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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프란츠 요제프 1세 | |||
루돌프 |
추정상속인 카를 루트비히 |
추정상속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
추정상속인 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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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카를 1세 | ||||
오토 | }}}}}}}}} |
<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의 대공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Erzherzog Franz Ferdinand von Österre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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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란츠 페르디난트 카를 루트비히 요제프 마리아 (Franz Ferdinand Karl Ludwig Joseph Maria) |
출생 | 1863년 12월 18일 |
오스트리아 제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그라츠 | |
사망 | 1914년 6월 28일 (향년 50세)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사라예보 | |
배우자 |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 (1900년 결혼) |
자녀 | 조피, 막시밀리안, 에른스트 |
아버지 | 오스트리아의 카를 루트비히 대공 |
어머니 |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눈치아타 공주[1] |
형제 | 오토 프란츠, 페르디난트 카를, 마르가레테 조피 |
서명 | |
최종 계급 |
기병대장 (General der Kavallerie) |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문장 |
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장조카이자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예정이었던 후계자.[2] 제1차 세계 대전의 불씨를 지핀 사라예보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하다.2. 생애
2.1. 유년기
1863년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 재위 1848.12~1916.11)의 남동생인 카를 루트비히(1833~1896) 대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친모인 마리아 안눈치아타는 결핵으로 프란츠가 8세 때 사망하였으며 이후 계모인 마리아 테레자 대공비가 프란츠를 양육했다. 1875년에는 모데나 공작가[3]의 마지막 공작 프란체스코 5세가 죽으면서 가계가 끊기자, 모데나 공작가의 상속자가 되어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고 부자가 된다.[4] 이때부터 사망하기 직전까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공식 칭호는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전하 (His Imperial and Royal Highness The Archduke of Austria-Este)가 된다.2.2. 뜻하지 않았던 제위계승권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는 이미 루돌프 황태자(1858~1889)가 있었다. 그런데 1889년 1월 루돌프 황태자가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페르디난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바로 아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은 20년 전에 멕시코에서 처형되었고[5] 자식도 없었으므로, 페르디난트의 아버지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황제의 후계자로 지명된 것이다. 7년 후인 1896년 아버지 카를이 사망하면서[6], 카를의 맏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 계승자가 되었다.2.3. 결혼, 그리고 황실과의 갈등
황태자가 된 페르디난트는 후계를 위해 결혼 중매를 받는데, 이상하게도 동생 오토[7](1865~1906)와는 달리 중매를 번번이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분가인 합스부르크테셴 가문의 프리드리히 대공[8]의 집을 자주 방문해서, 프리드리히 대공의 아내인 이자벨라 대공비는 8명이나 되는 자신의 딸들 중 한명이 페르디난트의 아내가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그런데 1898년 페르디난트는 프리드리히 대공의 딸들이 아니라 그들의 시녀에 불과한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를 아내로 선택했다. 당연히 황실은 뒤집어졌고, 차기 황후가 될 여자가 겨우 중류 귀족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격렬히 반대했다. 조피는 백작의 딸이고 귀족들 중에서도 먹고 들어가는 명문 출신이라 엄연한 상류층이나, 근세/근대 유럽의 귀천상혼-동등결혼 판단에서 중요한 것은 '통치가문' 출신인지의 여부이다.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라 자신의 영지(독립된 영토)를 통치하는 '군주'와 그러한 군주의 신하인 귀족은 서로 다른 신분으로 여겨졌던 것. 예시를 들면, 황가와 백작 가문의 결혼이라도 백작 쪽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같이 독립된 영토를 통치하는 가문이라면 격이 충분히 맞는다고 판단되어 귀천상혼이 아닌 동등결혼으로 인정받는다. 반면에 조피는 보헤미아계 백작 가문의 4녀에 불과했다. 합스부르크가 전통적으로 통혼해오던 가톨릭 명문 왕가 출신도, 하다 못해 슈탄데스헤어[9] 출신도 아닌 일반 귀족 조피와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와의 결혼은 명백히 귀천상혼으로 간주되었다. 이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당시 시대상 동서를 불문한 어느 나라의 왕실이라도 무조건 반대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조피와의 결혼을 고집했고, 결혼을 결사반대하는 프란츠 요제프 1세 사이에는 극심한 반목이 일어났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귀천상혼을 이유로 그의 계승권을 박탈할 수도 있었으나[10][11] 이미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로 여론이 뒤숭숭한 마당에 또 다른 제위 계승자가 계승권을 박탈당한다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여론의 비난이 거세질 것을 우려하여 결국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조피는 황제가 수여한 호엔베르크 여공작이라는 타이틀로 만족해야 했다. 그들의 두 아들과 딸은 황족 취급을 받지 못해 제위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조피는 결코 공식 석상에서 황태자와 마주할 수 없었으며,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먼 대공녀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어야 했다. 명색이 황태자의 결혼식인데도 황제는 물론 황실 인사들은 전부 불참하고, 유일하게 결혼에 찬성했던 계모 마리 테레제와 그녀의 딸 2명만이 참석했을 뿐이었다. 유럽 왕족 사회에서 이는 왕족의 정부와 그 자손들에게 대하는 대우로 당시 이들이 황실 내에서 어떠한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조피를 자신의 아내이자 황태자비로서 당당히 사람들 앞에 드러내기를 바랐고, 1914년 사라예보 방문 때 아내를 대동한 것도 아내의 정치적 위신을 세워주고자 한 배려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만 놓고 보면 최악으로 끝나고 만다.
2.4. 사상과 업적
그는 당시 사람치고는 드물게 고집이 세고 자기주관이 강한 인물이었다.[12] 아무래도 본래 황위계승과는 먼 사람이었다 후계자가 된 자라 그런 모양. 페르디난트는 기존 권력층인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정계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실제로 그가 꾸린 예비 내각을 보면 기성 정치권에서 소외된 슬라브계 민족,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이 많았다. 뒤집어 말하면 출신성분과 민족을 따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평화 유지에 대한 강력한 소신,[13] 불평등한 국가 구조의 혁신에 대한 정치적 신념, 귀천상혼 같은 개념은 버리고 연애결혼을 하는 등 여러모로 진보적인 인물이었고, 오스트리아 정계의 멸시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슬라브계 등용을 통한 오스트리아 제국 통합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페르디난트가 지지했던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에 따라 작성된 제국 지도. 민족별로 제국을 재편했다.
페르디난트는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사상적 차이로 자주 대립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06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을 제창하여[14] 민족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일생일대의 업적인 대타협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대타협 체제를 근본부터 뒤집는 페르디난트의 안건을 거부했다. 또한 이렇게 되면 기존 체제에서 권익을 가졌던 독일계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이 불리했기 때문에[15] 기존 권력자들, 특히 제국의 절반을 차지하며 자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강제 동화 정책을 펴던 헝가리 왕국 정계와의 반목도 극심했다. 헝가리 총리 티서 이슈트반은 대놓고 페르디난트가 즉위해 개혁을 밀어붙인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그의 방안대로라면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 슬로바키아, 보이보디나, 그리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를 잃어버리고 영토가 3분의 1로 쪼그라들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헝가리의 위협은 단순한 허언이 아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두 나라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체제로,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등한 위치를 점한 채 제국을 절반씩 나눠 다스렸다. 헝가리는 자신들이 지배하는 영역, 일명 성 이슈트반 왕관령에 대한 자체적인 내정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는 자체적인 군대까지 보유했다.[16] 이 때문에 헝가리 총리가 황실 후계자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다. 실제로 합동 육군과 란트베어, 그리고 황립 해군은 헝가리 혼베드의 반란 상황에 대비한 작계까지 세워뒀을 정도다. 헝가리가 그렇게 뻗댄다면 군대로 밀어버리거나 해서 강제로라도 고분고분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애당초 대타협이 어떻게 성립됐는지를 생각하면[17] 무력으로 밀어붙였다간 제국이 공중분해될 판이었다. 때문에 그의 아이디어는 제국 멸망 이후에야 반영되며, 전쟁에서 이긴 협상국은 오헝 제국을 해체하고 그 영토를 타국에 할양할 때 그의 합중국 방안에 따라 작성된 지도를 일부 참고했다.
군사적으로도 페르디난트는 자국 해군과 군의 보급제도를 현대적으로 개선하고자 한 유능한 인물이었다. 육군 대장으로서 제국군 총감(Generalinspektor der gesamten bewaffneten Macht)이 된 페르디난트는 황제의 신임을 받는 인물로서 자그마치 25년간 육군참모총장직을 역임하며 제국의 부제(Vizekaiser)라고까지 불리던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 백작[18]을 해임하고, 대신에 자기가 눈여겨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대장을 후임 참모총장으로 내정했다. 회첸도르프가 페르디난트 자신이 구상한 군 개혁에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군 내부에 페르디난트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구축하고자 한 목적도 있었다. 다만 평화주의적이었던 페르디난트와 달리 지나치게 호전적이었던 회첸도르프와 갈등이 불거지면서, 회첸도르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한다.
동시에 페르디난트는 황립 및 왕립 해군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는 육군 대장임과 동시에 해군의 대장이기도 했다. 20세기 초의 유럽은 건함 경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으며, 페르디난트는 전함 12척, 장갑 순양함 4척, 정찰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 대형 어뢰정 36척, 잠수함 6척 등이 포함된 대규모의 건함 계획을 지지했다. 실제로 그의 구상에 따라 건조된 것이 바로 제국 해군의 주력함인 테게토프급 전함이다.[19] 그의 개혁 정책은 1차 대전에서 제국군이 부족하게나마 협상국 군대와 맞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던 페르디난트를 두고 말이 많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오스트리아의 황실의 후계자였다. 그리고 당시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의 개혁 성향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했다. 세르비아는 이미 세르비아 왕국이라는 이름의 독립국이었지만, 대세르비아주의자들은 세르비아인들, 그리고 더 나아가 형제 민족인 보슈냐크인들과 크로아티아인 같은 남슬라브인들이 사는 보스니아 등도 세르비아령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20] 그러나 황태자의 개혁이 성공하면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남슬라브인( 유고슬라비아)들도 독일계, 헝가리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되어 굳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추종할 이유가 없어지며, 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결코 좋지 않은 미래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태자로서 제국의 분열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재편성 계획을 내놓은 것이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세르비아의 강경 민족주의자들은 황태자를 제거하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2.5. 암살
자세한 내용은 사라예보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3. 사후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묘는 본래 오스트리아 황실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었으나, 아내 조피가 위에서 말한 신분 문제 때문에 황실 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계모인 마리 테레제가 나서서 황실 묘지에 프란츠를 혼자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조피와 함께 안장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들여서 페르디난트 부부의 묘는 황태자의 별장 하오스트리아 지방의 바카우 계곡 근처에 있는 아르트스테텐(Artstetten) 성 지하에 함께 안장되었다.[21] 황태자 부부의 장례식은 합동으로 치러졌는데, 원래 황실에서는 조피의 관을 남편보다 15인치가량 낮은 자리에 두고, 그 위에는 시녀를 상징하는 장갑을 놓으려 했지만 뜻밖에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를 저지하고 나선 덕에 평범하게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사후 그의 뒤를 이어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계자이자 차기 황제가 된 건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장남 막시밀리안이 아니라 조카인 카를 1세였다. 귀천상혼으로 그의 아들은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오스트리아 황실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자녀들이 오스트리아 황실 소속이 아니라 조피가 하사받은 칭호인 호엔베르크 가문이라는 핑계로 연금 지급까지 거부했다. 물론 프란츠가 물려준 유산은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토지 등 부동산 형태라서 정작 당장 쓸 수 있는 현금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페르디난트의 자식들에게 동정적이었던 일부 인사들이 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특히 이들의 계조모인 마리 테레제 대공비가 나서서 황실에서 프란츠의 자녀들을 돌봐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본인의 연금을 대신 주고서라도 보호하겠다고 항의했다. 당시 황실의 여성 중에선 마리 테레제가 가장 지위가 높아서[22] 발언권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황실에서 연금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황실이 해체되면서 부동산이 여러 독립국들로 쪼개지고 재산 대부분을 몰수당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자녀 중 아들들인 막시밀리안과 에른스트는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에 반대하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고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야 석방되었다.
페르디난트의 암살로 공석이 된 제국군 총감찰관직은 톄셴 공가의 수장인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대공이 이어받았다.
4. 여담
- 라데츠키급 전함 3번함 SMS 에르츠헤르초그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함명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제국 해군의 좋은 후원자였던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해군 측이 표한 일종의 예우였다.
- 사냥을 매우 즐겨했다. 원래부터 사냥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귀천상혼과 관련된 결혼 문제로 황제와 갈등을 빚으면서 현실도피로 사냥에 더 몰두했다고 한다. 체코, 프라하 남쪽에 있는 코노피슈테(Konopiste) 성에 페르디난트가 잡은 사냥감들이 박제되어 보관되고 있는데, 호랑이나 곰은 물론이고 6000번째 사슴, 1000번째 영양, 100번째 독수리 등이 있다고 한다.
- 막내 남동생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도 평민과 귀천상혼을 하여 황위 계승권과 황족 작위를 박탈당했다. 둘째 남동생 오토 프란츠는 황실의 압박으로[23]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공주와 결혼해 두 아들( 카를 1세, 막시밀리안 오이겐)을 두었지만 결혼생활은 불행했다고 전해진다.
- 여동생 마르가레테 조피는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잠재적 계승자였던[24] 알브레히트 공작과 결혼해 3남 4녀를 두었는데, 이후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어 알브레히트가 왕가의 수장이 됨에 따라 뷔르템베르크 왕가는 마르가레테 조피의 후손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25] 이복동생 엘리자베트 아말리는 한스아담 2세의 할머니이다.
-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함과 동시에 평화를 사랑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여러 민족들에게 동등한 주권을 부여하고, 민족간의 차별을 금지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시행하려고 했다.[26] 이런 행보를 보인 덕분에 2023년 현재에는 민족간의 내전과 학살로 큰 비극을 경험한 발칸 반도에서 재평가되고 있다.[27] 믿기 어렵겠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에 대한 문제를 세르비아 왕국과의 지속적인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하고 전쟁 및 민족갈등을 막을 브레이크가 사라지면서, 유럽은 2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했고 발칸 반도는 2000년대까지 온갖 내전에 시달렸다.
- 전쟁이 일어나면 유럽에 있는 제국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는데,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에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은 붕괴되었으며, 특히 러시아의 경우 아예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마저 러시아 내전 와중에 붉은 군대에 의해 전부 총살당했다. 그나마 세르비아 왕국은 승전국이 되어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성장하였으나 내부 민족갈등을 통제하지 못하다가 20년 뒤 추축국의 침략으로 점령 당하고 전후에는 티토의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왕정이 폐지되었다.[28]
- 만화 등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을 간략하게 다룰 때는, 그가 실질적인 황태자[29]였다는 점 때문에 외모를 은근히 미화해서 그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금성판 과학학습만화의 상대성 이론 편[30]에서는 아예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무슨 베르사이유의 장미에나 나올 법한 젊은 미남으로 묘사했는데,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왕자하면 떠오르는 동화 속 꽃미남이 아니라 그냥 콧수염난 후덕한 아저씨 얼굴이었다.[31] 물론 이 만화는 교양과학 만화지, 역사 만화가 아니니까 그렇게 상세한 고증은 안한 것으로 보인다.
- 현대에 와서는 귀천상혼의 대표적인 예시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5. 가족관계
5.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호엔베르크의 조피 여후작 (Princess Sophie of Hohenberg) |
1901년 7월 24일 | 1990년 10월 27일 |
프리드리히 폰 노스티츠리네크 백작 슬하 3남 1녀 |
1남 |
호엔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 (Maximilian, Duke of Hohenberg) |
1902년 9월 29일 | 1962년 1월 8일 |
마리아 엘리자베트 보나 폰 발트부르크 추 볼페크 운트 발트제 여백작 슬하 6남 |
2남 |
호엔베르크의 에른스트 후작 (Prince Ernst of Hohenberg) |
1904년 5월 27일 | 1954년 3월 5일 |
마리테레즈 우드 슬하 2남 |
자녀들의 인생도 불행했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자녀들은 모두 귀천상혼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32]
어머니 조피의 뒤를 이어 제2대 호엔베르크 공작이 된 장남 막시밀리안(1902 ~ 1962)은 1945년부터 10년간 소련군정 치하에서 호엔베르크 공가의 본가가 있는 아르츠테텐(Artstetten)이라는 도시의 시장을 지냈다. 1926년 결혼해서 슬하 6남을 두었다.
명목상 호엔베르크 공작위는 그 장남 프란츠(1927 ~ 1977)가 승계했다. 프란츠는 룩셈부르크 샤를로트 여대공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두 딸을 보았으나, 호엔베르크 공작위가 살리카법 때문에 명목상의 공작위[33]는 동생 게오르크(1929 ~ 2019)가 이어받았다. 그는 직업외교관으로 바티칸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냈다. 2남 1녀를 두었으며 사후 장남 니콜라우스(1961 ~ )가 당주를 계승했다. 호엔베르크 공작가의 현재 남계 후손 목록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차남인 에른스트는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때 나치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석방되고, 이후 어렵게 살다가 1954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장녀인 조피는 1920년에 19살 나이로 결혼해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나, 독소전쟁에 참전했던 차남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레오폴트는 1945년 전쟁터에서 22세로 전사하고 같이 참전한 장남인 프란츠 페터 파울은 소련 굴라크에서 1949년 28세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래도 그녀는 페르디난트의 자식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부모를 죽인 일당 중 하나이며 범인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던 바소 추브릴로비치(1897 ~ 1990)와 같은 1990년 89세로 숨을 거뒀다. 그녀의 자녀들 중 삼남 알로이스 카를 요제프(1925 ~ 2003)는 슬하 3남 1녀를 두었다. 막내인 고명딸 조피 아말리아 테레지아[34]는 1929년생으로, 슬하 2남 2녀를 두었다.
2023년 1월 12일 차남 에른스트의 차남 에른스트(1944-2023)가 사망하여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친손자 세대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 생존해있던 마지막 외손자녀인 조피 아말리아 테레지아도 2024년 4월 19일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이렇듯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는 암살당하고 세 자녀들도 모두 개고생하면서 살았지만 셋 다 무사히 장성해서 자녀들을 남겼으며, 특히 장남인 막시밀리안 폰 호엔베르크 공작이 슬하에 무려 6남을 두었던 덕분에 사촌인 카를 1세처럼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자손 역시 많이 번성했다.
[1]
양시칠리아 왕국의 3대 국왕
페르디난도 2세의 장녀다.
[2]
큰아버지의 추정 상속인이었기 때문에 살아생전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황태자 직위에 오른 적은 없다. 왜 그랬냐면 그는 황제의 직계인 아들이나 손자가 아닌 조카였기 때문이다. 이론상으로는 황제가 황후와의 사이에서 다시 아들을 낳으면
왕위 계승의 법칙상 그 아들이 다시 계승 서열에서 황제의 동생이나 조카들보다 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된다. (법률적인 구분이기에 후계자가 태어날 실질적인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때문에 공식적으로 황태자로 책봉되지는 못했고 추정상속인에 머물렀다. 본래 황태자였고 황제의 외아들이었던
루돌프 황태자가 아들 없이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면서 계승 서열 1위가 된 그가 후계자 자리를 넘겨받은 것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황태자로 지칭하는 문서들은 편의상이거나 이러한 사실관계를 몰라서 지칭하는 것이며, 이 문서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황태자로 지칭하는 것 또한 편의상 지칭하는 것이다.
[3]
당시 모데나 공작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가였던 다스부르고에스테(d'Asburgo-Este) 가문이었다. 다스부르고에스테 가문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4남 페르디난트(Erzherzog Ferdinand Karl von Österreich (1754–1806))가
모데나 공국 에스테 가문의 상속녀인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Maria Beatrice d'Este)와 혼인하면서 생긴 가문이다.
[4]
모데나 공작가의 남계는 완전히 단절되었지만 여계후손은 현재도 남아있다. 마지막 공작 프란체스코 5세의 남동생 페르디난트 카를 빅토어 대공이 레오폴트 2세의 손녀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여대공과의 사이에서 얻은 외동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
루트비히 3세의 왕비가 되었고, 이들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5]
멕시코가 내전을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틈에
나폴레옹 3세가 그를 멕시코의 황제로 만들어 그를 통해 멕시코를 지배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혁명군에 의해 오히려 막시밀리안만 처형당했다. 당시 막시밀리안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막시밀리안의 아내였던
벨기에의 샤를로트 공주는 나폴레옹 3세에게 남편을 구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나폴레옹 3세는 "그대의 남편을 위해 기도하리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국민들마저 나폴레옹 3세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이에 나폴레옹 3세의 권력 기반은 본격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6]
신앙심이 깊어서 매일 성지에서 떠온 물을 마시다가 위장병에 걸렸다고 한다.
[7]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
독일 제국
작센 왕국의 마리아 요제파 공주와 결혼했다. 이후 그들의 장남인 카를 대공이
카를 1세로 즉위한다.
[8]
나폴레옹 전쟁 때의 명장
카를 대공의 손자이자
테셴 공국의 공작. 당대의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와
바이에른의 마지막 왕세자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의 외삼촌.
[9]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국들의 지배 가문으로 군림하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통치권을 잃은 귀족가문들을 의미한다. 원래 통치가문들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지위를 일부 인정했다.
[10]
실제로 귀천상혼으로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는 사례는 왕왕 존재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큰오빠 또한 귀천상혼을 이유로 계승권을 포기했고 따라서 그 작위는 엘리자베트의 남동생이 이었다.
[11]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자녀들은 제위권이 없다.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군주에게는 매우 심각한 결격사유.
[12]
현대 2020년대 기준으로도 프란츠 페르디난트 같은 경우는 일반 시민이라면 모를까 왕족은 물론 정치인 중에서도 매우 드문 케이스다. 사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자기주관과 고집이 센 경향이 있는 사람이 자주 나온 편이고, 그래서 세계사적으로도 독특한 왕실 및 귀족 가문의 케이스로 꼽히곤 하는데 그런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도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특이한 축에 들 정도였다고 보면 된다.
[1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 둘 다 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에 대한 적대정책에 반대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뒤 모든 것이 페르디난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14]
이 방안을 제안한 아우렐 포포비치는
루마니아인이었다.
[15]
두 민족을 합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전 인구 비율에서 고작 44%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 44%도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포함한 수치기 때문에 유대인을 제외할 경우 비율은 더 낮아지게 된다.
[16]
명목상 황제가 지휘하는 정규군 조직인 '합동 육군' 외에도
미국의
주방위군처럼 독자적인 예비군 조직인 '방위군'(
오스트리아 제국은 황립 및 왕립 란트베어,
헝가리 왕국은 왕립 혼베드)을 유지하고 이는 각각 오스트리아 총리, 헝가리 총리의 지휘를 받았다.
[17]
대타협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헝가리인들의 목소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오스트리아와 맞먹을 정도로 체급이 커져버린 헝가리를 이대로 포기할 수 없던 오스트리아가 그래도 한 나라로 남기 위해 던진 마지막 카드였던 셈.
[18]
벡지코프스키는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동갑인 1830년생으로, 해임 당시 나이가 자그마치 76세였다.
[19]
그와 부인이 사망한 후 그들의 유해는
테게토프급 전함 1번함인 비리부스 우니티스(Viribus Unitis)로 오헝 제국 본국에 운구되었다.
[20]
하지만 많은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를 모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세르비아 왕국으로 묶여서 독립당하느니 차라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밑에 있겠다는 입장이었고, 이 때문에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황태자의 복수를 하겠다면서 대규모 폭동을 일으켜 세르비아인들을 공격했다. 그나마 세르비아에 대해 온건한 편이던 슬로베니아인들조차 세르비아의 남슬라브 통합정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불씨는 이미 이 때부터 존재했던 것.
[21]
자식과 손자들도 함께 매장되어 있다.
[22]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는 암살당했고 황제의 바로 손아래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의 아내인
벨기에의 샤를로트 공주는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한 후 정신병에 걸려서
벨기에에서 오빠
레오폴드 2세에 의해 유폐당했다가 1927년 사망했다. 손윗 동서들이 차례로 불행하게 죽으면서 사실상 마리 테레제가 황실 내 최고 어른이었다.
[23]
원래 마리아 요제파의 언니 마틸데가 오토의 사촌형
루돌프 황태자와 친형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차례로 혼담이 오갔지만 모두 거절당했기 때문에 오토만큼은 반드시 작센의 공주와 결혼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24]
알브레히트는 국왕의 직계자손이 아닌 먼 친척(마지막 국왕
빌헬름 2세의 8촌동생)이었고 아버지 필리프가 1917년까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결혼 당시에는 확정상속인이나 1순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다. 1918년 왕국 멸망 당시에는 추정상속인이었고, 빌헬름 2세가 사망한 1921년에 왕가의 수장이 된다.
[25]
현재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수장은 알브레히트와 마르가레테 조피의 고손자인 빌헬름이다.
[26]
실제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똑같은 방식으로 민족간의 융합을 추구하며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시켜 나갔으나, 티토 사후
세르비아인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다른 남슬라브계통을 차별하고 학살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붕괴된다. 심지어 티토 시절에도 민족 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서 국가 요직은 여전히 세르비아인 위주였다.
[27]
덤으로 페르디난트를 암살한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슬라브족의 민족 영웅에서 걸물을 암살해 비극을 초래한 극단주의자로 평가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현재까지 그의 평가가 좋은 곳은
세르비아뿐이며 심지어 그 세르비아에서도 비판적인 평가가 크게 늘었다.
[28]
거기다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가 내전으로 여러 국가로 해체되면서 세르비아 왕실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한 대세르비아주의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9]
상술했듯이 황제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태자가 아니라 추정상속인이었다.
[30]
제목대로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소개하는 편이며, 동시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전기 만화이기도 하다.
[31]
생몰년도를 보면 50세에 죽은 사람이다. 자녀도 셋이나 뒀다. 그냥 봐도 소싯적의
웨일스 공 윌리엄 같은 꽃미남과는 거리가 멀었다.
[32]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이들은
오스트리아의
왕정복고 문제에 있어서 국제적 발언권 및 정당성이
카를 1세의 후손들보다는 높은 편인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이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한
사라예보 사건 때문인데다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이 될 때는 이들이 아닌 카를 1세가 제위를 계승해 통치를 하고 있다가 퇴위를 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카를 1세 역시도 억울한 케이스이긴 한데 어쨌든 전쟁 책임을 이유로 카를 1세의 폐위에 앞장선 협상국 국가들 입장에서는 제위 계승 및 권력과는 1도 인연이 없던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후손들에겐 할말이 아예 없는 셈.
[33]
현재 공화국인 오스트리아는 공작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34]
결혼 후, 구데누스 남작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