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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1 ~ 2009북한의 정치인.
2. 생애
통일부는 1936년 평양 출신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나, 북한의 부고를 보면 1931년생으로 추정된다. 화룡유격대에서 정치위원으로 복무한 리영찬의 아들로 태어나 해방 이후 만경대혁명학원에 들어갔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였으며 이후 군에 잔류하여 1970년 소장에 이르렀다고 한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원래는 교통 쪽에 근무하여 1974년 정무원 체신부 산하 해운부장에 있었으며,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정무원 륙해운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유임되었다.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때 장의위원 서열이 양형섭보다도 높은 것을 봐서는 사회안전부장에 이미 임명되었던 상태로 보인다. 이후 1984년 6월 15일, 방북한 중국공안부장 류푸즈에게 사회안전부장 자격으로 연회를 베풀어 국가보위부장으로 이동한 리진수의 뒤를 이어 신임 사회안전부장에 임명된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1984년 7월 6일부터 7월 9일 사이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6기 9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리철봉의 사회안전부장 재임은 매우 짧았는데, 1년도 되지 않은 1985년에 백학림에게 부장 자리를 넘겨주고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으로 강등되었고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탈락하였다. 김정일은 소련 대사와의 회담에서 리철봉이 해임된 이유는 지나친 음주 습관 때문이며 중국 대표단 앞에서 보드카 2병 반을 마시고 만취해서 인사불성이 되는 추태를 보이는 바람에 해임됐다고 설명했다.
1987년 8월, 리진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9년 1월 20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산하에 도시경영부가 부활하자 도시경영부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정무원 도시경영부장에 유임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과 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도시경영부와 국토환경보호부가 통합되어 도시경영 및 국토환경보호성이 됨에 따라 도시경영부장에서 물러나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옮겼다. 1999년 철도성 정치국장으로 이동했다.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2005년 철도성 정치국장에서 물러나 2006년에 최원익 사망 이후 5년간 공석이었던 강원도당 책임비서에 임명된 것이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성공을 환영하는 강원도민 대회에 출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김정일 현지지도에도 수차례 동행했다. 2007년 6월, 리인모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8년에는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그에겐 영향이 없던 걸로 보인다.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09년 4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예산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 25일에 교통사고로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2월 27일자 로동신문은 당중앙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공동 명의의 부고를 게재하고 "리철봉동지는 당과 수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여온 우리 당의 충직한 혁명전사이다. (...) 리철봉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 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령도에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매우 좋게 말해주었다. 후임 강원도 당책으로는 백계룡이 임명되었다.
3. 여담
리철봉의 아들 리성호는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2022년 현재 조선인민군 상좌로 복무하고 있다고 전해진다.4. 매체에서
북한 소설 <봄에서 봄으로>에 군인 시절의 젊은 리철봉이 등장한다. 외제 신무기를 들여와야 미국에 대항할 수 있다고 보는 일부 군인들의 주장에 갈팡질팡하는 그를 김일성이 주체사상이면 다 이길 수 있다는 개소리로 세뇌하는 내용.(...)5. 참고문헌
- 통일부 통일정책국 정치사회분석과, 북한의 주요인물 2008(서울: 통일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