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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케슈페헤르바르 Székesfehérvá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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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26f4c> 국가 | 헝가리 | |||
지역/주 Regio/megye |
중부 트란스다뉴비아 페예르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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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170.89㎢ | |||
인구 |
2014년 97,617명 (헝가리 9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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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밀도 | 571.23명/㎢ | |||
시간대 | UTC+1 ( 서머타임 준수) | |||
홈페이지 | 시 홈페이지 | |||
시청광장 | 성 이슈트반 대성당 |
보리성 | 유적지 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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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관식의 백색 성읍
Koronázóváros, Fehérvár
Koronázóváros, Fehérvár
세케슈페헤르바르는 페예르 주의 주도이자 중부 트란스다뉴비아 지역의 중심도시이다. 부다페스트로부터 남서쪽 64km 정도 떨어져있다.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와 부다페스트의 중간 경로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헝가리 대공국 시절 수도이기도 했고 오스만에 점령당하기 이전에는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 장소이기도 했다. '백색 성읍'이라는 뜻의 Fehervar라고도 널리 알려져있다. 중세에는 외국어로도 그냥 '백색 성읍'이라 곧잘 불리곤 했다.
공교롭게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역시 백색 도시라는 뜻이다. 베오그라드도 전근대에는 독어로는 바이센부르크, 베네치아어로는 카스텔루비안코, 헝가리어로는 난도르페헤르바르 같이 각국 언어로 백색 도시라 번역차용 되어 불리곤 했다.
2. 역사
고대 로마 제국 시기에는 판노니아 속주의 헤르쿨리아(Herculia)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 시대 이후 판노니아는 아바르 칸국에서 모라바 제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민족의 지배를 거쳤고, 9세기 경에는 마자르족이 모라바 제국을 멸망시키고 판노니아에 정착하였다. 머저르인의 도래 이전의 세케슈페헤르바르의 당시 지명이나 자세한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다.중세 시대에 세케슈페헤르바르에는 10여개의 교역로가 지났다. 교역로는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등을 이어주었고 예루살렘까지 가는 성지순례가 지나는 길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때문에 십자군 전쟁 중에는 민중 십자군이 헝가리를 통과 와중에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깽판을 부리다가 헝가리군에 개발살 나기도 했다.
아르파드 왕조의 창건 군주인 아르파드 대공의 손주인 턱쇼니와 그의 아들인 게저 대공의 통치기에 세케슈페헤르바르는 헝가리 대공국의 수도 역할을 맡게 되어 문화와 왕실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게저 대공은 헝가리에서 가톨릭을 공인하였고 972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헝가리 최초의 석조 교회와 궁전을 건설하였다. 세케슈페헤르바르라는 지명은 상술하였듯 백색 성읍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중세시기에 지어진 성벽이 백색을 띄고 있어서 이러한 지명이 붙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세시대 세케슈페헤르바는 다뉴브강의 습지대 사이에 솟아있는 언덕에 건설되었는데 이로 인해 방어에 이점을 가지고 있었고 주요 교역로와 교통의 요지로써 전략적, 상업적인 중요성을 가진 도시이기도 했다.
게저 대공의 아들인 이슈트반 1세가 국왕으로 인정받으면서 헝가리는 왕국이 되었다. 이슈트반 1세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대성당을 건설하였다.[4] 헝가리 왕국이 창설 된 이후 수도로서의 기능은 에스테르곰이나 부더로 이전되었다. 하지만 옛 수도로써의 전통성을 인정받아 헝가리의 국왕은 전통적으로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에스테르곰 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중세 프랑스 왕국의 대관식 장소였던 랭스와 같은 포지션. 대관식을 올리는 상징적인 장소 외에도 오스만 제국의 침략 이전까지 헝가리 의회가 이곳에 소재했다. 이슈트반 1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왕위를 가져가는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은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 장소였다. 36명의 국왕과[5] 39명의 왕비가 이곳에서 대관식을 올렸고 이중 초대 국왕인 이슈트반 1세를 비롯하여 14명의 국왕[6]이 안장되었다. 이곳에 최후로 즉위식을 올리고 사후에 안장된 국왕은 서포여이 야노시[7]였다.
하지만 모하치 전투 이후 16년이 지난 1542년, 부더가 함락되었고 다음해인 1543년에는 세케슈페헤르바르가 오스만 제국의 수중에 떨어졌다.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과 옛 성벽은 이시기를 전후에 완전히 파괴되어 오늘날엔 그 터만이 남아있다.
세케슈페헤르바르가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어 오스만 헝가리에 속하게 되고 헝가리의 왕위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어가면서 세케슈페헤르바르는 이전에 가졌던 대관식 장소이자, 왕릉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2세부터 대관식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중에 남아있던 왕령 헝가리의 중심지인 포조니의 성 마르틴 교회에서 거행되었고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카푸친 교회[8]에 안장되었다.
1682년 상 헝가리의 귀족 퇴쾨이 임레의 봉기와 그로 인해 벌어진 제2차 빈 공방전, 대튀르크 전쟁 끝에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수복하였고, 세케슈페헤르바르는 재건되었다. 하지만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는 못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그저 그런 농업 도시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인해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지위가 뒤바뀌게 되었다. 트리아농 조약의 결과 헝가리는 산업 중심지인 도시지역을 대량으로 상실하였다.[9] 이에 따라 전간기 동안 헝가리 수중에 남은 얼마 안되는 도시 중 하나였던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산업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3월 경에는 헝가리를 가로질러 공격해온 소련군과 독일 국방군간의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10] 디트리히가 지휘하는 독일 6기갑군이 소련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이 간극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는 아르덴 공세도 실패한 이후에 벌어진 독일군 최후의 발악이었으니 당연히 성공할 리가 없었고(..) 곧 톨부힌 원수의 역습을 받아 독일군의 반격은 실패로 끝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는 공산화되었다. 공상정권 이래 세케슈페헤르바르는 본격적인 산업화에 진입하여 여러 제조업 업체들이 들어섰다. 이에 힘입어 도시 인구는 전쟁 직후의 3만5천명에서 1970년대에는 10만명으로 세배 가까이 늘었다.
동구권 붕괴와 함께 헝가리가 민주화되면서 이전의 국영기업들은 쇠퇴했다. 하지만 부다페스트에서 가깝고 교통의 중심지인 세케슈페헤르바르에는 여러 외국 기업과 자본의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 도시의 주력산업은 자동차 및 관련 제조업으로 자본주의에 잘 적응한 도시로 평가받고 있다.
3. 교통
헝가리 서남부의 교통의 요지이다. 부다페스트를 기점으로 출발하는 M7 고속도로가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지나 크로아티아 국경까지 이어져있다. 이는 크로아티아 국내 도로망으로 다시 자그레브까지 연결된다.부다페스트와는 자가용으로 약 50분 거리에 위치해있다.
4. 관광
중부유럽 최대 호수인 벌러톤 호수가 차량으로 40분 정도 떨어져있다. 부다페스트에서 벌러톤 호수를 보기 위해 중간에 들르는 경우가 꽤 있다.유적지 전경 | 대성당의 복원도 |
정식 명칭은 축복받은 동정녀 성모 마리아 승천 대성당(Nagyboldogasszony-bazilika)
헝가리 왕국이 성립된 이후 이슈트반 1세에 의해 11세기 초반에 건설 되었다. 이후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 장소이자 안장지로서 사용되었다.
1543년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기까지 15명의 헝가리 왕이 이곳에 안장되었다. 1601년에 성당 건물이 화재로 소실돼 그 터만이 남아있다. 대타협 무렵인 1862년 이후부터 헝가리에서는 꾸준히 유적지를 발굴, 관리해오고 있다. 1967년에는 벨러 3세의 유해가 발굴 되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오늘날에는 성당 터를 정비하고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국왕들의 합동묘소를 조성하여 국가사적지로 관리해오고 있다. 유적지 정원(Középkori Romkert)이라고도 불린다.
* 성 이슈트반 대성당(Szent István-bazilika) 세케슈페헤르바르 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본디 고딕 양식의 성당이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인 1768년에 증-개축을 거치면서 바로크 양식이 절충되었고 헝가리 국왕 성 이슈트반 1세에 봉헌되었다. 1777년에는 세케슈페헤르바르 교구가 신설되면서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첨탑 사이에는 테라스가 있고 난간에는 이슈트반 1세와 성 라디슬라우스, 성 에메릭[11]의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성당 내부는 성 이슈트반의 삶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제단은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옆에는 성안나 예배당(Charpel)이 존재한다. 이는 중세시대에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지어진 30여개의 교회와 예배당 중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 보리성(Bory Castle)
건축가, 조각가이자 화가였던 보리 예뇌[12]가 1923년 세케슈페헤르바르의 근교에 건설했다. 보리의 거주지이자 작업실이기도 했다. 애처가이기도 했던 보리는 성안 안팎의 곳곳을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과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오늘날에는시민들의 휴식공간이자 특히 신혼 커플들의 웨딩촬영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 아르파드 온천 스파
1905년에 개장하였다. 외부는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이지만 내부는 꽤 현대적으로 잘 정비되어있다.
이밖에 세케슈페헤르바르 곳곳에는 헝가리 국가 지정 문화 유산이 존재하고 있다.[13] 이중 상당수가 주거건물들인데 18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지어진 후기바로크,신고전주의,네오바로크 등 여러 양식의 건물들이 잘 남아있는 편이다. 도시내에는 동상 등 전시물이나 소규모의 박물관들도 여럿 존재한다.
5. 경제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산업은 2차 대전 이후 공산정권 시절에 빠르게 발전했다. 이 시기에 지역 기업체로 버스 제조업체인 이카루스와 TV,라디오와 같은 전자제품 제조업체인 비데오톤[14] 등이 생겨났고, 알루미늄 생산 단지가 들어섰다.동구권 붕괴와 민주화 이후에는 제조업이 쇠퇴했다. 하지만 세케슈페헤르바르는 부다페스트에서 가까운 교통 중심지라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해외기업과 자본의 투자를 받아 비효율적인 국영 기업체를 대체할 수 있었다. 포드, 덴소, 알코아[15] 등이 도시에 들어서면서 도시의 산업은 자동차 및 관련 산업으로 바뀌어갔고 지역 기업인 비데오톤도 자동차 부품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이밖에 IBM 등도 입주하고 있다.
6. 생활문화
-
정치
2019년 지방선거 결과 지방의회 21개 의석 중 시장을 포함하여 피데스에서 14개 의석을, 야당연정에서 4개 의석을 차지했다. 이밖에 무소속이 2석, 지역정당이 1석을 구성하고 있다.
현직 총리가 이 지역 출신이라 피데스 지지세가 강한듯 하다 -
스포츠
프로농구팀인 얼버 페헤르바르가 인기가 많다. 축구도 인기가 많은 편으로 대표적인 지역연고 프로팀으로 MOL 비디 FC[16]가 있다.
7. 자매결연 도시
한국과는 아직까지 자매결연 도시가 없다.8. 출신 인물
- 오르반 빅토르: 정치인, 총리
- 도미니크 소보슬러이: 축구선수
9. 참고자료
시 홈페이지(영어)
[1]
알바 레기아
[2]
슈툴바이센부르크,
이중제국시절만 해도
오스트리아 제국 측에서는 이 명칭을 주로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그냥
음차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3]
이스톨니 벨그라드
[4]
이 대관식에서 이슈트반 1세가
성 이슈트반 왕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5]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올린 국왕이 36명에서 43명까지 다양한데 세케슈페헤르바르 시청에서는 36명이라 게재되어 있다.
[6]
이슈트반 1세의 아들인 임레 왕자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즉위하지 못하였고 대성당에 안장된 최초의 왕족이 되었다.
[7]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 패배하고 전사한 이후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왕국 동부
에르데이 귀족들이 주관한 의회에 의해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8]
다만
오스트리아 공작 시절에는
빈의
슈테판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9]
트리아농 조약으로 상실한 주요 도시들은
포조니(Pozsony),
커셔(Kassa),
콜로주바르(Kolozsvár),
테메슈바르(Temesvár),
서버드커(Szabadka) 등이 있다.
[10]
헝가리에는 소량이나마 석유가 산출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덴 공세의 실패로 독일군의 상황이 최악이었음에도
히틀러는 헝가리에서
소련에 대한 반격을 지시했다.
[11]
임레, 이슈트반 1세의 아들로 이슈트반 1세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12]
Bory Jenő(1879-1959)
[13]
2019년 현재 139개소
[14]
EU의 내에서 10대 전자제품제조업체로 꼽히는 헝가리 기업
관련기사
[15]
Alcoa, 미국 소재 세계 8위의 알루미늄 제조회사, 한국에도 차량용
알로이 휠로 잘 알려져 있다.
[16]
상술된 지역기업체인 비데오톤이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