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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평가 | ||
가족 관계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틴어: Gaius Octavius |
|
출생 | 기원전 100년(추정) |
사망 | 기원전 59년 (향년 41세) |
지위 | 원로원 의원, 법무관,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 |
계급 | 에퀴테스,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공화국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배우자 |
안카리아(사별) 아티아(재혼) |
자녀 |
대(大) 옥타비아 소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정 후기의 신참자(노부스 호모) 원로원 의원, 법무관, 장군, 총독이다. 신참자임에도 키케로와 함께 후대 로마인들에게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다. 그 이유는 그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친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친아들 아우구스투스 외에도 양손자 티베리우스, 증손자 클라우디우스 1세, 현손 칼리굴라, 브리타니쿠스의 직계조 중 한명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로마 근교의 벨리트라이 태생으로, 로마의 오래된 평민 씨족 옥타비우스 가문 출신의 에퀴테스로, 노부스 호모이다. 다만, 평민 출신, 에퀴테스라고 해도, 로마 사회 안에서는 기사계급의 은행가 출신으로, 조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시절부터 로마 공화국 하위 행정 공무원, 대대장, 시의원을 배출한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다.
2. 생애
2.1. 출신 가문 이야기
로마 근교의 오래된 라틴 도시 벨리트라이 태생이다. 평민 계급이나, 태어날 때부터 부와 명예를 누린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풍요 속에서 성장했다. 이는 그토록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혐오한 수에토니우스가 황실 비서관으로 있으면서, 뒷조사를 철저히 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까지 보고한 내용이라고 하니 신뢰할 만 하다. 그의 주장처럼 아우구스투스 친가의 재산은 증조부 이전부터 환전상이나 고리대금업자, 세리 등을 할 정도로 많은 돈이 필요한 집안이 아니었다.후일 사위가 될 인물로, 아들 아우구스투스와 평생 숙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내전 당시, 옥타비아누스를 경멸조로 이렇게 문구를 적어 조롱하고, 옥타비아누스 일가 전체를 싸잡아 폄하했다.
"그의 증조부는 투리움에서 밧줄을 만들어 팔던 해방 노예, 조부는 환전상, 아버지도 환전상."
이런 네거티브 전략은 그렇지만 로마 시대 관보를 통해 완벽한 거짓 선동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수에토니우스는 전한다.[1][2]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직계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후손들은 분명 노부스 호모였지만, 아우구스투스 부친의 8촌뻘 되는 옥타비우스 분가 사람들은 일찌감치 로마로 진출해 집정관을 여러 차례 지낼 정도로 출세했다. 따라서 로마 사회에서 옥타비우스 가문이 완전한 무명 가문은 아니었다.
옥타비우스의 조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2차 포에니 전쟁 당시인 기원전 205년경 시칠리아에 주둔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휘하 대대장으로 복무하며 로마군 장교로 활동한 행정관료였다. 이는 옥타비우스의 아버지(아우구스투스의 할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후일 시의원을 했지만 그 전까지는 지방행정관으로 근무했고 수입이 상당한데다 아주 장수했다. 이런 이유로 옥타비우스는 일찍부터 아버지 소유의 시골 대저택에서 자랐고, 후일 아들 아우구스투스를 얻자 복잡한 로마를 떠나 벨리트라이 집으로 돌아가 살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일찍이 자신의 외조모 집안인 율리우스 가문 내의 카이사르 가에 입양됐다. 그렇지만 그는 청동판으로 제작한 자서전 <업적론>을 통해 친부 옥타비우스를 언급했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 친부는 벨리트라이 태생의 오래되고 부유한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옥타비우스 가문에서 최초로 원로원에 진출했다."
2.2. 신참자 옥타비우스
조부, 부친 모두 로마 안에서 기사계급 중 사회적 존경을 받는 화이트칼라 직업을 지냈고, 아버지가 시의원을 하며 은행가로 사업수완이 뛰어났던 만큼 일찍부터 출세를 위해 정치활동을 했다. 이는 신참자들이 흔히 밞았던 그 방식이었는데, 옥타비우스는 그 재산이 후일 처가가 되는 아티우스 가문이나 아들이 입양간 카이사르 가문보다 많았던 부잣집 도련님이라서 아마도 키케로 형제와 비슷한 길을 밞았던 것 같다.태어난 년도로 추정된 기원전 100년보다 더 어린 나이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70년 명예로운 경력의 첫 발자국인 재무관이 됐다. 이후, 정치 경력과 행정실무 경력을 쌓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기원전 61년 법무관에 입후보 후 당선돼 고위직인 법무관까지 오른다.
기원전 60년, 법무관 임기를 마친 뒤 로마 공화정 시대 동안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 배정받은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 파견됐다. 이 시기, 그는 마케도니아 총독을 지내면서도 성공적으로 통치를 했다. 속주민 통치에 대해 단호하고 공정하게 통치를 했고, 트라키아의 베시아인들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으며, 동맹 부족과의 외교 문제에 대해서도 잘 대처했다. 이 증거는 키케로가 자신의 동생 퀸투스의 무능함을 질책하면서 쓴 편지에 나타나있다. 편지에는 "제발 마케도니아 총독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동맹 부족들을 외교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배워라."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법무관을 지내기 전, 혹은 그 직전 두 번의 대대장 선출, 안찰관 취임을 했다. 이 기간, 옥타비우스는 스파르타쿠스의 옛 잔당들이 점령했던 투리움 지역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따라서 그는 기원전 63년 아티아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을 얻은 뒤 자기 아들에게 '투리누스'라는 추가 이름을 지어준다.
원로원 내 실력자들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그 능력이 탁월했으나, 집정관 직에 출마도 못 하고 로마로 가던 중, 놀라에서 횡사했다. 일설에 따르면 로마 귀환 후 다음 해 혹은 그 다음해 집정관을 노리기 위해 입후보할 준비를 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많아도 40살에 불과했다.
3. 사후 이야기
아들 아우구스투스는 후일 포룸을 건설하면서, 아버지 옥타비우스의 경력을 비문에 새겨 넣고 이를 널리 알렸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C(aius) Octavius C(ai) f(ilius) C(ai) n(epos) C(ai) pr[on(epos)]
pater Augusti
tr(ibunus) mil(itum) bis q(uaestor) aed(ilis) pl(ebis) cum
C(aio) Toranio iudex quaestionum
pr(aetor) proco(n)s(ul) imperator appellatus
ex provincia Macedonia
가이우스의 아들이자, 손자이자 증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
두 번의 대대장, 재무관, 재판관 가이우스 토라니우스와 함께 안찰관을,
법무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의 총독을 지냈다.
pater Augusti
tr(ibunus) mil(itum) bis q(uaestor) aed(ilis) pl(ebis) cum
C(aio) Toranio iudex quaestionum
pr(aetor) proco(n)s(ul) imperator appellatus
ex provincia Macedonia
가이우스의 아들이자, 손자이자 증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
두 번의 대대장, 재무관, 재판관 가이우스 토라니우스와 함께 안찰관을,
법무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의 총독을 지냈다.
4. 결혼과 후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생애 동안 두 번 결혼했고, 이혼은 한 차례도 없었다. 이는 대개의 로마 원로원 의원 중 신참자들의 결혼 생활과 상반된 모습이다.첫 아내는 같은 벨리트라이 출신의 평민 태생인 안카리아였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옥타비우스는 딸 대(大) 옥타비아를 얻었다. 대 옥타비아는 결혼 적령기가 되자마자, 원로원 의원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1세와 결혼해 사이에서 두 아들을 뒀다. 그녀의 두 아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2세, 마르쿠스 아풀레이우스는 옥타비우스의 아들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외삼촌 아우구스투스의 후원 아래 모두 집정관에 올랐다.
첫 아내와 사별 후, 주변의 도움과 중매로 공화정 시대의 유력 평민귀족( 노빌레스) 규수인 아티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정황상 장인 아티우스 발부스 혹은 그를 도와준 주변 인사들 덕에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티아와의 사이에서 딸, 아들을 각각 한 명씩 얻었는데 이중 아티아가 낳은 첫째가 소 옥타비아, 둘째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즉, 후일의 아우구스투스로 유명한 옥타비아누스다.
그의 가문인 옥타비우스 가는 유일한 아들인 아우구스투스가 18세의 나이에 아내의 외종조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양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되면서 정식적으로 그 대가 끊긴다. 그렇지만 옥타비우스의 아들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는 후일 율루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의 외손녀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가 낳은 아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형식상 옥타비우스 가문 남성으로 인정해, 그를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증손자로 벨리트라이의 옥타비우스 가문 묘지에 안장하도록 허락했다.
[1]
안토니우스 측이 옥타비아누스 일가를 비방할 때, 사용한 방법은 비열했지만, 당시 로마 전역에서 부유한 에퀴테스들을 폄하할 때, 이 방법을 쓰는 것은 의외로 효과가 높았다. 먼저 기원전 2세기 이래, 라틴어로 에퀴테스라고 하는 기사계급은 거의 대부분 재산 축적 과정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보더라도 경악할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일가처럼 자영농에서 착실히 재산을 불려 나가면서, 지역 유지가 되고, 자녀 교육 속에서 로마 공화국 하위 공무원을 배출하면서 명망을 쌓았던 기사계급 출신들은 따라서 이런 그들과 엮이는 것을 무척 혐오했다. 이런 이유로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건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외조부는 대대로 지역 실무 공무원 출신으로 덕망을 쌓은 자신에게 막대한 재산을 강조하며, 사위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베스파시아누스의 부친에게 가계와 직업을 묻고 처음에는 불쾌감을 대놓고 표했다. 그러나 결국 청혼을 승낙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이 세금징수업을 대대로 했지만 기부도 계속 했고, 고리대금업 대신 경매업, 세무사 업무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 부모는 결혼했는데, 그럼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칼리굴라 황제에게 출신보다는 능력을 인정받아 추천을 받기 전까지는 번번히
조영관 선거에서 낙방하고, 황제가 된 뒤에도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 문제로 조롱거리가 됐다.
[2]
로마 시대 기사 계급은 평민들 중 재산의 규모로만 정해졌다. 이들은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본토의 부유한 자영농 계급이 몰락한 뒤로 금융업자, 상인, 운송업자, 공장 경영자를 뜻했다. 그중에 금융업자는 극소수의 지역 유지로 조합 형태로 은행업을 하면서 사업 대금을 빌려주고, 저축 사업 등을 한 이들을 빼면, 거의 대부분 세금 징수, 환전, 고리대금업 등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모든 일을 겸했다. 또 이들은 돈이 될 만한 일이라면 전부 다했다. 포에니 전쟁 중에는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이 휩쓸고 간 폐허된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자영농 가족들에게 헐값에 땅을 사들이거나, 돈을 빌려주고 못 갚으면 빼앗았다. 또 델라토르 같이 사람의 약점을 잡아 고발 후 고발된 사람이 처형되거나 추방될 때 재산의 4분의 1을 챙기는 등 온갖 나쁜 짓을 많이 했다. 그러니 전통적으로 로마 사회에서 귀족은 물론 로마 농민들에게, 기사계급 출신 중 금융업을 한다면 처음부터 그 이미지는 최악이었고, 그 가계 중 한명이라도 푸블리카나를 경영하면서 세금 징수를 한다면 경멸을 넘어, 선출직 출마 후 당선을 장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