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7 20:01:11

주의(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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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무성강후(武城康侯)
周顗 | 주의
시호 (康)
작위 무성후(武城侯)
(周)
(顗)
백인(伯仁)
생몰 269년 ~ 322년 3월
출신 여남군(汝南郡) 안성현(安城縣)
부모 부친 - 주준(周浚)
모친 - 이락수(李絡秀)
형제자매 3남 중 장남
자녀 주민(周閔), 주염(周恬), 주이(周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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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로 자는 백인(伯仁). 예주 여남군(汝南郡) 안성현(安城縣) 출신으로 서진의 안동장군 주준의 아들이다.

2. 생애

어린 시절부터 명성이 높았고, 수려하고 훤칠한 외모로 인해 또래 아이들은 그와 친근하게 지내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동향인 사도부의 관리 분숭(賁嵩)은 고상한 지조가 있었는데, 그는 주의를 만나보고는 감탄했다.
"여남과 영천에는 기이한 선비가 많구나! 오랫동안 천하의 바른 길이 퇴색되었으나 오늘 주백인(周伯仁)을 만나니, 그는 장차 옛 기풍을 바로 일으켜 세우고 우리 민족을 맑게 할 인재로다!"
이후 지역에서 명사(名士)로 이름을 날리던 중 수재로 천거받아 낙양에 입성했다. 광릉(廣陵)의 명사 대연도 천거되어 낙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평소 주의의 명성을 흠모하여 그를 방문했다. 대연과 주의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대연은 이내 주의의 달변에 기세가 죽어 떠날 때까지 감히 그의 앞에서 함부로 입담을 뽐낼 수 없었다. 주의의 사촌동생 주목(周穆) 역시 명성이 높았지만 주의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주목은 사촌형을 능가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썼으나 주의가 구태여 그를 상대하지 않으니, 사대부들의 마음은 더더욱 주의에게로 향했다. 여러 주와 군에서 그를 불렀으나 모두 거절했다.

태강 10년(289년), 아버지 주준의 작위인 무성후(武城侯)를 습작하고, 비서랑에 임명되었다가 상서이부랑으로 옮겨졌다. 이후 동해왕 사마월의 아들 사마비(司馬毗)가 진동장군에 임명받았을 때, 그의 장사가 되어 진동장군 휘하에 배속되었다.

영가 5년(311년) 6월, 유총의 공격에 의해 낙양이 함락되고 회제 사마치가 포로로 잡혔다. 주의는 사공 순번 등과 함께 낙양성을 빠져나오고 진왕(秦王) 사마업을 받들어 허창(許昌)으로 갔다. 이들은 염정의 무리와 합류했으나, 염정이 독단적으로 장안에 가려 하니 본래 산동 출신인 순번 등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쪽 장안으로 향하던 도중, 주의는 염정으로부터 탈출해 당시 강동에 자리를 잡아가던 낭야왕 사마예에게로 도망쳤다. 낭야왕 사마예는 그를 맞이하고 군자좨주로 삼았다.

영가 6년(312년), 낭야왕 사마예가 주의를 영원장군, 형주자사, 영호남만교위에 임명했다. 주의가 양주(揚州) 심수성(潯水城)에 이르렀을 때, 건평군의 유민 부밀(傅密) 등이 형주에서 두도의 반란군을 영접했다. 이 사실을 모르던 주의는 면양(沔陽)에서 두도의 장수 왕진(王眞)에게 습격을 받자, 허둥대다가 큰 위기에 빠졌다. 때마침 무창태수 도간이 장수 오기(吳寄)를 보내 구원해주었고, 주의는 겨우 목숨을 구해 심수성으로 다시 들어갔다. 성을 지키기는 무리라 판단한 주의는 정토도독 왕돈이 주둔하고 있는 예장(豫章)으로 도망쳤고, 왕돈은 그를 자신의 군영에 머물게 했다. 대막이 왕돈에게 건의했다.
"주의는 비록 패퇴했으나, 부임지에 겨우 막 도착했을 때 벌어진 일이라 그에게 허물은 없습니다. 본래 덕망이 중한 자이니 마땅히 돌려보내 복직시켜 주십시오."
왕돈은 따르지 않고 무창태수 도간을 형주자사로 삼았다. 사마예는 하는 수 없이 주의를 불러들이고 양무장군, 연주자사에 임명했다. 주의가 건강으로 돌아오자 사마예는 그를 파견보내지 않고 군자좨주로 삼아 자신의 곁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우장사로 옮겨졌다.

건무 원년(317년) 3월, 낭야왕 사마예가 진왕(晉王)을 칭하고 동진 정권을 수립했다. 이때 주의는 이부상서에 임명되었으나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린 일로 탄핵받아 정직 처분을 받았다. 그가 다시 업무에 복귀할 때 즈음, 그의 문하생 중 한 명이 사람을 베어 다치게 해 또 탄핵을 받고 면직당했다.

태흥 원년(318년) 3월, 진왕 사마예가 황제를 칭하고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다시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원제 사마예는 주의를 태자소부로 삼고 중서랑 유량(庾亮)과 함께 태자 사마소의 교육을 맡겼다.

태흥 3년(320년) 3월,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었다. 주의는 초창기에 매우 명성이 높았으나 나중에 가서는 술을 무척 좋아하는 바람에 그 명성이 많이 깎였다. 상서좌복야를 지내는 와중에도 술에 취해 지내는 경우가 많았으며, 오히려 깨어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 정도가 어찌나 심했는지, 누나가 사망했을 때 3일, 고모가 사망했을 때 3일, 그 외에는 매일같이 술에 취해있었다고 한다. 상을 당할 때만 술에 깨어있는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3일복야(三日僕射)"라 칭했다. 그의 동료인 유량도 주의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주후(周侯)는 말년에 들어서 그 봉덕(鳳德)이 쇠락하였소."
심지어 그와 우애가 매우 깊었던 동생 주숭(周嵩)도 매일 술에 쩔어 지내는 형의 모습을 보고 눈을 부라리며 성냈다.
"그대의 재주는 이 동생만도 못하면서 높은 명성은 또 어찌 얻었는가!"
그러고는 홧김에 타고있던 촛불을 집어 술을 퍼마시는 형을 향해 던졌다. 그럼에도 주의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동생에게 천천히 말했다.
"이 놈아, 여기서 화공(火攻)을 쓰는 건 하책이다."

그의 이런 술버릇은 황제인 원제 사마예 앞에서도 벌어졌다. 원제 사마예가 대신들을 불러모아 서당(西堂)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분위기가 무르익고 다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사마예가 농담삼아 말했다.
"오늘 명신(名臣)들이 모두 이렇게 모였는데, 요순의 시대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하지만 이때 만취해있던 주의가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비록 같은 인간이 군주의 자리에 있다하나, 어찌 성세(聖世)에 비할 수 있겠는가!"
원제 사마예는 대노하여 박차고 일어나 연회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곧장 손수 조서를 내려 정위(廷尉)[1]에게 죄를 묻게 했다. 주의는 며칠 간 형벌을 받다가 겨우 사면받아 풀려날 수 있었다. 관리들이 그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오니, 주의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며칠 전에 지은 죄가 죽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었네."
이후 조정으로부터 호군장군에 임명되었다. 그 뒤로도 술에 취해 예를 어겼다는 탄핵을 받은 적이 있지만 조정도 이쯤에서 포기했는지 따로 조서를 내려 죄를 문책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대장군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왕돈의 사촌동생인 왕도는 자신의 친척 20여 명을 거느리고 매일 아침 석고대죄했다. 주의가 여느 때처럼 조정에 출근하는데 무릎을 꿇고 있는 왕도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주의와 친분이 있던 왕도는 황제한테 잘 좀 말해달라 간청했지만, 주의는 아랑곳 하지 않고 태연히 조정으로 들어갔다. 주의가 뛰어난 언변으로 원제 사마예에게 왕도의 충성심을 말해주니, 사마예는 왕도를 사면하고 왕도의 조복(朝服)을 돌려주었다.

영창 원년(322년) 3월, 사마예의 명령을 받고 유외, 조협, 대연, 왕도 등과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왕돈이 주둔하고 있는 석두성을 쳤다. 하지만 이내 대패하였고 사마예는 왕돈에게 조서를 바쳐 항복의 의사표시를 했다. 주의는 대연 등 공경대신들과 조서를 받들어 석두성에서 왕돈을 접견했다. 왕돈이 주의에게 말했다.
"백인(伯仁)이여, 경(卿)은 내게 지고 말았구려!"
주의가 답했다.
"공(公)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나는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친히 6군을 지휘할 수 없어 결국 패하고 말았소. 내가 공에게 패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오."
왕돈은 그의 당당한 태도를 꺼림칙하게 여겨 더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호군장사 학하(郝嘏) 등 부하들이 주의에게 왕돈으로부터 도망치라 권했으나, 주의가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대신으로서 국가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다. 내 어찌 풀숲에 숨어 목숨을 구하거나 외지로 도망쳐 오랑캐에게 투항할 수 있겠는가!"
과연 왕돈은 주의와 대연의 명성을 꺼려 부하를 보내 둘을 체포했다. 주의는 끌려가면서 태묘(太廟)를 지날 때 큰 소리로 외쳤다.
"천지선제(天地先帝)의 영이시여, 도적 왕돈이 충신을 무고하게 살해하고 천하를 능멸하나이다! 선조의 영께서 계시다면 왕실이 기울어지기 전에 속히 역적 왕돈을 죽여주시옵소서!"
하지만 도중에 왕돈의 병사가 휘두른 창에 찔려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상처에서 피가 그의 발끝까지 내려왔지만 그의 낯빛은 변함이 없으니, 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주의와 대연은 석두성 남문에 이르러 참수되고 그의 수급은 저자에 효수되었다. 향년 54세.

비록 주의가 죽었으나 왕돈은 효수된 주의의 목을 볼 때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시 날이 한창 추웠음에도 얼굴이 뜨거워 시종은 부채질을 멈출 수 없었다. 왕돈은 수치심에 대한 화풀이로 무탄(繆坦)을 보내 주의의 집을 털었으나, 얻은 것이라고는 서적을 보관하던 상자 여러 개, 솜옷 한 벌, 술 다섯 독, 쌀 몇 석 뿐이었다.

비록 술에 빠져 지내는 형에게 크게 실망하긴 했으나, 그래도 형과 돈독한 사이였던 주숭은 형을 죽인 왕돈에게 크게 분노하였다. 태녕 2년(324년) 정월, 그가 전권을 휘두르는 왕돈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방해하니 왕돈도 그를 매우 미워했다. 마침 이탈(李脫)이라는 요사스러운 도사가 백성과 병사들을 현혹시키고 있었는데, 왕돈은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주숭과 주연(周莚)을 이탈의 무리로 무고하여 반역죄로 잡아들이고 군중에서 둘을 참수했다.

태녕 3년(325년) 2월, 명제 사마소가 왕돈의 난을 평정하고, 억울하게 살해당한 주의를 좌광록대부, 의동삼사로 추증한 뒤, 소뢰(少牢)의 예로 다시 제사를 지냈다. 시호는 강(康). 아들로는 주민, 주염(周恬), 주이(周頤)가 있고 후사는 장남 주민이 이었다.


[1] 구경 중 형벌을 관장하는 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