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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쿠크 시타델. 북쪽의 아르빌에 묻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기독교의 성인이자 이슬람에서도 존중받는 다니엘 영묘. 아랍 지역에서 보기 힘든 푸른 돔이다
아랍어 كركوك
쿠르드어 کەرکووک
튀르키예어 Kerkük
시리아어 ܟܪܟܘܟ
영어 Kirkuk
1. 개요
이라크 북부의 도시.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200km, 아르빌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진 평원에 위치해 있다. 동명의 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약 60만명이다. 티그리스 강의 지류인 카사 강변에 위치한 키르쿠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에 세워진 아라파에서 기원한, 유서 깊은 도시이다. 다만 중세를 거치며 쇠퇴하였다가 1927년 교외의 바바 구르구르에서 이라크 최초의 유전이 발견되며 번영하게 되었다.키르쿠크는 위치상 아랍인, 쿠르드인, 튀르크인들을 중심으로 소수의 아시리아인이 거주하는 민족적으로 다양한 도시이다. 그러한 이유로 북쪽의 쿠르드 자치정부의 편입 시도가 빈번하며, 따라서 이라크 정부에게 매우 중요한 북방 거점이다. 2014년 ISIS가 남쪽 100km 의 티크리트를 점령한 후 키르쿠크 군사기지의 이라크 군이 철수하자 쿠르드 민병대가 점령하였으나 2017년 이라크 측에 평화적으로 반환하였다.
2. 역사
키르쿠크 일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초엽인 우바이드 기부터 인간 거주의 흔적이 나타난다. 기원전 3000년경 서남쪽 10km 지점에 누지 유적이 형성되었다. 기원전 2300년 경 아카드 제국기에 아라파로 불렸고, 이후 아카드를 멸망시킨 구티인들이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구티 왕조는 단명하였고, 아라파는 곧 신 수메르 제국을 거쳐 고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함무라비 대에 잠깐 바빌로니아에 점령되었던 도시는 기원전 1725년 다시 아시리아령이 되었다. 한편 그무렵 아라파 일대는 쿠르드인의 조상 격인 후르리인들이 정착하였는데, 결국 기원전 1450년경 그 종주국인 미탄니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 역시 오래가지 않았고, 이후 아라파는 약 800년간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11세기, 중기 아시리아 제국 후반부터 아라파는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번영하였다. 기존 후르리인들은 축출되거나 아시리아인에 동화되었다.기원전 609년 경 신아시리아가 멸망한 후 아라파는 앗수르 주의 일부로써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셀레우코스 왕조 등의 지배를 받았다. 앗수르 일대는 이민족들의 지배에도 아시리아의 정체성을 유지하였고, 파르티아 제국기에 중앙 정부의 느슨한 통제를 틈타 앗수르에는 여러 아시리아 후계 국가들이 세워졌다. 아라파는 그러한 소국들 중 하나인 베트 가르마이 (ܒܝܬܓܪܡܝ, 기원전 160년 ~ 서기 250년)의 수도였다. 하지만 3세기 파르티아를 대체한 사산 제국은 이러한 소국들을 멸하고 아시리스탄 주를 설치하였다. 한편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라크에도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을 위시로 한 기독교가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티크리트와 함께 아라파는 단성론에 속하는 시리아 정교회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341년, 사산 조의 황제 샤푸르 2세의 아시리아 기독교인 박해로 1150명이 순교하였다.
사산 제국기의 박해와 7세기 이슬람화 이후의 과세로 키르쿠크의 기독교 공동체는 쇠퇴하였다. 다만 14세기 이후 절멸한 티크리트와 달리 키르쿠크에는 현재까지도 1.3%에 불과하긴 하지만 아시리아 기독교 공동체가 남아있다. 중세에 셀주크 제국, 장기 왕조, 일 칸국, 백양 왕조, 오스만 제국 등의 튀르크 국가들의 지배를 받으며 키르쿠크에는 다수의 튀르크인들이 유입되어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게 되었다. 1918년, 1차 대전의 일환으로 영국군이 키르쿠크를 점령하였다. 영국은 석유의 존재 가능성 때문에 아랍인 비율도 낮은 앗수르 지방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의 이라크 왕국에 편입시켰다. 이후 이라크 왕국이 세워짐과 거의 동시에 키르쿠크의 북서쪽 교외인 바바 구르구르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다. 바바 구르구르는 바위 틈의 천연가스 덕분에 항상 불이 붙는 장소로, 이라크 전역에서 여인들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원하러 오는 민간 신앙의 장소였다.[1]
한편 유전의 발견으로 키르쿠크는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동시에 본래 튀르크인이 주로 거주하던 도시는 석유 산업 때문에 몰려든 아랍인, 쿠르드인들로 인해 다양성을 지닌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1957년 통계에 의하면 키르쿠크의 주민 구성은 튀르크인이 여전히 37.6%로 가장 많았지만, 32.3%의 쿠르드인과 22.5%의 아랍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였다. 후세인 정권의 아랍화 정책으로 튀르크인들은 스스로 아랍인이라 표기해야 했고 다수의 쿠르드인들이 축출되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떠났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키르쿠크를 두고 이라크 정부와 쿠르드 자치 정부는 극렬히 대립하였다. 결국 21세기 들어 이라크 전쟁 후 추방되었던 쿠르드인들이 귀환하고 후세인 정권기에 이주되었던 쉬아파 아랍인들이 도시를 떠나며 과거의 인구 비율이 얼추 복구된 사례이다. 오스만 시절의 도시 유적과 과거 아라파 유적인 시타델 등을 이유로 키르쿠크는 2010년 이라크의 문화수도로 선정되었다.
[1]
이는 20세기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