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대 종묘 배향공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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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동배향) ■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서배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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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天祐
1354년 ~ 1417년
1. 개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이자춘의 손자이며 태조 이성계의 백형 이원계의 차남이다. 즉 태조 이성계의 조카이다. 본관은 당연히 전주 이씨. 어머니는 경주 김씨이며, 계모인 남평 문씨는 목화로 잘 알려진 문익점의 딸이다. 즉 이천우는 문익점의 의붓외손자인 셈이다.민제의 사위이기도 하는데, 즉 태종 이방원의 사촌형이면서 동서지간이다. 다만 조선왕조 실록과 선원속보[1]에는 이천우의 두 번째 부인 황보씨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누구의 딸인지는 기록이 없고, 여흥 민씨 세보에는 민제의 딸이 3명(조박의 처, 원경왕후, 노한의 처)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2. 생애
2.1. 태조 이성계의 총애를 받는 조카
조선왕조실록 졸기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고 풍모가 아름다웠으며 재기와 도량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369년 동녕부의 수령으로 있다가 숙부인 이성계의 휘하에 바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이후 이성계를 도와 각종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에는 이성계의 최측근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서는 그의 행적이 사실상 이성계 휘하로 들어간 이후에는 보이질 않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성계 즉위시에 이성계가 그의 부축을 받는다는 기록으로 사실상 첫 개인 행적을 보여준다.
이후 1393년에 원종공신에 책봉되었고, 1394년에는 상의중추원사로 임명된다. 그리고 1396년에 강원도 조전 절제사가 되어 강원도 일대에 출몰하던 왜구를 격퇴하게 한다. 그리고 1398년에는 중추원부사에 이른다. 이 때까지는 확실하게 태조 이성계의 총애를 받는 조카였다.
2.2. 사촌 태종 이방원의 최측근
하지만 1398년 무인정사에 사촌 이방원의 편을 들게 되면서 숙부인 태조와는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사실 이천우는 이방원의 봉기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중간에 사태를 파악하고 곧바로 이방원 편을 들게 되었고 무인정사가 성공이 된 이후 동지중추원사 겸 병조 전서 의흥 시위사 상장군 지삼군부사라는 상당한 직책을 받음과 동시에 자신의 형인 이양우와 함께 정사공신 2등을 책록받게 된다.이후 정종이 즉위하게 되고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이방원이 이방간을 쳐야 한다고 숙부인 이화와 함께 설득하는데 앞장서게 되면서 좌명공신 2등을 책록받게 되고, 1400년에는 완산후에 봉해진다. 1402년에는 안주도 도절제사가 된다.
그러다 곧바로 조사의의 난을 맞게 되고 난 당시 박순, 송류 등과 함께 선발대로 나갔으나 초기에 강력한 조사의에게 패배했다. 이천우가 초반에 보낸 기병 백여 명은 조사의에게 잡혔으며, 다음날 전투에서 포위당했다가 아들을 포함한 10여 명의 기병과 겨우 탈출하였다. 이후 다시금 본군에 합류하여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고 태조 이성계를 시위하게 된다. 아마도 이성계와 가까운 사이였던 그가 사실상 이성계가 일으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사의의 난에 우선적으로 나서게 해서 시간을 끌게 하고 이후 조사의의 난을 완벽하게 진압한 이후 이성계를 데려오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2] 실제로 그가 조사의의 난에서 한번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내전에서 그만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비단옷을 내려주게 되는데 그 이유를 공전에서 수고하였다는 것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러한 내막을 파악해볼 수 있다.
이후에도 그는 태종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한양 천도 등에도 참가하고, 1407년에는 세자를 명나라 하정사로 보내는데 부사가 되어 베이징에 다녀오게 되고, 1408년에 의정부 찬성사가 되어 중앙 정계에 다시금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1409년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곧바로 판의흥부사 겸하면서 다시금 의정부 찬성사가 되었고, 1410년에는 판의용순금사사를 의정부 찬성사와 함께 겸하게 된다.
그리고 1413년 이조판서가 되었고 곧바로 서북면 도체찰사가 되어 성과 병사 등을 챙기게 하였다. 그리고 1414년 완산부원군이 된다. 또한 곧바로 의금부 도제조가 되는데 이 직책을 꽤나 오랫동안 유지하게 된다. 특히 1416년에 있었던 민무휼, 민무회 형제의 숙청작업 등을 돕는다. 그러다 1417년 병에 걸려서 죽게 된다.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사촌이었던 태종 이방원의 최측근으로 활동한 셈이 되었다. 한편 태종 이방원은 그가 죽자 한동안 고기를 먹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태종이 죽자 하륜, 조영무 등과 함께 태종의 배향공신이 된다.
자녀로는 이굉과 이완이 있는데 유일한 적자였던 이굉은 여러 문제를 일으키다가 아버지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불효의 죄를 받게 되면서 직첩이 거두어지고 곧 죽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이 어머니와 함께 담양으로 낙향하여 그 지역에 종파를 이루고 살게 된다.
3. 대중매체
인지도가 높은 인물은 아니라서 그런지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비중이 있게 나온건 < 용의 눈물> 뿐이고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카메오 수준으로 출연하는 정도.[3]-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김옥만[4]이 연기했다. 이방원의 사촌이라는 사실은 사병 혁파에 저항하다 귀양가기 전까지는 크게 언급되지 않는다.[5] 상왕으로 물러난 이성계가 궁 밖으로 나가려 하자 금위장 신분이라 말리다 따귀를 얻어맞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6] 이방원의 다른 공신들 중 조영무와 친밀하여 자주 붙어다니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나름 공신임에도 이방원이 충분히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느끼지만 2차 왕자의 난 당시 조영무와 콤비를 이루어 활약했다.[7]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에 이어 2차 왕자의 난까지 방원 일파의 승리로 마무리되자 매우 승승장구하지만... 이후 사병 혁파 시점에서는 조영무, 조온 등과 마찬가지로 세자인 이방원에게 반항하다 귀양 직전 불려온 술자리에서 귀양 간다는 말을 듣고는 험악한 인상을 마구 구기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할 수 있는 짓거리오이까", "저하께서는 인면수심이시옵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아 먹는다더니... 우리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구나"라고 울부짖는다. '은혜를 배신으로 갚다니 뒤가 두렵지 않사옵니까. 그러고도 편히 주무실 수 있사옵니까' 라는.. 평상시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극언까지 서슴치 않고 울분을 토하지만 세자 방원은 전혀 질책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듣기만 하며 괴로워한다. 이방원 본인은 이천우와 조온의 말에 대해서는 딱히 변명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하게 했으며 이후 공신들을 모두 귀양보내고 인면수심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가슴 아파했다. 드라마 속에서 종종 나오는 방원의 인간적인 면모의 한 대목이다(용의 눈물 77회 회차)
방원은 귀양 직전 술자리에서 이천우에게 크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도 한다. 이천우 등장 이래 한번도 형님이라고 부른 일도 없고, 또한 이천우와 방원이 친척 간이라는 해설도 전혀 없었지만 이 77회에서 처음으로 형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천우의 아버지 이원계의 어머니는 천한 노비의 신분이었다고 말하며, 이성계와 방원이 주선하여 사촌 형님(이천우)을 오늘날 이 자리에 이끌었다고 생색내듯 말한다. 이천우는 지난 이야기를 뭐하러 끄내시냐며 언짢은 표정이다. 하지만 이것을 잘못된 내용으로, 이자춘의 맏아들 이원계의 어머니 한산 이씨는 엄연한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의 첫째 부인으로 1333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자춘은 둘째 부인인 영흥 최씨를 맞이했고 1335년 둘째 아들 성계를 둔 것이다. 따라서 이원계의 어머니 한산 이씨는 측실이라고 할 수가 없고 이는 위화도 회군 이전에 이색이 쓴 이자춘 신도비문 같은 객관적인 자료에서 입증된다. 이후 귀양지에서 조온과
장기를 두며 세월을 보내다[8] 복직 소식을 받은 후에는 자신들의 사병을 빼앗아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자신들은 귀양보냈다 적당한 시점에 불러들여 감복케 하는 이방원의
정치력에 놀라며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라며 경외심을 보인다.
그리고 85회에서 임금이 된 방원(태종)이 이천우에게 사과하는 대목이 나온다. 종친부 여러 어른들께 집안 내력에 대해 알아보니 큰아버지(백부)인 이원계의 어머니가 노비, 천출이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이 77회에서 한 말을 사과한다. 자신과 이천우는 친사촌 간이라고 말하며 형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로서 이천우는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잊게 된다.
조영무와 마찬가지로
조사의의 난 진압에 참여[9]한 것을 마지막으로 정국이 안정화되면서 장수가 아닌 조정 대신 중 1명으로 꾸준히
얼굴을 내비친다. 정많고 소탈한 조영무와 달리
왕족으로서 태종의
왕권 강화
정책을 철저히 지지하며 민씨 4형제
숙청에 목소리를 높였고 세자인
양녕대군을 보필해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10]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것을 끝으로 퇴장하는데 웬만한 인물들은 모두 졸기를 띄워 주는 와중에 언급도 되지 않고 사라진다.[11]
한 가지 씁쓸한 점은, 방원이 왕이 되기 전, 조사의의 난 마무리 시점까지는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매우 친하고 좋은 동지 사이였는데, 민무구의 옥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천우는 왕실 종친으로서 민씨 형제들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이다. 민무구, 민무질은 물론 민무휼, 민무회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권력 앞에서는 영원히 동지나 친구가 없다는 점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이성계, 이화는 이천우의 숙부들인데 극 속에서 이천우가 그 둘에게 숙부라고 부르는 대사는 없다. 아뭏든 용의 눈물 드라마 상에서 오랫동안 등장한 인물의 하나로 이방원을 위해 일평생 헌신한 인물이다. 실제로 이천우는 태종종묘묘정배향 공신이다.
(용의 눈물 드라마 원작 소설인 박종화의 '세종대왕' 에서 이천우는 조사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당연히 역사 왜곡이다. 이 소설에서는 이맹종도 숙부 이방원이 직접 쏜 화살에 맞아서 죽고, 이숙번이 이성계가 보는 앞에서 부마 이제를 칼로 신수이처하는 등 왜곡된 내용도 있다....)
이성계, 이화는 이천우의 숙부들인데 극 속에서 이천우가 그 둘에게 숙부라고 부르는 대사는 없다. 아뭏든 용의 눈물 드라마 상에서 오랫동안 등장한 인물의 하나로 이방원을 위해 일평생 헌신한 인물이다. 실제로 이천우는 태종종묘묘정배향 공신이다.
(용의 눈물 드라마 원작 소설인 박종화의 '세종대왕' 에서 이천우는 조사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당연히 역사 왜곡이다. 이 소설에서는 이맹종도 숙부 이방원이 직접 쏜 화살에 맞아서 죽고, 이숙번이 이성계가 보는 앞에서 부마 이제를 칼로 신수이처하는 등 왜곡된 내용도 있다....)
- 2015년 SBS 드라마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등장하기는 했으나 비중은 매우 낮다. 무인정사 즈음에 등장했는데 사실 드라마 특성상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배역이 이름까지 달고 등장한건 당시 흑화하고 있던 정도전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종친 세력의 대표격 인물이라서인 듯하다.
- 2021년 태종 이방원에 등장하며, 조사의의 난에서 태종의 명에 의해 출정했으나 패배한다. 태조는 태종이 이천우를 선봉으로 보낸 것이 자신의 조카라는 점을 이용해 자신을 머뭇거리게 하기 위함이라 말하면서, 성정이 급한 녀석이니 유인 후 매복하면 패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실제 그렇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승리를 축하는 자리에서 이방원에게 벌하여 달라고 빌지만 이방원은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면서 넘어간다.
[1]
완풍군파속보 기준
[2]
드라마
태종 이방원(드라마)에서는 이 해석을 그대로 따랐다.
[3]
<용의 눈물>은 159부작의 장편
대하사극이고 <육룡이 나르샤>는 50부작이다. 그만큼 뒤로 갈수록
사극 제작 여건이 안 좋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 무엇보다 <육룡이 나르샤>는 실존과 가상, 역할들이 겹친 인물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이천우의 경우는 드러낸 경우가 없다고 볼 수 있다.
[4]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충주 지역의 장군이던 금식 역, 2001년
SBS 드라마 <
여인천하>에서는
류순정 역.
[5]
22회에서 이방원이
박포를 통해 이천우를 소개받는 장면이 있는데 전후 맥락으로 보아 아무래도 처음에는 사촌간이라는 사실을 제작진 측에서 몰랐던 듯 하다.
[6]
사적으로는 아무래도 조카인데 조카가 자신의 자식을 지지하여 또다른 자식을 죽였으니 원망스러울만도 하다.
[7]
다만, 이방원에 대한 충성심은 조영무보다 밑인지라 전투 도중
이방간의 군사에게 수적으로 크게 밀리자 "차라리 항복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단순한 충성심 차이만이 아니라 이성계의 아들들과 사촌 형제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말이다.
[8]
조온이 "곧 자신들을 죽이지 않겠느냐"며 불안해하는 것과는 달리 "죽이든 살리든 어차피 사병을 뺏긴 이상 죽은거나 다름없다"며 자포자기한 모습을 보인다.
[9]
다만,
조사의로부터 "
삼국지로 비유해서
장비라고 하면 딱 좋을 자"라는 평을 듣고 그 후 대패한다.
[10]
양녕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이천우가 수행하는데 이 때 태종이 "완산군 이천우 백부께서 함께 가실 것"이라고 직접 말한다.
[11]
역사적으로는 민씨 형제 중 막내인 민무휼과 민무회가 사사되고 난 이듬해에 졸했는데 졸기가 없는게 이천우 하나는 아니나 비중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