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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파시스트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아돌프 히틀러 |
1. 개요
"
자유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부정한다. 파시즘은 국가가 개인의 진정한 실체라는 것을 확인한다. 파시즘은 국가와 개인의 자유가 진지하게 숙고될 수 있는 국가 내에서 유일한 자유를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파시스트에게 모든 것은 국가 안에 있고 국가 밖에서는 아무것도 법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존재할 수 없거나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전체주의적이다."[1]
-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 독트린.
-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 독트린.
"언제나 A이면서 A가 아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스페인의 철학자.
정확히는 1919년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창시한 극단적 내셔널리즘, 인종주의, 일당독재, 전체주의, 반자본주의,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 반자유주의 등으로 무장한 대중 중심의 정치 사상 및 운동을 말한다. 일본과 북한에서는 파쇼(내지는 파쑈)라고 말하는데, 원래 파시즘이란 단어의 유래가 19세기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정치 결사체인 파쇼의 사상이란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자 파쇼(Fascio)의 당원들이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아돌프 히틀러 주도 나치당이 주도한 민족사회주의( 나치즘, NationaleSocializimus)은 일반적인 파시즘의 개념에서 (보통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추가하여 파시즘의 하위 분류에 속한다.
사회주의, 자유주의 등과 달리 핵심적 뿌리가 되는 사상가들이 없고 정교한 이론 체계도 없어서 여러 파시즘들 사이의 '최소치'란 것을 산출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파시즘의 실체를 부정하는 주장도 있다. 이를테면 파시즘이란 그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국가파시스트당의 운동만 해당할 뿐, 나치즘이나 기타 여러 나라의 파시즘은 파시즘이 아니라 그저 그 나라의 개별적인 사례들에 불과하단 것이다. 하지만 파시즘 연구가 팩스턴의 경우에는 그럼 중구난방의 의미로 쓰인 자유주의나 나라마다 다른 양상을 보인 공산주의도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파시즘의 최소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팩스턴은 파시즘이 사상이라기보단 믿음,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
2. 어원
파시즘(Fascism)이란 단어의 근원은 파시즘의 상징이기도 한 속간(束桿)에서 비롯되었다.[2] 고대 로마시절 집정관의 경호원들이 들고 다니던 것으로 라틴어로 파스케스(Fasces)'라 불리며, 집정관의 권력과 권위, 그리고 "결속을 통한 힘"을 상징했다.[3]
파시즘이란 사상은 개인을 비롯한 그 무엇보다도 국가를 무조건 우선시하고, 결속을 통한 힘을 강조한 사상이었기에, 파스케스는 그 상징이자 이름의 유래로서 매우 적합했다.
3. 사상
이론적으로서 정통 파시즘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을 이기적인 동물과 구분하는 요소는 정신적 고귀함이므로 이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다르게 본다는 데서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와는 맥을 달리한다. 자유주의의 첫번째 원칙은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이고 사회주의는 노동자에 대한 부르주아의 경제적 탄압을 끝내고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주의를 이룩하는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둘은 물질적인 것을 중요하게 본다고 할 수 있다.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목표는 평화와 풍요가 첫번째 목표지만 파시즘은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물과 다를바 없기에 인간은 정신적인 가치를 첫번째 목표로 한다. 비슷하게 유심론적 관점에서 인간은 원론적으로 자유를 추구해야 하는 개체이며, 개개인은 각자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기 위해 외부적인 기관들과 물질의 억압을 끊어내야 한다는 아나키즘의 인간관과 오히려 사상적으로는 비슷하다.
이게 정치의 차원으로 들어와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서로 극단적으로 척을 지게 된 건 아나키스트들은 저 배를 달리 하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의 모태인 계몽주의의 인권, 민주주의, 만민평등 등의 관념을 수용하고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간 반면, 파시즘은 오히려 근원인 사상적 반계몽주의를 정치적 차원의 반계몽주의로 밀어 붙혔기 때문이다.
알프레도 로코(Alfredo Rocco,1875-1935)는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는게 아니라 사회가 인간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이는 로크가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정부를 설립한다는 것과 마르크스가 노동자가 부르주아의 사회를 끝내고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즉 인간이 사회를 형성한다는 사상과는 정 반대되는 사상이다. 사회가 인간을 형성하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것이 정신적인 가치라면, 이 가치를 형성하는 것이 사회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니체의 상대주의와 초인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니체는 도덕적 진리는 없고 상대적 가치들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상대성을 바탕으로 한 문화의 다양성의 존중을 주장했다고 볼수 없다. 이러한 존중역시 결국엔 하나의 가치일 뿐이며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니체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만들어낸 그의 여동생의 영향이크다. 사실 니체는 나치나 파시스트가 주장하는 '민족주의'와 거리가 먼 인물이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따윈 없고, 서구사회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God'이 금욕적 이상주의로 사람들에게 어떤 몹쓸짓을 해왔는지 그의 저서 '반그리스도'에 상세히 서술했다. 게다가 니체는 상대주의자도 아니다. 자신의 율법대로 삶을 살다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율법으로 자신의 현재를 철저히 비판할것을 요구할 뿐이다. 다시말해, 니체는 '성찰적'인 인간형으로 '초인'의 등장을 '예견'한 것이 '차라투스트라'이지, 스스로 '초인'임을 선포한적도 없다. 만약 그렇게 알고 있다면, 책을 읽지 않고 어디서 주워들은걸로 입터는 것이다. 게다가 니체는, 반유대주의에도 치를 떨었는데 자신이 엄청 좋아하던 바그너를 나중에 깔 때도, 그의 반유대주의 성향과 작품의 세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무슨말이냐면, 보편적인 가치를 사람들에게 왜곡하여, 절대선으로 획일화하고 마치 현재의 고통만 참으면 미래에 뭔가가 보장된다고 조장하는 '사랑'이야기나 반유대주의에 대한 대책없는 무책임함이 별차이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니체 대 바그너'를 참조해라. 그리고 혹여나 반민주주의적인 인간이라고 니체를 알고있거나 까는 인간이 있다면 역시 니체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일 뿐이다. 왜냐하면, 니체가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처음부터 갖던것은 아니다. 니체는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을 되게 엄청 깐다. 그 이면에는 대중의 '반지성주의, 광기'를 지적한 것이다. 니체가 주장하는 '노예도덕'은 동양의 소인과 유사한데, 우리의 사고가 이분법적이라면 이를 나쁘게 받아들일 테지만, 사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으로 봐야한다. 노예도덕이라 함은, 나태하고 반성적이지 못하며 천박함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니체의 관점에 의하면, 부자나 권력층에도 노예적인 인간이 있는것이다. 이를 곡해하지말자. 어쨌거나, 현재 세계의 우경화 이면에 존재하는 대중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성찰이 여기저기서 나오고있는데, 이미 약 180년전에 니체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했을 뿐이다. )
그렇기에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했을 때 나오는 결과는 어떠한 판단도 불가능한 절대적 혼돈일 뿐이다. 이 상태의 인간을 니체는 바람직한 상태라고 보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기에 이를 지지할리는 만무하다. 니체는 이러한 상태에서 '초인'이 등장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과정은, 반드시 파괴를 전제로 하지만 이는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와 유사한 맥락이 있다. 서로 대극적인 가치를 합일로 이끌어 낼때, 거기서 창조가 만들어진 다는 것이고, 전제조건은 '성찰'이다. 쉽게말해 태극사상과 비슷한 면이 있다.)
파시즘은 이러한 사상을 빌려서 국가, 즉 사회가 이러한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국가와 사회는 특정한 하나의 국가와 사회를 지칭하지 않는다. 궁국적 목표는 정신적인 가치의 달성이기 때문에 이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국가와 사회를 가지고 있는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잘 알려져 있듯이 니체가 독일민족에 대해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도) 니체와 파시즘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이기도 한데 니체는 민족과 국가를 구분하며 국가가 이러한 가치들을 대변하거나 만들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파시즘은 국제화와 세계화를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한다.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규정하는 공통점들은 언어, 사상, 인종등이 있을수 있는데 한국인과 중국인의 공통점은 부분적 사상(유교)와 인종으로 줄어든다. 여기서 국가 하나를 더한다면 공통점은 더 줄어들고, 더하면 더할수록 계속 줄어들게 된다. 결국 끝에 남는것은 경제적 이익이다. 파시즘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을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보기 때문에 결국 파시즘은 사회주의(인터내셔널)와 자본주의(세계시장)와 달리 세계화에 반대한다. 이를 정리하자면 파시즘은 세계적 민족주의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다.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에서 파시즘을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집단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
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규정은 파시즘에 대한 학술적인 정의를 대체적으로 잘 정리해 놓은 것이다. 파시즘의 속성은 공동체와 전체에 대한 강조와 동시에 개인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의 성향을 철저히 부정, 비판, 반대한다는데 있다.
한데 저러한 파시즘에 대한 규정은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나 나치 독일의 경우에는 적절하게 들어맞으나 일본 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유럽의 파시즘 국가들은 주권이 왕, 귀족 계급에서 시민으로 넘어간 이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은 개인이나 정당이 집권했는데 비해 일본은 시민 민주주의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즉, 소수의 엘리트집단이 전체주의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4]
이런 군국주의적 엘리트층과 군부 출신 엘리트층이 초기에 주도했으나 이후 일본 대중들도 자발적으로 따랐으므로 일본 제국 역시 명백한 파시즘 국가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대중은 강압적으로 따르기만 했으므로 배타적 민족주의와 결합된 전체주의 형태를 보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파시즘 국가는 아니라는 시각도 있고, 유럽의 형태와는 별개로 아시아에서 나타난 다른 형태의 파시즘 국가가 일본 제국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의외로 파시즘이 그다지 불건전한 사상이 아니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근대 이성의 위기 상황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사상의 한 갈래였으며, 좌파 민중주의( 마르크스주의)의 반대쪽 극단에 선 사상이 우파 민중주의라고 할 수 있는 파시즘이었다. 그리고 이 그럴듯해 보이는 사상에 혹한 사상가들도 많고, 파시즘 국가의 탄압 아래에서 전향한 사회주의자들도 넘쳐났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예이기는 하지만, 하이데거가 나치의 옹호자가 되었던 이유 역시 그가 단순히 '가장인 남성'으로서 현실 논리에 굴복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사상과 파시즘 사상 사이에 합치하는 부분이 일정 부분 있었기 때문이다.
파시즘 또한 무너져가는 근대에 대한 하나의 반향이었으며, 역사적 전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과대망상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명심하자. 애초부터 세상에는 아예 쓸모 없는 대안도 완벽한 대안도 없다. 하지만 파시즘은 그 근본부터가 선전과 선동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사상이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층과 중층이 가진 힘, 다시말해 대중의 정치적 힘을 이용하기 위한 장대한 감성팔이가 결국에는 파시즘의 본질일 뿐인 것이다. 파시즘을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근대의 괴물처럼 과장하는 것 역시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지만, 민중을 쥐락펴락해서 자기들의 입맛대로 하겠다는 사상이 정당화될 여지 또한 없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나 계몽주의와 달리 파시즘이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없는 이유다.
한국에선 과거 운동권이 파쇼란 단어를 마구잡이로 사용한 끝에 파시즘=전체주의 식으로 오용하는 경향이 있고 신문 기사 등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나며, 그래서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같은 의미인 줄 아는 사람들도 자주 보이지만, 앞선 내용에 있듯 엄밀한 의미에서 파시즘이란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적인 형태가 지배계급의 엘리트주의와 결합하는 상태로 등장한 것으로, 엘리트주의가 없다면 전체주의적인 것은 될지언정 파시즘으로 볼 수는 없다. 사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고 파시즘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이란 용어가 너무도 헤프게 남용되어서 파시즘은 이제 학술적인 용어라기보단 욕의 일종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상대가 식육목에 속하지 않지만 상대를 개새끼라고 욕하듯이 상대가 파시스트가 아니더라도 그냥 상대를 파시스트라고 욕하는 격이 된 것이다.
즉 파시즘은 전체주의의 한 갈래이나 전체주의가 곧 파시즘인 건 아니다. 비슷한 예로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한 갈래일 뿐 모든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는 아니다. 전체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의 결합이 파시즘이란 데에서는, 배타적 민족주의 요소가 거의 없었던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사례를 들어 반론이 제기된다. 또한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가 파시즘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물론 1970년대~80년대 당시 국외 문화의 유입을 "민족문화의 창달" 및 "건전한 민족문화 육성"이라는 명분으로 통제하고 상당부분 금지했기 때문에, 한국도 배타적 민족주의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고 진단하는 학자들도 있다. 허나 해외에서는 현대 한국을 파시즘이 만연한 권위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후안 페론 집권 시절의 아르헨티나를 독재국가이긴 하나 어느정도 민주주의적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파시즘으로 분류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단순한 민족주의가 아닌 전체주의 사상을 띈 민족주의에 단일민족설+주전성향의 우파 집권까지 파시즘의 단어적 정의에는 완전히 부합한다는게 근거. 단지 파시즘의 정의자체가 논쟁의 여지가 많은것또한 사실. 역사적으로 파시즘 정권은 이론적 기반이 희박하고, 그때 그때 기회주의적 성향을 자주 보여왔기 때문에 '무엇이 파시즘인가?'는 정답이 없다.
3.1. 정체
모든 파시즘적 이데올로기는 환빠스러운 즉 "영광스러운 과거로의 회귀"를 주창한다. 나치의 경우 고대 아리안 종교에 대한 관심과 함께 "게르만 족의 생활 공간 ( 레벤스라움)," "고유 영토" 등의 개념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여주며, 나치당은 비스마르크, 프리드리히 대왕, 더 나아가서는 바바롯사 대왕 등을 민족 영웅으로 내세우며 선전에 나섰다.[5] 아돌프 히틀러 본인은 로마 제국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일천년 동안 유지될 자신의 제국이 로마와 같이 많은 유산들을 남길 것이라는 몽상을 품고 있었다. 일제의 경우 물질주의적 서구에 대항해 이른바 "야마토 정신"으로 일컬어지는 정신주의로 무장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좀 정도가 심했던 황도파의 경우 이른바 쇼와 유신이라는 미명 하에서 천황의 친정을 주장하기에 이르른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로마 제국의 부활, 지중해의 이탈리아 내해화라는 명백한 극우적 복고주의를 내세우고 있다파시즘적 조합주의 등을 좌파적 요소로 지목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은 기업의 이익과 노동자들의 이익을 파시즘 국가가 통제하는 구조를 일컫는 것으로 생산수단을 자본가들로부터 박탈하고 사회화하는 사회주의적 경제 구조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구상들은 집권 이전 포퓰리즘적 구호로 이용되었을 뿐 실제로 파시스트들이 집권하게 되면 이들이 과거에 내세웠던 이데올로기적 정책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오로지 총통이나 두체(Duce)에 대한 충성만을 강조한다. "총통은 독일이며 독일은 총통이다"라는 유명한 구호가 이를 증명하며, 나치당의 강령 등을 내세워 사회주의적 요소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히틀러 본인의 행동[6]만 제시해도 충분히 논파가 가능하다. 이러한 파시즘의 특성에 대해서 영국의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독특한 해석을 한 바 있는데 그녀에 따르면 파쇼란, 대부분 자의식 과잉에 빠져있는 이들이 파쇼가 되기 때문에 항시 자기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세우려 한다고 해석했다. 파쇼들은 기존의 여타 사회 집단에 적대적인 것은 물론이고 같은 파쇼들 사이에서도 적대적인 권력 암투를 계속하기 때문에[7] 충분히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파쇼들이 사회주의 노선을 걷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부정하는 제3의 위치[8]를 취하게 된 원인에는 많은 연구가 있다. 파쇼들 중에는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가입한 사람들도 있었고, 파시즘의 민족 공동체에 관한 아이디어는 대부분 아나키즘에서 유입된 것이다. 노동계급이 국민국가와의 협조로 민족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개념은 분명 생디칼리즘의 영향이다.[9] 때문에 이 문제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일단 알아둬야 할 점은, 파쇼들은 어떠한 특정한 사상의 공유를 통해서 생성된 철학적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파시즘이 먼저 있고 그를 공유하는 파쇼들이 파시즘의 기치 아래 모인 것이 아니라, 파쇼라는 집단이 먼저 모여서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외부에서 파쇼들의 언행 등을 관찰하다가 정립한 개념이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파쇼들이 서로 모이게 된 배경은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가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 부조리의 원인이 되는 암적 요소들을 제거해야 된다"는 비교적 원초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는 게 통설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파쇼들이 사회주의 노선을 걷지 않은 원인이 비교적 명확해진다. 1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는데,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볼셰비즘 혁명가들이었다. 이들은 맑시즘이 볼셰비즘으로 완성(?)된 이후에 나타났다는 점에서 이탈리아에 있던 기존의 사회주의자들과는 차이가 있다.[10] 지금도 같은 사회주의 진영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판할 때 자주 나오는 얘기지만 소련이 형성된 이후에는 유럽 전역에 직업적인 혁명가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는데, 이걸 굳이 나쁘게 말하자면 밥만 먹고 다른 사람 마녀사냥이나 하러 다니는 인간들이 늘어났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이런 혁명가들 중 소련 외부에서 활동한 이들은 결국 "우리도 공화국이 돼서 연방에 가입하자"는 주장을 할 뿐이니 마치 외세를 떠받들자는 주장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런 "마녀사냥"과 "매국 행위"에 대항하여 사회의 기본 형태를 지켜야된다는 식의 경계심이 폭발하여 끝내 광기로 이어진 것이 파시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11]
경제혼란기에 노동자와 빈민계층이 사회주의 사상에 몰리면, 공산혁명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본가와 대기업이 파시즘을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는 기존 정치권의 자유주의자들마저 공통적으로 보이던 행동이다.[12]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파시즘이 태동했던 대도시 밀라노가 아니라 에밀리아 로마냐(Emilia-Romagna)라는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가난한 농촌이었다. 이 농촌의 지주 계급들은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 자신들의 지배권에 위협이 될까 두려워해 파시즘을 지원한 것이었다. 또한 파시즘이란 사상 자체의 기회주의적인 면도[13] 종래의 경제체제를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그대로 내버려두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
다만 파시즘은 근본적으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체계이기 때문에 자본가들 역시 정권에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상당히 인생이 팍팍해지게 된다. 또한 파시즘의 가장 깊은 기반은 "생계수단이 없으며 사회에 무차별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무법자들"에 있기 때문에[14] 파시즘도 최종적인 목표는 기존 경제체제의 전복이었다. 그러나 이미 파시스트 본인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부정했으므로, 파시즘이 결국 혁명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즉, 어느 정도 우발적으로 벌어진 면이 있었던 1차 대전과 달리 2차 대전의 경우는 파시즘에 의해 사실상 의도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4. 파시스트 당기
전범기 중의 하나. 깃발에 그려진 나무뭉치에 묶인 도끼는 본래 로마의 집정관의 경호원들이 들고다니던 파스케스(fasces)라는 것으로, 집정관의 권력과 권위, 그리고 "결속을 통한 힘"을 상징했다고 한다.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는 개인의 모든 활동을 민족이나 국가 같은 전체를 위하여 바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상이므로, "결속을 통한 힘"을 상징하는 파스케스는 그 역사적인 배경부터 시작하여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상징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파스케스를 참조할 것.
5. 유사사상
5.1. 네오 파시즘
네오 파시즘 문서 참고.6. 국가
- 이탈리아 왕국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1923~1945)
- 나치 독일 (1933~1945)
- 오스트리아 연방국 (1934~1938)
-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1939~1945)
- 루마니아 왕국 국민군단국가 (1940~1941)
- 크로아티아 독립국 (1941~1944)
- 크비슬링 정권 (1942~1945)
- 헝가리 왕국 국민단결정부 (1944~1945)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지만 추축국이나 추축국의 점령국, 혹은 친독 국가들은 모조리 다 파시스트 국가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우선 히틀러는 나치즘을 독일 국민과 나치당의 신성한 계약으로 간주하여 이를 해외에 전파하는 것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독일 점령 하의 덴마크에선 덴마크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통치에 배제되었고 명목상으로 파시즘 지도자들을 내세운 네덜란드, 벨기에 등지에서도 현지 파시스트들은 들러리였고 실제로는 독일의 강압적 점령 통치가 있을 뿐이었다. 독일의 괴뢰국(혹은 괴뢰국으로 인식되는) 비시 프랑스등도 파시즘과는 거리가 먼 전통 보수 세력이나 교권세력이 집권했다.[15]
독일의 동맹국을 살펴보자면 호르티 미클로시의 헝가리 왕국도 파시즘이 정치권에서 오히려 배제된 권위주의 정권에 불과했으며 안토네스쿠 영도 하의 루마니아도 파시즘으로 해석되지만 실제론 안토네스쿠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과거 동료였던 파시스트 조직인 철위대를 히틀러의 승인을 얻어 숙청해버린 인물이다. 프랑코의 스페인도 파시즘이란 인식이 강하지만 최소한 1942년 이후엔 파시즘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색채가 없으며 그 이전에도 파시즘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강한 떡밥인 일본 제국도 일부 파시스트들은 있었으나 일본 제국 수뇌부는 파시즘의 핵심 수단인 대중정치를 백안시한 군사 엘리트 계층으로 파시즘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이들을 파시스트라 보는 것은 극우, 제국주의=파시스트라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정의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페론의 아르헨티나도 친독 성향 때문에 파시즘이라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틀린 해석이다. 극단적으로 파시즘 국가는 무솔리니의 국가 파시스트 당 영도하의 이탈리아 뿐이라는 주장이 나올 정도이다.[16]
6.1. 논란이 있는 경우
- 일본 제국 (1937,1940~1945)
- 스페인국 (1936~1944)
- 포르투갈 공화국 (1933~1944)
- 그리스 왕국 (1936~1941)
-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1940~1945)
다만, 위의 논의를 보충하자면 일본 제국이 파시즘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학계로 일본 학계는 일본 제국을 '위로부터의 파시즘' 체제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일본 제국의 자기 우월적이고, 스스로를 도덕적이라 믿는, 나치의 레벤스라움과 흡사한 '광역권'을 바탕으로 한 팽창적 민족주의는 구조적으로면 몰라도 사상적으론 파시즘에 해당한다면서 일본 제국을 파시즘 체제라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론 재니스 미무라, 존 다우어 등이 있으며 특히 존 다우어의 논의를 확장하여 브라이어 마이어스의 북한 체제를 일본 제국의 그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 '북한은 왜 극우의 나라인가'이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의 프랑코 정권이나 살라자르 정권 역시 대중선동과 유사 사회주의적 경제방식을 기피하였으므로 완전한 파시즘 정권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조합주의적(corporatist)적 경제방식이나 반정부적 인사들에 대한 수용소 건설, 무솔리니의 군사통치법 및 식민지에 대한 종주국의 의무(civilization) 등을 강조한 점, 아동들에게 교권주의적/군국주의적 관점을 세뇌시키는 등 보수반동적이었던 가톨릭 교회와 적극 협력하며 가톨릭 국가의 순수성과 피지배민족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고 그들(서사하라, 앙골라, 모잠비크 등)을 문명화를 시켜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목표를 보면 단순한 권위주의 정권들로 치부하기도 힘들다. 즉 이베리아의 전체주의 정권들도 파시즘의 영향을 깊이 받은 교권파시즘(clerical fascism) 정권으로 볼수도 있다.
그리고 요한네스 메탁사스 정권하의 그리스 왕국 역시 총리가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무솔리니의 운용법에서 많이 참고해서 유사 파시즘적 통치를 자행하였다.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역시 국가판무관인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저지른 만행 때문에 파시즘 국가로 분류될수 있으나 괴뢰국도 아닌 준 식민지였기에 파시즘 국가로 분류되기 힘들다.
6.2. 파시스트 국가로 오해 받는 경우
- 폴란드 공화국 (1926~1935)
- 중화민국 (1928~1949)[17]
- 알바니아 왕국 (1939~1944)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1939~1945)
- 폴란드 총독부[18] (1939~1944)
- 헝가리 왕국 (1939~1944)
- 덴마크 왕국 (1940~1945)
- 프랑스 군정청 (1940~1944)
- 프랑스국 (1940~1943)
- 터키 공화국 (1940~1944)
- 헝가리 왕국 (1940~1944)[19]
- 벨기에-북프랑스 군정청 (1940~1944)
-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1940~1945)[20]
- 루마니아 왕국 (1941~1944)[21]
- 불가리아 왕국 (1941~1944)
- 세르비아 군정청 (1941~1944)
- 세르비아 구국정부 (1941~1944)
- 바나트 자치주 (1941~1944)
- 류블랴나 주 (1941~1945)
- 몬테네그로 보호령 (1941~1944)
- 그리스국 (1941~1944)
- 핀란드 공화국 (1941~1944)
- 소련 군정청 (1941~1944)
- 동방 국가판무관부 (1941~1945)
-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 (1941~1944)
- 모나코 공국 (1942~1944)
- 로코트 자치국 (1943~1944)
- 벨라루스 중앙 의회 (1943~1944)
- 알프스 산록 지대 작전 구역 (1943~1945)
- 아드리아 해 작전 구역 (1943~1945)
- 벨기에-북프랑스 국가판무관부 (1944)
- 마케도니아 독립국 (1944)
- 후안 페론 치하의 아르헨티나
- 제툴리우 바르가스 치하의 브라질
추축국의 군사 점령지 대부분은 그곳의 민족들을 절멸시키거나 강제로 동화시키려고 했으니 그곳에 있는 지역 파시스트랑 별 상관이 없다. 대표적으로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 단체가 우크라이나 국민 정부를 선포하자 국방군이 강제로 진압하고 군사 점령지로 유지시킨 사례가 있다. 또한 일부 전간기의 민족주의/국가주의 성향 독재국가들이나 대전동안의 추축국들과 추축국에 친화적인 국가들을 무작정 파시스트 국가라고 단정짓는 것도 무리한 해석이다.
7. 정당
7.1. 초기 파시즘
- 악시옹 프랑세즈(프랑스)(?)
- 러시아인민동맹(러시아 제국)
- 검은 100인단(러시아 제국)
7.2. 유럽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당(독일) -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
- 국가파시스트당(이탈리아) -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
- 화살십자당(헝가리) - 지도자 살런시 페런츠[22]
- 대천사 미카엘 군단(루마니아)[23] - 지도자 호리아 시마[24]
- 렉시스트 당(벨기에) - 지도자 레옹 드그렐[25]
-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네덜란드) - 지도자 안톤 뮈세르트[26]
- 국민연합(노르웨이) - 지도자 비드쿤 크비슬링[27]
- 신당(new party), 영국 파시스트 연합(영국) - 지도자 오스왈드 모슬리[28]
- 푸른 셔츠단(아일랜드) - 지도자 이오인 오더피
- 팔랑헤(스페인) -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마누엘 에디야
- 프루동 모임, 페소(프랑스) - 지도자 조르주 발루아
- 애국청년단(프랑스) - 지도자 피에르 테탱제
- 신생 카톨릭국민연합(프랑스) - 지도자 노엘 드 카스텔노
- 불의 십자단, 프랑스 사회당(프랑스) - 지도자 프랑수아 드 라 로크[29]
- 프랑스 인민당(프랑스) - 지도자 자크 도리오
- 프랑스연대
- 녹색 셔츠단(프랑스) - 지도자 앙리 도르제르[30]
- 우스타샤(크로아티아) -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
- 라푸아 운동(핀란드) - 지도자 비토리 코솔라
- 페르콘스 십자단(라트비아) - 지도자 구스타브스 첼민슈
7.3. 아메리카
- 토착 아메리카당(미국)
- 순아메리카당(미국)
- 기독교 신앙 수호자들(미국) - 지도자 제럴드 윈로드[31]
- 은색 셔츠단(미국) - 지도자 윌리엄 더들리 펠리
- 카키색 셔츠단(미국) - 지도자 아트 스미스
- 아메리카 나치당 - 지도자 조지 링컨 록웰
- 나시오날리스타스(아르헨티나)
- 아사우 인테그랄리스타스 브라질레이라(브라질) - 지도자 플리니우 살가두
7.4. 아프리카
- 남아프리카 기독교 국가사회주의 운동(남아프리카 공화국) - 지도자 루이스 바이하르트
- 남아프리카 파시스트(남아프리카 공화국) - 지도자 J.S 폰 몰트케
- 포장마차 파수대(남아프리카 공화국)
7.5. 1945년 이후
- 그리스 : 황금새벽당
- 네덜란드 : 자유당
- 독일 : 네오 나치[32], 민족민주당(NPD)
- 미국 : KKK
- 북한 : 조선로동당
- 영국 : 영국국민당(BNP), 잉글랜드 수호 동맹(English Defence League)
- 러시아 : 자유민주당 -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통합 러시아당 - 블라디미르 푸틴
- 우크라이나 : 스보보다, 프라비 섹토르
- 오스트리아 : 자유당
- 헝가리 : 요빅
- 이탈리아: 이탈리아 사회 운동과 그 후계 조직인 국민 동맹.
- 스페인 : 사회 혁명 운동, 팔랑헤
- 일본 : 재특회, 넷 우익
- 프랑스 : 국민전선 ( 장 마리 르 펜, 마린 르 펜 참고)
- 호주 : 한나라당(호주)
안타깝게도 세계 대공황 때처럼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이후 각국에서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극단적인 민족주의나 종교 근본(극단)주의를 내세운 각종 정당이 서서히 힘을 얻고 있다. 다만 이러한 민족주의나 종교 근본(극단)주의가 21세기 네오 파시즘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남발하면 곤란하다. 위에 예시로 등재된 사례는 어디까지나 민족주의나 종교적 근본주의나 극단주의에 따라 폭력적인 사회 운동을 표출할 뿐, 독일, 이탈리아, 일본처럼 추축국이 아닌 나라는 딱히 추축국의 이념을 계승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대에 벌어지고 있는 유사 파시즘 운동이 제2차 대전 당시의 그것처럼 일단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내로남불로 점철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어떤 단체가 파시즘 단체라고 지목될 때는, 그것이 단순한 정치적 비방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곰곰이 따져 볼 수 있도록 하자. 당장 서유럽이나 북미의 지도자들은 물론 요시프 브로즈 티토조차도 소련 말을 안듣는다는 이유로 소련에게서 파시즘 지도자란 비방을 들었다.
8. 인물
8.1. 유럽
- 독일
- 아돌프 히틀러
- 요제프 괴벨스
- 헤르만 괴링
- 루돌프 헤스
- 하인리히 힘러
-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 발터 폰 라이헤나우
- 페르디난트 쇠르너
- 아돌프 아이히만
- 에른스트 룀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로베르트 라이
- 그레고어 슈트라서
- 오토 슈트라서
- 발터 슈테네스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 스페인
- 루마니아
- 노르웨이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벨기에
- 레옹 드그렐[34]
- 프랑스
- 앙리 도르제르
- 자크 도리오
- 프랑수아 드 라 로크[35]
- 덴마크
- 프리츠 클라우센
- 네덜란드
- 안톤 뮈세르트
- 영국
- 오스왈드 모슬리
- 윌리엄 조이스
- 포르투갈
- 룰라우 프레토
8.2. 아시아
8.3. 1945년 이후
9. 파시스트로 오해받거나 의혹이 있는 인물들
9.1. 유럽
상기한 인물들 중 페탱의 경우에는 나치와 협력했단 이유로 파시스트로 낙인찍히곤 했지만 그의 정체를 살펴보면 그는 권위주의 성향의 전통적 우익에 불과하지 파시스트로 해석할 수 없다. 프랑코의 경우에는 파시스트들의 도움을 받아서 집권한 경우지만 정작 집권 후엔 파시스트 정당을 약화하고 정통 팔랑헤들을 숙청해버렸다. 그나마 1940년대로 접어들면선 프랑코에게서 그나마 찾아볼 수 있던 파시즘 색채도 희미해지며 정치학적으로 냉정히 살펴보면 기껏해야 파시즘과 동맹한 우익 지도자 정도로 분류된다. 미클로시와 안토네스쿠의 경우에도 추축국이었단 이유로 파시스트로 낙인찍히지만 호르티는 페탱이나 프랑코처럼 권위주의 우익 정치가였고 안토네스쿠는 파시즘 색채를 띠긴 했지만 정통 파시즘 쪽은 호리아 시마 쪽이었으며 안토네스쿠는 이들과 오히려 정치적 경쟁을 하던 사이였다. 슬로바키아의 요제프 티소의 경우에도 파시즘과 거리가 먼 교권주의 성향의 인물이었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히틀러는 파시즘, 나치즘의 전파에 관심이 없던 인물이고 오히려 파시즘과 경쟁하는 쓸만한 권위주의 세력과의 동맹을 추구했다. 안토니우 살라자르의 경우, 히틀러 유겐트를 비롯하여 파시즘적인 도구 일부를 빌려오긴 했지만 광적인 대중정치를 하던 유럽의 다른 파시스트들과 달리 대중정치를 극도로 혐오하며 '안빈낙도'적인 소극적이고 폐쇄적 정치를 추구하며 오히려 포르투갈 내부 파시스트 지도자 룰라우 프레토 등을 탄압했다.
9.2. 아시아
- 일본
- 중화민국
- 이란
일본 제국의 경우에는 상기한 듯이 일본 제국이 파시즘 국가인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팩스턴의 경우에는 일본 제국 수뇌부를 대중정치를 경시한 군부 독재에 불과하다고 했으나 일본 사학계 등지에는 '위로부터의 파시즘' 개념을 소개하면서 일본 군부의 생존권 집착과 순혈주의 등의 파시즘적 사상을 들어 그들이 파시스트라고 주장하고 있다. 장제스의 경우에는 마오쩌둥에게서 파시스트란 비방을 받았지만 팩스턴식 구조주의 분석에 따르면 그는 도무지 파시스트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며 파시즘 적인 주장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휘하의 남의사가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것 자체는 인정되는 부분.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의 저자 정두음의 경우에는 남의사를 파시스트 단체로 규정했지만 팩스턴이나 팩스턴에게 남의사 관련 문헌을 소개한 프레드 웨이크먼 주니어의 경우에는 남의사가 파시즘 영향은 받았어도 궁극적으로 파시스트 단체는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캐빈 패스모어 역시 남의사가 파시즘을 혁명의 수단으로 여겨 관심을 보인 것은 지적하지만 남의사는 비밀결사에 불과했음을 지적한다. 호메이니의 경우엔 복잡한데, 팩스턴처럼 대중정치를 경시한 신정체제가 파시즘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경우와, 종교파시즘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하는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 수출론을 주장한 파시스트라 할 수 있다.
9.3. 아메리카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제툴리오 바르가스
페론이나 바르가스 모두 파시스트 의혹을 받아왔으나 바르가스의 경우에는 '파시즘과는 거리가 먼 현대화된 독재'를 추구했고 페론의 경우에는 아르헨티나 토착 상황을 이용한 '페론주의'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10. 여러 파생된 파시즘
10.1. 식민지 파시즘
후지이 다케시 교수가 창안한 개념. 3세계에 흔히 보이는 우익 권위주의 독재자들은 파시스트인가 아닌가를 논하면서 나온 개념이다. 일단 팩스턴 등이 말하는 구조적 파시즘을 논할 때는 3세계 국가들은 도무지 파시즘이라 볼 수가 없다. 일단 팩스턴은 파시즘을 이미 있던 민주주의를 방기해야 하며, 필연적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당-국가 이중 정부 구조와 파시즘 독재자의 총애를 얻기 위한 양자의 경쟁, 기존 엘리트들과의 협력 및 알력 등의 복잡한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3세계 국가들 상당수가 민주주의 방기에서부터 글러먹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여러 독재자들에 대한 파시즘 비난부터가 공산주의식 파시즘 정의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거나 파시즘이 뭔지도 모르고 파시스트라고 까고 보는 경우가 많다.하지만 많은 3세계 국가들에게서 파시즘과 유사한 면모가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몇가지만 지적하자면 지도자를 문화, 민족정체성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열광적으로 숭배한다거나, 좌우파를 망라한 기존 정치를 경멸하고, 경제에 대한 공동체 및 국가 개입을 강조하는 면모 등이 있다. 이 때문에 후지이 다케시는 이탈리아나 나치 독일과 같이 제국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저항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식민지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소개한 바가 있다.
10.2. 종교 파시즘
이슬람 문화권을 비롯한 제3세계에서 가장 크게 만연하고 있는 유형민족주의가 아니라 종교를 배이스로 깐 파시즘을 말한다.[36] 파시즘이 기존 정치와 근대에 대한 반항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파시즘 거물들의 최고봉인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모두 종교에 대해 영 삐딱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종교와 파시즘은 거리가 먼 것처럼 인식될 수 있지만 관련 연구에 따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우선 종교 역시 파시즘이 기존 엘리트들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협상 대상이 되곤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교황과 무솔리니의 라테라노 조약이다. 종교 파시즘은 아예 종교가 민족주의를 대체하여 파시즘적 열정을 부여한다고 보는 경우다. 이에 대해 스텐리 페인 교수는 종교의 계율과 가치가 파시즘 지도자를 제약하기 때문에 종교가 어느 정도 세속화되어야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실제로 벨기에, 루마니아, 스페인, 핀란드 파시스트들은 종교를 중시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파시즘이 택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는 팩스턴은 종교 파시즘의 출현 가능성을 긍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종교는 그 정체성 측면에서는 국가만큼이나 강력할지 모른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실제로 종교적 정체성이 국가적 정체성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종교 근본주의에서는 종교 내의 단합과 활력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국가의 단합과 활력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게 작용한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종교에 기반한 파시즘의 출현이 가능하다. 결국 그 어떤 파시즘도 상징이나 구호가 다른 형태의 파시즘과 비슷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 그러하듯이 각 나라의 애국주의 레퍼토리를 얼마든지 끌어들일 수 있다."
이외에 미국의 극우 개신교 인사들이 이끌었던 나치 운동이나 핀란드의 '라푸아 운동'은 드물게도 전통적 권위주의나 보수주의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 개신교의 극우 운동이 파시즘까지 급진화된 사례로써 주목할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팩스턴이 언급하진 않았으나 남아공의 포장마차 파수대 역시 종교 파시즘으로 볼 여지가 다분하다.
여기서 논란이 되는게 현재 난동을 부리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파시스트인가 아닌가 이다. 팩스턴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파시스트가 아니라고 보고 있지만 근래에는 이슬람 파시즘이란 개념을 주장하며 이들 역시 파시스트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37]
10.3. 미시 파시즘
대한민국 사회와 일상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유형.각자의 개성과 선택권을 무시한 채 동일한 규율로 문화, 가치관에 구성원 전체를 묶어버리는 문화를 미시 파시즘이라 한다.
주로 국가레벨로 일어나는 파시즘이지만 독재, 상급자에 대한 복종, 전체를 위한 희생, 의견무시 등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대학 신입생들이 강제로 술먹는 것, 가부장제, 신입사원으로 하는 재롱잔치 준비 등이 얼마나 권위적이고 조직이 바라는 것을 위해 개인을 학대하는 행위를 쉽고 흔하게 볼 수 있다.
10.4. 좌파 파시즘
좌파 파시즘 문서 참고.
11. 참고문헌
- 파시즘, 로버트 팩스턴, 교양인. - 이 문서를 서술하는 가장 핵심적인 도움을 받은 책이며 파시즘의 정의에 대한 매우 신중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파시즘의 정의를 위한 최소치 산출을 위해 전 세계의 파시즘 운동을 정리한 걸작. 다만 10년 전에 나온 책이라서 지금은 논의가 진보되었음은 유의해야 한다. 당장 이 책이 나오던 시점까지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이슬람 파시즘이라거나 마이어스 등이 주장하는 북한식 파시즘에 대해서는 논의가 되지 않고 오로지 유럽의 정통 파시즘만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상으로의 파시즘에 대해서 간과했다는 비판이 있다.
- 파시즘, 장문석, 책세상.
- 파시즘, 캐빈 패스모어, 고유서가.
-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 정두음, 선인.
- 비시 신드롬, 앙리 루소, 휴머니스트.
- 암흑의 대륙, 마크 마조워, 후마니타스.
- 사회사상과 정치 이데올로기, 앤드류 헤이우드, 오름.
- 영국 파시즘 연구 -대륙 파시즘과 구별되는 모슬리 파시즘의 특징들-, 김명환, 영국 연구 제11호.
- 체임벌린의 후기 사상과 모슬리 파시즘의 비교, 김명환, 역사와경계 92, 부산경남사학회.
- 모슬리의 조합국가론, 김명환, 역사와경계 50.
- 모슬리 파시즘의 현실인식, 김명환, 영국 연구 제10호.
-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논쟁, 김용우, 서양사론 제68호.
- 1930년대 프랑스의 파시즘과 보수주의 -불의 십자가 논쟁과 그 문제점-, 김용우, 서양사론 제60호.
- 프랑스 파시스트 이데올로기 형성에 관한 연구, 김용우, 서양사론 제45호.
- 파시즘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김용우, 프랑스사연구 제32호.
- 파시즘의 알리바이?, 장문석, 영국 연구 제29호.
- 파시즘과 대중기반, 이국영, 국제정치논총 38(3), 한국국제정치학회.
- 비교사의 시각에서 본 한국의 파시즘과 권위주의, 채오병, 경제와사회 111, 비판사회학회.
- 루마니아의 파시즘, 엄태현, 동유럽발칸학 제8권 2호.
- 열광의 정치: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 박한규, 대한정치화회보 14집 3호,
12. 픽션에서의 파시즘
- 겟타로보 시리즈
- 기동전사 건담 우주세기 - 지구연방 내 군대 사조직, 지온공국과 그들의 잔당 세력들
- 브이 포 벤데타 - 노스 파이어 정권
- 시귀 - 시귀
- 스타크래프트 세계관 - 지구 집정 연합
- 우주전대 큐레인저 - 우주막부 쟈크 매터
- 은하영웅전설 - 우국기사단
- 폴아웃 시리즈 - 미국, 중국, 엔클레이브, 시저의 군단
- 해적전대 고카이저 - 우주제국 잔갸크
13. 관련 문서
[1]
전체주의란 표현도 무솔리니의 이러한 정의에서 시작되었다.
[2]
속간에 묶여 있는 몽둥이는 태형을 집행할 권리를 도끼는 사형을 집행할 권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동양에서 도끼를 부월이라고 부르며 도끼 모양이 임금 왕자가 된 것과 비슷한 원리
[3]
사실 속간은 로마 공화정을 뜻하는 의미도 있었기 때문에 공화정을 체택한 국가에서 권력기관의 상징으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미국 상원의장에도 속간이 들어가 있고
링컨 기념관에서 링컨이 앉아있는 의자에 속간이 새겨저 있으며 프랑스 대통령의 문장에도 속간이 그려저 있다.
[4]
2차 대전때의 일본은 1차대전까지의 독일과 비슷한 형태다.
[5]
정작 여기서 언급한 인물들이 본인이 나치 선전에 이용되는 꼴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6]
에른스트 룀을 숙청한 "장검의 밤" 때 나치당 내의 좌파적 인사들까지 함께 죽였다.
[7]
무솔리니의 라스 숙청, 히틀러의 장검의 밤, 김일성의 도서정리사업 등
[8]
파시즘은 사실 당시의 좌익 사상과 우익 사상을 적절히 혼합한 것이기 때문에 좌도 우도 아닌 제3의 위치로 불렸다. 민족 무정부주의, 민족 생디칼리즘,
페론주의,
슈트라서주의 등이 이에 속한다.
[9]
이 때문에 생디칼리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르주 소렐의 경우, 좌우파 모두에게 존경을 받게 된다.
[10]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개념이 확실히 잡힌 현대의 기준으론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맑시즘이 볼셰비즘의 형태를 취하는 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는 걸 생각하면 이러한 차이가 이해되지 않을 것도 없다.
[11]
이건 다르게 말하면 소비에트 연방과 그에 동조한 볼셰빅들의 의도와 달리, 분명 유럽 사회 일각에서 보기에는 소련이 주장하는 세계화가 러시아 제국주의의 연장선으로, 그리고 소련의 사주를 받는 혁명가들이 그저 백수 건달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결국 제2 세계가 무너진 지금에 와서는
노동조합의 역할이 곁가지로 밀려나버린 소련식 혁명은 처음부터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12]
독일에서 제1당이지만 불과 32%의 지지율을 얻었던 나치당이 연립정부로 집권한 것도 좌파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여타 정파들이 나치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13]
이는 파시즘이 튼튼한 이론적 근거가 있지 못하다는 점을 나타내기도 한다.
[14]
Zetkin, Clara; Foner, Phillip Sheldon. <Clara Zetkin: Selected Writings>. New York: International Pub, 1984
[15]
하지만 나치당이 반교권주의와 결탁한 것은 사실이나 종교와 나치즘이 아닌 파시즘이 무조건 사이가 나쁘라는 보장도 없다. 당장 무솔리니와 교황
비오 11세의
라테라노 조약만 봐도 그렇거니와 루마니아의 파시스트들이나 벨기에의 파시스트들은 대놓고 교권주의를 주창했다. 나치즘이란 특수 경우를 제외하고 파시스트 국가나 추축국의 토속 파시스트들은 왕정이나 구 기득권들에게 대게 협조하며 공생하는 편이었다. 나치 독일을 제외하고는 파시즘 성향을 띄는 국가들은 예외없이 왕국이거나 교권주의적 통치를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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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주장은 무리한 주장으로 비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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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정보기관인
남의사가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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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은 총독부이다. 나치가 폴란드의 흔적을 말살시키고 레벤스라움을 실천하려고 일부러 폴란드에 관련된 이름조차 붙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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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러시 페렌츠 집권 시기에는 파시즘 국가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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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내에 있는 자치 정부인
노르웨이 국민정부는 파시즘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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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군단국가 시절에는 파시즘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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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5월 선거에서 200만 표 중 75만 표를 획득하며 크게 선전했으나 그 당시에는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의 통치가 굳건하여 의미 없는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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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위대(Garda de fier)란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창당자는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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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선거에서 15.38%의 지지와 390석 중 66석의 의석을 획득하여 3당으로 약진했으나 이들의 폭력행동에 질린 안토네스쿠가 히틀러의 승인을 얻어 이들을 숙청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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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나 무솔리니를 제외하면 가장 성공적인 서유럽의 파시스트 정당으로 1936년 5월 선거에서 11.5%의 지지와 202석 중 21석의 의석을 차지했지만 1937년 4월 선거에서 카톨릭에서 공산주의자들까지 대동단결해서 파울 반 젤란드를 중심으로 얘들을 조져버림으로 퇴갤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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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선거에서 7.94%의 지지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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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선거에서 2.2%의 지지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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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설립 이후 1934년까지 빠르게 성장하여 데일리메일 발행자 로더미어 자작을 비롯한 여러 거물의 지지를 받으며 5만명의 당원을 확보했으나 1934년 올림피아 박람회장 난동 사건과 장검의 밤 때문에 충격받은 영국인들이 파시스트를 성토하고 기존 파시스트 당원들도 90%나 집단 탈당함으로 쇠락했다. 1936년 케이블가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공공질서법이 통과되어 이들의 제복 착용이 금지되었고 1939년까지 2만명 수준의 당세를 회복했으나 영국 보수파들의 세력 회복과 거국내각의 등장으로 인해 망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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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은 파시스트 정당이었으나 1940년에 예정된 선거가 독일의 침공으로 무산되면서 프랑스의 파시스트화는 적어도 프랑스인들의 손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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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프랑스의 농촌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기존 보수주의 단체인 자크 르 루아 라뒤리의 프랑스농민연합에게 밀려서 퇴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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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를 지지한 프로테스탄트 파시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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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독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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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위대에서 안토네스쿠와 공동 1인자 노릇을 했으나 1940년 권력투쟁 과정에서 안토네스쿠에게 철위대와 함께 숙청당하고 독일로 망명하여 1993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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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파시스트 정당인 렉시스트 당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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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회당의 지도자. 다만 이후 항독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프랑스 내부에서는 이 사람이 파시스트가 아니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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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스턴이 파시즘이 주로 취한 수단이 민족주의나 반유대주의였지만 파시즘의 수단이 민족주의나 반유대주의에 국한될 이유는 없다고 설명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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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팩스턴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보단 차라리 현대 이스라엘이 파시즘화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실제로도 GDP 대비 군사비 지출이 6~7%에 달하고 사회 분위기가 매우 억압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에서도 자국이
군국주의화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대표적으로 Uri Ben-Eliezer의 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