 밝혀달라고 요청하는 건 충분히 처형 사유가 된다. [96] 당시 롱고가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하면 안 된다는 패밀리의 금기를 어긴 것이다. 같은 대화에서 롱고는 로렌스 덴티코 (사진)가 지간테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언급함과 동시에 30~40명의 해결사를 보유한 제노비스 패밀리는 다른 조직과의 전면전이 일어나도 가장 강력하다고 발언했다. 여담으로 롱고는 207cm의 키에 체중이 145kg에 달하는 거구로 알려져 있다. [97] 즉, 마피아 세계에서 선반 위에 올린다는 표현은 파문을 뜻한다. [98] 소망대로 바론은 2010년에 자연사했다. 국내 제도권 언론사 중엔 경향신문에서 「마피아 최고의 살인자 조지 바론, 86세로 자연사」라는 제목으로 사망 소식을 전했다. # [MMMCA] 1945년에 제노비스 패밀리와 감비노 패밀리가 20여 개의 항만하역사를 규합하여 만든 MMMCA는 마찬가지로 마피아와 연관된 항만노조인 국제항만노동자협회(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와 함께 모든 노사 간 단체협상을 담당하고 수억 달러에 달하는 항만노조원들의 임금과 연금을 공동으로 관리한다. (2019년 기준) MMMCA는 1300만 달러 상당의 자산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2010년대에 제노비스 패밀리의 거리 책임자(Street Boss)로 확인된 마이클 라구사 (사진)의 형제 조셉 라구사 (사진)가 협회장을 맡고 있는 등 조직범죄(특히 제노비스 패밀리)의 영향력이 여전하다. [벤자민_브리프만] 뉴욕 변호사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브리프만은 마피아 두목 지간테 외에도 가수 마이클 잭슨, IMF 총재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 백악관 선임고문 재러드 쿠슈너의 아버지 찰스 쿠슈너, 래퍼 JAY-Z 퍼프 대디, 뉴욕주상원의원 칼 크루거 같은 유명 인사들을 변호했다. 그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2806호 스캔들: 진실 공방(Room 2806: The Accusation)에도 출연했다. [로슬린_마우스코프] 마우스코프는 2021년에 연방법원행정처장으로 영전한다. [아돌포_브루노_살인사건] 브루노 제거로부터 약 8년이 지난 2011년에 범행을 지시한 당대 제노비스 패밀리 거리 책임자(Street Boss) 아서 나이그로 (사진), 직접 총격을 가한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게아스 형제가 각각 유죄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게아스 형제 중 한 명인 포티어스 게아스는 과거 보스턴 암흑가의 주도권을 놓고 페트리아카 패밀리와 대립한 아일랜드계 범죄조직 윈터 힐 갱단의 두목(Boss) 제임스 벌저를 연방교도소 내에서 보복 살해했다. 국내 제도권 언론사 중엔 연합뉴스에서 「감옥서 전설적인 보스턴 갱두목 살해한 건 마피아 조직원」이라는 제목으로 사건 소식을 전했다. # (페트리아카 패밀리-윈터 힐 갱단 항쟁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마피아/국가/미국 문서의 다른 도시의 마피아 문단 페트리아카 패밀리 부분 참고.) [103] 가르시아는 FBI가 자신에 대한 보호를 소홀히 해 약 3년 동안 보복의 두려움 속에 살았다고 밝혔지만 2024년까지 그의 신변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104] 리치가 실종되고 일주일 정도 지난 2005년 10월 16일과 10월 17일에 지간테의 사생아 빈센트 에스포지토 (사진)가 아버지를 접견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살인 같은 중요한 논의를 할 경우 가급적 편지나 전화 통화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접견을 사후 보고 시점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5] 당시 리치와 함께 무죄판결을 받은 국제항만노동자협회(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 이하 ILA) 고위 간부 해롤드 다겟은 2011년 ILA의 정점인 국제위원장이 되었다. (2019년 기준) 약 6만 5천 명에 달하는 노조원의 수장인 그는 21세기 지미 호파라 부를 수 있는 인물로, 약 1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마피아-항만노조 부패 고리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2024년에는 다겟의 주도로 ILA가 총파업에 돌입하여 미국 내 36개 항구가 올스톱되었고 JP모건 체이스는 이들의 파업이 미국 경제에 하루 최대 6조 6천억 원 규모의 손실을 입힐 수 있다고 예측하는 등 크게 화제가 되어 국내 제도권 언론사 중엔 연합뉴스에서 「美동남부 항만 47년만의 파업…인플레 자극 등 경제여파 주목」이라는 제목으로 관련 소식을 전했다. # [106] 훗날 처형된 리치의 뒤를 이어 조직 사업을 관장하게 된 인물은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스티븐 데피로 (사진)로 밝혀진다. [로렌스_리치_살인사건] 리치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마이클 코폴라 (사진)다. 젊은 시절 악명 높은 제노비스 패밀리 작업조 주먹(Fist)에 속해있었던 그는 수많은 살인과 방화와 폭행을 저질렀으며 지도력을 인정받아 행동대장 대행을 맡기도 했다. 코폴라는 1996년에 상부의 지시를 받고 마피아 조직원 존 래디에를 살해한 혐의로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았다. 쫓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아내와 함께 도주했고 약 11년 동안 지명수배를 피했다. 수사기관은 네바다 주, 펜실베이니아 주, 플로리다 주, 캐나다, 이탈리아, 코스타리카에서 수색 작전을 펼쳤음에도 코폴라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지명수배자 신분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를 오가며 지속적으로 패밀리 사업에 관여했는데, 2005년엔 직속 행동대장(Caporegime) 티노 피우마라 (사진)의 지시를 받고 리치 살인 작업에 가담했다고 추정된다. 결국 2007년 뉴욕 시의 한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검거된 코폴라는 재판에 넘겨졌지만 1996년 래디에 살인사건에 대해선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고 2005년 리치 살인사건도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불기소처분이 내려졌다. 하지만 지명수배 기간 동안의 갈취, 신분증 위조 등 다른 혐의들이 유죄로 인정되어 법정최고형에 가까운 도합 19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형량을 듣고도 보호관찰을 선고받은 아내에게 "괜찮아.(It's O.K.)"라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장기징역형에 직면했지만 오메르타를 지키며 동료들을 밀고하지 않은 코폴라는 2024년에 77세로 출소할 예정이다. 한편, 법망을 피한 그의 직속 행동대장 피우마라는 2010년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피우마라의 조카는 제55대 뉴저지 주 주지사이자 2016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연방검사장 출신 정치인 크리스 크리스티다. [108] 지간테가 사망한 스프링필드 연방교정의료센터는 그의 후견인 비토 제노비스 (사진)와 라이벌 존 고티가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109] 당시 유족들은 연방교정의료센터의 치료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지간테가 사망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플로라 에드워즈 변호사를 선임한 뒤 연방정부를 대상으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110] 가톨릭 뉴욕 대교구 폴 카스텔라노, 존 고티, 프랭크 데치코 (사진) 같은 다른 마피아들의 장례미사는 불허했지만 빈센트 지간테에겐 허용했다. [111] 지간테는 평생 1건의 살인공모 혐의로만 유죄판결을 받았다. 지간테와 동시기에 활동한 루케시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앤서니 카소 (사진)는 유죄판결로 인정된 살인만 37건에 달한다. 그는 30~40명을 직접 살해했고 100건이 넘는 살인을 지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112] 당시 덴티코가 상담역에서 물러나고 시릴로가 상담역이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시릴로 역시 몇 년 뒤 피터 디키아라 (사진)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113] 빈센트 지간테가 사망한 뒤 한동안 고위 간부들의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었던 제노비스 패밀리가 벨로모를 두목으로 추대한 시점은 201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부두목 망가노 역시 강력한 두목 후보였고 수감 중에도, 출소 후에도 변함없는 맨해튼 조직의 책임자였지만 고령의 나이와 건강 문제 탓에 스스로 두목 자리를 고사한 것으로 보인다. 패밀리의 원로가 된 망가노는 2017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뉴욕 마피아 수뇌부를 다룬 몇몇 기사와 주립 가톨릭학교 급식 계약과 관련된 갈취미수 사건을 다룬 기사에서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큰 뉴스엔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고 기소되거나 수감되지도 않았다. 2019년에 작성된 연방정부 문서 #를 보면 망가노가 사망한 뒤 부두목 자리를 상술한 패밀리 고위 간부 무스카렐라 #가 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14] 시즌 2 시점의 소프라노는 현실 속 지간테처럼 재판 방어 차원에서 있지도 않은 정신질환을 가장하지만 시즌 4에 이르러 법원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뒤 급격한 치매 증세를 보이며 본격적으로 개그 캐릭터가 된다. [115] 블랙 버드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문서 하단의 수감생활 관련 부분 참고. [갓파더_오브_할렘] 갓파더 오브 할렘은 주인공 존슨과 프랭크 코스텔로를 우호관계로 묘사하는 데 비해, 존슨과 지간테는 적대관계로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론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불화도 없었다. 오히려 존슨은 모든 이탈리아계 마피아와 두루두루 가까운 고위 추종세력(High-level Associate)이었다. 정부 측 증인이 된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는 드라마 내용의 90%가 허구라고 지적했다. 그는 영상 인터뷰를 통해 일부 예외 사례가 존재하긴 하지만 모든 마피아 패밀리는 정규조직원(Made Member)의 직접적인 마약 거래를 금지하며 지간테가 마약 사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드라마 속 설정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 [117] 작중 그라벨리가 자신의 창문 사업을 언급하는 대사가 있기 때문. [118] 댄버리 트래셔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아이스하키 문서의 매체 문단 말하지 못한 이야기 시리즈 부분 참고. [119] 링크된 기사에선 갈란테가 제노비스 패밀리를 팔아넘기는 대신 형량을 적게 받았다고 설명하지만 그는 이아니엘로를 포함한 그 어떤 마피아 관계자도 밀고하지 않았다. 단지 재판에 가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감형 받는 유죄인정을 했을 뿐인데, 이걸 기자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120] 공교롭게도 빈센트 지간테의 아내와 애인의 이름이 모두 올림피아로 똑같다. 의도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가 아내와 애인의 이름을 혼동하여 잘못 부를 일은 없었을 것이다. [121] 어퍼이스트사이드는 이방카 트럼프가 졸업한 채핀 스쿨(Chapin School)이 소재한 지역이며 캘리포니아 주의 부촌 베벌리힐스 보다 땅값이 더 비싼 지역으로 파악된다. [모리스_레비] 제노비스 패밀리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지적된 레비는 루이 암스트롱 같은 전설적인 가수, 90개 이상의 회사, 9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렸던 인물로 1986년 시점에 그가 보유하고 있던 사업체와 판권의 가치가 도합 2200만~5500만 달러에 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레비는 척 베리의 가사를 인용한 비틀즈의 명곡 Come Together를 문제 삼아 존 레논으로 하여금 Rock 'n' Roll 앨범을 발매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를 가리켜 빌보드지에선 ‘연예업계에서 가장 논란이 많고 화려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버라이어티지에선 광범위한 산업 통제력을 일컬어 ‘문어(Octopus)’로, 올뮤직 가이드에선 ‘예술가들에게 로열티를 사취한 악명 높은 사기꾼’으로 각각 묘사했다. 훗날 FBI의 연예산업 내 조직범죄의 역할에 대한 수사 대상이 된 레비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사업체와 판권의 대부분을 EMI 유니버설 뮤직 그룹 등에 매각했고 이후 유죄판결을 받지만 교도소에 수감되기 약 2개월 전인 1990년 5월에 사망한다. [123] 실제로 SEBCO는 뉴욕 대도시권 일대에 다수의 세탁소를 운영한다. 잘 알려져 있듯 세탁소는 직업 범죄인들이 아주 선호하는 돈세탁 사업이다. [124] 이 부분만 보고 오코너 추기경을 부패한 성직자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는 수많은 성범죄를 저지른 시어도어 매캐릭 신부의 악행을 규탄하는 서한(오코너 서한)을 교황청에 보낸 최초의 고위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모두가 "확실하지 않다", "근거 없다" 그러나, 남달랐던 한명의 추기경 기사 참고. [125] 1997년 어느 광인이 센트리 보안회사 소속 경비원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60세 할머니와 9살 손녀가 사는 아파트에 침입했다. 그 광인은 자신이 HIV 감염자이며 두 사람에게 병을 옮기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할머니가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마피아 보안회사의 경비원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1시간 넘게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다행히 이웃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여 별다른 인명피해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훗날 지간테 신부는 그나마 있던 보안인력마저 없애는데, 이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세상에 돈을 내지 않고 받는 서비스는 없소."라고 답한다. 이후 지간테 신부는 보안회사를 철저히 영리를 추구하는 사업체로 바꾼다. [126] 상술한 이야기를 종합하면 지간테 신부는 마피아와 결탁한 성직자이면서 부동산업계과 관련된 인물로 정의할 수 있는데, 1990년에 개봉한 영화 대부 3편의 길데이 대주교 캐릭터와 상당히 유사하다. [살바토레_지간테] 살바토레 지간테는 아버지 사후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된 형 앤드루 지간테 (사진)와 달리 뉴욕 대학교 부동산학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사회경영학과에서 학업을 마친 뒤 SEBCO 산하 센트리 보안회사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는 등 직접적인 마피아 사업과 거리를 두고 합법적인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빈센트_디나폴리]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빈센트 디나폴리 (사진)는 지간테 신부와 함께 1970~80년대 조직의 건설 사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힌다. 결국 그는 1988년에 건설입찰 조작, 노동 공갈, 갈취, 도박업, 살인공모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24년을 선고받고 코네티컷 주에 위치한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교정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 로렌스 웨커가 정기적으로 디나폴리를 방문했고 다른 루케시 패밀리 조직원도 16개월 동안 35번이나 디나폴리를 방문했다고 한다. 이후 1991년 항소심 재판에서 유죄판결이 뒤집힘에 따라 디나폴리는 석방되었다. 출소 후에도 조직 생활을 이어간 그는 2005년에 사망했다. [129] 리타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전문은 이 회고록에서 읽을 수 있다. [130] 모자가게가 언급되는 이유는 빈센트 지간테가 소싯적 표면적인 직업으로 모자 제조업체 스콧 노블티사(Scott Novelty Co.) 소속 영업사원 행세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31] Jailhouse Rock의 가사는 교도소 파티 이야기고 대부는 마피아 영화다. 즉, 빈센트 지간테가 특히 좋아할 만한 대중예술인 셈이다. 리타에 의하면 아버지는 제대로 된 노래를 단 한 소절도 못 불렀지만 최대한 원곡을 흉내 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132] 찻집 주인은 모자이크로 장식된 아름다운 마루와 벽화 등 지간테의 몇몇 인테리어는 그대로 놔뒀다. [133] 사실 뉴욕 시와 거리가 먼 뉴욕 주 외곽 지역의 대부분은 주로 농사를 짓는 공화당 강세 지역이다. 에어몬트 역시 공화당 강세 지역으로 필립 지간테도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34] 자금 지원의 대상인 전 상담역은 가석방 소송을 제기한 루이스 만나 (사진)로 추정된다. [135] 이 사건에서 제노비스 패밀리와 연루된 노조는 (2013년 기준) 127만 4천156명의 노조원을 보유한 식품•상업노동자연합(United Food and Commercial Workers 이하 UFCW)이다. 지미 호파가 위원장이었던 전미트럭운수조합이 (2020년 기준) 약 250만 명의 노조원을 보유하고 있다. 즉, UFCW도 전미트럭운수조합 못지않은 거대 노조인 셈이다. [136] 이러한 결정의 배경은 과거 메리노프가 지간테나 지간테 가문으로부터 받은 어떠한 은혜를 갚기 위함일 수도 있고 파이프의 마피아 연줄과 노조 지역위원장 이력이 자신의 주류사업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137] 2000년대 후반 일 물리노의 원래 주인들은 상표명과 함께 레스토랑을 팔았다. 일 물리노의 새로운 주인들은 본점을 포함해 10개가 넘는 가맹을 보유한 레스토랑 체인으로 사업을 확장시켰다. [138] 이 사진을 찍은 장소는 빈센트 지간테의 조카 루이스 지간테가 운영하는 지간테 레스토랑 & 바(Gigante Restaurant & Bar)이다. [116번가_행동대] 제노비스 패밀리 116번가 행동대는 빈센트 지간테의 전임 두목 필립 롬바르도 (사진), 빈센트 지간테 휘하에서 거리 책임자(Street Boss)를 역임한 앤서니 살레르노, 빈센트 지간테 휘하에서 부두목(Underboss)을 역임한 사베리오 산토라 (사진), 빈센트 지간테의 후임 두목 리보리오 벨로모 등을 배출한 실세 집단이다. [140] 1980년에 레비의 최측근 인사인 네이선 맥칼라가 정부 측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제노비스 패밀리에 의해 살해되었다. 자신의 오른팔이 살해되는 모습을 본 레비는 끝내 마피아를 거스를 수 없었다. [141] 지간테가 정신질환자 연기의 연장선상으로 자신이 문맹이라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트렸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지간테가 글을 쓰거나 읽을 줄 안다고 시인했다는 교정당국의 기록이 존재한다. [142] 마피아-연예인 관계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마피아/기타 문서의 연예계와의 관계 문단 참고. [트라이앵글_사교클럽] 빈센트 지간테는 외부에서 내부를 일절 볼 수 없게 사교클럽의 입구와 창문을 온통 검은색으로 만들었다. 약 11평 크기의 내부에 희미한 조명이 켜져 있었던 이 사교클럽은 낡아빠진 의자와 테이블들, 커피머신이 장착된 바, 핀볼 기계 2대로 채워진 평범한 장소였지만 정문에 '회원 전용(Members Only)'이라는 문구가, 벽면에 '말하지 마라. 이 장소는 도청되고 있다.(Don't talk. This place is bugged.)'라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특히 화장실 앞 작은 테이블은 빈센트 지간테의 전용석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앉을 수 없었다. 참고로 이 사교클럽은 맨해튼 서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암흑가 사람들이 제노비스 패밀리를 '웨스트사이드(Westside)'로 부르는 유래가 되었다. 형 마리오 지간테의 수행을 받으며 사교클럽에 들어가는 빈센트 지간테의 모습(gif). [144]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부하들과 카드게임을 하며 종종 밑장을 뺏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본인이 황제니 부하들이 속임수를 눈치채도 판을 엎기는커녕 티도 못 내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145] 실제로 여러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한 내용 중 ‘남이 나를 속이기 전에 내가 남을 속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꽤 많다고 한다. [146] 훗날 마이클 프란지스는 존 고티 앤서니 살레르노를 언급하는 2020년 영상 인터뷰에서도 당대 가장 강력한 마피아가 지간테였다고 언급한다. # [147] 보험 사기 재판 1년 뒤 칸테리노는 연예기획사 사장 모리스 레비 (사진)와 함께 연예업계를 갈취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지만 1년 뒤 항소가 받아들여져 석방되었다. 이듬해 그는 마피아 창문 재판(Mafia Windows Case)으로 재차 기소되지만 심장질환을 이유로 재판에서 배제되어 법망을 피했고 얼마 뒤 사망한다. [148] 카파로는 탈출 직후 자신을 만난 살레르노가 그 시점에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고 밝혔다. [149] 이 담판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참석자 중 하나이자 훗날 정부 측 증인이 되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카파로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제임스_나폴리] 1970년대 중반에 제노비스 패밀리의 행동대장이 된 나폴리는 얼마 안 가 1969년 WBA WBC 라이트헤비급 세계 타이틀전 경기를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자행한 법정모욕죄로 약 6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당시 나폴리는 교정시설에서의 편의를 위해 교도소장과 교도관을 매수했는데, 당시 빈센트 지간테의 막냇동생 루이스 지간테 신부 (사진)가 그의 로비를 도왔다고 알려져 있다. 나폴리는 출소 이후인 1978년에 약 2000명이 고용되어 매년 1억 5000만 달러 상당의 수익을 올리는 국가에서 가장 큰 도박 사업을 관리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어진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그는 약 5년의 수감생활을 겪었다. 이후 상술한 만나와 나폴리의 대화가 있고 그 이듬해인 1989년에 두 사람 모두 고티 형제에 대한 살인을 공모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만나는 2건의 살인교사, 2건의 살인공모와 공갈 혐의로 징역 80년을 선고받은 반면 나폴리는 법망을 피했지만 3년 뒤인 1992년에 사망한다. 2021년에 나폴리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갱스터 오브 뉴욕(American Rackets)이 제작되었다. 본 작품엔 빈센트 지간테가 비중 있게 등장하며 아버지를 따라 제노비스 패밀리의 추종세력(Associate)으로 활동한 나폴리의 막내아들이 직접 등장한다. 여담으로 막내를 포함한 나폴리의 세 아들 모두 제노비스 패밀리의 추종세력으로 활동했다. [151] 뉴욕 마피아 세계에선 대상자의 가족들이 보는 앞이나 대상자가 거주하는 자택 앞에서만큼은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기 때문에 자택 근처에서의 경호는 비교적 신경을 덜 쓴다. [152] 이렇듯 지간테 뿐만 아니라 역사상 모든 이탈리아계 마피아 두목들은 마약 규율의 해석을 두고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153] 고티와 사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과 행동대원(Soldier)들은 축의금을 전달했다. [154] 이후 췌장암에 걸린 아르디토는 2006년에 범죄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지만 보석으로 풀려났고 얼마 뒤 사망했다. 바라타는 약 19년의 복역을 마치고 2012년에 출소했다. [앨버트_파치아노] 1910년생인 파치아노는 165cm의 키에 평범한 체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말년의 그는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평범한 이웃집 할아버지로 착각할만한 외모였지만 실상은 60년 넘게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활동한 베테랑 마피아였다. 1970년대 후반에 공갈 혐의로 약 11년간 복역한 뒤 1989년에 출소한 파치아노는 상술한 일화로 알 수 있듯 불같은 성격의 폭력배로 여겨졌다. 실제로 파치아노를 미행한 FBI 요원은 그를 '90대에도 불구하고 거칠고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로 묘사했는데, 플로리다 주의 카지노에서 휠체어를 탄 덩치 큰 사람이 실수로 파치아노와 부딪칠 뻔한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사건이 벌어지자 파치아노가 무서운 표정으로 상대를 쏘아보면서 사과를 받아냈다고 한다. 그 현장에 있었던 FBI 요원은 파치아노의 표정을 직접 본 사람으로서 만약 상대가 잘못된 대처를 했다면 현장에서 머리가 쪼개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2006년에 파치아노는 강도, 돈세탁, 은행 사기 등의 범죄 사업을 관리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그 이듬해 97세의 나이로 가택연금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4년 뒤에 사망한다. [156] 당시 케니는 2대의 자동차 중 어느 것을 빌려줄지 지간테에게 물었는데, 그는 트렁크가 더 큰 것을 빌려달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들은 케니는 자신의 자동차 트렁크에 시신이 담길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157] 프란지스는 이미 기존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지간테와의 일화를 소개했지만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직접 업로드 한 경우는 이 영상이 처음이다. [158] 홀은 정신질환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159] 이 드라마엔 지간테 역시 등장한다. 작품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이야기가 약간 각색되어 실화와 다소 차이가 있다. [160] 당시 피해자로 법정에 선 코스텔로는 빈센트 지간테가 자신을 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161] 당시 아무소의 수행원으로 냉혈한 살인자(Stone Killer) 2명이 있었지만 그들도 빈센트 지간테의 엄포를 듣고 전율했다고 한다. 이후 루케시 패밀리는 창문 사업 이권을 제노비스 패밀리 측에 양보했다. [162] 규율을 어긴 행동대장은 1986년에 마약 유통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조셉 디팔레르모 (사진)다. 당시 처벌 수위를 놓고 함께 논의하던 다른 고위 마피아들은 빈센트 지간테의 섬뜩한 발언을 듣고 일순간 침묵했다고 한다. 하지만 디팔레르모는 이미 고령의 나이로 수감 중이었기 때문에 파문 혹은 강등 처분을 받았고 1992년에 사망한다. [163] 코랄로는 빈센트 지간테가 마피아 위원회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얘기했다. [164] 레오네티의 삼촌은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Boss) 니코데모 스카르포다. [165] 마이클 프란지스의 아버지는 콜롬보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존 프란지스다. [166] 해당 인물은 '뚱뚱한 살(Fat Sal)'이라는 가명으로 마피아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167] 결과적으로 고티가 살해당하지 않고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자연사했기에 이 예측은 빗나갔다. 하지만 고티가 약 5년 동안 거리에서 두목(Boss)으로 재직하며 1990년에 구금된 반면 지간테는 약 16년 동안 거리에서 두목으로 재직하며 1997년에 구금된 사실을 생각하면 1980~90년대 조직범죄와의 전쟁 기간 동안 지간테가 고티보다 거리에서 훨씬 더 오래 살아남았기에 절반은 맞춘 예측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