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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06년( 태종 6) |
전라도 능주 # | |
사망 |
1470년
10월 16일[1] (향년 63 ~ 64세) (음력 성종 1년 9월 13일) |
재임기간 | 제29대 영의정 |
1466년
6월 9일[2] ~
12월 5일[3] (음력 세조 12년 4월 18일 ~ 10월 19일) |
|
봉호 |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
시호 | 충렬(忠烈) |
본관 | 능성 구씨[4] |
자 | 이율(而栗), 경률(景栗) |
부모 |
부친 - 구양(具楊) 모친 - 윤사영(尹思永)의 딸 |
부인 | 청주 이씨 - 이중부(李仲扶)의 딸 |
자녀 |
슬하 1남 4녀 장남 - 구경(具慶) 장녀 - 박휘(朴暉)의 처 차녀 - 권영손(權永孫)의 처 3녀 - 조선(趙選)의 처 4녀 - 류익후(柳益厚)의 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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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영의정이다.2. 생애
1429년 사마시(생원시)에 합격하고, 1434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초기에는 한직을 전전하였으나 이후 승승장구하여 좌익좌리공신이 되었고,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의 요직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 하는 과정에서 계유정난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중외병마도통사(中外兵馬都統使)로 이징옥의 난 진압에 나설 때, 구치관이 도통사 종사관으로 임명되면서 세조가 그를 눈여겨 보았다고 한다. 세조는 "경을 늦게 안 것이 한스럽다"고 할 정도로 구치관을 높게 평가하였다.사육신 사건 당시 국문을 실질적으로 구치관이 담당했었다. 당시 세조의 친국은 첫날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구치관이 담당했다. 하지만 그렇게 활약이 두들어지지는 않았는지 남효온이 지은 소설 육신전에서의 사육신 일화에서 구치관은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행적은 해동명신록과 여지승람에 실려있다. 그는 세조 즉위 과정에서 아무런 공이 없다 하였고, 실제 정난공신 명단에도 없다. 그렇게 세조 즉위 과정에서 아무런 공이 없었지만 세조는 그를 신임하여 동부승지, 이어서 좌승지에 임명하였으니 세조를 최측근에서 보필하였다. 이후 이조참판, 병조참판으로 임명되어 이조와 병조의 인사를 실질적으로 관장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이징옥의 난 때 함길도에서 역당을 제거하고, 그를 보필하게 되면서 큰 신임을 받게 되었고, 세조에게 문무를 겸비했다는 칭찬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족보에 출장입상(出將入相,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된다는 뜻으로, 문무를 다 갖추어 장상(將相)의 벼슬을 모두 지냄을 이르는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구치관은 문관인데도 무관들이 맡는 절도사(節度使)에 임명되었고, 훗날에는 대장군(大將軍)의 지위를 받았다.
세조는 북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핵심 측근들과 대책을 세웠는데, 구치관은 반드시 포함되었다. 그를 평안도 절도사에 제수하고 나서는 "이제 나는 다시 서쪽을 돌아보지 않을 것(不復西顧)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구치관이 있으니 굳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뢰를 표현한 것이다. 그가 돌아오자 세조는 그를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대신들이 서로 말하기를, 곧은(直) 사람이 전형(銓衡) 즉 인사의 업무를 책임지게 되었으니 공도(公道)가 바르게 펼쳐질 것이라 하였다. 그 후로 함경도 지역이 위험하다고 하니 이번에 구치관은 함경도 도체찰사로 임명받았다. 세조는 "경(卿)이 평안도를 관할하고 이제는 함경도로 가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매우 편치 않다. 그러나 변방의 일이 지극히 중하니 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북방에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오자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했고, 다음 해에는 의정부 좌찬성에 임명하였다. 그해 세조가 강원도 철원 지방으로 사냥을 떠나게 되었는데, 세조를 호종하기 위해 지방에서 징발된 병력의 규모가 기병 7,800, 보병 2,400에, 한양에서부터 이동하는 병력만 기병 2,400, 보병 3,600이었다. 이 모든 병력은 구치관이 지응사(支應使)로 임명되어 지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가가 강원도 철원에 이르러 마침 비가 내리자 구치관이 세조의 허락도 없이 독단적으로 군대를 움직여 파진하였다. 임금을 호종하는 군대를 독단적으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크게 오해를 살 수 있는 일로[5] 이에 승정원에서 구치관을 의금부로 압송하어 국문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세조는 구치관의 뜻은 갑자기 비가 오니 군사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리한 것일 뿐이라며 구치관을 옹호하여 아무런 문제없이 넘어갔다. 세조가 구치관을 얼마나 신임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후로도 승승장구하여 벼슬이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이르렀고, 이후 정승에서 물러났어도 북방에서 변고가 발생하면 세조는 구치관을 찾았다. 건주위 이만주 토벌 후 그 잔당들이 남아 기승을 벌일 조짐을 보이자, 세조는 구치관을 진서대장군(進西大將軍)으로 임명하여 만주로 보내면서 조정에서 이르기를, "능성은 나의 만리장성이다."라고 하였다.
사후 순성 붕량 경제 좌리 공신 호를 추증받았으며, 정질(貞質)·정간(貞簡)·정소(貞昭) 등의 시호를 봉상시에서 논의했으나 "'능성은 평생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청백하게 조심하여 살았다. 지금 아뢴 바 시호는 실제에 부응하지 아니하니, 다시 의논해서 아뢰라.""라는 명에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실록에 따르면 구치관은 용모와 행동이 엄숙하고 확연하게 지키는 것이 있어서 이익과 세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몸가짐을 청백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니,[6] 생업(生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죽던 날에는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세조 대의 고위 관료들 중 거의 유일하게 청렴하게 살았던 대신으로 당시 큰 뇌물 사건이 터졌을때, 고위 대신들 중에서 연관되지 않은 유일한 한 명이 구치관이었다. 전형의 임무를 맡았으나 뽑아 쓰기를 모두 공평하게 하였으니, 혹 청하는 자가 있으면, 관례상 옮길 사람도 도리어 옮겨주지 않았고, 고관의 자제일지라도 오히려 이들을 먼저 도태시켰다. 이런 면모 때문에 졸기에 따르면 어떤 이들은 구치관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편벽하고, 거짓으로 이름을 낚는다고 비방하였다고 한다.
세조의 신임을 받으며 요직을 거치면서도 죽어서는 장례를 지낼 돈조차 없을 정도로 재산을 남기지 않았으나, 이런 그의 올곧음은 훗날 구치관 일가와 자손들이 번성하며 능성 구씨 일문이 조선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하는 토대가 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열미리에 있다. 신도비에 새겨져 있는 글은 사가정 서거정이 지었으며 족보에 써져 있는 글은 사간 박효원이 지었다.[7]
구치관 졸기를 보면 더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으니 참고바람.
3. 경력
년도 | 지위 | 비고 |
1434년 | 문과 급제 | |
정9품 승문원정자 | 관찬 서적의 교정 및 주요 제향 축문 관장 | |
정9품 예문관검열 | 왕의 측근으로 왕명 대필 등의 사무 관장 | |
정8품 예문관대교 | 사고 서적의 관리와 왕과 신하의 대화 기록 관장 | |
정7품 승정원주서 | 승정원일기 기록 등의 업무 관장 | |
정6품 사헌부감찰 | 관리의 비위 규찰 | |
종5품 황해도사 | 지역관리 비위 규찰 | |
1455 | 종2품 이조참판 | 능성군 봉직 |
1457 | 종2품 호조참판 | |
1457 | 평안도절도사 | |
1462 | 종1품 우찬성 | |
1466 | 정1품 영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