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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어: Українські росіяни러시아어: Русские на Украине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을 가리킨다. 2001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인구는 8,334,100명으로 당시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17.3%에 달했다. 해당 통계에서 러시아계로 분류된 인구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가 아니라 인구조사 자가응답에서 자신을 러시아계라고 응답한 경우에 한했다. 2018년 통계 기준으로는 분쟁 지역인 크림반도를 포함해서 717만여 명이 거주 중이다.
2. 거주 지역
범례 | ||
우크라이나어 | ||
러시아어 | ||
루마니아어 / 몰도바어 | ||
크림 타타르어 | ||
헝가리어 | ||
불가리아어 | ||
가가우즈어 | ||
폴란드어 | ||
알바니아어 | ||
체르노빌 피해지역 |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의 남동부와 남부에 주로 거주한다. 19세기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은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곡물, 그리고 우크라이나 남부 해안 지역에 영국 자본의 투자를 받아 생산하는 광업, 중공업 생산품들이었는데 이러한 연유로 19세기 후반 기준으로 러시아 제국 전체 수출의 3/4을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책임지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오면서 특히 곡물 수송, 그리고 중공업 투자가 활발했던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러시아인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1897년 인구 조사 당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인 1700만여 명과 300만여 명의 러시아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도회지 기준으로 보면 키이우와 오데사 주민의 절반, 하르키우 주민의 60% 가까이가 러시아계였다.
설상가상으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터지면서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어 화자가 급속히 감소하고 러시아어 화자들은 계속 도시화된 돈바스로 몰려든 것도 한 원인이다. 원래 20세기 초엔 로스토프나도누까지도 다 우크라이나어권이었다.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에 게일어 화자가 급격히 줄어든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니키타 흐루쇼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이 지역 출신이라 때문에 평소에 러시아어를 구사하기는 했어도 우크라이나어 억양이 섞였다.
1950년대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속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속으로 바뀐 크림 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들은 남동부 지역( 돈바스), 남부 주, 오데사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남동부와 남부의 주들은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들이 과반수를 차지하지만 중부와 서부로 갈수록 비율이 줄어들며 러시아 제국의 통치를 겪지 않은 갈리치아[1], 자카르파탸[2], 체르니우치[3]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들의 비중이 거의 없다.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 러시아인 인구 중 58%가 독립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립 찬성에 투표한 경우가 과반수를 넘는 이유로는 러시아계 인구와 우크라이나계 인구의 일상적인 통혼 및 우크라이나계 인구가 러시아어를 모어로 사용하면서 명목상으로는 러시아인이 되었지만 우크라이나인 정체성이 남은 경우나 니키타 흐루쇼프처럼 러시아인이되 우크라이나에 애착을 가진 경우 등등이 적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우크라이나 독립 찬성표가 러시아계에서조차도 과반이 넘게 나왔던 것은 정체성적인 이유보다는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이미 1991년 6월 12일에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며 소련 중앙정부와 따로 놀겠다고 선포한 상태였고,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에서도 독립의 목소리가 높아져 갔는데 이 와중에 보수파들이 일으킨 8월 쿠데타 이후로 소련 중앙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물자 보급 시스템도 마비되면서 줄은 더 길어지고 물가상승률도 100%대에 육박하자 차라리 독립해서 독자화폐를 발행하면서 서방의 지원을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러시아계라고 해도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던 것이었다. 이것이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투표에서 도네츠크, 히르키우에서도 독립 찬성률이 80%를 넘고 러시아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던 크림반도에서조차 독립 찬성률이 과반을 넘었던 이유다. 다만 독립 이후에는 우크라이나의 경제가 기대와 달리 가격자유화와 지하경제 창궐로 물가상승률이 몇천%대로 폭주하며 더한 시궁창에 빠지자 러시아인이 많이 살던 동부를 중심으로 소련에 대한 향수가 생겨나고 산업연계와 정서상의 이유로도 러시아를 멀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 친러 성향이 강화되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우크라이나가 독립 이후로도 순탄한 길을 걸었으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처럼 노골적인 차별정책을 편 것도 아니니 러시아계도 자동적으로 우크라이나인에게 동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얘기이다.
3. 문화
비교하자면 캐나다인과 미국인 사이의 구분이 모호한 것처럼 여타 일반적인 우크라이나인이나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사이에 정체성 차이를 일반화하기 힘들다. 원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키예프 루스라는 나라를 공통 조상으로 두고 있는 데다 우크라이나 영내에 러시아인들이 정착해서 살기 시작한 것은 근세 흐멜니츠키 대봉기 이후이고, 서부 지역을 제외한 중부와 동부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3자간의 통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도 조부모나 여타 친척 중 한 명 이상이 우크라이나계가 아닌 경우를 찾기가 더 힘들 정도라고 한다.[4] 실제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 우크라이나인들이 많이 정착했으나 이들은 대다수가 언어도 그냥 러시아어를 쓰는 등 문화적으로나 정체성적으로나 러시아인에게 동화되었기 때문에 통계상으로 그냥 러시아인으로 집계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성씨로 그 흔적을 짐작하는 수준이다.러시아인들과 별 접점이 없는 경우는 상술한 갈리치아, 자카르파탸, 체르니우치 지역 주민들 그중에서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5] 신도들이다.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들은 상당수가 러시아 정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중부와 동부 지역 우크라이나인들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 등등을 기점으로 별개의 우크라이나 정교회로 갈라졌다. 우크라이나 기준으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과 러시아 정교회는 양 극단이라고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아직 독립되지 못하고 동서 분단되어 외세에 통치당하던 시기인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에서는 우크라이나 내 동방 가톨릭 교회를 강경하게 탄압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정교회를 핍박하였는데 러시아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종교 축일이 동일하지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은 그레고리우스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종교 축일이 정교회와 달라서 공존이 힘들었다. 즉, 양측이 겪어온 문화나 역사가 다르다.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 외에도 중부, 동부 지역 우크라이나인들과 문화적으로 이런저런 공통점이 많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어 화자가 많지만 이들은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이 아니라 그냥 우크라이나인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모어가 러시아어라고 해서 곧바로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소련 붕괴 이후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져있던 우크라이나인들[6] 상당수가 우크라이나로 이민하였는데 이들의 대다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우크라이나에서 찾지만 모어가 러시아어이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인구 중 적지 않은 수가 소련 붕괴 이후 다시 이민해 온 사람들인데 우크라이나 현지에서는 이런 경우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으로 간주하지는 않는 분위기이다. 현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도 우크라이나어가 아닌 러시아어가 모어이다.
4. 현황
우크라이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상당수가 러시아로 빠져나갔다. 2000년대 초반 테러와의 전쟁으로 인한 국제유가상승으로 2010년대 중반까지 러시아 경제가 호황을 누리는 동안 우크라이나는 2008년 금융위기와 2013년 경제위기,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4000불 아래로 침체되었기 때문이다.
Русский язык - не иностранный, 러시아어는 외국어가 아니며, А мы - не иностранцы! 우리 또한 외국인이 아니다! |
우크라이나는 1996년 헌법 선포 이래 오직 우크라이나어만 국어로 인정하고 있으며 러시아어가 일상생활 등에서 폭넓게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를 국어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러시아가 펼친 러시아화 정책의 영향으로 러시아어가 우크라이나어보다 더 널리 사용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다. 2012년 우크라이나 국회는 러시아어를 소수민족어뿐만 아니라 지방어로도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위헌 판결을 받고 폐지되었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어의 사용을 금지하진 않았지만 우크라이나어의 사용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00년대와 2010년대 전반기에는 친러파 중도정당인 지역당의 지지가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지역당이 실각하고,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은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의 입지를 크게 약화했다.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로 우크라이나는 2012년 통과된 법안에 위헌판결을 내려 러시아어와 다른 언어들을 지방어 지위에서 박탈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강화된 반면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비중이 높은 크림반도와 돈바스가 우크라이나 통치에서 이탈해 버려 이전처럼 친서방 세력과는 1 대 1로 맞짱 뜨지는 못하게 되었다. 다만 친서방 세력이라는 것도 여러 개의 정파로 나눠진 만큼 우크라이나 선거에 끼치는 영향은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이라 2019년 대선에서 포로셴코를 낙선시키고 젤렌스키를 당선시키는 데 기여한 주요 유권자층이라 선거에 끼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즉, 서부와 1 대 1로 맡붙는 수준은 못 되어도 고춧가루를 뿌려줄 수는 있는 계층이다.
어쨌든 친서방 세력에 대한 반감이 크고 러시아에 호의적이어서 푸틴에게도 상당한 호감을 가치던 집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감도 2014년 러시아가 크림을 합병하고 돈바스에 전쟁을 일으키면서, 결정적으로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상황이 크게 변했다. 아무리 러시아계이고 러시아에 호감이 있어도 자기들이 살던 지역이 전장이 되어 살기 고달파졌고, 침략자 러시아군·반군의 민간인에 대한 처우가 정말 나쁜 것도 한몫했다. 친러 성향이 강했던 동부 최대 도시 하르키우는 전쟁 내내 벌어진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었고 전쟁 후 러시아군의 전쟁범죄 증거를 국제형사재판소에 보내겠다며 포격이 떨어진 곳을 계속 시민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다.[7] 비슷한 사정인 마리우폴은 아예 러시아군이 주민들의 탈출도 막아놓고 식수도 끊은 다음 민간인 거주지역에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헤르손에서 친러 괴뢰 정부를 수립하려던 계획도 얼마 전까지 친러 성향이 강했던 주민들의 반발에 차질을 빚는 등 '친러 지역'이라는 기존 관념이 무색하게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계는 러시아의 횡포에 크게 실망해 협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당시 동남부 도시 곳곳에서 친러계 주민들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의 통치를 거부하고 친러 시위를 진행 및 독립하려고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더군다나 러시아군이 점령지에서 행패를 부리고, 부차 학살 등 러시아군의 잔혹한 전쟁범죄가 속속들이 밝혀지면서 이들도 점차 러시아와 선을 긋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들도 전쟁 이후 러시아어 대신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한다. # 러시아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동부 지역 출신 주민들이 러시아의 침공을 받자 우크라이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 오데사도 러시아의 포격을 자주 받자 러시아어 대신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 그러나 여전히 친러적인 태도를 가진 일부는 아예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거나 러시아로 넘어가 버리는 등 점차 양분되는 모습을 띄고 있다.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1]
폴란드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2]
전통적으로
헝가리 왕국 영토였다.
[3]
전통적으로 현대
루마니아의 전신 중 하나인
몰다비아 공국의 영토였다.
[4]
제2차 세계 대전 전후로
스테판 반데라 등이
폴란드인이나
유대인 상대로는 이런저런 적대 행위를 일삼았지만 러시아계를 상대로는 적대 행위가 적었던 이유 중에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사이의 통혼이 활발해서 누가 러시아인이고 누가 우크라이나인인지 정확하게 분간하기 쉽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반면 유대인이 기독교인과 결혼하는 경우야 오늘날에야 흔하지만 한 세기 전만 해도 드문 일이었고 우크라이나에 거주했던 폴란드인들 역시 가톨릭 신도라 정교회를 믿는 우크라이나계와 서로 통혼하는 일이 드물었다.
[5]
정교회 전례를 유지하되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동방 가톨릭 교파
[6]
이들 중 상당수는
스탈린 시절
대숙청의 결과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강제이주된 케이스이다.
[7]
전자정부 앱 Diia에서 피해 보고를 즉각적으로 업로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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