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01:13:10

로리 갤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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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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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이 2015년 100대 기타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실제 현역 기타리스트들과 평론가들이 뽑은 순위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키스 리처즈 제프 벡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비비 킹 척 베리 에디 밴 헤일런 듀언 올맨 피트 타운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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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해리슨 스티비 레이 본 앨버트 킹 데이비드 길모어 프레디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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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트럭스 닐 영 레스 폴 제임스 버턴 카를로스 산타나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쳇 앳킨스 프랭크 자파 버디 가이 앵거스 영 토니 아이오미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브라이언 메이 보 디들리 조니 라몬 스코티 모어 엘모어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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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쿠더 빌리 기븐스 프린스 커티스 메이필드 존 리 후커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랜디 로즈 믹 테일러 디 에지 스티브 크로퍼 톰 모렐로
<rowcolor=#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믹 론슨 마이크 블룸필드 휴버트 서믈린 마크 노플러 링크 레이
<rowcolor=#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제리 가르시아 스티븐 스틸스 조니 그린우드 머디 워터스 리치 블랙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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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마 클라렌스 화이트 오티스 러쉬 조 월시 존 레논
<rowcolor=#fff>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앨버트 콜린스 로리 갤러거 피터 그린 로비 로버트슨 론 애시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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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키 베츠 로버트 프립 조니 윈터 듀언 에디 슬래시
<rowcolor=#fff>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레슬리 웨스트 T-본 워커 존 맥로플린 리처드 톰슨 잭 화이트
<rowcolor=#fff>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로버트 존슨 존 프루시안테 커트 코베인 딕 데일 조니 미첼
76위부터는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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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 선정 250대 기타리스트
175위
Rory Gallagher
로리 갤러거
파일:Rory Gallagher.jpg
<colcolor=#34062B><colbgcolor=#E3996A> 본명 William Rory Gallagher
윌리엄 로리 갤러거[1]
출생 1948년 3월 2일
아일랜드 얼스터 주 도니걸 밸리셰넌
성장지 아일랜드 먼스터 코크
사망 1995년 6월 2일 (47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국적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아일랜드
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음악 프로듀서
소속 테이스트 (1966 - 1970)
무소속 (1970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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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34062B><colbgcolor=#E3996A> 학력 북 수도원 학교 (졸업)
가족관계 아버지 : 다니엘 갤러거
어머니 : 모니카 갤러거
동생 : 도널 갤러거
종교 기독교 ( 가톨릭)
신체 175cm
장르 , 블루스 록, 재즈, 포크송
활동 기간 1963년 - 1995년
사용 악기 보컬, 기타, 베이스, 색소폰, 하모니카
레이블 폴리도르, 부다, 캐슬, 크리설리스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1. 개요2. 일생3. 상세
3.1. 연주 스타일3.2. 평가 및 영향
4. 사용 장비5. 디스코그래피6. 여담

[clearfix]

1. 개요

로리 갤러거(Rory Gallagher) 아일랜드 출신 블루스 기타리스트, 싱어송라이터이다.

2. 일생

1948년 3월 2일 아일랜드 얼스터 주 도니걸 발리쉐논에서 탄생한 로리 갤러거는 버디 홀리, 에디 코크런, 제리 리 루이스,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하울링 울프의 음악을 듣고 영향을 받으며 뮤지션의 꿈을 키웠으며 9살 때 처음으로 기타를 배워 15살 때엔 스쿨밴드의 리더가 되었다.

1960년대 초,'폰타나 쇼 밴드' 라는 이름으로 당시 인기를 끌던 스키풀 장르의 밴드를 조직하며 순회공연을 다녔고, 1965년엔 그룹명을 '임팩트'로 바꾸었다. 그 후 독일 함부르크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활동을 했으며, 아일랜드에선 3인조 밴드 '테이스트'를 이끌며 1969년 영국 런던으로 진출, 기타 연주 중심의 앨범들을 발표하였다.[2] 그룹 테이스트는 블루스 컨트리 뮤직 취향의 곡들을 하드 록 스타일로 연주해 서서히 지명도를 넓혀갔고, 1970년 전설의 와이트 섬 페스티벌의 첫 오프닝 무대에 서는 영광을 얻게된다.

그 후 테이스트가 해산하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몇몇 소규모 밴드들에서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1972년엔 당대의 미국 블루스 음악계를 꽉 휘어잡고 있던 아티스트 머디 워터스의 런던 세션 앨범에 참여했고, 1977년에는 영국 스키풀 계의 거물 로니 도네가오의 재기작 'Putting On The Style'에 참여하였다.

특히 블루스 로큰롤 분야에 관심이 있는 기타리스트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라인전개를 펼쳤다. 특히 그중에서도 'Daughter Of The Everglades', 'Livin', Like A Trucker', 'For The Last Time', 'Hands Up', 'There’s A Light', 'Take It Easy Baby' 와 같은 연주곡들로 그의 진가를 알 수 있다. 또한 블루스 거장 제리 리 루이스와 생전에 녹음한 롤링 스톤즈의 명곡 (I Can't Get No) Satisfaction의 커버 또한 명연으로 손꼽힌다.

철저하게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기를 싫어했던 그의 성격은 TV 쇼 출연조차도 거부하고 오로지 앨범과 라이브 공연을 통해서만 음악을 계속했던 그의 생전 활동에서 드러난다. 그가 이끈 테이스트는 8장의 앨범을 내놓고 해체했지만 로리 갤러거 본인은 솔로 활동을 통해 유행의 변화에 쫓지 않고 록 음악에 바탕을 둔 정통 블루스 연주자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지켜나갔다. 실제 롤링 스톤즈와 같은 거물급 밴드에서 오는 러브콜들을 정중히 거절하는 자세에서 볼 수 있었으며, 자신이 심각한 병에 걸린 것을 알면서도 1994년 말까지 라이브를 계속함으로써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애착을 알 수 있다. 1995년 1월 당시에는 공연을 앞두고 극심한 복통으로 쓰러져 병원에 후송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병세가 나빠졌다.

그는 평소에 주기적으로 폭음을 하는 좋지 못한 술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과음을 계속할수록 그의 은 계속해서 나빠졌으며, 더군다나 평소에 비행 공포증이 있던 그는 이를 이겨내기 위해 신경안정제를 자주 투여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음주, 약물 습관은 그의 몸을 갉아먹어 종래에는 간 이식을 받아도 돌이키기 힘든 수준으로 병세가 악화된다. 1995년, 그는 영국 런던에서 간 이식 수술을 받게 되었으나, 수술 직후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에 감염되었고, 끝내 이를 이겨내지 못한 채 향년 47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파일:external/www.deadbluesguys.com/gallagher_rory_004.jpg
파일:external/media-cdn.tripadvisor.com/rory-gallagher-statue.jpg
아일랜드 코크, 세인트 올리버 공동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좌)과 아일랜드 발리쉐논에 세워진 그의 동상(우)
사후 그는 그의 고국인 아일랜드 코크의 세인트 올리버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이후 그가 태어난 아일랜드 발리쉐논에는 그의 동상이 설치되었으며, 수도 더블린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인 로리 갤러거 코너(Rory Gallagher Corner)가 생겼다. 이 장소의 벽에서는 그가 생전 사용하던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묘사한 구조물 또한 볼 수 있다.

3. 상세

3.1. 연주 스타일

대표곡 중 하나인 Bad Penny
( 1982년도 Rockpalast 라이브)
또 다른 대표곡 Shadow Play
( 1979년도 몽트뢰 라이브. 하드 록에 가까운 색체를 보여준다.)
롤링 스톤즈 (I Can't Get No) Satisfaction 커버
( 제리 리 루이스와의 협연이다.)
I Could've Had Religion
( 하모니카와 기타를 동시에 연주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밴 모리슨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아일랜드 대중음악의 상징. 그 명성은 아일랜드 전역을 넘어서 유럽을 강타한 브리티쉬 인베이전의 뮤지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다 롤링 스톤 선정 기타리스트 순위 57위라는 점에서 순위권에 있는 지미 페이지, 리치 블랙모어같은 저명한 기타리스트에 비해 저평가 받는다고 생각할수 있으나, 위에 언급된 레전드들에 비해 과소평가되면 과소평가 되었지 절대로 꿇리지 않는 뮤지션, 오히려 유튜브같은 현대 매체들의 활성화 이후 그 훌륭한 음악성과 퍼포먼스가 이전보다 훨씬 고평가받고 있다.

그는 에릭 클랩튼과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이나, 팝적인 히트곡을 주로 제조한 에릭 클랩튼과는 달리 상업성, 대중성과 거리가 먼 블루스 곡들을 주로 작곡하였으며, 라이브 공연과 폭발적인 무대 매너로 기억하는 팬이 많다. 그의 음악은 훌륭한 연주력과 빈티지 스트라토캐스터에서 우러나오는 크런치한 기타 톤이 장점이며, 특유의 즉흥 애드리브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신만의 개성이나 독자적인 주법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였으며, 특히 다운피킹, 피킹 하모닉스 기교, 그의 전매 특허라 할수있는 블루스와 아일랜드 민요를 녹인 진행 등 영국 본토 스타일과 확연히 차이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의 절정에 다다른 연주는 Irish Tour '74 라이브 쇼인데, 이 공연은 로리 갤러거 스스로도 인생 최고의 공연이었다고 자부하는 라이브이기도 했다.[3]

기타 뿐만 아니라 하모니카를 연주하거나 슬라이드 기타 테크닉을 사용하는데도 능숙하였으며, 밴조와 같은 기타족 현악기 또한 상당히 잘 다뤘다.

3.2. 평가 및 영향

MC: How does it feel to be the greatest guitarist in the world?
Jimi Hendrix: I don’t know, go ask Rory Gallagher.
MC: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지미 헨드릭스: 전 모릅니다, 로리 갤러거에게 물어보세요.[4]
'How do you get your sound Mr. Gallagher?' and he sits and tells us. So I owe Rory Gallagher my sound."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내나요, 갤러거 씨?"하고 물었더니 앉아서 얘기를 해 주더군요. 제 기타 사운드의 근간은 로리 갤러거에게 있습니다. 전 그에게 정말 큰 빚을 졌죠[5][6]
브라이언 메이 ()
The Man who got me Back into the blues
나를 블루스로 다시 되돌아가게 해 준 장본인
에릭 클랩튼
Rory was probably the most natural player I’ve ever seen.
In all the gigs we did together I don’t think I ever heard him play the same thing twice... He was the ultimate performer.
로리는 정말 천부적인 기타리스트입니다, 같은 곡이라도 항상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였고요…
그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뮤지션입니다.
리치 블랙모어 ( 딥 퍼플, 레인보우)
I’m a big admirer of Rory Gallagher, When I was in my 20s, he was someone I discovered and was very much a fan of. He left a great mark.”
저는 로리갤러거의 열렬한 팬입니다. 20대 시절을 보내며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그는 아일랜드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토미 엠마뉴엘
파일:17_mm_poll.jpg ]
음악 일간지 '멜로디 메이커'의 1977년 발간본으로 추정되는 회차에 실린 올해의 기타리스트 우승자 목록
아래 붉은 네모가 쳐진 '1972년 우승자' 란에 로리 갤러거의 이름이 보인다. 그는 1970년대 기타리스트 인기 투표 순위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했었다.
여러 후대 아티스트들 중에도 로리 갤러거의 영향을 숱하게 받은 아티스트들이 많은데, 마찬가지로 아일랜드 출신 음악가이며, U2의 기타리스트인 디 에지는 특히 자국 아일랜드에서 해마다 열리는 Rory Gallagher Festival의 제1회 수상자로써 기쁨의 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7][8] 대한민국 일본에서 꽤 높은 인지도를 지닌 블루스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조차도 자신의 최고 롤 모델은 로리 갤러거라고 밝힌 적이 있을 정도.[9] 장르가 살짝 다르긴 하나, 헤비 메탈 밴드 주다스 프리스트의 기타리스트 케이케이 다우닝 글렌 팁튼이 그에게 기타 레슨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딥 퍼플 롤링스톤즈[10]의 차세대 기타리스트 후보로 추천 받았고 영국의 레전드 데프 레파드의 기타리스트 비비안 캠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기타 좀 오래 쳐봤다는 사람들도 잘 모를 정도로 대한민국에서의 지미 헨드릭스보다 훨씬 명성과 업적에 비해 매우 처참한 인지도를 가졌다. 이는 그가 비교적 활발히 활동하던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실력에 비해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아일랜드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통상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멸시하던 나라였던 아일랜드를 터부시하던 것도 있고, 그들을 배척하는 텃세가 매우 심했기 때문.[11] 더군다나 그는 앞서 언급한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TV 쇼 같은 매체에의 출연을 거부하고 오직 앨범 발매와 라이브만으로 음악 생활을 이어나갔기에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횟수 또한 적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루스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연구하고 넘어가야 할 뮤지션이며, 미국에서 유럽으로 넘어온 블루스 신드롬 역사를 논하는데 이 사람을 뺄 수 없다.

4. 사용 장비

4.1. 일렉트릭 기타

파일:external/www.rorygallagherstrat.com/rory-gallagher-strat-wiring.jpg
파일:rorygallagherstrat.jpg
로리 갤러거와 그의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일렉 기타
그는 커리어의 대부분을 1961년에 생산된 펜더사의 스트라토캐스터(Stratocaster) 일렉트릭 기타와 함께하였다. 그의 스트라토캐스터에는 독특한 비화가 있는데, 어느 날 공원에서 이 기타를 도둑 맞고 일주일이 지난 뒤 다시 그 자리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그 전까지는 비교적 멀쩡하던 바디가 페인트가 대부분 벗겨져 나간 매우 낡고 헤진 모습으로 변해있었다고 한다. 이 그냥 바디가 살짝 헤진 것도 아니고 바디 부분에 피니쉬 조각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심각한 피니쉬 파손이 일어났음에도 그는 이 기타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였다. 이는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기타의 외관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지 커리어 내내 기타에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그냥 굴러다니는 나사를 아무거나 박아넣고 사용하는 등 기타를 매우 과격하게 유지/보수하였다.[12]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생산된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는 그 자체로 대중 음악에 미친 영향력 탓에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고 또 희귀하기에 수집가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하게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데, 그가 사용하던 이 스트라토캐스터는 로리 갤러거라는 거장이 사용하였다는 가치가 또 더해지기에 만에 하나 경매에라도 출품된다면 같은 연식의 다른 스트라토캐스터 이상으로 대단히 비싼 가격에 거래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점쳐진다.

해당 기타를 생산한 펜더사에서는 이후 자사의 플래그쉽 라인업인 펜더 커스텀 샵에서 로리 갤러거가 사용하던 스트라토캐스터를 바디에 생긴 실금과 잔기스, (바디의 태반이 벗겨져 있지만) 피니쉬 자국 하나까지 완벽하게 복각한 제품을 선보인 바 있다. 원래 해당 모델은 한정판으로 단 몇십 대만 생산하여 판매하려 계획되었으나, 워낙에 반응이 폭발적이었던데다, 그 수요가 컸기에 현재는 아예 주기적으로 생산하여 판매되고 있다. 2024년 기준으로 신품가는 대략 6,000달러 중반대(한화 약 800만 원)에 형성되어 있다.
[clearfix]
조 보나마사의 연주 조니 마의 연주
원본 기타는 현재 로리 갤러거의 친동생인 도널 갤러거가 소유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위 영상처럼 간혹 다른 뮤지션들이 사용할수 있도록 빌려주기도 한다.

물론 그는 이 스트랫을 제외한 나머지 일렉 기타도 많이 사용하였는데, 댄일렉트로, 깁슨, 펜더 듀오 소닉과 텔레캐스터 등이 그러하다.


이 기타가 약 89만 파운드(한화 16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4.2. 어쿠스틱 기타

파일:rorygallagher3.jpg
주로 사용한 어쿠스틱 기타 Martin D-35 모델이며, 그의 이름을 딴 시그내쳐 모델도 판매가 되었었다.

어쿠스틱 기타도 위의 일렉 기타 만큼이나 험하게 다룬 것으로 유명한데, 해당 링크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여기저기 찍힘이나 세월의 흐름이 잔뜩 녹아 있는 모습이다.

4.3. 이펙터

이펙터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트레블 부스터 이펙터를 애용했으며, 커리어 후기에는 플렌저나 옥타퍼즈 등 다양한 종류의 이펙터를 쓰기도 했다.

4.4. 기타 앰프

기타 앰프 또한 뭐든지 가리지 않고 썼다. 가장 대표적인 앰프는 VOX의 AC-30 앰프이지만, 펜더의 베이스맨 앰프와 마샬에서 생산된 콤보 앰프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5. 디스코그래피

Rory Gallagher – 1971
Deuce – 1971
Live in Europe – 1972
Blueprint – 1973
Tattoo – 1973
Irish Tour '74 – 1974
Against the Grain – 1975 Rolling Stone review at the Wayback Machine (archived 1 October 2009)
Calling Card – 1976 Rolling Stone review at the Wayback Machine (archived 1 October 2009)
Photo-Finish – 1978
Top Priority – 1979
Stage Struck – 1980
Jinx – 1982
Defender – 1987
Fresh Evidence – 1990

특이하게 정규 앨범보다 라이브 앨범의 평가가 더 높다. Live in Europe과 Irish Tour 앨범은 라이브 앨범 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으로도 불린다. 로리 갤러거의 낮은 인지도 때문에 묻히곤 하지만, 평론가들의 평은 압도적으로 좋다.

6. 여담

  •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엄청난 훈남이었다. 늙었을때는 약간 살이 찌긴 했지만 그 나이대 치고는 동안이었다.
  • 여권을 말하길 '신이 만든 가장 불필요한 물건'이라고 했다. 아마도 투어를 좋아하는 그의 성격상 이미그레이션에서 기다리는게 꽤나 지루했고 극도의 비행 공포증도 한몫 했을 것이다.
  • 팬서비스가 엄청났다. 길 가는 중 싸인도 물론이고, 사람들이 손을 뻗자 관중석을 손으로 쓸어주고, 자기 기타를 잠깐이긴 하지만 보여주고 만져보게 해주는 등의 영상들이 있다, 또한 실제 공연장에서 갑자기 무대로 뛰어든 한 관객이 무대 가드들에게 끌려나가자 가드를 제지하고 같이 'Shadow Play'를 함께 열창하였다고 한다 그걸 본 관객들은 폭풍오열하였다고 전해진다.
  • 도덕성에서도 귀감으로 삼을 만 한데, 표절 시비[13], 섹스 스캔들, 마약 등의 약물 관련 문제 등 동시대 다른 아티스트들에게는 있었을 법한 논란이 단 한 건도 없었다.
  • 여자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루피들 뿐 만 아니라 실제 여자친구와도 흐지부지 했다고 한다.[14] 지인으론 동생이랑 무지 가까웠다고 한다. 실제 성격은 수줍음이 무지 많았다고 한다. 전기의 표현을 빌리면 극도의 수줍음이었다.
  • 주변인들의 가장 그럴듯한 평은 그는 이미 블루스에 목숨과 모든걸 바쳤기에 그 무엇도 그의 인생에 간섭할수없었다고 말한다, 낡은 스트라토캐스터와 청바지를 입고 스스로 고독한 스파이처럼(실제 007시리즈와 추리소설 작가인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을 즐긴걸로 추정)무대위에 올라 연주하는것을 삶의 낙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그의 소탈하고 음악적인 열정이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땀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산성이었다고 한다.


[1] 아일랜드어로는 Uilleam Ruairí Uí Ghallchóir(일럄 루어리 이 갈호르)이다. [2] 이 당시 앨범들은 프로그레시브, 재즈 풍의 실험적인 장르들과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3] 이 공연은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있는데, 이 당시 아일랜드 북아일랜드 사이의 분쟁으로 인해 IRA가 아일랜드 전국 각지에서 무장 항쟁을 일으키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로리 갤러거는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아일랜드 전 국토를 투어하였고, 국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신문에서 '로리 갤러거는 아일랜드 국민을 버리지 않았다.' 라고 평가했을 정도. [4] 다만 이 인터뷰가 실제로 있었던지는 명확하지 않다. https://youtu.be/voaWfroElwY 본 영상의 0:15경에 로리갤러거의 트리뷰트 앨범(실제 라이브 공연실황을 짜집기한 앨범인지 방송녹음인지 정확히 알수없음)을 소개하는 MC가 본 발언을 언급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언은 많아도 실제 인터뷰 영상이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지미 헨드릭스에게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된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본 인터뷰가 실제로 있기는 했는데, 그 인터뷰에서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 중에는 최고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라고 겸손한 답변을 했다.로리 갤리거에 대한 지미 헨드릭스의 인터뷰는 이 실제 인터뷰에서 파생된 루머일 가능성이 크며, 위키피디아에서도 이 발언의 출처를 찾을 수 없다고 서술되어 있다. 비슷한 사례로 에릭 클랩튼에게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누구냐는 질문에 프린스에게 물어보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나, 이것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5] 출처: "Dvdverdict.com". Dvdverdict.com. 15 April 2009.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5 April 2009. Retrieved 17 July 2011. [6] 실제로, 브라이언 메이는 Dallas사의 Rangemaster Treble boost이펙트와 Vox AC30 앰프 조합을 주로 사용하였는데,이는 로리 갤러거의 영향이 컸다. [7] 로리 갤러거의 죽마고우 베이시스트 제리 맥어보이의 자서전 서론에서 발췌 [8] 자신의 10대 시절 인생의 낙이 그의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는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9] 실제로 게리 무어는 로리 갤러거와 기타 스트링을 서로 교환하기도 하며 꽤나 가까이 지낸 것으로 보인다. 로리 갤러거 사후에는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한 이력이 있다. [10] 하단 여담 참조 [11] 당시 아일랜드인들은 피부 하얀 검둥이라는 비아냥과 조롱을 받을 정도로 영국을 포함한 주류 사회에서 차별받아 왔다. [12] 아래에 나올 펜더 커스텀 샵의 복각 모델에서도 이러한 부분이 쓸 데 없이 잘 재현 돼 있다. 실제로 해당 모델의 픽가드 부분을 잘 살펴보면 펜더 사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규격 외의 나사(...)가 박혀 있는 부분도 볼 수 있다. [13] 당시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은 서로 LP판을 돌려 들으며 라디오로 서로의 릭을 카피하기도 했으며, 몇몇 아날로그의 수혜를 톡톡히 본 표절 아티스트들은 유튜브가 활성된 지금 시대에 와서야 누가 누구것을 표절했는지 단번에 밝혀지게 되었다. 물론 당연히 표절하지 않은 뮤지션이 더 많지만 브리티쉬 인베이젼 초창기 뮤지션 출신으로 단 한 곡조차 표절 시비에 거론되지 않는 점은 지금도 존경받을 점이다. 리치 블랙모어의 어떤 아티스트의 어떤 곡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Plagiarism(표절)강의를 보면 더더욱 와닿는다. [14] 성소수자나 무성애자, 또는 성에 대해 꽉 막힌 사람도 아니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알 수 없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