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18:27:38

심충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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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沈充
(? ~ 324)

동진의 인물. 자는 사거(士居). 양주 오흥군(吳興郡) 무강현(武康縣) 출신. 당시 대장군이던 왕돈의 심복.

2. 생애

심충은 어려서부터 병서를 좋아하였고, 마을 내에서 영웅호걸로 유명하였다. 그는 왕돈의 부름을 받아 참군으로 임관하면서 동향인 전봉(錢鳳)도 천거하니, 왕돈은 전봉을 개조참군(鎧曹參軍)으로 임명하여 둘을 심복으로 삼았다. 심충과 전봉은 왕돈이 반역할 뜻이 있음을 알면서도 왕돈의 야망을 돕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심충은 부친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왕돈과 사자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으며 은밀히 교류하였다. 이후 왕돈은 상표하여 심충을 선성내사에 임명되게 하였다.

대흥 3년(320년) 10월, 왕돈이 다시 조정에 상표하여 심충을 상주자사(湘州刺史)에 임명시켜 줄 것을 구하였다. 왕돈을 무척 경계하던 원제 사마예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초왕 사마승(司馬承)을 상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대장군 왕돈이 유외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무창(武昌)에서 거병하였다. 이때 심충도 거병하여 오흥(吳興)을 점거하고 왕돈에게 호응하니, 왕돈은 그를 대도독, 독호동오제군사(督護東吳諸軍事)로 삼았다. 심충은 곧바로 오군(吳郡)을 쳐 함락시키고, 오국내사 장무를 살해하였다. 한편, 수도 건강(建康)을 향해 진격하던 왕돈은 석두성(石頭城)을 점거하고 관군을 궤멸시켜, 원제의 항복을 받아냈다. 왕돈은 승상에 올라 조정을 장악한 후, 본거지인 무창으로 돌아갔다.

반란에 성공한 왕돈은 수도로 가야할 공물을 대부분 가로채고, 장군, 재상, 지방관을 멋대로 임명하였다. 왕돈은 측근인 심충과 전봉의 참소하는 말만 듣고 많은 관리를 죽였다. 심충을 비롯한 왕돈의 무리들은 교만해져 저택을 크게 짓고, 남의 집과 밭을 침구하였으며, 시장이나 길가에서 약탈까지 자행하는 등 여러 만행을 부렸다.

태녕 2년(324년) 정월, 회계내사 주찰(周札)의 의흥 주씨 가문이 번성하는 것을 꺼렸던 왕돈은 주찰과 그 친족들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의참군 주연(周莚)과 어사중승 주숭(周嵩)을 체포해 참살하였다. 그리고 참군 하난(賀鸞) 오군으로 보내, 심충에게 주찰의 형제와 그 자녀들을 몰살하고 군사를 몰아 회계군을 습격할 것을 명하였다. 심충이 왕돈의 명령대로 행한 뒤에 곧바로 회계를 습격하니, 방심하고 있던 주찰은 황급히 관속 수백 명을 모아 맞서 싸웠지만 패사하였다.

태녕 2년(324년) 7월, 왕돈이 병에 걸려 누운 사이 명제 사마소가 역적 왕돈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하였다. 왕돈은 형 왕함에게 군사 작전을 위임했지만, 왕함은 월성(越城)에서 관군에게 패하고 도주하였다. 형의 패전 소식을 들은 왕돈은 분노하여 스스로 직접 출전하려다 힘이 없어 다시 드러누웠고, 얼마 안 가 병사하였다. 왕돈의 뒤를 이은 조카 왕응(王應)은 성정이 방탕하여 왕돈의 시신을 멍석에 말아 관청 아래에 대충 묻고는 부하들과 밤낮으로 술과 여색을 즐겼다.

명제 사마소는 심충을 회유하고자 같은 고향 사람인 심정(沈禎)을 보내, 지금 귀순하면 그를 사공에 임명하겠다며 유혹하였다. 이에 심충이 답했다.
"삼사(三司)는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중요한 직책인데, 어찌 나를 사공으로 삼으려 한단 말인가! 후한 예물과 입에 발린 말은 옛 사람들도 경계하던 것이었다. 또, 대장부가 공동으로 일을 도모하면 끝까지 함께해야 하거늘, 중도에 안녕을 좇아 길을 쉽게 바꾼다면 그 누가 나를 용서하랴!"
심정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충성을 다하고 순종해서 망하는 자는 없습니다. 대장군이 병사로 막고 입조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작위와 상을 내린 것은 5척 동자가 봐도 그에게 반역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설령 찬탈한다 하여도 어찌 예전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전쟁터의 모든 장수들은 원래의 왕조로 돌아갈 길을 찾을 것이고, 내외의 선비들은 모두 죽기만을 바랄 것입니다. 의로움에 따라 나라를 옮기고 주인을 바꿔, 북면하여 올바른 일을 돕지 못 할 망정, 어찌 역도들과 계속 협력하여 불의(不義)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십니까! 조정이 성실하고 솔직한 것은 이 심정도 아는 바입니다. 조정은 역적의 무리라도 용서하여 함께 고치고 다시 시작하기를 바랄 뿐인데, 기회를 보아 사악한 짓을 꾸미겠습니까!"
그러나 심충은 믿지 않고 조정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이후 전봉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키고, 출병하기 직전에 처자식을 불러
"남아가 한번 표범의 꼬리를 세운 이상, 일을 마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 말하고는 수도 건강을 향해 진격하였다. 10,000 군대를 거느리고 진군하던 심충은 왕함의 패잔병과 군대를 합치고 건강에 인근에 주둔하였다.

때마침 연주자사 유하와 임회태수 소준이 조정을 도우러 정예병 10,000명을 이끌고 건강에 도착한 상태였다. 심충과 전봉은 먼 길을 달려온 유하와 소준의 군대가 피로할 것이라 예측하고, 서둘러 나아가 호군장군 응첨과 건위장군 조윤(趙胤)의 관군을 격파한 뒤, 선양문(宣陽門)에 이르렀다. 심충이 한창 관군이 선양문 앞에 세워둔 목책을 뽑고 있을 무렵, 유하와 소준의 군사가 남당(南塘)에서 나와 심충군의 옆구리를 돌파하여 3,000명이 익사하였다. 심충은 청계(靑溪)로 물러나 유하와 다시 싸웠지만 대패하여 오흥(吳興)으로 도망쳤다. 한편, 심충과 전봉의 패전했다는 소식에 왕함 등도 군영에 불을 지르고는 야반도주하였다.

전봉은 도망치다가 합려주(闔廬洲)에서 심양태수 주광(周光)에게 배반당해 참수되고, 주광은 전봉의 수급을 들고 건강으로 가 명제 사마소에게 속죄받았다. 전봉과 헤어져 따로 도망치던 심충은 길을 잃고,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오유(吳儒)의 집으로 들어갔다. 오유는 심충을 이중 벽으로 된 방으로 안내한 뒤, 그를 방에 가두고 웃으며 말했다.
"3,000호의 후작이로다."
이는 당시 명제가 심충에게 건 현상금이었다. 심충이 말했다.
"후작에 봉해지는 것은 탐낼 만한 것이 아니다. 내가 대의를 이루는 날이 오면, 우리 종족이 반드시 네게 후히 보답하리라. 만약 나를 죽인다면 너의 가족도 멸해질 것이다."
오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심충을 죽여 그 수급을 명제에게 진상하였다. 하지만 고향 사람의 도움을 받아 멸족을 피한 심충의 아들 심경이 훗날 오유와 그 일가족을 모두 죽임으로써 심충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