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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 바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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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올타임 아티스트
919위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1970년대 아티스트
220위

시드 바렛
Syd Barrett
파일:시드 바렛 컬러.jpg
<colcolor=#000000><colbgcolor=#eee> 본명 로저 키스 바렛
Roger Keith Barrett
출생 1946년 1월 6일
영국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사망 2006년 7월 7일 (향년 60세)
영국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화가, 시인
소속 (1963 - 1968)
무소속 (1968 - 1972)
스타즈 (1972)
서명
파일:바렛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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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colbgcolor=#eee> 부모님 아버지 아서 맥스 배럿
어머니 위니프리드 배럿
형제자매 형 앨런, 도널드, 루스
여동생 로즈메리
학력 몰리 메모리얼 초등학교 (졸업)
케임브리지셔 고등학교 (졸업)
케임브리지 예술학교 (예술 디자인학 / 졸업)
켐버웰 미술 대학교 (미학 / 중퇴)
신체 180.3cm[1]
종교 시크교 (추정)
재산 약 £1,700만
활동 기간 1963년 – 1972년
장르 사이키델릭 록, 익스페리멘탈 록, 아방가르드 음악, 사이키델릭 팝, 사이키델릭 포크, 애시드 록
사용 악기 보컬, 기타
레이블 하베스트[2]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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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생애
3.1. 유년기3.2. 음악 활동 초기3.3. 대학교 시절3.4. 핑크 플로이드 초창기와 UFO 클럽3.5. 핑크 플로이드를 탈퇴하다3.6. 솔로 활동, 정신병의 악화3.7. 은둔 생활3.8. 사망
4. 음악적 성향과 유산5. 디스코그래피6.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25.media.tumblr.com/tumblr_metzrgUJG01qhccpao1_500.jpg
파일:external/images5.fanpop.com/Syd-Barrett-syd-barrett-31467482-500-524.jpg
파일:external/photos1.blogger.com/Syd_reverse.jpg
핑크 플로이드 시절 (1967년)[3] 솔로 활동을 하던 시절 (1969년도)[4] Wish You Were Here 앨범 레코딩 도중 애비 로드 스튜디오를 방문한 시드 (1975년)[5]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핑크 플로이드의 초대 리더였다.

2. 상세

영국의 전설적인 사이키델릭 록,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의 전 리더이자 멤버였으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를 맡았다. 음악을 그만둔 이후에는 은둔 생활을 하며 화가로서 활동했다. 짧은 활동기간동안 핑크 플로이드의 리더로써 핑크 플로이드의 상당수의 곡을 작곡했으며,[6] 사이키델릭 록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들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7]

초기 핑크 플로이드의 리더였으며 보컬 기타를 담당하였다. 1960년대 사이키델릭 록의 상징적인 인물중에 한명이다. Arnold Layne 등의 곡은 그의 음악적 취향이 많이 들어간 곡이다. 음악적으로 존 레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 외에도 밥 딜런, 롤링 스톤즈 등 다양한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사운드를 선보였다. 1집인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을 주도적으로 제작해 초기 핑크 플로이드의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핑크 플로이드의 작곡가 중에선 로저 워터스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시드 바렛 역시 이에 뒤지지 않는 뮤지션으로 많은 팬들에게 추앙받는 인물이다.[8]

그러나 이후 밴드의 음악을 성공시켜야한다는 강박증과 마약 중독 등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되었고, 결국 1968년 건강상의 문제로 탈퇴하게 되었다. 이후 약 4년동안 추가적인 활동을 했지만 그렇게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1972년 음악계를 떠나 고향인 케임브리지에서 화가 겸 시인으로 살아가다가, 2006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비록 핑크 플로이드가 시드의 탈퇴 이후 스타일이 많이 변하기는 했음에도, 그는 핑크 플로이드의 전반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록 음악가로 자주 거론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팬들중에서도 시드 바렛의 팬이 매우 많다.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들도 이후 시드 바렛을 그리워하며 Wish You Were Here이라는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3. 생애

3.1. 유년기

시드 바렛의 본명은 로저 키스 배럿(Roger Keith Barrett)이다. 그는 1946년 1월 6일 영국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에서 아서 맥스 배럿과 위니프리드 배럿의 4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의학과 산하의 아덴브루크 병원에서 교수로 일했으며 동시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소속된 병리해부학자였다. 아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났는데, 그래서 공강일때는 아마추어 화가 겸 필하모닉 연주자로 일했다. 어머니인 위니프리드 역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중산층이었고, 시드가 어릴적 그의 집안은 매우 유복하였다. 시드 바렛의 형제 자매는 위로 3명의 형인 앨런, 도널드, 루스가 있었고 아래로 여동생 로즈메리 한명이 있었다.

시드는 케임브리지 글리슨가에 위치한 60번지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릴적에 183 힐스로드로 이사했다. 이 집은 로저 워터스가 어릴적 살던 집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시드는 몰리 메모리얼 초등학교에 진학했는데, 그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로저 워터스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로저 워터스와 시드 바렛은 어릴때부터 금방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시드 바렛은 매주 토요일 아침 인근에 위치한 호머튼 칼리지의 미술반에 다니곤 했는데, 여기서 데이비드 길모어를 처음 만났다.

그는 또래에 비해 훨씬 조숙했었고 15살때 인근 문법 학교에 다니고 있던 독일계 여자 친구와 사귀기 시작했다. 시드 바렛은 굉장히 쾌활하고 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또래한테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로저 워터스만큼은 아니어도 학교 규율에 조금은 반항적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서 보이스카우트의 리더를 맡기도 했다. 또한, 부모님이 그의 예술적인 재능을 일찍이 발견하고 격려해주신 덕분에 어릴때부터 시 낭송 대회, 웅변 대회 등에 나가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특히나 미술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현하였다.

1961년 12월 11일 시드 바렛의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하였다. 시드 바렛은 필력도 엄청난 수준이었기 때문에 50줄이 넘는 일기장을 매일 꽉꽉 채울 정도였는데, 이날만큼은 "불쌍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라고 한줄만 썼다고 한다. 정말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길모어는 아버지의 죽음과 상관 없이 이후에도 계속 성격은 유쾌했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적이 없었다며 시드 바렛이 아버지의 죽음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을 부정하였다.

3.2. 음악 활동 초기

미술과 마찬가지로 시드는 음악에도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가 필하모닉 연주자로도 일했기 때문에, 다양한 악기를 접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음악적으로도 일찍이 재능을 보인 편이었다. 어릴때에는 피아노를 연주하던 수준이었지만 부모님이 많은 악기를 사주셔서 10살때 우쿨렐레를 처음 선물받고, 1년 뒤에는 밴조를, 14살때는 어쿠스틱 기타를 선물받아 연주하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쿠스틱 기타도 그냥 굴러다니는 동네 기타가 아니라 미국에서 수입한 호프너[9]제 기타를 사줬다고 한다.

15살때는 용돈을 털어서 일렉트릭 기타 엠프를 구입했다. 친구인 로저 워터스 데이비드 길모어도 음악에 어느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점심 시간에 기타를 연주하며 놀았는데, 이때의 경험은 핑크 플로이드의 초기 라인업을 만드는데 있어서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시드 바렛은 집이 워낙 부자였던 만큼 많은 앨범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앨범을 들으면서 로저 워터스와 기타 연습을 했다고 한다. 어릴때 시드는 로큰롤, 그중에서도 보 디들리의 음악을 가장 좋아했지만 블루스, 재즈 같은 다른 장르도 많이 듣곤 했다.[10]

그러던 1962년, 비틀즈가 역사적인 첫 싱글 Love Me Do를 발매했고 시드 바렛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1년 뒤 Please Please Me의 발매로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고향 내에서도 소문이 날만큼 비틀즈에 크게 심취하여 매일 비틀즈 음악을 듣고, 1963년 경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또 시드는 친구 로저 워터스에게도 비틀즈 음악을 추천해줘, 워터스의 취향이 로큰롤에도 우호적이게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외에도 밥 딜런이나 당시에는 별로 안유명했던 롤링 스톤스도 좋아했다고 한다.

3.3. 대학교 시절

1962년 여름, 시드 바렛은 친구 존 고든과 함께 케임브리지 예술학교(Cambridge School of Art)의 미술 디자인 학부에 입학했다. 이는 케임브리지 예술학교의 행정실에서 일하고 있던 시드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시드 바렛은 학교 내에서 한성깔하는것으로 교수는 물론이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는데, 안보이게 책상 아래에서 발로 기타를 연주하여 교수를 골탕 먹이거나(...) 제멋대로 강의실을 드나들어서 교수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또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사실상 가장처럼 활동했는데 어머니에게도 아주 까칠하게 대하곤 했다고 한다.

반항아적인 스타일과는 별개로 과제는 정말 출중하게 잘해왔다고 한다. 과제 제출 마감시간 직전에 완벽한 그림을 그려왔으며, 그 결과 예술학교를 꽤나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것도 비슷한 스타일로 그린게 아니라 추상적이면서도 실험적으로 인상적인 그림을 남겼기 때문에 그의 천재적인 미술 재능은 수많은 모범생들에게 충격과 열등감을 자아냈다. 한편으로는 예술학교에서 점심시간 때 친구들과 합주를 했는데 여기에 같은 학교를 다니던 데이비드 길모어도 동참하였다. 데이비드 길모어는 정석대로 기타를 잘 연주한 반면에 시드 바렛은 아주 실험적으로 기타에 접근해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기타를 막 쳤고, 그래서 시드 바렛에게 기타를 배우려던 친구들도 시드는 기타 선생으로서 굉장히 안좋다며 다들 길모어에게서 기타를 배웠다.

학교에서 음악에 대한 호기심을 쌓던 시드 바렛은 제프 모트 앤 더 모토스(Geoff Mott and the Mottoes)라는 학교 밴드를 만들었고 데이비드 길모어 등 여러 친구들이 그와 함께 스쿨 밴드 활동을 하였다. 로저 워터스는 이때 시드 바렛과 항상 같이 붙어다녔지만 정작 음악에는 관심이 없어서 활동은 딱히 안했다고. 여담으로, 이때 시드는 믹 재거를 만나기도 했다. 당시 믹 재거는 별로 안 유명했었는데 시드 바렛의 잘생긴 외모와 깡마른 체형을 보고 자기네 베이시스트랑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시드 바렛은 그의 인생을 평생 망치게 되는 마약을 피우기 시작했다. 미성년자 시절부터 마리화나 중독 상태였다고 한다(...).

1964년 시드 바렛은 캠버웰 미술대학교에 입학했다. 본래는 첼시 미술대학교에 입학하기를 희망했지만 성적이 조금 부족했기 때문에 2지망 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런던으로 이사와서 학사 과정을 밟았고 동시에 아마추어 화가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런던에서 몇번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시드의 그림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실험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이때까지만해도 시드는 음악보다는 미술에 더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3.4. 핑크 플로이드 초창기와 UFO 클럽

1963년, 리전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의 건축학부에 다니고 있던 릭 라이트, 닉 메이슨, 로저 워터스는 스쿨 밴드를 결성하기로 결정했고 밴드 이름은 시그마 6(Sigma 6)가 되었다. 여기에 추가로 몇명의 대학교 친구들이 동참했지만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던 멤버가 탈퇴해버리면서 시그마 6는 출범과 동시에 반쪽이 되고 말았다. 급했던 로저 워터스는 마침 런던에서 미학 학사 과정을 착실히 밟고 있던 시드 바렛에게 SOS를 쳤고, 바렛이 동의하면서 시드 바렛은 보컬 겸 메인 기타로 시그마 6에 가입했다. 이때 시드 바렛은 로저 바렛이라는 본명 대신 시드라는 본명을 썼는데 시드는 보이스카우트 시절 그의 별명이기도 했고, 그가 좋아했던 동네 재즈 뮤지션의 애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로저 워터스와 이름이 겹쳤기 때문에 이때부터 그는 로저 배릿이 아닌 시드 바렛으로 활동했다.

시드 바렛은 활달한 성격으로 금세 밴드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동시에 메가데스나 더 티세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밴드의 이름을 고정시켜야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그가 좋아했던 미국 출신의 두 블루스 뮤지션의 이름을 합쳐 핑크 플로이드 사운즈(Pink Floyd Sounds)라는 이름을 임시로 만들었다. 핑크 프로이드 사운즈라는 이름은 장난스럽게 지은 이름이었지만 멤버들이 입에 착착 감긴다고 하여 이내 "사운즈"를 빼고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후 데이비드 길모어의 옛 친구이기도 했던 밥 클로스가 부모의 반대로 밴드를 떠나게 되면서 릭 라이트-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시드 바렛으로 구성되는 초기 핑크 플로이드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초기에 핑크 플로이드는 블루스를 연주하던 흔한 밴드였다. 그러던 1966년, 비틀즈가 희대의 명반이라고 불리는 Revolver를 발매하면서 런던 음악씬에 사이키델릭 록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비틀즈의 열렬한 팬이었던 시드 바렛은 시대의 흐름을 적극 반영하여 블루스에서 탈피하여 점차 사이키델릭 록 아방가르드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방가르드 음악의 대부라고도 불리는 프랭크 자파에게 큰 영향을 받아 언더그라운드 아방가르드 록씬에 깊이 관여했다.

이때 시드 바렛은 UFO 클럽이라는 언더그라운드 클럽에 관심을 가지고 클럽에서 수십번이나 라이브 공연을 가지며 여러 음악가들에게 입소문이 났다. 핑크 플로이드의 첫 공연에서 피트 타운젠드가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11] 지미 헨드릭스 오노 요코 같은 저명한 인사들도 UFO 클럽에 관심을 가지면서 점차 핑크 플로이드라는 존재가 소문을 타고 알음 알음 유명세를 얻었다.

여기에 힘을 입어 시드 바렛은 Arnold Layne이라는 곡을 작곡해 발매했으며, 이 곡은 UK 차트 20위까지 오르며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을 영국 록씬에 처음으로 알렸다. 뒤이어 발매한 See Emily Play 역시 UK 차트 6위에 오르며 선전해 거대 음반사 EMI에게 관심을 받게 되었고, 비틀즈의 레코딩 엔지니어였던 노먼 스미스를 프로듀서로 하여 핑크 플로이드 1집인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도어즈, 재니스 조플린과는 다른 또다른 독특한 사이키델릭한 감성을 풍기는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여담으로 이 앨범을 녹음할때 옆방에서 비틀즈 멤버들은 페퍼 상사 음반을 녹음하고 있었는데, 폴 매카트니가 시드 바렛이 녹음하는 것을 보고 정말 독특한 친구라며 핑크 플로이드라는 밴드는 성공할게 분명하다며 덕담을 많이 해줬다고 한다.

데뷔 앨범의 Matilda Mother, The Gnome 같은 곡에서 알 수 있듯 사이키델릭 록 장르에 동화적, 혹은 몽환적 느낌을 부여한 선지자적 뮤지션으로서 고평가받는다. 그리고 See Emily Play는 지포 라이터를 기타에 갖다대고 슬라이드를 한 곡으로 돌고래 소리 같은 기타 사운드가 특징이다. 이 슬라이드 기타는 실제로 존재하는 주법으로 슬라이드 바나 지포 라이터를 이용하여 기묘한 소리를 내는데, 주로 블루스나 컨트리 음악에 자주 쓰인다.

3.5. 핑크 플로이드를 탈퇴하다

''대강 이런말이였죠. ‘시드, 나 담배 좀 사러 나갔다 올게’ 그러고 나선 다음날 돌아왔어요.''
- 리처드 라이트
''시드는 우리 친구였어요. 하지만 우리는 거의 모든 시간 그 자식을 목 졸라 죽이고 싶었죠.''
- 로저 워터스
''누군가 ‘시드도 불러야 하지 않아?’라고 말했죠. 그말에 누군가(아마도 워터스였던 것 같은데) ‘싫어, 귀찮은 일 만들고 싶지 않아’라고 되받았죠.''
- 데이비드 길모어
''우리의 생각은 비치 보이스의 방식을 채택하자는 것이었어요. 브라이언 윌슨이 자기가 내킬때 무대 위로 밴드를 소집하는 식대로 가자는 것이였죠. 우리는 모두 시드가 핑크 플로이드 안에 어떤 식으로는 남아 있기를 원했으니까요.''
- 닉 메이슨
핑크 플로이드의 첫 음반은 시드 바렛이 주도적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밴드가 유명세를 얻게 된 바탕인 특유의 스타일 확립에도 시드 바렛의 영향이 컸으며, 작사 작곡까지 대부분 시드 바렛이 도맡아 했다.[12]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시드 바렛의 압도적이었던 비중은 그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였다. 단 몇달만에 시드 바렛은 가끔 아방가르드 음악이나 취미로 하던 평범한 대학생에서, 순식간에 주목을 받는 영국의 대표적인 록 음악가가 되었고, 2집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감과 빡빡한 투어 일정에 점점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시기 시드 바렛은 피트 타운젠드 조지 해리슨이 그랬듯이 인도 철학에도 심취했고, 아예 시크교로 개종까지 했지만 #, 진정한 안도감을 찾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LSD를 점점 더 많이 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오히려 시드 바렛이 평생 정신 문제를 겪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2집과 콘서트에 대한 압박감을 누그러트릴 수는 있었지만 LSD의 노예가 되어버리면서 마약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고, 1967년 겨울쯤에는 정말 상황이 악화되어 콘서트까지 망쳐버렸다. 기타 연주도 틀리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거나, 혹은 투어를 하는지도 모르고 한가롭게 산책을 해서 멤버들이 부랴부랴 다른 사람을 시드 바렛인척 하고 기타 핸드 싱크를 시켜야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노먼 스미스는 물론이고 밴드 멤버들까지 신경질을 냈는데 초등학교때부터 친구였던 로저 워터스마저 "콘서트를 할때만은 시드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결국 화가 폭발한 로저 워터스의 제안으로 데이비드 길모어가 1967년 12월에서 1968년 1월 사이에 세컨드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고, 시드 바렛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었다. 1968년 봄에는 아예 시드 바렛이 연주를 할수조차 없는 몸이 되어 불같은 성격의 워터스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조차 시드 바렛을 기피하게 되었다. 이 시기 시드와 같이 거주 했던 릭 라이트는 "담배 한갑 사가지고 올게"라고 거짓말하고 나가서 라이브 한번 뛰고 오는게 정말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소회했다. EMI 측에서도 이대로 가면 밴드가 엉망이 되겠다 싶어서 시드 바렛이 밴드를 탈퇴하도록 설득했고 시드 바렛은 설득을 받아들여 밴드를 갑작스럽게 탈퇴한다.

3.6. 솔로 활동, 정신병의 악화

And what exactly is a dream
And what exactly is a joke
그래서 꿈이란게 정확히 뭔데...?
그래서 장난이란게 정확히 뭔데...?
Jugband Blues 中, A Saucerful of Secrets 수록 곡
그가 작곡한 Jugband Blues나 공동 작업한 Set the Controls for the Heart of the Sun[13] 등은 2집인 A Saucerful of Secrets에 수록되었고, Vegetable Man이나 Scream Thy Last Scream 같은 몇몇 곡은 미발표되었다. 시드 바렛은 데이비드 보위를 포함한 여러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그러나 밴드를 탈퇴한 직후 시드 바렛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고, 친구들마저 그를 피해다니는 끔찍한 상황에 이르렀다. 음악 활동은 물론이고 일상 생활조차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밴드를 탈퇴한 시드 바렛은 친구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동거하였는데, 밤마다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괴상한 소음을 냈고, 툭하면 여자친구를 기타로 폭행(!)하거나 심지어는 문 앞에다가 분뇨를 싸지르는 미친짓이 매일 반복되어 친구들도 시드 바렛을 하나 둘씩 떠나가기 시작했다. 보다못한 시드 바렛의 친구들은 미친짓 보는게 지겹다고 화장실이나 천장 위 공간에 시드를 몇시간동안 가둬두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나마 1970년경에는 상황이 호전되어서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1968년 밴드 탈퇴 이후 정신이 말짱했을때 간간히 작곡해둔 몇곡을 모아서 The Madcap Laughs이라는 이름으로 1집을 발매했고, 영국 차트 내 진입은 성공했지만 이는 핑크 플로이드의 여러 솔로 곡들의 성적과 비교해봤을때 형편 없는 것이었다. 몇달 뒤, 시드는 신곡과 예전에 작곡한 곡들을 모은 신보 Barrett을 발매했는데 여기에는 릭 라이트 데이비드 길모어의 도움이 많았다고 한다.

말이 "호전"이지 실질적으로는 이 시기에도 정상적인 음악 활동은 거의 불가능한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음반을 몇번이나 갈아엎고 프로듀싱 상태도 개판이라서 릭 라이트와 길모어가 많이 고생했다고 한다. [14] 또 몇시간을 기타만 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아예 멍하니 멍때리는 상태로 녹음도 안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Barrett 앨범은 이전 The Madcap Laughs에 비해서도 상업적으로 부진했다.

1972년, 스타즈라는 밴드를 만들어 잠깐 활동하기도 했지만, 정말 눈뜨고 봐주지 못할정도로 공연을 개판쳤고, 이때를 마지막으로 시드 바렛은 기나긴 은둔 활동에 들어갔다.

상업적으로는 부진하긴 했지만 이 앨범들은 후일 재발굴되어 네오 사이키델릭과 애시드 포크의 시금석으로 평가받는다. 1집은 들어야할 명반 1001선에 꼽히기도 했다. 음침하면서도 중독적인 멜로디와 바렛 특유의 동화적 광기가 담긴 가사가 인상적인 앨범들이며, 대표곡으로는 'Octopus', 'Here I Go', 'Baby Lemonade' 등이 꼽힌다. 이외에도 <Opel>(1988)은 시드 바렛의 미발표곡과 아웃테이크 등을 모아놓은 앨범이다.

3.7. 은둔 생활

핑크 플로이드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발매하며 세계 최고의 인기 록밴드 반열에 올랐다. 밴드의 음악 성향은 사이키델릭에서 프로그레시브로 완전히 뒤바뀌었지만 사실상의 정신적 지주는 시드 바렛이나 다름 없었고, 1975년 멤버들은 그에게 헌정하는 Wish You Were Here이라는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로저 워터스 체제에서 만들어진 The Wall, The Dark Side of the Moon, Wish You Were Here은 모두 시드 바렛을 묘사하는 곡이 수록되어있을 정도로 핑크 플로이드 내에서 시드 바렛의 영향력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이런 핑크 플로이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시드 바렛은 1972년 이후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수년간 런던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1973년경 에릭 클랩튼 소속 밴드로 유명한 크림의 잭 브루스와 함께 있는 장면에 목격된 이후로, 그 어떤 음악가와도 함께하지 않았다가 1974년경 케임브리지 시절때부터 시드와 친했던 한 친구에 의해 목격당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시드는 머리를 밀었고 조금 뚱뚱해졌지만 까치발걸음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잘생긴 외모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다음해인 1975년의 어느날, 시드 바렛은 기습적으로 애비로드 스튜디오를 방문해 약 1시간동안 머물렀다.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은 Shine on You Crazy Diamond를 녹음하던 중이었는데, 양치를 하면서 일어섰다가 앉았다를 반복하는 시드 바렛을 몰라보고는 새로 고용된 사운드 엔지니어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게 45분이 지났을때쯤 로저 워터스가 시드의 이목구비를 보고 간신히 눈치를 채서 다른 멤버들에게 뚱뚱한 대머리 청년이 마약 중독으로 몰라보게 변한 시드 바렛이라는 사실을 알려줬고, 멤버들은 정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Wish You Were Here 앨범이 제작되었다.

이후 1977년, 로저 워터스는 런던의 해롯 백화점에서 돌아다니던중 우연히 간식거리를 사던 시드 바렛을 보게 되었다. 시드는 로저 워터스를 바라보자마자 도망쳐버렸고, 이후 그 어떤 멤버들도 시드 바렛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핑크 플로이드가 엄청나게 성공해 중년 시절에는 그에게도 관심이 쏠렸으나 음악 경력 얘기하는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핑크 플로이드가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될 당시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2001년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그럭저럭 즐겁게 봤다고 하며, See Emily Play를 여전히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1970년대 말부터 말년까지는 자신의 가족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어릴때부터 친했던 데이비드 길모어와 연락하고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데이비드 길모어가 1976년경 기자에게 시드 바렛이 살고 있는 호텔 방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길모어보다도 더 친한 사이였던 로저 워터스와는 별다른 연락을 하고 지내지는 않았는데, 시드의 가족들(특히 어머니)가 시드의 마약 중독을 로저 워터스 때문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로저 워터스와 사이가 엄청나게 나빴다고 한다. 이런 일 때문에 시드 바렛의 건강이 안좋았던걸 워터스는 몰랐지만 길모어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고.

3.8.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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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시드 바렛
핑크 플로이드의 상업적 성공이나 내분과는 별개로 음악 활동을 그만둔 본인은 대중의 눈에 띄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낙향 후 자택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면서 자발적인 은둔생활을 하였다. 멤버들하고도 만나지 않았고, 여동생을 통해 근황을 알리는 정도였다. [15] 대신 낙향 전까지 록 음악 사진가였던 믹 록과 교류를 했고, 20년이 지나 믹 록이 바렛 사진집에 사인을 요청하자 흔쾌히 해줬다고 한다.

그러다 췌장암으로 2006년 자택에서 향년 60세로 사망하였다. 장례식에는 가족만이 참석하였고 시드의 가족들과 사이가 안좋았던 로저 워터스는 물론 데이비드 길모어를 포함한 다른 멤버들도 참석하지 못했다. 평소 당뇨와 위궤양를 앓고 있었으며[16]대변인에 따르면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자식은 없다고 한다. 여러 여자와 염문이 있었고 심지어 한 여자와는 결혼할 뻔했으나[17] 결국엔 그놈의 정신병 때문에 무산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사후 케임브리지에 본인 이름을 딴 정신병 치료를 위한 기금이 생겼다고 한다.

4. 음악적 성향과 유산

Arnold Layne Pow R. Toc H., Astronomy Domine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컬트 인물인 그는 핑크 플로이드의 초기 리더로서 기발하고 잊혀지지 않는 사이키델리아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AllMusic #

1963년에서 1972년까지 짧게 활동한지라 다채로운 사운드를 보여주지는 못했고, 또 곡중 일부는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 그러나 그가 제작한 핑크 플로이드 초기의 유산들은 사이키델릭 록의 정점을 보여주며 음악적으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전반적으로 몽환적인 사이키델릭 록의 곡을 많이 썼다.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의 경우 유럽의 동화 등에서 아이디어를 채용하여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곡들이 많이 포함되어있다. 더 도어즈, 지미 헨드릭스 등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사이키델릭 아티스트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별한 분위기의 광기를 보여줬다.

로저 워터스 체제 이후 핑크 플로이드 내에서 사이키델릭 록의 색체가 옅어지고, 프로그레시브 록과 사회 비판적인 분위기가 강화되긴 했지만, 핑크 플로이드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만든 음악가로서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핑크 플로이드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중에서 유독 사이키델릭한 색체가 많이 남아 있는 편이었는데, 이는 시드 바렛의 영향이 컸다.

그가 밴드를 떠난 뒤에도 3집 More까지는 그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사실 시드 바렛이 가입하기 전까지의 핑크 플로이드는(그 전에는 Sigma6 등 다른 이름을 사용했지만) 평범한 블루스 위주의 밴드였으므로, 사이키델릭 취향의 음악으로 틀어놓은 게 시드 바렛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의 영향은 3집보다도 훨씬 후까지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사이키델릭한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은 1972년 7집 Obscured by Clouds까지 계속된다.

무엇보다도,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은 그의 첫번째 앨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많은 아티스트들이 그의 독특한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사이키델릭 록의 역사에서 이 앨범이 빠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드 바렛의 천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문제들로 인해 1970년대 이후 더욱 다채로운 시도를 보여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놀라운 능력들은 후대의 록 음악에 큰 영향을 줬다.

비틀즈, 그중에서도 존 레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학생 시절에도 매일 비틀즈 노래를 불렀고 비틀즈의 공연을 보면서 음악적인 퍼포먼스와 스타일, 사운드에 대해 많이 공부하며 록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운 바 있다. 그 외에도 롤링 스톤즈의 팬으로 믹 재거 키스 리처즈의 영향도 받았다.

핑크 플로이드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데이비드 보위가 대표적으로 시드 바렛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스스로 언급한 바 있다. 또 선대 아티스트인 폴 매카트니 피트 타운젠드도 그의 몽환적인 작사, 작곡 스타일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외 뉴트럴 밀크 호텔, 플레이밍 립스, 애니멀 콜렉티브, 블러(밴드)도 영향력을 언급하기도 했다.

솔로 시절엔 건강상의 문제로 핑크 플로이드 시절의 정교한 연주나 작곡, 안정적인 프로듀싱은 사라졌지만 최소한의 편성으로 특유의 환각적인 광기와 멜로디를 구현했으며 이런 시도는 플로이드랑 달리 펑크 록 이후 네오 사이키델릭 애시드 포크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소프트 보이즈[18], XTC, 티어드롭 익스플로전 같은 1980년대 영국 네오 사이키델릭 밴드들이 솔로 시드 바렛 추종 성향이 짙다.


Revolver 앨범의 영향으로 사이키델릭 록으로 전향하기 전에는 블루스를 주로 다뤘다.

5. 디스코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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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d Barrett Disc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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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dcap Laughs
1970
Barrett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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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파일:잘생긴 바렛.jpg
60년대 전성기 시절
  •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핑크 플로이드 초기에는 정말 엄청나게 잘생겼었다. 그러나 이후 마약에 손을 대면서 점점 망가지다가 1975년 경에는 뚱뚱해지면서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외모가 많이 변하게 되었다.[19][20] 다만 대머리가 된 것은 마약 중독과는 별 연관이 없어보인다.[21] 그의 친인척들중 대부분이 대머리였다고 한다. 즉, 대머리는 유전이었던 것. 아무튼간에 이때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었던지,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들은 대마초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마약 문제에서는 당대 록밴드들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었던 편이다.
  • 떠난 시드 바렛에 대한 남은 멤버들과 우정은 극진하였다. 상술한 Wish You Were Here 앨범 자체가 사실상 시드에 대한 추모(정확히 말하자면 추억)적 성격을 띨 정도다.[22] 한때 그와 절친이었던 릭 라이트는 바렛이 탈퇴하고 자신도 같이 탈퇴할까 고려했다고 하며, 로저 워터스는 심지어 1986년 다른 멤버들과 법정 공방을 벌일 때 '핑크 플로이드'라는 밴드는 시드 바렛의 정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자기 아버지의 영혼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3] 물론 이 철없는 억지의 끝은 패소였고 밴드의 이름은 길모어와 메이슨에게 넘어갔다.
  • 핑크 플로이드 멤버 중에서 유일하게 가명(Syd)을 쓴다. 본명을 썼다면 로저 워터스와 이름이 같아지기 때문인 듯[24]. 시드는 어릴적 바렛의 별명이기도 했다.
  • 케임브리지 출신인 다른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25]도 용인발음을 구사했지만 [26], 시드 바렛은 미들 클래스, 그것도 대학 교수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욱 찰진 정통파 용인발음을 구사했다. 영국 대중음악계에서 최초로 용인 발음으로 노래를 부른 사람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 데이비드 길모어는 '시드의 이야기는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 너무나 미화되어 있다' 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상술했듯 로저 워터스의 '시드 바렛 정신' 등의 이야기를 볼 때 시드가 일부러 못된 짓(?)을 하고 다녔다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 혹은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정도의 심한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관련 증언들을 보면 자의는 아니었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피폐해지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본인 또한 인터뷰에서 '내 머릿속은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27]
  • 한편 그의 정신병이 존 레논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 간단히 말하면 비틀즈보다 크게 될거라는 핑크 플로이드 프로듀서 (노먼 스미스, Rubber Soul 레코딩 엔지니어였다) 의 입털기에 존 레논이 빡쳤고, 밴드와 만났을때 평소 존 레논을 존경했던 시드와 멤버들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로큰롤 초보들이 무슨 사이키델릭 타령이냐, 너넨 그냥 우리가 깔아놓은 초석을 밟는 애송이다" 라는 식으로 폭언을 퍼부었고, 이것이 엄청난 충격과 실의가 되어 정신병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차검증이 가능할만한 실질적인 근거가 전혀 없으므로 결론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이 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팬들은 없다.
    다만 존 레논과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들이 만난 적은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바로 옆방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1집이 녹음되고 있었기 때문. 로저 워터스는 후일 존 레논을 좀 더 오래 만나봤으면 했다면서 아쉬워했다고 한다.
  • 바로 위의 루머와는 상반되게도(...) 존 레논이 작곡한 What’s The New Mary Jane이라는 익스페리멘탈 록 음악[28]에 참여한적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루머이다. The Beatles Bible 등 비틀즈 노래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이트에서도 시드 바렛의 참여에 대한 말은 없으며, 무엇보다도 곡의 녹음일이 이 설을 부정한다. What's the New Mary Jane은 1968년 8월 18일과 11월 26일 EMI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는데 이때는 시드 바렛이 LSD 과복용으로 제정신이 아닐 때였기에 녹음에 참여할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 1978년만 해도 돈이 다 떨어져 캠브리지로 돌아갈 정도였지만, 그래도 길모어가 제대로 로열티를 정산해준데다 사치를 하는 타입은 아니었던지 경제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었다. 유산으로 1천 7백만 파운드 정도를 [29] 남매들에게 남겼다고 한다. 밴드 역사로 보자면 짧은 시간 재적했지만, The Dark Side of the Moon 대성공 이후 사람들이 바렛이 쓴 곡이 들어있는 이전 음반 및 컴필레이션을 찾아들으면서 로열티가 현직 멤버들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하게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 본 항목의 제목의 표기가 한국에서 잘 알려진 터라 '바렛'이라 표기되었지만,[30] 영미권 사람들은 대개 베어릿이라 발음하는 듯. 물론 바-릿(바렛)이라 발음한 예도 많다.
  • 생전에는 시크교의 신도였던것으로 보인다.
  • 영미권 록 평론가들은 마약 중독과 정신병력(때문에 짧게 끝난 솔로 활동), 사이키델릭/애시드 포크 음악 성향, 기나긴 은둔 후 재발굴 등 샌프란시스코 출신 록밴드 모비 그레이프의 리더였던 알렉산더 스킵 스펜서와 비교하기도 한다. 활동 시기도 비슷했고 나이도 같았으며, 솔로 첫 앨범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점도 똑같다. 다만 스킵은 시드랑 달리 결혼해 자식을 봤다고 한다. 또 플리트우드 맥의 기타리스트이자 초대 리더였던 피터 그린 (Peter Green)과도 닮은 점이 있는데 둘다 LSD 중독으로 자기가 리더였던 밴드에서 제일 먼저 탈퇴했다. 또 피터 그린도 1971년 은퇴해 시드 바렛과 거의 같은 시점에 음악 활동을 그만뒀다.


[1] 당대 기준으로는 장신이었지만 정작 180cm는 가볍게 넘어가는 거인 천지였던 핑크 플로이드 내에서는 2번째로 단신이었다. [2] EMI 산하의 음반사 [3] 최전성기로, 로저 워터스 이전의 핑크 플로이드의 리더 시절. 상당한 미남이었다. [4] 솔로 앨범 프로모션을 위한 사진들 중 하나. 믹 록이 찍었다. 정신적 문제가 생겨 약물을 복용하던 시기라 보이다시피 눈빛이 흐려지고 머리가 산발이 되는 등 중독이 심하게 된 모습이다. [5] 마약 금단현상으로 인해 고도 비만에 대머리가 된 모습으로,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 모두가 약 45분동안 시드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이마저도 시드 바렛과 가장 친했던 로저 워터스가 이목구비를 보고 간신히 시드 바렛임을 알아보고 다른 멤버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 때 시드는 양치질을 하고 있었는데, 다들 새로운 음반기술자인 줄로 알고 있었다고. 믿기지 않겠지만, 왼쪽의 사진에서 이 모습까지 되는데 6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6] 시드 바렛-로저 워터스-데이비드 길모어로 이어지는 핑크 플로이드 독주체제의 첫 스타트를 끊은 인물이다. 핑크 플로이드는 시드 바렛 탈퇴 직후 ~ 1970년대 중반, 1990년대 이후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기간 음악 제작 방식이 한 멤버의 독재에 가까운 작곡이었는데, 그 독주체제가 아니던 거의 유일한 시점의 앨범이 바로 The Dark Side of The Moon이고, 리처드 라이트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 '완전한 밴드가 하나로 움직이듯이' 모든 멤버들이 작곡 등의 작업에 골고루 참여했다. 그나마 시드 바렛 시기에는 워터스도 작곡을 거들었지만, 워터스도 이때는 시드 바렛의 스타일에 매우 큰 영향을 받아 시드 바렛식의 노래를 주로 작곡했다. 워터스 독주 시대인 The Wall과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7] 실제로 그의 잔재는 1973년 즈음 프로그레시브 록 색채가 강해지며 서서히 사라졌지만 1975년의 Wish You Were Here 앨범 등에서 볼 수 있듯 멤버들은 여전히 그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8] 정작 최근의 핑크 플로이드의 팬덤들은 대부분 1973년 The Dark Side of The Moon 이후의 스타일의 앨범들을 듣는 경우가 많아 시드 배릿 시기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크다. 시드 배릿 시기의 팬덤들은 오히려 사이키델릭 록의 팬층인 경우가 많다. 최근에 유입된 시드 바렛 팬덤은 인디 음악 팬덤에서 유입된 경우가 많다. 후술하겠지만 시드 바렛은 인디 음악에서 비중이 큰 네오 사이키델릭/애시드 포크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9] 폴 매카트니가 콘서트를 할때마다 들고다니는 금색 베이스 기타를 이 회사가 만든 것이며, 폴 매카트니의 인지도에 힘입어 현재는 베이스 기타로 더 유명하다. [10] 데이비드 길모어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했다고 하며, 로저 워터스는 오히려 어릴때는 블루스와 재즈를 좋아했고 로큰롤을 가장 싫어했다고 한다. [11] 참고로 피트 타운젠드는 핑크 플로이드의 마지막 공연인 2005년 라이브 8에도 등판한다. 그야말로 록씬의 살아있는 화석. [12] 1967년 발표된 핑크 플로이드 곡중 거의 대부분이 시드가 작사 작곡한 곡들이다. 유일하게 그가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곡은 라이트가 단독 작곡한 Paint Box와 워터스가 단독 작곡한 Take Up Thy Stethoscope and Walk뿐이 였다. [13] 이는 시드와 데이비드 길모어가 모두 참여한 곡으로, 핑크 플로이드 사상 유일하게 다섯 멤버가 모두 참여한 사례이다. [14] 때문에 전반적인 녹음 퀄리티가 밴드 시절보다 거친 편인데, 이런 거친 질감이 펑크 뮤지션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기도 했다. [15] 생전에도 기자나 극성팬들이 여전해 케임브리지로 찾아오곤 했지만 근황용 접촉 빼고는 가족들이 내쫓았다고 한다. 상술한 파파라치 사진도 완전히 동네 할아버지처럼 나온 걸 보면 시드 본인은 주변 눈치 개의치 않고 산 것으로 보인다. [16] 여동생의 말에 의하면 당뇨 합병증 때문에 손가락 몇 마디를 절단해야 할 정도였다고 하니 꽤나 심했던 듯. [17] 옥스포드로 이주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산. [18] 리더였던 로빈 히치콕은 데이먼 알반과 함께 시드 바렛 추모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19] 상기하였듯이 첫 등장 후 약 45분간은 멤버들도 시드를 레코딩 엔지니어로 오인했다가, 로저가 간신히 이목구비를 알아보아서 멤버들에게 알려줘 멤버들이 경악했다고 한다. [20] 마약으로 외모가 변한 예시로 키스 리처즈를 들 수 있는데, 리처즈의 경우는 폐인 외모여도 간지를 획득했지만, 시드는 그런 거 없고 폐인 외모가 되었다. [21]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마약을 피워댄 지미 페이지, 루 리드, 에릭 클랩튼, 키스 리처즈 모두가 얼굴이 삭으면 삭았지 탈모가 오지는 않았다. [22] 앨범 타이틀 곡에는 시드의 솔로 앨범 수록곡 중에서 가사를 따와 붙이기도 했다. [23] 실제로 시드가 떠난 후 핑크 플로이드에서 로저가 독재 체제로 제작한 전설적인 명반 The Wall의 주인공 핑크는 시드 바렛에게서 모티브를 따 온듯한 묘사가 많다. [24] 하지만 로저 워터스의 퍼스트 네임은 George이다 [25] 로저 워터스, 데이비드 길모어 [26] 핑크 플로이드 멤버 대다수는 대학까지 나온 고학력층에 속한다. [27] 솔로 활동 시절에도 인기 밴드 리더였던만큼 많은 팬들이 모인 곳에서 라이브를 한 적이 있었는데, 혼자 멍하게 코드 한 개만을 계속 연주하며 노래는 전혀 부르지도 않는 상태가 지속되는 등(심지어 마약을 하고 무대에 오른 것도 아니었다.) 개판이었다고. [28] 앤솔로지 3에 수록되었으며 2018년 화이트 앨범 50주년 기념 믹스 버전에도 에셔 데모 버전이 수록되었다. [29] 한화로 약 260억 정도. [30] '배릿'이라 표기한 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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