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3:16:08

로저 워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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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워터스
Roger Waters
파일:로저 워터스.jpg
<colcolor=#fff><colbgcolor=#000> 본명 조지 로저 워터스
George Roger Waters
출생 1943년 9월 6일 ([age(1943-09-06)]세)
영국 잉글랜드 서리 그레이트 부컴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사회 운동가
소속 (1965 - 1985)
무소속 (1985 - )
서명
파일:워터스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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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부모님 아버지 에릭 플레처 워터스[1]
어머니 매리 워터스
학력 몰리 메모리얼 주니어 학교 (졸업)[A]
케임브리지셔 고등학교 (졸업)[A]
파일: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아이콘.png 리전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 (건축학 / 중퇴)[4]
신체 187cm[5], 90kg
종교 무종교 ( 무신론)
활동 기간 1964년 – 현재
장르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사이키델릭 록, 록 오페라
사용 악기 보컬, 베이스, 기타
레이블 하베스트, 소니, 컬럼비아, 캐피톨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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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생애
3.1. 초기 생애3.2. 핑크 플로이드 시절3.3. 솔로 활동
4. 평가
4.1. 송라이팅4.2. 악기 연주자4.3. 보컬4.4. 라이브 공연
5. 비판 및 논란
5.1. 인간적 면모
5.1.1. 리처드 라이트와의 관계5.1.2. 다른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과의 관계
5.2. 정치적 발언 논란
6.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content.clickbooq.com/ee3095ad64.jpg
파일:external/www.musiclipse.com/Roger-Waters-bass-guitar.jpg
<rowcolor=white> 전성기 시절의 사진. 2011년 The Wall 라이브 공연에서 찍은 사진.

영국 음악가.

2. 상세

프로그레시브 록 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며, 더 나아가 대중 음악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영국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6]로, 핑크 플로이드의 전 리더이자 베이시스트로 알려져 있다. 동시에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있는 단일 인물 중 한 명이다. 앨범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취급함으로써, 유기적으로 곡들을 연결하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대중화와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으며 동시에 프로그레시브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핑크 플로이드의 대부분의 곡의 작사에 관여하였으며, 핑크 플로이드의 명곡하면 자주 떠오르는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 Money, Brain Damage, Eclipse 등은 모두 워터스의 단독 작곡이며, Comfortably Numb, Time 외에도 거의 모든 핑크 플로이드의 히트 곡 들에 참여하였다.

동시에 좌파, 진보주의적인 사회운동을 통하여 지금은 존 레논 이후로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대중음악인으로 평가받는다.

3. 생애

3.1. 초기 생애

파일:어린이 로저 워터스.jpg
1959년, 16살의 모습
1943년 9월 6일 영국 서리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조지 헨리 워터스(G. H. Waters)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공병으로 근무하던 중 1916년 9월 14일 프랑스에서 전사하였고[7] 그의 아버지인 에릭 플레처 워터스(Eric Fletcher Waters)는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2차대전 초반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택해 런던에서 구급차를 운전하였다. 이때 공산주의자가 되었고[8], 독소전이 일어난 후인 1942년 그는 입장을 바꾸어 영국 육군에 입대해 장교로 복무하다가, 1944년 2월 18일 안치오 상륙 작전에서 전사했다. 워터스의 할아버지가 전사했을 때 그의 아버지가 1914년생으로 2살이었고, 그의 아버지가 전사했을 때 그는 만 1세도 안 된, 즉 생후 5개월이었다.[9]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스스로 밝히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이 바로 영국군의 1945년 5월 승전 행사였다고. 이 당시의 기억이 그의 정치 성향과 인생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은 확실하다.

아버지가 전사한 이후 워터스는 서리주를 떠나 케임브리지에서 자랐다. 그는 케임브리지 소년 핵군축 운동(YCND)의 회장을 지냈고, 이곳에서 시드 바렛 데이비드 길모어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때 워터스는 스포츠 게임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 외의 학교 교육을 굉장히 싫어했으며, 전형적인 악동이었다. 크리켓과 럭비를 굉장히 잘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리전드 스트리트 폴리테크닉(현재 웨스트 민스터)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으며[10] 이곳에서 릭 라이트 닉 메이슨을 만나 친구가 되어 음악을 같이 하게 되었다.

3.2. 핑크 플로이드 시절

1963년, 나날이 커져가는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리전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에서의 학업에 금방 흥미를 잃은 메이슨과 라이트는 파트 타임 교사였던 마이크 리오너드(Mike Leonard) 소유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둘은 대학교 지하실에서 악기들을 연주하며 시그마 6라는 밴드를 만들었고, 워터스도 밴드에 가입했다. 보통 시그마 6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지만, 메가데스( ...?)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다. 당시 워터스는 리듬 기타를 연주했고, 메이슨은 드럼을 연주했다. 보컬리스트 키스 노블(Keith Noble)과 베이시스트 클라이브 멧칼프(Clive Metcalfe)도 밴드의 구성원이자 창립 멤버였지만, 1963년 9월 독자적인 밴드를 만들어 밴드를 탈퇴함에 따라 시그마 6는 결성과 동시에 두동강이 나버린다(...).

결국 워터스는 런던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있던 소꿉친구 시드 바렛에게 밴드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고, 곧이어 바렛은 밴드의 리더가 되었다. 이어 기타리스트 밥 클로스(Bob Klose)도 영입하였다. 그리고 워터스는 이때 포지션을 베이스로 바꾸고 밴드 이름을 스크리밍 앱댑스(Screaming Abdabs)로 바꿨다. 이후 여러번 밴드 명이 바뀌다가 핑크 플로이드 사운드(Pink Floyd Sounds)로 밴드명이 바뀌고, Sounds가 빠짐에 따라 밴드명이 핑크 플로이드로 최종 결정되었다. 1966년 밥 클로스는 부모님의 반대로 밴드를 탈퇴해 핑크 플로이드의 초기 4인조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엉성한 스쿨 밴드였던 시그마 6가 그럴듯한 사이키델릭 록 밴드로 바뀐건 그의 친구 시드 바렛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한 일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1968년 모종의 사건으로[11] 시드가 밴드를 급작스럽게 탈퇴하면서 시드 바렛과 가장 친한 사이였던 로저 워터스가 사실상의 리더가 되었다.[12] 1970년대 초반까지는 시드의 색체가 강하게 남은 사이키델릭한 색체를 보여줬지만, 점차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의 분위가 강해졌으며,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대성공으로 밴드의 주도권을 잡고 핑크 플로이드를 사이키델릭 록 밴드에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로 전환시켰다.

이후 Wish You Were Here, The Wall 등 여러 명반들을 잇달아 주도적으로 제작하면서 명성을 얻었고 1970년대 최고의 송라이터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밴드의 다른 멤버였던 데이비드 길모어, 릭 라이트, 닉 메이슨의 불만은 커져갔다. 악기 연주 실력은 최정상급이었던데다가 송라이팅 실력도 준수했던 라이트나 길모어의 불만은 더욱 컸다. 워터스는 이에 라이트를 The Wall 세션 당시 강제로 탈퇴시키고, 데이비드 길모어와 닉 메이슨은 세션 연주자 수준으로 떨어트리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사실상 핑크 플로이드를 개인 밴드로 만들어버렸다.

The Final Cut에서 가장 심화된 이런 분위기는 결국 1985년 워터스가 밴드를 탈퇴하면서 끝이 난다. 이후 수년간의 법정공방과 싸움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다른 멤버들과[13] 사이가 돌이킬 수 없게 틀어져버렸다.[14]

3.3. 솔로 활동

파일:로저 워터스_틀.png
Disc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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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from The Body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 When the Wind Blows Radio K.A.O.S.
1970 1984 1986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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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used to Death Ça Ira Is This the Life We Really Want? Igor Stravinsky's The Soldier's Tale
1992 2005 2017 2019
파일:IMG_0893.jpg 파일:IMG_1072.jpg
The Lockdown Sessions The Dark Side of the Moon Redux
202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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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Live Alb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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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핑크 플로이드에서 Atom Heart Mother를 공동 작곡한 아방가르드 작곡가 론 기신과 함께 인체 다큐멘터리 The Body의 사운드트랙( Music from The Body)에 참여했다.

핑크 플로이드에서 The Final Cut을 발매한 다음 해인 1984년 The Wall 세션때 구상해 놨던 컨셉트 앨범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를 발매했다. 이 음반은 평론가들에게 엇갈린 평가를 받았고, 영국 차트 13위, 미국 빌보드 200 31위를 기록했다. 발매 직후 1985년까지 첫 솔로 투어를 열었는데, 이 투어에는 음반에 참여한 에릭 클랩튼이 참여했지만(1984년 투어에서만), 적자를 기록했다.

핑크 플로이드를 탈퇴한 이후 1986년 자신의 세션맨으로 구성한 블리딩 하트 밴드를 결성하고, 반전 애니메이션 바람이 불 때에 사운드트랙을 맡았고 1987년 두번째 정규 음반이자, 컨셉트 음반 Radio K.A.O.S.를 발매했다. 이 음반은 평론가들에게 엇갈린 평가을 받았고, 영국 차트 25위, 미국 빌보드 50위까지 진입했다. 이때도 1년간 투어를 돌았는데 당시 핑크 플로이드의 A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와 맞불을 놓게 되었다.[15]

이후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으로 베를린에서 The Wall 콘서트를 열었다. 이 공연에선 시네이드 오코너, 독일 헤비메탈 밴드 스콜피온스, 신디 로퍼, 밴 모리슨, 더 밴드등 여러 게스트 뮤지션들이 출연했고, 약 30만명의 관객이 모여들었다. 이후 이 실황을 담은 라이브 음반 The Wall - Live in Berlin을 발매했다.

그후 1992년 텔레비전 미디어를 비판하는 컨셉트 앨범 Amused to Death을 발매 했다. 원래는 Radio K.A.O.S. 파트 2로 계획하고, 1989년부터 작업에 들어갔지만, 중간에 워터스가 프랑스 혁명사를 다룬 오페라 제작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음반작업이 속도를 내지 못한것이다. 이 음반은 영국 차트 8위, 미국 빌보드 200 21위를 기록했고, 평론가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는 워터스의 솔로 음반중 가장 좋은 기록이다. 이후 워터스는 이전과 달리 투어를 열지 않았고, 오페라 제작에 집중하면서 한동안 조용히 지냈었다.

그러다가 1999년 In The Flesh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투어를 돌기 시작했고, 이때 실황은 1년뒤 In the Flesh - Live로 발매되었다. 이후 2002년 같은 타이틀로 월드 투어를 열었고, 이때 그동안 핑크 플로이드나 워터스가 한번도 공연해본적이 없는 한국, 인도, 남아공, 태국, 아랍에미리트, 레바논등에서도 공연했었다. 이후 컴필레이션 앨범 Flickering Flame을 발매 했고, 2004년 이라크 전쟁에서 영감을 얻은 디지털 싱글 To Kill the Child/Leaving Beirut를 발매했다.

2005년, 워터스가 이전부터 준비했던 프랑스 혁명사를 담은 오페라 싸 이라( Ça Ira)가 로마에서 공식 초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평론가들에게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오페라 음원이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이후 2006년 6월부터 2007년까지 The Dark Side of the Moon Live 투어를 열었고, 투어 중간에 몇몇 공연에선 닉 메이슨이 등장해 드럼을 연주했다.

이후 2010년부터 2013년까지 The Wall Live라는 투어를 열었고, 이 투어는 2012년 상반기에만 140만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하면서 워터스 투어중 가장 큰 수익을 기록했다. 투어중에 2011년 5월 12일 런던 O2 아레나 공연에서 데이비드 길모어와 닉 메이슨이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2015년에 투어를 담은 콘서트 필름 Roger Waters The Wall이 공개 되었고, 사운드트랙겸 라이브 음반도 발매 되었다.

이후 2017년 이전부터 제작해 왔던 새 솔로음반 Is This the Life We Really Want?을 발매했고, 같은 해 Us + Them 투어를 진행하여 2018년 12월에 종료했다. 이후 새로운 투어 This Is Not a Drill을 2021년부터 시작하기 위해 준비하였으나 코로나 19 확산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2022년부터 투어를 시작하였다.

4. 평가

4.1. 송라이팅

로저의 비판 정신이야 말로 밴드의 핵이었어요. 고로 이 음반은 도저히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이라 할 수 없었죠.
- 릭 라이트 (2000년)
로저는 정말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죠.
- 데이비드 길모어

로저 워터스는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송라이터 중 한 명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 스타일인 프로그레시브 록을 거의 혼자서 정립했다.[16] 또한, 핑크 플로이드의 가장 성공한 앨범 중 하나이자 역대 최고의 컨셉트 앨범 중 하나인 The Wall을 사실상 혼자 만들었다.[17] 사이키델릭 록 밴드로 시작한 핑크 플로이드의 처음을 장식한 초기 리더 시드 바렛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핑크 플로이드라는 밴드를 사이키델릭 밴드에서 프로그레시브 아트 록 밴드로 만든 것은 워터스가 주도해서 해낸 것이다.

워터스는 단순 멜로디 작곡 능력도 훌륭하나 스토리라인 제작, 작사, 앨범 구성 등의 역량에서 역사적인 수준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즉, 작곡/작사 능력을 넘어서서 음악적 연출력이 매우 뛰어난 프로듀서라고 할 수 있다. 전성기 워터스가 만든 모든 앨범은 컨셉트 앨범이었으며, 워터스가 주도적으로 제작하지 않은 음반중 좋은 평가를 받는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은 시드 바렛 주도로 만들어진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뿐이고, 워터스가 탈퇴한 후, 데이비드 길모어의 주도 하에 제작된 모든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들은 졸작, 잘해봐야 수준의 평가를 받았을 뿐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탈퇴할 때까지는 아예 대놓고 다른 멤버들을 세션맨 수준으로 떨어트려놓고 솔로 활동을 하듯이 자기 멋대로 음반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매하는 족족 상업/음악성 둘 다 잡으며 대성공하고, 이 때문에 데이비드 길모어, 릭 라이트 등 워터스와 더불어 전설로 평가받는 멤버들조차 이에 대들지 못했을 정도로 워터스의 송메이킹 능력은 전설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도 워터스와 싸우고 쫓겨났으나, 위의 어록에서 볼 수 있듯 워터스의 능력만큼은 아예 이견이 없이 인정했을 정도이다. 사실 워터스의 독주가 거의 10년 가까이 가능했던 이유도 그의 송메이킹 능력이 전설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제일 많다.

그가 만든 콘셉트 앨범들 자체의 완성도만 놓고 봤을때는 비틀즈 페퍼 상사 앨범도 저리가라할 수준으로 하나같이 역사상 최고의 명반들이다. 또 더 후 Tommy 앨범으로부터 내려오던 록 오페라 장르를 가장 훌륭하게 만든 송라이터였다. The Wall은 더블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곡의 가사가 줄거리로 이어지는 하나의 소설이자 사회 비판극과도 같은 음반으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사회 비판적인 요소를 곡에 넣는 것을 주저하기는커녕 하나의 아이덴티티로 삼기도 한다. 핑크 플로이드 탈퇴 이후 만든 싱글 앨범들도 대부분이 우파 정치인들과 자본주의, 전쟁 등을 비판하는 다소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Animals 앨범에서는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어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작사 능력 또한 높게 평가받는다. 로저의 가사는 현실과 자전적인 경험에 기반을 둔 지적이면서도 직설적인 표현으로 유명하며, 이는 The Dark Side of the Moon과 Animals, The Wall에서 정점을 보여준다. 또한 Echoes, Shine on You Crazy Diamond처럼 시적이고 몽환적인 가사를 쓰는 것에도 능했으며, Money, Welcome to the Machine처럼 날카롭고 냉소적인 가사를 쓰는 것에도 능했다. 현재는 존 레논 밥 딜런같은 기라성같은 작사가들과 대등한 평가를 받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로저가 밴드의 실권을 쥐고 독재를 시행할 수 있게 해준 핵심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로저의 가사는 밴드의 핵심이 되었으며, 80년대 이후로 사이가 틀어졌던 릭 라이트 조차 '로저의 가사와 비판 능력은 밴드의 핵심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높게 평가받는다.

이 '자전적인 경험'은 로저에게 아주 큰 영향을 끼쳐서, 핑크 플로이드 탈퇴 당시의 소송에서 핑크 플로이드라는 밴드는 시드 바렛의 정신과 안치오 상륙 작전 당시 전사한 아버지의 영혼을 포함해야한다는 억지 주장을 하기도 했다. Wish You Were Here은 앨범 전체가 시드 바렛에 대한 추모적인 느낌으로 만들어져있으며. The Wall은 사실상 로저 워터스의 자서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의 경험이 짙게 드러나있다.

그가 주도적으로 제작한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들은 프로그레시브 록의 색체가 강하고, 여러 사운드를 이용해 곡을 만들어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는 전위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폴 매카트니, 엘튼 존 과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록스타중 하나다. 특히 솔로 활동으로 번 수입은 역대 록 음악가중 1위에 달한다.

음악적으로는 핑크 플로이드의 초대 리더였던 시드 바렛, 더 후, 비틀즈, 롤링 스톤스, 밥 딜런 등 다양한 1960년대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본인 말로는 비틀즈의 존 레논[18]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고 한다. 또 천안문 항쟁 등의 사건에서도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릭 라이트 해고나[19] 데이비드 길모어와 갈등 등으로 로저 워터스를 개인적인 면모에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인간적인 면모를 배제하면 송라이팅 실력 만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편이다.

4.2. 악기 연주자

한편 연주력에 대해서는 최고 수준이라고 인정받는 데이비드 길모어, 리처드 라이트만큼의 칭송은 받지 못하는 편이긴 하지만. 애초에 베이시스트 자체가 개인의 스킬이 그리 강조되는 포지션이 아니다. 그리고 베이시스트 중 워터스의 연주력을 고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화려한 기교를 뽐내며 연주하는게 아닌, 철저히 밴드 지향적인 연주를 하는 베이시스트로 보는 것이 중론.[20] 국내에선 (비록 포지션은 다르지만) 김태원(음악인)과 비슷한 부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워터스가 떨어진다기보다는, 데이비드 길모어와 릭 라이트가 연주력 면에서 상당히 고평가를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져보이는 것일 뿐이다.

다른 악기를 다루는 실력도 전체적으로 괜찮은 편. 길모어가 베이스를 연주하고 워터스가 리듬기타를 연주한 Pigs (Three Different Ones)를 들어보면, 1960년대 시절부터 갈고 닦았기 때문인지 그의 연주력은 당연히 평균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어쿠스틱 기타나 피아노, 오르간, 클라리넷등도 다루며 간간히 녹음까지 도맡아했다고.

4.3. 보컬

핑크 플로이드 멤버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보컬을 구사한다, 일단 공식적으로 확인된 음역대가 B1-G#5[21]로, 로버트 플랜트 등 쟁쟁한 보컬들의 음역대보다도 넓고[22], 특유의 드라마틱한 톤과, 오페라 가수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한 성량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잘 부르는’ 스타일의 보컬은 아님에도[23], 본인의 곡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에 굉장히 탁월하다고 평가받는다.[24] 이렇게 자기만의 스타일이 워낙 뚜렷해서 따라하기가 쉽지 않은 편에 속한다.[25] 같은 밴드의 보컬을 맡았던 데이비드 길모어와 비교해 보았을 때 스타일 상으로 많은 차이가 있는 편이다.



또한 젊었던 시절에는 비명을 기깔나게 지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위 영상의 괴성들은 토크박스 소리가 아니라 모두 워터스의 육성이다. 1968년에 발매한 싱글인 Careful with That Axe, Eugene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26]에서 그가 지르는 비명을 들을 수 있다. 라이브 공연에서도 많이 비명을 지르곤 했는데, 그가 나이를 많이 먹은 최근에는 아쉽게도 그 찰진 비명을 들을 수 없다.

4.4. 라이브 공연


최정상급 록스타답게 라이브 콘서트에도 상당히 공을 들인다. 공연장 위치, 무대 설계, 조명, 음향, 복장까지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신경을 써서 로저 워터스의 라이브 콘서트는 1970년대에 활동했던 노장의 콘서트라고 보기 힘들만큼 매우 세련되어있고 볼거리가 풍성한 편이다. 2016년 멕시코 시티 공연 당시에는 아예 무대 세트를 Animals 앨범 커버와 유사하게 재현하기도 했고, 1970~80년대 The Wall 투어 당시에는 너무 라이브 공연에 열을 올린 나머지 적자(...)를 봤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라이브 공연 영상을 보면 화려하고 세련된 무대 때문에 그의 전성기 팬들이었던 중노년층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공연을 감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라이브 공연으로 가장 많은 수익을 낸 아티스트 3위이며 특히 솔로 록 음악가로 한정하면 역대 1위다.

이런 로저 워터스의 화려한 무대 세팅은 1970년대 중반 아레나 록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5. 비판 및 논란

5.1. 인간적 면모

음악가로써 매우 뛰어난 역량을 가진 워터스이지만 인간적으로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잦다.

로저 워터스는 과거부터 전체주의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사회민주주의적 메시지를 전파해왔으나, 근 몇 년간 중국의 독재와 인권침해에 대해 침묵하거나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서서히 이미지가 하락하였고, 후술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러시아를 옹호함으로써 큰 충격을 주었다.

사실 워터스 본인은 1970년대 중반부터 핑크 플로이드 내에서 독재적 성향을 띠었고, 특히나 Animals 이후로는 그 성향이 매우 강해졌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친 길모어, 라이트 성향 핑크 플로이드 팬들에게 공산권 독재자와 다를 바 없다며 비판받았다. 이외에도 성격 자체가 상당히 까다로운 인물로 꼽히며, 에릭 클랩튼, 존 레논, 루 리드와 더불어서 뛰어난 음악가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성격을 가진 것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평가된다.

The Wall 시기 릭 라이트의 해고 사건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27] 당시 다른 멤버들에게도 세션맨처럼 대하는 행보를 보여주어 밴드 내 민심을 크게 잃었다. 또한 The Wall의 공동 프로듀서 밥 에즈린이 공연 초연 직전 빌보드 직원에게 낚여 실수로 The Wall 라이브 공연의 진행 순서를 발설했는데,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칼같이 계약을 해지해버린 뒤 The Wall의 공연까지 못보게 하는 뒤끝을 보여줬다.[28]

그래도 친구인 로버트 플랜트 그리스에서 교통사고로[29] 죽을 뻔했을 때 본인 소유의 그리스 별장을 빌려줘서 로버트 플랜트의 재활을 도왔다는 미담도 있다.

5.1.1. 리처드 라이트와의 관계

라이트와 워터스는 리젠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에서 만날때 부터 사소한 성격차가 있었다. 라이트는 핑크 플로이드 메이저 데뷔 이전에도 모 가수에게 자작곡을 준적이 있을 정도로 유능한 작곡가였으며, 초창기 시드 바렛 주도 시기 핑크 플로이드에서 시드 다음으로 음악적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도 라이트 였다. 심지어 초창기 핑크 플로이드의 매니저언트였던 피터 제너와 앤드루 킹은 바랫과 라이트를 밴드의 브레인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바렛이 탈퇴이후 워터스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라이트의 작곡 기여는 이전보다 줄어들기 시작했다.

핑크 플로이드의 전성기 시절인 1970년대 중반 라이트가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통해 번 돈으로 시골의 저택을 사자 워터스가 기성 록스타처럼 활동한다며 라이트를 인신공격 수준으로 비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워터스가 라이트의 저택보다도 더 으리으리한 시골 저택을 사들였고 분노한 라이트가 워터스에게 추궁하자 "아내가 사자고 했다."라며 변명했다.

라이트는 1994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1977년 Animals부터 워터스가 작곡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반면, 워터스는 오히려 이후 라이트가 솔로음반 Wet Dream을 출시하며 자작곡을 우리하고 한 차례도 공유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둘의 관계는 2년 뒤 The Wall 제작 과정에서 파탄난다. 워터스가 음반 프로듀서 권한을 라이트에게 못주겠다고 하자 라이트는 이에 반대했고, 당시 여러 가정 문제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던 라이트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고 그를 기여도 미약으로 퇴출 시켰다. 이에 The Wall의 공동 프로듀서인 밥 에즈린은 워터스가 라이트를 완전히 망가뜨리려 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심지어 밴드가 재정적으로 안좋았던 상황을 이용해 다른 멤버들에게 라이트를 퇴출하지 않으면 The Wall 발매를 거부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코카인을 때문에 퇴출 당했다는 루머를 그대로 방치했다.[30]

이후 둘은 세션 키보디스트 존 카린의 중재로 1999년 무대 백 스테이지에서 재회했으며 이후 핑크 플로이드가 재결합한 Live 8에서 화해한듯 하며, 2007년 핑크 플로이드 재결합 공연 때도 백스테이지에서 만나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누는 등 관계가 상당히 회복되었고, 라이트가 2008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화성 진행 면에서 릭의 귀는 우리 음악의 기반."이라고 그를 추모하면서 둘의 관계는 이전만은 못하더라도 많이 누그러졌다는 평을 받는다. 비록 2020년대 들어 워터스가 데이비드 길모어와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이미 고인이 된 라이트를 비난하는 발언을 하긴 했지만, 적어도 예전의 남보다도 못한 관계보다는 확실히 나아졌다.

5.1.2. 다른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과의 관계

1985년에는 라이트와는 달리 순순히 프로듀싱 권한을 준 닉 메이슨까지 해고하고 데이비드 길모어와 2인조 록밴드 체제로 세션 멤버들을 고용할 생각이었는데[31] 오히려 데이비드 길모어가 그렇게 놔둘수는 없다면서 적극적으로 메이슨과 손잡고 워터스에 대항해, 결국 워터스가 노발대발하며 밴드를 탈퇴하게 만들었다.[32]

물론 이대로 순순히 밴드를 냅둘 워터스가 아닌지라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을 못쓰게하려고 어떻게든 변호사를 고용하여 데이비드 길모어를 괴롭혔다.[33] 이 과정에서 워터스는 시드 바렛에다가 자신의 죽은 아버지까지 끌고오는 시체팔이를 시전하며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을 못쓰게 필사적으로 막았고, When the Wind Blows라는 애니메이션 OST를 담당했을때 가사를 "이 땅은 나의 땅"에서 " 이 밴드는 나의 밴드"라고 바꿔 부르기도 했을 정도의 비이성적인 집착을 보였다. 심지어 음반 제작과 라이브 투어에 필요한 핑크 플로이드의 자산마저 동결시켜 결국 길모어와 메이슨이 사비로 조달하는 수 밖에 없게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메이슨은 목표 금액을 만들려고 자신이 소유한 가장 비싼차인 페라리 250GT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리기도 했다고한다. 기나긴 법정 공방 끝에 결국 핑크 플로이드가 승리하긴 했지만, 릭 라이트가 계약상의 이유로 1990년까지 밴드에 들어가지 못하고,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도 심신상 너무 많이 지쳤을 정도로 워터스는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들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그 외에도 데이비드 길모어가 The Final Cut 당시의 마거릿 대처 비판도 별로 안좋아했고 정치적으로는 자기와 180도 다른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며 대놓고 우파 몰이를 시전하며 다른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들을 벙찌게 한 것, 밴드 초창기부터 릭 라이트를 대놓고 업신여기며 괴롭힌 것 등 자잘한 것만 따지면 여기에 다 행적을 옮겨 적기 힘들다. 오죽하면 The Wall 당시 참여했던 음반 관계자는 "어린 시절 나를 괴롭혔던 나쁜 일진들을 보는 것 같았다"라고 참담한 심정으로 회상했을 정도다.

세월이 지나고 여럿 일들을 겪으며 예전보다는 관계가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데이비드 길모어와의 관계는 무척 나쁜 편에 속한다. 허나 닉 메이슨과는 화해했으며, 닉 메이슨의 투어에 워터스가 간간히 게스트로 서는 등 우호적인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중. 워터스 또한 다른 멤버들을 비난하는 발언을 자주 하면서도 메이슨을 비난하는 발언은 거의 하지 않았을 정도로[34]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35]

5.2. 정치적 발언 논란

극좌이자 급진적인 정치 성향으로 매우 유명하다. 핑크 플로이드 자체가 여느 록밴드들처럼 리버럴한 성향을 갖고 있긴 했지만 워터스는 특히나 리버럴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강성 좌익이었고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를 옹호했으며 그것을 앨범에 녹여내기를 원했다. 그래서 워터스는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로는 항상 중국공산당을 지구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체제(...)에 가깝다고 지인들에게 설파하고 다녔으며, 줄곧 중국에서 콘서트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는 본인이 주도적으로 제작한 대부분의 앨범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반 권위주의, 반 전체주의의 아나키즘 성향을 드러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워터스가 찬양하는 중국공산당은 그 반대로 권위주의의 끝판왕이라는 것과 워터스는 1977년 즈음부터 1983년까지 핑크 플로이드 내에서 '독재'를 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친 길모어 성향 팬들에게는 공산권 독재자라며 조롱받는다.

최근 급진적인 반서방, 친중, 친러 성향 발언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36]

2022년 8월 CNN에 출연해 “ 중국 대만을 포위하는 게 아니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이고 1948년[37] 이후 국제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 그걸 모르면 충분히 책을 읽지 않은 것이다. 나가서 읽어라”고 했다.

상술된 인터뷰에서 워터스는 또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이는 나토의 확장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 중국 캐나다 멕시코에 미사일을 배치하면 미국이 어떻게 반응하겠느냐”고 했다. 또한 진행자가 “ 인권 침해의 최상위권에 중국이 있다”고 하자 워터스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언급하며 “ 중국은 누굴 죽였느냐”고 했다. 진행자가 “ 자국 국민”이라고 하자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중국의 인권탄압 및 대학살을 전면 부정했다.

이와 같이 그의 사회적 입지나 젊은층과의 소통과는 별개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고 중국 인권탄압을 부정하며 강력한 반미의 모습을 보인다. 이에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의 알렉스 브리스토 부국장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 대만은 공산주의 중국에 통치된 적이 없다”며 “로저 워터스는 달의 어두운 면(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제목이자 다른 세상이라는 의미)에 산 것 같다”고 했다. 결국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 중단을 주장하다가 폴란드 공연이 취소되었고 올레나 젤렌스카 우크라이나 영부인과 설전이 있었다. #

2023년 유엔 연설을 통해 "러시아의 침공에 이유가 없지는 않다"고 발언하자, 우크라이나 측은 "기타나 계속 쳐라"라고 응수했다. # 근데 로저는 베이시스트이다

게다가 베를린 공연 때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붉은색 완장을 팔에 두른 것과 관련해 베를린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자 독일서 공연하던 도중 '반유대주의자'라는 낙인을 부인하며 눈물을 흘렸다. #[38]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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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로 인해 꼼짝 없이 집에 갇혀 지내게 되면서 브라이언 메이처럼 70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SNS에 수많은 글을 올리며 젊은 층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글의 대부분은 그답게 정치적인 발언들이며, 간간히 새 음반 소식이나 핑크 플로이드에 대한 소식도 올라온다. 환경 운동, 노동 운동 등을 지지해달라는 글들도 많이 올라오는 것으로 봐서 늙어서도 정치에 대한 관심은 여전한듯 하다. 또 최근 SNS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새 노동당 대표인 키어 스타머를 엄청나게 싫어하는 것 같다. 키어 스타머를 토니 블레어의 복제품이라고 부르며 엄청난 강도로 비난하고 있다.
* 인터넷에 자주 짧은 영상을 올리는데 내용이 코믹스러워서(...) 핑크 플로이드 팬들에게는 거의 밈처럼 사용되고있다. 짧은 영상의 내용들은 대체로 새 앨범 소식, 우파 정치인 비난, 데이비드 길모어에 대한 불평불만질리지도 않나, 그리고 각종 기행(...)들이다.
  • 에릭 클랩튼과는 절친으로 유명하다. 데뷔는 클랩튼이 더 빨리 했지만, 나이는 워터스가 2살 많다. 서로 협업도 많이 하고 콘서트에도 참석한다. 비교적 최근인 2020년 초에 진저 베이커[46] 추모 공연에서 에릭 클랩튼과 함께 사이키델릭 록 최고의 명곡중 하나로 여겨지는 Sunshine of Your Love를 연주하기도 했다. 참고로 에릭 클랩튼은 정치적으로 극우에 가까운 성향인지라 로저 워터스와는 완전히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걸 보면 로저 워터스도 남의 정치 성향에 대해 그렇게 큰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닌듯하다.
  • 다섯번 결혼했다. 첫번째는 도자기 예술가 “주디스 트림”. 1969년 결혼해서 아이는 안가졌고, 1976년 이혼했다. 이후 1977년 영국 귀족이였던, 캐롤린 크리스티와 결혼해 나중에 워터스 투어에서 하몬드오르간을 연주하는 아들 해리 워터스를 가졌다. 그러나 이 둘도 1992년 이혼하고, 이후 1993년에 Priscilla Phillips와 결혼 하지만, 2001년 이혼. 1997년에 낳은 아들(잭 플레처)이 있는데 201cm의 장신이다.[47] 이후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로리 더닝이랑 2004년 약혼하고 2012년 결혼하지만, 2015년 이혼했다. 이후 한동안 독신으로 지내다가 2016년경부터 사귀어 온 35살 연하의 운전기사 카밀라 차비스와 2021년 결혼했다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렸다.
파일:식물과 물.jpg * 해외 록 음악 커뮤니티에서는 Watch Robert Plant while Roger Waters라는 유명한 밈이 있다. 로버트 플랜트의 성인 Plant가 영어로 "식물"을 뜻하고, 로저 워터스의 성인 Waters가 영어로 "물"을 뜻하는 점을 들어 "식물에게 물을 준다"라는 언어 유희를 하는 것. 여기에 추가해서 장미에도 물을 주거나, 위에 을 하나 띄워놓는 식의 기출 변형도 존재한다. 참고로 이 넷은 모두 본명이다.
  • 2021년 6월에는 페이스북 광고에 Another Brick in the Wall을 써도 되냐면서 자신에게 문의한 페이스북 측에 쌍욕을 날렸다고 한다. # 마크 저커버그에게 뻐큐를 시전했다! 아무래도 위의 진보주의적 성향과 연계되어, 상업적 광고를 최대한 기피하려는 것과 연관된 듯.[48]


[1] 1914년~ 1944년 2월 18일. 로저가 약 생후 5개월일 때 전사. [A] 시드 바렛의 학교 선배다. [A] 시드 바랫의 학교 선배다. [4]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5] 지금 기준으로도 엄청난 장신인데, 젊은 시절에는 무려 191cm에 달했다. The Wall의 컨셉 포토를 보면 알 수 있듯, 대다수의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이 180cm를 넘는 장신인데다 거구이기까지 한데 이 사람 옆에 있으면 거의 다 작아보인다. 다른 핑크 플로이드의 주요 멤버들인 시드 바렛이나 데이비드 길모어 등은 전부 약 180cm로, 객관적으로 보나 나이대를 고려해 보나 장신인 편인데 거인 수준인 로저 워터스 옆에 선 사진을 보면 전혀 장신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6] 존 레논, 폴 매카트니, 믹 재거, 피트 타운젠드, 레이 데이비스 등과 함께 영국의 록 음악 작곡가로서 가장 입지가 높은 인물이다. [7] 핑크 플로이드의 벽에서 할아버지의 묘에 참배하는 신이 나온다. [8] 마이클 무어와의 인터뷰 [9] 본인 인터뷰 [10] 여담으로 기계공학 전공도 고민했었다고. 존 디콘? 이때 그는 진로 적성검사에서 건축학이 알맞다는 결과를 받아 기계공학이 아닌 건축학과로 진학했다. [11] 정신 문제가 가장 유력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12] 시드 바렛 체제에서는 오히려 릭 라이트의 지분이 워터스보다 더 컸다고 한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이후로 전반적인 작사를 로저 워터스가 혼자서 다 하게되면서 점차적으로 라이트가 밀려나고 워터스에게 지분이 쏠리다가, 1977년 Animals 세션 이후 로저 워터스 독재 체제가 되었다. [13] 릭 라이트, 시드 배릿이 사망한 현 시점에선 데이비드 길모어만 한정이고, 닉 메이슨과는 사이가 예전만큼 좋다. (그나마도 릭 라이트와는 고인 생전에 화해했었고, 시드 바렛은 은둔으로 인해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사이 자체는 친한 편이었다.)물론 밴드 이름에 대한 법적 분쟁 당시에는 메이슨과 워터스와의 관계도 매우 나빴었지만 훗날 2002년에 카리브해에서 우연히 제회하면서 다시 친해졌다. 사실 메이슨은 워터스와 처음으로 밴드를 시작했을때부터 계속 함께했던 동료이기도 하고, 워낙에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 그런것이다. [14] 그래도 Live 8에서 다시 사이가 좋아지는 듯 했으나 다시 틀어져 버렸다. [15] 여담으로 핑크 플로이드가 미국에서 리허설를 진행할때, 워터스는 토론토에서 공연하고 있었는데, 핑크 플로이드의 비밀 모니터 요원 세션맨이자 팬이였던 키보디스트 존 카린, 색소폰 주자 스콧 페이지와, 길모어의 친구이자, 이전에 워터스와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 투어를 돌았던 기타리스트 팀 렌웩이 함께 몰래 워터스 공연을 본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워터스는 당연히 핑크 플로이드 맴버들이 자기 공연에 출입하는걸 금지 했었다. [16] 일반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The Dark Side of the Moon, Wish You Were Here, Animals, The Wall의 컨셉은 모두 로저가 주도하여 고안해낸 것이며. 이 세 앨범에 있는 모든 곡의 가사를 쓰고, 대부분의 곡을 본인이 작곡했다.(The Dark Side of the Moon은 10곡 중 7곡을 단독/공동 작곡하였고, 그 뒤 The Final Cut 시기까지는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들을 단독/공동 작곡하였다.)그 외 바렛 시기를 제외한 초중반기 시절의 앨범들에서도 대부분의 곡을 작사하였고, 각 앨범 수록곡의 절반 이상의 곡을 단독/공동 작곡하는 등 타 멤버들에 비해 압도적인 기여도를 보여주었다. 거의 밴드를 견인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17] Comfortably Numb의 일부를 제외하면 모든 곡을 혼자 작사 작곡했다. 스토리라인 역시 워터스가 만들었는데, 대중음악사에서도 The Wall처럼 뛰어난 스토리라인이 있는 앨범은 거의 전무하다. [18] 존 레논 역시 로저 워터스같이 대표적인 진보주의자였다. [19] 릭 라이트도 워터스 못지않게 초중반 핑크 플로이드 음악에 크게 기여했던 점에서, 당시 워터스가 얼마나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었는지는 놀라울 정도이다. [20] 보통 밴드 내에서 독선적으로 구는 리더는 자기 파트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전체적인 사운드를 그르치는 일이 많은데, 로저 워터스는 송라이팅에 있어 독재를 했을지언정 자기가 연주하는 베이스는 묵묵히 근음을 잡아주는 역할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해봤자 Another Brick in the Wall처럼 인트로를 치는 정도. 그조차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21] 대중 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 중 하나로 손꼽히는 로저 달트리와 단순 음역으로는 거의 비슷한 수준. [22] 물론 고음만 따지자면 플랜트가 더 많이 올라간다. [23] 일단 음색부터가 매우 특이하고 대중성이 있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에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거기에 당시 록 보컬들 대다수가 그랬듯이 제대로 된 발성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인골라가 매우 심하고 목에 데미지가 많이 가는 창법을 구사했다. 결과적으론 그런 점이 오히려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과 아주 잘 어울렸지만. [24] 일례로, Sheep의 후반부 기타 리프가 마음에 들었던 데이비드 길모어는 투어 당시 세트리스트에 이 곡을 넣고 싶어했지만, 보컬을 따라할 수가 없어 결국 넣지 못했었다. [25] 특히 이런 면이 두드러지는 것이 The Wall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The Trial. 아무도 제대로 따라하질 못한다. [26]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비명인지 모르고 듣다가 알고 나서 멘붕이 오는 경우가 많다. (시작할때 나오는 그 전자음 같은 소리가 맞다.) [27] 다만, 당시 릭 라이트 해고 사건의 경우 다른 멤버들의 증언으로 보아 라이트 본인이 워터스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에게도 민심을 크게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28] 에즈린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공연을 보러 갔는데 마침 공연장 경호원중 에즈린이 과거 키스를 프로듀싱할때 친분이 생긴 경호원이 있던 덕분에 공연을 볼수 있었다고 한다. [29] 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30] 닉 메이슨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라이트의 코카인 흡입설을 강력히 부정했다. A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 당시 실제로 코카인을 흡입했던 데이비드 길모어 역시 라이트의 코카인 흡입설을 부정했다. [31] 닉 메이슨은 당시 기준으로 워터스와 20년 넘게 친구로 지낸 사이였고 인간성도 좋다고 평가받는다는 점에서 당시 워터스의 막장성을 짐작할 수 있다. [32] 어쩌면 길모어를 향한 워터스의 평생 분노는 여기서 시작되었거나 폭발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자신이 실력 때문에 남겨놓으려던 멤버가 자신의 의견에 대항하니 일종의 배신감 같은 감정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로저가 사실상 독재를 했다는 사실마저 바꾸지는 못한다. [33] 당시 신보를 녹음하고 있던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 앞으로 5분에 한번씩 변호사들의 전화가 울렸다고 한다. [34] 기껏해봐야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을 두고 법적 공방을 벌였을 때 정도. [35] 이것도 로저의 지랄맞은 성격을 닉이 참아줘서 그런것이다. [36] 아이러니하게도 로저 워터스의 절친인 에릭 클랩튼은 보수 성향으로 유명하지만, 최근 백신 음모론 등 급진적인 극우 성향 발언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37] 정확히는 1949년. [38] 이는 워터스가 모든 The Wall 공연에서 선보인 것으로, 반유대주의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나치 독일 등 독재자를 풍자하기 위한 것이다. [39] 당시 길모어와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사실 길모어하고는 아직도 사이가 안 좋다. 닉 메이슨마저 그만 싸우라고 깠을 정도. [40] 이 차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포츠카에서 항상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명차로도 유명하다. [41] 우파들의 주장과 달리 부유한 사람이 사회 변화를 주장한다고 해서 위선자가 되는 건 아니지만, 로저 워터스가 평범한 할리웃 리버럴이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이다. 사실 워터스의 주장이나 생활 습관만 보자면 그는 리버럴이기보다는 강성 좌파~극좌에 가깝다. [42] 영국의 보수주의적 도덕 신념을 강조한 사회보수주의 성향의 교육자 [43] 노동 계급 출신의 노엘 갤러거는 노동당 지지자이고, 한때 토니 블레어의 열광적 지지자였지만, 그의 우클릭으로 인해 현재는 쌍욕을 섞어서 저주할 정도로 토니 블레어를 매우 싫어한다. 다만 성향 자체로만 봤을때 갤러거보다 워터스가 훨씬 강경좌파적이다. 갤러거는 코빈을 공산주의자라 비판한 전적이 있다. [44] 그외 핑크 플로이드 상징중 하나인 돼지 풍선에다가 대놓고 트럼프를 그려놨다. [45]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라디오헤드도 핑크 플로이드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진보적인 아젠다를 표방하는 밴드라는 것. 사실 라디오헤드는 정치적인 성향과는 별개로, 친 이스라엘이 성향 강해 (조니 그린우드의 부인은 아예 이스라엘인이다) 이에 대한 얘기가 좀 있다. [46] 에릭 클랩튼이 몸담았던 밴드 크림의 드러머를 맡았다. [47] 로저 워터스 본인도 187cm로, 동년배들 중에선 키가 제일 큰 편이다. [48] 로저 워터스와 비슷한 성향의 사회주의자인 데이비드 길모어도 공연 스폰서를 받았다가 크게 후회하며 모든 스폰서 수익금을 전부 사회에 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