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00:47:00

장무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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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장무환(張茂煥)
출생 1926년
강원도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현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 #
사망 2015년 9월 19일 (향년 89세)
경상북도 울진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1926~1945)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1948~2015)[1]

[[북한|]][[틀:국기|]][[틀:국기|]](1953~1998)
[2]
가족 남한 부인 박순남, 아들 장영욱
북한 부인, 슬하 자녀 5명
병역 대한민국 육군 3사단 상병 만기 면역
거주지 강원도 울진군 ( 1926년~ 1953년)[3]
평안북도 천마군 ( 1953년~ 1954년)[4]
함경북도 경원군 ( 1954년~ 1966년)[5]
함경북도 온성군 ( 1966년~ 1998년)[6]
경상북도 울진군 ( 1998년~ 2015년)
특징 국군포로
북한이탈주민

1. 개요2. 생애
2.1. 탈북 이전2.2. 에서 으로2.3. 이후
3. 방송 출연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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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국군포로, 북한이탈주민. 최종계급은 상병( 대한민국 육군 / 1952년~ 1998년)이다.

1926년 강원도 울진군 원남면(현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에서 출생하여 1948년에는 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했고 1950년에는 북한 인민의용군 강제 입대[7]했으며 1952년에는 대한민국 국군 징집 등을 거쳤고 1953년 7월 13일에는 금성 전투(= 금화지구 전투)에 임했다가 포로가 됐다. 이후 포로 교환을 기대했지만 북한 정권의 조작으로 귀순한 것처럼 포장되어 수십 년간 함경북도 온성군의 탄광에서 강제부역을 했으며 북한 정권의 강제 혼인 정책으로 재혼하여 슬하에 5명의 자녀를 두고 지내다가 1998년에는 두만강을 도강해 중국을 통해 탈북했다.

가족으로는 부인 박순남(朴順南), 장남 장영욱, 장영욱 슬하에 손주 2명, 북한의 부인 아무개[8]와 그 슬하의 자녀 5명 등이 있으며 손자도 있다고 한다.

2. 생애

2.1. 탈북 이전

1926년 강원도 울진군 원남면(현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에서 태어났다.

8.15 광복 후 1948년 당시 조카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국방경비대에 입대했지만 폐병으로 8개월 만에 의병 제대했다.[9]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기습 침공으로 인해 조선인민군이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울진군[10]까지 점령했고 결국 그는 반 강제로 조선인민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다부동 전투 영천·신녕전투 낙동강 전선 대한민국 국군이 수호하고 유엔군의 지원으로 인해 인천상륙작전이 시행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그도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탈영, 고향 울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11] 얼마 안 가 그는 부인 박순남과 결혼했고 아들 장영욱을 낳으면서 가난했지만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그런데 1952년 11월 대한민국 국군에서 다시 그를 징집하면서 후방이었던 부산광역시[12]에서 대한민국 국군으로 복무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1.4 후퇴와 가평전투가 발생하는 등 전쟁은 교착화되었고 그가 소속된 부대가 동부전선으로 출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그도 동부전선으로 가게 되었다.

정전 회담이 진행 중이던 그때 동부전선 금성 전투에 나선 일병 장무환은 1953년 7월 13일에 주변에 터진 수류탄에 기절하여 쓰러졌고 이후 중공군 포로로서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조인됐다. 그 일주일이 45년이 되어 버렸다.
군번 9287057
육군 일병 장무환
1953년 7월 19일
전사

아내인 박순남 씨한테 보내진 장무환 씨의 전사 소식.

포로로 잡히고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 탄광, 온성군 등지로 끌려가서 탄을 캐다가 1년 뒤인 1954년에야 포로 교환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하도록 협박했으며 다치거나 갱도가 무너져 사망해도 방치하는 추태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피복은 1년에 1개씩 지급할 정도로 개인 위생이 열악했다고 했으며 식량 사정도 열악했고 조선노동당 국군포로에 대한 인권 조치는 최악이었다고 하며 조선노동당은 그에게 강제결혼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북한에서 한 이혼녀와 재혼했고 그 슬하에 5명의 자식과 손자들까지 두었다.[13]

2.2. 에서 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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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방송 영상의 클립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영상
꼬꼬무2 방송 영상

1998년 그는 두만강을 건너 탈북 중국 동북3성 지역에서 은신하면서 처음 주중국 대한민국 대사관에 전화했고 구출 요청을 했으나 북한 주민으로 등록되었고 사망자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당시 주중국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은 노골적으로 무례한 태도로 "하… 없어요"라는 극도로 개념을 밥말아먹은 전화 답변을 했고 전화를 끊었다.[14][15]

그러자 가족들이 그가 생존해 있다는 걸 알고 처음에는 국방부, 통일부 등 정부기관과 접촉했으나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자 민간 단체에 지원을 요청했고 민간 단체가 수용했다. 한편 이 소식을 알고 있던 SBS < 그것이 알고싶다> 팀은 PD 2명과 카메라맨 1명을 꾸려서 중국 현지로 찾아가서 국군포로 장무환의 탈출기를 촬영했다.

그런데 그가 탈출하려고 하자 은신처 주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캠코더를 들고 들어와 은신처 내 인원들을 촬영하고 1만 달러(당시 환율로 1,400만 원)를 주지 않는다면 공안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했고, 이때 있는 돈을 모두 끌어모아서 2,500달러(350만 원)로 합의를 보고 빠져나왔다. 그렇게 되자 이미 중국에 입국한 가족들은 기차를 타고 가까운 항구도시로 간 뒤 배를 타고 인천으로 입국하는 방식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철도역까지는 택시를 탑승했으나 평생 자동차를 타본 적이 없어서 가는 중 멀미를 하는 등 고통을 호소했고 가다가 멈춰서 구토를 하고 다시 출발하는 과정을 반복했으며 힘겨운 이동 끝에 역에 도착했다.

중국의 철도역에는 경찰들이 배치되고 북한이탈주민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말을 시킨 후 맞으면 체포해 강제 북송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가족들은 혹시 경찰이 말을 걸 경우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인 척 하기로 계획을 짰고 경찰들이 수시로 움직이면서 북한이탈주민들에게 말을 걸어 강제 북송을 할 가능성이 높으니 15시 55분 즈음에 철도역에 도착하기로 했다.[16]

결국 기차를 타고 항구 도시에 도착했으나 여권이 없는 까닭에 우선 가족들이 먼저 귀국했고 그는 잠시 항구도시에서 은신하기로 했는데 칭다오에서 홀로 은신처에서 은신 중에 있어서 불안했기 때문에 주중대한민국 대사관에 전화하였는데 상담원의 "어쩌라고요" 영상이 찍혔다. 하지만 북한 주민으로 등록되어 있고 대한민국 여권이 없는 그를 입국시켰다가는 서류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고 가족들이 먼저 귀국한 후 국방부와 외교부를 통해 그를 귀국시킬 방법을 강구했으나 당시에는 관련 법조차 없었고 외교적 문제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 그러던 중 그의 조카 장영웅은 정체불명의 전화를 받게 되는데 신원을 밝힌 것도 없이 "내일 정오에 남서울호텔(현재의 르메르디앙호텔) 로비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약속 장소로 향했고 거기서 신원을 밝히지 않은 검은 정장의 남성[17]으로부터 장무환의 명의로 된 여권을 받았다.

여권을 받은 후 다시 그 항구 도시로 갔는데 그도 출국하려고 했지만 출국장의 경찰(출국심사관) 여권으로 중국에 왔으면서 어째서 입국 도장이 찍혀있지 않느냐는 이유로 의심하며 출국 불허하려고 했으나 아들과 조카가 " 입국한 공항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인민경찰 국가이민관리국에서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고 거짓말로 주장했고 30여분간의 실랑이가 이어졌는데 뒤에서 기다리다가 항의하던 다른 출국자들의 눈치가 보였던 경찰이 결국 굴복하고 출국도장을 찍어주면서 출국허가를 해 주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되었다.[18][19]

1998년 9월 30일 인천항을 통해 45년 만에 대한민국으로 귀환했으며 조사를 걸쳐 금성전투에서 실종된 참전용사가 맞다고 인정되었고 전사 기록도 삭제되었다.
신고합니다. 상병 장무환은 1998년 10월 29일부로, 면역(免役)[20]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백골!

1998년 10월 29일에는 제3보병사단에서 면역식(免役式)에서 신고를 해 그렇게 장장 45년이라는 긴 군생활을 끝냈고 경상북도 울진군의 본가로 돌아가서 부인 박순남, 아들 장영욱, 형제자매, 조카들 등과 재회하고 울진에서 여생을 보냈다.

2.3. 이후

2021년 5월 13일에 방영한 SBS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10회에서는 그가 돌아온 후의 이야기도 함께 다뤘다.

부인 박순남은 그와 14년을 행복하게 살다가 2012년에 사망했고 그는 가끔씩 꿈속에서 북한에 남은 가족들을 만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2015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야말로 그는 역사적 비극으로 인해 남쪽에도 북쪽에도 다리를 걸친 채 기구한 젊은 시절과 행복한 노인 시절을 보낸 회색인의 삶을 살다 갔다.

여담으로 한국에 귀환한 첫 날 부인 박순남이 남편을 맞으려고 집안 청소와 식사 준비까지 다 해 놨는데 정작 본인은 큰형 집에서 자고 왔다는 웃픈 해프닝이 있었다.

아들 장영욱은 아버지가 돌아와서야 아버지의 은밀한 고백으로 북한에 다른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아버지를 배려하여 어머니 박순남뿐만 아니라 북한에 살고 있는 아내 아무개와 이복동생들의 이름들도 아버지 묘비명에 새겨 두었다.

이 사건으로부터 이미 23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이었기 때문에 아들 장영욱과 조카 장영웅도 완연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3. 방송 출연

4. 관련 문서



[1] 1953년 전사 처리되어 사망자 취급을 받았으나 1998년 9월 30일에 귀환한 후 대한민국 국적자로 재인정됐다. 따라서 공백기인 1953년부터 1998년까지도 대한민국의 국적법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2] 당사자의 의사나 탈북 이후 국적을 회복하는 절차를 거친 사실 등을 고려했을 때 해당 기간 동안에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판단되지만 한편 실질적으로는 '북한 주민'으로서 46년 동안 살았으며 국제법적으로 보면 국제연합 회원국인 북한도 국가이다. 만약 장무환의 국적이 논쟁으로 비화되었다면 '장무환을 북한 국적자로 볼 것인지', 그리고 '언제부터 언제까지 북한 국적을 가진 것으로 볼 것인지'가 중요한 논쟁 포인트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3] 6.25 전쟁 일부 시기 중 군 복무( 북한 인민의용군, 대한민국 국군)로 인해 강원도 회양군, 경상남도 부산시 등지에서 기거. [4] 1953년 7월부터 1954년 8월까지 천마광산에서 강제부역. [5] 1954년 8월부터 1966년까지 하면탄광에서 강제부역. 1958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계층 분류가 되면서 장무환과 장무환의 북쪽 가족은 적대계급잔여분자로 분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적대계급잔여분자는 조선로동당 입당이 어떠한 경우에도 불허되고 교육, 기타 행정 등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는다. [6] 1966년부터 1998년 이전까지 상화탄광에서 강제부역. [7] 지원병 제도이지만 모집률이 저조하자 북한 정권에서 강제로 입대시켰다. 장무환은 야밤을 기회삼아 탈영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8] 본관이 경주로 나온다. 경주 김씨, 경주 이씨, 경주 최씨 등의 성씨 중 하나로 추정된다. [9] 당시에는 모병제가 시행되었다. [10] 당시 강원도 울진군 [11] 그것도 금강산에서 울진까지 217km를 걸어서 왔다. [12] 당시 경상남도 부산시 [13] 중국으로 찾아온 부인 박순남에게 처음에는 자식까지 둔 사실까지는 털어놓지 못하다가 한국에 돌아가서야 솔직하게 얘기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부인은 실망스러운 태도를 보이지 않고 남편이 몇 십 년 만에 돌아와서 함께 있다는 걸 뜻 깊게 받아들였다. [14] 이때 조금이라도 성의 있게 대답을 했다면 국민의 공분을 덜 샀을 것이다. 1998년 방영 당시에도 '저 직원은 누구냐'는 분노 섞인 여론이 터져 나왔으나 인터넷이 없던 관계로 큰 소란으로 이어지진 않았는데 2006년 그것이 알고싶다 재방영 당시에는 거의 폭발적인 분노가 터져나와 소위 '대사관녀'가 검색순위에 올랐고 다음 아고라에서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11월 22일에 외교부는 당혹해하면서 곧 입장을 밝히겠다고 하였고 이어 오후에 "대사관에서 그 같은 전화응대가 있었다는 점에 대해 매우 죄송하게 생각한다. (...) 당시에는 국군포로 수가 아주 적어 송환을 위한 명확한 지침이나 업무 체계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 이 사건 이후 정책과 시스템의 대폭 개선을 통해 관계 업무 추진에 있어 최우선 순위를 두고 국군 포로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의 송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문제의 직원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파견된 업무보조원으로 보이며 이미 퇴직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답변했다. # 이후에도 해당 답변 사건이 잊을 만하면 회자되어 맹비난을 받는 걸 보면 이 직원은 죽고 나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온갖 욕을 들어먹어야 할 업보를 지은 셈이다. [15] 대한민국 외교부는 해외 대사관/영사관에 필요한 단기 계약직 직원을 채용하고 있다. 해당 직원은 계약직 직원일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 [16] 이때 장무환 일행이 기차를 타려는 순간 한 중국 공안이 장무환의 가방을 빼앗자 장무환 가족 일행들은 걸렸나 싶어서 긴장했는데 알고보니 공안 측은 그냥 가방을 대신 실어 주려고 한 것이었고 "좋은 여행 되십시오."라고 말하며 가방을 열차에 실어 주면서 한숨 놨다고 한다. [17] 이 사람이 누구인지, 어느 소속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북한 주민으로 등록된 장무환에게 그냥 하이패스로 한국 여권을 발급해주는게 가능한 정부기관은 당시엔 국가안전기획부 국군정보사령부 말고는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으니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도와준 것으로 추측된다. 저 둘 중 어느 곳인지는 불분명하다. 국군포로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보사일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첩보임무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음지에서 근무하는 최고 기밀 신분인 정보사 공작관들이 저런 비교적 부차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대낮에 정장까지 차려입고 호텔에 갈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안기부 요원이라는 게 기정사실이라는 일각의 의견도 있다. [18] 출입국을 전산으로 관리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통한 것이지 전자여권 보급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전산관리를 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였으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19] 해당 여권을 분실해서 주 중국 대한민국 대사관 영사부 주 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 대한민국 재외공관에서 재발급 신청했다 등의 변명이 통할지의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발행관청에 Ministry of FOREIGN AFFAIRS가 적혀있어서 그 변명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20] 免役은 정해진 복무기간보다 더 오래 복무한 군인의 병역을 끝내는 것을 말한다. 免疫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