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朝鮮貴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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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金德漢
1874년 ~ 1946년 12월 17일
1. 개요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 본관은 신 안동 김씨.2. 생애
구한말의 판서이자 조선귀족 김학진의 아들로, 1894년 전시(殿試) 병과에 급제하며 관료로 입각하였다.대한제국 비서원에서 비서원랑과 비서원승으로 재임하여 홍문관 시독(侍讀)과 태의원 소경(太醫院 小卿), 경상남도 울산군수, 규장각, 부제학, 봉상사 제조(奉常司 提調), 종묘서 제조(宗廟署 提調), 의효전 제조(懿孝殿提調)으로 재임하였다.
1908년부터 1909년까지 《국조보감(國朝寶鑑)》 찬집위원(纂集委員)과 선사위원(繕寫委員), 감인위원(監印委員)으로 재임하였다.
1909년 10월 《국조보감》 찬집에 기여하여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4등 태극장을 수여하였다.
1912년 8월 일본 황실로부터 한국 병합 기념장을 수여했다.
1914년 6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종5위에 서위되었다.
1918년 1월 10일 김학진이 받은 남작 작위를 승계하였다.
1922년 3월 승계하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28년 11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사과 촉탁으로 재임하였다.
1946년 12월 17일 사망했다.
3. 기타
- 스위스산 커피를 즐겨마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커피가 귀해서 정치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최고급 디저트였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IV-1》. 서울. 137~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