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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비판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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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식민지 근대화론 친일 발언
2.1. 비판에 대한 반론
3. 독도 관련 발언
3.1. 비판에 대한 반론
4. 위안부 관련 논란
4.1. 주장 옹호에 대한 반론4.2. 존 마크 램지어 교수 옹호 성명
5. "세종이 위안부의 원류" 발언6. 이중적인 독재 옹호7. 조정래 아리랑 비난
7.1. 허수열의 반박
8. 화랑세기 위서론 부정9. MBC 기자 폭행 방송 장비 파손
9.1. 비판에 대한 이영훈의 반론
10. 외증조부 사칭11. 서울대 명예 교수 사칭 논란
11.1. 비판에 대한 이영훈의 반론
12.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여성혐오설 주장13. 제보학생은 인생의 패배자 전락 발언14. 일제의 호적제가 신분을 해방시켰다?15. 대법원 판결 왜곡16. 보수 정당에 대한 왜곡17. 식민지 배상18. 북한의 경제 발전이 일제 유산 때문?19. 자본주의 맹아론이 한국 정체성 부정?20. 중국 주적 논란21. 한국인의 종교성 비하

1. 개요

경제사학자 이영훈에 대한 비판 및 논란 일람이다.

2. 식민지 근대화론 친일 발언

  • 2019년 일본의 대한국 경제 보복이 일어난 뒤 유튜브 채널 이승만 TV의 영상이 일본 방송을 탔다. 적어도 1944년 8월 이전까지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들은 일본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았으며 조선인 노동자들이 힘들었다는 것은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한 발언이 내용이 방영되었다.
  • 2015년 9월 8일 이영훈은 아베 신조가 자민당 총재 3선 기념을 겸해 한 담화에 대해서 “진중하게 쓰인 훌륭한 문장”이라고 평가하였고, 한국의 반일 종족주의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해 많은 논란이 되었다. #
  • 파일:external/www.mediafire.com/kad1653u0ce5fe9z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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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년 4월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식민통치가 정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서울대 교수가 일제 강점기 때 인구가 증가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라는 언급을 했는데, 이영훈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칭한 걸로 해석한다. 아베 신조는 아예 공정한 동북아시아 역사 연구라는 미명하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미국 학자를 초빙할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
  • 민족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20세기 일제강점기 때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민족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민족' 개념까지 부정하였다.[1] #, 민족주의 성향의 동양사학자인 김기협 교수가 이에 대해서 반박한 바 있다. # 民族이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맞으나 민족이라고 하는 관념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2]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하는 이영훈 자신은 정작 일본 민족주의자들의 관점과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게 재밌는 점이다. 다만 입장이 바뀐 것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이영훈은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문제는 한국은 서구식 민족주의와는 다른, 반일종족주의에 기초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실제로 이영훈 본인은 반일종족주의에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된다며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습니다"라고 주장했다. # 그러나 서양의 민족주의는 백인 우월주의에 따른 식민지 정당성 주장과 인종차별,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으로 이어져 결국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불러 일으켜 수천만 명을 죽게 만들었으며 현대까지 그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이영훈 같은 뉴라이트 인사들이 찬양했던 프랑스 혁명의 나라인 프랑스에서조차 함께 혁명에 참가해 같이 피를 흘리고 싸운 프랑스 여성들은 참정권을 무려 1944년에야 얻었을 만큼 남자들보다 더 큰 차별을 받았다. "있던 민족을 없었다고 우기면 없어지는가?" 서구 민족주의가 평등을 준다는 이영훈의 말은 이런 역사적 과정에 무지한 오류일 뿐이다.[3] 아울러 이영훈 등 뉴라이트 인사들이 공동저술한 책인 <반일 종족주의>의 20장에서 이영훈은 신채호가 쓴 소설 <꿈하늘>의 내용 중 육계의 승패가 영계의 승패에도 영향을 준다는 <꿈하늘> 속 을지문덕의 말을 근거로, 한국 민족주의와 무속신앙이 차별적이어서 나쁘다는 투로 말했는데, 이는 이영훈 본인이 한국의 민족주의 그 자체를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4]
  • 2019년 9월 10일, 한국외신클럽의 반일 종족주의 관련 인터뷰에서 그는 ‘1945년 한국의 독립은 한국인이 주체적으로 이룬 업적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으며, “한국인은 조선 왕조를 매우 아름다운 선비의 나라라고 생각한다.[5] 그런데 매우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일본 제국주의가[6] 들어와 조선 왕조를 멸망시켰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한국은 일본에 대해 강렬한 적대감을 갖고 있고 이를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면서 “이런 역사 교육과 의식은 결코 대한민국을 선진사회 선진국으로 발전시킬 수 없다.[7][8] 바로 이런 반일감정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위기감을 느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20만명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하였고,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동안 학살이라고 할 만한 범죄는 없다고 주장"하였다.[9] 이에 ‘위안부 문제에 일본의 책임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묻자 이 전 교수는 “위안부에 대한 한국인의 편견 - 납치, 감금, 폭력, 성 착취 등 초등교육에서 이뤄지는 교육 -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 FNN 원본
  •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말해 논란이 된 류석춘을 자신의 이승만TV에서 옹호하였다. 그리고 해당 발언을 녹취한 학생에 대해서는 '인생의 패배자', '파괴된 영혼', '광기에 사로잡힌 홍위병'이라고 비난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

적어도 초기에는 반론 문단에서와 같이 이영훈 교수는 '조선을 위한 근대화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본 문서의 내용에 나오듯이 이영훈 본인이 친일 관련 문제에 대해 많은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어서 의미가 퇴색되었다. 자신의 근대화론이 수혜론과는 별개의 주장이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작 이영훈 본인이 저술, 강연 활동 등에서 계속해서 정치적 해석을 펴고 있어서 정작 자신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쓰는 저서에서 펴는 주장을 보면 사실상 이영훈의 식근론은 수혜론과 논지 전개가 차이가 없어진 상황이다.

2.1. 비판에 대한 반론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성과 강압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좋든 싫든, 개항기와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시기에 한국인들이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근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물론 국가의 주권과 정치적 독립은 담보되지 않았고, 일본의 식민지배가 물리적인 힘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보았다.
"흔히 사람들은 일제가 토지와 식량을 수탈했다는 교과서의 서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그렇다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자는 말이냐”라고 불쾌해합니다. 저는 제국주의 비판의 논리가 그렇게 단순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는 수탈 여부로 비판할 것이 아니지요. 수탈 여부와 무관하게 제국주의는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름 아니라 인간 본성에 반하는 체제가 제국주의이기 때문입니다. " (중략)
자유가 없는 사람은 시체와 다를 바 없지요. 인간생명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한용운 선생이 일제의 조선 지배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 자유의 논리에서였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한용운 선생의 글을 읽고 일본인 검찰은 마음으로 승복하고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입니다. 그에 비출 때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각종 세금은 거두어 가면서 정치적 권리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 일제의 지배체제였습니다. 그런 모순은 어차피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모순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책은 조선인을 모조리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입니다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제2장에서 썼습니다만, 차별을 받는 가운데 조선인들은 그들이 하나의 운명공동체인 민족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민족의식은 역설적으로 일제의 동화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일수록 더욱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동화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의 방책은 조선인이게도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제는 1942년 조선의 청년들을 일본군대로 동원할 계획에서 1946년부터 조선인의 참정권을 인정할 방침을 세웁니다. 일제가 일찍 패망하는 통에 이 방침은 공수표가 되었습니다만, 실제 실현되었더라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지는 짐작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조만간 해체될 수밖에 없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다고 보지요.
— 저서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발췌

그러나 정작 이영훈 본인은 과거에 자신이 했던 주장조차 시간이 지나자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한 예로 이영훈 본인은 2004년 9월 5일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구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여 여성을 강제 동원하고 감금하여 병사들에게 성적 위안을 강제한 행위는 국제사회가 협약으로 금하고 있는 성노예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라고 해명했다가, 15년 후인 2019년에는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가 없고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고 자발적인 자영업자였다며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했던 주장을 정반대로 뒤집었고, 이에 대해 MBC 스트레이트 기자가 해명을 요구하자, "당신은 15년 전과 같으냐?"라고 윽박지르며 폭력을 행사한 일이 있다.

3. 독도 관련 발언

파일:이영훈 독도 망언.jpg
  • 이영훈은 독도가 현재 한국 영토인건 이승만 이후 현재 실효지배를 한국이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영토인 것이지[10] 역사적 근거들을 보면 한국 측은 근거가 빈약하며 일본 측이 주장하는 근거들이 더 맞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 독도가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이고, 우리가 주장하는 독도 주장의 근거 중 틀린 것이 많다[11]라며 일본 정부의 공식 주장을 그대로 말하였다.
  • "독도는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 이라고 언급했다.
  • 우산도 그 자체는 언제부턴가 14세기 말이나 15세기 초에 생긴 환상의 섬으로 죽 내려왔다라고 주장했다.
  • 그는 반론에서 우산과 독도의 관계에 대해서 고지도의 경우에는 측량기술의 부족을 들어서 '독도가 아니다'고 주장하고, 근대 지도의 경우에는 죽도의 이유를 들어 '독도가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팔도총도 하나만을 들어 우산이 독도가 아님을 주장하는, 일본 측에서도 절찬리에 써먹고 있는 주장이지만 실은 근거가 빈약하다.
  • 첫째, 팔도총도에 우산이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졌다는 이유만으로 고지도의 독도를 무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독도 문서에 더 자세한 설명이 있지만 이미 세종실록지리지에 "우산,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죽도는 울릉도에서 매우 가까워서 날씨가 어떻든 늘 보이는 섬이다. 날씨가 청명해야 보이는 섬은 독도가 맞다. 둘째, 견강부회라는 말까지 쓰며 죽도=독도오해설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일본에서 근대에 제작된 태정관지령을 봐도 명백히 남동쪽두 섬과 부속도서가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까지의 거리와 울릉도까지의 거리를 비교했을 때 어떠하게 보아도 울릉도 동북쪽 코앞에 한 섬으로 남아있는 죽도가 명백히 아님을알 수있다.
  • 독도/역사 문서에 나오듯이, 울릉도도형 등의 지도에서의 오류나 삼척참사인 장한상이 " 독도를 그저 '희미하게 보이는 한 섬'이 있는데 다만 일본 땅은 아님" 정도로 인식한 것은 맞는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 측에서 '희미한 한 섬' 정도로나 인식했던 독도 조선 땅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왕명으로 당시 조선의 재/군정을 기록한 '만기요람'에서는 "여지지에 이르길, 울릉·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이며, 우산은 왜인들이 이르는 바 송도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송도마츠시마의 훈차로서 독도를 말한다. 왜 독도냐면 이미 이 문서 이전의 1677년에 일본 측의 '은주시청합기'에서 "북서로 2일 1야를 가면 마츠시마가 있는데 다시 1일 거리에 타케시마가 있다."라고 마츠시마=독도임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죽도나 관음도에서 울릉도를 가는데 1일이 걸리진 않는다. 한마디로 조선정부가 당시 이미 "독도가 무슨 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울릉의 부속이다."라는 식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또한 안용복의 사례를 통해 독도의 존재를 아는 조선인들은 독도를 조선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한국인의 독도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미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렇게 독도에 대한 인식이 커진 것이 일본의 영유권 주장 때문이었음을 생각한다면 '20년 전부터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과 단지 '돌(乭)'이라는 국자(글자)가 있었기에 '석(石)도가 돌(乭)도가 될 수는 있어도 독도가 될 수는 없다'는 주장이야말로 견강부회이다. 1911년의 조선지지자료나 1938년의 조선어사전, 한국지명총람(1966-86)) 등 돌(石)의 방언으로서 '독'이 사용된 사례가 이미 예전부터 수없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12] 다시 말해 얼마든지 석도가 독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발음이 바뀌는 것은 방언에서 상당히 자주있는 일로, '방언에서도 석도가 돌도가 될 뿐이다.'는 주장은 방언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주장이다.
  • 일본 측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석도"가 독도인지 관음도인지 확실치 않음을 근거로 반박하기도 한다. 살펴보면 별로 새롭지도 않은 주장으로 2000년대에도 있던 주장이다. "칙령 제41호의 '석도'가 과연 지금의 '독도'인가?"의 문제인데, 독도의 역사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실제 증언에 따르면 평화선 이전부터(1895년)도 울릉도 근처를 돌아다니는 어민들은 지금의 '독도'를 '돌섬'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큰 섬 두개와 작은 섬이 많이 있었다."는 증언은 죽도도 관음도도 아닌 '독도'의 지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민국일보 1962년 3월 19일 기사 그리고 죽도고 관음도고 간에 독도가 정확하게 현대적 측량법으로 측량된 것이 1849년의 '리앙쿠르 락스(Liancourt Rocks)'이다.[13] 그리고 이 '리앙쿠르 락스'라고 알려진[14] '지금의 독도'에 대해 1904년 일본 군함 니타카(新高)호의 행동일지에 “리앙코루도 암, 한인은 이를 독도(獨島)라고 쓴다”는 기록이 있어 이것이 한국인들이 부르던 고유 명칭임을 확인사살해준다. 이는 관음도도 죽도도 아닌 리앙쿠르 락스=독도(현재)=독섬(어민들)=석도 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조선어 대사전에도 이미 나와있었지만, '독'은 '돌(石)'의 전라도 방언이다. 관보의 지명은 당시만해도 당연히 한자로 써야했기에 그것을 '석도(石島)'라고 적은 것뿐이다. 더 자세한 반박은 신용하 교수 참고.
  • 마지막 반박은 간단하게 논파되는데, 독도/역사 문서에도 나오듯이 이미 평화선 이전에 공식적[15]으로도 암묵적(승정원일기)으로도 국제적으로도(태정관지령) 한국(조선)령 취급 받던 게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시작으로 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일본령으로 얼마간 있었던 것이다. 혹여나 대한제국 칙령에서 말한 독도는 독도가 아니라 죽도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구역(區域)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管轄) 사(事)."라고 하여 죽도말고도 석도의 존재를 명확히 하고 있다. 이영훈의 반박은 단지 대한민국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이나 역사같은 총체적인 것까지 말한다면 그 이전부터도 우리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 이름과 관련해서는 일본과 한국 양측에서 수시로 바뀌었기에 더 자세한 내용들은 독도문서와 독도/역사문서에 나와있다.
  • 그는 자신의 저서 반일 종족주의의 166-168P '석도의 실체'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객관적으로 보아 독도는 돌섬이라기도보다 바위섬입니다. 돌과 바위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석도는 처음부터 독도와 무관한 섬이었습니다." 또한 이후에 '죠션디도와 울릉도 부분(1911)'이라는 지도를 제시한다. 이 지도에서는 울릉도 밑에 두 개의 작은 섬이 그려져 있으며, 왼쪽의 작은 섬 옆에 '돌도(?)'라는 단어가 써져있다. 이영훈은 두 섬을 관음도&죽도라고 직접 언급하진 않았다. 하지만 '울릉도 북동쪽에 있어야 할 섬을 남쪽에 잘못 그렸다.'는 식의 언급으로 보아 정체불명의 두 섬을 관음도&죽도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영훈은 이러한 논리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石島'는 독도가 아니라 관음도 혹은 죽도라는 식의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돌섬'과 '바위섬'이라는 용어 혹은 개념의 구분 문제이다. 한국 측은 '석도'와 '독도'는 동일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근거는 경상도 및 전라도 방언에서 '돌'과 '독'이 혼용됐다는 점이다. 옛날 한국인들은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 뜻에 맞는 글자를 찾기도 하고 발음에 맞는 글자를 찾기도 했다. ( 음차 문서 참조.) 돌섬 즉, 독섬을 석도로도 표기하고 독섬 즉, 독도(獨島)로도 표기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깨기 위해 이영훈 이사장은 "객관적으로 보아 독도는 돌섬이라기보다 바위섬입니다"라고 말한다. 바위섬이므로 돌섬 즉 독섬으로 불렸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영훈의 주장대로라면 '독도=바위섬, 울릉도 근처의 섬(관음도, 죽도)=돌섬'이 된다. 그런데 이는 이영훈 개인의 자의적인 구분법일 뿐이다. 대체 어디에서 돌섬과 바위섬이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쓴단 말인가? 돌섬과 바위섬이 해양학이나 지리학 등지에서 학술적으로 명백히 구분해서 쓰는 단어라도 된단 말인가? 그래서 학술적으로 독도는 바위섬이고 관음도와 죽도는 돌섬으로 분류된단 말인가? 당장 인터넷에서 관음도, 죽도, 독도 세 섬의 사진을 검색해봐도 관음도건 죽도건 독도건 생김새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다. 설마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지면 바위섬이 되고 한 개의 단일섬이면 돌섬이 된다는 뜻인가? 아님 덩치가 크고 위가 평평하면 돌섬, 크기가 작고 뾰족하면 바위섬이 된단 말인가? 이영훈의 주장은 요약하면 독도는 바위섬이므로 돌섬 즉, 독섬으로 불렸을 리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나 옛날이나 사람들은 돌과 바위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바위산'을 보고 '돌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사회의 이런 일반적인 언어습관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있는 자의적인 주장일 뿐이다.

    둘째, 지도 해석에 대한 이중잣대 문제이다. 이영훈은 앞서 조선시대 고지도들에 그려진 '우산도'에 대해서는 '위치가 부정확하므로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며 실존하는 섬이 아닌 환상의 섬이다.'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면서 해당 지도의 울릉도 밑에 있는 정체불명의 두 개의 섬에 대해서는 '위치가 부정확하게 그려져있지만 관음도랑 죽도 맞음. 아무튼 그럼.'이라는 식의 주장을 한다. 문제의 두 개 섬을 관음도 죽도라고 비정할 확실한 근거가 없음에도 우산도에 대한 엄근진한 태도와는 달리 매우 관대한 해석을 하는데 이는 명백한 이중잣대이다.

    셋째, 설령 해당 지도의 두 섬이 관음도나 죽도가 맞다고 해도 석도가 독도가 아님을 확언할 수는 없다. '돌도(?)'라 써진 왼쪽의 섬이 죽도가 될 경우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석도를 죽도와 명백히 구분하여 언급한 점과 정면으로 충돌해버리게 된다. 그나마 관음도라고 해석하면 칙령 제41호와 충돌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경우에도 해당 지도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관음도의 또 다른 이름은 돌도이다.'지 이것만으로 '석도는 독도가 아니라 관음도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기엔 부족하다. 관음도가 돌도라고 불렸는지와는 별개로 독도의 경우 독도/역사 항목에서 보듯 돌섬/독섬이라고 불렸다는 수많은 근거들이 존재하며 교차검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관음도의 경우 깍새섬이라 불렸단 얘기는 있어도 돌섬/독섬이라고 불렸다는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며 만약 있다면 이영훈이 제시했어야 한다. 결국 이영훈이 제시한 자료를 최대한 관대하게 해석해도 결국 '관음도와 독도 모두 돌섬/돌도라 불렸다.'란 결론이 나오는 정도가 한계이다. 종합하자면 이영훈은 문제의 지도로부터 '석도는 독도가 아니고 관음도나 죽도'라는 결론을 무리하게 도출하려다가 기적의 분류법과 이중잣대 등 수많은 논리적 헛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참고로 저 '죠션디도와 울릉도 부분(1911)'에서 이영훈이 '돌도'라고 읽은 단어가 실은 '울도'라는 반박이 나왔고 결국 이영훈도 '돌도일 가능성이 있으나 울도일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라며 이러한 비판을 수용했다.
  • 그는 <세종실록> '지리지' 편에 나오는 "우산과 무릉 두 섬은 (울진)현에서 정동쪽으로 바다 가운데 있다"는 문장에 대한 한국 측 해석을 비판한다. 이 문장 밑에는 "두 섬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날씨가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는 주석(해설)이 딸려 있다. 누구라도 '독도와 울릉도 두 섬이 바다에 함께 떠 있는 그림'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 위 실록 문장을 두고, 이영훈 이사장은 "무릉은 울릉의 별칭입니다"라고 한 뒤 "우산도는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섬입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환상의 섬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종실록>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는 독도가 환상의 섬인 근거를 제시한다. 독도는 땅도 없고 물도 없다는 게 근거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그는 "국제법에서는 그런 곳을 섬이라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 편찬자는 수백년 뒤에나 탄생하는 서양 국제법적 개념을 갖고 '두 섬'을 말한 게 아니라, 바다에 떠 있으므로 '두 섬'이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영훈 이사장은 '세종실록 지리지' 편찬 당시 존재도 하지않던 수 백년 뒤의 서양 국제법의 개념을 원용해 '독도는 섬이 아니다'라고 한 뒤, <세종실록> '지리지'가 수백년 뒤의 서양 국제법적으로 해석했을때 잘못된 기록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섬이 아닌 것을 섬으로 기록했으니 잘못된 기록이라는 논리이다.

3.1. 비판에 대한 반론

위의 비판들에 대하여 이영훈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512년)에서 이사부 우산국을 정벌한 것을 근거로 일찍이 신라가 독도를 지배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울릉도가 신라의 지배에 놓이게 된 것은 맞지만 독도가 포함되었는지는 이 기록만으로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451년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근거로 독도 고유영토설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 기록만으론 두 섬의 거리, 방향 등이 불분명하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하는 무릉(武陵)은 울릉도를 의미하는 우산(于山)의 별칭이라고 해석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가 쓰인 것은 마지막으로 울릉도에서 주민을 데리고 나온 지 한 세대가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정보의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고, 따라서 '두 섬의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좋으면 서로 바라볼 수 있다'라는 서술 자체가 잘못된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또한 장한상이 멀리 한 섬이 희미하게 보인다는 것도 실제로 울릉도 성인봉 정상에 올라서도 망원경 등 광학기기 없이 육안으로 독도를 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들어 수평선에 걸린 구름을 섬으로 잘못 본 것으로 판단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팔도총도'라는 지도에 나오는 우산도와 울릉도와의 위치가 잘못 표기되었다는 점을 들어 '우산=독도'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대단한 비약이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여러 고지도를 보면 우산, 울릉(무릉) 2개의 섬은 서로 거의 같은 크기로 묘사되며 두 섬의 위치관계도 지도마다 다 제각각이다. 정확한 해양측량기술이 발달하기 전인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한 섬을 서로 다른 두 탐험가가 자신이 발견했다고 주장하여 두 섬으로 지도에 실리는 경우가 서양에서도 많았다.
    파일:대한전도 울릉도.jpg
    또한 대동여지도, 대한전도 등 근대 지도에 나오는 소위 독도는 현대 지도와 비교해보면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죽도임이 명백한데도 독도라고 견강부회해 왔다고 주장했다.
  • 그는 한국인들의 독도에 대한 인식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대단히 미약했다고 보았다. 조선시대 문헌상으로 보더라도 조선시대 사람들은 독도에 대한 인식이 거의 부재하다시피했고, 육지로부터 대단히 멀리 떨어진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제국 관보에 언급된 석도(石島)가 돌 석 → 호남 방언으로 돌이 '독'이므로 독도 라는 한국측의 주장도 견강부회로, 이미 조선시대부터 돌(乭)이라는 국자가 있었으므로[16]석도가 방언으로 바뀌어도 돌도(乭島)가 되지 독도가 될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석도와 죽도 2개의 섬이 명시된 것도, 울릉도 옆에 붙어있는 현재의 관음도 죽도를 말하는 것이지 울릉도에서 수십km 떨어진 독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고 주장했다.
  • 그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독도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고 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평화선 덕분에 독도가 비로소 한국령으로 확정된 것이고, 이승만 정부 이후의 역대 정부가 일관되게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이것이 굳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적어도 노무현 정부 이전까지 한국의 역대 한국 정부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고히 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공격적 자세는 자제해온 것은 잘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4. 위안부 관련 논란

제 경험 역시 그러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연구할수록 제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짐을 깨닫습니다. 역사가로서 저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건의 윤곽을 스케치하듯 그릴 뿐입니다. 새로운 연구서를 읽고 또 새 사료를 분석하면서 그 윤곽조차도 끊임없이 수정하게 됩니다. 2007년에 낸 『대한민국 이야기』라는 책에서 저는 일본 관헌이 여성을 납치, 연행한 것은 아니지만 위안부 동원이 "일본군의 전쟁범죄"였으며, 위안부는 "행동의 자유가 박탈된 성노예"라고 썼습니다. 요시미 교수의 견해에 공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10여 년간 여러 연구서를 섭렵하고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기도 한 결과, 저는 일본군 위안부제는 일본과 조선의 공창제[17]가 군대 안에서 재현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군의 전쟁범죄"라든가 "성노예" 주장에 더 이상 동조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저에게 왜 말을 바꾸느냐고 비판합니다만, 저로서는 연구결과 갖게 된 새로운 견해를 솔직하게 밝힌다는 역사가의 책무를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이영훈(2020),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 pp. 54-55

이영훈은 자신의 연구나 학술적 성과와 별개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많은 관심과 의견을 표하였다. 단순히 미화, 옹호, 비판을 떠나서 대단히 포괄적이고 심도있게 의견을 표하였으나, 국내 언론에서 몇몇 부분만 취사선택하여 왜곡 보도, 뉴라이트 진영 및 식민지 수혜론자들의 곡해, 이영훈 본인의 모호한 입장으로 인해 논란을 낳고 있다.

이영훈이 최초로 위안부 논란의 몰매를 맞은 건 2004년부터인데, 당시 MBC 100분 토론 및 저서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견해를 표명했다가, 언론 측에 "위안부는 자발적인 참여"라는 식으로 이영훈의 논지를 악질적으로 왜곡 축소 보도하여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 연구실이 계란 투척을 당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찾아가서 큰 절까지 하며, 논란에 대하여 사과한 적도 있다. #

그러나 막상 2004년 MBC 100분 토론에서 그의 논지를 살펴보면 맥락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MBC 100분 토론의 사회자였던 손석희가 해당 논지를 다시 정리하도록 한 것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1, #2 최근에는 이승만TV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주익종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의 성격에 대해서 10편이 넘는 강좌 영상을 올린 바 있는데, 이를 추리면 아래와 같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영훈은 여러 가지 자료와 연구성과를 토대로 보았을 때, 일본 정부에 의한 직접적인 '일본군 위안부' 납치는 없되(군인 개개인의 개별적인 납치, 감금, 성폭행을 제외하고), 중개업자 특히 같은 조선인 중개업자에 의한 취업사기 및 인신매매, 아버지(또는 양아버지)가 딸을 팔아먹는 등의 다양한 이유로 많은 여성들이 의사에 반하여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다고 보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논리가 일본 정부가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밑에서도 줄줄히 이야기 하지만, 직접적이진 않았다고 인정해도 그 공창제적 성격으로 인해 일본 정부가 최소한 방관자적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18]

구체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는 가족구성원의 보호를 위해 가부장권을 설정한 일본식의 호주제를 조선에 도입하였으나, 빈곤한 하층민 가정에서는 도리어 가부장권을 이용하여 양아버지나 친아버지가 자식을 돈을 주고 파는 악습이 생겨났고, 특히 딸을 매춘업소인 유곽에 파는 일이 성행하였다. 기존의 매춘업이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고, 불평등한 불공정계약을 맺어 인신을 구속하는 문제점이 있어 이를 국가가 계약을 공인하고 관리하는 공창제로 전환하였으나, 도리어 현장에서는 여성들이 납치와 폭행을 동반한 협박을 받고, 광범위하게 서류조작을 당하여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이 의사와 상관없이 매춘업에 유입되었다. 가령 양아버지에 의해 매매업자에게 떠넘겨진 딸들은 양아버지에게 저항하기 어려웠고, 인신매매계약이 법적으로 공인되었으면 제도적으로도 구제받을 길도 없었다. 공창제 실시전에도 유녀들은 매춘지역인 유곽을 벗어날 수 없었는데, 공창제 하에서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인신이 양도되어, 자신의 몸값으로 지불된 채무를 갚기 전까지는 자유로이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는 운영주체가 군이라는 점에서 차이는 있되, 본질적인 점에서는 이 공창과 거의 같았다. 공창과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안부도 일본군 위수지역의 사령관의 영업 및 폐업의 허가증을 받았고 지역의 경찰서장의 통제를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위와 같은 반(半)강제적인 위안부 조달을 방관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이런 업자들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직접적인 사업 방침을 내렸다. 애초에 당시 활동했던 위안부 공급 업자들은 일본군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는데, 이러한 통제는 위안부를 모집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군에 조달하는 과정, 선별 기준 등이 들어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제하는 군이 위와 같은 비윤리적인 행태를 모를 리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공급 행태를 오히려 고착화하였다는 점에서 공식적 차원에서 장려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한국군 위안부가 생겨났으며, 다시 남한과 미군에 대한 광범위한 군용 공창제도로 변용하였으며, 나중에는 이것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매춘산업으로 번져나갔다. 이영훈은 인신매매와 불공정거래, 여성의 인권 유린 성격 뚜렷한 한국 매춘산업의 악습은 공창제도와 일본군 위안부 이후로도 한국사회에서 50년을 더 이어나가 군산 화재 참사로 그 참상이 버젓히 드러났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매매 문화" 와도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심각한 인권 문제이며, 일본군 위안부 이후에도 끊이질 않고 이어져 나온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매매 악습" 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인권적인 비난을 피하면서, 일본제국주의만 단죄하고픈 이중성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더불어 과거로부터 유래한 이러한 악습이 남아있으므로 위안부 문제는 종식된 것이 아니라 현재도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우리 내부의 성찰과 비판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뉴라이트 사용후기』의 저자 한윤형도 이영훈 교수의 발언이 실제와 다르게 전파되었다고 주장했다. # #

그밖에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해서는 해방직후의 여러 시대적인 상황에 의해 피해를 입은 것 역시 분명하므로 치료와 생활복지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이미 저서나 대담을 통해 여러 차례 밝혔다[19] 다만,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 정부 측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한 일본정부의 배상 책임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일본정부가 아니라 한국정부에게 보상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정대협을 포함한 대부분의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복지와 보상보다도 반일민족주의를 조장하는 것에 더 열중하고 있다는 의견도 표하였다.[20]

그러나 여전히 일부를 취사선택하여 편파 보도하는 행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2019년 7월 10일, 노컷뉴스는 이영훈이 공동 집필진으로 참여한 『반일 종족주의』의 내용에 대해서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 『노컷뉴스』는, 이 책에서 <여인들이 공창으로 향할 때 가난과 폭력이 지배하는 가정을 벗어나 도시의 신생활로 향하는 설렘이 없지 않았듯 위안소로 향하는 행렬도 마찬가지였다>, <위안부 역시 전쟁특수를 이용해 한몫의 인생을 개척한 사람이었다. 이들을 세상 물정에 어두운 무능력의 존재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일본군 위안부가 위안소나 주변을 함부로 이탈할 수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 부자유는 직업적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선택의 자유가 전혀 없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로 보기 어렵다>라고 서술했다고 보도하였다.

이는 앞, 뒤를 살피지 않고, 특정한 표현만 떼어 놓고 편파 보도한 것으로, 책의 공동 저자 중 한명인 이우연은 노컷뉴스의 기사가 책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왜곡해서 잘못 보도했다고 반박하였다. 이우연 박사는 1944년 9월부터 6개월간 징용이 실시되었으며, 징용에 응하지 않으면 100엔 이하의 벌금이나 1년 이내의 징역에 처했다고 분명히 적시했다고 밝혔으며, 노컷뉴스가 책 내용은 보지도 않고 내용을 잘못 보도했다고 주장했다. #1, #2

여기에 관해서는 처음에 노컷뉴스의 기사를 공유했었던 박찬승 교수도 페이스북을 통해서 '징용이 이뤄지는 시기에도 징용과 별개로 도일해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조선의 청년들에게 로망이었다는 의미'라는 이우연 박사의 반박에 대해서는 수긍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 정확하게 박찬승 교수는 일제시기 인원 차출에 대한 이우연 박사의 의견과는 별개로[21] 노컷뉴스 기사를 근거로 '징용=로망'이라는 식으로 몰고가는 것으로 오해해 이것에 대해 노컷뉴스의 기사를 인용해 비판하였으나, 이우연의 반박으로 실제 책을 사서 읽어본 뒤 '징용=로망'이라 주장했다는 것은 자신의 오해를 인정했다고 한다.

다만 그렇다고 이우연의 주장에 대해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우연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임금에는 차이가 없었다는 주장을 했으나, 해당 주장은 네티즌 임경덕에 의해 반박당했고 이우연 본인은 주장의 근거로 삼은 데이터의 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낙성대 연구소의 논문에 대한 비판 글 또한 이우연이 조선인 강제 징용에 대해서 "조선인들은 임금 체불 같은 어떠한 차별도 안 받았다."라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자 호사카 교수가 "조선인 노동자들이 못 받은 임금을 받기 위해서 일본군 반장한테 찾아가 임금을 달라고 항의하자, 일본군 반장이 일본도를 빼어들고 위협해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쫓아내서 그들이 임금을 받지 못했다."라는 사건에 대해 댓글로 작성하자, 이우연은 "(알려줘서) 고맙다."라는 댓글만 달고는 전혀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지 않고 계속 조선인 강제 징용에 대해 차별이 없었다고 일관적으로 우기고 있다. 이에 대해 호사카 교수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서 몇 번 말하자, 이우연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호사카 교수의 사진을 올려놓고 "웃기고 계시네."라며 싸늘한 냉소를 보냈다. #

4.1. 주장 옹호에 대한 반론

언론만이 그의 주장을 왜곡한다 이야기하긴 어렵다. 반일 종족주의에 어설프게 영감을 받은 뉴라이트 학자들과 몇몇 공저자들이 이영훈의 주장을 '위안부=매춘부'라는 식으로 공식화해서 발언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고문, 폭행까지도 부정한다. 만약 이 섹션의 서술이 진짜로 이영훈의 주장이라면 왜곡은 언론뿐 아니라 극우 학자들도 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본인 스스로도 논란을 심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아래 섹션의 "세종이 위안부의 원류"라는 식의 주장 등과 맞몰려서 시작점에 대한 논리 구조가 헷갈리는 주장, 즉 일본군 위안부로부터의 악습이 한국 사회에 고착화 되었다는 것인지(위의 설명), 조선시대로 부터의 성매매 악습이 위안부를 통해 고착화 되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전자의 경우라고 한다면 일본군 위안부를 벤치마킹했다는 한국군 위안부의 형태가 성매매 악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을 증명할 책임이, 후자의 경우라고 한다면 또 "인과관계가 빈약하고 비약이 심하다."는 문제점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영훈 본인이 운영하는 이승만 학당 유튜브 영상에서 과거 본인주장의 근거이자 공문서를 근거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동원을 입증한 일본인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의 견해는 틀렸다며 강제성을 부정하는 주장도 했다. 여기에다 류석춘을 비롯해 '위안부=매춘부'를 주장하는 이들과 함께 외부 활동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어, 현재 그의 입장이 무엇인지 매우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또, 일본군이 납치해서 간 게 아니라 속아서 갔거나 취업사기로 갔으니 성노예가 아니라 공창이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럼 속아서 염전에 가서 강제노동을 하게 된 사람은 염전 노예가 아니라 그냥 염전 직원인 것이라는 반론도 들 수 있다. 납치로 갔든 속아서 갔든 뭐로 갔든 그곳에서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성노동을 했으면 성노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논하면서 "한국사회에 만연한 성매매 문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매매 악습" 운운하며 물타기를 하는 것도 논점에서 벗어난다. 일단 전세계 모든 나라에 존재하는 성매매 문화를 가지고 마치 한국 사회에만 유독 존재한다는 식의 왜곡된 시각도 시각이기도 하다.

4.2. 존 마크 램지어 교수 옹호 성명

"우리는 이번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 논란과 관련 하바드 한국계 학생들을 중심으로 램자이어 교수의 사과와 학술지 측에 느닷없이 논문철회부터 요구하고 나선 반학문적 망동에 특히 경악하며, 마치 중국의 ‘문화대혁명’[22]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행태에 대해서만큼은 굳이 지목해서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다...(중략)...‘논문철회(retraction)’는 논문에서 혹시 심각한 부정행위가 발견되었을 때나 학술지가 자체 조사 후 최종적으로 취하는 제재 조치다. 아직 논문 내용과 관련 학문적 공동체에서 어떤 본격적인 논의도 이뤄지기 전에 단순히 의견, 관점이 다를 뿐인 문제를 두고 학생들이 학문의 자유라는 상아탑 지고의 가치를 짓밟으려 하는 모습을 국제 학계와 선학들이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후략)"
하버드대 교수의 위안부 논문,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본격적 토론의 계기로 삼아야!

존 마크 램지어 위안부 논문 게재 논란이 일어나자 문제의 논문을 쓴 램지어 교수를 옹호하는 공동 성명을 류석춘 연세대학교 교수,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 정안기(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장, 최덕효 한국인권뉴스 대표, 황의원 미디어워치 대표와 함께 발표했다.

하지만 정작 마크 램지어가 인용한 게임 이론의 대가이자 이영훈과 같은 경제학 전공이면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앨빈 로스와 폴 밀그롬은 게임 이론은 이런 논문에다 쓰는 것이 아니며, 단순하게 바라볼 문제가 아닌데다가 홀로코스트 부정을 상기시킨다며 논문 철회에 서명했다. # 이들은 램지어의 논문을 단순히 의견,관점이 다른 문제로 보고 있지도 않으며 램지어의 주장 또한 학문의 자유로 보지도 않고 있다.

5. "세종이 위안부의 원류" 발언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정부와 지방관아에는 춤추고 노래하고 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기생 신분의 여인들이 있었다. 기생의 신분은 딸에게 세습되었다. 특정 여인에게 성 접대의 역을 강요하고 세습시킨 다른 나라의 예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기생제는 세계사에서 한국사가 지닌 개성적 특질을 상징하고 있다. 그 기생제를 사실상 창출한 군왕이 다름아닌 세종이었다. 기생의 딸은 기생이라는 법은 세종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기생은 관비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이전 고려시대만 해도 기생은 관비가 아니었다. 나아가 세종은 국경지대의 고을에 군사를 접대할 기생을 설치하였다. 이후 전국의 각 군현에 수십 명씩의 기생이 배치되었다. 세종이 창출한 기생제는 20세기 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원류를 이루었다. #
  • 위에서 이영훈은 세종의 노비종모법을 들어 세종이 위안부의 원류라고 주장했다. 이게 왜 오류가 있냐면, 기생은 원칙 상 몸을 팔지 않는다. 단지, 관습적으로 양반의 성적인 수청(守廳)[23]을 거부하지 못할 뿐이다. 조선은 법으로 매매춘을 금지했는데 정책으로 직접 매매춘을 장려할 리가 만무할 뿐더러, 몸을 파는 기생(더벅머리)이 생겨난 것도 후기로 넘어가면서 사회 체계가 흔들리게 된 이후이다. 물론 초기에도 납치, 강간, 성상납 강요 등이 불법적으로 자행되긴 했지만, 말 그대로 불법적 관행이었을 뿐 정부에서 추진한 건 아니었다.[24] 또한 몇몇 기생들은 중인층과 결혼을 하거나 정절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등 변칙적이었던 측면이 있다. 더 나아가 일제강점기 당시 스스로를 창녀 취급하지 말라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경우도 있다. 애초에 처음 관기는 양반 계층의 성욕을 채워주기 위한 게 아니라 관의 연향에 동원할 목적으로 만들었던 제도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일종의 국가공인 전문위문공연자 개념에 더 가깝다.
  • 애시당초 현재 우리가 아는 위안부는 전시에 만들어진 신종용어였고 그 이전까지 뜻이 전혀 다른 용어였다.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란 용어가 무슨 개념인지 몰랐다. 예를 들면 한국인 대부분은 당시에 "위안부"란 용어가 무엇인지 몰랐다. 이것은 일본인도 마찬가지로 심지어 1943년의 어떤 일본인 헌병한테도 해당 사례가 확인된다. 한 전직 일본 헌병은 1943년에 '위안부 구역'에서 경비임무를 맡게됐는데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진 ‘위안부’라는 것이 '사창가'같은 곳이 아닌 '장교 클럽'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니 위안부란 용어자체만 따진다면 그 당시에 조선인과 일본인이 위안부가 무엇인지 알고 접근했는지를 알 수 없다.일본 정부가 '위안부 구역' 창설을 승인하고 주선하고 '위안부'를 모집하라는 지시를 내린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위안부'라는 용어는 반드시 '매춘부'라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니 여성과 그 가족들이 그 '위안부'에 대해 소통할 때 일의 본질에 대해 모호하게 되기 쉬웠다. 실제로 무슨 일인지 모르고 속았다는 증언들이 있다. 특수위안시설협회 항목에서도 나왔지만, 처음 이 용어를 접한 사람은 군 위안이라는 명칭을 처음 들으면 당연히 위문공연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 세종의 노비종모법 시행에 대한 논란 이전에 이영훈이 주장하는 " 기생이 군 위안부의 원류가 되었다."는 주장은 기생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영훈이 최초가 아니라 넷 우익들이 써먹던 주장의 변형이다. 이런 주장은 위에서 말한 기생은 매춘제도가 아니라는 점 말고도 문제점이 하나 더 있는데 기생제도가 군 위안부의 원류를 이루었다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굳이 그렇게 주장하려면 관기의 '수청'행위가 20세기 군대의 위안부 제도로 차용되었다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메이지 유신이후 일본에서 공창제를 시행했으며 그걸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이 들여와 창기가 아닌 기생들도 유곽에서 일하는 여자 쯤으로 인식이 떨어진게 현실이다.
  • 이런걸 다 떠나서 저 주장대로라면 "일본제국이 세종을 따라서 위안부를 만들었다"는 뜬금없는 주장이 된다. 이영훈의 주장대로라면 조선시대 기생제도가 근대 일본 제국이 위안부를 만드는데 영향을 줬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증거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일본에는 게이샤가 있었는데 굳이 억지로 원류를 찾는다면 뜬금없이 관련도 없는 남의 나라에 이어붙이는 것보다 게이샤에서 원류를 찾는게 차라리 더 합리적일 것이다. 과거 조선이 일본을 지배하며 영향을 끼친 것도 아닌데 일본의 위안부 제도를 왜 일본 내부가 아닌 조선에서 기원을 찾는지 의문이다. 애초에 위안부 자체가 일본군만의 독특한 '성노예 시스템'이었다. [25] 오히려 유사성을 따지면 일본의 요시와라 유곽의 요타카나 가라유키상이 더 일본군 위안부에 가깝고 기생은 게이샤와 더 유사성이 많다.
  • 사실 이영훈은 이 건이 아니라 세종 자체를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관련 논쟁과 반박은 세종(조선)/비판과 반론 문서를 참조.
  •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또한 세종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26]
  • 그런데 조선의 기생이 일본군 위안부의 뿌리가 되었다는 주장은 이영훈이 처음 한 게 아니라 이미 일본의 극우 지식인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가 먼저 했으며, 조선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기생집으로 팔려 '위안부'가 되었다는 주장[27]도 이영훈이 처음 주장한게 아니라 이미 일본의 대표적인 우파 논객인 니시오카 스토무(西岡力)가 먼저 하였다. # 그런 주장을 이영훈이 그걸 그대로 베껴서 되풀이 한 것이다. 정작 니시오카 스토무는 조선 여성들이 기생집에 팔려 위안부가 되었다는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하였다. #(링크 삭제됨)
  • 그나마 한국사에서 위안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건 독재정권 시절의 한국군 위안부이다. 물론 이영훈은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

6. 이중적인 독재 옹호

2006년에 이영훈ㆍ안병직ㆍ유영익 등 뉴라이트 성향의 학자들[29]이 참가한 《교과서포럼》[30]에서 역시 4.19혁명 격하 및 5.16을 격상했다는 논란이 일어 회장에 기습한 4.19 기념단체 및 유족회 회원들에게 폭행당한 적이 있다. #

사실 이승만과 박정희의 행적은 조선시대의 인권침해보다 더 심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조선시대는 전근대의 한계라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 이 둘은 전쟁 중에 자국민에 대한 민간인 학살 사건, 무능과 부패, 반대파에 대한 숙청과 고문, 처형, 여성 편력 및 미군에 대한 성상납 등을 보면 시대의 변화를 감안하지 않아도 조선시대에 이뤄졌던 인권침해보다 더 심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박정희는 4.19 혁명을 의거로 격하시키는 짓을 저질렀다.[31] 게다가 이승만은 아예 수하르토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자국민을 학살한 반공권 독재자다.

또한 이영훈을 비롯한 뉴라이트 인사들은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 운운하면서[32] 극단적으로 숭상한 나머지 아예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부정한다.[33] 그러나 정작 이승만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박정희조차 1962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인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이승만을 가리켜 여러 차례 독재자라고 날선 비판을 퍼부었다 박정희도 비판했다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 심지어 박정희는 소설가 이병주,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와 가진 자리에서 "그(이승만)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연 없소. 12년이나 해 먹었으면 그만이지 四選(사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라는 말도 남겼다[34].

아울러 이영훈을 비롯한 뉴라이트 인사들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뻘짓만 한 테러리스트인 것마냥 폄하하면서 이승만의 독립운동만큼은 예외적으로 호평하며 진정한 독립운동은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 하나밖에 없고 이승만 한 명만의 공헌으로 조선이 독립된 것처럼 찬양하고 있으나,[35][36] 박정희는 이병주, 황용주와 만났을 때 "미국에서 교포들 모아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라고 아예 이승만의 독립운동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도 했다 #.

7. 조정래 아리랑 비난

2007년에 이영훈이 뉴라이트 계간지 시대정신에서 조정래의 ' 아리랑'(이하 소설로 칭함)을 광기로 가득 찬 역사 왜곡 소설이라며 비난 #했고 조정래는 이영훈을 "이영훈 교수는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진실만을 말한다. 난 근거 없는 건 절대 쓰지 않는다” # 라고 반박했다. 이영훈은 학술 논문도 아니고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된 역사 소설[37] 반일 종족주의 출간 시점까지 붙잡고 많은 비판을 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2007년에 이영훈이 비판한 내용은 이렇다. 기고문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소설에서는 토지조사사업 당시 농민이 지주총대에게 땅을 빼앗겨 분을 이기지 못하고 지주총대를 폭행하자 경찰에게 토지조사사업 방해 명목으로 즉결처형을 당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그런데 토지조사사업 항목에도 나오지만 당시 지주총대는 땅을 소유하지 않은 자도 명단에 올라와 있는 등 경제적 실권이 없었고 또 종전부터 소유권 조사를 철저히 한 탓에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땅을 남이 함부로 빼앗을 수도 없었다. 더불어 직결처분권이 있는 헌병 경찰이라 할지라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존재 자체도 유명무실한 지주총대를 위해 농민을 즉결 처형할리도 없을 뿐더러 그런 기록도 없고, 소설에서 경찰이 언급하는 법률조차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로 소설은 지시마 열도에서 이뤄진 비행장 공사가 끝난 후인 1944년 초여름에 4천 명가량의 조선인 노무자가 일본군에게 기관총으로 학살되었다고 묘사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 일대의 공사는 1944년 말까지 진행되었고, 다른 지역의 공사도 있었으며, 그나마 있는 노동자들도 전염병 등으로 죽어나가(일본인 포함) 노동력이 부족했던 상황이므로 학살이 벌어질 리도 없고 실제로 일어난 적도 없었다.

셋째로 소설에서는 러일전쟁 이후부터 이미 풍요로운 곡창지였던 서해안과 김제 평야의 토지를 일본인들이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 곡창지대를 탐낸 이완용이 1898년부터 직권을 이용해 사들이는 모습이 보인다. 문제는 실제로 이 지역은 광범위한 평야의 논에 물을 공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3.1운동이 일던 1919년 때까지 수확량이 거의 없는 황무지나 다름없었고, 1925년 동진수리조합이 개설되고 난 후에야 수확량이 늘어났다. 즉, 그전까지 황무지로 수십년간 방치된 지역을 이완용이 탐낼 리도 없을뿐더러 그 지역에 거주한 일본인 지주들의 위세 역시 소설에서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약하다. 일본인 지주들은 1920년대가 지나고 나서야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소설속에서는 방조제와 저수지의 위치조차 실제 김제 일대의 지형과 지리와 무관하게 묘사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7.1. 허수열의 반박

허수열은 이영훈의 아리랑 비판 3개 항목 중 첫번째 항목에 대해서는 허수열 본인이 토지와 쌀 직접 수탈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고 링크 , 지시마 학살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한 적이 없으며, 세번째 항목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였다.

가령 이영훈이 기고문2에서 일본 육군이 발행한 <옥구도엽>이라는 지도의 연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릇되게 표시하였고, 이영훈은 해당 글에서 벽골제가 바닷물을 막기 위한 방조제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벽골제가 저수지 및 수리시설이었음을 입증하는 연구[38]들이 있고, 특히 허수열은 이점을 들어 강력히 비판한다.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허수열 "이영훈 경제통계 모두 엉터리",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76화(1:19:55 초경부터)에서도 이에 관하여 인터뷰를 하였다. 허수열 교수의 이영훈 이론 반박 내용들 허수열은 이영훈의 주장처럼 일본인들이 개간을 열심히 해서 조선의 토지 면적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기존에 있던 토지들을 세금 많이 걷으려 측량하다보니 조선 왕조 시대에 토지 대장에 넣지 않았던 토지들이 통계에 들어간 것 뿐이라고 설명한다. 아울러 허수열 교수의 발언에 의하면 이영훈의 주장도 사실 무슨 사료나 문헌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일본인들이 개간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일 뿐이라고 한다. 심지어 이영훈은 뉴라이트 인사들이 만드는 잡지인 시대정신에 1921년에 만들어진 지도를 엉뚱하게 1917년에 만들어진 지도라고 잘못 주장한 일도 있었다.

8. 화랑세기 위서론 부정

2003년 화랑세기에 대해서, 화랑세기속에서 묘사되는 삼국시대의 노비가 조선시대의 노비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며, 이러한 것은 필사자가 위서로 꾸며낼 수 없다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 # 그러나 학계에서 화랑세기 위서론이 강세를 띄고 있기 때문에 빈축을 샀다. # #[39] 사실 화랑세기를 옹호하는 논지를 보면 신라인들이 자신들을 신의 나라로 여기며 문란한 생활을 했으며 신라의 노비제가 조선의 노비제보다 인도적이었다는 본인의 근거없는 추측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신라가 조선보다 선진적이고 자주적인 사회라는 가정이 꼭 필요한지 의문이다.

9. MBC 기자 폭행 방송 장비 파손

파일:이영훈 폭행.....jpg



사건의 원본 영상. 27분 8초부터 보면 된다. 폭행 장면은 29분 28초부터다.

이영훈이 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에 대해 친일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2019년 8월 4일 MBC 스트레이트 제작진이 이영훈의 입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갔다. 그러자 이영훈은 인터뷰를 거부하면서 마이크를 파손하고 취재기자의 얼굴을 가격하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이영훈은 20분 동안이나 기자를 상대로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이후 이영훈은 취재기자가 자신의 인격권을 침해했다며 해당 촬영 영상의 방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기했다. 이에 대해 MBC 기자회는 인격권을 침해한 건 오히려 이 교수라면서 해당 가처분신청은 범죄를 은폐하려는 속셈이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 그리고 법원은 이영훈의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였다. #

아래의 반박 문단에서 나온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상대가 폭력을 휘두른 것도 아닌 상황에서 경찰조차 부르지 않고 폭력을 휘두른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대응이며 당연히 법적으로도 위법한 행위이다. 자칫하면 이게 해당 기자가 폭행을 선제로 한게 아닌이상 정당방위가 아닌 모욕죄와 폭행죄 및 기물파손 혐의로 구속될 수 있는 행위가 되며, 무엇보다 저 상황은 MBC측에서 이전부터 수 차례씩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계속 거부하고 묵살한 결과로 나온 것이라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40]

이 사건에 대해 이영훈과 같은 동창이기도 한 허수열 교수는[41] 자신도 뉴스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면서, 이영훈이 기자를 폭행한 진짜 이유는 이영훈을 비롯한 뉴라이트 인사들이 MBC 쪽을 굉장히 싫어해서 한 일이라고 말했다. #

9.1. 비판에 대한 이영훈의 반론

이에 대해서 이영훈은 MBC가 사전에 연락도 없이 자택 근처에 잠입해있다가 불쑥 나타나 인터뷰를 강요했고, 20여 차례 인터뷰를 거부했고, 인터뷰 및 토론을 원한다면 정식으로 신청해서 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50m를 쫓아오며 마이크를 강제로 입에 갖다 대는 등 인권을 침해했다고 반박했다. #1, #2, #3[42]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 버즈 올드린이 그를 쫒아다니면서 달착륙이 거짓임을 자백하라고 주장하던 아폴로 계획 음모론자 바트 시브렐을 주먹으로 폭행했는데도 법원에서는 이를 올드린의 정당방위로 인정된 점을 들어서 개인의 방어권이 폭넓게 인정되는 미국이었다면 처벌받는 쪽은 MBC 기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 주먹질은 올드린이 무시하려고 피했지만 시브렐이 코앞까지 다가와 겁쟁이, 거짓말쟁이, 도둑놈이라고 욕설을 퍼붓고 난 다음에 행해진 것이어서 위 사례와 똑같다고 볼 수는 없다. 심지어 욕설을 한 쪽은 기자가 아니라 이영훈 본인이었고[43], 그것도 무려 20분 동안이나 계속 했다.

10. 외증조부 사칭

이영훈은 본인의 행보들로 인해 줄곧 친일/친일파 논란의 대상이였는데 이에 대해 이영훈 자신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반발하며 자신을 변론해 왔다. 그런데 논란이 워낙 커지면서 이게 사실인지 확인이 들어갔으며 이후 이영훈이 일방적으로 독립운동가 후손을 사칭한 것이라는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이영훈의 외외증종조부[44] 차이석(車利錫)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출처 그런데 이영훈은 차이석 선생이 자신의 외증조부이며 어릴적부터 독립운동가의 자손임을 자랑스러워 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차이석의 외아들 차영조는 언론에 나와 차이석이 이영훈의 외증조부가 아니라고 밝혔다. 출처 정확히는 글 첫머리에 나오듯 '외외증종조부'로, 차이석의 큰형님의 딸의 딸의 아들이며 차이석 - 이영훈 간의 관계는 촌수로 따지면 외가 쪽으로 5촌이 된다.[45] 그리고 차영조는 MBC 뉴스데스크와의 인터뷰에서 이영훈이 일제 침략자의 변호인 역할을 하면서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이름을 이용해 먹었다며, 다시는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라며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또한 차이석 선생 집안의 족보에도 이영훈의 이름은 없으며, 차영조는 집안 제사나 성묘에 이영훈이 단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자신을 가리켜 차이석 선생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굉장히 불쾌해했다.

11. 서울대 명예 교수 사칭 논란

이영훈을 스스로를 서울대 명예교수라 칭하고 다니지만, 서울대 명예교수 추대를 받은 적이 없다. 서울대 명예교수 규정은 ‘본교에서 전임교원으로 15년 이상 재직한 사람’을 추대 자격으로 두고 있는데 이영훈은 재직기간 미달로 애초에 추대될 수 있는 자격자체가 없었다. 즉, 전직 서울대 교수이지 명예교수는 아니다. #

살펴보면 이영훈은 1984년 한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임용되어서,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거쳐서 2017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정년 퇴임을 하기까지 약 33년 간 교수로 활동했다. 그런데 2002년 6월에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부임하여 2017년 2월에 정년 퇴임하였다. 따라서 재직연한으로 비추어볼 때, 15년에 조금 미치지 못한다.

이에 대해 그래도 이영훈도 서울대 교수였는데 명예교수 사칭 논란이 뭐가 문제인가? 라고 하겠지만 공식적으로 교수로 통계가 잡히지 않을 뿐이지, 사실상 정교수의 연장선이며 그만큼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제대로 따져보면 전직 교수와 명예 교수는 사실 적잖은 차이가 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영훈 본인부터가 애초부터 전직 교수였기에 이를 가장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해 명예 교수라고 하는 것은 논란이 안생길 수가 없다.

실제로 MBC에서 이에 대해 "이영훈이 활동중인 이승만 학당 홈페이지에 이영훈은 명예 교수라고 소개되어 있고"[46], 언론 인터뷰 등에서 서울대 명예 교수로 소개되어 있다는 점을 보도하였는데 실제로 MBC에서 보도된 인터뷰 기사에서도 이영훈은 서울대 명예교수로 되어 있었다. 이영훈…"애초에 '서울대 명예교수' 아니었다" (2019.08.12/뉴스데스크/MBC)

11.1. 비판에 대한 이영훈의 반론

  • 하지만 남이 자신을 ‘명예교수’라고 호칭하면 적극적으로 “나는 명예교수가 아니다”라고 바로 잡아주었다고 한다. 이영훈 교수를 ‘서울대 명예교수’라고 표기한 이승만학당 측은 흔히 정년퇴임한 노교수를 ‘명예교수’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 부분을 놓쳐버렸다고 해명했다. #

12.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여성혐오설 주장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거짓말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여성 대통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여성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하하는 한국인의 집단 심성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습니다.
이영훈 외,『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미래사, 2019, 13쪽
얼마 전 광화문에 나갔더니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색 천막이 아직도 쳐 있는 가운데 "왜 안 구했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벌써 몇년입니까. 5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진상은 다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왜 안 구했나"라니요. 아직도 그 시간에 여성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애인과 밀회를 하거나[47] 마약을 즐겼다는 겁니까. 그런데 아무도 그 거짓말의 천막에 항의하지 않습니다.
이영훈 외,『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미래사, 2019, 13쪽

자세한 내용은 반일 종족주의 문서 참조.

13. 제보학생은 인생의 패배자 전락 발언

(MBC)"류석춘 제보 학생은 인생 패배자"…이영훈 '가세'

위안부 매춘 망언 발언들로 논란이 된 류석춘 교수에 대해 학생 성추행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일어나자 류석춘 교수를 옹호하며 "공공연하게 행한 발언에 그와 같은 요소가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과연 성희롱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 홍위병들이 대학으로 들어와서 학교로 들어와서 그들의 교수에게 거짓의 고깔을 씌우고…" "그 사람을 파멸시키기 위해 이미 그 행위(녹음)를 한 학생의 영혼은 파괴됐으며 인생의 패배자로 전락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발언으로 해당 논란을 제보한 학생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었다.

그런데 정작 이영훈과 동창이었던 허수열 교수는 "이영훈은 학생운동을 하다 군대에 끌려간 운동권으로 나를 '의식화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면서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들이 달라졌다", "1970~80년대 고도성장의 부작용이 드러나던 시기에 중국 사회주의가 평등사회 모델로 많이 언급됐다. 그러나 1991년 사회주의 환상이 무너지자 운동권이 대거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옮겨갔다. 이것이 '뉴라이트'의 탄생이다. 극좌에서 중간까지만 갔으면 좋았는데, 극우로 간 것이 문제였다."라고 지적했다(...) # 허수열 교수의 발언대로라면 이영훈 본인이야말로 자신이 지금 그토록 혐오하고 저주하는 홍위병과 비슷한 극좌의 위치에 있었는데, 그런 과거 이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렇게 강경한 극우로 돌변한 것이다.

14. 일제의 호적제가 신분을 해방시켰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영훈은 2009년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1909년 일본 정부가 한국 통감부가 설치되며 호적 제도를 도입하고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백정을 비롯한 천민 계층에도 성씨를 가지는 것을 허용해서 신분 차별을 철폐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일본 제국을 미화하는데 자주 쓰인다. # 그런데 일제의 호적제 개편은 1923년의 일이며, 그것마저도 단순히 대한제국이 이미 진행했던 민적법을 대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하지만 갑오개혁 당시 이미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되고 그 이전에 노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차치하더라도 조선이 노비와 백정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노비 또한 하늘이 낸 백성이니 함부로 구타하거나 죽이지 않도록 했으며[48], 이영훈이 그토록 비난해대는 세종 또한 관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는 등 노비들을 어찌됐던 사람으로 생각하고 어느 정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양반층에서도 덕치의 관점에서 노비를 좋게 대우하는 것을 미덕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백정 또한 마찬가지였다.[49] 다만 천민들이 사회적 약자 층에 속했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기 힘들었고 당시 사람들의 차별 의식 때문에 인권을 존중받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전근대 시절 다른 국가는 물론이고 21세기 현대 사회에서도 적지 않게 일어난다.[50]

또한 조선시대 노비들이 성씨를 가지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경우 평민들마저도 성씨를 가지지 못했으며 각각 갑오개혁과 메이지 유신 이후 성씨를 가지는 정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뭐가 더 낫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리고 노비가 성씨를 가지는 것이 허용이 안 됐다는 주장 자체가 당시 호적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틀린 주장이다. 단성호적을 분석한 권내현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노비들 중 성과 본관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만 호적에 성과 본관 중 하나를 가지거나 둘 다 가진 노비들도 많았다고 한다. 권내현 교수는 단성현 도산면 호적의 분석 결과를 예시로 들었는데 1678년 단성현 도산면 호적에 등록된 노비호 128호 중 성과 본관 둘 다 없는 호는 35호로 전체 노비호의 30% 정도를 차지했으며 성과 본관을 모두 가진 호는 전체 노비호 중 약 5%, 나머지 호들은 성과 본관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즉 성과 본을 가지지 못한 호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성씨를 가지는 것이 허용이 안 됐던 것은 아닌 셈이다. 1717년 단성현 도산면의 호적을 보면 노비호 중 성과 본관 둘 다 가진 호의 비율이 더 늘어나 전체 노비호 중 18%였다. 그리고 이들이 가진 성과 본관을 분석해보면 이들이 무조건 주인의 성을 따라한 것도 아니었다. 도산면의 호적에서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나는 성씨는 김해 김씨로 1717년 기준으로 총 46호의 주호가 있었는데 도산면의 호적에서 김해 김씨를 가진 것으로 확인되는 양반이나 중인 주호는 아예 없었으며 김해 김씨를 가진 주호들은 대부분 기존에 평민이였던 주호들이거나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 평민 주호들이였다. 아직 노비이면서 김해 김씨를 가진 주호는 9호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조선시대에 천민 계층이 성씨를 가지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게다가 호적에 올린 것 = 신분 해방 성취라는 등식이 과연 설립되는 것부터가 의문이다. 만약 호적제를 개편하는 것만으로 노비 해방을 시킬 수 있다면 조선왕실이 진작에 끝냈을 것이다. 조선 왕실은 세금과 군역을 위해서라도 천민을 될 수 있는 한 줄이려 했고 이영훈의 주장대로라면 법적인 신분제를 철폐했던 갑오 개혁 이후 호패법 등 과거 호적제를 개편하는 것만으로도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비의 발생 원인 중 하나인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민이 스스로 노비화하는 현상이 호적제 개편으로 해결되는지는 의문이다.

결과적으로 일제 강점기 당시에 친일 양반들을 조선귀족으로 임명해서 특권 계층으로 만들었다는 점, 형평 운동 등 신분 해방 운동이 존재해 왔다는 점 #[51] 1975년까지 일본에서 부라쿠민에 대한 반공식적인 차별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과연 호적에 올린 것 => 신분이 해방되었다는 결론이 근거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의 내지인(일본인)들 사이에서 조차 인신매매의 대상이 된 노예들이 존재했다.

15. 대법원 판결 왜곡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판결과 관련해선 "미지급 임금을 달라고 주장한다면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원고 측이) 일본 정부가 아니라 한국 정부를 제소해야 했다"며 대법원 판결을 흑역사라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은 미지급 임금이 아닌 위자료라고 밝혔다.

대법원의 판결문에 대해서 원고의 주장이 상당 부분 거짓말이라고 판단했다. 원고들은 '급료를 받은 적이 없다', '일본 기업에 속았다'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모집 광고에 응모해 임금을 받았다는 것이 판명됐다"고 주장했는데 대법원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매달 2~3엔 정도의 용돈을 받았을 뿐 회사 측이 피해자의 동의를 얻지 않고 대부분의 임금을 계좌에 입금했다. 통장과 도장은 기숙사 사감이 보관했으며, 피해자의 요구에도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일보에서 이영훈에 대해 보도하면서 이영훈 주장뒤에 대법원 판결의 실제 내용을 붙여서 비교하며 지적했다. ##

16. 보수 정당에 대한 왜곡

한국의 보수 정당이나 한일 전문가들에 대해 정권을 비판하면서도 문제가 일본이 되면 침묵한다"고 주장하며 "공개된 장소에서는 국민 감정 고려와 낙선에 대한 두려움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며 "야당의 가장 큰 한계"라고 비난했다. #

하지만 이는 사실왜곡이다. 한국의 보수 정당과 정치인은 아무말도 안하기는 커녕 이미 줄곧 입장을 표명하며 반박하였다. 따져보면 한일관계 악화에 대해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일본 정부에 대해서도 똑같이 비판적이다.
“아베 정부의 잘못된 결정을 엄중히 규탄하며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아베 정부의 이번 결정은 한일 관계를 과거로 퇴행시키는 명백히 잘못된 결정”
“양국 경제에 모두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은 물론 글로벌 경제에도 상당한 손상을 입힐 것"
“책을 읽어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며 “왜 이 책을 보수 유튜버가 띄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특히 “토지조사 사업, 쇠말뚝, 위안부 문제 등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고 오히려 일본의 식민사관 주장과 맞아 떨어지는 것 아닌가”라며 “보수우파의 기본 생각에도 어긋나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 반일운동은 문재인 정권이 초래한 상황으로 동의하기 어렵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제국의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홍 전 대표는 “이러니 보수·우파들이 좌파들의 친일 프레임에 걸려드는 것이라며 “세상이 흉흉해지니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고 적었다.
“책을 읽는 동안 심한 두통을 느꼈다”며 “책은 거짓말 국민이 모여, 온통 거짓으로 살아가는 나라, 대한민국으로 시작한다. 저자가 뱉은 침이 제 얼굴에 튄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고 썼다. 이어 “이 책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자연스레 가질 수 있는 반일 감정이 이 나라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며 국민을 ‘우민’(愚民·어리석은 백성)으로 여기고 있다”며 “우민이 된 국민으로 격한 모욕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또 “일제강점기 시대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러려니 한다”면서도 “하지만 독도 영유권 주장이 한국사회가 진보하지 못하는 이유고, 강제징용은 허구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자해행위“
보수 야당에서도 입을 다물기는 커녕 오히려 비판적이였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통한 한국기업들 목조르기, 독도 영유권 도발은 보수에서도 일본의 도발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한 사안들이다.[52] 당장 보수 야당인 자유한국당 의원들부터 일본의 수출규제 중단을 촉구하는 현수막을 각자의 지역구에 게시했다. #

때문에 홍준표 의원은 반일종족주의에 대해 비판적 수용없이 일방적으로 추천해대는 우파 유튜버들의 작태를 지적하며 이러니 친일몰이가 되는 것[53]이라고 거칠게 조소했고, 장제원은 일본측에서 도발하는 독도 영유권 주장을 지적하며 비판했다.

17. 식민지 배상

이영훈은 2019년 7월 17일 서울 광화문 아펠가모 연회장에서 열린 반일 종족주의의 출간 기념 북 콘서트에서 최근 한일 갈등의 원인이 된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해서는 "제국주의 역사상 식민 피해 배상은 제기돼본 적도 없고, 실제 지급된 바도 없다"라고 발언했다. #

그러나 위 발언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우선 2013년 6월 6일 영국 고등판무관이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한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1950년대 식민통치 가혹 행위에 대한 케냐 정부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공개 사과와 배상을 발표하였다. 영국 정부는 이날 이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피해자 5,200여명에게 2,150만 달러를 배상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피해자 개인에게 약 4,000달러를 받게 되는 금액이다. 영국 정부는 케냐변호사협회에도 925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

또한 2011년 네덜란드 법원은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 네덜란드 정부가 생존자 1명과 유가족 8명에게 총 20만 유로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인도네시아는 1602년 이후 300여 년간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를 받다가 1942~1945년 일본에 점령됐다. 네덜란드는 일본 패전 이후 인도네시아를 다시 점령하면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네덜란드 군은 1947년 독립운동에 관여됐다는 이유로 라와가데 마을에서 인도네시아인 약 430명을 즉결 처형했다. 이후 네덜란드 정부가 1968년과 1995년 즉결 처형은 인정하면서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자, 2008년 생존자와 유족들이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2011년의 판결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첫 번째 판결이며, 민간인 학살과 같은 ‘인도에 반하는 범죄’에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국제법의 원칙을 적용한 판례가 적용 되어 네덜란드 정부는 항소하지 않고 배상금을 지급했으며, 2013년 9월에는 64년 만에 공식 사죄를 했다. #

아울러 남베트남 정부는 2차 대전 와중에 일본한테 1941년부터 1945년까지 4년 동안 국토가 점령당해 있던 상태에서 입은 피해를 해방이 된 이후인 1951년 일본 정부한테 정식으로 배상을 요청을 하였다. 이 요청은 8년 동안 남베트남 정부와 일본 정부가 끈질기게 협상을 한 결과, 1959년 배상 결정이 나서 일본 정부는 1965년까지 남베트남 정부에 약 3,900만 달러를 지급했다. #, #

그리고 일본은 남베트남에 했던 것처럼 2차 대전 때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던 필리핀과 미얀마와 인도네시아에 각각 8억 달러와 2억 달러와 2억 2,300만 달러를 배상했다. #, #

구글 검색 1분이면 알 수 있는 간단한 사실들에 대해서 저렇게 "전혀 없었다."라고 완전히 틀린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은 이영훈 본인이 식민피해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하고 성의가 없이 대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다. 심지어 저 사례들은 이영훈이 책을 내기 6년 전에 이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족으로 옛 식민지 국가들에 대해 제국주의 열강들이 사과나 배상을 전혀 안 했다는 주장은 과거 일본의 2ch 같은 사이트에서 일본 극우 네티즌들이 자주 들먹이며 한국을 조롱했던 발언이 그 뿌리인데, "제국주의 역사상 식민 피해 배상은 제기돼본 적도 없고, 실제 지급된 바도 없다"라는 발언을 한 걸 보면 그 발언의 뿌리가 되는 자료의 출처도 의심스러워진다[54].

18. 북한의 경제 발전이 일제 유산 때문?

이영훈은 자신의 책인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북한 초기의 경제 발전을 두고 이렇게 주장했다.

"그 상당 부분이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고 합니다만, 드러난 건물이나 저장 시설이야 그러했지, 분리 가능한 핵심 설비를 폭격의 대상으로 방치해 둘 정도로 북한의 지도부가 어리석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북한이 196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앞섰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선전하는 대로 사회주의 생산력의 덕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북한이 일제로부터 받은 물적 유산이 풍부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대한민국 이야기>, 171~172쪽) #

그러나 저 문장에서 "북한의 지도부가 어리석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은 그저 이영훈의 생각일 뿐이지, 그 생각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이영훈 본인이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가리켜 근거없는 허구라며 비판했던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이영훈은 북한의 체제가 일제 전시 체제와도 연관이 있다라고 주장하는데[55], 이러면 일제강점기의 근대화는 적어도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에겐 전혀 의미가 없는 셈이다. 게다가 2022년 UN 통계 기준 그 일제 유산이 많이 남아있다는 북한의 1인당 GDP는 590달러로 소말리아(590달러)보다도 낮다.

19. 자본주의 맹아론이 한국 정체성 부정?

이 같은 맹아론의 정치학에 따르면, 1948년에 건국한 대한민국은 조선봉건체제의 지배계급과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예속 자본가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민족분단을 무릅쓰면서 세운 반민족적·반(半)봉건적 국가체제이며,대한민국은 통일과 함께 해체되어야 할 잠정적인 위선(僞善)의 체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영훈은 자본주의 맹아론이 한국을 부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음 주장을 잘 읽어보자.
물질적으로 보더라도 당시 일본은 이렇다할 도로나 건물, 위생시설 등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일본이 변하게 된 것은 전국적으로 서구문명을 도입한 뒤부터였다. 한국도 만일 한국이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도록 허용했다면 한국은 일본이 이룩한 것을 당연히 이루어냈을 것이다.
이승만 뉴욕타임즈 사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명백히 우수하다', 1919. 5. 18. 출처: 이승만학당[56]
이영훈의 주장대로라면 이승만 대통령 또한 한국을 부정한 인물이 된다.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이든 자본주의 맹아론이든 결국 마르크스적 역사발전론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20. 중국 주적 논란

이영훈이 2021년 3월 백년동안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인 <호수는 어디에>에는 "우리나라는 언젠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걸고 중국과 일대 대결을 벌일 것이 자명한데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후의 한 명까지 그 일전에 매진할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이 언급된다. #[57]

이는 객관적 학문을 하는 학자의 태도라고 도저히 볼 수 없으며, 나치 독일의 선전부 장관인 괴벨스 총력전을 운운하며 독일 국민들한테 소년에서 노인까지 모두 전쟁터로 나가 싸우다 죽어야 한다고 선동했던 태도와 비슷하다. 이영훈의 사고관이 얼마나 뒤틀린 극우 우경화로 치달았는지 알 수 있는 자료다.

또한 이것은 '언론이 왜곡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는 것이 이영훈 본인이 직접 쓴 책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영훈의 저런 대중국관은 최근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꽤나 오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2019년 8월 12일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클리앙에는 2006년 자신이 이영훈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 그 글에 의하면 "우리 역사를 한번 잘 살펴보라. 고난과 굴종의 역사였어. 나는 정말이지 우리 역사가 때론 부끄럽다. 중국을 보라. 우리는 수천년에 걸쳐 중국에 굴종해야 했고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살았어. 중국의 힘이 더 세지면 우리를 그대로 놔둘 것 같은가? 나는 중국을 믿지 않아. 그건 우리 역사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 중국은 자신보다 잘 사는 한국을 그냥 놔둘 리 없어."라는 말을 이영훈 본인이 직접 했다고 한다.[58]

정작 중국과의 수교를 했던 정부가 노태우이며 박근혜 대통령도 중국과의 무역과 외교에 노력을 기울이다 못해 전승절 열병식 참석[59]하고 이명박 대통령도 쓰촨성 대지진에 방문하여 중국인을 위문했으며 # 윤석열 정부에서도 중국 관광객들을 통해 경기 부양을 구상하고 있는걸 보면 보수 우익의 정책에 대해서도 무지한 셈이다.

게다가 본인의 주 종목이 식민지 근대화론 설파인데, 중국의 티베트와 위구르 지배에 대해 통계적으로 일제강점기 조선보다 큰 발전을 보였음에도[60] 이에 대한 고찰은 전혀 없이 중국인에 대한 투쟁을 설파하는 모습은 본인이 주장하는 한국인의 반일종족주의보다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영훈은 중국과의 전면적 대결을 외치는 극우 반공주의에 완전히 매몰되어 형식적인 객관성마저 잃어버린 것이다.[61]

사실 해당 책은 한국이 중국문명을 숭상하고 영향을 받은 한국의 지명들을 극도로 비난하며 그것 때문에 중국과 대결하지 못할 거라는 논지의 주장인데 정작 중국문명의 영향을 받은 모습들은 일본에서도 존재하며 그러한 영향과는 별개로 일본이 중국과 대결을 피한 적은 없다.[62] 즉 해당 논지 자체가 혐중을 가장한 혐한을 표하기 위한 억지 논리에 불과하다.[63]

21. 한국인의 종교성 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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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주장에 대해 한국인이 물질주의가 심하고 조선시대까지 신과 사후세계에 관심이 없었다고 까는데[64], 현재 일본은 한국보다 사후세계의 관심이 적고 무신론자의 비율은 약간 낮지만 사실상 큰 차이가 없고 종교성이 낮은 모습을 보인다. #[65] 또한 현재 전 세계에서 선진국으로 평가받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도 국민들이 신이나 종교 및 사후세계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무종교사회에 가까우며 하느님과 내세를 믿지 않는 레이프는 삶을 즐기고, 특히 자기 일중에서 의미를 찾아낼 줄 안다., 역시 선진국으로 평가받고 있는 독일 역시 교회에 사람들이 하도 안 와서 교회가 아예 실내 암벽 등반 시설로 탈바꿈하고 있는 상황이다 #. 오로지 한국에 대한 혐오에만 집착하지 해외는 물론이고 한국에 대해서도 정확하지도 않은 폐쇄적인 정보취합, 자급자족인 사고 체계인 셈.

[1] 이것은 이영훈이 민족이나 종족의 개념을 몰라서가 아니라, 한국의 민족주의 그 자체를 극단적으로 혐오하다 보니 아예 한국의 민족주의는 민족주의라고 인정하지도 않아서 종족주의라고 폄하한다고 봐야 한다. [2] 당장 중국 역사만 봐도 선비족, 몽골족, 만주족 등 각종 '족'들간 왕조싸움의 역사며 이런 구분은 현대에 생긴 개념이 아니라 옛날부터 존재하던 개념이다. [3] 여기에 대해 김기협은 "1906년 핀란드의 여성 참정권 도입 전까지는 유럽에 민족이란 것이 없었단 말인가? 프랑스에는 1944년 여성 참정권을 시행하고서야 민족이 생겼단 말인가?"라고 비판했다. # [4] 하지만 정작 기독교 교리에서도 사후세계인 천국에서 차별이 있음을 보여준다. # [5] 이 말부터가 사실이 아니다. 당장 헬조선이라는 말도 조선왕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했으며, 한국 교과서도 조선 시대 및 구한말의 혼란상이나 지도층의 악행 같은 건 나타난다. [6] 그렇다면 일본 제국주의는 도덕적이고 비폭력적이었나?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실제로 조선 말엽과 일제강점기를 모두 살아본 친일파 윤치호조차 자기가 쓴 일기에서 일제가 조선 왕조보다 더 잔혹한 지배자였다고 서술했다. [7] 그러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도대체 선진국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2015년부터 한국의 1인당 GDP는 이탈리아랑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며, 2020~2021년 당시 대한민국의 GDP는 브라질도 제친 세계 10위였고(심지어 2020년 IMF 통계 기준으로는 세계 9위였다), 심지어 전 세계 국가들이 한 나라의 경제력 순위를 측정하는 새로운 지표로 사용하고 있는 1인당 구매력 지수인 PPP에서 대한민국은 이미 2017년부터 일본을 앞질렀다! 그리고 2024년에는 1인당 GDP에서 일본을 앞질렀다. 심지어 2020년에 시작되어 2022년까지 전 세계를 휩쓴 신종 코로나 사태에서도 미국 유럽 일본 같은 기존의 선진국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허둥대어 수천만 명의 감염자와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냈던 것에 반해 대한민국은 (후반에 빛이 완전히 바랬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아도) 그들보다 훨씬 먼저 코로나 방역을 안전하게 마쳐서 오히려 미국 국회에서 한국의 조기 코로나 방역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으며 #, 심지어 이탈리아는 한국 정부에 코로나 방역에 대해 도와달라는 요청까지 하였다. # 아울러 오스트리아 유력 일간지 비너 차이퉁(Wiener Zeitung)은 29일자(현지시간) 지면에 게재한 '한국을 배우자'라는 제목의 사설까지 실었다. # [8] 정작 대한민국은 1999년 G20이 창설되었을 때부터 회원국이었고 한국은 꽤 오래전 부터 선진국이었습니다., 한국의 OECD 가입은 1996년인데, 그 때 이미 세계 GDP 11위였다. 지난 40년간 한국의 GDP 순위 변화 아니, 이미 한국은 1991년부터 GDP 순위 15위권 안에 안착했고, 1994년 경제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들어섰으며, 1997년부터 IMF로부터 선진국으로 분류된 나라였다. GDP 순위와 상위권 국가들의 면면을 볼 때 한국이 1996년까지 OECD 가입을 안하고 있었던 쪽이 더 이상했던 것이다. 이영훈이 경제학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영훈이 일본에게 불핑요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한국의 선진국 진입 시기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선진국/대한민국 문서 참조. [9] 3.1운동 기간에 일본군이 벌인 제암리 학살사건이나 간도 참변, 관동대지진 직후의 조선인 학살만 보더라도 이영훈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10] 때문에 현재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11] 우산국이 독도가 아니다. 동서의 위치가 바뀌어있기 때문이다라는 식이다. [12] 독도/역사 항목에서도 석도=독도 관련 내용이 있으니 참고 [13] 지금도 서양권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14] 당시 프랑스 [15]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16] 단적인 예로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신돌석 장군의 돌자의 한자표기도 이것이다. [17] 1990년대 이후 발호한 일본 자유주의사관의 시각이다. 공창제가 언중에 잘 쓰이지 않기에 와닿지 않을텐데, 위안부는 국가, 사회, 개인이 합심하여 만들어낸 창녀로 그 책임은 일본제국과 조선인사회, (그들의 시각에 따르면) 창녀 개인에게 있으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일본은 도의적, 계승국가 수준 이상의 책임은 없다는 주장이다. [18] 이들은 강제동원 여부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일본 정부에게 면죄부를 주는 셈이라며 양쪽 모두 강제동원/인신매매적 공창제로써 일본 정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보았다. [19] 이영훈은 스승인 안병직과 이에 대해 토론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도 잘 나온다. [20] 2020년 5월 무렵 정의연 사건이 터지면서 정의연의 전신인 정대협에 대한 비난이 다시금 부각받고 있는 상황이다. [21] 박찬승이 반일종족주의에 수록된 이우연의 견해를 동의한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정혜경을 비롯한 역사학자들이 이우연의 주장을 비판하는 이유는 징용이 로망이었냐가 아니라, 이우연이 징용 이전인 노무동원 시기까지는 자유의지에 의한 계약 관계였고 동원된 이들은 근무지에서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지금 강제동원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들의 입장은 아전인수격 곡해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22] 이영훈은 자신과 뉴라이트의 식민사관을 설파하는 것에 대한 항의를 과거 중국 전통 문화와 지식인들을 탄압했던 문화대혁명과 홍위병에 빗대 비난하는데, 이영훈과 그 추종자들이 강요하는 식민사관은 한국의 전통문화가 아닐 뿐더러 다른 지식인으로서도 비판을 상당히 받고 있다. 도리어 이영훈과 그 추종자들이 조선왕조를 악질 봉건질서로 낙인찍고 폄하하는 것이야말로 과거 자국의 전통문화를 봉건주의의 잔재로 싸잡아 폄하했던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에 가까운 입장이다. [23] 본래 의미는 높은 벼슬아치 밑에서 시키는대로 따르며 심부름함을 의미하나, 이후 성적향응을 요구함이 추가되었다. [24] 심지어 고을 수령의 수청 요구는 법전에 규정된 불법이었다. 당시 일본은 아버지가 딸을 매음굴에 파는 경우가 존재했고 위안부는 훨씬 더 심한 성노예 제도였다. [25] 차라리 기생제도는 에도 막부 당시 게이샤+오이란을 합친 제도로 봐야 하는 것이 맞다. 적어도 위안부처럼 평민 여성들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연산군이 비슷한 짓을 했지만 왕좌에서 쫓겨났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왕으로 취급받지도 못한다. [26] 과거 1980년대에 활동했던 좌파 운동권 인사들 중에서 마르크스 이념에 입각하여 조선 왕조 시대를 극단적으로 비하하던 시각 중 하나로 "세종이 백성들을 더 악랄하게 착취하기 위해서 한글을 만들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한 바 있다. 김일성이 '불완전했던' 한글을 완전하게 다듬었다는 개소리는 덤이고. [27] 참고로 이 일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진행되던 일이다. [28] 유교 질서가 자식을 매매하는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는 주장도 엄밀히 따지면 허술한데, 전근대에 조선보다 여성매춘과 인신매매가 발달했던 일본이 조선보다 유교를 더 열렬히 믿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동구권 붕괴후 서구로 유입된 동유럽 출신 매춘부들이 유교를 독실하게 믿던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울러 1970년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일본의 성매매도 무슨 유교적 질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29] # # [30] 초,중,고 국사교과서가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고 때문에 이를 교정하겠다는 부류들이 모여서 구성한 뉴라이트의 하부조직, 2005년에 구성되었다. # # [31] 그나마 박정희도 4.19를 '반독재 학생혁명'이라고 일컫고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도 '4.19 혁명'이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발견되는 것을 보면 당시 '4.19 혁명'이라는 표현은 오늘날로 치면 촛불혁명과 유사한 비공식적 표현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모양. [32] 당장 건국절 논란에 불을 붙인 장본인이 이영훈이다. [33] 대표적으로 '이승만 시기에는 야당도 활동 가능했으니 독재가 아니었다'가 있다. 참고로 로버트 무가베 시기 짐바브웨도 실질적인 야당이 있었던 데다가 무가베 VS 야당 구도의 대통령 선거는 꾸준히 치러졌지만, 그런 짐바브웨를 민주주의 체제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외에도 이승만이 부정한 방법으로 헌법을 뜯어고쳐가며 장기집권을 이어나간 것을 단순 '장기집권'이라 포장하는 것도 뉴라이트들의 주된 레퍼토리다. [34] 출처: 대통령들의 초상/ 이병주 지음/ 서당/ 1991년 9월 1일 출간 [35] 윤서인도 타 독립운동가들은 폄하하면서 이승만만큼은 '가장 열심히 산 독립운동가'라고 내로남불성 호평을 했다. [36] 이는 북한이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들을 뻘짓 취급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김일성 한 명의 공으로만 돌리는 북한과 소름끼칠 정도로 판박이다. [37] 그래서 정확성 면에서 한계는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래의 역사소설은 수많은 자료 조사, 특히 당시 사건의 생존자들로부터 작가가 직접 청취한 많은 인터뷰 등 귀중한 사료들을 기반으로 쓰여지다보니 역사를 탐구하는 데 있어 참고할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38] 김주성, 「벽골제의 기능」, 『백제문화』58, 2018. 정확히는 방조제로 지어졌다가 고려 후기부터 저수지가 되었다는 입장이다. 또한 이상훈, 『전략전술 한국사』, 푸른역사, 2014 에서도 백제 비류왕 시기인 4세기 초축 당시에는 방조제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해수면이 하락함에 따라 저수지로 용도가 바뀌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최근에는 발굴 조사 결과 통일신라 시대에 수축된 제방 아래 지층에서 담수식물이 발견되어 과거 벽골제에 민물이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 어느 연구든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계속 방조제였다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부분이다. [39] 화랑세기를 위서로 보지 않는 유명한 학자로는 대표적으로 임용한이 있다. [40] 상대가 귀찮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폭행을 해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게다가 이영훈은 전직 서울대 교수이다. 욕설이 섞인 언어폭력과 물리적 폭력은 전직 교수 신분은 물론이요 그가 운영하는 이승만 학당의 대표 신분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이승만의 명성을 악용하여 이승만 학당을 만들고, 이승만을 팔아먹는 행위를 하고 있다. 여태껏 한국 독자에게 감정적인 행동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고 비평을 자주 하며, 책까지 출간한 사람이 본인도 끝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타인에게 함부로 물리적 폭력을 행한 것이니 당연히 이영훈에 대한 이미지는 크게 추락하였다. [41] 이영훈과 같이 식민지 근대화론과 뉴라이트의 대부인 안병직 교수 밑에서 공부를 했으나, 자기가 일제 강점기 시절의 자료들을 모아서 연구를 하다보니 식민지 근대화론에 중대한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어 지금은 자신이 배운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날이 선 비판을 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불편한 진실' 아닌 '불편한 허구'다,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허수열 "이영훈 경제 통계 모두 엉터리" [42] 다만 이런 주장에 대해서도 MBC 기자 측에서 반박을 했는데, 자신들이 몇 번이나 이영훈과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계속 연락을 했지만 그때마다 모두 이영훈 측에서 아무런 대답도 안 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43] 애시당초 이영훈에게 폭행당한 기자는 이영훈을 욕하지도, 흉보지도 않고, 기자답게 인터뷰를 요청하려고 마이크를 가까이 댄게 전부였다. [44] 어머니의 어머니의 아버지의 형/남동생이다. [45] 차이석의 큰형님이 (자신의 외가쪽으로) 증조니까 3에 차이석은 그의 작은 남동생이니 2를 더해서 촌수가 5가 되므로 5촌이다. [46] 이승만학당 사이트에서 이영훈에 대한 소개 부분인데 기존에는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서울대 명예교수로 되어있었고 이를 MBC가 보도하였다. 이후 명예교수가 삭제되었으며 현재는 이영훈 이승만 학당 교장으로 바뀌었다. [47] 이 보도의 출처는 일본 극우 언론인 산케이 신문인데, 정작 이영훈과 뉴라이트 인사들은 산케이 신문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이나 항의도 하지 않고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다... [48] 당시 일본은 무사가 농민을 자의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키리스테고멘을 합법화했다. 물론 무사가 농민들이 자신들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딱히 죽이진 않았다고 하지만 이는 조선의 양반 또한 노비들이 자신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조건은 비슷하다. 게다가 일본 측은 아예 합법화했기 때문에 더 좋았다고 볼 수는 없다. [49] 사실 백정은 일반 백성보다 폭력 범죄를 많이 저질러서 인식이 좋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50] 당장 일본만 해도 직장 상사가 직원들의 얼굴을 끓는 물에 담가 화상을 입히거나 삭발을 시키고 벌거벗긴 뒤 물을 뿌리는 등 헌법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권 존중과 동떨어진 일이 발생한다. [51] 해당 운동은 일본 신분차별의 피해자였던 수평사와 연계했다. 조선 총독부는 이런 운동이 탄압받는 것을 방조하거나 이용하려 했다. [52] 진영논리를 떠나 이러한 것들은 반도체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산업들에 대한 일본의 공격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영토 도발이다. 지난 2012년 사상 처음 현직 대통령 자격으로 독도를 방문했던 사람이 어느 당 소속이었는지 기억해보라. [53] 정확히는 니들이 친일을 해서 우리까지 싸잡혀 친일몰이당한다이다. [54] 아울러 이영훈이 공동저자로 참여한 저서 반일종족주의나 이영훈 본인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이승만 TV에서 한국 정부는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증거를 전혀 제시 못하고 있다, 라면서 한국의 독도 영유권에 대해 부정하고 있는데 이런 주장은 이영훈이 처음 내세운 게 아니라 이미 2006년 무렵 디시인사이드 역사 갤러리에 일뽕 성향이 강한 유저들이 올린 게시물에 나와 있었다. 그렇다면 이영훈 같은 뉴라이트 인사들이 독도 영유권 문제 같은 역사적 논란거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들의 출처가 디시인사이드 역사 갤러리 같은 한국 넷우익들한테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55] 다만 이 논의에선 일본 학자들의 논문까지 출처로 삼으며 나름 근거가 있는 주장을 폈다. [56] 반일종족주의 항목에서 발췌 [57] 혹시 이 문장을 잘못 해석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데, 이는 중국과 싸우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최후의 한 명까지 중국과 대결을 벌여야 한다고 선동하는 내용이다. [58] 물론 이 말에도 얼마든지 비판이 가능하다. 중국에서 한자, 종이, 인쇄술, 화약 같이 한국에 좋은 문물을 전해준 사례도 많고 한국이 1997년 IMF 위기를 빨리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도 중국이 한국 물건을 많이 사준 대중국 무역 흑자 덕분이었다. 또한 한국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 초창기에 중국이 한국을 가만히 내버려둔 것은 어떻게 설명할 텐가? 반면 이영훈이 그렇게 찬양하는 일본은 조선은행의 금괴를 모조리 약탈해 가고 # 1997년 IMF 구제 금융 사태 당시에 한국에 투자했던 자본금 70억 달러를 한꺼번에 인출해 가서 한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리고 이영훈이 '식민지 시절을 어둡게 묘사해봐야 내 얼굴에 먹칠하기네'라고 했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과거 한국의 수천년 역사를 전부 중국에 굴종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살았다고 묘사해봐야 자기 얼굴에 먹칠하기가 아닌가? 그런데 만약 위의 발언이 사실이면 화랑세기까지 옹호하면서 신라를 찬양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 [59] 이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정도이다. [60] 티베트가 중국의 지배를 받기 전에는 봉건 영주들이 주민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수십 배의 높은 이자를 받아먹는 사채업을 일삼는 등 악랄하게 착취했으며, 만약 주민들이 반항할 경우에는 내장을 뽑아내는 고문 같은 잔인한 혹형까지 일삼았다. 중국이 1951년 티베트를 공격해 점령한 이후로는 이러한 봉건 영주들의 착취와 고문 행위가 없어졌다. [61] 한국은 대외 무역 흑자가 나야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인데, 이영훈이 그렇게 찬양하는 일본은 한국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내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영훈이 그토록 증오하는 중국이야말로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을 상대로 가장 많은 무역 흑자를 내준 나라였다. [62] 이승만 대통령도 6.25 전쟁 당시 스스로를 당나라 덕종에 비유하는 등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은 티는 냈지만 그것이 중공군과 싸우지 못하게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다시 일본의 지배하에 노예가 되느니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의 속박을 원할 것이라며 중국의 침략으로 북진통일의 꿈이 가로막혔음에도 중국에 대한 반감보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훨씬 강한 모습을 보였다. [63] 아이러니하게도 이영훈의 스승인 안병직은 젊었을 적 마오주의를 연구하던 사람이었다.(...) [64] 이영훈이 갑자기 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나온 이유는 뉴라이트 성향을 띈 인사들의 상당수가 기독교 신자이거나 혹은 기독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영훈은 한국의 샤머니즘과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전자에 대해 사후관에 차별이 있다며 폄하하고 후자에 대해 평등을 강조한다며 찬양했으나,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이 역시 다분히 이영훈 본인이 가진 혐한 성향과 기독교에 대한 피상적인 낮은 이해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 [65] 심지어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후쿠자와 유키치는 종교를 가리켜 "세상에 병신들이 있는 한 종교 또한 매우 유용하다. 바보와 병신에게 종교는 꼭 맞는 구색이 아니랴."라고 경멸하기까지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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