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17 01:02:51

박태화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승려. 법명은 학림(鶴林).

2. 생애

1919년 10월 15일,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났다. 1934년 보현사 불교학원에 입학, 1936년에 졸업했으며 1937년부터 보현사에서 수행하였다.[1] 해방 이후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1946년 북한에서 조직한 어용조직인 불교도연맹 함경북도위원회 부장이 되었다. 1955년 인민경제대학에 입학하여 1958년에 졸업했다고 한다. 이때는 박태호라는 이름을 썼다.

1959년 불교도연맹 함경북도위원장에 임명, 10년간 재임하였으며, 1970년 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79년 9월, 불교도연맹 위원장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김일성이 어용 종교인들을 대남, 대일 외교에 활용하면서 활용도가 높아졌고[2],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989년 5월, 조선종교인협의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89년 11월, 최덕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통일정책심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91년 1월, 범민련 북측본부 중앙위원에 선출, 1991년 7월, 조일 우호친선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1991년 10월, 조선불교도연맹 대표단장으로 미국까지 다녀왔다.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3년 7월, 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이 되었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1996년에 대선사 칭호를 얻었다고 하는데 남한 언론을 보면 이미 그 이전부터 대선사라고 불리고 있다. 1996년 9월, 려연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박태호란 이름 대신에 박태화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1998년 8월 10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 1999년 7월, 김병식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남북 데탕트 시기 남북 불교 협력 관련해서 많은 활동을 했으며 2002년 3월 27일, 김일성 탄생 90주년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9월 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2004년 12월, 6.15 공동선언 실천 북측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2005년 11월 11일 정오, 86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조국전선,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박태화위원장은 해방후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불교도들을 새조국건설과 전쟁승리에로 조직동원하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그는 전후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제시하신 사회주의건설로선과 조국통일방침을 높이 받들고 해내외 불교도들과의 련대와 단합을 위하여 모든 정력을 바쳐 사업하였다. 조국과 민족앞에 세운 공로로 하여 그는 《김일성훈장》을 비롯한 많은 국가표창을 수여받았다. 박태화위원장은 생전에 그처럼 념원하던 조국통일의 날을 보지 못하고 우리곁을 떠났으나 조국과 민족앞에 세운 그의 공로는 길이 남아있을것이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후임 불교도연맹 중앙위원장으로는 2006년 류영선이 선출되었다.

이후 2007년 8월 1일, 애국렬사릉에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생전 박태화의 밑에서 배운 조불련 소속 책임지도원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북한 불교계에서는 중흥조 취급을 받는다.

3. 참고문헌

  • 2005 북한의 주요인물(서울: 통일부, 2005).

[1] 박태화의 은사 스님이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가 출가할 당시 보현사 주지였던 김법룡 스님 혹은 그 이전에 주지로 있었던 박보봉 스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2] 이때 동원된 어용 종교인들은 대부분 일제 시대 이전 진짜 종교인들이었다. 종교알못인 북한 입장에서 가짜 종교인들을 육성할 능력도 여력도 안되었기 때문. 기독교계의 강량욱, 고기준 등도 모두 해방 이전 진짜 목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