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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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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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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성씨
昌寧 成氏
관향 <colbgcolor=#fff,#191919> 경상남도 창녕군
시조 성인보(成仁輔)
집성촌 강원도 춘천시
경상남도 진주시, 창녕군
경상북도 김천시, 봉화군, 상주시, 영천시
전라북도 고창군, 진안군
전라남도 순천시, 해남군
충청남도 보령시, 예산군
충청북도 영동군, 음성군
황해도 금천군, 평산군
인구 195,310명(2015년)
사이트 창녕 성씨 대종회 |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1. 개요2. 조선 왕실과의 관계3. 분파4. 집성촌5. 인물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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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창녕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집단이다.

시조 고려시대 당시 창녕 지방의 토호(土豪)이며 호장 중윤을 지낸 성인보(成仁輔). 시조 성인보의 출생연대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성공필과 성한필 대에서 두 계통으로 갈라졌으며, 지금은 13파로 분파되었다. 성인보의 아버지는 신라 대관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씨약사」는 시조 인보가 고려 고종 때 성씨의 성을 창성한 것으로 전한다. 족보 기타 문헌 사료도 시조는 인보로서 상계는 밝혀지지 않고 전해지며, 이것이 창녕 성씨의 유래이다. 성씨 족보 중에서 가장 오래된 창녕 성씨 족보 계축 보는 성종 24년 계축(서기 1493년)에 처음으로 편찬된 것으로, 성씨 족보에 처음으로 편찬되었다.

역사기록에 최초로 성씨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 108년이지만 창녕 성씨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문종 당시 성(姓)이 없는 사람은 과거를 응시할 수 없게 하여 고려 고종 당시 성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족보가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창녕 성씨의 족보는 그 중 대표적인 족보 중 하나이다. 족보의 경우 창녕성씨계축보(昌寧成氏癸丑譜)라 불리고 있으며 1493년(성종 24년) 성중성(成重性), 성현(成俔) 등이 간행하였다.

한국 전근대 사회에서 과거 시험의 사회적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가문이다. 특히 고려 시대에 비해서 과거 시험의 비중이 더 커지고, 음서의 범위가 축소되는 등 더욱 실력 위주 사회를 지향한 조선 시대에 있어서 과거 시험의 의미를 드러내는 사례이다. 창녕 성씨 가문과 유사한 경위를 통해서 조선 초기 발현한 가문이 광주(경기도 광주) 이씨 가문을 들 수 있다. 창녕 성씨 가문은 1456년 병자원옥 - 소위 사육신 사건을 겪으면서도 성석용-성달생-성승- 성삼문, 삼빙, 삼고 계열 외 다른 구성원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대를 거치면서 크게 발흥하여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15세기 문물 제도 정착에 크게 기여한다. 하지만 광주 이씨 가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산군 대에 불행하게도 크게 된서리를 맞은 가문 중 하나로 성현[1] 부관참시되었고 성준은 교살되었다. 그래도 후손들은 살아남아 성희안, 우계 성혼 등 여러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영남 지방 최대 명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인구는 2015년 기준 182,377명.

2. 조선 왕실과의 관계

3. 분파

  • 판서공파와 찬성공파로 크게 나뉘었는데 판서공파에서 십파(十派)의 공파가 형성되었고 찬성공파에서 삼파(三派)의 형성되어 십삼파(十三派)가 존재한다.
    • 판서공파(判書公派)
    • 독곡공파(獨谷公派)
    • 회곡공파(檜谷公派)
    • 상곡공파(桑谷公派)
    • 중낭장공파(中郞將公派)
    • 판사공파(判事公派)
    • 시랑공파(侍郞公派)
    • 정절공파(貞節公派)
    • 사인공파(舍人公派)
    • 좌랑공파(佐郞公派)
    • 평리공파(評理公派)
    • 검교공파(檢校公派)
    • 지사공파(知事公派)

4. 집성촌

5. 인물

6. 관련 문서


[1] (成俔, 1439~1504) 조선 성종 대의 문신으로 성석린의 동생 성석인(成石珚, 1357~1414)의 증손으로 『 악학궤범』, 『 용재총화』를 남겼다. [2] 조선의 비빈들 중 유일한 창녕 성씨로, 본명은 성덕임이다. 홍봉한(정조의 외조부) 가문 청지기 성윤우의 딸이다. 어릴 때 혜경궁 홍씨의 처소 궁녀로 입궁했다. 정조가 이미 10대 때 승은을 내리려 했으나 왕비 효의왕후가 아직 임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무려 15년 뒤에 정조가 또 한 번 구애했으나 또 거절, 결국 정조가 하인에게 벌을 내리고 나서야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이후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 이순과 장녀 옹주를 낳았다. 그러나 딸과 아들 모두 요절하고, 본인은 셋째를 임신한 상태인 만삭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졸하였다. 만약 문효세자 이순이 무사히 장성하여 왕위를 계승하고 더 나아가 현재까지도 직계 후손이 이어지게 되었다면 성삼문의 방계 후손이 대대로 조선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3]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의 아버지 성유경이 이 마을 출신이다. [4] 성낙인 전 서울대학교 총장과 독립유공자 성태영이 이 마을 출신이다. [5] 2000년부터 6년간 헤드헌팅 회사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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