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1:44:16

양봉(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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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관직 거기장군(車騎將軍)
성씨 (楊)
(奉)
생몰연도 ?년 ~ 1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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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이각 곽사의 내전( 삼보의 난)2.2. 헌제 탈출2.3. 처절한 도주2.4. 권력 다툼과 조조의 접근2.5. 조조의 속임수로 중앙에서 실각2.6. 원술과의 결탁과 결렬2.7. 최후
3. 삼국지연의4. 평가5. 기타6.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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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군벌. 백파적 출신임에도 거기장군까지 올랐다. 장안을 나와 동쪽으로 가는 헌제를 호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중앙 정치와 거리를 뒀지만 조조의 권력 쟁탈에 밀려 각지를 떠돌다 사망했다.

2. 정사 삼국지

2.1. 이각 곽사의 내전( 삼보의 난)

본디 백파적이었다가 이각을 섬겼다.

흥평 2년( 195년) 2월 수도 장안에서 이각 곽사 간에 전투가 벌어졌고 4월, 이각의 부하 장포(張苞), 장룡(張龍)이 곽사의 장병들과 내통해 밤중에 습격해왔다.[1] 당시 헌제도 이각의 영에 있었는데 화살이 근처까지 날아왔고 화살이 이각의 귀도 관통하는 상황에서 양봉이 이들과 싸워 물리쳤다. 싸움은 6월까지 계속되어 만여 명이 죽었고 이 틈을 타 양봉이 황문시랑(黃門侍郞) 종요, 상서랑(尙書郞) 한빈(韓斌), 이각의 군리 송과(宋果) 등[2]과 함께 이각을 죽이려다 들통나 이탈했다.[3] 상호간의 병림픽 싸움으로 약해진 이각과 곽사는 장제가 중재해 화해하고, 홍농군으로 헌제를 옮기기로 했다.

2.2. 헌제 탈출

7월, 곽사가 거기장군에, 양정이 후장군에, 양봉이 흥의장군(興義將軍)에, 동승이 안집장군(安集將軍)에 임명되어 헌제를 호위하였다. 장제는 표기장군이 되어 먼저 섬현(陝縣)으로 돌아갔다.

8월, 경조윤 신풍현(新豊縣)을 지나다가 곽사가 헌제를 우부풍 미현(郿縣)으로 빼돌리려 하자 양봉이 양정, 동승과 함께 이를 저지하였고 곽사가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이탈하였다.

10월, 곽사의 부하 오습, 하육(夏育), 고석(高碩)이 불을 지르며 다시 헌제를 데려가려 하는 것도 격파하고[4] 홍농군 화음현(華陰縣)에 이르렀다.

그곳에 주둔하던 영집장군(寧輯將軍) 단외가 여러 물품을 제공하며 헌제를 맞이하려 하였는데 단외는 양정과의 사이가 영 좋지 않았던 탓에 혹시 변고가 생길지 몰라 에서 내리지 않고 읍했고, 양정과 친했던 시중(侍中) 충집이 이를 빌미로 ‘단외가 역심을 품었다’고 모함하였다. 태위 양표, 사도 조온, 시중 유애(劉艾), 상서(尙書) 양소(梁紹) 등이 단외의 마음을 보증했지만 동승과 양정까지 '곽사군이 단외의 진영에 들어갔다'고 거짓말하는 바람에 헌제는 노숙했고 양정, 양봉, 동승은 십여 일간 단외를 공격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단외는 헌제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며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보이니 전투는 끝났다. 한편 이각과 곽사는 헌제를 보낸것을 후회하고 단외를 구한다는 핑계로 헌제를 쫓았다.

2.3. 처절한 도주

11월, 양정 형주로 도망쳤고 황제의 어가는 홍농군 홍농현에 도착했으나,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헌제를 홍농현에 두자는 장제의 제안을 거부하고 더 동쪽으로 향하였다.[5] 헌제 일행은 장제가 이각, 곽사와 손잡고 공격해오자 많은 사람이 죽고 치중을 잃는 가운데 간신히 조양간(曹陽澗)에 닿았다. 황제 일행은 하동군에 있던 옛 백파적 이락, 한섬, 호재, 그리고 남흉노 거비(去卑)[6]에 구원을 요청해 적군에 대항했다. 이들은 추격군 수천 명을 참수하며 쫓아내기도 했으나 격전 끝에 거의 다 죽고 섣달에는 섬현까지 내몰렸다.

이렇게 되자 황제 호위군인 호분(虎賁)과 우림(羽林)은 백 명도 남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밤에 몰래 십여 장(丈) 높이 절벽을 내려가서 황하를 건너기로 했는데 사람들이 기어오르거나 뛰어내려 다치거나 죽고, 살아남은 자들이 배에 오르려고 하니 동승과 이락이 매달린 손가락들을 내리치며 배를 출발시켰다. 손가락이 잘린자들은 떨어져 동사, 익사했고 잘린 손가락이 여기저기 널려 참혹했다. 이렇게 계속 사람들이 죽어나가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마침내 하동군 대양현(大陽縣)을 거쳐 안읍현(安邑縣)에 당도하였다. 하내 태수 장양을, 하동 태수 왕읍(王邑)이 비단을 공급하였다.

2.4. 권력 다툼과 조조의 접근

건안 원년( 196년), 동승 장양 환도하자고 했지만 양봉과 이락은 영 내키지 않아했다. 이 와중에 한섬은 동승을 공격해 동승은 야왕현(野王縣)의 장양에게로 피신하고 한섬을 호재와 양봉이 공격하려다 헌제의 명령에 그만두었다.

5월, 양봉, 이락, 한섬도 환도에 나서 길을 떠났다.[7] 장양과 동승은 미리 낙양의 황궁을 보수하고 호재와 이락은 하동군에 남았다.

6월,[8] 연주 조조 의랑(議郞) 동소를 시켜 편지를 써 양봉에게 전하였다.
저는 장군의 명성을 듣고 진심으로 그 의로움을 사모하였습니다. 장군께선 천자를 환난에서 구해 옛 도읍으로 모셔왔으니 그 보좌한 공은 세상에 필적할 자가 없습니다. 오늘날 흉악한 무리들이 중원을 어지럽히고 사해(四海)가 안녕치 못합니다. 왕조 질서를 청명히 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못할 일입니다. 심장, 배, 두 , 두 다리는 서로가 의존하며 하나라도 없으면 흠이 됩니다. 장군은 안쪽에서, 저는 바깥에서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저는 식량이 있고 장군은 군사가 있으니 상호 있고 없는 것을 융통해 돕기가 충분합니다. 죽으나 사나 고생을 같이합시다.

연주의 군대가 가까이 영천군 허현(許縣)에 있으면서 병사도 식량도 넉넉하니 의지할 수 있겠다면서 양봉이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표를 올려 조조를 진동장군으로 올리고 조숭의 작위인 비정후(費亭侯)를 받게 해주었다.[9]

7월, 헌제가 낙양 땅을 도착했다. 8월, 장양은 내군으로 돌아가 대사마가 되었고, 양봉 역시 거기장군이 되어 하남윤 양현(梁縣)으로 나갔으며 헌제는 위장군 동승과 대장군 사례교위 한섬이 보위하였다. 이때 한섬이 공을 믿고 멋대로 정사에 관여하자 동승이 조조를 끌어들였다.[10] 한섬과 장양을 조조가 탄핵하니 한섬은 살해당할까 두려워 양봉에게 도피하였으나 헌제는 그간의 공로를 들어 일절 를 묻지 않았다.

2.5. 조조의 속임수로 중앙에서 실각

당시 낙양에는 궁궐도 없고 관리들이 담벼락에 의지했고 기근도 심해 사람들이 아사하거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상서랑(尙書郞) 이하가 직접 돌벼를 채취해왔을 정도로 낙양은 처참했다. 조조는 양봉에게 허현 근방의 남양군 노양현(魯陽縣)으로 황제를 옮겨 운송을 쉽게해 부족한 식량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가 자신을 추천하고 답례도 후했던지라 양봉은 조조의 의견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조조의 속임수로 조조는 약속과 달리 환원관(轘轅關)을 지나 허( 허창)가 있는 동쪽으로 황제를 데리고 갔다. 양봉은 뒤늦게 깨닫고 한섬과 같이 추격했지만 양성산(陽城山) 골짜기에서 먼저 다다른 경기병 부대가 복병에 당해 놓치고 말았다.[* 《[[헌제춘추》 ; 이현 주석, 《후한서》72권 열전 제62 동탁에서 인용]

10월, 양봉과 한섬이 영천군 정릉현(定陵縣) 일대를 유린하자 조조는 양봉의 본거지인 양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두 사람은 양주 원술에게로 달아났다.

2.6. 원술과의 결탁과 결렬

건안 2년( 197년) 무렵, 양봉은 공손찬, 원술, 한섬과 함께 현상금이 걸려 체포대상이었는데 이 와중에 원술은 사망 플래그 황제참칭을 감행한다.[11] 서주의 여포 진규와 조조의 꼬드김에 넘어가 진행되고 있던 혼담을 끊어 원술과 관계를 단절하니 원술은 화를 내며 장훈, 교유, 양봉, 한섬으로 하여금 일곱 길에서 수만 명으로 서주를 쳤다. 이에 여포는 양봉과 한섬에게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장군이 어가를 호송하며 동쪽으로 온 것은 나라에 제일가는 공이오. 당연히 역사에 남아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오. 원술은 반역하여 토벌받아야 마땅한데 어찌 역적과 한패가 되어 나 여포를 친단 말이오? 나 여포 또한 동탁을 주살한 공신이오. 힘을 합해 원술을 격파하고 천하에 공을 세웁시다.

여포가 설득하며 또 노획한 군수물자도 전부 주겠다고 하니 마침내 내응하기로 했다.도적에게 제일 짜릿한 보상은 약탈 최대로! 여포가 진격하여 장훈과의 거리가 100보쯤 되었을 때 한섬과 양봉도 동시에 장훈군을 타격하였다.[12] 배신을 당한 원술군은 죽고 다치고 물에 빠진자가 수두룩했고 결국 궤주했다.[13]

2.7. 최후

이후 양봉과 한섬은 여포와 같이 구강군 수춘현(壽春縣) 방향으로 수륙병진하며 지나는 곳마다 노략하고 종리현(鍾離縣)에서 회하 북쪽으로 회귀하기도 하는 등 서주와 양주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던 차 양봉은 유비와 회견할 일이 있어 갔다가 붙잡혀 죽었다.[14]

3. 삼국지연의

제13회에 황보력을 참수하려던 이각을 말리는 것으로 첫 등장하는데 직위는 기도위다. 이각의 전횡과 푸대접에 송과와 함께 내부에서 이각을 기습하려 하지만 일이 누설되어 송과는 잡혀 죽고 자신은 패하여 종남산(終南山)으로 도주한다.

이후 장제의 중재로 헌제는 홍농으로 가게 되는데 양봉은 이를 보호하려고 천여 명으로 달려간다. 거가가 화음현에 이르러 곽사가 헌제를 도로 데려가기 위해 추격해온 순간 양봉이 도착하고 휘하의 서황이 곽사의 장수 최용(崔勇)을 고꾸라트리고 양봉은 곽사군을 물리친다. 이튿날, 곽사가 또 다가와 이들을 포위하면서 위기에 빠진 순간 동승이 나타나 구해준다. 이후 이번엔 곽사가 이각과 연합해 몰려오니 동승과 함께 동간(東澗)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지만 섬북까지 쫓겨 옛 백파적 한섬, 이락, 호재에게 구원을 청한다. 이락은 위양(渭陽)에서 대패하고 호재는 전사하며 이 와중에 어가는 간신히 황하를 건너 안읍현에 도달한다.

동승과 양봉이 헌제를 모시고 낙양으로의 환도에 나서는 동안 이락은 따르지 않고 남아서는 이각, 곽사와 협동해 헌제를 협박하려 한다. 동승,양봉, 한섬이 이를 알고는 속히 기관(箕關)으로 향하고 이락도 이각·곽사를 기다리지 않고 진군한다.

제14회, 양봉이 서황을 출마시켜 이락을 쓰러트린다. 헌제가 낙양에 이르러 조조를 불러들이고, 조조는 이각과 곽사를 크게 깨트린다. 양봉과 한섬은 권력을 쥔 조조를 염려해 대량(大梁)으로 나가지만, 조조가 허도로의 천도를 행하자 양봉과 한섬이 그 길목을 가로막는다. 허저와 50여 합을 겨뤄도 끄떡 않던 서황은 친구 만총의 권유에 조조에게로 귀순한다. 사실 정사에서의 서황은 양봉이 격파된 후 조조에게 귀순한다. 양봉이 1천 명의 기병으로 이를 추격하는데 조조의 복병에 개발살나고 한섬도 합세하지만 패배하여 둘은 원술에게로 도망간다.

제17회, 원술이 20여만 명을 동원해 일곱 길을 따라 여포가 있는 서주로 진공한다. 양봉은 제7로군을 맡아 준산(浚山)으로 전진한다. 한섬은 제6로군이다. 진등 한나라로 귀환하고 싶어하는 한섬과 양봉의 마음을 이용한다. 한섬은 진등의 설득에 넘어가 내통하고 양봉에게도 전달한다. 서주로 곧장 향하던 장훈의 제1로군을 여포·한섬·양봉이 협공해 무찌른다. 뒤이어 오던 칠로도구응사(七路都救應使) 기령도 쳐부순다.

여포는 한섬을 기도목(沂都牧)으로, 양봉을 낭야목(瑯琊牧)으로 천거하고는 서주에 두려는데 진규의 '두 사람이 산동에 웅거하면 1년 내에 산동의 성곽이 몽땅 여포에 속할 것'이란 말에 둘을 기도와 낭야에 있게 했다. 사실 진규의 본심은 둘이 여포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여포를 속인것이다. 이후 둘은 약탈을 벌이다 유비가 마련한 술자리에 가서 관우 장비에게 피살된다. 그 머리는 수춘 전투에 앞서 유비가 조조에게 헌상한다.

4. 평가

동소로부터 용감하지만 생각이 짧아 의심을 하지 않는다 디스 평을 받았다.

5. 기타

막판에 서주와 양주 일대를 노략질하다가 죽었는데 단순 도적질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여포군 소속이 되었는데도 이랬다는 것을 보면, 여포가 이들을 홀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정규군이 되었다면 기본적으로 군량이 부족하지 않는 한 약탈할 상황이 아닌데다가, 유비에게 이들이 살해되었는데도 이에 대한 불만이나 반감을 나타냈다는 기록이나 그러한 정황이 없기 때문이다. 양봉과 한섬은 군량부족에 허덕이다가 약탈을 할 수 밖에 없는 지경이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각, 곽사를 상대로도 불리한 싸움을 계속 하였던 한섬, 양봉이 선뜻 배반을 결심한 것도 여포와의 불화가 있지는 않았는지 의심이 되는 부분.

6.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6.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삼국지3양봉.png
삼국지 3
파일:external/vignette1.wikia.nocookie.net/Yangfeng-rotkxi.jpg
삼국지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001.jpg
삼국지 12, 13, 14

등장은 하지만 대접은 그리 좋지 않다. 친구인 한섬은 백파적스러운 사나운 인상과 복장으로 등장하는데 양봉은 의외로 갑옷을 잘 갖춰입고 나오는 편. 이유는 알기 힘들지만 가끔씩 둘의 궁합 수치가 많이 차이가 날 때도 있다.

특이사항으로는 여러차례 진영을 바꾸고 연의에서 노략질하다 유비에게 살해당한 것 때문에 숨겨진 능력치인 의리가 최저로 설정된(...) 경우가 많은데 황제를 끝까지 호위한 경력 덕분에 한실 중시로 설정된 경우가 많다. 즉, 의리가 최저이면서 한실을 중시하는 독특한 성향을 가진 무장이다. 그 반대인 의리 최고에 한실 무시도 화만, 조모 정도로 드물다. 삼국지 5편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삼국지 2에서는 시나리오 2( 군웅할거)에서 선택 불가능한 군주로 등장하고, 휘하에 서황이 있다.

삼국지 3에서는 변변치 않은 잡장 스탯이다. 능력치는 육전지휘 56/수전지휘 21/무력 63/지력 47/정치력 29/매력 48. 말 그대로 잡장. 1회 단역들 중에서도 이것보다 스탯이 높은 장수들이 수두룩하다. 일례로 사서에는 " 곽사를 죽였다" 하나 밖에 안 써 있는 오습도 장군이 될 수 있는데 양봉은 육전지휘고 수전지휘고 무력부터 영 낮아서 장군이 되지 못한다.

삼국지 5에서는 콤비인 한섬은 살아남았지만 본인은 짤렸다.[15] 근데 이 양봉보다 지명도가 떨어지는 남만의 양봉은 또 나왔다.

삼국지 6에서는 군웅할거에서 독립 군주로 등장한다. 거점인 진양은 인구는 적지만 기병을 징병할 수 있고 휘하는 서황이 홀로 있으므로 서황만 믿고 어떻게든 해봐야 한다. 서황이 아직 완숙하지 않아서 무력이 80대고 지력도 50대지만 이것만으로도 무력은 70대 빼고 모두 쩌리인 양봉보다는 훨씬 낫다. 더욱이 서황의 꿈이 의협이라서 배신도 하지 않는다. 양봉 본인의 꿈도 대의이고, 의리 수치도 높다.

7탄부터 양봉의 일러스트 번호가 0번이 되었다.[16]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9/무력 68/지력 29/정치력 21. 병법으로 돌파와 정란 2개를 가지고 있다. 돌파는 1단계 병법이라 구리고, 정란은 그나마 공성전에서 쓸만하지만 노병계나 궁기병계 병법이 없기 때문에 정작 공성전에 데려가면 상대의 요격으로 야전이라도 발생하지 않는 이상은 무병법 장수로 변한다. 그래도 삼국지 9는 잡장에 대하여 관대한 편인지라 토류 노가다로 숙련치를 쌓아서 최종단계 병법인 돌격을 배우거나, 아니면 후방도시로 군단을 편성해서 위임하는 용도로 쓸 수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7/무력 63/지력 34/정치력 28/매력 58로 뭐 하나 써먹을 데가 없는 잉여. 특기는 상업, 돌격인데, 돌격은 그렇다 치고 양봉의 정치력은 28인지라 상업 특기는 써먹을 데도 없다. 물론 애매한 무장으로 전 특기 습득 플레이를 하게 된다면 양봉이랑 친해두면 상업 특기 획득 시 도움이 된다는 점은 있다.

삼국지 11에서는 군웅할거 시나리오에서 서황과 함께 재야 인사이며 낙양에서 거병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거병한 지 얼마 안돼서 높은 확률로 조조나 이각군에게 짓밟힌다. 삼국지 11에서는 특히 일러스트가 크게 달라져 일러스트만 보면 상당히 강력한 장수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연의에서나 정사에서나 활약상과 존재감 대비 최고의 일러스트라고 평한다.[17]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창을 두 손으로 든 채 소리치면서 분투하고 있으며 전법은 전공격강화로 그나마 쓸 수는 있는 수준이고, 이각과 곽사와 동일한 전법이다. 라이벌 구도로써 같은 전법를 준 듯.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6/무력 65/지력 31/정치력 14. 특기는 훈련 1, 순찰 1, 공성 1이고 전수특기는 훈련으로 전법은 궁방약화. 병과적성은 창병과 기병이 B/궁병 C.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7, 무력 65, 지력 34, 정치 20, 매력 58로 전작과 달리 통솔력이 1, 지력이 3, 정치력이 6 상승했다. 개성은 동원, 저돌, 적도, 주의는 아도, 정책은 어린강화 Lv 3, 진형은 어린, 봉시, 전법은 분전, 견제, 저지, 친애무장은 한섬, 혐오무장은 없다.

6.2. 삼국전투기

발음의 유사성 때문인지 양봉업자(...)로 나온다. 하구 전투 (4)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는데, 첫 등장 시점에 비하면 꽤나 늦은 편.

낙양 전투 편에서는 양표에게 포섭된 무장 중 1명으로 등장한다. 황제가 장안을 나오자 황제 일행과 합류하였고, 이후 같은 세력인 장제, 동승과 내분을 일으키고, 결국 동승과 손을 잡으면서 장제를 쫓아낸다. 이후에는 동승과 더불어 황제 탈출을 도우려 하는 세력들을 자진해서 차단하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후 조조가 헌제 탈출을 돕게 되고, 낙양에 도착하자 외척인 동승과 원로대신 양표와는 달리 자신은 산적 출신이라 조조가 영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여 도망친 이각, 곽사를 잡아오겠다는 명목으로 조조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하동군 양현으로 빠져나간다.

장사 전투 편에서는 조조가 대장군이 되고 허현으로 천도를 하려 하자 양봉 일당은 자신들이 찬밥 신세가 될 것을 우려하여 도중에 황제를 가로채기로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긴다.

하구 전투 편에서 오랜만에 재출연. 황제 가로채기에 실패하고 어느샌가 원술의 진영에 눌러앉았다고 묘사된다. 원술의 서주 7로 공략군에 참여하여 한섬과 함께 우이 방면의 군을 맡게 되었으나, 원래부터 원술에 대한 충성심은 딱히 없었기에 여포군 쪽에서 편지를 보내며[18] 원술의 물자를 전부 주겠다며 회유하자 1초 정도 고민하고 바로 수락하기도 했다. 여포에게 회유된 뒤 우이 방면의 군을 바로 하구로 돌려 여포와 함께 기령군을 박살냈다.

환 전투 편에서는 한섬과 같이 여포에게 회유된 이후 산동 방면의 서해 지역을 영지로 받는데, 흉년 때문에 지역 자체가 폐허가 다 되어 있어서 여포에게 크게 실망하여 여포를 치기로 결정한다. 소패의 유비가 여포에게 악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섬과 같이 소패로 유비를 회유하러 가지만, 유비가 이들을 죽이라 명하여 한섬과 같이 허무하게 사망한다.

연의와 같은 결말이지만, 차이점이라면 한섬과 양봉은 아직 약탈을 벌이지 않았고, 여포에게 실망하여 유비를 회유하러 갔을 뿐인데 다짜고짜 그냥 베였다(...). 관우, 장비도 의문스러워서 베고 난 뒤에 유비에게 여포가 적인 건 똑같은데 왜 손을 잡지 않느냐고 묻자 유비는 "양봉과 한섬 같은 애들이랑 놀면 이미지 망쳐서 장사 못한다"라고 대답한다. 말 그대로 양봉과 한섬은 알려진 이미지가 영 나쁘기 때문에 이런 녀석들과 손을 잡으면 자신의 진영의 이미지도 덩달아 내려가고, 자신의 이름을 팔기 어려워진다는 뜻.

6.3.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진규의 설득에 넘어가 원술을 배반하려는 한섬에 의해 이름만 언급된다. 이 둘의 최후 또한 작중에 나오진 않는다.

6.4. 레전드히어로 삼국전

악역 군주 이각의 영웅패로 등장.

6.5. 삼국지 가후전

원씨 가문의 후원을 받고 백파적 두령들과 함께 우보의 군사와 싸우면서 서황이 원군으로 온 가후의 군사에게 격파되어 곽태가 뭐라고 하자 너무 그러지 말라면서 지금까지 큰 피해없이 막아냈다는 것을 말하며, 이후 가후의 계략에 따라 백파적이 이간질에 속아 가후의 군사에게 격파당한다.


[1] 《헌제기》(獻帝紀) 이현 주석, 《 후한서》72권 열전 제62 동탁에서 인용. [2] 삼국지》6권 위서 제6 동탁. [3] 원굉(袁宏), 《 후한기》28권. [4] 자치통감》61권 한기 제53 헌제 흥평 2년. [5] 헌제춘추》 ; 《 태평어람》92권 황왕부 제17 효헌황제에서 인용 [6] 《후한서》동탁전, 《삼국지》무제기, 원굉의 《후한기》에서는 우현왕. 《후한서》헌제기에서는 좌현왕이다. [7] 《후한기》29권. [8]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9] 삼국지》14권 위서 제14 동소. [10]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에서는 동승이 원술의 부하 장노(萇奴)와 연계하여 조조가 보낸 조홍을 막았다고 하였으나 이 기록과 상충된다. [11] 영웅기》 ; 배송지 주석, 《삼국지》7권 위서 제7 여포에서 인용했다. [12] 구주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7권 위서 제7 여포에서 인용. [13] 후한서》75권 열전 제65 여포. [14] 이 일은 《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엔 196년의 일로 잘못 삽입되어 있다. [15] 다만 한섬의 열전에는 이름이 언급된다. [16] 삼국지 시리즈의 일러스트 순서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삼국지 7에서 지정된 일러스트 순서가 최신작까지 이어지고 있다. [17] 다만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에서 싸움에 도가 튼 이각, 곽사를 상대로 상당히 잘 싸운 것은 맞다. [18] 이 와중에 여포의 글씨가 너무 악필이라 내용을 알아보지를 못하는 개그씬도 연출한다.누구 아랍어 아는 사람...? 편지의 내용은 바로 1컷 뒤에 한섬이 해석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