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7-12 21:55:15

갑골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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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용례3. 발견사4. 해석5. 기타

1. 개요

갑골문자()는 기원전 1200년 즈음에 처음 등장한, 중국 대륙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체계적인' 문자이자, 한자의 직계조상인 문자이다. 거북이의 등껍질[A](甲)이나 동물의 뼈(骨)에 새겨졌기에[2] 갑골문(甲骨文)이라고 부른다.[3] 갑골에 군사적인 정벌이나 자연재해, 제례를 지내는 방식과 날짜를 신인 제(帝)에게 아뢰고 기록한, 상나라의 유일무이한 문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갑골문이 제(帝)에게 운명을 묻는 용도로 쓰인 것이 신탁(神託)하는 것에 착안하여 Oracle bone script(신탁 뼈 문자)라고 번역하였다.

2. 용례

고대 중국에는 거북이 껍데기에 열을 가하여 터진 금을 보고 치는 점술이 있었는데 귀복(龜卜)이라 부른다. 갑골문은 귀복을 친 결과를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한 문자이다. 물론 일반적인 사건을 기록한 갑골문도 존재하지만 흔하지 않다. 사기(史記) 귀책열전에는 "거북이 껍질을 태워 그 징조를 살폈는데 그 변화가 무궁무진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실제 고고학적 결과와 일치했다.

복사가 새겨진 갑골은 구성이 좌우대칭인데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점친 것이다. 예를 들어 비가 올지 안 올지 점친다고 해보자. 좌측에는 '모 일에 누가 묻습니다. 비가 오겠습니까?'라는 점을 치고, 우측에는 '모 일에 누가 묻습니다. 비가 오지 않겠습니까?'라는 점을 친다. 그리고 점의 결과가 맞은 쪽에 결과를 기록했다. 고고학적으로는 거북이 배딱지(복갑腹甲)나 등딱지(배갑背甲)[4]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뚫고 균열을 낸 모습이 특징적인데, 구멍을 뚫음은 가열했을 때 쉽게 균열되도록 한 조치이다.

갑골문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거북이 껍질과 짐승 뼈를 이용했다. 거북이는 주로 남방에서 공급되었는데 갑골문에도 남방에서 거북이를 몇 마리 바쳤다는 명문이 자주 발견된다. 짐승 뼈 중에서는 주로 소, 특히 어깨뼈(견갑골)을 주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사슴 뼈와 뿔, 호랑이의 뼈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사람의 뼈를 쓰기도 하였다.

갑골에 씌여진 글에는 왕이 직접 그 결과를 판단한 복사가 많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갑자일에 점을 쳤다. 왕이 그 결과를 보고 말했다. 사흘 뒤에 비가 내릴 것이다. 삼일 뒤에 비가 내렸다." 하는 형태로, 왕이 점복에 관여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주로 무정(武丁) 시기 기사가 많은데, 갑골문 해독 결과에 따르면 무정이 거느린 무당이 무려 70여 명이나 되었다.[5]

당시 상나라는 제(帝)라는 신을 상나라의 수호신이자 주신으로 섬기며 하늘과 자연의 뜻을 물었는데, 군사적인 주제로는 강(羌)족과 인방(人方), 주방(周方) 정벌 문제를 자주 제에게 뜻을 물었다. 특히 갑골문 기록상 주방과 갈등이 심각한데, 주방은 훗날 무력혁명으로 상나라를 전복한 그 주나라이다. 갑골문에 주방은 나라를 뜻하는 방(方)과 무리를 뜻하는 족(族)이 혼용되거나 의도적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상나라 사람이 주방에 악감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상나라 이후 천자국이 된 주나라 또한 갑골 문자를 사용했는데, 점을 칠 때 상(商)자를 옷 의(衣)자로 기록하였다. 주나라 사람들 또한 상나라를 비하한 듯하다. 衣의 발음은 '은'으로 추정된다. 또는 상나라의 수도 은(殷)[6]을 비하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라와 은나라는 대나무 가지나 거북이 껍질을 사용해 점을 쳤다. 점을 치고 나면 이를 모두 버렸다. 한번 점을 친 것은 보관해봐야 영험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나라에서는 점치는 직책인 복관(卜官)이 이를 소중히 여겨 보관했다.
사기 귀책열전

참고로 사기에 따르면 점을 치고 버렸다고 언급했으나, 고고학적으로 갑골문은 층층이 아래서부터 겹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상나라 사람들이 특정한 장소에 따로 보관했다는 증거이다. 갑골문을 소홀히 여겼다면 따로 발견되어야 하므로 현 학계에서는 귀책열전의 내용이 오류라고 본다.[7] 한 장소에 모아서 버렸다고 할 수도 있지 않나?[8] 성산패총?

3. 발견사

주로 중국의 은허(殷墟) 지역에서 파편 형태로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명나라 말기에 은허 지역은 농촌이었다. 종종 밭을 개간하던 농민들의 의해 상나라의 유물인 청동 기물이나 갑골문으로 추정되는 거북이 껍질이 발견되었는데, 청동기는 시장에 매물로 팔렸으나 갑골문은 뼈라서 귀해 보이지 않아 매물 신세를 면한 것으로 추정된다. 갑골문들은 한데 모아서 한군데에 묻었다고 전한다.

청나라 광서제 말년에 중국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小屯村)의 농민들이 밭을 갈다가 갑골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식이 부족한 농민들은 갑골문을 고대 문자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문양이 새겨진 뼈라고 여겼다. 뼈는 농사에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었기에 농민들은 갑골문을 한약방에 팔아버렸다. 이렇게 갑골문은 용골이라는 약재로 취급받았다.[9]

일종의 문화재 수난사였다. 그저 무지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수천 년 전 고대의 역사에 대한 귀중한 기록들이 사람 뱃속으로 헛되이 낭비되어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890년대 무렵, 금석학자 유악과 왕의영(王懿榮)이 용골에 새겨진 문양이 고대문자임을 알아내어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었다.

청나라 시절에는 문자의 옥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고증학이 발달했는데, 고증학에서 중시하는 분야 중에 한자 자체를 연구하는 소학[10]이 있었다. 왕의영 자신도 금석학자로 상당한 소양을 갖춘 인물이라 옛 한자 지식이 해박하였다. 왕의영이 학질에 걸려 달인당(達仁堂)이라는 한약방에서 약재로 구입했던 용골에 적혀 있는 문자가 자신이 연구하던 금문 이전의 문자임을 직감하고 용골을 구입했던 약방에 문의하여 앞으로 같은 용골이 있으면 자신이 고가로 매입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899년 한 약재상 혹은 골동상이 대량의 갑골문이 적힌 갑골편을 가지고 와서 바로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11] 왕의영 사후 그가 남긴 갑골 조각들을 같은 금석학자이며 그의 식객이자 친우였던 유악(劉鶚)이 물려받아 연구하여 철운장귀(鐵雲藏龜)[12]라는 책으로 출판함으로써 갑골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하남성 안양 소둔촌이 갑골의 발굴지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발굴 결과 상나라 수도의 옛터(은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은허 발굴 당시 거북이 껍질에 새겨진 갑골문이 층층이 겹쳐 있었는데, 왕국유를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상나라 궁실에서 점복 결과 기록물을 보관하던 건물 터라는 결론을 내렸다. 갑골문이 어느 정도 해독이 되자 학자들은 사마천 사기의 내용에 주목하였다. 청나라 시대 고증학에서는 오제본기-은본기의 상당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학설이 있었는데, 갑골문을 연구할수록 갑골문에서 등장하는 상나라 왕의 묘호와 사기의 왕의 묘호의 순서가 대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오히려 사기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고 입증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상나라는 학계에서 고대국가로 인정받게 된다.

청나라 말기에 한 프랑스 학자가 갑골문으로 은나라 역사를 재구성하기도 했는데, 갑골문이 발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생소한 학문은 해외는 물론 중국 본토에서조차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후 청나라가 민국으로 교체된 뒤 각지에서 군벌들간의 전쟁으로 치안이 혼란했을 시기에도 은허에서는 갑골문 발굴과 해독은 계속되었다. 민국 말기에는 둥쭤빈(董作賓)이 갑골문 연구를 주도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초반에는 궈모뤄(郭沫若)가 주도했다.[13]

4. 해석

현재까지 갑골문이 새겨진 조각을 대략 1만 편 이상 발굴했다. 그러나 학계에서 대다수가 동의하는 해독된 갑골문은 겨우 1천여 자에 불과하고, 해독하지 못한 글자가 거의 5천 자에 달한다. 이 정도밖에 못 알아냈다면 갑골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의문이 가겠지만, 해독되지 않은 글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고유명사이거나 딱 한 번만 나오는 글자들이라서 해독에 큰 어려움은 없다. 갑골문은 한자의 원형이라고 하지만, 현재 한자의 자형은 남북조시대( 420년 혹은 439년~ 589년)에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갑골문과의 자형이나 모양이 현 한자와 많이 다르다. 새벽 조()[14] 나 아침 단(), 비 우(), 어조사 우()와 같이 무척 단순한 자형은 현대 한자와 거의 일치하여 학계에 이견이 없지만, 그 외에는 갑골문이 사람이나 동물, 어떤 손짓, 어떤 형상을 그대로 그려낸 영락없는 상형문자라 학자에 따라 이견이 많다.

갑골문은 한자의 원형이지만 당대에만 그친 자형이 있다. 또 현대 한자와 자형이 얼추 일치한다고 한들 갑골문의 배경은 기록이 아닌 제례적인 목적이 강하기 때문에 또다른 고고학적 해석문제가 있다. 문장 해석에서 갑골문은 즉흥적으로 제 순서가 없이, 그것도 문법은 엉망으로, 배열이 흐트러진 채로 기록되었다. 또 기록자가 이전까지 통용되던 자형을 조합하여 단 1회용 문자를 창조하는 경우도 있어 학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몰론 갑골문 학계에는 해독에서 단비와 같은 문자가 존재한다. 금문(金文)이다. 금문은 주나라의 상형문자다. 고고학적으로 주나라의 유적지에서 갑골문 파편이 출토되었고, 금문의 형태가 갑골문과 거의 일치하여 한자적 연관성과 뜻을 유추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금문만 완전히 믿을 수도 없다. 현재 한자로 이어지는 독창적인 한자, 예를 들면 사랑 애(愛), 알 지(知), 땅 지(地)와 같이 갑골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주나라만의 독창적인 문자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금문은 갑골문과 한자와의 연관성을 연구하는데 중간 다리 역할을 하지만, 또다른 난관이 존재하는 것이다.

갑골문의 자형은 주로 오른손 우(又), 나무 목(木), 눈 목(目), 갈 지(之), 계집 녀(女), 집 면(宀) 등으로 일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형태를 그렸다. 제례와 관련되는 문자는 무당으로 추정되는 계집 녀(女)가 많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어려울 간(艱)에는 갑골문 자형으로는 여성이 북을 두드리는 모습이었으나 나중에는 여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갑골문 해석 쪽에 관심 있는 사람이 참고하면 좋은 링크. 국내 포탈 지식인 격 중국어 사이트이다. 1, 2.

5. 기타

왕의 이름을 단 한 글자로 겹쳐서 기록하기가 유행했었다. 둥쭤빈은 갑골문의 서체를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알고보면 매우 잔인한 모습의 글자가 많이 있다. 인신공양을 심심하면 바쳤던 시대를 반증한 탓인지, 붉을 적(赤)자는 본래 불 위에 사람이 올라가 있는 모양, 즉 사람을 태워 죽이는 모습을 본땄고, 토끼 묘(卯)는 본래 토끼가 아니라 사람을 반갈죽하는 것을 묘사한(...) 글자이며, 백성 민(民)자는 눈에 칼을 꽂은(!)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상나라 때는 인신공양을 바칠때 노예의 눈을 멀게한 다음 시행했는데 이를 의미한다. 버릴 기(棄)자는 아이를 광주리 혹은 구멍에 버리는 모습을 딴 글자에서 비롯되었다. 아래는 그 예시.
파일:赤_字源.png
파일:백성 민 자형 변천.jpg
버릴 기 자의 갑골문자. 두번째 사진이 버릴 기 자이다.
갑골문자에서 각각 한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유심히 보자.

미국의 IT 기업 오라클을 중국에서는 의역해서 갑골문이라 부른다.(...) 로고도 갑골문의 서체를 모방했다.

중국 정부가 2020년 들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관련 정보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자, 중국 네티즌들이 갑골문자를 사용해 정보를 유통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 서로 알아보긴 하나


[A] 사실 배껍질이라고 한다. [2]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은 시대라(기원후 105년경 탄생) 이것들을 기록용으로 쓴 것이다. [3] 다만 갑골에만 기록한 것은 아니며 다른 곳에도 기록했다. [4] 등딱지는 단단해서 글을 새기기 어려울뿐더러 표면이 울툴불퉁하여 잘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예 안 쓰인 것은 아닌데, 다만 복갑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드문 경우였다. [5] 무정 사후 조갑(祖甲)이 즉위할 때부터 제는 그저 왕의 묘호로 전략해버렸고 당연히 제에게 뜻을 묻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6] 상나라의 마지막 국호는 사실 은(殷)이 아니라 천읍상(天邑商)이고, 은(殷)은 도시 이름이다. 상나라는 수도를 중심으로 같은 성의 제후를 봉하였다. 같은 성의 제후에게 읍(邑)을 하사하여 군사적으로는 수도를 보호하고, 주변 이민족을 감시하였는데, 당시 받을 수(受)와 받들 봉(奉)자의 갑골문 자형으로 추정해보면 제후에게 기념수나 정교한 배를 하사한 모양이다. [7] 사실 귀책열전은 사마천의 원본이 사라져 저소손이 보충했으나, 내용이 난잡하고 가독성이 떨어지기로 유명하다. [8] 명 말기의 농민들이 갑골문을 발견하곤 한데 모아다 묻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흩어져있던 갑골문을 명나라 농민들이 모아서 버려놓은 흔적일수도 있다. [9] 다만 문자가 적힌 은나라 시대 갑골만 용골로 취급받은 것이 아니고 땅에서 나오는 오래된 뼈나 화석들을 모두 용골이라고 불렀다. 칼에 베인 상처에 가루를 만들어 뿌리거나 학질에 달여먹으면 효험이 있다고 여겼지만 귀한 약재는 아니었고, 원산지에서는 한 근당 동전 몇 푼 정도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탄산칼슘이므로 지혈효과는 있었겠지만, 닭뼈를 갈아 먹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다. [10] 小學: 조선시대 아동 윤리교습서적 소학이 아니라, 한자 자체를 연구하는 한자학을 말한다. [11] 다만 이 에피소드는 1931년 한 신문에 석옹(汐翁)이라는 필명으로 쓴 갑골문이라는 글에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계속 인용되면서 사실로 굳혀진 것으로 이 일화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는 모양. 왕의영은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서태후와 광서제가 몽진하고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몸을 던져 사망했기에 지금 와선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12] 철운(鐵雲)은 유악의 자(字)이다. [13] 참고로 둥쭤빈은 갑골문으로 재구성한 상나라의 달력인 은역보(殷歷譜)를 집필하였는데, 이게 학계에서 지나치게 난해해 문제가 있다고 평가받긴 해도, 갑골문 학계에선 위상이 있다 보니 상나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덴 거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그렇기에 은역보를 통해 갑골문을 접했던 한국의 김경일 교수는 은역보의 단점을 거론하면서도 이 책이 학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하지 않았다. [14] 아침 조라 해도 맞긴 맞는다. 풀 사이로(艸) 해와(日) 달이(月) 동시에 떠 있는 시간을 가리키기에 새벽이라 해도 맞기는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