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9:55:47

조용준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만화 '행복한 세상의 족제비'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행복한 세상의 족제비/등장인물 문서
3.1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조용준 관련 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조용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3.svg 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3 2004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02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2561> 파일:2023 KBO 한국시리즈 엠블럼.svg KBO 한국시리즈
역대 MVP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982 1983 1984 1985 1986
김유동
OB 베어스 / 외야수
김봉연
해태 타이거즈 / 내야수
유두열
롯데 자이언츠 / 외야수
-[1] 김정수
해태 타이거즈 / 투수
1987 1988 1989 1990 1991
김준환
해태 타이거즈 / 외야수
문희수
해태 타이거즈 / 투수
박철우
해태 타이거즈 / 내야수
김용수
LG 트윈스 / 투수
장채근
해태 타이거즈 / 포수
1992 1993 1994 1995 1996
박동희
롯데 자이언츠 / 투수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 / 내야수
김용수
LG 트윈스 / 투수
김민호
OB 베어스 / 내야수
이강철
해태 타이거즈 / 투수
1997 1998 1999 2000 2001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 / 내야수
정민태
현대 유니콘스 / 투수
구대성
한화 이글스 / 투수
퀸란
현대 유니콘스 / 내야수
우즈
두산 베어스 / 내야수
2002 2003 2004 2005 2006
마해영
삼성 라이온즈 / 지명타자
정민태
현대 유니콘스 / 투수
조용준
현대 유니콘스 / 투수
오승환
삼성 라이온즈 / 투수
박진만
삼성 라이온즈 / 내야수
2007 2008 2009 2010 2011
김재현
SK 와이번스 / 지명타자
최정
SK 와이번스 / 내야수
나지완
KIA 타이거즈 / 외야수
박정권
SK 와이번스 / 내야수
오승환
삼성 라이온즈 / 투수
2012 2013 2014 2015 2016
이승엽
삼성 라이온즈 / 내야수
박한이
삼성 라이온즈 / 외야수
나바로
삼성 라이온즈 / 내야수
정수빈
두산 베어스 / 외야수
양의지
두산 베어스 / 포수
2017 2018 2019 2020 2021
양현종
KIA 타이거즈 / 투수
한동민
SK 와이번스 / 외야수
오재일
두산 베어스 / 내야수
양의지
NC 다이노스 / 포수
박경수
kt wiz / 내야수
2022 2023
김강민
SSG 랜더스 / 외야수
오지환
LG 트윈스 / 내야수

[1]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인한 한국시리즈 미개최.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2561> 파일:KBO 시상식 로고.svg KBO 리그
역대 신인상 수상자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983 1984 1985 1986 1987
박종훈
OB 베어스 / 외야수
윤석환
OB 베어스 / 투수
이순철
해태 타이거즈 / 내야수
김건우
MBC 청룡 / 투수
이정훈
빙그레 이글스 / 외야수
1988 1989 1990 1991 1992
이용철
MBC 청룡 / 투수
박정현
태평양 돌핀스 / 투수
김동수
LG 트윈스 / 포수
조규제
쌍방울 레이더스 / 투수
염종석
롯데 자이언츠 / 투수
1993 1994 1995 1996 1997
양준혁
삼성 라이온즈 / 내야수
류지현
LG 트윈스 / 내야수
이동수
삼성 라이온즈 / 내야수
박재홍
현대 유니콘스 / 외야수
이병규
LG 트윈스 / 외야수
1998 1999 2000 2001 2002
김수경
현대 유니콘스 / 투수
홍성흔
두산 베어스 / 포수
이승호
SK 와이번스 / 투수
김태균
한화 이글스 / 내야수
조용준
현대 유니콘스 / 투수
2003 2004 2005 2006 2007
이동학
현대 유니콘스 / 투수
오재영
현대 유니콘스 / 투수
오승환
삼성 라이온즈 / 투수
류현진
한화 이글스 / 투수
임태훈
두산 베어스 / 투수
2008 2009 2010 2011 2012
최형우
삼성 라이온즈 / 외야수
이용찬
두산 베어스 / 투수
양의지
두산 베어스 / 포수
배영섭
삼성 라이온즈 / 외야수
서건창
넥센 히어로즈 / 내야수
2013 2014 2015 2016 2017
이재학
NC 다이노스 / 투수
박민우
NC 다이노스 / 내야수
구자욱
삼성 라이온즈 / 내야수
신재영
넥센 히어로즈 / 투수
이정후
넥센 히어로즈 / 외야수
2018 2019 2020 2021 2022
강백호
kt wiz / 외야수
정우영
LG 트윈스 / 투수
소형준
kt wiz / 투수
이의리
KIA 타이거즈 / 투수
정철원
두산 베어스 / 투수
2023
문동주
한화 이글스 / 투수
}}}}}}}}}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2 KBO 리그 구원왕

{{{#fab93d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51번}}}
최만호
(1997~2001.7.24.)
조용준
(2002~2007)
팀 해체
{{{#fff [[우리 히어로즈|우리]]/[[서울 히어로즈|서울]]/[[넥센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51번}}}
팀 창단 조용준
(2008~2010)
장기영
(2011~2013)
}}} ||
A대표팀 참가 경력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fff>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svg 1999 야구선수권 대회
주성노호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fff><colcolor=#09539D> 투수 15 구대성 · 20 정민태 · 21 경헌호
28 주형광 · 29 문동환 · 35 진필중
39 임창용 · 51 조용준 · 55 정민철
포수 2 김동수 · 22 홍성흔 · 44 김상훈
내야수 5 김한수 · 6 류지현 · 14 신명철 · 16 박정태
18 김동주 · 36 이승엽 · 42 김민호
외야수 8 정수근 · 9 이병규 · 10 양준혁
33 박한이 · 62 박재홍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5''' 주성노
타격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2 최정우
투수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3 양상문
주루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4 신현석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fff>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svg 2002 아시안 게임
김인식호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fff><colcolor=#09539D> 투수 18 노장진 · 20 이승호 · 21 송진우
27 박명환 · 37 임창용 · 41 김진우
47 이상훈 · 51 조용준 · 55 정재복
포수 22 홍성흔 · 44 김상훈
내야수 1 장성호 · 3 박진만 · 5 김한수 · 10 김동주
14 김민재 · 16 김종국 · 36 이승엽
외야수 7 이종범 · 9 이병규
34 이영우 · 62 박재홍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1''' 김인식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0 김재박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90 김성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fff>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svg 2003 야구선수권 대회
김재박호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fff><colcolor=#09539D> 투수 11 조규제 · 17 조웅천 · 19 이강철
20 정민태 · 37 임창용 · 41 김진웅
47 이승호 · 51 조용준 · 55 김진우
포수 12 진갑용 · 44 조인성
내야수 1 장성호 · 3 박진만 · 5 정성훈 · 14 김민재
16 김종국 · 18 김동주 · 27 이승엽
외야수 7 이종범 · 33 박한이
35 이진영 · 62 박재홍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0''' 김재박
타격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90 김성한
투수·배터리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6 조범현
수비·주루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5 정진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 ||
파일:조라.jpg
조용준
趙容浚 | Cho Yong Jun
출생 1979년 3월 17일 ([age(1979-03-17)]세)
전라남도 여수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백초초등학교 ( 졸업)
여수중학교 ( 졸업)
순천효천고등학교 ( 졸업)
연세대학교 (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98 / 학사)
신체 175.6cm, 75kg[1]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8년 2차 5라운드 (전체 35번, 현대)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 (2002~2007)
우리- 서울- 넥센 히어로즈 (2008~2010)
지도자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7)
덕수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17)
해설위원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3~2015)
병역 예술체육요원
(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야구 부문)
종교 불교 천주교[2]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경력
3. 피칭 스타일4. 은퇴 후5. 여담6. 박명환야구TV 출연7. 연도별 성적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현대 유니콘스, 넥센 히어로즈의 야구 선수. 현대 유니콘스에서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고 슬라이더를 잘 던져서 '조라이더'라는 별명이 있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순천효천고등학교 시절에는 체구가 작고[3] 동기 강철민에 밀려 뚜렷한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4][5].

효천고를 졸업한 1998년 드래프트에서 2차 5순위로 현대 유니콘스에 지명되었으나[6]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1998학번-2002졸업)[7][8][9]에 진학. 대학에서 기량이 급성장하였다.

2.2. 프로 경력

파일:external/img.khan.co.kr/20100122001056_r.jpg
연세대를 졸업하고 2002년 계약금 5억 4000만원을 받고[10][11]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하여 허리 부상을 당한 위재영[12]을 대신해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원래는 위재영 대신 전년도 팀내 투수고과율 1위인 신철인[13]과 베라스라는 용병과 더블스토퍼 체제여서 7회부터 8회 2이닝만 던지고 9회에 마운드를 인계하는 역할이었지만 베라스가 불과 10경기도 안되어 박살이나고 신철인은 전년도 혹사로 추격조로 편입이 되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9회까지 던져 마무리 보직을 맡았다. 최종적으로 구원 포인트 1위[14]에 오르며 KIA 타이거즈 김진우를 제치고 신인왕을 거머쥐었다.[15]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는 대표로 뽑혀 금메달을 따고 병역 특례를 받았다. 이 해 기록은 60경기 출장에 109이닝 116탈삼진 1.90의 평균자책점과 28세이브 4홀드. 신인시절 세이브 영상 결과론적으로 이 때의 기용이 조용준의 야구인생을 망치게 된다. 아마 때부터 혹사당한 투수를 신중히 관리했어야 하는데 오자마자 불펜으로 마구잡이로 굴리는 바람에 나중에 크게 탈이 나게 된다.[16] 물론 현대는 막 입단한 조용준을 담금질 없이 1군에서 바로 기용할 정도로 신뢰하고 특급 유망주로서 대우를 했다. 하지만, 등판 간격이나 투구수 관리 등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

이후 2003년에는 약간의 소포모어 징크스인지 잠시 주춤했으나[17] 이듬 해에는 마치 페드로 마르티네즈을 연상시키는 서클 체인지업을 장착하여[18] 63경기 75이닝 10승 3패 34세이브 방어율 2.28의 좋은 성적을 기록, 다시 이전 모습을 되찾으며 팀의 4번째 우승에 공헌하였다. 특히 이 해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동안 무피홈런을 기록했다. 맞은 홈런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인상적.
파일:1594308237.gif
파일:1594547883.gif
현대 유니콘스의 V4를 확정짓는 조용준
삼성 라이온즈와의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에서는 빗발치는 폭우 속에서 승리를 지켜냈는데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역대 한국시리즈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 해 한국시리즈 성적은 7경기 12⅓이닝 2실점 비자책 3세이브 평균자책점 0. 한국시리즈 MVP도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아직도 조용준 하면 2004년 한국시리즈와 삼성 라이온즈 그리고 오승환 진필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무리한 투구폼[19]과 직구가 아닌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포크볼 위주로 피칭한 것, 어찌보면 대학시절 ~ 프로 데뷔 첫 시즌 시절은 그야말로 진필중이나 임창용을 보일 듯한 중무리 투수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이 때까지 있었던 혹사의 피로누적과 자기관리 실패까지 겹친 탓인지 2005년에는 부진했다.[20] 이 해에는 구원 등판만 하면 이상하게 불을 잘 질러 조라이터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다. 그래도 삼성 타자들에게만은 강했다. 아니, 통산 성적으로도 미키 캘러웨이 수준의 삼나쌩[21]이었다고... 그래서 당시의 삼성팬들은 선발투수로 미키 캘러웨이가 나오면 처음부터 안봤고[22], 다른 경기도 잘 보다가도 조용준이 올라오면 채널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나오기도 한다.[23] 오승환이 나올 때 타 팀 팬들의 속마음을 그대로 삼성팬들에게 투영시킨 선수가 조용준이었다.

2005년 부진의 원인은 어깨 부상이었고, 구단에서는 이미 감독부터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같은 말이나 하는 상황이 되자, 아예 조용준을 8월부터 전력에서 제외한다. 입단 직후부터 제대로 된 휴식 없이 던졌기 때문에 뒤늦게나마 9월에 수술 일정을 잡고, 2006년 전반기까지 재활을 하다가 2006년 후반기부터 복귀시켜 다시 마무리 투수로 기용하는 전략이었다. 다만, 조용준의 시즌 아웃 직전에 삼성 라이온즈와 대구 3연전이 있었는데 3연투를 하고 3세이브를 거두고 시즌 아웃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성적이 2004년 대비 떨어진 것이 눈에 보이나, 탈삼진은 풀시즌을 안 뛰었음에도 더 늘어났다. 게다가 세이브도 27세이브를 거두었기 때문에 풀시즌을 뛰었더라면 30세이브는 거뜬했을 것이다.

그 후 2006시즌부터는 아예 1군에서 빠지며 2년 동안 단 1경기도 등판하지 못한 채 2군에서 재활에 몰두하게 된다. 구단에서는 그의 자기관리 소홀을 우려하여 대선배인 정민태와 함께 수술시키고 재활 프로그램을 짜줬으나, 일설에 따르면 은퇴가 임박한 노익장 소리듣는 정민태보다도 재활 훈련에 소홀했다는 얘기가 있었다.[24][25] 그리고 수술을 받고 6개월 만인 2006년 3월부터 2군 경기에 투입한 것도 있다고 한다.[26] 당시 재활군에서 조용준의 구속은 140km을 찍었다. 결과적으로 조용준을 구단에서 계속해서 1군 복귀를 시키려다가 선수 본인이 계속해서 거부하자, 벌금을 부여받았고 억울해했다는 후문. 심지어 조용준이 받은 수술은 어깨 슬랩 수술로 회복도 어려운 수술이었다.

조용준은 전체적으로 자기 몸을 좀 소홀히 여겼다. 이미 대학교 1학년 때 어깨수술을 받았는데, 제대로 재활이 되지 않았고, 결국 프로 입단 후 다시 수술을 받으라는 진단이 나왔으나 그걸 무시하고 4년을 더 던진 것이었다.[27][28]

2007년 현대의 마지막 시즌에 그는 그 자리에 없었고 2008년에는 아예 연봉 미계약자로 남아 히어로즈[29]의 창단식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때문에 한동안 조용준의 거취에 대한 기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2008년 말에는 은퇴설, 잠적설 등 온갖 루머까지 나돌았다. 그런 와중에 히어로즈와의 연봉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뉴스만 나오다가 결국은 연봉 8천만원에 팀에 복귀한다.[30][31] 이후 2009년 8월 16일 마침내 1군에 모습을 드러냈고 9월 10일에는 무려 1,455일 만에 세이브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9:8로 이기고 있던 9회 1사 1루 상황에서 등판해 김태균에게 안타를 허용한 후 다음 타자 이도형에게 끝내기포를 얻어맞고 전대미문의 역전패의 마지막[32]을 장식하며 정민철의 은퇴식[33]을 더더욱 성대하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 경기는 조용준의 선수생활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34]

이후 김시진 감독이 2010년에는 마무리로 기용해 보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시즌 직전에 신종플루에 걸려 훈련이 힘들어진 데다가 어깨 통증까지 재발하면서 스프링캠프 도중 신철인과 함께 조기 귀국했다.[35] 마무리 보직은 경찰청에서 갓 제대한 손승락에게 넘어갔으며, 손승락은 그 해 세이브왕을 차지한다. 이후 2010년 시즌 내내 강진 2군에서 재활만 하다가 2010년 10월 8일 자로 신철인과 함께 구단에서 방출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6월부터 아예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향후 복귀가 어려워진 만큼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게 되었다. 신철인, 조용훈 둘 다 30대 초~중반으로 아직은 더 활약할 수 있던 나이였지만 아쉬운 부분.

다만 본인은 현역 연장의 의지를 보였고, 다른 팀에서라도 새출발 하겠다는 마음으로 자택 근처에서 개인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부상 후유증, 자기관리 문제 등이 겹치면서 2010년 이후 어떤 팀에도 둥지를 틀지 못했고, 끝내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당시 나이가 32세로 상당히 젊은 편이었는데, 이 무렵 동기라고 할 수 있던 선수들이 현역으로 많이 뛰었던 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쉽다.[36] 조용준 본인은 오랜 재활로 인해 야구에 대한 열정도 어느 정도 떨어진 상황이었고, 아예 야구계를 미련 없이 떠날 생각이었다고 한다.

통산 116세이브로, 제대로 마무리로 뛴 시즌이 불과 4시즌밖에 안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관리가 조금만 더 잘 됐다면 오승환[37]과 더불어 KBO를 대표하는 양대 마무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야만없. 그리고 조용준이 은퇴한 뒤, 그 오승환은 2016년 메이저리그에까지 진출했다 KBO에 복귀했고, 2023년 현재, KBO 통산 세이브 1위는 오승환이다.

3. 피칭 스타일

파일:조용준 투구폼.gif
투구폼. 팔을 휘두르면서 고개도 같이 꺾이는게 특징.[38] 이종범.][39]
"슬라이더는 조용준과 김수경이 가장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박경완 인터뷰[40]
기본적으로는 작은 체구를 가졌음에도 강력한 구위로 윽박지르는 파워 피쳐의 유형의 투수로, 최고 150km/h 초반의 포심과 140km/h를 상회하는 고속 슬라이더가 주무기였다. 특히 슬라이더는 역대 프로야구 최고의 슬라이더 순위를 매긴다면 항상 상위권에 위치할 정도의 마구였고, 오죽하면 선수 시절 별명이 조라이더였다.[41] 04년에는 서클체인지업을 장착하면서 재미를 보기도 했다.

공을 던지면서 고개가 꺾이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몸이(특히 상체, 어깨가) 극단적으로 나가는 형태의 투구폼을 갖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서 최대한 힘을 짜내기 위해 고안된 폼으로 여겨진다. 이런 투구폼인데 입단 당시부터 어깨부상을 안고 있었다. 거기에 훈련에 불성실하기로는 유명했는데도 구원왕에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할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역대급 재능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4. 은퇴 후

2011년에는 5월에 목동야구장에서 야구를 관람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2011년 6월 29일 간암에 걸렸다는 기사가 나와 팬들을 걱정하게 했다. 그나마 초기 수준이었다는 게 다행. 8월 23일 기사에 의하면 간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한다. 해당 기사 이때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입원 사실을 안 알렸는데 박승민 등 지인이 수소문해서 병원을 찾아왔다고 한다.

2013년부터 엠스플에서 박재홍과 해설을 맡기 시작했다. 해설 첫 데뷔전은 시범경기 삼성 라이온즈 vs. LG 트윈스 경기. 차분하면서도 조곤조곤한 말솜씨를 보였으며, 목소리가 좀 지루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42]

다만 메이저 리그 해설에서는 지식이 부족해서인지 평이 좋지 않았다. 팬들은 제발 웬만하면 한국프로야구 해설만 하라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2014년에는 메이저 리그 해설만 했다. 그것도 새벽 경기만.[43] 2015년도 다를 것이 없어서 여전히 메이저리그 해설만 하고 있으며 국내 프로야구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만 출연했다. 나중에 밝히길 해설을 하면서 맞지 않는 분야와 비난에 스트레스가 많았던 듯 하다. 결국 2015년을 끝으로 해설위원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 해 연예인야구 자선 경기에 출장하기도 했다. 타자로 나와서 상대해야 했던 말년 최병장이 자신의 유행어를 응용해서 외쳤던 건 덤. 이런 젠장 바뀐 투수가 조용준이라니!!

2014년 9월 24일 네이버 해외야구 MLB SHOW 코너의 "빅리그의 슬라이더 - 구간2. 슬라이더의 이면 with 조용준 위원" 편에서 한 청자가 삼성에게 강했던 이유를 묻자 당시 던졌던 시속 140km 대의 공이 슬라이더가 아니라 써클 체인지업이었다고 답했다. 자세한 내용

2016년 RSB스크린야구 일산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일산센터 카페 최근 투구 영상(프로동네야구 유튜브)

2017년에는 강혁 감독의 부름을 받아 신일고 코치로 변신했다가, 몇 개월 뒤에는 어떤 이유인지 덕수고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강혁 감독이 물러나면서 같이 사임한 것으로 추정. 그리고 2018년부터 인천에서 유소년 야구 지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2019년 6월 26일.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해서 경기도 지역화폐 슬라이더 게임을 했다. 오상민-박명환-조용준이 슬라이더만으로 과녁을 맞추면 경기도 지역화폐로 이뤄진 빙고판에 하나씩[44] 붙여서 빙고가 되면 그 상품을 기부하는 게임이었는데 은퇴 이후에도 녹슬지 않는 슬라이더 구사력을 보여줬다.

5. 여담

  • 원래는 불자였으나, 후에 천주교 개종하였다. 어깨 수술 후 재활을 할 때 어깨에 성모 마리아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45]. 더는 어깨가 아프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로 새겼다고. 큰 수술을 한 사람들이 보기 흉한 수술자국을 가리기 위해 문신을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것도 겸해서 새겼을 것이다.
  • 삼성 라이온즈 팬들에게는 굉장한 악몽으로 남아있는 선수다. 타 팀 팬들이 느끼는 " 오승환" 등판의 체감을 삼성 팬이 궁금해 한다면, 그 때 야구를 봤던 사람 한정으로 2004년 조용준 등판한 느낌이라고 말해주면 아마 200% 공감할 것이다. 당시에 야구를 보지 않아서 모르는 경우라면 마무리 투수로 니퍼트가 나온다면 어떤 느낌[46]이겠냐? 고 되물어보면 바로 납득할 것이다. 2017년 현재 이 선수가 지도한 아기 사자 양창섭이 삼성에 왔다.[47]
  • 배우 안재모의 혼삿길을 열어준 사람이기도 한다.[48]
  • 아마추어 시절 같은 연세대 선수였던 이현곤과 함께 도핑 테스트를 거부하여 시드니 올림픽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한 전과가 있다.[49] 그러나 이 두 선수가 도핑을 거부한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당시는 도핑 자체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을 뿐더러 둘 다 정황상 약물을 안 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기 때문. 물 도핑이라는 게 약을 한다고 바로 야구 실력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약물과 함께 반복되는 고강도 훈련으로 근육 부하를 버텨주면서 벌크업이 되어 파워가 늘어나는 것인데 두 선수 모두 체격 벌크업이 없었고, 롱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둘은 연습을 많이 하는 성실한 선수 또한 아니었다. 이현곤은 당시 이때부터 간염을 앓고 있어서 자율 훈련을 하고 있었고, 간염 환자에게 약물 도핑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조용준의 경우 아마추어부터 프로까지 훈련 태도가 매우 불성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혹은 둘은 당시 연세대 동기이자 절친한 관계였는데 향간에는 둘이 도핑 테스트가 있는 줄 모르고 테스트 전날까지 신나게 노는 바람에 도핑 테스트 당일 거부했다는 루머가 있다.[50]]
  • 2002년 김진우와 한국프로야구 신인왕 경쟁을 하던 도중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김진우는 시원하게 말아먹은데 비해 조용준이 호투를 해서 둘의 희비가 갈린 것 같다고 밝혔다. 아시안게임에서 김진우가 부진하자, 대표팀 코치이자 원 소속팀 감독이었던 김성한이 "똑바로 던져 이 XX놈아."를 시전했다고.
  • 프로에 있으면서 선발로 등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51] 다만 연세대 시절에는 선발 투수로 활동하기도 했고, 대학 시절 출전한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항전에서는 한국 대표팀의 선발 투수로 출전했다. 국대 선발투수로 기용되었을 정도면 선발 투수로서의 능력은 충분했다는 이야기지만, 조용준이 마무리로만 기용되었던 건 작은 체구 및 어깨 수술 경력 등으로 인해 코칭스태프가 부상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KBO 데뷔전이후 연속이닝 무실점/무자책 기록을 갖고 있다.(무실점:18이닝/무자책:29 2/3이닝)
  • 2020년 현재 대졸 신인 투수들 중 유일하게 구원으로 입단 첫 해 부터 100이닝을 돌파한 선수이며, 고졸로는 임태훈이 마지막이다.[52]
  • 현역 막바지 시절 후배 문성현에게 자신의 슬라이더 그립을 전수했다고 한다.
  • 마구마구에서는 2002년 신인왕과 1점대의 방어율 및 마무리 100이닝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되어 레어밖에 없다가 엘리트 등급의 카드가 뒤늦게 추가되었다. 단지, 너무 짧은 전성기 때문에 레전드 카드 구현이 어려울 뿐. 현재 엘리트 카드는 2개다. 조용준의 최고 전성기라 불린 04년도 카드의 경우 레어, 엘리트 둘 다 속성으로 출시되었다. 04년도 한국시리즈의 폭우에서 보인 혈투 때문으로 보인다.
  • 꽤 젊은 나이에 은퇴한 게 한인지 의외로 영상 출연이 잦다.[53]
  • 은퇴 후에는 한동안 야구와 인연을 아예 끊고 살았다. 애초에 넥센에서 방출 통보를 받았을 때도 더 이상 야구에 미련을 갖지 말고 은퇴하자는 생각을 했고 곧바로 전화번호까지 바꿔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 조웅천, 조용훈과 현대 출신 조 씨 3인방 중 하나다. 이 중 조용훈과는 같은 시기에 뛰기도 했다.[54] 심지어 조용훈과는 이름도 비슷하고 등번호도 둘 다 50번대를 썼다 보니 오죽하면 조용준의 어머니가 조용훈이 등판한 경기를 TV중계로 보고 자기 아들이 등판한 줄 알고 헷갈릴 정도였다고 한다.
  • 한창 스타크래프트가 유행하던 2002년 말, 현대 대표로 프로야구 스타크래프트 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종족은 저그, 좋아하는 선수로는 이기석을 꼽았다고...
  • 데뷔를 앞둔 2001년 말에 중고로 그랜저 XG를 마련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연세대 동기인 김민우와 강철민이 엔터프라이즈를 샀다고 한다. 그러자 그 길로 혹해서 아버지의 지나가는 말을 듣고 쌍용차 대리점에 가서 바로 아이보리색 체어맨을 계약해서 끌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벤츠를 중고차로 샀다고[55] 밝혔다. 그래서 계약금 5억 4천 받고 바로 외제차를 뽑았다는 루머가 생겼다.
  • 동기인 서승화 강철민이 LG와 기아에서 계약금 각각 5억을 받자, 조용준에게 현대에서는 5억 1천을 제시했다. 조용준은 2번째 만남에서 6억을 제시했고, 결국 훈련을 앞 둔 3번째 만남에서 구단 측의 1군 캠프 동행 제안 및 특급 관리에 따라[56] 5억 2천부터 시작했고, 결국 계속 합의점을 찾다가 계약금 5억 4천만원에 연봉 2천만원으로 합의를 했다. 이 때 번 계약금으로 가계의 부채를 청산했다고.[57]
  • 등번호인 51번은 고등학교 - 대학교 - 프로에서 내내 달았다. 효천고 시절에는 61번을 달고 싶었는데, 강철민이 이미 자리를 비운 새에 61번을 차지했고, 결국 이치로를 보고 51번을 선택했다고 한다.
  • 한때 사고싶은 게 있으면 이것저것 사느라 신용카드를 마구 긁는 등 소비습관이 잘 들여진 편이 아니었다. 결혼한 후 아내가 조용준의 카드값을 보고 경악했고 끝내 체크카드로 갈아타게 되었다.

6. 박명환야구TV 출연

2020년 8월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하여 선수 생활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 2002년 신인 시절 계약금 5억 4000만원을 일시불로 달라고 요구했고[58] 그 계약금으로 바로 수입차를 구매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받은 계약금으로 아버지 빚을 갚았다고 한다. 채무를 갚은 뒤 부친은 조용준에게 "아들 고맙다" 라고 처음으로 말했다고 한다.
  • 신인 시절 룸메이트가 전준호, 신철인, 이상열 등으로 계속해서 바뀌었는데, 새벽 3시에 클럽에서 전화가 오면 이들을 같이 데려가서 클럽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조용준은 적당히 양주만 마시고 왔지만 정작 나머지 셋은 숙취로 드러누워서 벌금을 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 신인 시절 주전 포수였던 박경완과 배터리를 짤 때 조용준이 박경완이 낸 사인을 거부한 일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냥 편한대로 던지라면서 잘 달랬다고 한다. 조용준과 박경완 두 사람의 연차가 7년으로[59] 상당히 큰 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박경완이 이래저래 비범하게 보이는 부분. 다만, 장기영이 투수 시절 장광호의 사인을 거부하고 던졌던 적이 있었는데, 제법 잘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박경완이 장기영을 두들겨팼다고 한다.[60]
  • 은퇴 후인 2012년 12월 여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는데,[61] 결혼식은 조촐하게 했다. 은퇴 후 한동안 야구와 인연을 끊고 살았다 보니 야구계 지인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30명 정도만 초대했다고. 그런데 동갑내기인 박용택이 오고, 현대 시절 스승이던 김재박 감독도 어떻게 알고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아내는 친구의 아내의 동생이라고 한다. 의외로 조용준의 아내는 조용준의 활약을 본 적이 없다.
  • 다만 입단한 지 얼마 안 돼서 중고로 외제차를 샀다는 썰도 동시에 풀었는데, 바로 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직 신인이 계약금 외엔 외제차를 구입할 만한 돈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 외제차 값은 빚 갚고 남은 계약금이 맞고, 결론적으로 계약금을 일시불로 받았고 그 돈으로 수입차를 산 사실은 맞긴 하다. '바로' 산 게 아니었을 뿐. 바로 샀다는 얘기는 입단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이 외제차를 끌고 다니니 그 이야기가 어찌어찌 와전된 듯. 방송에서 "그랜저XG를 타다 벤츠 SLK 중고차를 샀다"고 설명했다.
  •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에서 박진만이 실책을 할 때는 의외로 무덤덤했다고.
  • 현대 유니콘스 시절 2군에 내려갔을 때 2군 선수단 회식에 참석한 썰을[62] 풀었다. 1군은 매일 소고기 회식을 하는 반면 2군은 소고기보다 싼 돼지갈비로 어쩌다 한 번씩 회식을 했는데 1군보다 2군의 선수 숫자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서인지 250만원으로 리미트를 걸어놓고 회식을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회식을 하다가 금액 한도를 넘겼다는 이유로 회식을 중단시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매니저에게 "스톱! 그런게 어딨어요? 오버된 금액은 제가 낼께요" 라고 하며 선수단은 회식을 계속할 수 있었다.
  • 선수협 현대 구단 대표였는데 현재의 선수협이 창단 당시 선수협의 취지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FA 제도 개선 등의 활동들이 1군 선수들에게는 좋지만, 2군 선수들의 복지개선을 위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했다.

7.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2 현대 64 109 9 5 28
(2위)
4 1.90 80 42 116
2003 47 53⅔ 2 7 26
(3위)
1 3.52 52 19 39
2004 63 75 10 3 34
(2위)
0 2.28 67 25 56
2005 49 52⅓ 2 1 27
(2위)
0 3.27 47 23 61
2006 1군 기록 없음
2007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8 우리 1군 기록 없음
2009 히어로즈 11 9 0 1 1 0 4.00 11 7 6
2010 넥센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5시즌)
234 299 23 17 116 5 2.59 257 116 278

8. 관련 문서



[1] 당시에는 176으로 반올림해서 말했다. [2] 언젠가부터 어깨 성모마리아 문신을 하고 난 이후로 개종하였다. 아마 2010년 넥센 2군 구장인 강진 베이스볼 구장에서 사진이 나왔다. [3] 프로필상 키는 176cm이지만 이보다 더 작다는 말이 있다. 본인은 175.6cm인데 반올림해서 176cm이라고 말했다. [4] 고등학교 시절 위계질서 문화(단체집합)와 코치들의 간섭으로 인한 자괴감에 야구를 그만두려 했는데 때 마침 선수 시절 자유 분방한 성격을 가진 부임한 장호연 감독과 면담 후 어깨가 좋다는 이유로 코치들의 일체 간섭을 받지 않는 약속과 함께 투수로 전환했다고 한다. 영상 링크 [5] 고2 때 연세대 입학을 확정지었다고 한다. 시작은 고려대학교 야구부와 연습경기를 했는데, 조용준의 공을 못 치자 고려대 감독의 눈에 먼저 들어왔고(2이닝 무실점에 4타자 연속 삼진), 이후 장호연 감독이 조용준의 이 활약상을 연세대 감독한테 얘기하여 연세대학교 야구부 감독 앞에서 라이브 피칭을 했는데 슬라이더를 미리 알려주고도 연세대 타자들이 공을 못 치자 그 다음날 계약을 했다고 한다. 어찌보면 장호연 감독이 본인 선수생활에 최고 은사라면 은사인셈. 영상 링크 [6] 당시는 드래프트 지명권이 영구 유지되었기 때문에 대학 진학을 선언했거나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고졸선수를 적당한 라운드에서 지명한 후 대학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조용준의 팀 후배였던 손승락 장원삼 역시 이러한 케이스로 고교시절 신인지명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으며 둘 다 대학에서 재능이 만개한 케이스이다. [7] 하필이면 왜 국어국문학과일지 궁금해할 수도 있는데, 지금은 체육특기자는 체육 관련 학과에 학적을 등록하지만 이 당시엔 체육 특기자는 어차피 수업은 안 들을거 아무 학과나 원하는 대로 넣어주는 아름다운(?) 관행이 있었다. 당연히 국어국문과 동문 취급은 안해준다...만 연세대 운동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연세대 자체의 동문취급은 받는다. 그런데 그걸 감안해도 국어국문학과는 특이하기는 했다. 당시 운동선수들은 원하는 과를 고를때 어느 정도 여학생들이 있으면서 수업을 안 나가도 학고를 안 맞기 쉬운, 그리고 프로에서 실패하거나 프로에 못 가도 취준을 하기 용이한(물론 IMF 이전 취준자 한정) 법학과, 경영학과 등을 선호했기 때문. 참고로 이건 지금까지도 체육 특기자가 원하는 과를 갈 수 있고, 운동부 출신이 오히려 취직에서 가산점을 받는 일본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다만 일본은 법이나 경영 말고 순수 인문사회 전공을 택하는 선수도 꽤 많다. [8] 은퇴 후 유튜브 박명환야구TV에서 썰을 풀었는데, 당시 일본프로야구를 동경해서 일본에 진출하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98년도는 일본에서는 선동열, 조성민, 이종범, 이상훈 등 한국 선수들이 NPB에서 활약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일본어를 배워둬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일어일문학과로 등록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연세대에 진학해보니 연대에 일어일문학과가 없어서 그냥 꿩 대신 닭이라고 비슷한(?) 어문계열인 국어국문으로 등록을 했다고. [9] 선수들이 거의 다 대학생활 중 강의를 등한시하여 딱히 배우는게 없지만, 예외적 케이스가 있는데 유민상이 있다. 부상 재활 중에 심심해서 강의도 들어가고 사이버 강의도 자주 들으면서 과제제출도 재미로 하나둘씩 해서 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재미붙이는 바람에 공부를 성실히 해서 A나 B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어릴 때 미국에 살아서 영어를 할 줄 알기에 영어가 많이 필요한 과제도 잘 냈다고 한다. 물론 운동부 선수가 과제에 성실한 것을 교수들이 매우 긍정적으로 본 부분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것도 안 하기도 하고, 그것만으로 A를 쉽게 주기는 힘들다. 어느 정도 유민상의 학업성취도가 있던 것. 유민상은 조용준처럼 연세대학교 출신이다. [10] 현대 유니콘스 투타 통틀어 신인 계약금 중 최다액. 2위가 그 박재홍(4억 3000만원). 당시 현대 구단이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용준에게 거액의 계약금을 준 것[63]은 그만큼 조용준에 대한 기대치가 컸다는 거다. [11] 이 때 고교 동기 강철민 역시 한양대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98아시안게임 멤버이기도 하다.) KIA 타이거즈에 입단해 비슷한 계약금(5억)을 받았다. 강철민이 먼저 KIA와 5억원에 계약했기 때문에 조용준이 더 높은 계약금을 부를 수 있었다. [12] 실제로 2000년~2001년 2시즌간 마무리를 뛰었다. 본인이 블론 세이브 할 때마다 너무 멘붕이 오고 머리도 아프고 고통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상까지 겹쳤기에 2002년부터 선발로 다시 되돌아갔다. [13] 2001년 96이닝을 던지며 13세이브를 올렸다. [14] 순수 세이브로는 두산의 진필중이 1위였다. 세이브는 31개 [15] 조용준은 대졸이고 김진우는 고졸이라 프리미엄이 있고 고졸 신인 첫 탈삼진왕을 거머쥔 김진우의 신인왕 수상이 유력했으나 김진우가 그 해 부산 아시안 게임 중국전의 2이닝 2실점,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 신인왕 수상에 실패했다. 이어서 조용준이 등판했다가 호투를 한 것도 가산점을 받은 원인이다. 김진우의 부진을 본 당시 국가대표팀 코치이자 소속팀 감독인 김성한은 이를 태업으로 의심하고 김진우에게 쌍욕을 했다고. [16] 역대 신인 중 단일시즌 구원 포인트가 가장 많은 건 조용준. [17] 전년도 이닝 수를 보면 혹사에 가깝다. 2002 시즌 당시 김시진 투수코치는 권준헌, 이상열, 신철인, 마일영, 송신영을 제외하면 던질 만한 투수가 없어서 마무리 투수인 조용준을 8회에 집어넣을 때가 많았다. 그나마도 신철인과 송신영은 4점대 자책점, 이상열도 평균자책점 3.93을 기록할 정도로 썩 좋지 않아서... 그냥 유니콘스 선수들 방어율이 처참했다. 1선발 김수경만 봐도 방어율이 5점대에 근접했고, 임선동은 말 그대로 하락세가 시작되었다. [18] 특히 좌타자에게는 거의 마구 수준이었다고 [19] 조용준은 우선 투수치고는 하드웨어가 작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관리했던 투수코치 김시진이나 고교시절 은사였던 장호연도 보자마자 선발투수로는 롱런은 힘들고 평범한 중간계투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 이를 극복하려고 투구폼을 굉장히 크고 역동적으로 가져갔는데, 그만 몸에 무리를 심하게 준 것. [20] 일반팬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용준의 자기관리 소홀은 노장진, 임선동, 김진웅, 프로 동기 고졸 김진우와 함께 야구계에서 꽤나 유명했다. 안 그래도 김진우랑 연관되어 있는 것부터가...데뷔년도도 2002년으로 같고 서로 신인왕 경쟁도 하였고 서로 방황하다가 복귀한 것까지 보면 참...[64] 김시진 감독에 의하면 급작스럽게 스타 플레이어가 되면서 자만에 빠졌던 게 문제라고 한다. [21] 현대에서 역대 삼성전 가장 강했던 투수들은 정명원[65], 정민태... [22] 3시즌 통산 선발로 나와 8승 무패 방어율 0 [23] 아마도 2004년 한국시리즈의 여파가 컸을 것이다. [24] 그 때문인지 정민태는 2006년 10월에서라도 복귀하지만(1경기 등판), 조용준은 2007년이 다 지나가도록 복귀하지 못한다. [25] 다만 정민태는 복귀에 너무 서두른 나머지 2007년 승리 없이 7패 평균자책점 12.81을 기록하며 완전히 먹튀가 되어버린다. 먼저 복귀한 정민태가 제대로 망하면서 이를 구단에서 반면교사로 삼으며 조용준이 비교적 수월하게 재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26] 저렇게 되면 이동현 이나 한기주 처럼 재활기간이 길어 질 수 있다. [27] 이미 프로 입단 전부터 현대에서 조용준의 저런 몸상태를 알고도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한 것이었다. [28] 프로 입단 후 수술 받으라는 소견이었던 부상은 바로 Slap. 즉 어깨관절와순 파열 부상이었다. 이 부상은 수술 후 재활에서 복귀한 케이스가 MLB까지 통틀어도 극히 드물다. 따라서 구단에서도 재활과 출전 병행을 권유했으며, 본인도 이에 응한 것이다. 근데 약속과 다르게 이닝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한 것은 구단의 실책이라고 봐야 한다. 먼저 문제는 마무리 투수를 용병에게 맡긴 것이 패착이라고 본다. 이후는 감독과 투수코치의 문제와 선수 본인의 문제. [29] 2019년 지금은 키움 히어로즈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우리담배에서 스폰서 공급을 하는 우리 히어로즈다. [30] 당시에도 히어로즈는 그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수두룩했는데 시즌 후 60%의 선수들이 타팀으로 떠나거나 새롭게 계약을 했다. 다만 그 동안 보류수당 문제가 꼬이면서 실제로 조용준이 수령한 금액은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에 가까웠다. [31] 조용준 본인은 당시 상황을 회고하면서 터무니 없는 수준의 삭감율(김동수와 전준호는 70% 이상 연봉이 삭감되어 1억 미만으로 재계약을 했다. 심지어 송지만과 김수경은 해체 후 재창단이었기 때문에 FA 계약도 사라졌다.)을 보고 선수협 현대 유니콘스 대표였던 본인의 입장에서는 도의적 책임 때문에 가장 먼저 계약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가장 늦게 계약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박노준 단장이 아예 언론플레이를 통해 조용준을 이런 식으로 밀고 갔다고. [32] 이날 서울 히어로즈는 9:0으로 리드하다가 막판에 무려 11점을 내주고 역전패했다. 당시 9점차 역전승 한국프로야구 기록이었다. 2013년 5월 8일 SK 와이번스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10점차를 뒤집는 승리를 거두면서 기록을 경신했다. [33] 이날 팬들과 정민철은 은퇴식 중에 눈물을 보였다. [34] 이 날은 같이 몸을 풀던 송신영이 올라가겠거니 싶었는데 투수코치가 조용준의 등판을 지시했다고. 이 날의 역전 쓰리런 홈런을 맞은 이후로 코칭스태프가 잔여시즌에 올리지 않았다. [35] 이때 야갤에서 김시진 감독 담배 타임이 더 늘어난다는 개드립이 있었다. [36] 과거 현대 시절 팀 선배인 송신영이나 박준수보다도 더 일찍 은퇴했다. 동갑내기 친구인 김수경이 좀 더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를 했었다가 번복한 것이 2013년. 김수경은 2014년 독립 야구단인 고양 원더스에서 새롭게 선수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결국 한계를 느끼고 완전 은퇴를 선택했다. [37] 조용준이 세운 최소경기 100세이브(197경기)를 돌파한(180경기) 유일한 선수 [38] 상대 타자는 [39] 영상은 신인상 특집 하이라이트였다. 공교롭게도 상대팀인 KIA의 김진우와 당해년도 신인왕 대결을 하여 조용준이 승리를 했다. [40] 박경완은 조용준과 1년간 현대에서 함께한 적이 있고, 김수경이 현대에 입단한 그해 트레이드로 현대에 와서 4년반 동안 같이 했다. [41] 조용준과 마찬가지로 프로야구 역대급 슬라이더를 구사했던 선배 투수 염종석의 별명에서 따왔다. [42] 여담으로 박재홍과 조용준은 현대 유니콘스 시절 2002년 한 시즌간 함께 팀 선수로 있었다. 또한 연세대학교 선후배지간이다. [43] 그래도 송진우, 염종석, 최원호, 진필중 등 이런 분들의 해설을 듣다 보면 저들에 비해 조용준 위원은 양반이다. [44] 슬라이더로 한가운데 맞추면 두개씩 [45] 과거에는 댓글달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사라지기전 어떤 네티즌들이 저걸보고 김시진 감독님 담배량 또 늘어났다 라고 개드립 치기도 했다. [46] 문제는 니퍼트가 포스트시즌에서 마무리로 등판하여 블론세이브를 적립한적이 있기에 두산팬들은 오히려 악몽으로 기억하고 있다. 문제의 블론세이브 경기날은 박병호에게 동점 3점홈런을 당한것. 연장전가서 결국 이겼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삼팬들이 그토록 원하던 니퍼트를 격침해 버렸다. 채태인 박한이의 활약이 컸다. [47] 현재는 팔꿈치 부상이 있는지 1군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재활 훈련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48] 드라마 야인시대의 청년기 김두한,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방원 역으로 유명한 그분. [49] 관련기사 [50] 도핑 거부에 대한 또 다른 의견으로는 국가대표는 예비 엔트리라 무조건 차출이 아니었고, 당시 연세대는 정기전과 연고전 등의 경기가 남아 있어 의도적으로 거부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2000년 연고전이 시드니 올림픽 야구 결승 이틀 후인 9월 29~30일에 걸쳐 치뤄졌기 때문에 신빙성은 있는 추측.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m=search&p=1&b=kbotown2&id=2771795&select=sct&query=%EC%A1%B0%EC%9A%A9%EC%A4%80+%EC%95%BD%EB%AC%BC&user=&reply=]|링크] [51] 그러니깐, 역대 신인상 기준 수상 선수들 중 선발 없이 순수 불펜으로 신인상을 받은 선수 중 하나였다. 이후에 등장하는 선수가 오승환 그리고 흑역사를 쓴 임태훈도 있었다. 대신 오승환은 선수생활 말년인 2023년에 이벤트로 딱 한번 선발투수를 하여(하지만 패전투수) 조용준과는 다른 커리어가 되었다. [52] 임태훈 역시 중간계투로만 나왔고 별개로 2007년 한국시리즈때 첫 데뷔 선발로 뛴 적은 있었다. 문제는 시리즈 내내 장렬하게 홈런 3방이나 쳐맞고 침몰했다. [53] 선수 소개에 있던 영상도 다시 찾아보기 힘든 영상이다. 유튜브의 주인이 계정 탈퇴를 하면서 채널이 폭파 되어 옛 영상 자료들을 볼 수 없다. [54] 같은 조 씨 투수에 우승멤버지만 조규제의 경우에는 이미지나 실제 활약이나 쌍방울 쪽이 훨씬 존재감이 강했기 때문에 현대 쪽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편이다. [55] 2001년 당시 팀 입단 동기인 김민우, 이대환과 전지훈련 중 대만에서 이 차를 보고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56] 심지어 시작을 1군에서 했다. [57] 조용준의 부친이 평소에 칭찬을 안 하던 사람인데, 빚을 다 청산하자 아들에게 칭찬을 했다고. 효자 노릇했는데 오히려 계약금 전부 차에 몰빵했다는 팬들에게 서운하다 한 것은 덤. [58] 보통 신인이나 FA등 계약금은 분기로 나눠서 준다. 7월과 12월. [59] 더군다나 대학 졸업 후 2002년에 프로에 데뷔한 조용준과 달리 박경완은 199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프로 무대로 직행했기 때문에 프로 입단 연도로 따지면 무려 11년이나 차이가 난다. [60] 다만 박경완의 구타가 잘 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장광호는 은퇴를 앞둔 36살의 베테랑 포수였고, 장기영은 그 전 해에 입단한 21살의 신인이었다. 15살이나 어린 신인 투수가 베테랑 포수의 사인을 거부하고 있으니, 그걸 지켜보던 박경완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61] 사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인 2012년 2월 이미 득남한 상태였다. 원래 2011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조용준이 간암 수술을 받는 바람에 1년 뒤로 미뤘다고 한다. [62] 후배 조용훈도 회식에 대한 썰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