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07:54:43

장창(서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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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張昌
(? ~ 304)

서진 시기 반역자. 의양국(義陽國)의 만족.

2. 생애

젊을 적 평씨현(平氏縣)의 하급 관리를 지내던 장창은 무력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매일 자신의 운명을 점치며 남들에게 본인이 반드시 부귀해질 것이라 말하고 다녔다. 또, 공격하여 전투를 벌이는 병법에 대해 논의하길 좋아하였는데, 그의 동료들은 이런 장창의 모습을 보고 모두 비웃었다.

이류가 촉(蜀)에서 유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창은 조정이 정신없는 틈을 타 반년 동안 잠적하여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았다. 이후 훔친 의장기를 들고 다시 나타난 장창이 이류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다며 사람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조정에서는 이류를 토벌하기 위해 〈임오조서(壬午詔書)〉를 발령하여 병력을 징집하고 이들을 "임오병(壬午兵)"이라 불렀는데,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여기에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아 기피하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조정은 병력을 더 빨리 모으기 위해 조서를 집행하는 관리가 한 군에 5일 이상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제한을 걸어두었고, 이를 어길 시 그 관리가 머물던 지역의 태수는 면직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로 인해 장창이 사람을 모을 때면 군과 현의 관리들이 모두 나와 빨리 떠날 것을 독촉하였다. 결국 이곳저곳 떠돌기만 하고 사람을 모으는 데 실패한 장창의 무리는 그대로 도적떼로 전락하여 인근 지역을 약탈하고 다녔다.

태안 2년(303년) 5월, 강하(江夏)에 큰 풍년이 들자, 팔왕의 난 등의 전란으로 대륙을 떠돌던 유민 수천 명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강하군으로 모여들었다. 안륙현(安陸縣)의 석암산(石巖山)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장창은 이를 이용해 떠돌던 유민들을 무리로 포섭하여 세력을 키우고, 자신의 이름을 이진(李辰)으로 개명하였다. 장창의 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경계하던 강하태수 궁흠(弓欽)은 군대를 파견해 토벌하려 했지만, 오히려 장창에게 격파당했다. 이후 장창은 무리를 거느리고 궁흠의 군대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고, 궁흠은 남쪽으로 도망쳐 면구(沔口)로 갔다. 진남대장군, 신야왕 사마흠은 궁흠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독 근만(靳滿)을 파견해 장창을 토벌케 하였으나, 근만 역시 수군(隨郡)에서 장창에게 격파되어 도주하였다. 이리하여 장창은 강하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그 병장기와 물자를 모두 탈취하였다.

장창은 강하군을 근거지로 삼고, "마땅히 성인(聖人)이 나타날 것이다."라는 요사스런 말을 지어내 퍼뜨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장창은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산도현(山都縣)의 현리 구침(丘沈)을 가리켜 저 사람이 그 성인이라면서 곧바로 성대한 수레와 의복을 준비해 구침을 영접하였다. 장창은 구침을 유니(劉尼)로 개명시켜 한(漢)의 후예라 떠받들고, 천자로 옹립하였다. 장창은 이내 백관을 설치하여 스스로 상국에 올랐고, 형 장미(張味)는 거기장군, 동생 장방(張放)은 광무장군으로 삼아 각기 병력을 통솔케 하였다. 궁전은 석암산에 지었는데, 궁전 곁에 대나무와 실로 새 모형을 조각하고 5색 비단으로 장식한 다음, 주변에 고기를 뿌려 새들을 유인하였다. 그리고 그 모형을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봉황이 강림하여 주포(珠袍), 옥새, 철권(鐵券), 금고(金鼓)가 저절로 나타났다 거짓말쳤다. 이후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는 '신봉(神鳳)'으로 개원하였으며, 교사(郊祀), 관복 색은 과거 한나라 시절과 똑같이 하였다.

장창은 불응하는 자들의 종족을 멸하고, 또다시 유언비어를 퍼뜨려 형주 이북의 민심을 선동하니, 백성들은 몹시 두려운 마음을 품고 거병하여 장창에게 호응하였다. 장창의 무리는 한 달여 만에 그 수가 30,000명에 이르렀으며, 모두 머리에 붉은 모자를 쓰고, 말꼬리로 수염을 만들어 얼굴에 붙였다. 신야왕 사마흠은 감군 화굉(華宏)을 보내 장창을 공격하였으나, 장산(障山)에서 또 장창에게 격파당해, 조정에 상소하여 구원을 청했다. 조정에서는 비로소 대응에 나서기 시작하여, 유교를 예주자사로 삼아 여남(汝南)을 굳게 지키도록 하고, 유홍을 형주자사로 삼아 완(宛)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전장군 조양(趙驤)과 평남장군 양이(羊伊)에게 정예병 8,000으로 주어 유홍을 돕게 하였다.

이 당시 강하와 의양의 백성들 중 장창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강안현령 왕구(王傴)와 수재 여유(呂蕤)만이 굴복하지 않았다. 장창이 그들을 삼공으로 삼아 회유하려 하자, 왕구와 여유는 가족들만 데리고 여남으로 도망쳐 예주자사 유교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기사현령 이권(李權), 상안현령 오봉(吳鳳), 효렴 오창(吳暢)도 500여 가를 이끌고 왕구 등의 뒤를 따라 장창 세력에서 이탈하였다.

장창이 장수 황림(黃林)을 대도독에 임명하여 20,000 병력을 이끌고 예주로 나아가게 하고, 장수 이궁(李宮)을 선봉으로 삼아 여수(汝水)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약취하게 하였다. 하지만 유교가 파견한 장수 이양(李楊)에 의해 대파되니, 황림 등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익양(弋陽)을 공격하였고, 익양태수 양환(梁桓)은 장창군에 맞서 성을 굳게 지켰다. 비록 황림의 군대는 익양에서 고착 상태에 빠졌으나, 장창의 다른 장수들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무창(武昌)으로 보낸 마무(馬武)는 성을 함락시킨 뒤 그 태수를 죽였고, 동쪽 지역을 공략하러 간 석빙(石冰)은 양주자사 진휘를 격파하였다. 특히 석빙은 이후로도 관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강주와 양주의 여러 지역을 굴복시키고 그곳에 수장을 두었다. 여기에 더해 임회(臨淮) 사람 봉운(封雲)이 거병하고, 장창에게 호응해 서주를 유린하기까지 하였다.

장창군이 양양(襄陽) 북쪽 번성(樊城)에 이르자, 신야왕 사마흠은 출전하여 장창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고 관군은 대패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재빨리 조서를 내려 유홍을 진남장군,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로 삼아 사마흠을 대신케 하였다. 유홍은 대도호 도간 등을 보내 비어있는 양양을 지켰으나, 장창이 군대를 이끌고 완을 공격하는 바람에 전장군 조양이 격파되고 평남장군 양이가 전사하면서 성이 함락되었다. 유홍이 완을 빠져나와 양현(梁縣)으로 도망치자, 장창은 다시 양양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 했다.

형주, 강주, 서주, 양주, 예주 5개의 주가 대부분 장창에게 점거되니, 장창은 각 주의 목과 태수를 임명해 파견하였다. 그러나 장창이 임명한 자들은 모두 도적질 밖에 할 줄 모르는 흉포한 소인들뿐이라, 백성을 착취하고 약탈하기만 하여 민심이 점점 멀어져갔다. 이때 유홍이 사마 도간, 참군 괴환(蒯桓),피초(皮初)를 보내 경릉(竟陵)을 공격하게 하고, 유교도 장수 이양, 독호 이봉(尹奉)을 보내 강하로 치게 하였다. 장창은 경릉에서 도간 등이 이끄는 군대와 며칠에 걸쳐 악전고투를 벌였으나, 끝내 대패하여 죽은 자만 수만 명에 이르렀다. 장창은 하준산(下儁山)으로 도망치고, 남은 장창의 부하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영흥 원년(304년) 가을, 장창은 관군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하고, 그 수급은 수도로 보내졌다. 그를 따르던 무리는 모두 3족이 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