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6:09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고대 로마의 정치가.

풀네임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피우스(Sextus Pompeius Magnus Pius, BC.67 ~ BC.35). 대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라고 부른다. 여기서 피우스는 아그노멘(별명)으로 효자라는 뜻이 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피우스'도 이 뜻이다.[1]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자신이 아버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스스로 이런 아그노멘을 붙였다고 한다.

2. 생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적인 장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전전했으나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넘어 로마로 진군하면서 아버지와 형은 그리스로 도피하지만 본인은 계속 로마에 남는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연전연패하면서 세력을 거의 상실하자 로마를 빠져나와 아버지와 다시 합류한다.

그러나 이후 아버지가 암살당하자[2] 그의 형 그나이우스가 있는 아프리카로 갔다. 탑수스에서 공화파가 패하고 소 카토가 자살한 뒤에는 형제가 같이 스페인으로 도망쳤다. 여기서 폼페이우스 씨족은 매우 인기가 있었기에[3] 형제는 열세개의 군단을 조성하여 카이사르에게 맞섰다. 그러나 문다 전투에서 괴멸당하고 그나이우스는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섹스투스는 스페인의 오지로 도주하였고, 카이사르는 그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여 사면해주었다.

그러나 이건 실수였다. 섹스투스는 스페인 부족들과 공화파의 지원하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4] 이 와중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공화파는 폼페이우스의 아들이자 스페인에서 독립적인 세력권을 구축한 섹스투스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기원전 43년 원로원은 그를 해군 및 해안 제독으로 임명했다. 섹스투스는 자신의 세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시칠리아로 갔고, 총독을 구슬려 시칠리아를 넘겨받고 통치했다.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되어 공화파가 괴멸당하자 섹스투스도 살생부 명단에 올랐으나, 이미 시칠리아를 장악한 섹스투스에게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섹스투스는 로마로의 곡물 수입을 막았고, 로마는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섹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시도했지만, 옥타비아누스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안토니우스는 이를 거절했다.[5][6] 거기다 때마침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가 죽자 옥타비아누스와 브룬디시움 협정을 맺고, 그의 누이가 안토니우스와 결혼하여 동맹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안토니우스는 식량난에 분노한 로마인들의 폭동에 옥타비우스가 생명이 위험할때 군대를 이끌고 이를 진압하고 구해주기까지 했다.

이제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부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섹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와 강화를 하기로 했다. 그들은 미세눔 조약을[7] 맺었고, 섹스투스의 추종자들과 공화파들은 시민권을 되찾았으며, 섹스투스는 이미 점령하고 있던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에 더하여 펠로폰네소스의 반도를 얻었다.[8] 당시에는 섹스투스가 많은 이득을 취한 것처럼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자 시민권을 되찾은 망명자들이 섹스투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가면서 이것이 명백한 실책임이 분명해졌다. 또한 메노도루스가 섹스투스에게 실망하여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하여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잃게 되었다.

메노도루스의 귀순으로 자신감을 얻은 옥타비아누스는 협정을 깨고 섹스투스에게 시칠리아 내전을 일으켰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편지를 써서 전쟁을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충고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무시했다. 그러나 섹스투스는 메노도루스와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모두 격파했고(메시나 해전) 옥타비아누스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서 달아났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였던 아그리파가 갈리아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왔고, 그의 구원요청에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가 응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동시에 시칠리아로 향했고,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배를 지원해주었다. 다행히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폭풍우를 만나 격파되었지만, 레피두스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해 거점을 확보했다. 아그리파는 밀라이에서 섹스투스 함대를 격파했고, 시칠리아섬의 북쪽 항구들을 장악했다. 그러나 섹스투스는 추가로 상륙하는 레피두스의 군단을 격파했고, 다시 상륙을 시도하는 옥타비아누스의 군단을 격파했다.[9]

그러나 계속해서 상황은 불리해졌다. 아그리파는 북쪽 항구들을 장악했고, 옥타비아누스는 23개 군단을 시칠리아에 상륙시키는데 성공했으며, 레피두스는 섹스투스 최후의 거점이었던 메사나를 함락시키고 8개 군단의 항복을 받아냈다. 섹스투스는 미틸리네로 도망갔다. 이후 아시아에서 3개 군단을 모집했고 파르티아 왕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체포되어서 기원전 35년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3. 여담

보다시피 이름이 심히 아스트랄해서 소재로 꺼내기 좀 민망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 영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섹스투스(Sextus)는 당연히 섹스와는 관련이 없고 단순히 라틴어로 '여섯 번째'라는 뜻이다. 즉 섹스투스는 섹스광이 아니라 폼페이우스의 여섯번째 자식이라는 뜻이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의 내전의 한축을 담당하고 옥타비아누스를 상당히 애먹인 인물임에도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에 비해 존재감이 미약하며 로마사를 간략히 다룬 서적에서는 무시당할때가 많다.

사후에 쓰인 역사가들의 기록에서는 은근히 해적이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은데, 동시대의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했던 위대한 로마귀족이라고 생각했다.[10] 부전자전이라고 그의 군사적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스페인에서 빈손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해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것,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해군 제독이 되고, 군대를 모조리 끌고 시칠리아로 가는 도박을 해 지중해를 장악하는것은 고작 20대 초반에 이룩한 일이었다. 세력에서 열세였음에도 옥타비아누스를 여러번 격파했고, 심지어 그의 뛰어난 해군제독이었던 메노도루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한 이후에도 승전을 계속했다. 사실 섹스투스는 2차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11]

그러나 전략적인 시각이 부족했다.[12][13] 미세눔 조약때 섹스투스는 많은 이득을 얻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망명자들이 로마로 돌아가버리게 하는 크나큰 실책이었다.[14] 펠로폰네소스 반도 역시 거리가 하도 멀었고, 안토니우스가 지배권을 넘겨주길 거부하여 그의 세력권이 되지 못했다. 섹스투스가 받은 유산은 위대했던 아버지의 명성밖에 없었는데, 미세눔 조약으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들과 타협하게 되면서 공화정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도 희석되었다. 이에 실망한 메노도루스가 샤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들고 이탈해버렸고, 그의 세력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러한 행동을 조금 변호하자면, 섹스투스 역시 삼두정치의 분열을 노리고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을 시도했다. 일각에서는 미세눔 조약을 맺지 않고 계속 로마를 압박했다면 됐을거라고 말하는데, 브룬디시움 협정이 맺어진 시점에서 섹스투스는 안토니우스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시칠리아와 샤르데냐만으로 로마 전 세력과 싸우는 것은 가망없는 일이었고, 실지로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협약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키고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가 그를 도우면서 현실이 되었다.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이 실패로 돌아간 시점에서 이미 가망없는 일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섹스투스 혼자의 실책이 아니라 동시대 다른 정치인들, 특히 가장 강력한 세력을 확보한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 비해 전략안이 심각하게 모자랐던게 근본 원인이었다.[15]


[1] 그 외에 자신의 이름에 충실한, 신에게 충실한, 믿음직스러운 등에 뜻이 있다. 앤서니 에버렛의 저서인 아우구스투스에서 자신의 이름에 충실한 이라고 써놨지만 전후맥락을 볼때 효자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 타당하다. [2] 당시 섹스투스는 이 장면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았다. [3] 그의 아버지 大폼페이우스는 스페인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총독으로 재직한 바 있었다. [4] 아피아노스는 이렇게 기술했다. "섹스투스는 뛰어난 기동력으로 예기치 않은 순간에 출현했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의 군대는 끊임없이 적을 괴롭혔다. 마침내 크고 작은 수많은 도시들이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5] 특히 이를 강하게 추진했던 것이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와 어머니 율리아 안토니아였다. 율리아는 섹스투스를 만나서 동맹제안을 가지고 안토니우스에게 전하기까지 했다. [6] 다만 아무래도 카이사르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끊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는 건 아무리 안토니우스라고 해도 부담이 갈 만한 일이었다. 특히 안토니우스도 카이사르 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권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았다가는 자신의 휘하 병사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고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끊자 많은 수의 안토니우스 휘하 병사들이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도망쳤다. [7] 특이하게도 이 협상은 바다위에 두개의 구조물을 설치하여,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고함을 쳐가면서 협상을 했다고 한다. 이는 어린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섹스투스가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8] 조약이 맺어지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가 섹스투스의 기함에 올라와 대접을 받았다. 이때 그의 부하였던 메노도루스가 섹스투스에게 이들을 모두 죽이고 로마 전체의 지배자가 되라고 권유했으나, 섹스투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메노도루스, 그대는 나한테 얘기하지 않고 먼저 그렇게 했어야 했다. 이제는 다 끝났다. 우리는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해야 한다. 나는 약속을 어길 수 없다." 이 일화는 윤색의 논란이 있다. 당시 이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바다에 설치한 구조물에서 협상을 벌이기까지 했는데 이런 일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기에 당시에 섹스투스의 고지식함에 대한 로마인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말도 있다. [9]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종자 한명과 함께 간신히 해안에 상륙했다고 한다. 그는 섹스투스의 함대로부터 계속 도망쳐야했고, 그 와중에 살생부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한 참모 장교의 노예가 그를 죽이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악지대의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여 도와주었고, 결국 그를 기다리던 군단에게 돌려다 주었다. [10] 사실 원로원파는 원래 로마의 수뇌부였으므로 이들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카이사르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쥐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카이사르가 명분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원로원은 갈리아에서 승리하고 로마를 구한 카이사르를 견제의 차원을 넘어 아예 죽이려고 했기 때문. 그렇다고 카이사르가 무슨 뚜렷한 죄를 지은 것도 없고 거기다 카이사르가 몇 번이나 타협안을 제시했는데도 원로원은 이를 거부하고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카이사르의 무조건적인 굴종과 무장해제만을 요구했는데, 이는 사실상 카이사르를 불법적으로 살해하겠다고 공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11] 섹스투스와의 싸움에서 적어도 3차례 옥타비아누스는 죽을 위기에 처했다. 구체적으로 로마의 기근으로 인해 민중한테 죽을뻔한 일, 메시나 해전에서 함대가 격파당하고 홀로 도망친 일, 다시 시칠리아 상륙을 시도하다 격파당해 혼자 도망친 일이다. 반면 레피두스는 힘없이 옥타비아누스에게 권력을 뺏겼고, 안토니우스도 자폭만 하다가 스트레이트하게 밀렸다. [12] 아피아노스는 구체적으로 섹스투스는 뚜렷한 전략적 목표가 결여되어 있었고, 성공의 여세를 몰아붙이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13] 그의 아버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역시 전략, 전술에서는 매우 뛰어났지만 정치는 완전 잼병이나 다름없어서 삼두정치 시절에는 거의 카이사르가 일을 주도했었다. [14] 다만 다른 한편으로 로마로 돌아간 공화파들이 다시 얼마간 세력을 형성했고, 섹스투스는 이탈리아의 기근으로 잃었던 그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어느정도 지지를 받을수는 있었다. 섹스투스 역시 로마 정계에서 거물이 되긴 했다. 다만 카이사르의 내전 이후 이제 권력은 로마 정계의 지지가 아니라 칼과 창에 있었다는 것을 섹스투스는 파악하지 못했다. [15] 그렇다고는 해도 당시에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할 이유가 없었다. 애시당초 이 시점에서 두 사람(사실은 레피두스까지 포함해서 세 사람)은 다 카이사르 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싸우는 것보다 서로 힘을 합치는 쪽이 훨씬 더 이득이었고 특히 안토니우스는 삼두 정치의 결과로 가장 이득을 많이 본 쪽이었는데 그가 차지한 부유한 동방에서는 가만히만 있어도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었던 데다가 삼두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영향력도 막대했으므로 굳이 원로원파인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을 필요도 없었고 이득도 없었다. 오히려 괜히 로마를 공격했다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42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42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