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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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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니우스상.
정식 명칭은 Hermannsdenkmal(헤르만 기념비)[1]

1. 개요2. 생애3. 뒷 이야기4. 매체

1. 개요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승리를 이끈 게르만의 영웅으로, 독일에서는 게르만의 해방자로 대접받는다.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라틴어식으로 표기된 이름으로, 줄여서 아르민(Armin)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독일에서는 주로 독일어식 이름인 헤르만(Hermann)으로 불린다. 현대 독일어와 고대 게르만어 사이에 다소 차이가 있어서 어느 쪽이든 원어로 읽은 이름은 아니다.[2]

2. 생애

게르만족의 한 부류인 케루스키족의 군장인 세기메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원전 11년 ~ 기원전 9년에 있었던 드루수스의 게르마니아 전쟁으로 인해 친동생 플라부스[3]와 함께 인질로 로마로 보내졌다. 아르미니우스는 동생과 함께 로마에서 자라며 로마군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로마 시민권을 얻어 기사계급( 에퀴테스)이 되어 로마군의 전술을 터득하고 또한 로마군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했으며 이후 게르마니아로 돌아오게 된다.

그 자신은 게르만족의 왕국을 세워 왕이 될 야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가 게르만족의 왕이 될 것을 두려워한 친척들과 대립하였다.

로마는 게르마니아에 지배권을 행사하여 라인 강을 넘어 엘베 강 연안까지 속주화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위해 아우구스투스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를 총독으로 파견하게 된다. 문제는 게르마니아의 사정에 어둡던 바루스가 금이 부족하였던 게르만족들의 형편을 무시하고 예전에 자신이 먼저 부임했던 속주들에서 하던 대로 세금을 금으로만 거두어 들이거나 로마의 민족우월주의 등을 내세워 게르만족의 정서와 문화를 무시하는 등, 게르마니아를 무리하고 성급하게 속주화하려고 시도했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 밑에 있을 당시 군사적 능력을 포함한 모든 능력을 인정받는 동시에 신임받기까지 했으나 바루스는 그에게 치안관 이상의 직책이나 권한은 부여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자신이 홀대받음과 동시에 소외되었다고 생각한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와 협력하는 대가로 힘을 빌려 게르만족의 왕이 되려했던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수정하여 자신을 따르는 여러 게르만족 부족들을 연합하고 기원후 9년에 봉기하였다. 그는 자신이 봉기를 주도한 사실을 숨기고 바루스를 전장으로 꾀어내어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로마의 3개 군단을 전멸시키는 쾌거를 이루어낸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 뒤인 기원후 14년부터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가 보복으로 이끌고 온 로마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으며 16년에 벌어진 이디스타비소 전투에서 게르마니쿠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참패하면서 그의 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4] 이후 로마군은 앙그리바리안에서 다시 집결한 아르미니우스의 세력을 격파했고, 게르만족의 거주지들까지 공격해서 초토화시켰기에 더욱 큰 타격을 입혔다. 이로써 아르미니우스는 끝장난 듯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황제가 여기서 더 나아가기를 원치 않고 게르마니쿠스를 로마로 소환하면서 아르미니우스는 기사회생했다.

로마군이 철수한 이후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와의 전쟁 대신 마르코마니족의 왕인 마로보두스와 전쟁을 벌여 그의 군대를 패퇴시키지만 보헤미아를 탈취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카티족 대표가 서찰을 보내와 자신들이 아르미니우스를 독살했으니 포상을 달라고 요구했는데, 티베리우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비열한 음모로 어둠 속에서 복수하지 않고, 당당히 무기로써 복수를 해 온 민족이다.[5]

카티족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는 로마인들이 천천히 물러나고 마로보두스도 격퇴당해서 당장 공동의 적이 없어진 상태에서 아르미니우스가 왕이 되려 하자 그의 권한이 강력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친족들이 서기 21년 아르미니우스를 암살했다고 전해진다.

타키투스는 의미심장한 다음과 같은 구절로 아르미니우스의 생애를 논평하고 있다.
그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게르마니아의 해방자였다. 그것도 그 이전 게르마니아의 초기 역사에 존재했던 각종 군장들, 왕들과 달리 당당한 왕권을 가지고 군림했으며, 복잡한 결과이기는 했으나 무패의 전과[6]를 거두며 로마 제국의 도전을 무찔렀다. 그는 이리하여 37년의 생애, 12년의 집권을 마침질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최후가 "아르미니우스가 자기를 도와준 숙부이자 장인이기도 한 세게스테스까지도 친(親) 로마파로 몰아서 죽이는 것을 본 아르미니우스의 친척들이 그를 암살했다."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나무위키를 근거로 아르미니우스를 다루는 여타 매체들에 대고 "세게스테스를 친(親) 로마파로 그리다니 / 아르미니우스가 세게스테스를 모함하는 걸 묘사하지 않다니 아르미니우스 미화다!"라고 주장하는 일도 있었다.

아르미니우스의 숙부는 잉고마르[7]이며, 장인 세게스테스[8]와는 다른 사람이다. 두 명 모두 로마에 우호적이었다고 무려 로마 역사가들이 기록했다. 그리고 아르미니우스가 숙부나 장인을 암살했다는 내용은 역사에는 없는 허구이다.

한편 무고한 피해자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던 장인 세게스테스는 자신의 딸인 투스넬다를 데려다가 게르마니쿠스에게 포로로 진상했고,[9]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뒤에 로마로부터 거주지를 할당받아서 평생 잘먹고 잘살았다. 즉, 친로마파인 것은 물론이고 아르미니우스보다 장수했다. 투스넬다는 이후 로마로 끌려가 거기서 아들 투멜리쿠스를 낳았다. 이 모자의 운명에 대해서는 투멜리쿠스가 라벤나에서 살았다는 것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에 라벤나가 검투사 양성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투멜리쿠스도 검투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다만 아르미니우스가 부족 간의 권력 다툼에서 자객들에게 암살당한 것과 그 자객들이 그를 반대하던 친족들이 보낸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10]

3. 뒷 이야기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독일에서도 민족주의 물결이 일고 독일 통일 사상이 대두하자 자연스럽게 아르미니우스를 게르만의 영웅으로 숭배,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문서 상단의 동상도 이때 건립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나치 독일 시대인데, 아돌프 히틀러 나치당이 게르만 족의 우상으로 그를 간주해 숭배사업을 거창하게 벌이면서 그의 신격화가 나치에 연관되어서[11] 한동안 독일에선 그에 대하여 언급을 꺼리기도 했다. 물론 나치 청산이 많이 이루어진 지금은 아르미니우스가 드라마 주인공으로 나오는 등 다시 독일의 위인으로서 많이 언급되고 있다.[12] 같은 독일문화권인 스위스(독일계 주민 한정),[13] 오스트리아,[14] 리히텐슈타인에서도 독일 민족의 위인으로 추앙받는다. 물론 이들 국가 또한 문화적으로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로마가 싫어서 그런 건 딱히 아니고, 외세에 맞선 저항정신과 단결력을 본받자는 것이다.

여담으로, 독일의 구단인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에 그의 이름이 쓰였다.

21세기 기준으로 학계에서는 거의 사장되긴 했지만 북유럽 신화의 시구르드의 원형 혹은 전설이 성립하는데 영향을 준 인물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다.

4. 매체

대개 무시무시한 금속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출토된 가면에서 유래했다. # 이 가면은 1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뭔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원체 카리스마가 오지는 장치여서 매복해서 기습하는 무서운 캐릭터의 특성을 반영하기 좋다고 판단한 듯.

파일:Laurence-Rupp-as-Hermann.jpg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바바리안이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제작됐다. 로마인들은 철저한 고증의 라틴어 게르만족들은 점잖은 현대 독일어를 사용하는데, 아르미니우스는 특이하게도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의 양자가 되어 로마 기사 직위도 받고 매우 점잖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게르만족에게 과중한 세금을 물리고 학대하면서 양자인 아르미니우스를 그들을 통제할 수단으로 써먹으려고 생각한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를 게르만족의 왕으로 임명하는데, 아르미니우스는 소꿉친구들이 전하는 부족들의 참상을 보고 진짜 왕답게 행동해서 원래는 원수지간인 다른 부족들까지 규합하는 데 성공해 바루스의 군대를 함정에 빠뜨려 궤멸시키고 바루스는 친아들이나 다름없던 자신의 양아들이 로마를 배신해 로마 병사들을 도륙내는 모습을 보자 증오를 비롯한 여러 감정들이 뒤섞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살한다.[15] 로마 군단병 복장이나 게르만족 족장 복장, 독일어와 라틴어를 오가면서 고뇌하는 캐릭터 묘사가 잘 되어있다. 상술한 가면은 클라이막스와 그가 첫 등장해 바루스에게 보고를 하는 신에서 등장.

토탈 워 시리즈에서는 비운의 작품인 토탈 워: 아레나에서 지휘관으로 등장. 역시 가면을 쓴 무시무시한 캐릭터이다. 위장과 기동에 특화돼있다.
[1]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데트몰트(Detmold)에 위치한 토이토부르크 숲에 위치해있다. 토이토부르크 전투 승전을 기념해 승장인 아르미니우스에 헌정한 동상이다. 1838년 독일 연방 후기에 건립이 시작되어 1875년 독일 제국때 완성된다. [2] 아르미니우스의 독일어 명칭을 "헤르만"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다름아닌 마르틴 루터이다. 이 헤르만이란 이름은 고대 게르만어로는 헤리(Heri)라고 불렸을 거라 추측되지만, 이것이 아르미니우스의 본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3] 아르미니우스의 동복친동생으로 게르만식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름처럼 금발머리였다. 대 드루수스 원정 당시, 협정에 따라 어린 나이에 로마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으며 시민권 취득 당시 기사계급에 편입됐다. 아내는 카티족 부족장 아크투메르의 딸로 이 사람의 가족과 후손들은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이탈리아에 정착해 기사계급 로마인으로 살았다. 아들 중 이탈리쿠스는 아르미니우스 암살 이후, 친로마파 부족민들과 티베리우스와 로마군의 도움으로 케루스키의 왕좌를 차지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플라부스의 손자(이탈리쿠스의 아들)까지 케루스키족 왕좌를 지켰지만, 도미티아누스가 로마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니아 전쟁 중 재정지원을 제한하면서 왕좌를 포기했다고 한다. 플라부스는 형과 달리 로마군에 남았고, 한평생을 가족들과 함께 로마인으로 살았다. 그는 전쟁 기간 중 일리리쿰 반란 진압을 지휘하다 한쪽 눈을 잃는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받았고 게르마니쿠스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부상 이후에도 퇴역하지 않고 끝까지 로마군 장교로 복무하고 퇴역했다. 플라부스는 형의 아내와 조카가 로마군 포로가 된 이후 상황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완벽히 로마인으로 살았다는 말도 전해진다. [4] 이 전투는 개활지에서 벌어졌다. [5] 로마인들은 명예를 중시해서, 실제 강적인 피로스의 주치의가 대가를 주면 피로스를 독살해주겠다는 서신을 보내오자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주치의가 그런 음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피로스에게 통보해버렸다. [6] 사실 이 부분은 타키투스의 오류이다.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제외한 다른 전투에서는 로마군에게 무승부 정도가 아니라 큰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7] 벨레이우스 II.118.2 [8] 타키투스 Annals I.55 [9] 이 때 이미 아르미니우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심지어 딸이 포로로 끌려오는 개선식에 관객으로 초대받아서 그걸 지켜봤다는 기록도 있다. [10] 타키투스 Annals II.88 [11] 저 동상 앞에서 나치들이 각종 행사를 갖기도 했을 정도다. [12] 과거 로마에게 피점령당했거나 싸웠던 유럽 국가들에서는 로마에 맞선 '이민족' 지도자들을 위인으로 추앙하는 경향이 독일의 아르미니우스 외에도 꽤 있다. 영국 카시벨라우누스 부디카, 프랑스 베르킨게토릭스, 루마니아 데케발루스( 다키아 왕), 불가리아 아스파루흐( 콘스탄티누스 4세와 싸운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칸), 벨기에는 암비오릭스( 카이사르와 싸운 벨가이족 족장)를 영웅으로 칭송한다. 여담으로 불가리아는 트라키아인 출신인 스파르타쿠스 또한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칸 아스파루흐와 더불어서 로마 제국 지배층의 폭압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13] 프랑스계는 라틴계 + 켈트계의 혼혈이고 이탈리아계와 레토로망스계는 라틴계다. 라틴계는 아예 로마의 후예이고 켈트계는 게르만계에게 핍박받은 역사가 수차례 있어서 딱히 아르미니우스를 기념할 이유는 없다. 따지고 보면 스위스인들은 현재는 사멸한 기층민족인 켈트계 헬베티아족의 혈통이 언어권 불문하고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정식 국명도 라틴어 명칭인 헬베티아로 정했을 정도. 한편 영국의 경우 카시벨라우누스와 부디카가 앵글로색슨족에게 쓸려나간 켈트계 브리튼족이고 루마니아는 아예 자기들이 라틴계지만 토착영웅들을 잘만 숭상한다(...). 라틴화된 프랑스와 루마니아, 앵글로색슨화된 영국 모두 현 언어의 도래 이전 민족을 조상으로 기념하는 셈이다. 이는 민족국가 형성과정에서 로마를 강조하면 주변민족 및 국가와 차별화가 안 되니 일부러 차별화되는 고대사를 파서 프로파간다로 띄워준 역사가 누적되어 아예 역사인식이 바뀐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4] 이쪽도 소수의 비독일계 주민들(특히 헝가리계 체코계)은 제외. [15] 물론 실제 역사와 달리 처음부터 로마에 저항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고, 자신은 이미 오랜 시간 로마 시민권자로서 살아왔으며 로마군으로 복무한 만큼 로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바루스가 동족인 게르만인들을 억압하는데에 자신을 내세우고 아예 게르마니아에서 족장으로 살라고 하며 사실상 그를 게르마니아 지배를 위한 장기말 정도로만 여기는 모습에 돌아선 것으로 각색 되었다. 다만 후에 나온 묘사를 보면 정말로 친아들처럼 아꼈던 것은 사실인듯 하다. 아르미니우스와 바루스 사이의 오해로 시작된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