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관을 계승한 서울대학교 산하기관에 대한 내용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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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실 도서관으로,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규장각(奎章閣)이란 이름에서 규(奎)는 28수 별자리 중에서 규수(奎宿: 안드로메다자리 근처의 별들)를 가리킨다. 규수가 예부터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자리라고 여겼기 때문에, 규(奎) 자가 학자나 잘 쓴 글씨를 비유하는 말로도 쓰였다. 그래서 규광(奎光), '규수의 빛'이라고 하면 과거를 열어 선비를 뽑을 징조라 하였다.규장(奎章)이라 하면 임금이 쓴 글씨, 혹은 (글쓴이가 임금이 아니더라도) 걸출한 문장이나 글씨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다. '규장각'이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2. 역사
'규장각'이란 명칭의 규장(奎章)이란 단어가 드러내듯, '규장각'은 본래 조선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 서화, 유교(遺敎) 등을 관리 및 보관하던 곳이다. 최초로 이를 구상했던 때는 15세기 중엽 세조 재위기이다. 세조 10년(1464)에 양성지가 건의하여 처음 설치하였으나 세조가 사망한 후 곧 폐지하였고, 18세기 말엽 정조 때 다시 부활하였다. 세조 때는 어제존각지소(御製尊閣之所)라고도 불렸는데, 세조 사후 폐지되어 건물이 황폐화되자 숙종 20년(1694)에 세조가 친히 쓴 '규장각(奎章閣)'이라는 액자를 종정시(宗正寺)의 환장각(煥章閣)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 때 규장각을 설치한 후 한국사 최초의 왕조 시문집인 열성어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내각일력에는 규장각의 업무나 문화 사업에 관련된 일을 모두 실었다.규장각의 의의는 역대 국왕의 어제나 어필을 보관하는 데에도 있었지만, 당시 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척신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신하 중 학식, 경륜이 뛰어났던 사람들을 모아 경사를 토론시키고, 정치의 득실,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등 다방면에 걸친 시폐를 개혁하는 것에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예절과 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국왕의 선택을 받은 측근들이 왕을 보좌하며 왕권 강화를 꾀하는 참모기구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조선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들이 출세하는 중앙 통로가 돼버렸다. 그래서 갑신정변 때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궁내부에 소속되다가 1895년( 을미개혁)에 규장원으로 개칭, 1897년( 대한제국)에 다시 규장각으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결국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규장각에서 소장하던 도서들은 조선총독부 참사관실 등에서 조사하고 정리하여 보관하였다가 일부는 이왕가로, 나머지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다. 해방 후에 이왕가 도서들은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다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으로 옮겨졌고, 경성제국대학 도서들은 그 후신인 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하였다. 서울대학교는 이 도서를 바탕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을 설치했으며, 이에 따라 서울대 규장각이 확장 개편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규장각에서 소장했던 도서들을 일부 보관한다.
3. 구성
관원은 제학(提學) 2인, 직제학(直提學) 2인, 직각(直閣) 1인, 대교(待敎) 1인, 검서관(檢書官) 4인이 있었다. 강화도에 외규장각이라는 분관이 있었다.4. 청사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규장각 문서 참고하십시오.5. 창작물
- KBS1에서 방영되었던 성균관 스캔들의 원작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후속작인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의 작중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6. 기타
- 여기서 술판을 벌이면 10월 26일에 사람이 총에 맞아 죽는 저주가 있다고 한다. 피해자(?)는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이다. [차길진의 갓모닝] 664. 규장각의 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