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독일어: Standesherr영어: Mediatized Houses
한국어: 등족영주가 (等族領主家)[1]
18세기 빈 체제 이후의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최상급 귀족(Hoher Adel 또는 Hochadel)' 가문을 구성하는 특수한 신분층을 지칭하는 말.
신성 로마 제국은 수백 개의 소국들로 분립된 나라였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키고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소국들을 비교적 큰 나라들에게 합병시켰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대(對)프랑스 동맹국들은 1815년 빈 회의를 열어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대불동맹의 주축국들 역시 나폴레옹의 도움으로 소국들을 합병해서 영토를 넒힌 탓에 독일을 다시 300개의 소국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자의든 타의든 소국들을 합병하면서 본인들의 세력, 영토가 넒혀진 것은 좋지만 나폴레옹 이전으로 돌아간다고 합병한 영지에 대한 반환을 반길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나폴레옹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모토는 프랑스가 차지했던 영토 한정이지 자신들이 넓힌 영토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래서 영지를 돌려달라고 항의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빈 회의의 결론은 프랑스에 의해 영지를 잃은 이들에게 '합병된 왕가들'이라는 뜻의 슈탄데스헤어(獨 : Standesherr / 英 : Mediatized Houses)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했다.
칭호는 공작(Herzog) 및 후작(Fürst)의 칭호를 가진 경우에는 " 저하(독일어 : Durchlaucht / 영어 : Serene Highness[2])", 백작(Graf)의 경우에는 " 합하(독일어 : Erlaucht / 영어 : Illustrious Highness)"였다. 슈탄데스헤어 공, 후, 백작가의 자녀들은 왕자, 왕녀들과 결혼할 수 있는 준왕족이었기에 주권국의 왕자, 왕녀와 마찬가지로 프린츠 Prinz / 프린체신 Prinzessin 을 칭했다.[3]
이 가문 출신의 남자는 병역이 면제되었으나, 직업군인인 경우 보통 소위 계급부터 시작하는 특전이 있었다.
이들은 19세기에도 각자의 영지에 대한 사법권과 행정권을 유지, 사실상 나라 안의 나라 같은 기능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1848년 혁명 이후에는 중앙집권화를 추구한 독일 각 영방국가들에 의해 이런 특권이 소멸되어 갔다. 그러나 이들 가문의 당주는 1918년까지 프로이센 귀족원(Preußisches Herrenhaus)이나 헤센 대공국 회의(Landstände des Großherzogtums Hessen)에 의석을 보유하였고, 영지가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 경우에는 두 나라의 의회에 의석을 가지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라이닝겐 후작령은 헤센 대공국과 바덴 대공국으로 분할되어 합병되었기 때문에 라이닝겐 가문의 당주이자 명목상의 라이닝겐의 후작(Fürst)은 두 나라의 귀족원 의원을 겸했다.
2. 귀천상혼
슈탄데스헤어 가문들에 대해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대국의 왕실과 귀천상혼이 아니라 동등한 결혼으로 인정(신분상응 身分相應: 독일어 Ebenbürtigkeit)받았다. 따라서, 백작 집안이라 해도 슈탄데스헤어 가문이라면 명목상 귀천상혼이 아니게 된다.물론 일부 위세 높은 집안, 특히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나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의 경우 "솔직히 동급은 아니지 않냐?"하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계승서열이 좀 떨어지는 구성원의 통혼은 허락한 경우가 있으나 후계자 카를 대공의 신부감으로 슈탄데스헤어인 호엔로헤 가문의 영애를 맞는 것은 거부했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후처인 아우구스테 폰 하라흐(Auguste von Harrach) 여백작이 합병된 공실 출신이었지만 귀천상혼으로 간주하여 '리그니츠 여공이자 호엔촐레른 백작 부인[4]'의 작위를 받았다.[5] 19세기 말경부터 유럽의 왕가·귀족 가문에 대한 저명한 족보인 'Almanach de Gotha'[6]는 "주권국의 지배가문", "합병된 지배가문", "일반 귀족가문" 이렇게 세 계층으로 구성되기 시작했다. 일반 귀족 가문보다는 격이 높지만 주권국의 왕실[7]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정도로 생각되었던 듯하다. 실제로 슈탄데스헤어 가문이 통치하던 영지 규모도 대부분 규모가 작았다.
2.1. 군주제 폐지 이후
호엔촐레른 가문이나 비텔스바흐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같은 이름 있는 왕가들도 1918년 군주제 폐지로 슈탄데스헤어와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그리고 호엔촐레른 가문처럼 귀천상혼 제도를 유지하는 가문의 경우 동등결혼을 해야 하는데[8] 현존하는 유럽의 왕실들[9]과의 결혼은 가능성이 낮아졌고, 옛 제국 내 통치 가문과 결혼하자니 이들도 저출산 고령화 추세를 피해가지 못한 탓에 짝을 항상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게 되었다.[10]
20세기에는 폐지된 옛 유럽의 왕실과의 통혼도 꽤 있고 지금도 종종 하지만[11] 이것도 21세기 이후로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폐지된 엣 유럽 왕실들도 당연히 저출산 고령화 추세를 피해가지 못했으니 역시 짝을 항상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또한 종교가 서로 다른 집안과의 통혼은 여전히 적은 듯 하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12], 가톨릭 가문들끼리는 여전히 통혼하는 편이다.
그러나 아무리 혼인 상대를 찾기 어렵다고 해도 격이 낮다고 보는 그리말디 가문은 폐지된 독일의 왕가들조차 원하지 않는다. 엄연히 일국의 국가원수 가문임에도 역사가 일천하다는 이유로 반기지 않는다.
현재 모든 독일 왕조들의 대표격인 호엔촐레른 가문은 현실을 인정해 일반 귀족 출신의 여성과 결혼해도 동등결혼으로 인정한다.[13] 당연히 일반 귀족보다 급이 더 높은 슈탄데스헤어 가문은 옛날보다 가치가 올라갔다. 당장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의 후계자였던 小 루이 페르디난트(1944 ~ 1977), 그리고 장남이자 현 당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연달아 슈탄데스헤어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면서 슈탄데스헤어 가문과의 통혼이 더이상 귀천상혼이 아니게 되었고, 동등결혼을 할 필요가 있는 왕가 입장에서는 사실상 가장 격이 높은 동등결혼이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나라에서 귀족 신분을 법적 지위로 인정 받지 못하는 현대에 들어서는 구 왕가의 후손을 포함한 젊은 귀족들은 부모대가 타 귀족 후손들과 정략결혼을 잡으려 해도 그냥 자기 원하는 대로 연애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
3. 가문 목록
취소선은 현재 단절된 가문이다.공작가(Herzog):
- 아렌베르크(Arenberg)
- 크로이(Croÿ)[14]
- 로츠 운트 코르스바렘(Looz und Corswarem)
- 아우어스페르크(Auersperg)
- 콜로레도(Colloredo)
- 콜로레도-만스펠트(Colloredo-Mansfeld)
-
디트리히슈타인(Dietrichstein) - 에어바흐-쇤베르크(Erbach-Schönberg)
- 에스테르하지(Esterházy)[15]
- 푸거-바벤하우젠(Fugger-Babenhausen)
- 퓌르스텐베르크(Fürstenberg)
- 퓌르스텐베르크-퓌르글리츠(Fürstenberg-Pürglitz)
- 호엔로헤(Hohenlohe)
- 호엔로헤-바르텐슈타인(Hohenlohe-Bartenstein)
- 호엔로헤-잉겔핑겐(Hohenlohe-Ingelfingen)
- 호엔로헤-야크스트베르크(Hohenlohe-Jagstberg)
- 호엔로헤-랑엔부르크(Hohenlohe-Langenburg)[16][17]
- 호엔로헤-실링퓌르스트(Hohenlohe-Schillingsfürst)
- 호엔로헤-발덴부르크-실링퓌르스트(Hohenlohe-Waldenburg-Schillingsfürst)
- 케벤휠러-메치(Khevenhüller-Metsch)
- 라이닝겐(Leiningen) 본가[18]
- 라이엔(Leyen)[19]
- 로브코비츠(Lobkowicz)
- 뢰벤슈타인(Löwenstein)[20]
-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프로이덴베르크(Löwenstein-Wertheim-Freudenberg)
-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Löwenstein-Wertheim-Rosenberg)
-
메테르니히-비네부르크(Metternich-Winneburg)[21] - 잘름(Salm)
- 잘름-호르스트마르(Salm-Horstmar) (1817년 이전까지는 백작가)
- 잘름-키르부르크(Salm-Kyrburg)
- 잘름-잘름(Salm-Salm)
- 잘름-라이페르샤이트-크라우테임(Salm-Reifferscheid-Krautheim) (1804년 이전까지는 백작가)
- 잘름-라이페르샤이트-디크(Salm-Reifferscheid-Dyck) (1816년 이전까지는 백작가)
- 잘름-라이페르샤이트-하인스바흐(Salm-Reifferscheid-Hainsbach)
- 오르시니 운트 로젠베르크(Orsini und Rosenberg)
- 외팅겐(Öttingen)
- 외팅겐-발러슈타인(Öttingen-Wallerstein)
- 외팅겐-슈피엘베르크(Öttingen-Spielberg)
-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 [22]
-
진첸도르프(Sinzendorf) - 슈타르헴베르크(Starhemberg)[23]
- 투른탁시스(Thurn und Taxis)[24]
- 트라우트만스도르프-바인스베르크(Trauttmansdorff-Weinsberg)
- 발트부르크(Waldburg)
- 발트부르크-발트제(Waldburg-Waldsee)
- 발트부르크-부르차흐(Waldburg-Wurzach)
- 발트부르크-차일(Waldburg-Zeil)
- 비드(-노이비드)(Wied(-Neuwied))
- 빈트시-그레츠(Windisch-Grätz)
- 벤트하임(Bentheim)
- 벤팅크(Bentinck) (영국 포클랜드 백작)
- 카스텔(Castell)
- 에어바흐 가문의 분가
- 에어바흐-에어바흐(Erbach-Erbach)
- 에어바흐-퓌르스테나우(Erbach-Fürstenau)
- 푸거(Fugger)[27]
-
푸거-글뢰트(Fugger-Glött) -
푸거-키르히베르크-바이센호른(Fugger-Kirchberg-Weissenhorn) -
푸거-키르히하임(Fugger-Kirchheim) -
푸거-노르덴도르프(Fugger-Nordendorf) - 푸거-바벤하우젠(Fugger-Babenhausen)
- 하라흐 추 탄하우젠(Harrach zu Thannhausen)
- 이젠부르크(Isenburg)
- 이젠부르크(-비르슈타인)(Isenburg(-Birstein))[28]
- 이젠부르크-뷔딩겐(Isenburg-Büdingen) (이후 후작가 승격)
- 이젠부르크-메르홀츠(Isenburg-Meerholz)
- 이젠부르크-베흐테르스바흐(Isenburg-Wächtersbach)
- 쾨니히제그-아울렌도르프(Königsegg-Aulendorf)
- 쿠에프슈타인-그라일렌슈타인(Kuefstein-Greillenstein)
- 라이닝겐 분가들
-
라이닝겐-알트-베스터부르크(Leiningen-Alt-Westerburg) -
라이닝겐-빌링하임(Leiningen-Billigheim) -
라이닝겐-노이데나우(Leiningen-Neudenau) -
라이닝겐-노이-베스터부르크(Leiningen-Neu-Westerburg) - 나이페르크(Neipperg)[29][30]
- 네셀로데(Nesselrode)
- 오르텐부르크-노이오르텐부르크(Ortenburg-Neuortenburg)
-
오스테인(Ostein) - 파펜하임(Pappenheim)[31]
- 플라텐-할레르문트(Platen-Hallermund)
- 플레텐베르크-비템(Plettenberg-Wittem)
- 퓌클러 운트 림푸르크(Pückler und Limpurg)[32]
- 크바트-이스니(Quadt-Isny)
- 레흐베르크 운트 로텐로벤(Rechberg und Rothenlöwen)
- 레흐테렌(Rechteren)
- 자인-비트겐슈타인(Sayn-Wittgenstein)
- 자인-비트겐슈타인-베를레부르크(Sayn-Wittgenstein-Berleburg) (후작가 승격)[33]
- 자인-비트겐슈타인-혼슈타인(Sayn-Wittgenstein-Hohnstein) (후작가 승격)
- 자인-비트겐슈타인-자인(Sayn-Wittgenstein-Sayn)
- 샤에스베르크-탄하임(Schaesberg-Thannheim)
- 슐리츠 게난트 폰 괴르츠(Schlitz genannt von Görtz)
- 쇤보른(Schönborn)
- 쇤보른-부흐하임(Schönborn-Buchheim)
- 쇤보른-비젠테이트(Schönborn-Wiesentheid)
- 쇤보른-뵈멘(Schönborn-Böhmen)[34]
- 쇤부르크(Schönburg)
- 쇤부르크-글라우샤우(Schönburg-Glauchau)
- 쇤부르크-발덴부르크(Schönburg-Waldenburg) (후작가 승격)
- 쇤부르크-하르덴슈타인(Schönburg-Hardenstein) (후작가 승격)
- 지킹겐(Sickingen)
- 졸름스(Solms)
- 졸름스-바루트(Solms-Baruth)
- 졸름스-라우바흐(Solms-Laubach)
- 졸름스-뢰델하임-아센하임(Solms-Rödelheim-Assenheim)
- 졸름스-뢰델하임 운트 아센하임(Solms-Rödelheim und Assenheim)
- 졸름스-빌덴펠스(Solms-Wildenfels)
- 졸름스-브라운펠스(Solms-Braunfels) (후작가 승격)
- 졸름스-호헨졸름스-리흐(Solms-Hohensolms-Lich) (후작가 승격)
-
슈타디온(Stadion) -
슈타디온-탄하우젠(Stadion-Thannhausen) -
슈타디온-바르트하우젠(Stadion-Warthausen) - 슈테른베르크-만데르샤이트(Sternberg-Manderscheid)
- 슈톨베르크(Stolberg)[35]
- 슈톨베르크-로슬라(Stolberg-Rossla)
- 슈톨베르크-슈톨베르크(Stolberg-Stolberg)
- 슈톨베르크-베르니게로데(Stolberg-Wernigerode)[36]
- 퇴링-예텐바흐(Törring-Jettenbach)[37]
- 발트보트 폰 바센하임(Waldbott von Bassenheim)
- 발모덴-김보른(Wallmoden-Gimborn)[38]
- 부름브란트-슈툽파흐(Wurmbrand-Stuppach)
4. 슈탄데스헤어 가문 출신의 인물
-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1773 ~ 1859) - 빈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의 재상.
-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1819 ~ 1901) - 독일 제국의 재상.
- 하인리히 프린츠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 (1916 ~ 1944) - 자인-뷔트겐슈타인-자인(Sayn-Wittgenstein-Sayn) 백작가 출신, 2차대전 독일 야간전투기 에이스(격추 83기, 독일 야간전투 3위)
-
필기류 굴지의 명품 기업인
Faber-Castell은 신생 남작 가문이던 파버 가문의
딸이 슈탄데스헤어 가문 중 하나인 카스텔-뤼덴하우젠 가문의
아들과 귀천상혼을 한 결과 탄생한 백작가이다.
귀천상혼까지 하며 결혼했지만 결국 나중에는 이혼한다.다만 약간 애매한게 원래부터 카스텔-뤼덴하우젠 가문은 가문의 수장만 퓌르스트 작위[39]를 갖고 나머지 가문원은 백작 작위만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파버 가문의 딸과 결혼한 카스텔-뤼덴하우젠 백작은 애초에 백작위만 가지고 있었다. 단, 파버-카스텔 백작은 일반 귀족 가문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카스텔-뤼덴하우젠 백작위와 파버-카스텔 백작위는 엄청난 격의 차이가 있었다. 유럽의 작위는 오등작으로 번역되긴 하지만 동양의 오등작처럼 무조건 공-후-백-자-남으로 서열이 갈리는 것이 아니다. 같은 백작이라도 카스텔-뤼덴하우젠 백작은 제후고 파버-카스텔 백작은 일개 가신으로 취급 받았다. 같은 백작위이라도 두 백작위의 격은 한참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격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1]
한국어 위키백과의 표기로 공식 번역어는 아니다.
[2]
프랑스의 Serene Highness와는 달리
독일어권의 Serene Highness는 Highness보다 낮은 칭호이다.
[3]
영어의 프린스 Prince가 주권자의
아들, 소국의
제후를 모두 의미하는 것과 달리
독일어의 프린츠 Prinz는 오로지 주권자의 후손이라는 의미만 갖는다. 영어로 Prince로 번역되면서 소국의 제후를 의미하는
작위로 퓌르스트 Fürst라는 작위도 있지만 해당 작위는 후작에 해당하는 작위이다.
[4]
프로이센 국왕은 호엔촐레른 백작을 겸하고 있다.
[5]
다만 두 번째 왕비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개인적 소망이 작용하기도 했다.
루이제 왕비를 보면 그럴만도 했다.
[6]
현재는
공식 웹사이트로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7]
왕실이라고는 하지만 조그만한 대공국이나 공국도 포함된다.
[8]
물론 근래에는
하노버 가문처럼 평민과 결혼하더라도 수장의 승인 하에 동등결혼으로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귀천상혼 제도를 느슨하게 적용하는 가문이 많아졌다. 앞서 언급한 합스부르크 가문 역시 마찬가지로, 현재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장의 승인과 가톨릭
혼인성사만 올리면 평민과 결혼하더라도 동등결혼으로 인정된다.
[9]
현존하는 유럽의 왕실은 10개다.
[10]
참고로 엣 독일 제국의 통치 가문 수는 22개로 그 중에서 직계가 단절된 가문이 14개고, 그 중에서도 완전히 단절된 가문은 7개다.
[11]
독일 제국
호엔촐레른 가문의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와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가문의
키라 키릴로브나 여대공이 결혼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12]
비교적 최근의 사례로는
바덴 대공가의 수장 막시밀리안(1933 ~ 2022)과,
토스카나 대공가 출신인 발레리 여대공의 혼인을 예로 들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루트비히 1세의 경우처럼 가톨릭 집안과 개신교 집안 간의 통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한쪽이 개종하거나 자녀들은 시가의 종교로 키운다는 협의 하에 통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13]
그 수혜를 입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빌헬름 2세의 5남
오스카 폰 프로이센. 그는 본래 여백작과 결혼해서
귀천상혼으로 간주되었는데, 독일에서 군주제가 폐지된 후인 1920년에 가문법을 바꾸면서 동등결혼으로 인정받았다. 덕분에 그의 아들들은
호엔촐레른 가문 계승권을 유지했다.
[14]
아렌베르크와 크로이 가문은 벨기에의 Prince 작위도 가지고 있다.
[15]
헝가리 계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서깊은 후작 가문이다.
하이든 등 여러 유명 예술가들의 고용주이기도 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이었던
독일 주재무관 에스테르하지 중령의 그 에스테르하지 가문이다. 다만 적통은 아니고, 에스테르하지 중령의 조부인 장마리 오귀스트 발생 에스테라지(Jean Marie Auguste Walsin-Esterházy)가 자신이 마리안 에스테라지 드갈란타 백작부인(Marie Anne Esterházy de Galántha, 1741-1823)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에스테라지 가문의 허락 없이 멋대로 본인의 성씨에 집어넣은 것이다.
[16]
참고로 현재 이 집안의 당주인 10대 후작인 필리프(1970 ~ )는
필립 마운트배튼의 종손이다. (큰
누나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르가리타 공주의 장남의 아들.)
[17]
또한 이 가문의
스페인계 후손 중 빅토리아 폰 호엔로헤-랑엔부르크라는 1997년생의
여성은 현재 제 20대 메디나셀리 공작(Duchess of Medinaceli)을 비롯해 총 43개 작위를 동시에 보유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으로 스페인의 대귀족 (Grandee)의 일원이다.
[18]
빅토리아 여왕의 이부 오빠인 엠리히 공, 전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3세로 자칭하는 카를 엠리히 공의 가문이다.[40] 그 덕에 이 가문은 영국 궁정에서 헤센, 뷔르템베르크 가의 방계와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한편 엠리히 공의 여동생인 페오도라 추 라이닝겐은
빌헬름 2세의 황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의 외할머니이자,
펠리페 6세와
칼 16세 구스타프의 모계조상이기도 하다.
[19]
남계는 1970년 단절되고 준살리카법을 적용해서 대를 이었다. 원래는
프랑스 귀족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이후
프로이센 왕국으로 망명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대패한 것을 생각하면...
[20]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분가이며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사생아 아들인 루트비히 1세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21]
그 유명한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가문. 1992년 단절. 호헨로헤 가문의 라티보르-코르베이(Ratibor and Corvey) 계통 당주가 지금도 메테르니히-산도르(Metternich-Sandor) 성씨를 달고 있긴 한데 이건
차남으로 태어난 4대 당주가 외할아버지 집안으로 입양가서 성씨만 단 거라 의미없다.
[22]
나폴레옹과 대적한 오스트리아의
명장 슈바르첸베르크 장군의 가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군의 선배가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다.
12대 당주 카를(카렐)은 前
체코 외무장관.
[2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스페인 전역의 오스트리아 사령관인 기도 폰 슈타렘베르크 장군의 가문으로 이 장군은 프랑스의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방돔 장군에게 2번이나 털렸다.
[24]
16세기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우정사업을 관장했던 가문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 방계는 1923년 이탈리아로 귀화해 카스텔두이노(Castel Duino) 공작 작위를 받아 현존함.
[25]
이 가문의 방계가
만년필 회사인 파버카스텔社의 사주 가문이다.
[26]
루이스 페르디난트 주니어의 처가다.
[27]
합스부르크 가문의 물주였던 은행가 가문. 출신성분이 비슷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숙적이었다.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 역시 푸거 가문의 주요 고객이었다. 하지만 펠리페 2세가 4번이나
파산을 선언하는 바람에 몰락하고 말았다.
[28]
호엔촐레른 가문의 현 수장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의 부인인 조피 요한나 마리아가 이 가문 출신이다.(현 수장 알렉산더의 여동생)
[29]
여담이지만 이 집안의 나이페르크 백작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나폴레옹 2세와
마리 루이즈 항목 참고.
[30]
현재 이 가문의 수장인 카를 오이겐 폰 나이페르크는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사위이다. 오토의 장녀인 안드레아 여대공과 결혼해 3남 2녀를 두고 있다.
[31]
30년 전쟁 당시
가톨릭 최고의 기병대장인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추 파펜하임의 가문
[32]
프로이센 초기부터
호엔촐레른 왕가를 지지한
군인
귀족으로 이 후손들이 프로이센이 치른 전쟁들에서 활약한다.
[33]
2017년 타계한 6대 당주 리하르트(1934~2017)는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의 첫째
동생 베네딕트 공주의
남편이었다. 2023년 현재 7대 당주는 리하르트의 1남 2녀 중
장남이자
외아들인 구스타프(1969년생)지만,
자녀가 없어서((가문 내 선대 유언장 및 상속 문제로) 2003년부터 동거하던 여자친구 카리나 악셀슨(1968년생)와 2022년 6월 4일에 결혼함) 이후 가문은 현 당주 구스타프의
삼촌이자 선대 당주 리하르트의 동생인 로빈(1939년생)과 그 자손(두번 결혼해서 얻은 1남 2녀와 3명의
손자, 1명의
손녀가 있다.)으로 이어질 전망이었는데... 구스타프와 부인이 2023년 5월에
대리모를 통해 아들을 낳아서 변동 가능성이 생겼다.
[34]
오스트리아 출신 추기경인 크리스토프 쇤보른이 이 가문 출신이다.
[35]
슈톨베르크 게데른도 있었는데
프라이부르크에서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에게 털린 장군이 이 가문 출신이고 그 손녀인 루이제는
자코바이트 왕위 계승권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영 프리텐더)의 아내었다
[36]
슐리펜 장군의 외할머니가 이 가문 출신이다. 이거 귀천상혼 아니냐는 경우도 있는데 슐리펜은 친가와 외가 모두 백작 집안이니 아니다.
[37]
이 가문은
영국
윈저 왕조와 은근히 많이 연결되어 있다.
켄트 공작 조지 왕자의 처형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리자베트 공주가 이 가문의 당주인 카를 테오도르 백작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엘리자베트 공주는
필립 마운트배튼과 사촌이기도 하다. 현 당주인 바이트 그라프 폰 퇴링-예텐바흐는
찰스 3세에게는 6촌 재종형이고
켄트 공작 에드워드 공자와
켄트의 알렉산드라 공녀,
켄트의 마이클 공자와도 6촌 간이다.
[38]
조지 2세의
사생아 가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 귀족 작위가 없는데
찰스 2세가 자신의 사생아 대부분에게 공작 작위를 부여(리치먼드, 세인트알반스, 그래프턴, 버클루)한 걸 생각하면...
[39]
동양의 오등작으로 치면
후작이나 마찬가지인 작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