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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해병

돌아오지 않는 해병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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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산 1위 흥행 영화
연산군
(1962)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빨간 마후라
(1964)[1]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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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0000>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The Marines Who Never Returned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e0006522_588c4d8b3b1a9.jpg
장르 전쟁, 드라마, 액션, 시대극
감독 이만희
각본 장국진
기획 강용근, 전석진
제작 원선
출연 장동휘, 최무룡, 구봉서, 이대엽, 전영선
각색 한우정
촬영 서정민
조명 장기종
미술 홍성칠
편집 김희수
음악 전정근
제작사 대원영화주식회사
배급사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연방영화주식회사
개봉일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1963년 4월 11일

[[미국|]][[틀:국기|]][[틀:국기|]] 1966년 2월

[[영국령 홍콩|]][[틀:국기|]][[틀:국기|]] 1966년 10월 12일

[[멕시코|]][[틀:국기|]][[틀:국기|]] 1967년 2월 23일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1967년 4월 19일

[[덴마크|]][[틀:국기|]][[틀:국기|]] 1967년 11월 17일
화면비 2.35:1
상영 타입 2D
상영 시간 109분 (1시간 49분 29초)
제작비 880만원[2]
대한민국 총 관객 수 227,800명
스트리밍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상영 등급 파일:영등위_15세이상_2021.svg 15세 이상 관람가

1. 개요2. 시놉시스3. 등장인물4. 줄거리5. 명대사6. 수상7. 탐구
7.1. 사회상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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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3년 4월 11일 개봉한 이만희 한국 영화. 빨간 마후라와 함께 60년대 한국 전쟁 영화의 양대 산맥이다.

2. 시놉시스

한국전쟁 당시 강대식(장동휘) 분대장이 이끄는 한 해병부대는 서울수복 후 북진을 거듭한다. 그러던 와중에 양민들이 학살당한 한 마을에 도착,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고 그 곳에서 고아가 된 소녀 영희(전영선)을 만나 영희를 상관들 몰래 보살핀다.

또한 한 분대원(이대엽)은 여동생의 죽은 시체를 보게 되고 여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로 친구(최무룡)의 형을 증오하게 되는데... 어느 날 친구(최무룡)가 그 분대로 전입을 오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갈등하지만 전투를 거듭하면서 서로에 대한 오해와 갈등을 조금씩 풀기 시작한다.

북진을 거듭하던 중 어느 날 국군은 중공군을 만나게 되고 강대식 분대장이 이끄는 분대원들은 작전 상의 이유로 중공군과 피할 수 없는 전투를 벌이게 된다. 여러 가지가 열세인 조건 속에서도 분대원들은 사력을 다해 싸우게 되고 그 속에서 진한 전우애를 느끼지만 한 두명씩 죽음을 맞게 되는데...

3. 등장인물

4.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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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1950년 서울, 분대장 강대식(장동휘) 휘하의 분대원들은 인천 상륙 작전에 참가하여 서울 시가지에서 총격전을 벌인다. 분대원들이 건물에 있는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던 도중, 소녀 박영희(전영선)는 엄마와 도망치다 엄마가 북한군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분대원들은 영희를 구하고 건물 내의 북한군도 모두 소탕한다. 전투가 끝난 후 건물 안에서 북한군에게 학살당한 양민들을 보던 구 해병(이대엽)은 그중에서 자신의 여동생을 발견한다. 구 해병은 여동생의 죽음에 절규한다.

서울을 수복한 후 북진하기 시작한 분대원들은 영희를 마대 자루 속에 숨겨 데리고 다닌다. 어느 날, 분대원들은 기마전에서 승리하고 받은 상금으로 막걸리 파티를 준비한다. 그러다 구 해병의 친구 최 해병(최무룡)이 부대에 전입을 오는데, 최 해병의 형은 구 해병의 여동생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구 해병은 증오심에 그와 주먹다짐을 벌인다. 분대장의 개입으로 싸움은 일단락되지만, 구 해병은 최 해병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날 밤, 분대장은 대대장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영희를 현지 입대시키고 분대의 마스코트로 삼는다. 분대원들은 막걸리 파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천막 바깥에서 최 해병은 구 해병에게 자신의 형의 죄를 사과한다. 구 해병은 영희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리고, 최 해병은 그를 위로해준다.

다음 날, 분대원들은 전투 훈련을 받는다. 행군 도중 조장 해병(구봉서)이 용변을 보다가 무장 간첩 2명을 발견한다. 분대원들은 간첩을 쫓아 체포하고 이 공으로 특별 외박을 받는다. 그리고 평소 가고 싶어했던 연대본부 근처에 위치한 유흥업소로 향한다. 구 해병은 영희를 돌보기 위해 부대에 잔류한다.

분대원들은 유흥업소에 도착하지만, 그곳은 유엔군만 상대하고 한국군 출입금지였기에 양공주들은 분대원들을 탐탁지 않아 한다. 마담의 냉담한 태도에 분대원들은 가게 물건을 부수면서 많은 돈을 준다. 이에 마담은 태도를 바꿔 분대원들을 환영한다.[3] 그리고 분대원들은 양공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분대원들에게 긴급 복귀 명령이 내려진다.

영희는 대대장으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다. 그런데 이틀이나 남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벌써 준 것을 이상하게 여긴 구 해병은 분대가 최전방에 지원을 나가게 될 예정이기에 미리 준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구 해병은 영희를 대대본부에 맡기고 분대원들과 최전방에 투입된다.

분대원들은 중공군 백병전, 포격전을 벌이면서 힘겹게 전선을 지켜나간다. 그러나 부대는 전술상 후퇴를 결정하고, 분대원들은 중대가 후퇴하여 새로운 진지를 구축할 때까지 현 진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는다. 최후의 일전을 앞둔 분대원들은 영희가 보낸 크리스마스 편지를 읽고 슬퍼한다. 분대장은 부대원들을 격려하며 전투를 준비한다.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고,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분대원들은 하나둘씩 죽어나간다. 진지는 뚫렸지만 생존한 분대원들은 죽은 척 위장해 목숨을 건진다. 분대원들은 언제 적의 후방 부대가 자신들을 발견할지 모르는 위기에 처한다. 통신병 김 해병(김운하)은 중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홀로 중대로 향한다. 그리고 분대원들로부터 영희를 만나 모두 무사하다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분대원들은 고지에서 죽은 척을 하고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적을 조용히 처리한다. 그러나 실수로 총을 쏘는 바람에 총 소리를 들은 중공군 후방 부대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한편 중공군으로 위장해 중대에 도착한 김 해병은 지원 병력을 요청하지만, 중대장은 중공군과의 전투로 긴박한 상황이라 지원 병력을 보내줄 수 없다고 한다. 결국 김 해병은 대대본부로 가 영희를 만나고 분대원들이 모두 무사하다고 거짓말을 한다.

분대원들은 결사항전을 벌이며 중공군을 소탕해나간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로 분대장과 최 해병만이 살아남는다. 중공군은 중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하기 시작한다.

분대장은 진지에서 인원 보고를 마치고, 수많은 전우들의 주검 앞에서 분대장과 최 해병은 눈물을 흘린다. 진지에서 떠나는 분대장과 최 해병을 비추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5. 명대사

경익이, 내 형을... 아니, 나까지도 죽이고 싶겠지. 네 마음이 위로된다면 날 죽여도 좋아. 내 형이 그렇게까지 나빠질 줄은 몰랐다. 나는 지금... 네 동생의 영전에 내 형의 죄를 빌고 있다.

- 최 해병

빌어다오. 전쟁이 없고 죽음이 없는 평화로운 곳에 태어나...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게 빌어달란 말이다.

- 구 해병

어린 동생이 전쟁이 없이 평화롭게 살게 하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

- 분대장
내가 재밌게 말하면 너희들은 웃었지? 슬플 때도 말이야,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슬프지? 내가 없으면 누가 웃겨주니? 내가 웃으면... 이렇게 말이야.

- 조장 해병
나도 너희들만큼 살고 싶다. 내가 잘 싸운다면 그걸 살기 위해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내 도락이 아니야! 살기 위한 최악의 수단이야. 내게도 부모가 있고 처자가 있다. 총을 들고 사람과 싸우기보다는 삽을 들고 흙과 싸워 효도하고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4]

- 분대장
물론 저는 용기도 힘도 없는 여자 같은 남자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생의 애착은 강력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 책임감이 있습니다. 통신의 임무를 맡은 자는 교신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구두로 통신할 의무를 느낍니다. 성공하거든 날 남자라고 인정하십시오.[5]

- 김 해병
영희에게 모두 무사하다고 전해라. 아기에겐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어느 곳이든지 오빠와 아저씨들이 살고 있는 거라고 영원히 생각할 수 있게 말이야.

- 구 해병
너희 둘만은 꼭 살아 돌아가서 전쟁의 증인이 돼라.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고... 인간은 반드시 전쟁이 필요한지 물어봐라.

- 분대장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 제1대대 3중대 1소대 인원 보고. 총원 42명, 전사 39명, 실종 1명, 생존자 2명 중 1명 중상. 인원 보고 끝...

- 분대장

6. 수상

<rowcolor=#ff0000,#20a0bd> 연도 시상식 부문 수상자
1963년 제1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이만희
특별상·집단연기상 장동휘, 최무룡, 구봉서, 이대엽, 김운하, 남준택
국제영화예술상 전정근
1964년 제3회 대종상 감독상 이만희
녹음상 이경순
신인상 서정민
제7회 부일영화상 촬영상 서정민

7. 탐구

촬영 당시 국내에서는 가짜 총보다 진짜 총을 구하기가 더 쉬워서 공포탄도 아닌 실탄을 써서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6] 이 덕분에 사격 장면들 하나만큼은 정말 실감난다. 공포탄을 쏘는 요즘 영화들과는 달리 총을 쏘면서 반동을 받는 게 확실히 보인다. 그러나 촬영 당시 엑스트라 한 사람이 진짜 폭발에 휘말려서 그만 다리를 하나 잃었다고 한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신을 보면 당시 방한복을 비슷하게 맞춰서 입혀놓고 아무 무장도 없이 맨손으로 공격해온다. 아무래도 적성국 무기는 구하기 어려운데다 예산마저 열악했을 당시 사정상 그 많은 중공군 엑스트라들에게 총을 들려줄 여유까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7] 그러나 중공군의 묘사는 뛰어난 편인데 중국말을 쓰거나 총기도 영국제 스텐 기관단총이나 소련제 pps-43이 나온다. 중공군은 직전에 내전을 치르고 다시 한국 전쟁에 출병했는데, 국민당 노획무기를 많이 썼기 때문에 무장에 통일성이 없었다. 그리하여 초반에는 여러 무기를 혼합해 썼다.

보통 총 쏠 일이 없는 엑스트라들에게는 나무를 깎아서 대충 비슷하게 만든 목총이라도 만들어 들려주거나 하는데, 딱히 총 쏘는 장면이 없고 멀리서 잡아주어 목총이 티가 안 날 법한 장면에서도 역시 엑스트라들이 총 없이 나오는 걸 보면 예산이 워낙 열악하긴 했던 모양이다. 중공군이 총 쏘는 모습을 잘 보면 볼트액션 소총을 들려줬는데 스프링필드 M1903으로 보인다. 물론 고증에는 별 지장이 안간다. 왜냐하면 당시 중공군은 미제나 영국제 등등 서방권 무기도 혼용해서 쓰고 있었기 때문. 후반기가 되면서 소모도 있고, 보급문제도 있어서 해서 무장이 단일하게 통일된다.

7.1. 사회상

  • 양공주: 미군만 상대하는 유흥업소에서 국군은 상대 안 한다고 하자 다 부숴버린 후에 파손된 기물의 몇 배가 되는 돈을 주고 하려 하지만 옷 벗는 와중에 소집이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조장 해병과 옥신각신 하는 성깔 있는 양공주 역을 가수 김혜림의 어머니인 원로 가수 나애심이 맡았다. 참고로 조장 해병역은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 간첩: 후방에서 훈련 도중 간첩이 나타나는데 조장 해병이 용변 도중 발견한다. 인솔자인 분대장이 저격 수준의 사격 실력으로 폼 나게 팔과 다리를 쏴 생포하고 포상을 받는다.
  • 마을 간의 반목: 당시 인민재판이나 여러 사상적 갈등으로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되고 한 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유명한 이야기가 여기서도 나온다. 구 해병이 최 해병과 바로 멱살을 잡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가족이 이념의 갈등을 겪은 케이스다.
  • 민둥산: 신경 쓰고 보면 극중의 야외 풍경에 민둥산이 참 많이 나온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무라고 해 봐야 키작은 소나무 정도가 대부분이다. 옛날에는 생활 전반에 목재가 필요했으므로 남벌이 일상적이었고, 전쟁을 겪으면서 각종 폭격과 전투에 많은 산이 황폐화 됐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숲들도 전후 복구사업을 위한 목재 채취에 탈탈 털려야 했다. 영화가 제작된 60년대 초반은 이런 모든 악조건들이 갖춰진 그야말로 민둥산의 절정기였다. 심지어 지리산에 남아있는 산림을 '도벌'하다 적발되는 것이 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될 정도. 지금은 웬만큼 높이가 있는 산이라면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것이 당연시 되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황량한 민둥산들이 꽤 많았다. 다행히 60년대부터 시작된 녹화사업과 사회상의 변화를 겪으면서 30년 후에는 푸른 숲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점은 북한도 비슷했는데, 남한과는 달리 여기는 21세기까지도 민둥산이다. 게다가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려고 다락논까지 만들었다. 중국 쪽에서 보면 숫제 나무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여름마다 심해지는 풍수해는 덤이다.
  • 중공군: 영화의 배경인 사천강 전투는 1952년 3월부터 시작된 해병대와 중공군 사이의 공방전이었다.[8] 만약 북한군을 출연시켰다면 반공 메시지를 위해 북한군을 까는 묘사가 나왔을 것이고, 21세기 현재에 엄청난 비난을 받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9] 여기선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중공군을 등장시켜 단순히 싸워야 할 적군 이상의 역할을 주지 않았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시에나 현재에나 연출적인 면에서 신의 한 수였다. 반공적인 메시지와 민족주의에 기반한 용공적 메시지를 모조리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8. 기타

  • 권선징악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주제였던 당시의 한국 전쟁 영화와는 달리 전쟁 속에서 발휘되는 인간애와 전우애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 당시 서울관객 22만명을 기록하여 당시 기준으로 꽤 흥행을 했다.
  • 1970년에 나온 영화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이 영화와 아무 연관이 없다. 단지 장동휘가 출연했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 DVD는 처음에 레터박스가 들어간 비 아나몰픽 포맷의 열악한 화질로 출시되었는데, 2010년에 이만희 컬렉션 DVD 박스셋에 포함되어 재발매 된 것은 제대로 된 아나몰픽 DVD이며 화질이 많이 좋아졌다.
  • 김은식 작가가 임수혁을 추모하는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아마 제목을 여기서 따온 듯하다. 후에 동명의 책도 출간되었다. 전작 야구의 추억의 후속작 쯤 된다고 보면 되겠다.
  • 90년대 중반 한국 케이블 TV의 초창기에 컨텐츠 부족으로 같은 영화/방송을 수십 차례 재방송하는 일이 많았는데 당시 이 영화도 엄청나게 재방송되자 견디다 못한 한 시청자가 케이블 방송사에 전화를 걸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돌아오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 한국 영화 역사상 별난 기록이 하나 있는데 바로 엉덩이 노출이 나온 최초의 한국 영화라는 것이다. 그 주인공은 구봉서다. 다만 워낙 코믹한 남성 캐릭터의 노출이다 보니 보수적인 당시 사람들도 웃고 넘어갔다.
  • 오프닝에 나오는 곡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 상에서 찾을 수가 없다. 영화사에서 자체적으로 작곡한 곡으로 보이는데, 오래된 영화라 음질이 썩 좋지가 않으므로 자막을 켜고 봐야하는데, 해당 곡은 가사마저 나오지 않아 아예 찾을 수가 없다.

[1]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이라는 설도 있다. [2] 그 당시 평균 영화 제작비가 200~300만원이었다. # [3] 이때 마담이 오늘 밤은 국산품 애용의 밤이라면서 오늘 밤만은 외래품 사절한다고 한다. [4] 평소 분대원들이 잘 싸우고 승리하길 바랐던 분대장의 언행의 이유가 그가 살인에 미쳐서가 아닌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보여준다. [5] 김 해병은 성격과 외모 때문에 평소 분대원들에게 '여군'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홀로 지원을 요청하러 가는 그의 용감한 행동에 분대원들은 "남자, 성공을 빈다." 라며 그를 인정해준다. [6] 80년대 최무룡이 모 스포츠지에 연재했던 회고담에 따르면, 한창 촬영하는데 지프를 타고 지나가던 미군 장교가 실탄을 쓰는 촬영 광경을 보고 기겁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에 촬영 협조를 하던 군 당국에서도 사고 우려 때문에 크게 고민한 듯. 결국 특등사수들을 전 군에서 차출한 후에 모두 의도적인 오조준을 해서 "절대 맞히지 말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7] 중공군이 급하게 출병하느라고 실탄이나 식량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지만, 3인 일조로 총을 썼다는 이야기는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8] 한국에선 전쟁 내내 북한군과의 전투를 치렀다는 식으로 연출되는 매체가 많은데, 실제로는 인천 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은 사실상 전멸했기 때문에 중공군을 주력으로 내세우는 것이 맞다. [9] 사실 극초반에 북한군도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딱히 중요한 역할들도 아니고, 말 없이 소총 좀 쏘다가 죽는 잡졸들로 나오고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