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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대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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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quarezero.org/schism.gif
가톨릭( 로마)을 상징하는 성 베드로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상징하는 성 안드레아
한자 西
라틴어 Schisma Graecorum
그리스어 Σχίσμα των δύο Εκκλησιών
영어 East–West Schism, (the) Great Schism, Schism of 1054

1. 정의2. 서론3. 배경4. 5~10세기의 여러 충돌
4.1. 726, 성상파괴운동4.2.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공4.3. 교황령의 탄생4.4. 카롤루스 대제의 서유럽 평정4.5. 교황의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서임4.6. 프랑크 제국 vs. 동로마 제국: 무승부4.7. 9세기~11세기
5. 1054년, 상호파문 사건의 전말6. 진짜 분열7. 오늘날: 화해와 일치의 노력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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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

동서 대분열 혹은 (동서) 교회의 대분열은 원래는 그 유명한 니케아-칼케돈 신조를 비롯해서 여러 세계 공의회의 합의를 따르는 양대 기독교인 동방 교회(훗날의 정교회)와 서방 교회(훗날의 가톨릭)가 1054년에 분열되어 오늘날의 정교회 가톨릭으로 갈라선 시점이라고 역사가들이 보는 사건으로, 기독교사와 세계사에 손꼽히는 중대한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에페소 5:2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
고린토 1서 1:13
정교회에서는 ‘서방 대이교’라고 부르며, 반대로 가톨릭에서는 '동방 대이교'라 부른다.[1]

이 갈등은 9백 년이 지난 20세기 들어서야 교회일치운동의 확산 덕에 화해 무드로 들어갔으며, 1965년을 기준으로 동서 교회는 상호 파문을 취소하고 교류를 재개하였다.

2. 서론

후대 역사가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할 때 이 시점을 두 교회가 갈라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판단한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1053년까지 한 교회였다가 1054년부터 딱 갈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재통합되지 못하여 영영 떨어져 나간 것이다. 실제로 1054년 이전에도 두 교회가 상호 파문을 한 적이 있으며, 반대로 1054년 이후에도 두 교회가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므로 이 문서에서는 1054년의 사건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두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동서 분열에 대해, 정교회는 하나인 교회로부터 로마 측이 분열되어 나갔다고 인식하며, 가톨릭은 정반대로 하나인 교회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측이 분열되어 나갔다고 인식한다. 다만 양측에서는 모두 서로에 대한 시선이 개신교에 대한 시선과는 차이가 있으며, 분열 전 역사를 어떤 형태로든[2] 공유한다고 인식은 하고 있다.
서방의 가톨릭 동방의 정교회

3. 배경

그 근원을 따진다면,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지속적 침공을 받다 결국 서방 영토를 상실하여 서방 세계에 헬게이트가 열린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5] 여하튼 서방 세계가 개박살 난 와중에도 어찌저찌 야만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켜가며 어떻게든 생존한 서로마 교회는 게르만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동서 교회는 서로마의 급작스런 붕괴로 인해 벌어진 헬게이트를 수습하는 동안에는 멀쩡히 하나의 통합된 지체를 이루고 있었으나, 서방 교회가 어찌저찌 야만인들을 개종시킨 끝에 이 난장판이 수습되자 이미 로마의 동서 분리 때부터 슬금슬금 올라오던 수위권 떡밥이 또 튀어나오게 된다. 또, 이미 교리적 논쟁이 일어나서 본래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 교회 정교회 콥트 정교회라는 두 교회로 분열되는 등 이미 꽤나 오래 전부터 교회의 일치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가던 상황이었다.[6]

또,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의 진출로 인해 레반트 지역,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영구 상실하고 만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위기까지 겪었으나, 간신히 이슬람 세력을 격파하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돌려보자. 313년 밀라노 공인으로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은 이후 로마 제국 전역의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 기준으로 세 중심지인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훗날 신흥 세력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올라오고 예루살렘도 합세하며 5개 중심지 체제로 바뀐다. 이들, 즉 로마 제국의 총대주교 5명을 펜타르키아라고 하는데 펜타르키아의 구성원은 로마 총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다. 여기서 신흥 세력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방의 기존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와 갈등을 겪는데, 여기서 로마가 베드로가 세운 3개 주교좌(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사상을[7] 선호했다.

그리고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고토 회복 전쟁의 결과 동로마는 옛 서로마의 강역 중 상당 부분을 수복한다. 수복한 지역에는 옛 수도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 또한 포함이 되어 독립적인 교회 수장이던 교황은 다시 동로마 황제의 산하로 들어온다. 수복한 이탈리아 지역에는 라벤나 총독부가 설립되어 동로마 황제가 베드로좌를 보호했다. 그 결과 교황은 로마 교회의 사제단이 선출하여, 황제의 대리자인 라벤나 총독에게 선출을 보고하는 등 복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잡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5명의 총대주교가 대략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8]>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 순의 서열로 전 세계의 교회를 관리하며 동로마 황제가 신앙의 수호자로서 이들을 보호하는 보편 교회 자체는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7세기 이슬람의 발흥으로 인해 보편 교회의 근간이 뿌리채 흔들리게 된다. 동로마가 레반트, 북아프리카, 이집트 일대를 상실하게 되는데 하필 이 지역에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가 포함되는지라 3개의 총대주교좌 또한 이교도 손 안에 들어가고 결국 기독교 세계에 남은 총대주교좌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이 둘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세기까지는 동서 대분열이 일어나지 않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하나의 교회로 일치되어왔다. 흔히 알려진 필리오퀘 논쟁의 경우, 6세기 쯤이면 이미 라틴 교부 개개인의 견해를 넘어 서방의 지역 시노드들에서 채택되었으며 수백년간 동방에서도 이를 일치의 장애로 여기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들은 있었지만, 교회 일치의 면에서 필리오퀘는 결정적인 문제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룩한 그리스 교부들의 정식들은 설명될 수 있고 또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거룩한 라틴 교부들의 정식들을 비롯해 필리오퀘 역시 그렇게 설명되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각자가 지닌 고유한 독창성에 대해 온전히 존중하고 양측 간의 합의를 강조해야 한다. 6세기를 기점으로 '필리오퀘'는 서방 전통 안으로 들어갔으며, 이는 교회 간의 일치가 다른 여러 동기로 인해 분열되기 전까지 결코 교회 일치의 장애물로 간주되지 않았다.
-정교회 아드리아누폴리스(하드리아노폴리스) 대주교 다마스키노스Δαμασκηνός, 'Réflexions et perspectives au sujet du rétablissement de la communion sacramentelle', in 〈Oriente Cristiano〉 15 (1975), pp.7-25; 〈Irénikon〉 48 (1975), p.219.에서 인용[9]
가령 동방 교부인 고백자 성 막시모스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는 성령"이라는 라틴 신학의 명제를 표현 차이로 보았고, 라틴 신학의 이 명제에 명시적으로 동의하였다.
물론 도시의 여왕(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람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현 교황님의 시노드 서한을 공격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쓴 모든 장(章)들을 공격한 것은 아니고 그중에서 두 장만 공격했습니다. 하나는 (삼위일체) 신학으로 그들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은 또한 성자로부터도 자신의 발출(ekporeuesthai)을 갖는다." 또 다른 하나는 신적 강생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로마인들)은 첫 번재 사안과 관련해서 만장일치로 라틴 교부들의 증언들을 제시했으며, 거기에 더해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가 성 요한의 복음에 대해 작업했던 거룩한 연구에 따라 그의 증언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여러 증언에 바탕을 두고 성자를 성령의 원인(aition)으로 만들지 않은 점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ㅡ 실상, 그들은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점, 곧 한 분은 출산을 통해서 다른 한 분은 발출(ekporesi)을 통해서 유일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ㅡ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자를 통한 발출(to dia autou proïenai), 그리고 이를 통한 본질의 일치와 동일성을 입증했습니다. ··· 그러므로 그들(로마인들)은 잘못 비난 받은 것들과 관련해서 비난당했습니다. ... 당신의 질문에 따라, 저는 로마인들이 자신들에게 고유한 것("또한 성자로부터")을 번역하도록 청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부터 유래할 수 있는 애매모호함을 피하게 했습니다. ... 그밖에 그들의 생각을 하나의 언어로, 그들의 모국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외국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고백자 성 막시모스(AD 580-662), 키프로스의 사제 마리노스에게 보낸 편지(AD 655)[10]

아무튼 흔히 제기되는 단순화와는 달리, 필리오퀘 그 자체는 당대에 동서를 분열시킬 결정적 차이는 아니었다.

또한 로마 주교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의 교회정치적 경쟁 구도 역시도, 동로마 황제의 존재 때문에 어떻게든 중재가 되고 있었다. 후대인이 보기에는 동로마 황제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편들었을 것 같지만, 그건 분열 이후의 상황을 분열 전의 상황으로 소급해서 생각한 착각이다. 분열 전에는 로마 주교이든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이든 황제 입장에선 둘 다 정당한 주교이고, 오히려 '같은 도시'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 주교와 협력하곤 하였다.

요컨대, 신학적으로든 교회정치적으로든 어떻게든 일치를 이뤄가고는 있었다. 동시에, 동서방 사이에서 상호 경쟁구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4. 5~10세기의 여러 충돌

4.1. 726, 성상파괴운동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열은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 하나 때문만은 아니고, 이미 5세기 아카키오스 분열이나 단의론 논쟁 등을 통해 계속 쌓여왔다. 726년, 레온 3세 시대의 성상파괴운동[11] 등으로 인해 문화적인 이질감도 커져갔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동방교회의 성상파괴운동을 서방교회가 게르만족 상대 전도에 성상이 필요하다 여겨서 응하지 않았기(여기까진 맞다) 때문에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분열됐다'는 식의 이해는 학문적으로 매우 잘못된 이해이다. 세계사 교과서가 요약이 지나쳐서 이렇게 오해하기 딱 좋게 써놨는데 성상파괴주의는 동방 정교회 입장에서도 이단이다.
파일:Clasm_Chludov_detail_9th_century.jpg
애초에 동방교회가 전부 성상파괴주의였다면 그리스 정교 러시아 정교의 다채로운 이콘 문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성화(聖畵) 역시 성상파괴주의의 표적이었다.

동방교회는 전부 성상파괴주의가 아니고, 성상파괴주의에 대한 찬반이 교회 분열로 직접 이어지지도 않았다. 이 당시 성상파괴운동을 지원하던 것은 동로마 황제였고, 정교회는 성상 파괴에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로마 교황은 성상 파괴 논쟁에서 정교회의 입장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즉 성상파괴 관련 논쟁의 구도는 가톨릭 VS 정교회가 아닌, 정교회(+가톨릭의 지원) VS 동로마 황실+성상파괴론자이다. 그렇기에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열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교리적인 차이가 아니다. 애초에 성상파괴주의는 이슬람의 영향과 레온 3세의 정치적 의도가 결합한 결과물이었으니 교회 입장에서는 반발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상파괴운동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이유는 이를 기점으로 로마 가톨릭이 동로마 황제 영향력 차단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미 성상파괴운동 이전에도 동서 양쪽에서 모두 이단취급이었던 단성론자들과의 화해를 목적으로 단의론 논쟁을 촉발시킨 전적이 있는데 교회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시도를 다시 했기 때문이다.

4.2.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공

하필 이런 좋지 않은 타이밍에 안 그래도 북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랑고바르드족이 남하하여 중부 이탈리아를 개박살 낸다. 이미 7세기 초반 랑고바르드 족의 남하로 라벤나 총독부는 북부 이탈리아를 상실하고 중부 이탈리아로 영역이 축소된 상황었는데 이슬람에 의한 레반트-이집트-북아프리카 대거상실 트리플 콤보로 국력이 아작난 동로마는 안 그래도 라벤나 총독부 살려놓기도 힘든 판이었는데, 성상파괴운동으로 제국 내부가 분열되어 버렸으니 랑고바르드족의 침공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4.3. 교황령의 탄생

랑고바르드족들은 기어코 라벤나를 함락, 라벤나 총독부를 멸망시키고 로마까지 진군한다. 이 초유의 사태를 로마 교회는 간신히 민병대를 조직해 기적적으로 버텨낸다. 당연하지만 로마 교회는 버틸 수 없는 피꺼솟에 동방 교회에 참을 수 없는 악감정을 가지게 된다. 마침 다행히도 피핀 3세의 도움으로 랑고바르드족을 물리칠 수 있었고, 이때 피핀 3세는 라벤나 지역을 정복하고 교황에게 양도하는데, 이게 바로 교황령의 시초가 된다.

4.4. 카롤루스 대제의 서유럽 평정

그리고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가 서유럽을 제패하면서 랑고바르드족도 덤으로 깔끔하게 개박살났다. 그러고 이 양반은 랑고바르드 왕국도 개박살, 색슨 왕국도 개박살, 그야말로 로마 교회의 적이란 적은 모조리 개박살냈다.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프랑스 지역으로까지 진출하려던 이슬람 세력도 개박살냈다.[12] 게르만-북구 신화에서 신성시되는 세계수의 상징이자, 색슨족의 성지였던 이르민술도 바로 샤를마뉴가 작센을 개박살내면서 활활 태워버렸다.

4.5. 교황의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서임

마침 카롤루스는 서로마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교회들의 정보망을 이용해 지방 행정기구로 활용하였던 참이라 로마 교회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원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니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의 유착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 교회는 카롤루스를 교회의 새로운 수호자로 지목하였고 그를 서로마 황제로 대관한다.[13]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대관에 대해서 동로마는 잠깐동안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동로마의 국가적 위기 때문에 약 10년만에 카롤루스를 인정하게 된다.[14]
불가르 군대에게 패배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원로원과 군대는 스타브라키오스의 매형 미하일 1세를 황제로 선출했다. 이렇게 비잔티움 제국의 상황이 크게 악화되자, 그간 로마인의 황제로서 인정받지 못하던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비로소 자타공인 황제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이전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이 문제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812년 비잔티움 제국 사절단이 아헨에서 카롤루스를 바실레프스로 인정함으로써 세계에는 다시 한 번 동방과 서방의 로마 황제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Διονύσιος Σταθακόπουλος, 《비잔티움의 역사》A Short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최하늘 옮김, 더숲, 2023, 169-170쪽

4.6. 프랑크 제국 vs. 동로마 제국: 무승부

프랑크 쪽은 프랑크대로[15], 동로마 쪽은 동로마대로[16] 분노하여 아드리아 해와 발칸반도 북부에서 몇 년간 전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동로마 군대가 우세를 점했지만[17] 갈수록 양측 모두 승세를 얻지 못하고 소강상태에 빠져들었으며 동로마 입장에서는 북방의 불가리아가 새로운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양측은 휴전 협정을 하였고, 동로마는 카롤루스에 대해 "로마" 황제는 아니되 황제인 것까지는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4.7. 9세기~11세기

이후로도 서방과 동방, 그리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교회는 시대 사정에 따라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였다. 9세기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교회의 주요 분열 사건으로 포티오스 분열이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문서 참조.

하지만, 아직 교회가 완전히 분열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라벤나 총독부가 박살이 나긴 했어도, 11세기 중반까지는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남부(대 그리스)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로마에 이리 저리 간섭을 할 수 있었고, 따라서 교회가 완전히 분열될 만한 환경은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빙하기 크리를 맞고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남하한 바이킹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며 노르만인이 되었는데, 이들이 이탈리아 남부를 침공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서방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했다.

다만 1054년 시점에서 동로마 제국령 이탈리아는 아직 로베르 기스카르가 정착하기 전 시점이라 굳건했다.

5. 1054년, 상호파문 사건의 전말

전통적으로 동로마 황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한 자국의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항상 로마와 제휴하곤 했다. 11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고, 황제의 권력 또한 매우 약해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할 정도로 강해져 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는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찍어 눌러달라는 의미의 서한을 보냈다. 교황 레오 9세는 즉각 황제의 요구에 부응하여 로마 교회에서 가장 완고하며 호전적인 세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했다.

이 기간 중 내내 교황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뭐라고 하건 말건 처음부터 끝까지 교황의 수위권만을 주장했기 때문에 양자 간 합의는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이들을 추방했고, 결국 열이 단단히 뻗친 교황 사절단은 1054년 7월 16일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제대 위에 세계 총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올려놓고 로마로 돌아가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이것을 보고 격노한 세계 총대주교는 그 세 명을 파문하고 교황의 이름을 딥티코스에서 지워버렸다... 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일방적인 수위권 주장과 추방까지는 맞지만, 양측이 서로의 교회 자체를 파문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절단을 보낸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 4월 19일에 사망했고, 후임 교황 빅토르 2세(재임 1055~1057)는 1055년 4월 13일에 선출되었기 때문에, 사건이 벌어진 1054년 7월에 교황좌는 공석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레오 9세의 대리자로 파견된 것이었기 때문에 파문 교서를 하기아 소피아 성당 제대 위에 올려 놓았거나 말거나 그들은 끝끝내 몰랐지만 자격이 소멸된 상태였고[18] 게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인 미카엘 케룰라리오스가 직접 파문한 것은 교황이 아니라 훔베르투스 추기경과 그 사절단이었다. 혹은 일부 주장처럼 교황을 직접 파문했다고 하더라도 레오 9세는 이미 죽었고 빅토르 2세는 착좌하지도 않았던 상태였다.

결국 오늘날 동서 대분열이라고 불리는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 자체는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훔베르토 추기경이 적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교황과 세계 총대주교의 상호 파문 자체는 이미 500여 년 전 아카키오스 분열 때도, 200여 년 전 포티오스 분열 때도 있었던 일이다. 곧, 1054년의 사건은 아무리 중대하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전에도 있었던 분열의 반복일 뿐이었다. 전에도 그러했듯이 잠깐의 다툼으로 그치고 다시 서로 화해했다면, 1054년의 사건은 아카키오스 분열이나 포티오스 분열처럼 그냥 교회정치적 해프닝으로만 비추어졌을 것이다. 다시 서로 화해하기만 했다면 말이다.

요컨대, 이 분열을 대(大)분열로 만든 건 1054년의 상황이 아니다. 1054년의 분열에서 화해를 하지 않고 수백년을 보낸 것이야말로 이 분열을 대(大)분열로 만든 것이다. 다소 일상적인 비유를 하자면, 친구끼리 절교를 할 때는 꼭 무슨 거창하고 살벌한 다툼이 있는 건 아니다. 설령 해프닝에 가까운 다툼이라도, 이후에 서로 화해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버리면 그게 바로 절교가 되는 것이다. 1054년 이후 동서 교회가 소원해진 게 바로 이런 모양새였다.

6. 진짜 분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054년의 분열 자체는, 사건 그 자체만 보자면 900년 넘게 이어질 성질이 아니었다. 실제로 1054년 이후로도 두 교회는 교류를 계속 했으며, 50여 년이 지나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에 교황이 응하는 식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두 교회가 동질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자군 전쟁은 문서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단순히 종교와 신앙에 기반한 전쟁이 아니었다. 교황, 서방 국가, 동로마 제국 모두 각자의 정치적 이유를 가지고 전쟁에 임했던 것이다. 그래도 초기에는 실제로 성지를 수복하였으나, 십자군 세력은 동로마 제국의 통제를 받기를 거부하였다. 또한 동로마 콤니노스 왕조의 현란한 외교술은 장기적으로 동로마의 외교적 평판을 깎아먹었으며 외교술이 뛰어난 콤니노스 왕조의 대가 끊겨버리자 사방에 적만 깔리게 되었다. 게다가 베네치아 공화국 등 경제적 이득을 중시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마구잡이로 끼어들면서 1204년 결국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제4차 십자군 원정1054년의 사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일으켰다. 동로마 제국의 땅은 분열되었고 십자군과 베네치아가 세운 괴뢰 라틴 제국은 한심한 꼴로 몰락했다. 결국 분열된 정교회권 나라들은 하나씩 오스만 제국에 먹히게 되었다. 더 큰 비극은 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가 서로를 다른 집단으로 여기는 것을 넘어 적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이후 공의회를 통해 두 교회를 다시 합치려는 시도가 두 차례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 미하일 8세&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때 제2차 리옹 공의회(1274년)에서 동서교회 통합 논의가 나오자 필리오케 문제에 대해 정교회가 가톨릭의 입장을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미하일 8세 사후에 여러 사정으로 흐지부지됐다.
  • 요안니스 8세&교황 에우제니오 4세 때 열린 피렌체 공의회(1439년)에서도 정교회가 가톨릭의 필리오케를 수용하고 가톨릭의 수위권 우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통합하기로 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스 11세도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했지만 동로마의 국내 여론은 오히려 나빠졌다. 당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이라서 서방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동로마인들은 "정교회 신앙이고 뭐고 일단 살고 보자" vs "저 악마 같은 라틴인에게 머리숙이느니, 차라리 이교도의 손에 긍지 있게 죽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터번으로 덮히는 게 낫다. 튀르크족은 최소한 우리에게 즘미로서 정교회를 믿을 권리는 준다"며 국론 분열을 일으켰다. 이미 그 시점에서는 종교의 문제를 넘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를 멸망시킨 후, 통합 반대파 성직자인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를 세계 총대주교로 임명하며 밀레트 제도를 통해 국내 정교도를 관리했고, 통합 찬성파가 서방으로 망명하면서 동서교회 통합 논의도 흐지부지됐다.

그 이후 러시아의 전신인 모스크바 대공국을 제외한 전 정교회권이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두 교회는 완전히 단절되었는데, 교황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교황령으로 망명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을 이용하여, 그의 딸 조이 팔레올로기나를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동서 교회를 재통합하려 했다. 그러나 이반 3세는 결혼식을 치른 후 동로마 황녀와 결혼했다는 점을 이용하여 모스크바 제3의 로마로 선포하고 차르라고 자칭하며[19]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함으로써 통수를 날렸고(...), 이로써 마지막 통합 시도마저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에는 두 교회 간에 어떠한 통합 논의도 없어서, 동방과 서방은 각자 독자적인 신학 체계를 발전시킴으로써 신학적인 괴리는 갈수록 커졌다. 근대에는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고 세력이 강성해진 러시아 제국이 '정교회의 수호자'임을 강조하면서 정교회권과 가톨릭권의 알력이 다시금 드러나게 되었다. 다행히 현대에는 가톨릭-정교회의 상호교류가 늘면서 상당한 신학적 진전이 있는 중이고, 과거보다는 의견의 차이를 좁혔다.[20]

7. 오늘날: 화해와 일치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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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 사도 안드레아스 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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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Αθηναγόρας, Athenagoras).

위 두 사람이 이러한 흑역사를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64년 당시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 바오로 6세와 정교회의 대표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가 예루살렘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바오로 6세가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정교회의 여러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고 반대로 아티나고라스 역시 정교회의 대표로서 최초로 바티칸을 방문하는 등 서로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듬해인 1965년 12월 7일 1054년 동서 교회 대분열 이후 무려 900여년 만에 가톨릭과 정교회는 서로에 대한 파문을 철회하였다. 물론 900여년 간 분열되어 있었던 만큼 이 화해는 일단 명목상으로 화해한 것이며, 교회 일치 노력에 어느 정도 진전은 있지만, 서로 간의 입장과 견해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성사 교류에 대해서, 두 교회는 서로의 성사 유효성을 인정한다. 세례를 인정하므로 영성체도 가능하나 실제로는 사망 직전 등 위급한 상황이거나 본인 교회의 성사에 참가가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경우에 한해서다.

그 외에 대해선 교회 일치 운동 참조.

8. 관련 문서



[1] 나 먼저 원리를 따른 것이다. 정교회 입장에서는 서쪽의 가톨릭이, 가톨릭 입장에서는 동쪽의 정교회가 분리해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2] 정교회 시점의 역사관이든 가톨릭 시점의 역사관이든 [3]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알 안달루스 모사라베 포함 [4] 아나톨리아에 거주한 켈트족의 한 분파였으나, 기독교 공인 이후 자연히 그리스인으로 동화되었다. [5] 다만 이것의 책임을 서로마를 "포기"한 동로마에 돌리는 견해가 있는데 학문적으로 근거 없는 얘기다. 동로마와 서로마 사이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건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이지만 이건 두 로마 제국의 주도권이 책임감 있는 황제가 아닌 자기 잇속밖에 모르는 권신들에게 넘어간 속사정 탓이었다. 물론 스틸리코는 그렇지 않았지만, 하필 스틸리코의 홈그라운드는 서로마였던 데다가 다른 정치력 있는 부하도 없어서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동서 로마의 협조 체제는 나름 복원되지만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반달족을 격파하러 대규모 원정군을 보낸 것이 반달족의 화공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면서 동로마가 큰 경제적·군사적 피해를 입어(원정군 규모가 10만 명, 동원한 배는 1000척을 훌쩍 넘었다. 이 원정군을 편성하기 위해 동로마는 13만 리브라(금 48톤 750kg 상당)의 예산을 쏟아 부었다. 대규모 인력과 비용을 쏟아 부은 이 원정의 실패는 동로마를 근 30년 가까이 괴롭혔다.) 이후 더이상 서로마에 개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결코 동이 서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6] 하지만 콥트 정교회와 정교회의 대화이든, 콥트 정교회와 가톨릭의 대화이든, 오늘날엔 당대의 분열이 표현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데 넓은 공감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정교회의 대화처럼) 현실적인 실무 문제가 남아있지만. [7] 비록 알렉산드리아는 마르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지만. [8] 칼케돈 공의회에서 2위로 격상 [9] 이 인용문은 가톨릭의 이브 콩가르Yves Congar 추기경의 저서인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Je crois en l'Esprit Saint 제3권에서 찬성과 함께 언급되었다.(본문의 인용문도 콩가르 추기경의 이 책 한국어판에서 그대로 발췌한 것이다.) 정교회와 가톨릭의 이 두 주교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필리오퀘에 대한 논쟁은 동일한 신앙에 대한 두 표현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6세기엔 필리오퀘가 개별 교부의 견해를 넘어서 서방의 지역 시노드 차원에서 채택되었고, 동서방의 개별 교회들은 이를 친교 속에서 받아들였으며, 수백 년간 단죄되지 않았다. 가톨릭에선 필리오퀘에 대한 교의는 물론이고, 논쟁 그 자체도 동서분열의 결정적 원인이 아니라고 본다. 정교회의 경우 인용된 다마스키노스 대주교를 포함해서, 바실리 볼로토프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Болотов, 세르게이 불가코프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Булга́ков, 파벨 에브도키모프Павел Николаевич Евдокимов 등의 성직자/신학자들이 필리오퀘 논쟁이 가톨릭과의 분열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본다. [10] 번역은 Yves Congar 지음, 윤주현 옮김,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 제3권 113-114쪽에서 발췌. [11] 아래에도 설명되어 있었지만 동로마의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입장이었다. 성상파괴주의는 동로마 황제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문화 및 종교 사건으로 그 특징과 파괴력이 가히 로마판 문화대혁명급이다. [12] 다만 프랑크 왕국의 이베리아 진출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3] 이러한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문서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황에게 서방 통치권을 줬다는 8-9세기 프랑크 왕국 위조 문서인 〈콘스탄티누스의 증여〉이다. 이 위조 문서는 텍스트 자체는 역사적으로 당연 가짜이지만, 권리 자체는 기존 서방에서 관습적으로 굳어진 교황의 위상이 문서 위조의 형태로 명시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훗날 1054년 동서대분열의 당사자인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1세 케룰라리오스(Μιχαήλ Α΄ Κηρουλάριος)는 다름아닌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를 근거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의 교권을 황제의 속권보다 높이려 하였다. 「11세기 비잔티움 교회의 세력 강화는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라는 인물에게서 채현되었다. 로마로부터의 독립과 함께 총대주교의 계획은 단지 일부만 실현되었을 뿐이다. 그에게 그보다 적잖이 중요한 것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새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 총대주교는 성직의 세력을 속세의 세력보다 높이려는 아슬아슬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는 자신의 고압적인 요구의 근거로서 흥미롭게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증〉을 들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증〉은 여기서 처음으로 비잔티움의 사태가 전개되는 데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총대주교는 황제가 신는 자줏빛 신발을 신고, 황제를 퇴위시키겠다고 위협했다고 전해진다.」(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Georg Ostrogorsky,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Byzantinsche Geschichte 324-1453, 한정숙·김경연 옮김, 까치글방, 1999, 269쪽) [14] 또한 당시 동로마의 여제였던 이리니와 결혼하여 여성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크 및 게르만족 문화에 따라 "로마의 여황제와 결혼해 로마 제위를 넘겨받는다!"는 생각으로 (동로마 입장에선) 매우 황당한 정략결혼을 시도했고 이리니도 여기에 동의했으나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은 당연히 이에 반발, 여기에 친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의 눈을 뽑았던 것에 대한 불만이 합쳐져 이리니가 폐위되고 니키포로스 1세를 추대하면서 이 시도는 무산된다. [15] 정략결혼을 무산시킨 것으로 모자라 폐위시켰으니까 [16] 당시 동로마는 게르만 민족이 세운 프랑크를 야만족들의 나라로 보고 있었다. [17] 해군이 크게 활약하는 동시에 카롤루스의 아들을 전사시키는 등 몇차례 연승을 거두었다. [18] 서울 가톨릭대 신학과에선 이를 두고 "의도치 않은 월권' 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19] 이후에도 모스크바 대공국이라는 국호는 유지하다가 손자인 이반 4세의 치세에 루스 차르국으로 바뀌었다. [20] 물론 동서대분열 이후 1000년 가까이 독자적인 신학의 길을 걸어갔으니 여기서 생기는 차이도 있지만, 이건 어쨌거나 양측 모두의 공동 전승과 교부들에 기반했기에 생각만큼 큰 차이는 아니다. 가령 성모몽소승천은 동서대분열 이후 가톨릭에서만 확정된 교의이지만, 이 전승 자체는 정교회도 공유한다. 당장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 이름이 성모승천성당이다. 또한 헤시카즘 영성의 경우 동서대분열 이후의 정교회에서 본격적으로 발달시킨 영성이지만, 엄연히 분열 전의 공통 전승에 기반한 영성이다. 따라서 분열 후의 헤시카즘 영성도 가톨릭에서 딱히 이단시하지 않고 영성서적에서 긍정적으로 자주 소개된다. 교황과 총대주교의 권한 논쟁의 경우도,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미미하다. 이건 신학의 영역이 아니라 역사학의 영역이고, 약 1000년간의 공통 역사 동안 쌓인 문헌의 양은 막대하다. 그렇기에 가톨릭과 정교의 논쟁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벌어진 일에서 어떤 교의적/규율적 명제가 도출되는가?"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어쨌거나 1000년간 공통 문헌을 공유하니, 성경의 단편적인 언급에 기반하는 가톨릭&정교-개신교의 논쟁보다 훨씬 대화가 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