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왕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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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왕국 Bosansko kraljevstvo Босанско краљевств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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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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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왕국의 위치 | |||||
1377 ~ 1463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보스니아 반샤그 | 오스만 제국 | ||||
위치 | 보스니아 | ||||
수도 | 보보비츠 | ||||
정치 체제 | 봉건제 | ||||
면적 | 69,069km² | ||||
인구 | 50~100만 명(추정)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국왕 |
트브르트코 1세(1377~1391) 스테판 토마셰비치(1461~14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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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보스니아 정교회 정교회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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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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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남슬라브인들의 왕국. 오늘날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그 주변 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을 다스렸던 국가이다.2. 역사
헝가리 왕국의 종속국이었던 보스니아 반샤그의 반(Ban) 트브르트코 1세는 1371년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세르비아 제국이 붕괴된 뒤 세르비아가 여러 공국으로 나뉜 틈을 타 세르비아로 영역을 확장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모라비아 일대를 통치한 세르비아 영주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반면, 루드니크, 폴리믈리예, 상부 포드리나 일부, 자후믈례 동부 일부, 트레비네, 코나블레 교구 및 라구사 공화국과 접경하는 영지를 관리하는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와 갈등을 벌였다. 니콜라는 트브르트코 1세와 부크가 내전을 치렀을 때 부크를 지원했고, 라자르로부터 루드니크를 탈취했다. 여기에 프리즈렌을 공략하고 장차 세르비아의 새 군주가 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에 트브르트코 1세와 라자르는 서로 동맹을 맺고 니콜라를 공동으로 대적하기로 했고,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도 두 사람을 지원했다.1373년 가을, 트브르트코 1세는 헝가리 기병 1,000명을 지원받은 뒤 라자르와 함께 공세를 개시해 니콜라를 격파하고 그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후 두 사람은 니콜라의 옛 영지를 나눠가졌는데, 보스니아는 프드리나, 폴리믈리예, 자후믈례 상부 지역을 확보했다. 한편, 제타 공국의 발시치 가문은 트브르트코 1세와 니콜라가 전쟁을 벌인 틈을 타 트레비네, 코나블레, 드라체비차를 점령해, 보스니아와 국경을 접했다. 그 후 양측간의 국경 분쟁이 이어졌고, 트브르트코 1세는 1377년 초 트레비나, 코나블레, 드라체비차를 급습해 공략했다. 이에 분노한 주라지 1세 발시치(Đurađ I Balšić)는 보스니아를 침공해 네베신예를 약탈했다. 하지만 주라지 1세가 1378년 1월 13일에 급사한 뒤, 제타 공국은 이웃 공국들의 공세로 영역을 상당수 잃었다. 트브르트코 1세는 이 때를 틈타 1377년에 공략한 영토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졌고, 자신이 확보했던 영토와 보스니아 사이의 해안 지대 역시 합병했다. 이리하여 보스니아는 코토르와 라구사 사이의 아드리아 해안지대의 주인이 되었다. 이러한 정복 과정에서, 트브르트코 1세가 점령한 세르비아 영토에 살던 정교회 신자, 사제, 수도자들이 보스니아에 대거 편입되었다.
1377년 가을, 트브르트코 1세는 자신이 세르비아의 상당 부분을 확보했으며, 친할머니 엘리자베타가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의 딸인 걸 근거로 삼아, 자신이 세르비아의 왕실인 네마니치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그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학계에서는 성 데메트리오스의 축일인 10월 26일에 대관식을 거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나, 어디서 거행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본다. 라구사의 연대기 작가 마브로 오르비니는 밀레셰바 수도원에서 거행되었다고 기술했고, 20세기 세르비아 역사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였지만, 현대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역사가들은 보스니아 밀레 마을에 있는 성 니콜라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 거행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 수도원은 트브르트코 1세의 전임자 일부의 유해가 매장되었고, 트브르트코 1세의 후계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트브르트코 1세는 대관식을 치른 뒤 왕호에 네마니치 왕들과 연관하기 위해 상징적인 이름인 스테판을 덧붙였으며, 라구사 공화국에 서신을 보내 라구사가 13세기부터 세르비아 왕들에게 지급했던 성 데메트리오스의 수입을 자기에게 주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를 비롯한 몇몇 세르비아 영주의 인정을 받았을 뿐이고, 다른 세르비아 영주들은 무시했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국왕이 된 트브르트코 1세는 경제 정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라구사와 코토르 등 해상 도시들이 식량 운송을 위해 자국 영토를 이용하는 걸 이용해 통행세를 거둬들였고, 금속 광석과 금속 가공물(주로 은, 구리, 납)을 수출해 국고를 늘렸다. 그러던 1378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이 전쟁을 일으켰다. 러요시 1세는 제노바 편을 들었고, 베네치아와 대립하던 라구사 공화국도 제노바를 지지했다. 베네치아는 그해 8월 코토르를 점령한 뒤 트브르토크 1세에게 자기 편을 들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트브르트코 1세는 이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그러던 중 코토르 관리들이 베네치아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자기들이 세르비아 왕국에 속했다는 걸 이유로 트브르트코 1세에게 귀순하겠다고 약속했다. 라구사 공화국은 자기네 영향권에 있던 코토르가 보스니아에 들어가자 격분해 보스니아에 대한 금수 조치를 내렸다. 트브르트코 1세는 라구사로부터 코토르를 방어했지만, 코토르는 1379년 6월 러요시 1세 쪽으로 충성할 대상을 바꿔버렸다.
코토르를 귀속시키지 못한 데다 라구사 공화국의 금수조치로 인한 보스니아 경제가 피해를 입었고, 해상 무역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필요성이 생기자, 트브르트코 1세는 아드리아 해 동부 연안에 새 도시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1382년 초, 트브르트코 1세는 코토르 만에 도시와 요새를 건설하도록 하니, 이 도시가 바로 헤르체그 노비(Herceg Novi)이다. 그는 이 도시를 통해 소금 무역의 새로운 활로를 뚫으려 했다. 소금을 실은 첫 배가 도착한 그해 8월부터 무역 활동이 시작되었고, 코토르와 달마티아, 이탈리아 반도 상인들은 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라구사인들은 소금 무역 독점권을 잃게 생긴 것에 불만을 품고 헤르체그 노비의 상업 활동을 방해했으며, 보스니아와 베네치아에 대항하기 위해 달마티아 도시들의 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트브르트코 1세는 11월에 라구사 공화국과 타협해 소금 무역에서의 우선권을 그들이 가지는 걸 인정하기로 했고, 라구사 공화국은 금수조치를 풀기로 했다.
1382년 9월 11일,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가 사망했다. 이후 헝가리에서 계승 분쟁이 벌어지자, 트브르트코 1세는 1357년에 러요시 1세의 압력 때문에 지참금으로 내줘야 했던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1383년 봄 해군을 건조한 그는 베네치아로부터 2척의 갤리선을 추가로 구매했고, 베네치아 귀족을 제독으로 고용했다. 또한 오푸젠 인근에 새로운 도시인 브르슈타니크를 건설했다. 이러한 그의 움직임을 전해들은 헝가리의 새 여왕 마리어와 어머니 엘리자베타는 왕위가 지극히 불안한 상황에서 그와 싸우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그의 호의를 얻기 위해 양보하기로 했다. 1385년 봄, 마리어 여왕은 트브르트코 1세가 명목상으로나마 헝가리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코토르를 양도했다. 보스니아 왕국은 아드리아해의 주요 무역 도시인 코토르를 손에 넣으면서 큰 수입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제타 공작 뱔샤 2세 발사치도 이 도시를 원했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에 중재를 요청했지만, 1385년 사브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으면서 무산되었다. 뒤이어 제타 공작에 오른 주라지 2세 발시치는 보스니아에 대한 적대감을 유지했다.
1385년, 헝가리에서 라디슬라오를 받드는 세력과 마리어 여왕과 남편인 지기스문트를 받드는 세력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그는 라디슬라오의 편을 들었고, 라디슬라오가 헝가리를 장악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마리어와 지기스문트 부부에게 충성을 표하던 달마티아 도시들을 노렸다. 1387년 7월 클리스 요새를 공략한 뒤 스플리트와 자다르로 진군해 주변 지역을 약탈했지만, 두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해 11월 오스트로비차 요새를 함락시켰고, 뒤이어 트로기르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여기에 슬라보니아에서도 별도로 별동대를 보내 약탈 행진을 벌이도록 했다.
1388년, 보스니아군이 달마티아 깊숙이 침투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자, 달마티아 도시들은 지기스문트에게 자신들을 돕거나 부득이 항복하는 걸 승인해달라고 간청했다. 지기스문트가 라디슬라오의 군대와 전면전을 벌이느라 그들을 도울 겨를이 없자, 스플리트, 자다르, 시베니크는 저항 의지를 포기하고 트브르트코 1세와 협상한 끝에 1389년 6월 15일까지 지기스문트가 원조해주지 않으면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가 달마티아에 원정가느라 보스니아 동부를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 보스니아 왕국의 급격한 확장을 질시하던 제타 공작 주라지 2세 발시치가 오스만 제국군에게 보스니아에 대한 습격전을 벌여달라고 요청했다. 1388년, 랄라 샤힌 파샤가 이쓰는 오스만과 제타 연합군은 보스니아로 진군해 빌레차까지 진군했다. 이에 트브르트코 1세의 가신인 훔스키와 보스티아 대공 블라트코 부코비치가 요격에 나섰고, 1388년 8월 말 빌레차 전투에서 적군을 자클루 미안 협곡으로 유인한 뒤 격멸했다. 랄라 샤힌 파샤는 대다수 병력을 잃고 패주했다. 이에 경각심을 느낀 트브르트코 1세는 주라지 2세와 협상한 끝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89년 6월 15일 1차 코소보 전투가 벌어졌다. 트브르트코 1세는 충실한 봉신인 라자르를 도와주는 게 달마티아를 확보하는 것보다 우선한다고 여기고, 군대에 달마티아를 떠나 라자르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그 후 치러진 전투에서 상당수의 보스니아 귀족이 전사했고, 라자르 역시 전사했지만,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도 죽었다. 트브르트코 1세는 전투에 참여한 블라트코 부코비치의 편지를 근거로 삼아 기독교 연합이 승리했다고 확신하고, 여러 기독교 국가에 승리를 알렸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라자르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또다른 가신 부크 브란코비치는 트브르트코 1세의 적인 지기스문트에게 귀순했다. 이렇듯 코소보 전투로 충실한 가신들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가 세르비아 왕위를 주장하는 건 공허한 일이 되었다.
1390년 보스니아 왕국의 영역.
그가 코소보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군대를 철수하자, 달마티아 도시들은 태도를 바꿔 항복을 거부했다. 이에 트브르트코 1세는 군대를 재차 동원해 달마티아로 진격했고, 1389년 11월에서 12월까지 이어진 일련의 전투와 소규모 접전에서 헝가리군을 물리쳤다. 결국 1390년 5월, 달마티아의 거의 모든 해안 도시와 달마티아 섬은 트브르트코 1세에게 귀순했다. 트브르트코 1세는 자신을 "신의 은총으로, 라쉬카, 보스니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포모리예의 왕"이라고 칭했다. 이후 달마티아에서 여전히 자신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은 유일한 도시인 자다르를 공략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1390년 9월부터 지기스문트와 평화 협상을 시작하는 등 자기가 확보한 영역을 공고히 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작업이 채 끝나지 않은 1391년 3월 10일, 트브르트코 1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트브르트코 1세에게는 아들 트브르트코 2세가 있었지만, 보스니아 귀족들은 트브르트코 1세의 사촌인 스테판 다비샤를 차기 국왕으로 옹립했다. 다비샤가 왕위에 오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학자들은 트브르트코 2세가 너무 어려서 트브르트코 1세의 확장 정책으로 확보한 영역을 제대로 관리하기 어려울 거라 보고, 코트로마니치 가문 인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를 옹립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 나폴리 왕국에 사절을 보내 보스니아 국왕이 된 것을 알렸다. 베네치아 왕국은 1391년 6월 1일 그를 인정한다고 통보했으며, 라구사도 6월 15일 그에게 시민권을 주며 보스니아 국왕 직위를 인정했다.
얼마 후, 트브르트코 1세에게 정복되었던 스플리트, 트로기르, 시베니크 시가 보스니아에게 반기를 들 낌새를 보였다. 여기에 트브르트코 1세가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 달마티아를 석권한 것에 불만을 품은 지기스문트가 이 움직임을 부추겼다. 한편, 지기스문트를 상대로 헝가리 왕위롤 놓고 분쟁을 벌이던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도 1391년 여름에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귀족들을 고위 관직에 선임함으로써, 그 일대에 대한 다비샤의 주권 대신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받으려 했다. 1392년 봄 오스만 제국군 경기병대가 보스니아를 침공했지만 격퇴되었다. 한편, 지기스문트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에게 보스니아에서 이단인 보고밀파와 "분열주의자"인 정교회가 여전히 강성하다며, 이들을 토벌할 십자군을 단행하자고 주장해 승인을 받아냈다. 하지만 지기스문트가 보스니아를 상대로 벌인 공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단지 1년 안에 다비샤와 휴전 협저을 맺은 것만 전해진다.
그러나 다비샤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대귀족들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1394년 6월, 다비샤는 라디슬라오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지기스문트의 적이었던 달마티아 대귀족 이반 호르바트와 갈등을 벌였다. 그는 브라치, 흐바르, 코르출라 섬에서 차출한 병력을 파견해 호르바트가 다스리는 도시인 오미스를 포위하도록 했다. 당시 지기스문트는 달마티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다비샤의 오미스 포위로 인해 호르발트의 병력 상당수가 그쪽으로 보내진 틈을 타 공세를 개시했다. 이어진 도보르 전투에서, 이반 호르바트는 지기스문트에게 참패하고 생포된 뒤 처형되었고, 지그문트의 군대는 보스나 강에 있는 도보르 시를 파괴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다비샤는 도보르 시 인근 진영에서 지기스문트를 찾아가, 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고 충성을 서약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넘기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더해, 지기스문트를 자신의 주권자이자 보스니아 왕좌의 지명 상속인으로 인정했다. 그가 이토록 가혹한 조건에 동의한 계기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대가로, 지기스문트는 다비샤를 헝가리의 최고위 관리에 포함하고 소모기의 백작에 선임했다. 1395년 3월 말, 다비샤는 자후를례의 비슈체에서 라구사 당국에 서신을 보내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라구사 공화국이 의사를 보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다비샤는 1395년 9월 8일에 사망했다.
보스니아 대귀족인 흐르보예 부크비치 흐르바티니치 대공, 파블레 라디노비치, 산달지 흐라니치, 유라즈 라디보예비치는 사전에 합의한 대로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를 보스니아 국왕으로 받들길 거부했다. 그들은 의회를 소집한 뒤, 스테판 다비샤의 왕비인 옐레나 그루바를 여왕으로 옹립했다. 지기스문트는 보스니아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시르미아 인근으로 진군했지만, 보스니아 귀족들이 군대를 소집하여 맞대응하려 하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급했기에 물러나기로 했다. 그 후 지기스문트는 1396년 9월 25일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했고, 이 때문에 보스니아에 대한 별다른 압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옐레나는 의회와 귀족 대표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통치했다. 옐레나의 치세에 반포된 헌장에서, 그녀는 자기와 상의한 귀족으로 흐르보예 부크비치 흐르바티니치, 파블레 라디노비치, 산달지 흐라니치, 바탈로 산티치 등을 언급했다. 그러나 라구사 공화국은 그녀가 보스니아와 라구사 간의 기존 협정에 서명하는 전제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며 공물을 보내길 거부했다. 이에 라구사 출신의 보스니아 재무관 조레 복시치(Žore Bokšić)가 중재에 나섰고, 라구사 공화국은 1397년에 비로소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보냈다. 보스니아 대귀족들은 그녀의 집권기 동안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왕권은 쇠락하고 보스니아 왕국이 여러 대귀족의 영역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398년 1월, 오스만 제국군이 봉신인 세르비아 영주 스테판 라자레비치와 함께 보스니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과 폭설로 인해 많은 병사가 얼어죽자, 그들은 보스니아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그해 5월, 여왕의 집권에 대한 외세의 압력이 심해지고, 통치력이 없는 그녀 때문에 행정이 잘 돌아가지 않는 것에 부담을 느낀 귀족들은 그녀를 퇴위시키고 스테판 다비샤의 친척인 스테판 오스토야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오스토야는 권력을 잡은 직후 헝가리 왕위를 놓고 지기스문트에 맞서던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이에 지기스문트는 같은 해에 보스니아를 공격하려고 계획했지만, 내전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터라 중단했다.
1400년, 오스토야는 라구사 공화국이 보스니아인들을 노예로 판 것에 대해 항의하고, 이를 명분삼아 라구사 공화국과 짧은 전쟁을 벌였다. 일부 학자들은 가톨릭 신자를 노예로 파는 게 엄격히 금지되었기에, 라구사 공화국이 판 보스니아인은 보고밀파이고, 오스토야 역시 보고밀파였을 거라 추정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를 지원한 흐르보예 부크치치 흐르바티니치가 보고밀파에 호의적인 건 분명하다. 1403년, 라디슬라오는 자다르에서 헝가리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한 뒤, 흐르보예를 헝가리,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보스니아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오스토야는 흐르보예의 보호를 받던 한 귀족의 땅을 압수했고, 이로 인해 흐르보예의 반감을 샀다. 또한 오스토야는 또다른 보스니아 대귀족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와도 갈등을 벌였다.
1404년 4월 말, 흐르보예와 산달리는 오스토야가 소집한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해 5월, 두 사람은 군대를 일으켜 오스토야를 축출하고 트브르트코 2세를 새로운 보스니아 국왕으로 옹립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흐르보예의 꼭두각시 취급을 받았으며, 흐르보예의 영지인 사나에서 살았다. 1405년 봄, 흐르보예는 보스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광산인 스레브레니차의 관리권을 확보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흐르보예의 견해에 따라 헝가리 왕위를 놓고 지기스문트와 전쟁을 치르던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를 지지했다. 한편,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는 오스토야를 지지하던 라디치 산코비치를 공격해 일부 영지를 빼앗았다.
스테판 오스토야는 1404년 정변 때 가까스로 빠져나간 뒤 지기스문트에게 귀순했고, 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지기스문트는 즉시 그를 복위시키기 위해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1404년 6월, 헝가리군은 우소라와 보보비츠를 공략했다. 하지만 모든 보스니아 귀족은 트브르트코 2세를 왕으로 인정했기에 전쟁은 지속되었다. 1408년 9월, 지기스문트는 도보르 인근에서 보스니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트브르트코 2세는 1409년 초 보스니아에서 여전히 왕을 칭하며 라구사 공화국과 서신을 교환했지만, 헝가리의 강한 압력에 굴복한 보스니아 귀족들이 오스트야 편으로 돌아서자,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409년 말 해외로 망명했다.
스테판 오스토야는 보스니아 국왕에 복위했지만, 그의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가신들은 그에게 불순종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했으며, 흐르보예는 아예 오스토야 대신 지기스문트에게 직접 복종했다. 반면 코사차 등 특정 귀족들은 오스토야를 보스니아 국왕으로 인정하면서도 지기스문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1410년까지 라디슬라오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오스토야는 흐르보예를 어떻게든 견제하기 위해 흐르보예나 그의 가신에게 속한 땅을 다른 귀족에게 주려 했으며, 라디슬라오를 지지하는 코사차 등과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이에 지기스문트는 그에 대한 후원을 끊고 흐르보예와 함께 오스토야와의 전쟁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1410년, 헝가리군이 지기스문트의 지시에 따라 보스니아로 진군해 브란두크, 스레브레니크, 스레브레니차를 포함한 보스니아 북동부를 공략했다. 뒤이어 비소코까지 넘어가자, 오스토야는 저항 의지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지기스문트는 한때 보스니아 국왕으로 즉위하려 했지만, 그를 돕던 흐르보예가 반대하자 포기했다. 1410년 또는 1411년 겨울, 오스토야는 다코보로 찾아가서 지기스문트와 접견한 뒤 그를 자신의 주권자로 인정했으며, 헝가리 점령하에 있던 우소라와 솔라를 헝가리의 영역으로 인정했다. 지기스문트는 그 대가로 그를 보스니아 국왕으로 인정했다.
1414년 5월, 오스만 제국은 자기들에게 망명한 트브르트코 2세를 보스니아 국왕으로 복위하기 위해 보스니아 침공을 단행해 여러 마을과 도시를 약탈했다. 하지만 보스니아 대다수 귀족들이 오스토야를 계속 지지하자, 오스만군은 점령지에 트브르트코 2세를 남겨두고 돌아갔다. 1415년, 지기스문트는 동료 보스니아 귀족인 산달지 흐라니치를 무단으로 공격한 흐르보예에게 화가 나 그와 갈등을 벌인 끝에 흐르보야. 브라치, 흐바르, 코르출라를 몰수했다. 이에 흐르보예는 오스만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오스만 제국군이 출격해 라슈바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군은 더 이상 공세를 벌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트브르트코 2세를 무시하고 오스토야를 왕으로 인정한 뒤 돌아갔다.
1415년 8월, 오스토야는 지난날 오스만군이 쳐들어왔을 때 오스만군에 굴복하여 트브르트코 2세를 받들었던 처남 파블레 라디노비치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스토야는 파블레를 장남 페타르와 함께 크랄예바 수체스카 인근의 보스니아 의회에 초대했다. 그들이 그곳으로 향했을 때, 오스토야와 산달지 및 측근들이 두 사람을 습격해 아버지를 죽이고 아들을 사로잡았다. 그 직후, 오스토야는 파블레의 여동생이자 자기 아내였던 쿠야바와 이혼했다.
1416년, 흐르보예가 사망했다. 그러자 오스토야는 즉시 흐르보예의 미망인 옐레나 네립치치와 재혼해 상당한 영토를 지참금 형식으로 받아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술탄 메흐메트 1세는 그가 이대로 강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메흐메트 1세는 오스토야를 반대하는 회의를 소집한 뒤, 산달지, 라디슬라프 파블로비치[1] 및 오스토야의 유일한 적출자인 스테판 오스토이치를 불러들었다. 오스토야는 이 회의에서 파블레 라디노비치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메흐메트 1세는 코사차와 라디노비치 가문이 이 문제를 계기로 서로 갈등을 벌이도록 유도해 보스니아의 단결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오스토야는 이렇듯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1418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스테판 오스토야 사후 보스니아 의회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스테판 오스토이치는 즉시 어머니 쿠야바 라디노비치의 명예를 회복했고, 1419년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계모 옐레나를 투옥했다. 오스토이치는 라구사 공화국에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알리며 공물을 납부하라고 요구했다. 라구사인들은 이에 대해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와서 곤란하다며 공물 납부를 지연했다. 이에 흐르보예의 전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Protovestiarios: 재무 장관)인 미호 카보가는 그에게 라구사인들의 도시인 스톤을 공략하라고 촉구했다.
오스토이치는 이에 혹해 라구사 공화국에 라구사에 있는 흐르보예 가문의 재산과 슬라노를 둘러싼 해안, 그리고 모든 "왕실의 재물"을 청구했다. 만약 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를 명분으로 삼아 스톤을 공략하려 했다. 하지만 1419년 3월 즈베카 회의에서 어머니 쿠야바와 귀족들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라구사인들과 뎌 이상 갈등을 벌이지 않기로 하고, 전임자들이 라구사에 부여한 특권을 확인했다. 또한 같은 해에 가신인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가 코나블리와 소콜 요새를 라구사에 매각하는 걸 확인했다.
1419년 9월, 오스토이치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동맹을 갱신하기로 했다. 이후 제타 공작 발샤 3세가 알바니아를 침공했을 때 알바니아인들이 구원을 요청하자, 알바니아에 이권이 있는 베네치아의 호의를 사기 위해 발샤 3세와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이로 인해 발샤 3세의 계부이자 후견인을 맡았던 산달리가 반감을 품었다. 1420년 이샤크 베이가 이끄는 오스마군이 스테판 오스토이치와 그의 모계 친척 및 지지자, 파블로비치 귀족 가문의 영토를 표적으로 삼아 습격 작전을 벌이자, 산달리는 오스토이치에게 등을 돌리고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는 그의 사촌인 트브르트코 2세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다른 귀족들도 대거 가담했고, 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1420년 8월에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이리하여 11년 만에 복위한 트브르트코 2세는 1421년 8월 또는 9월에 보스니아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라구사 공화국이 코나블레 영지를 가지는 걸 승인하는 대가로 그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렇게 복위한 트브르트코 2세는 비소코에 궁정을 차리고 내치를 다졌다. 그의 두번째 치세 동안, 보스니아 광산 발굴은 최고조에 달했다. 라구사 상인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으며, 베네치아 공화국과 무역 협정을 맺어 경제를 더욱 활성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기들 라이벌인 베네치아와 손잡은 것에 분노한 라구사인들은 1424년 트브르트코 1세의 사생아 또는 부크 코트로마니치의 아들로 알려진 부크 바니치가 쿠야바 라디노비치 왕비[2]의 지원을 받아 반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뒤 도망쳤을 때 자기들에게 망명하도록 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라구사 정부에 부크를 인도하거나 추방하라고 권고했지만 모두 거부되었다. 세르비아 공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라구사 공화국의 도움을 받으며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 트브르트코 2세는 세르비아가 점거한 보스니아 영토인 스레브레니차 탈환을 시도했지만 격퇴되었다. 이에 악감정을 품은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오스만군을 격퇴한 뒤 보스니아로 약탈대를 파견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도록 했다.
1425년, 트브르트코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헝가리와의 관계를 개선하기로 했다. 그 결과 같은 해 또는 이듬해에 헝가리와 조약을 맺었다. 오스만 제국은 적국인 헝가리와 손잡은 것을 응징하기 위해 보스니아를 전격 침공했고, 트브르트코 2세는 급히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오스만군이 만족해 하며 철수하자, 그는 어떻게든 헝가리와 군사 동맹을 맺으려 했다. 지기스문트는 그에게 자기 장인인 첼레 백작 헤르만 2세를 자녀가 없는 그의 추정 상속인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트브르토크 2세는 1427년 가을에 헤르만을 추정 상속인으로 인정했다. 여기에 더해, 헝가리 귀족의 딸인 도로테아 고르얀스카와 결혼했다. 산달리와 즐라토노소비치 가문은 1428년에 열린 결혼 축제에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산달리와 화해했지만, 즐라토노소비치 가문의 영지를 몰수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1432년, 스테판 오스토야의 사생아인 라디보이 오스토이치가 트브르트코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를 자처한 주라지 브란코비치, 트브르트코 2세의 친 헝가리 정책에 반감을 품던 산달리,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라디보이를 지원해 보스니아 대부분을 장악하도록 도왔다. 트브르트코 2세는 유라이 보이살리치의 지원을 받으며 보스니아 중부와 북서부 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달리는 곧 중병에 걸려 대외 활동을 중단했고,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트브르트코 2세가 즐라토노소비치 가문으로부터 몰수한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은 것에 만족해 라디보이를 더이상 지원하지 않았다. 다만 오스만 제국은 라디보이를 계속 지원했고, 1434년에 그의 이름을 내세우며 보보바츠를 공략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헝가리 왕국에 구원을 간절히 청했지만, 헝가리군은 1434년 중반이 되어서야 보스니아로 진군했다. 그들은 야이체, 호디제드, 보차츠, 코모틴 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철수했고, 탈환했던 영역은 도로 라디보이에게 넘어갔다. 트브르트코 2세는 헝가리군과 함께 부더로 이동해 그곳에 머물렀다. 이리하여 라디보이가 사실상 보스니아 왕이 되었지만, 어떤 기독교 국가도 그를 합법적인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1435년 오스만 제국이 라디보이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자, 라디보이는 트르브트코 2세 추종자들의 반격을 받고 자클루미아에 있는 코사차 궁정으로 피신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헝가리군의 도움을 받아 보스니아로 복귀했다. 라디보이 오스토이치는 코사차 궁정에서 계속 보스니아 왕이라고 칭했지만,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했다.
1443년 11월, 보스니아를 조용히 통치하던 트브르트코 2세가 사망했다. 그는 차기 국왕으로 라디보이의 남동생으로 지금까지 별다른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던 스테판 토마시를 지명했다. 이는 자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라디보이에게 악감정을 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보스니아 귀족 대다수는 선왕의 지명을 받들어 스테판 토마시를 왕으로 선출했지만,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오스만 지지 세력은 라디보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라디보이는 라구사 공화국에 사절을 재차 보내 자기를 지지하고 토마시를 받들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
한편, 트브르트코 2세 치세 때 추정 상속인으로 지명되었지만 1435년에 사망한 첼레 백작 헤르만 2세의 손자 울리히 2세는 보스니아 왕위가 자기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토마시의 반대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으려 했다. 이에 토마시는 로마 왕 프리드리히 3세와 라구사 및 베네치아 공화국을 포함한 외국 통치자들에게 자신을 보스니아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때마침 울리히가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를 헝가리 왕으로 세우기 위해 브와디스와프 3세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느라 바빴기에, 그는 형 라디보이만 신경쓰면 되었다.
1444년 1월, 토마시는 코사차 가문이 통치하는 자클루미야 지역으로 진군했다. 코사차 가문에 불만을 품은 가신인 라디보예비치 가문이 즉시 합류했고,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의 조카인 이바니스 파블로비치도 그에게 가담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을 치르는 터라 보스니아에 별 신경을 쓰지 못했고, 이 때문에 지원을 받지 못한 코사차는 3월에 그와 휴전을 맺기로 했다. 토마시는 헝가리가 자신에게 공격을 가할 것을 대비해 베네치아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했고, 그 대가로 베네치아에 마을 및 광산 일부를 25년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해 6월, 라디슬라우스 지지 세력을 꺾고 헝가리 국왕에 등극한 브와디스와프 3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중재에 따라 토마시를 보스니아 국왕으로 인정했다. 이에 토마시는 후녀디 야노시에게 자유로운 통행권, 거주권, 연간 소득 및 모든 문제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1444년 7월, 브와디스와프 3세는 토마시에게 자신이 오스만 제국과 맺었던 휴전을 깨고 전쟁을 재개할 테니 도와달라고 청했다. 토마시는 이걸 기회로 삼아 영토를 확장하기로 했다. 이보다 앞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은 보스니아로부터 은광 마을인 스레브레니차를 탈취했고, 이 은광은 다시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다. 그는 군대를 동원해 스레브레니차를 급습해 탈환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 및 십자군과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는 코사차 가문과의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급파한 튀르크 기병대와 합세한 코사차 가문이 반격을 개시했고, 8월에 토마시를 코조그라드에서 보보바츠로 밀어냈다. 그해 8월, 오스만군은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로 복위했다. 주라지는 코사차와 동맹을 맺고 토마시에 적대했다.
1444년 11월, 바르나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전사하고 십자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오스만 제국이 자신에게 보복하려 들 것을 우려한 토마시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25년간 마을 및 광산 일부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할 테니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베네치아는 이를 거부하고 코사차 가문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445년 4월, 토마시는 스레브레니차와 드리나 계곡 전체를 주라지에게 빼앗겼다. 그는 이바니시 파블로비치와 함께 동맹을 맺고 포모리예로 진군해 드리예바를 탈환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침공이 가시화되자 이대로 전쟁을 이어가면 파멸 뿐임을 직감했다. 이에 코사차 가문과 평화 협상을 벌이는 한편, 그들이 왕으로 내세우던 형 라디보이와도 화해했다.
그는 평민인 보자차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코사차 가문의 여식인 카타리나 코사차와 결혼해 완전한 화해를 이룩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먼저 사생아라는 꼬리표를 자를 필요가 있었다. 1445년 5월 29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스테판 토마시와 라디보이 오스토야를 보스니아 전임 국왕 스테판 오스토야의 합법적인 아들로 인정했다. 이때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약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1446년, 토마시는 레시나 주교 토마소 토마시니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해 5월 중순 밀로드라지에서 열린 행사에서 토마시와 카타리나 코사차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며, 뒤이어 마일에서 부부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많은 보스니아 귀족들이 왕의 모범을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일부는 곧 보고밀파로 돌아갔다. 이후 그의 치세 동안 보스니아 전역에 교회와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세워졌다. 다만 그는 보고밀파가 보스니아에 아직 많다는 걸 인지해, 전임자들처럼 보고밀파 신자와 성직자들을 계속 존중했다.
1446년 가을, 토마시는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한 뒤 주라지와 협의해 두 사람이 마을과 광산 수입을 나눠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주라지는 내심 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에 보스니아를 공격해달라고 청했다. 1448년 3월, 오스만군이 토마시와 장인의 영지를 모두 침입해 약탈을 자행했다. 코사차 가문은 오스만 제국의 압력을 받고 주라지 편을 들기로 했다. 그해 9월 중순, 주라지의 처남 토마스 칸타쿠제노스는 토마시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하고 스레브레니차를 공략했다. 1449년 2월, 토마시는 다시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했다. 이후 1451년까지 적대 행위가 이어졌고, 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활발한 상업 활동을 벌였고 달마티아 상인들과 거래했으며, 소금 무역을 독점하고 광산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수입을 늘리고자 애썼다. 그러다가 1451년 토마시와 코사차 가문이 화해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1451년, 코사차 가문이 라구사 공화국과 전쟁을 벌여 침체된 영지 경제를 개선하려 했다. 토마시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기를 거부했지만, 라구사 공화국으로부터 코사차로부터 드리예바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호디제드를 탈환하는 걸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받자 이에 혹해 12월 중순 라구사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코사차 가문에 라구사를 공격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전쟁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1452년 3월,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와 아들 블라디슬라프 헤르체고비치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블라디슬라프가 아버지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한 뒤 자기와 함께 스테판 코사차의 다른 영지를 공략하는 데 협력해 달라고 청하자, 토마시는 이에 응해 그해 4월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고, 라구사군과 합세했다. 하지만 그는 내전에 직접 개입하기를 꺼렸고, 곧 북쪽으로 돌아가 오스만군의 침공을 막았다. 한편, 스테판 코사차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베네치아는 블라디슬라프로부터 드리예바를 빼앗고, 블라디슬라프에 대한 민중 봉기를 유도했다. 토마시는 나중에 돌아온 뒤 드리예바에서 베네치아군을 내쫓았다. 그러나 블라디슬라프가 토마시가 자신의 영지라고 주장한 드리예바와 블라가이를 내주기를 거부하자, 토마시는 이에 불쾌감을 느끼고 라구사군과 함께 철수했다.
1453년, 헝가리 국왕 대신해 크로아티아를 반(Ban)으로서 통치하던 페타르 탈로바츠가 사망했다. 이에 토마시와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 모두 페타르 탈로바츠의 과부인 헤드비히 가라이에게 결혼 동맹을 제안해 탈로바츠의 영지를 장악하려 했다.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는 자기와 재혼하자고 제안했고, 토마시는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결혼하라고 제안했다. 이로 인해 토마시와 스테판 코사차는 서로 갈등을 벌여 전쟁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스만 제국이 곧 보스니아로 쳐들어올 것임을 직감하고 화해했다. 이후 헝가리 국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첼레 백작 울리히 2세를 크로아티아의 새 반으로 세우고 크로아티아 도시들의 지배권을 강화하게 하면서, 탈로바츠 가문의 영지를 확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456년, 토마시는 교황 갈리스토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의 신부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후,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보스니아 국왕과 코사차, 파블로비치 가문에 이례적인 요구를 했다. 그는 토마시에게 10,000짐의 식량을 보내라고 요구했고, 코사차에게는 8,000짐, 페타르 파블로비치에게는 4,000짐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군대를 보내주고 오스만 측에서 전쟁에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보스니아 중부의 2곳과 헝가리와 베네치아가 지배하는 달마티아 영토에 접한 2 곳 등 총 4개 도시를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토마시는 이를 거부하면서, 메흐메트 2세가 보스니아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여기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기독교 연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1456년 7월 베오그라드 공방전에서 오스만군이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에 궤멸되었지만, 그 직후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지휘관 후녀디 야노시를 비롯한 헝가리 지휘관들이 병사했다. 여기에 첼레 백작 울리히 2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장남 후녀디 라슬로에게 피살되었고, 후녀디 라슬로는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는 1457년 후녀디 가문이 일으킨 반란군을 피해 오스트리아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했다. 이렇듯 헝가리 수뇌부가 잇따라 죽으면서 헝가리 왕국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전락하자, 토마시는 자기가 기독교 연합을 이끌기로 마음먹었다. 1456년 8월, 라구사에 사절을 보내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려 하니 도와달라고 청했다. 뒤이어 교황청에도 사절을 보내 자신이 십자군 지도자로 나서려 하니 협조해달라고 청했다.
교황 갈리스토 3세는 토마시의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보스니아 국왕에게 십자군 십자가 , 교황의 깃발 , 십자군 기금을 건네고 1457년 7월 연합의 지도자임을 표시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힘으로는 오스만 제국을 도모할 가망이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5세, 베네치아의 도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에게 사절을 보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청했지만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했다. 이후 카르바할 추기경이 보스니아로 파견되어 상황을 살펴본 뒤, 토마시 왕이 군대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걸 파악했다. 갈리스토 3세는 이에 환멸을 느끼고, 기독교 연합의 지도권을 알바니아에서 메흐메트 2세를 상대로 맹렬하게 저항하던 스컨데르베우에게 넘기기로 했다.
1458년 1월,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라자르 브란코비치가 사망한 뒤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이 혼란에 빠지자, 토마시는 지난날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이 탈취했던 드리나 강 계곡을 탈환했다. 그는 총 11개 마을로 구성된 이 지역에서 스레브레니차, 즈보르니크, 테오차크를 자기 영지로 삼고, 나머지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영주들에게 나눠줬다. 이후 그는 크로아티아로 시선을 돌렸다. 울리히 2세가 피살된 뒤 헝가리 왕국은 크로아티아의 새로운 반을 임명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사절을 보내 새로운 헝가리 국왕이 된 마차시 1세는 크로아티아를 점령한 뒤 보스니아나 베네치아 어느 쪽에도 좋은 이웃이 되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크로아티아를 나눠 가지고 반 칭호를 사이 좋게 쓰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비현실적인 제안이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토마시는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라자르 브란코비치의 미망인이자 동로마 제국 공주인 헬레나 팔레올로기나의 딸 옐레나를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동로마 제국의 혈통을 지닌 며느리를 확보하고, 스메데레보 요새와 그 주변으로 축소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을 보스니아에 편입하려 했다. 그 해 10월, 명목상 주권자인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계획을 알렸고, 12월 초 토마시 본인이 세게드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마차시 1세와 논의했다. 마차시 1세는 이에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토마시에게 가능한 한 빨리 아들을 보내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그가 보스니아를 오래 비운 사이, 오스만군이 보스니아로 쳐들어와서 보보바치와 브란두크를 포위했다. 토마시는 1459년 1월 중순 보스니아로 돌아와 오스만군을 격퇴한 뒤 호디제드로 진군해 오스만군을 몰아내려 했으나 공략에 실패하고 물러났다.
한편,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옐레나의 결혼은 성사되었고, 토마셰비치는 스메데레보 성에 입성한 뒤 3월 21일 스테판 브란코비치를 밀어내고 새로운 세르비아 데스포티스에 선임되었다. 이제 그의 계획이 성립되는 듯했지만, 메흐메트 2세가 대군을 이끌고 스메데레보 성벽 앞으로 진군하면서 상황이 급박해졌다. 스메데레보 성에 있던 형 라디보이 오스토이치와 토마셰비치는 겁에 질려 1459년 6월 20일 보스니아로 안전하게 돌아가게 해주는 조건으로 스메데레보 요새와 마을을 오스만군에 넘기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마차시 1세는 격노했고, 전 유럽에 토마시가 가장 중요한 요새를 적에게 팔았다고 주장했다. 토마시는 교황 비오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형과 아들이 스메데레보를 지킬 가망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항복했을 뿐이며, 자신은 이에 대해 몰랐다고 주장했다. 또한 7월에 만토바 공의회에 사절단을 보내 오스만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며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밀라노 공작부인인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가 안코나를 통해 병사 300명을 보스니아에 파견했지만, 다른 유럽 군주들은 그를 외면했다.
교황 비오 2세는 유럽 군주들이 그를 도우러 오지 않는 이유는 보고밀파가 여전히 보스니아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라며, 백성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데 힘을 기울이라고 촉구했다. 이에 토마시는 1459년 보고밀파 성직자들에게 개종하거나 자신의 영토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고, 보스니아를 떠난 보고밀파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2년간 12,000명이 강제로 개종했고, 성직자 40명은 보고밀파를 신봉하는 코사차 가문의 영지로 도주했다. 1461년, 토마시는 이단 혐의로 기소된 세 사람을 로마에 있는 후안 데 토르케마다 추기경에게 보내 심문받게 했다.
1460년 초, 오스만 제국군이 보스니아 북동부의 우소라, 스레브레니차, 즈보르니크, 테오차크를 공략했다. 이제 오스만군은 사바 강을 건너 슬라보니아와 시르미아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에 토마시는 해외에 원조를 요청하는 한편, 망명을 준비했다. 그러던 1461년 6월 중병에 걸려 라구사에 사절을 보내 의사를 요청했지만, 그해 7월 10일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고, 사후 보보바츠의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 세간에는 형제 라디보이와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현대 학계는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한다.
스테판 토마시 사후 보스니아 왕위에 오른 스테판 토마셰비치는 삼촌 라디보이 오스토이치가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그해 9월 18일에 헌장을 발행해, 라디보이의 모든 요새와 왕국 내의 다른 소유지를 "왕관에 대한 충실하고 진정한 봉사"로 인정했다. 그는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왕실 내의 모든 불화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우선 계모 카타리나의 직위와 특권을 보장했으며, 아버지와 줄곧 갈등을 벌였던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와 완전히 화해했다. 이후 경제를 개선하고 금속 가공 무역에 더 많은 이익을 챙기도록 힘을 기울였다.
한편, 토마셰비치는 교황 비오 2세에게 주교, 십자군, 대관식을 위한 왕관을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비오 2세는 모드루시의 주교 니콜라스를 파견했고, 니콜라스는 '보스니아의 수호자'로 선포된 성 그레고리 타우마투르구스의 축일인 11월 17일에 야이체의 성 마리아 교회에서 대관식을 주관하고 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이것은 보스니아에서 거행된 마지막 대관식이었다. 그러나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는 "보스니아는 헝가리 왕국의 봉신인데 어찌 왕관을 전달했는가?"라며 반발했다. 비오 2세와 에스테르곰 대주교 비테츠 야노시는 보스니아와 헝가리 국왕 간의 분쟁을 중재했지만,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62년 봄, 로마 왕 프리드리히 3세와 분쟁을 벌이던 마차시 1세는 그가 왕관을 받은 걸 용인하기로 했다. 토마셰비치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특정 도시를 양도하고 경의를 표하며,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걸 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무렵,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보스니아를 완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토마셰비치는 교황에게 조속히 십자군을 보내달라고 촉구했고, 라구사 공화국과 알바니아의 스컨데르베우의 지원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내 보고밀파 신자들은 토마시 말기부터 이어진 가톨릭으로의 강제 개종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오스만 제국이 보스니아를 석권해 자기들을 해방해주기를 희망했다. 여기에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와 그의 아들 블라디슬라프 헤르체고비치가 또다시 갈등을 벌였고, 블라디슬라프는 메흐메트 2세에게 아버지를 꺾기 위해 지원을 요청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흘러갔지만, 헝가리와 교황청, 라구사, 베네치아, 그리고 스컨데르베우가 자신을 도와줄 거라 믿은 토마셰비치는 1462년 6월 오슴만 제국에 바치던 조공을 거부하고 사바 강과 보스나 강의 합류 지점에 오스만 제국이 건설한 마을을 습격해 파괴했다. 메흐메트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해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보스니아를 멸망시키기로 했다. 이에 토마셰비치는 사방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어디에서도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다. 1463년 봄, 메흐메트 2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대규모 병력을 집결했다.[3]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긴 토마셰비치는 사절을 보내 철저히 복종할 테니 15년간 휴전 협약을 맺자고 청원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이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계속 진군해 보스니아를 삽시간에 휩쓸었다. 보스니아의 수도 보보비츠가 위협당하자, 토마셰비치는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야이체로 도주했다.
토마셰비치는 보보비츠 요새가 적어도 몇 달은 버티리라 여기고, 야이체에 보스니아군을 집결하고 해외에 원조를 청했다. 그러면서 아내 옐레나와 재산을 달마티아로 보냈으며, 계모 카타리나를 라구사로 보냈다. 그러나 보보비츠는 며칠 만에 함락되었고, 토마셰비치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피난길에 올랐지만 야이체 인근 클류치에서 따라잡혔다. 추격대 지휘관 마흐무드 파샤 안젤로비치는 클류치 요새에 그를 가둬놓고 4일간 포위했다. 그는 식량과 탄약이 부족해지자 절망에 빠졌고, 항복하면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안젤로비치의 말을 믿어보기로 하고 항복했다. 이후 70개가 넘은 마을에 직접 서신을 보내 항복을 종용했고, 그 덕분에 오스만 제국군은 보스니아를 별로 어렵지 않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그를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5월 25일 메흐메트 2세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토마셰비치는 안젤로비치가 자신의 안위를 보장하겠다고 서약한 문서를 가져와서 파디샤에게 바쳤다. 그러나 페르티아 태생의 무슬림 물라[4] 알리 알 비스타미는 파디샤는 자신의 하인이 한 약속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선언하는 파트와를 발표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바스타미가 자기가 발표한 파트와의 타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검을 뽑아 메흐메트 2세 앞에서 토마셰비치를 죽였다고 한다. 연대기 작가 베네데토 데이에 따르면, 메흐메트 2세가 직접 토마셰비치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후대 기록에 따르면, 메흐메트 2세는 토마셰비치의 가죽을 벗기거나 사격 표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삼촌 라디보이 오스토이치와 조카 트브르트코도 처형되었고, 계모 카타리나의 아들 지그문트와 카타리나는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이스탄불로 끌려갔다. 이리하여 보스니아 왕국은 멸망했고, 보스니아 전역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3. 보스니아 교회
보스니아 왕국에는 정교회 및 가톨릭의 교세도 있었으나, 보고밀파를 믿는 자체적인 "보스니아 교회"가 운영되었다. 과거 보스니아 공국 시절에는 헝가리에서 이단 보고밀파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종종 십자군을 파견하기도 했으나, 보스니아 왕국이 독립하면서 보스니아 교회 역시 국가 권력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보스니아 교회는 중세 교회 슬라브어로 예배를 보았으며, 사제들의 평균 교육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보고밀파는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를 거쳐 보스니아에 전파되었는데 이로 인해서인지 보고밀파는 무슬림들처럼 하루에 다섯 번 예배를 보는 율법이 있었다 한다. 보스니아 왕국의 멸망 이후 보스니아 교회를 믿는 사람들이 근세에 이슬람으로 대거 개종하면서, 오늘날 무슬림 보슈냐크인의 기원이 된다.4. 의의
본래 보스니아의 영역이었던 크로아티아의 왕위를 차지한 헝가리 국왕들은 보스니아를 '자기 땅'으로 인식했으며, 보스니아 국왕들 역시 보스니아를 지배하는 일개 영주에 불과하다고 격하해서 보았으나, 국제적으로 보았을 때 보스니아가 독립국이었음은 의심할 여지 없다. 실제로 헝가리를 제외하고 보스니아와 무역한 나라들은 보스니아를 독립 왕국으로 보았으며, 이는 보스니아 왕국이 최초의 보스니아인 독립국가로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현대 보스니아 역사에서 보스니아 왕국은 민족적 자부심이자 상징으로서 여전히 남아있다.세르보크로아트인들은 같은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함에도 종교를 이유로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 및 정교회를 믿지만 역사 및 생활 환경이 달랐던 몬테네그로인으로 갈라졌다. 이에 근대 보스니아 민족주의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던 이반 프라뇨 유키치는 보스니아 지역 사람들이 이슬람과 가톨릭, 정교회의 차이를 떠나서 보스니아 왕국의 후계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단결하자는 보스니아인 개념을 주창하였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이후 민족주의 열풍에 묻혀버렸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붕괴 이후 갈등을 좁히지 못하고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했다. 오늘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보스니아인 민족주의를 재발견하여 보스니아 내 민족과 종교 사이의 단합을 추구하고 있다.
5. 역대 군주
보스니아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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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브르트코 1세 | 스테판 다비샤 | 옐레나 그루바 | 스테판 오스토야 | 트브르트코 2세 | |
<rowcolor=#6D7585> 복위 | 제6대 | 복위 | 반왕 | 제7대 | |
스테판 오스토야 | 스테판 오스토이치 | 트브르트코 2세 | 라디보이 오스토이치 | 스테판 토마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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