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16:45:06

빌 클린턴/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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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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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긍정적 평가
2.1. 미국 역사상 최고 호황기를 이끈 대통령2.2. 사상 최대 규모의 재정 흑자2.3. 민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다2.4. 소수자 친화적 행보2.5. 코소보 독립에 기여
3. 부정적 평가
3.1. 지퍼게이트3.2.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글로벌 금융 위기 야기3.3. 러스트 벨트의 원흉3.4. 총체적인 외교 실패
3.4.1. 우크라이나 전쟁 원인 제공 논란3.4.2. 일본에서의 외교 결례 논란3.4.3. 한국에 대한 가혹한 대우와 정점을 찍은 한국 내 반미 여론3.4.4. 러시아를 다시 적으로 돌린 장본인3.4.5. 인도 총리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다3.4.6. 중동 정책의 실패3.4.7. 숨은 원흉 앨 고어
4. 논란이 있는 평가
4.1. 중국의 WTO 가입 찬성4.2. 글래스-스티걸 법안 폐지

1. 개요

미국 대통령을 지낸 빌 클린턴의 재임 시절 평가를 기록한 문서.

2. 긍정적 평가

2.1. 미국 역사상 최고 호황기를 이끈 대통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ow_jones.png
다우 존스 산업 평균 지수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이끈 대통령이었다. 베트남 전쟁 금 본위 제도 포기 선언, 오일 쇼크 등의 지긋지긋했던 악재들은 페트로 달러 체제와 폴 볼커 총재의 긴축 통화 정책 등을 통해 해결하며 기존의 중공업에서 부가 가치가 높은 금융 첨단 산업으로의 체질 개선에 성공한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40여 년간 대립하던 소련의 붕괴로 인해[1]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 주도로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 어느 국가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제적인 면에서 제조업 위주로 미국을 넘보던 일본도 마찬가지로 내수 금융 시장이 붕괴되며 버블의 후폭풍으로 잃어버린 10년을 맞게 되었으며[2] 중국 최빈국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3] 아직 주목할 만한 정도로 성장하기 이전 시기였다. 즉 미국의 영향력에 다가갈 만한 국가가 전무했던 시기였다.

1인당 GDP도 1998년 잠깐 일본의 1인당 GDP를 앞지른 것을 시작으로 2001년 이후 쭉 일본보다 우세를 점하게 되었고, 클린턴이 물러난 2001년부터 2002년까지는 간만에 1인당 GDP 5위에 들어왔다.

2.2. 사상 최대 규모의 재정 흑자

파일:Us fed deficit and surplus.png
1970년대 ~ 2020년대 미국 연방 정부 재정 적자와 흑자
지미 카터 행정부의 재정 남용과, 레이건 행정부 당시 국방예산 증액으로 인해 미국의 재정 적자는 날로 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적절한 증세 및 지출 상승 억제를 통해 첫 임기 중 재정 적자를 점점 줄이더니 결국 두 번째 임기 중인 1998년에는 흑자로 돌려놓고, 임기 말인 2000년에는 역사상 최대 규모인 2,362억 달러 규모의 흑자를 달성하였다.

이는 1947년부터 1949년까지 3년간 이어진 재정 흑자 이후 50년 만에 있던 재정 흑자였다. 이를 통해 GDP 대비 국가 채무 규모도 1993년도 47.8%에서, 2000년도에는 33.6%로 대폭 감소하였다.

레이거노믹스의 대폭적인 감세로 인해 재정 적자가 과거에 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증세를 한 이후에 세율은, 여전히 레이건 이전 시대의 세율보다 대폭 낮았다. 즉 레이거노믹스로 경기를 회복권에 올려두고, 이후 아버지 부시를 거쳐 정권을 이어받은 빌 클린턴이 적절히 대처하여 경기 호황과 재정 흑자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2001년부터 집권한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감세와 전쟁이라는 파격적인 이벤트로 재정 흑자가 다시 막대한 규모의 적자로 돌아서고, 결국 2008년도에 대침체를 맞으면서, 미국의 재정 흑자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상태가 2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2.3. 민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래 60년 만에 최초로 8년 임기를 마친 민주당 대통령이 되었다. 또 퇴임 8년 뒤 후임 민주당 대통령이었던 오바마의 당선, 재선과 함께 보수화되었던 미국 정치판의 축을 돌리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뉴딜 동맹이 깨진 이후 고전하던 민주당으로서는 반격의 신호탄 같은 인물이다. 클린턴은 1968년 대선 이후 카터 1회를 제외하고는 5패, 특히 레이건 이후 3연패를 당하고 있던 민주당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인물이다. 물론 그의 시대 역시 미국에서 보수가 강한 시대였지만, 그런 그가 여러 잡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8년 임기를 무사하게 마치는 데 성공했다는 점과 임기 말에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며 2000년 대선을 박빙으로 만들어놨다는 점은 정치인으로서 고평가받을 만하다.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의 전통적 아성이었던 캘리포니아주를 2023년 현재까지 막강한 블루 스테이트로 만든 대통령도 역시 이 사람이다. 미국 최대 인구와 경제력을 가진 캘리포니아주를 민주당의 아성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이후 민주당 후임 대통령들인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이 비교적 쉽게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는 클린턴 대통령 집권기 시절, '정보 고속도로' 정책을 통해, 미국 서부 지역에 IT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현재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IT 기업들의 다수가 클린턴 대통령 시절 창립된 경우가 많다.[4]

2.4. 소수자 친화적 행보

아래에서 보듯 소수 민족과 성 소수자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폈으며, 환경 정책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미군 동성애 정책을 일신한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다(Don't ask, Don't tell)" 정책, 즉 DADT도 큰 성과 중 하나다.[5] 로버트 라이시(노동부 장관)와 같은 젊은 관료와 로이드 벤슨(재무장관) 같은 경륜의 인물도 잘 등용했다.

2.5. 코소보 독립에 기여

국외에서는 1차 북핵 문제와 관련된 인상 때문에 한국에서는 온건파로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 코소보 공습도 클린턴의 당시 업적(?) 중 하나다. 특히 코소보 공습 때 미군을 파견하여 당시 코소보 분리 독립에 반대했던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찍소리 못 하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2008년 코소보는 결국 독립하게 된다.[6] 문제는 코소보 공습을 결단한 시점이 자신이 르윈스키 스캔들로 코너에 몰려있고, 의회가 탄핵을 착착 준비 중이던 때라는 것. 이런 상황이 영화 'Wag the Dog'에서 비꼬이기도 했다. 이런 업적으로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에는 빌 클린턴 대로가 존재한다.

3. 부정적 평가

3.1. 지퍼게이트

네셔널 지오그래픽의 응답하라! 1990's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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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녀 모니카 르윈스키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 시절부터 여자 문제로 트러블이 매우 많았다. 1990년 9월 중순, 주지사 연임을 시도하던 클린턴을 아칸소주 개발 재정국에서 해고된 직원 래리 콜린스가 "클린턴이 아칸소주의 재정을 유용하여 다섯 명의 여자와 간통을 했다."라고 폭로한 것이다. 클린턴은 아무것도 모르고 출근하다가 AP 통신의 기자 빌 시먼스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기겁했지만, 매우 침착하게 시먼스 기자에게 콜린스가 지목한 여자들과 인터뷰할 것을 요청했고 시먼스는 다섯 명 전부에게서 그런 적이 없다는 진술을 받았다. 하지만 공화당에서 이를 놓칠 리 없었고, 공화당 주지사 후보 셰필드 넬슨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클린턴을 부도덕한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여자들이 자꾸 이러면 고소하겠다고 반발했고 콜린스의 증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터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외에도 클린턴이 주지자로 재직하던 시절 호텔에서 그에게 섹스를 강요당했다고 주장한 폴라 존스, 12년간 클린턴과 혼외정사를 했다고 주장한 제니퍼 플라워스, 성매매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등의 스캔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제일 유명한 스캔들은 재임 당시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1973 ~)와의 불륜 스캔들, 속칭 지퍼게이트이다. 모니카는 펜타곤의 공보직으로 근무하는 동료 린다 트립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클린턴과의 관계를 허물없이 털어놨는데, 린다가 이 내용을 녹음하고 언론에 공개하면서 시작되었다.[7]

미국에서는 주에 따라 간통죄의 존재 여부와 이에 대한 태도가 다른데, 대도시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뉴욕을 비롯한 동북부 지역이나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서부 지역 등에서는 정치인들의 성 문제에 있어 좀 관대한 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텍사스를 비롯한 남부 지역이나 러스트 벨트 지역 등에서는 정치인의 성 문제에 있어서 민감하게 대응한다. 게다가 대선에서 클린턴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매우 보수적인 주라 남부 전략에 의해 민주당의 지지 기반에서 공화당의 지지 기반으로 변해가는 아칸소 루이지애나에선 특히 난리가 났었고,[8] 결정적으로 클린턴이 법정에서 위증 및 위증 교사를 하면서 케네스 스타 특별 검사에게 털리고, 하원에서 탄핵 의결이 통과되어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되었고 연방 대법원에서 '더 이상 우리 법원에서는 변호사로 활동할 수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9] 거기다 시가를 좋아하는 클린턴이 르윈스키의 음문 시가를 보관했던 일화를 비롯한 성적인 보도가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거기에 공화당이 장악한(공화당 228 : 민주당 205 : 무소속 1) 하원에서 기어이 탄핵안이 통과가 되면서 클린턴 행정부는 완전히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하지만, TV 생중계 등을 통해 대통령에게도 사생활이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하자 여론이 어느 정도 클린턴에게 동정적으로 돌아서고 중대한 사건이 아님에도 거짓말 한 번 잘못했다고 탄핵은 좀 지나치다 싶었는지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되면서 가까스로 대통령 자리는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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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르윈스키 스캔들로 한창 곤경에 빠졌던 클린턴을 바라보는 아내 힐러리의 모습. 이 사진은 1999년 퓰리처상 보도 사진상을 수상했다.

물론 이 시기에 아내인 힐러리와의 관계는 당연히 막장으로 치달았다. 이혼을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 힐러리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 남편을 반갑게 맞이했던 가족은 우리 집 개밖에 없었다."라고 한다.[10] 그리고 한동안 빌은 소파에서 잠을 자야 했다고 한다. 바람을 피운 주제에 변명할 말도 없겠지만 말이다. 힐러리의 회고록에는 지퍼게이트를 이렇게 요약해 놓았다. "(대통령에게도 사생활이 있다는 발언 이후) 설문 조사 결과, 빌의 지지율은 여전히 높았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빌에 대한 지지도는 지하층까지 떨어졌다." 반면 빌 클린던의 회고록 "My Life"는 힐러리의 회고록에 비해 두 배나 두꺼운데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추이가 무미건조한 사실 나열로 지나간다.[11]

사실 클린턴은 첫 대선 당내 경선에서도 이미 섹스 스캔들에 한번 휘말렸으나, 아내 힐러리의 강공으로 간신히 극복한 상황이었다. 훗날 힐러리는 한 인터뷰에서 남편이 밉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다만 이후에 화해를 제대로 하긴 한 듯하다. 당시 백악관 직원들이 남긴 회고록 등을 보면 직원들이 침실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노크를 해야 민망한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빌과 힐러리가 매우 격렬하게 섹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두 번이나 바람을 피운 자신의 남편을 대변해 준 덕분에 대중들에게 호감을 쌓아, 상원 의원에 진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후담도 있다. 물론 힐러리도 백악관 내에 들어서면 바로 태도가 돌변해서 한 성깔 하는 성질이 어디 가지 않고, 물건을 마구 던져대는 바람에 그렇게 던진 물건에 빌이 맞아 다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판결문이 인터넷에 퍼져 부모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때 미국민들 사이에서는 클린턴의 변명을 비꼬아서 " 오럴 섹스(구강성교) 는 섹스가 아니다."[12]라는 농담이 생겼고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묘사한 클린턴의 '부적절한 관계'[13]라는 표현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특히 일본의 정치인들 사이에 대유행이 되어 뭔가 문제가 생기면 갖다 붙이는 사과 표현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고위층의 변명으로 절찬리. 우스갯소리로 미국 대통령의 사무실이라 볼 수 있는 오벌 오피스(Oval Office)가 오럴 오피스라고 불렸다.

르윈스키 사건에 대한 빌 클린턴의 대국민 사과문을 살펴보면 한국인들의 시선에서는 온통 변명뿐인 데다 결론은 이건 우리 가족의 일이니까 댁들은 신경 좀 꺼 달라는 내로남불 마인드로 읽힐 수 있어서 지탄을 받기 쉬울지 모르나, 다시 말하지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불륜 자체'가 아니라 '클린턴의 위증' 여부였다.

구강성교가 '성적 접촉'(sexual relation)이 아니라는 대답을 하고 클린턴이 자기는 위증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검사가 질문을 하면서 성적 접촉의 범위를 한정했기 때문이었다. 검사는 성기나 항문, 유방 등에 접촉하는 것을 성적 접촉으로 규정하고 질문을 했다. 클린턴은 이 질문을 자신이 르윈스키의 그 부위에 접촉을 했는지 묻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그래서 자신의 입장에서 성적 접촉을 하지 않았다고 답한 것이다. 결국,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 정말 오럴 섹스를 받기만 했는지는 당사자 둘과 신만이 알겠지만, 그동안 클린턴이 보여주었던 교묘한 화술로 보아 '성 접촉을 하지 않았다'는 이 발언이 국민들을 속인 것은 맞지만 탄핵할 만큼 중대한 위증은 아니라는 여론이 일었고, 결국 탄핵안은 부결된다. 하지만 호도하기 위한 증언(misleading testimony)으로 판결 나서 이것이 유죄로 인정되어 벌금을 물고 변호자 자격이 정지되었다.

한편 내연녀 모니카 르윈스키는 이런 미국사에 길이 남을 전대미문의 추문의 당사자가 되어, 세계적으로 얼굴과 개인 정보가 팔리는 건 물론 매우 적나라한 사생활까지 뉴스를 통해 까발려졌다. 이에 기자, 파파라치, 그리고 변태들에게 온 가족이 쫓기며 몇 년간 이사를 다니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사건 이후로도 르윈스키는 온갖 코미디언들과 래퍼들이 자주 인용하는 농담 소재가 되었고, 특히나 제이 레노의 르윈스키 괴롭히기는 그 수준이 지독했다.[14] 지금까지도 미국 편의점에서 흔히 팔리는 3류 연예계 잡지에 그녀의 이름이 간간이 보이는 정도. 세월이 흘러 지퍼게이트가 단순한 가십거리가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 학계가 진중히 평가하는 사건이 되고 또한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더 개선된 현재는 "아무리 쌍방 간 합의해서 벌인 불륜이지만, 대학을 갓 졸업한 22살짜리 인턴을 50대의 미국 대통령이나 되는 양반이 꼬셔서 같이 놀아난 상황이라면 그 대통령의 죄가 훨씬 중하지 않냐"는 의견도 나온다. 또한 전 세계적 조롱거리가 되면서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망신과 수모에 대한 동정론이 이는 분위기. 르윈스키는 2014년에 회고록을 냈으며, TED에서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 온라인상 조리돌림의 폐해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 # 트위터에서 "자기가 받아본 커리어 조언 중에 최악이었던 것이 뭐냐"라는 트윗에 "백악관에서 인턴하면 이력서에 쓰기 좋은 스펙이 될 거야'라는 조언"이라고 답글하며 농담하는 등, 현재는 해당 사건에 대해 꽤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 하지만 르윈스키 때문에 가정이 파괴될 뻔했던 힐러리 클린턴은 2014년에 그녀를 나르시시즘에 빠진 루니 툰이라고 비난했다. 르윈스키 역시 아무리 당시 나이가 어렸다고 하지만 엄연히 빌 클린턴이 유부남임을 알고도 불륜 관계를 맺었으니 떳떳한 입장은 아닐 것이다.

당시 늘그막이던 전설적인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는 클린턴의 성 추문을 두고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그는 사랑하던 전 아내 마릴린 먼로 존 F. 케네디와의 성 추문 때문에 죽었다고 여겼기에 높으신 분들의 성 추문을 혐오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마지오는 빌 클린턴도 평생을 증오하던 케네디와 맞먹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잘못한 것이 클린턴 본인이니 할 말도 없긴 하다. 그런데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에게 매일 야구 배트로 폭행을 했던 인간쓰레기나 다름없는 놈이라 저렇게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마릴린 먼로가 이혼장을 내밀면서 했던 말이 "그가 나를 때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 이외의 여성과 불륜을 저지른 적은 없었고, 마릴린 먼로가 불륜을 저지르긴 했지만 가정 폭력도 큰 책임이 있으므로 그저 변명할 자격은 없을 것이다. 차라리 깔끔하게 이혼 소송을 했다면 비난은 고스란히 마릴린 먼로가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일:Impeachment American Crime Story.jpg

2021년 FX에서 방영한 범죄 시리즈물인 '탄핵: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 3'[15]에서 이 사건을 드라마화하여 방영하기도 했다. 무려 해당 사건의 당사자인 모니카 르윈스키가 직접 제작에 참여했으며 빌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 그 이후 빌 클린턴의 정치 행보와 수난을 매우 세세하게 다룬다. 그동안 사람들이 지퍼게이트를 단순히 미국 대통령의 불륜 스캔들이라고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관계가 어쩌다가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는지, 이것이 어째서 탄핵까지 가게 되었는지, 그 사이에서 빌 클린턴, 힐러리 클린턴, 모니카 르윈스키가 개인적으로 겪었던 상황까지 세세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지퍼게이트를 상세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필시 시청해야 할 드라마.


2023년 4월 16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르윈스키 스캔들에 대해 다뤘다.

이 르윈스키 스캔들은 후임자인 조지 W. 부시가 당선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부시는 적어도 사생활 면에선 깔끔하고 흠잡을 곳이 없었고, 이로 인한 부시의 도덕적인 이미지는 빌 클린턴과 대비되어서 지지율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3.2.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글로벌 금융 위기 야기

글로벌 금융 위기 시발점이 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원흉이 클린턴이라는 비판도 있다. 우선 서브프라임(subprime)은 우량 대출자 등급 (prime)보다 아래(sub)인 비우량 대출자들을 의미하고, 모기지(mortgage)는 주택을 구매하기 위해 융자를 빌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용 등급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주택을 구매하기 위한 돈을 빌려주도록 한 것이 바로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행들로 하여금 이렇게 신용 등급이 부족한 사람들에게까지 주택 구매를 위한 대출을 하도록 했던 대통령이 바로 클린턴이라는 것이다. 우선 클린턴은 Community Reinvestment Act of 1977이 실효적으로 집행될 수 있게끔 했다. 이 법안은 같은 민주당 대통령 지미 카터가 통과시킨 법안으로, 상업 은행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보유한 예금의 일정 비율 이상을 빈곤층 지역 공동체들에 빌려주도록 강제하는 법안이다.

이러한 클린턴의 행보에 힘을 실어준 것은 바로 시민 단체들이다. ACCORN, NACA 등의 시민 단체들은 빈곤층들에게는 대출의 기회가 제공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문제 삼았고, 이에 클린턴 정권은 대출에 대한 차등적 지위들을 금지할 것을 명령한다. 이는 곧 닌자론(NINJA Loan), 즉 무소득(No Income)+무직(No Job)+무자산(No Assets)자들에 대한 대출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소득도 없고, 직업도 없고, 자산도 없더라도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든 클린턴은, 이를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를 실현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

비우량 대출자들의 주택 구매를 위한 대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적 정의라는 이름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클린턴 정권과 민주당은, "사회적 정의"의 또 다른 핵심 이슈인 인종 문제 또한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즉 닌자론을 제공하지 않는 은행들은 흑인을 포함한 소수 인종들을 차별하는, 인종 차별주의적 집단이라고 매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대표적인 흑인 경제학자 토머스 소웰의 저서에 따르면, 클린턴 정권과 민주당,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한 시민 단체들은 상업 은행들이 대출을 하는 데 있어서 흑인 등 소수 인종들을 차별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이를 통해 은행들이 닌자론을 제공하도록 압박했다고 한다. #

또한 클린턴은 은행들에 대한 닌자론 제공 강제를 공고화하기 무려 100개 이상의 행정 명령을 서명하기도 했다. 게다가 주택 구입 희망자들에 대한 대출을 위한 공적 자금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들인 연방 저당권 협회(Fannie Mae) 연방 주택 금융 저당 회사(Freddie Mac)로 하여금 닌자론을 제공하지 않은 은행들에게 자금 지원을 끊도록 명령했다. 또 이들 기관들이 직접 닌자론을 제공하도록 하기도 했다. #

3.3. 러스트 벨트의 원흉

북미자유무역협정은 말이죠, 일자리라는 말입니다. 미국민의 일자리입니다. 벌이가 좋은 일자리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를 결코 지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 클린턴, 북미자유무역협정 비준안에 서명하며
그가 추진한 NAFTA는 러스트벨트에서 원망을 듣는다. #

3.4. 총체적인 외교 실패

3.4.1. 우크라이나 전쟁 원인 제공 논란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0년대 재임 시절 우크라이나에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한 데 대해 후회감을 표시했다.

1993~2001년 미 대통령을 지낸 클린턴은 최근 아일랜드 RTE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가 여전히 핵을 보유하고 있었으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들(우크라이나)이 핵무기 포기에 동의하도록 설득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책임을 느낀다”면서 “우크라이나가 계속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러시아가 이 같은 어리석고 위험한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 레오니트 크라프추크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 등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핵포기 협정인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 체결을 주도했다. 1994년 체결된 이 양해 각서는 옛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벨라루스가 핵 확산 금지 조약(NPT)에 가입하고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주권과 안보, 영토적 통합성을 보장받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미국·러시아·영국이 이 협정에 서명했다.[16][17][18]

3.4.2. 일본에서의 외교 결례 논란


일본에 대한 태도로 일본에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1998년 일본 방문 시 일본 천황 아키히토가 클린턴을 영어를 쓰며 공손히 영접했는데 일본과 국제 사회를 지나치게 압박하고 일본 천황에게도 영어를 강요하여 국제적으로 영어를 전 세계에 강요하는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 논란을 빚기도 했다.[19]

훗날 클린턴은 2000년 오키나와 방문 시 오키나와 평화의 비 앞에서 뒷짐을 지고 참배를 했다.

3.4.3. 한국에 대한 가혹한 대우와 정점을 찍은 한국 내 반미 여론

<시사IN>, 1997년 말, 미국은 왜 한국을 집어삼키려 했나?

한국에서는 1993년 집권 초부터 쌀 개방 문제로 농민들과 한총련한테 비난을 받아 방한 반대 시위까지 터졌고, 1997년 IMF 사태로 미국식 구조 조정을 강요한 원흉이자[20] 한국 금융 시장을 미국식 금융 자본에 종속시켜 놓은 원흉이라 할 수 있으며, 1997년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근거를 마련한 점에서 한국의 반미 감정을 키운 면이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클린턴만의 책임으로 보기는 어려운데, 하술될 문단과 앨 고어 항목 참고.
훗날 한국의 1997년 외환 위기에 대해, 당시 IMF 총재로서 IMF 협상을 지휘했던 미셸 캉드쉬당시 조치가 가혹한 측면이 있었다고 하는가 하면, IMF 조직 자체적으로 외환 위기 처방이 가혹하다며 자기반성하기도 하였다. #

심지어 한국에게만 가혹했던 게 아니었고 모든 나라에게 다 그랬다. 아예 일본 총리와 김영삼 대통령과 대놓고 기싸움을 했을 정도.[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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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6월 27일 캐나다에서 열린 한미 정상 회담의 모습. 이 자리에서 클린턴은 김영삼 대통령과 마지못해 악수를 하면서도 김영삼 대통령의 눈길조차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사진에서처럼 1997년은 한미 양국이 최악의 관계를 보였던 시기라 이해엔 주한미국대사까지 공석이었다. 결국 외환 위기가 터진 그해 12월 15일, 미국이 마지못해 스티븐 보스워스 대사를 임명하여 김영삼 대통령이 신임장을 수여했지만, 1년 동안이나 주한미국대사의 공백이 발생한 1997년은 그 당시 얼어붙은 한미 관계를 절실히 보여준 해였다.

1997년 11월 25일에 열린 정상 회담에서 클린턴은 김영삼 대통령과 마지못해 악수를 하면서도 애써 김영삼 대통령을 외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22]
1998년 청와대 방한 시 김대중 대통령과의 사진 촬영에서도 뒷짐을 지는 결례를 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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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인 1997년 6월 24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한국 정치 외교 사학회가 전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천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4대 강국 가운데 한국의 안보에 가장 위협을 줄 수 있는 나라로는 응답자의 10명 중 4명이나 미국을 꼽아 이 조사에서 90년대 들어 심해진 반미 감정을 잘 나타내었다. 이 조사에선 미국 다음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를 꼽아 한국과 통상 마찰이 잦은 미국과 일본에 더욱 반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23] 클린턴 행정부 시절 한미 관계는 안보적으론 1996년 로버트 김 간첩 사건 안기부의 미국인 중개상 래클리프 간첩혐의 구속 사건과 1997년 IMF 사태 등으로 역대 최악의 관계를 보였다.

3.4.4. 러시아를 다시 적으로 돌린 장본인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친서방, 탈냉전 정책들을 펼치면서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 등을 받기를 원했다. 빌 클린턴은 경제 개혁 시스템들을 제공하였지만 그 경제 개혁 시스템들이 러시아 상황에 맞지 않는 것들인 탓에 러시아 경제가 1998년 모라토리움 위기를 겪는 등 1990년도부터 2000년도 초반까지 러시아 경제는 최악을 달리게 되었다. 또한 소련이 무너지면서 소련 위성국이었던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을 나토에 가입시키고 코소보 전쟁에 러시아 동맹이었던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공습을 가하는 등 러시아 영향권에서 패권 행사를 부리자 이러한 태도에 러시아는 분노하여 결국 옐친이 물러나고 푸틴 행정부 중기부터는 다시 반미 국가로 돌아서면서 다시 미국과 대립하는 국가가 되고 만다. 참고로 푸틴은 초창기에는 나토 가입 #을 하겠다고 했을 정도로 친서방이었다.

거기에다가 러시아 견제에만 집중하면서 모가디슈 전투에서 고전하는 미군 병력에 대한 지원이 늦어버려 미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는 결과를 불렀다. 이 때문에 클린턴에 대한 비판 여론이 증가해 지지율이 떨어지는 결과를 불렀다.

3.4.5. 인도 총리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다

클린턴 집권 당시 공산주의의 수장이자 초강대국 반열에 올라있던 소련이 붕괴되면서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정책을 아무 무리 없이 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클린턴의 대외 정책은 그렇게 순탄치 않았으며 심지어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전쟁광"이라는 비판도 들었다.

실제로 1998년 핵실험을 강행한 인도 파키스탄을 중재하러 간다고 뉴델리에 방문했으나 당시 인도 총리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Atal Bihari Vajpayee, 혹은 Bajpai)에게 문전박대를 당했고[24] 미국 대통령이 인도 총리를 만나기 위해 먼저 와서 기다리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25]

3.4.6. 중동 정책의 실패

미국이 감싸는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는 중동 지역에서도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목표가 되기도 했다. 클린턴 스스로도 중동 평화에 관심이 많아 당선 이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평화 협정을 이끌어내는 등 성과를 보이기도 했으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극단파 유대인에게 암살되고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에서 미국의 아랍 공격에 항의하는 민중 폭동이 이어지면서 결국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도리어 실제적 업적은 차라리 북핵 문제와 관련된 제재의 정당성 확보 및 북아일랜드 분리 독립 문제 해결 측면에 있다.[26]

3.4.7. 숨은 원흉 앨 고어

사실 클린턴 본인은 특히 행실 측면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대외 정책에 대한 상식과 식견을 갖추고 있었고 합리적인 판단하에 적절한 처신을 위해 노력한 측면도 컸다. 크게 비판받는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의 전향적인 대북 정책에 힘이 되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컸다. 실제로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클린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김대중 김정일에게 제기한 것에 감사를 나타내고 정상회담에서의 합의가 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한 승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 애초에 클린턴 행정부 시기 한미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문민정부 시기 한정으로, 국민의 정부 시기에는 상당 부분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클린턴 대통령의 공은 아니고 김대중 대통령의 공에 가까웠다.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정부 시기 김대중 납치 사건, 전두환 정부 시기 미국 망명 등 이래저래 군부 독재 시기 고초를 겪는 과정에서 미국과 인연을 맺을 일이 많았는데, 이게 훗날 전화위복이 되어 특히 영미권 식자층 사이에서 드높은 위상을 구가하게 되었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조 바이든 민주당 의원 등과도 인맥을 쌓기도 했다. 이것이 대통령 재임 시기 외환 위기 극복은 물론 남북 관계 진전에 있어서도 간접적인 플러스 요소로 작용했다.

멀리 떠날 것 없이 빌 클린턴 본인부터가 김대중 대통령을 굉장히 존경하고 고평가해 두 정상 간의 분위기 자체는 항상 화기애애했다. 클린턴의 경우 학생 시절부터 진보 민주주의 인권운동 사회활동가부터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원조 사회운동 활동가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 존중하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본인이 말하기도 할 정도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 곧바로 클린턴 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고 싶다는 메세지를 밝혔으며[27] 그의 동생 로저 클린턴이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방문하기도 했고[28],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당시 청와대 의전 비서관의 증언에도 다른 서구권 지도자와는 달리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경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떠날 때나 도착할 때 차가 도착하거나 떠나는 현장까지 와서 차에 탈 때까지 배웅하고 지켜보며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인사를 하는 등 인권운동가가 대통령이 된 끝판왕 테크트리 선배의 대우를 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넬슨 만델라와 비슷한 느낌으로 서구권에서 민주진보 계열 세력에서 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크쇼 등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소개할 때면 아시아의 만델라라고 소개한다. 특히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제기한 것에 감사를 나타내고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합의가 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한 승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29]

러시아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클린턴 본인은 겉으로나마 미러 관계 유지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태도를 보였다. 나토가 동진하는 와중에도 나토 동진이 러시아 견제용이 아니라고 지속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등 외교 전략의 기본적인 부분은 충실하게 이해하고 수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러닝메이트이자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가 여기에 지속적으로 찬물을 끼얹고 다닌 것. 고어 당시 부통령은 러시아에게는 공공연하게 나토의 동진을 러시아 견제용이라고 밝히고 다녔고, 한국 관련으로는 아예 한국에 대한 금융 지원을 반대하면서 한국 지원을 주장한 클린턴과 강하게 대립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한국 지원을 주장했던 각료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 장관, 샌디 버거 국가 안보 보좌관 등 미국의 외교 안보 전략을 책임지는 전문 각료들이었음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고어 부통령은 또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 이후 한창 개선되고 있던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외교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표현을 동반한 추궁으로 큰 결례를 범하기도 했을 정도로 한미 관계를 훼손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처럼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은 외교, 안보, 통상 부문에 있어서만큼은 임기 내내 사사건건 치고받고 싸우는 관계였고, 대부분 옳은 판단을 하는 쪽은 클린턴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4. 논란이 있는 평가

4.1. 중국의 WTO 가입 찬성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데에는 광대한 땅,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 시장 경제 요소 도입 등 다양한 요인들을 지목할 수 있을 테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요인으로는 WTO 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WTO에 가입하기 전까지는, 비록 중국이 값싼 노동력으로 저렴하게 제품을 생산한다고 해도, 높은 관세가 부과되면서 수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중국산 제품들이 미국 등 다른 나라들에서 상대적으로 잘 팔리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WTO에 가입할 경우, 중공은 개발 도상국 지위를 통해 선진국과의 무역에서 관세 인하 혜택이 대폭 이뤄지기 때문에 수출이 크게 늘어날 수 있고, 따라서 경제도 가파르게 성장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1980년대부터 WTO 가입을 추진했지만, 번번히 미국의 반대에 부딪혀서 실패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행정부에서는 중국의 공산주의를 경계했고, 중공에게 지적 재산권 보호와 금융 시장 개방 등 매우 까다로운 조건들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은 이전 공화당 행정부 시절과 달리 중국의 WTO 가입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스탠스로 변하게 되었다. 실제로 클린턴은 자신의 연설에서 중공의 WTO 가입이 미국의 산업에 이익이 될 것이며, 중국을 민주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은 중국의 WTO 가입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의 통상 관계를 영구화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한다.

비록 1979년에 지미 카터의 민주당 정권이 미중 통상 조약을 체결하기는 했지만, 이 조약은 매년 갱신해야 하는 조약이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미중 간의 통상 관계를 정상적이고 영구적인 관계(Permanent Normal Trade Relations)로 격상시키고자 했고, 이를 통해 중국이 WTO에 가입할 때 일종의 보증을 서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백악관 고위관료의 공식 입장문에서도 중공과의 PNTR 법안 추진이 중국의 WTO 가입과 연계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We agree merely to support China's candidacy for WTO membership and to make permanent the Normal Trade Relations for China that we have passed each year for the past 20 years.
우리의 목적은 오직 중국이 WTO에 가입하는 것을 지원하는 것, 그리고 중국과의 정상적인 통상 관계를 영구화하는 것입니다.
Gene Sperling, 클린턴 행정부 백악관 국가 경제 위원회 위원장 #
하지만 당시에도 중국의 WTO 가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그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앨 고어 부통령은 중국의 WTO 가입에 관해 클린턴 대통령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자신이 집권하면 중국과 다시 협상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법안이 부결될까 봐 몸이 달아 있기는 전통적으로 업계의 이익을 대변해 온 공화당에서는 의원 약 150명이 찬성 표결에 돌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공화당 지도부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한 텔레비전 연설을 촉구하며 그 상황에서 구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공교롭게도 클린턴이 속한 민주당은 강력한 노조의 반발을 의식해 ‘주군’에 등을 돌려버린 형국이었다. 또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무역 대표부 차석 대표를 맡았던 통상 전문 변호사이자, 후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무역대표부 대표를 맡게 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가 있는데, 당시 그는 뉴욕 타임스 기고에서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 지배적인 무역 국가로 떠오를 것이며, 미국 내 모든 제조업 일자리가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됐다. 실제로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미국의 대중 무역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데이비드 오토 MIT 교수의 연구 팀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11년까지 중공과의 경쟁에 밀려 사라진 미국 내 일자리가 240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

반면 중국의 경우, WTO에 가입한 2001년을 기점으로 경제 성장이 급속도로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1992년에서 2007년까지의 중국 경제 성장률을 볼 경우, 2001년 이전까지만 해도 1999/2000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줄곧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1992년에만 해도 14.2%였던 성장률이, 2001년에는 8.3%까지 추락했다. # 하지만 WTO에 가입한 이후로는 글로벌 금융 위기를 맞이한 2008년 이전까지 줄곧 경제 성장률이 상승했으며, 특히 2007년에는 14.2%를 찍으면서 전례 없는 성장세를 보이기도 했다. #

이러한 엄청난 경제 성장을 견인한 것은 바로 수출이고, 이 수출을 견인한 것이 바로 WTO 가입이라는 것이다. 같은 7년 기간인 1994년에서 2001년, 2001년에서 2008년까지의 중국 수출액 추이를 비교해 보면 명확해진다. 1994년의 중국 수출액은 1046.07억 달러였고, 2001년에는 2720.6억 달러였다. 증가분은 1674.53억 달러, 160% 증가한 것으로, 이것 또한 상당히 많이 늘어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2001년에 2720.6억 달러였던 중국의 수출액은 2008년에는 1조 4980억 달러로까지 증가했다. 증가분은 무려 1조 2259.4억 달러에 달하고, 증가율 또한 451%나 된다. # 즉 WTO 가입 이후, 중국 수출액 증가 추이는 이전보다 더욱 가파른 상승세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의 WTO 가입은 중국의 수출을 비약적으로 늘렸고, 중국의 경제를 급속하게 성장시켰으며, 중국을 오늘날의 세계 2위 강대국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즉 중국을 세계 2위의 강대국으로 만든 데에는 중국의 WTO 가입을 추진한 클린턴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4.2. 글래스-스티걸 법안 폐지

1999년 클린턴 정부 시절 공화당 의원들 주도로 발의된 금융 서비스 현대화법이 통과되었다. 의원들의 이름을 따서 그램-리치-브릴리법으로도 불리는 이 법안은 대공황 이후 만들어진 1933년 은행법(Banking Act of 1933)[30] 중 상업 은행의 증권 관련 자회사 보유 금지와 상업 은행과 투자 은행의 임직원 겸직 금지 등 핵심 조항을 사실상 폐지시키며 상업 은행들이 투자 은행 업무에도 뛰어들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씨티코프와 트래블러스 컴퍼니 간의 합병이 승인되어 씨티그룹이 탄생하는데, 이를 기점으로 대형 상업 은행들이 투자 은행 업무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심화되었고, 기존 투자 은행 중 일부가 무리한 투자를 일삼다가 위기에 빠진 것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단초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31]

대공황의 원인이기도 한 은행의 고위험 투자를 막는 법을 폐지함으로서 투자 은행과 상업 은행의 분리가 의미 없어지고 후임자 조지 W. 부시 시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세계 금융 위기의 경제난을 초래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물론 해당 법안은 공화당을 중심으로 발의되었으며 1980년대 이래로 진행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미래의 화근을 알아채지 못하고 남들과 똑같이 훗날 미국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비극의 기반을 방관한 것은 비판받을 만한 행보로 뽑힌다. # 자세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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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구나 보리스 옐친이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당시 러시아는 2006년까지 대한민국 GDP조차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종이호랑이가 되어버렸다. [2] 다만 그동안 쌓아놓은 게 워낙 많아서 1995년에는 미국 GDP의 73% 가까이 따라잡기도 하고 1인당 GDP도 2000년까지 미국을 앞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룩셈부르크, 스위스 버금가는 세계 3~4위를 기록한 부국 중의 부국이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업보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영향력이 제한되어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을 뿐. [3] 처음으로 500달러를 넘긴 것도 1995년, 1000달러를 넘긴 것도 클린턴이 퇴임한 2001년이었다. [4] 대표적으로, 구글, 아마존, 이베이 등이 있다. [5] 다만 이후에 이 정책은 동성애자들로 하여금 입 다물라는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고 폐지된다. [6] 여담이지만 코소보 이슬람 신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더 정확히는 세르비아)로부터 자국을 보호해 준 미국을 매우 각별하게 생각하며, 특히 코소보 공습을 단행한 클린턴에 대해서는 동상을 세우고 그의 이름을 딴 도로를 만들 정도로 영웅시하고 있다. 후임 아들 부시 역시 코소보 독립을 적극 지지했기에 클린턴만은 못하지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7] 르윈스키의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트립은 "애국자로서 해야 할 의무"라고 주장했다. 린다 트립은 클린턴 정부 교체와 동시에 펜타곤에서 해임을 당했고, 2004년 독일 출신의 건축가와 결혼했다. 그녀는 워싱턴 D.C. 교외에서 크리스마스 용품 판매점을 경영하며 여생을 보냈다. 2020년 4월 8일 트립은 췌장암으로 사망했고 트립이 위독하단 것을 안 르윈스키는 자신의 트위터에 "과거와 상관없이 트립이 회복하길 바란다. 그의 가족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할 수 없다."란 글을 남겼다. [8] 이 사건의 여파로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고어는 미주리, 아칸소, 루이지애나, 플로리다(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오하이오, 뉴햄프셔, 애리조나, 네바다, 테네시, 켄터키, 웨스트버지니아 등 무려 11개 주를 공화당에게 내주며 패배했다. [9] 미국의 사법 체계에서 법정에서 작정하고 한 위증죄는 엄청난 죄다. 미국에서 다른 대통령이 관여한 큰 사건인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리차드 닉슨을 사임까지 몰고 간 것도 '워터게이트 자체'보다는, 이에 관련해 닉슨이 거짓말을 한 것이 더 크게 작용했다. [10]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 회고록 "살아있는 역사" 제2권 中. [11] A Living History 상, 하권을 다 합쳐도 My Life 상권 두께에 조금 못 미칠 정도다. [12] 클린턴이 위증 혐의를 변호하려고 본인이 법정에서 한 성교(sexual relationship)라는 말에 구강성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 변론에서 나온 말이다. [13] 원문은 'Indeed, I did have a relationship with Ms. Lewinsky that was not appropriate.' [14] 존 올리버는 자신 또한 그런 흐름에 편승해 여성 혐오적 농담을 한 것을 인정하며 사과하는 뜻으로 모니카 르윈스키를 쇼로 초청하여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 [15] 대한민국에서도 디즈니 플러스에서 시청할 수 있다. [16] 클린턴, ‘우크라이나에 핵 포기 설득’ 후회 kbs [17] 클린턴 전 美대통령이 상기한 '우크라 핵포기비핵화례와 북한 연합뉴스 [18] 클린턴 “우크라 핵무기 남겼더라면···” 과거 ‘핵포기 설득’ 후회 경향신문 [19] 한국에서도 이에 맞물려 클린턴 집권기 시절인 1997년부터 초등학교 영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20] 이에 대해 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이권 다툼에서 한국이 희생양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 [21] 타국 정상들과 불편한 관계란 건 자국의 파워가 워낙 막강해 다른 나라들을 좌지우지하거나, 외교적으로 무능한데 독선적이라 양국 관계가 경색되거나 둘 중 하난데 클린턴은 전자에 가까웠다. 당시 미국은 세계 유일의 압도적인 패권국인 데다 국력도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었고, 특히 경제 위기 상황에선 한국이 협상 레버리지를 많이 잃었기에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한국 입장에선 안 좋게 볼 수밖에 없지만 미국인들 입장에선 자국의 막강한 힘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거니 딱히 그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낮아질 요소는 아니다. [22] 1:12초에 나온다. [23] 한반도 전쟁 발발시 청소년 3명중 1명 피난가겠다 [24] 이때 파키스탄은 핵 실험 이후 카슈미르의 인도 지역인 타이거 힐스를 공격하여 빼앗으면서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분쟁이 발생했다. 나중에 인도군의 반격으로 파키스탄은 패하여 타이거 힐스를 빼앗기고 후퇴하였다. [25]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 개발 참조. 물론 바지파이 총리는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주었고 회담은 별 탈 없이 끝났다. [26] 클린턴은 자신이 아일랜드계 조상이 있어서 아일랜드 대선에, 또 "미국이 지난 1803년 프랑스로부터 사들인 땅의 일부인 아칸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프랑스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라고 농담했다("과거 프랑스 식민 제국 영토였던 곳에서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든 프랑스로 이사를 가서 6개월간의 거주 요건을 충족하고, 프랑스어를 말할 수 있으면 프랑스 대통령 선거 입후보가 가능"하기 때문 #).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이었지만, 클린턴이 아일랜드에 쏟은 관심의 근거를 엿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27] 클린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만나고 싶다 [28]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 동생 로저 클린턴 하의도 방문 [29] 김 대통령 핵, 미사일 등에 대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전화 [30] 글래스-스티걸 법안(Glass-Steagall Act). [31] 이를 극복하기 위해 2010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의해 상업 은행의 자기 매매는 금지되었는데 이것을 '새로운 글래스-스티걸 법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