Танк Т-34-85 | ||||
파생형 | 실전 | 운용국 | 미디어 | 모형 |
1. 개요2.
대전기3.
냉전
3.1.
6.25 전쟁
4. 현대전3.1.1.
폭풍 작전3.1.2. 서울 함락3.1.3.
춘천-홍천 전투3.1.4.
대전 전투3.1.5.
낙동강 전선3.1.6.
인천 상륙 작전3.1.7.
9.28 서울 수복3.1.8.
폭찹힐 전투
3.2.
1953년 동독 봉기3.3.
헝가리 혁명3.4.
피그만 침공3.5.
중동전쟁3.6.
프라하의 봄3.7. 1974년 키프로스 쿠데타3.8.
키프로스 전쟁3.9.
레바논 내전3.10.
베트남 전쟁3.11. 로디지아-부시 전쟁3.12. 예레반 동물원 코끼리 탈출 사건3.13.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3.14.
베트남-캄보디아 전쟁3.15.
중국-베트남 전쟁3.16.
앙골라 내전3.17.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3.18.
오가덴 전쟁3.19.
우간다-탄자니아 전쟁3.20.
루마니아 혁명1. 개요
T-34-85 및 하위 파생형들의 실전 일람 문서.해당 전차는 파생형을 모두 포함하여 도합 48,950량이 제작되었고, 세계 각지로 팔려 나갔기에 약 80여년간 20여개 이상의 분쟁에 참전한 경력이 존재한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도 1량이 등장하여 주목을 받기도 하였으며, 명불허전 불멸의 전차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중이다.
2. 대전기
2.1. 제2차 세계 대전
2.1.1. 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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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육군 소속 T-34-85 네임드 차량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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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육군 소속 T-34-85 네임드 차량 "아르메니아의 혈세로 만들어진"[2] |
그렇지만 별다른 활약은 보이지 않아 이듬해까지 소량만 생산하고 있었는데, 상술했듯 날이 갈수록 판터와 티거의 수량이 증가하며 화력의 증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한 소련 군부에서 포탑과 포를 재설계하고 전차장석을 증설해 포수와 전차장을 나눈 양산형을 만들어 생산했다.
개발사에서 상술했듯 소련군에게 고화력의 주력 전차가 생겼다는 일은 그야말로 호재 중의 호재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T-34-85가 대량으로 투입되었다는 사실은 티거나 판터 입장에서는 절대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76mm 탑재형 T-34 상대로는 정면에서는 중단거리에서도 견딜 수 있는 티거와 판터였지만 T-34-85가 출현하면서 티거는 500 m~600 m 정도의 중단거리에서는 정면장갑이 관통당할 수도 있는 위험에 처했고, 판터는 정면은 80 mm 경사장갑이라 실제는 140 mm의 수직장갑 수준의 방어력을 가져서 정면은 안전하다 해도 약점인 측면과 포방패는 더 쉽게 관통당할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판터와 티거를 정면에서 관통 가능하며, 이전과 다르게 좀 더 넓어진 T-34-85는 만주, 유럽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하며 마치 좀비와 같이 한대가 격파 당하면 그 다음에는 2대, 그 다음에는 4대, 그 다음에는 8대가 나타나며 독일군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만들었다.
개별적으로야 훨씬 우세한 티거와 판터였지만, 생산물량이 독일군보다 크게 우세한 소련군의 입장에서는 예전의 76mm 탑재형의 숫자만큼 85mm 탑재형 T-34-85를 엄청난 물량으로 밀고올 것인데 중단거리에서 위험에 안 노출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독일군 지휘관들과 전차장들이 제일 먼저 알아챘다. 거기에 더해 티거와 판터는 전력 손실이나 보충에 불리했다. 이런 문제들이 IS-2의 존재와 같이 티거2를 개발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주력 전차였던 4호 전차 입장에서는 사형선고나 같았다. 이미 T-34/76과의 싸움에서도 물량차이 때문에 우세를 점하기 어려워하고 있었는데, 7,5cm KwK 40 48구경장보다 우위에 있는 85 mm를 가진 전차가 오로지 숫자로 밀고 나왔으니, 물량에 지쳐서 우세를 점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44년부터는 4호 전차도 소모전에 휘말려 들어가서, 나중에서는 포탑 회전 모터 제거를 비롯한 염가형 버전인 4호 전차 J형이 등장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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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 제25기갑사단 9기갑연대 소속 노획 T-34-85 "125번차"[3] |
2.1.1.1.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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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당시 오데사 인근에서 진격하는 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소속 T-34-85 |
2.1.1.2. 우만-보토샤니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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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만-보토샤니 공세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34-85 (D-5T) |
2.1.1.3. 바그라티온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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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강을 도하해 진격하는 소련 육군 소속 T-34-85 "200번차"[4] |
2.1.1.4. 오글레두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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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레두프 전투 직후의 알렉산드르 오스킨 지휘 차량 및 휘하 전차병들 |
2.1.1.5. 베오그라드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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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그라드 공세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34-85 |
2.1.1.6. 동프로이센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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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스베르크 공방전 당시 격파된 T-34-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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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슬라우 공방전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34-85와 소련 공군 소속 Il-2, 1945년 3월 |
2.1.1.7. 드레스덴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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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공세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34-85 (D-5T) "210번차" |
2.1.1.8. 베를린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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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공방전 당시의 체코슬로바키아 육군 기갑사단 소속 T-34-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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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소련 육군 제11전차군단 제36전차여단 소속 T-34-85 "250번차" |
이 시기,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상당히 감소한 대신, 판처파우스트 등의 보병용 대전차화기의 위협이 증가하였는데 이로인해 사진처럼 철망을 가져다가 4호 전차의 쉬르첸처럼 증가장갑을 부착하고 운용한 사례도 많았으며[5], 슬랫아머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이후 승전 기념식에 참전하여 서방 세계에 그 위용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서방 세계 측에서 T-34-85에 대하여 위협적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1.1.9. 오스트리아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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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리젠의 소련 육군 제9근위전차여단 소속 T-34-85와 M4A2 (76) W[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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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린츠에서 미 육군 제9보병사단과 합류한 소련 육군 소속 T-34-85 "924번차" |
2.1.1.10. 모라비아-오스트라바 공세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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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비아-오스트라바 공세 작전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T-34-85 |
2.1.2. 계속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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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전쟁 당시 살로-리사깔라의 핀란드 방위군 소속 T-34-85[7] |
2.1.3. 라플란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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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핀란타 전투 후의 핀란드 방위군 소속 T-34-85 |
2.1.4. 소련-일본 전쟁
2.1.4.1. 만주 전략 공세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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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싱안링 산맥에서의 소련 극동군 소속 T-34-85 "561번차"[8] |
만주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라 은신도 불가능하며, 넓은 들판에서 서로 대규모 전차전을 벌이는 형태였는데, 일본군의 신포탑 치하의 47mm 1식 전차포로는 정면에서 뚫을 수 조차 없었으며, 측면을 노리려고 해도 상술했듯 뻥 뚫린 전장에서 우회를 한다는 행동 자체가 자살 행위에 가까운데다, 설령 맞췄다고 해도 도탄되거나 포탄의 품질이 좋지 않아 아예 탄이 깨져버리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할힌골 전투 당시의 소련군이 아니라 지옥 같던 독일과의 전투를 겪어 최정예가 되어버린 소련의 기갑부대였다.
결국 관동군들은 탈영하거나, 항복을 지속했고, 일부 부대는 저항하였지만 결국 무의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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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극동군 소속 T-34-85 "522번차"[9] |
2.1.5.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T-34-85 에이스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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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보흐코프스키
1923년 6월 28일생. T-34-85 전차장들 중 제일 많은 총합 36대의 적 전차를 격파한 슈퍼 에이스다. 이후 1999년 5월 7일에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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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오스킨
14대 격파. 그 중 티거 2 3량을 격파한 슈퍼 에이스.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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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 라자레비치 레겐
1925년 6월 4일생. 중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유대인이다. 총 12대의 전차 격파.
아버지 라자렛 모이셰비치 레겐은 구급대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간호사인 의업에 종사하던 가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3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12살에 이온은 대장간에서 일하는 등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1941년 군사 학교를 졸업하고 중위 계급을 받았으며,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에 T-34-85를 타고 참전했다.
제2근위전차여단 소속으로 활약하는 동안 총 12대의 전차를 격파했으며, 이 중에는 1대의
6호 전차 티거와 8대의
5호 전차 판터, 그리고
페르디난트 대전차자주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부상을 입고 제대했으며,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후보로 2번이나 지명되었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반려당했다고 한다.
전시에 부상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의무병들을 보고 깊게 감명을 받은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 1951년에 의사학위를 받은 이후 1959년에는 키예프 대학병원에서 정형외과의로 근무, 이후 1977년 이스라엘로 이주한 후 1997년까지 정형외과 의사로 활약했다.
대한민국에선 크게 알려져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 내에서는 정말로 유명한 의사로, 말년에는 시인으로도 유명해졌다. 2017년 4월 28일 9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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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마르코프
1923년 2월 16일 노보시비르스크 출생. 1943년 9월 1일 브랸스크 작전을 시작으로 활약했다.
1944년 7월 14일, 제61근위전차여단은 공세를 위한 전투 명령을 받았다. 르포프-산도미에르츠 작전이 시작되고. 마르코프 대대의 공격으로 올샤니트샤 전투에서 독일군은 7대의 탱크, 4문의 대전차포 및 2문의 대공포을 손실했으며, 사흘 뒤인 7월 17일에는 마을 근처의 전투에서 탱크와 승무원을 구했다. 피격당해 멈춰 있는[10]전차를 알아차린 그는 그쪽으로 빠르게 달려가서는 견인하여 아군 전차를 구출했다.
1945년 1월 비스툴라-오데르 작전 에서 독일군의 방어선이 돌파되는 동안 마르코프 대대는 독일군의 반격을 저지하는 데 참여했다. 1차 전투 결과, 독일군의 전차들 중 17대 중 13대가 완전 격파되었다.
마르코프는 1945년, 베를린 전투에서 자신의 대대를 이끌고 임무를 완수하고 부대의 성공적인 공세를 보장했다. 4월 15일 그의 대대는 여단 중 최선봉에 서서 나이세 강을 건넜다. 4월 21일 스탄겐하겐 전투 에서 마르코프의 대대는 독일군 보병연대가 지키고 있던 비행장을 공격했다. 그 와중에 노획한
판처파우스트 2대를 이용하여 비행장을 파괴했고, 대대장은 두 대의 적 항공기에 불을 지른 다음 격납고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비행장과 도시의 인접 지역을 비추어 흩어져 있던 퇴각 중인 독일군들에 대한 집중 사격을 가능토록 하였다.
포츠담 전투에 참여한 그는 4대의 탱크, 장갑차, 많은 적군과 장교를 사살했다. 1945년 5월 1일 비엘리츠 시에서 마르코프의 대대는 서쪽으로 후퇴하는 독일 부대의 타격을 받는 바람에 많은 차량을 손실했고, 결국 대대에는 단 하나의 T-34-85 만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으며, 탱크의 포탄이 떨어지면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조종수는 보병을 들이 받아 깔아뭉게는 등의 발악을 시전했고, 결국 서쪽으로 돌파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고 확신한 독일군은 항복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여단의 전차병들은 전차 5대, 장갑차 5대, 차량 34대, 박격포 3대, 포 3문을 파괴하였고, 약 1800명을 사살하고 1000명 이상의 군인과 장교를 생포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프라하에서 승전을 맞았다.
상기의 대활약에 의해 1945년 6월 27일, 소련 최고위층은 명령의 바람직한 이행과 나치의 침략과 전쟁에 표시 용기와 영웅주의를 사유로 그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와
레닌훈장과 금성훈장을 수여하였다.
종전 후에도 계속 군에 종군하던 그는 1955년, 조지아 트빌리시 시에서 불의의 사고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이름은 크라스노다르에 새겨져 있으며, 그의 고향인 노보시비르스크 시에는 아예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존재하는 등,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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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미하일로비치 카슈니코프
1915년 12월 27일 출생. 1942년에 종군하여 1945년에 T-34-85 "조국"을 탑승하고 총 18대의 차량을 격파. 독일군 보병중대 2개를 격퇴하였으나 1945년 4월 29일 전사하였다. 그가 탑승했던 차량은 현재 사라토프시에 전시되고 있으며, 그 아래 명판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3. 냉전
대전 직후에는 6.25 전쟁 당시 북한에게 공급되며 북한군의 운영 미숙으로 인한 전쟁 후반부의 추태로 명성에 흠집이 갔지만, 약 60~70년대까지도 85mm 포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던 수준이었기에 서방 세계의 악몽 중 하나가 "우크라이나를 넘어 T-55와 함께 끝도 없이 까마득하게 밀려오는 T-34-85들"이었다.소련은 T-34-85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종전 후 얼마 안 되어 T-55가 등장하며 중형전차에서 경전차로 재편성한 뒤에 1958년까지 1선 장비로 사용했다. 이후 60년대에 치장 장비로 전환되었으며, 소련이 해체된 지금도 퍼레이드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정도.
1950년대~60년대 소련은 공산국가끼리의 친목과 단합을 유도하려 체코와 유고에 위탁생산을 맡겨 친밀한 관계의 국가들에게 저렴한 값으로 뿌리고 다녔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 국가들 중엔 후에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공산정권이 붕괴되며 소련에게 포를 들이미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비슷한 예로는 AK-47나, RPG-7 등이 있다.
3.1.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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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청 앞의 조선인민군 육군 제105땅크사단 소속 T-34-85 "215번차"[11] |
T-34-85는 북한군에게 개전 전까지 242대(1947~1949)가 공여되었다는 것이 소련 문서로 확인되고 있다. 1950년엔 0대, 1951년엔 25대, 1952년엔 47대, 1953년엔 0대, 1954년엔 30, 1955년엔 90, 1956년엔 88대, 1957년도엔 몇대... 이렇게 1959년까지 총합 312대를 지원받았다.(1955년도부터 소련은 북한에게 T-34를 무료 공여하지 않고 유상 판매를 시작했다.) 다만 북한군은 T-34-76도 사용했는데, 소련 문서엔 T-34-76, T-34-85 이렇게 세분화하지 않아 몇년도에 소련이 북한에게 76mm 주포 장착형 T-34를 줬는지는 알 수 없다.
소련의 군정이 시작되고 소련은 미국과는 달리 북한군의 전력을 강화시키는 데 상당히 투자했고 기갑전력 또한 강화시켰다. 208전차 훈련연대를 창설해 전차병들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과 더불어 T-34-85 전차와 SU-76M 자주포를 견학시키며 전차 운용법을 가르친다. 1948년 소련은 미군정을 철수시키기 위해 소련군을 철수시키고 북한에 잔류하던 10전차사단 또한 철수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기갑세력의 확대개편을 위해서 한인 2세인 표들 중좌와 300명의 전차병을 군사고문단으로 남겨두고 242대의 T-34-85 전차를 인계했다. 208전차 훈련연대가 10월말 수료했고 최초 208전차 훈련연대의 인원을 주측으로 15전차연대를 창설했다.
15전차연대는 최초 10대의 T-34-85를 인계받고 표들 중좌 연대가 철수하면서 T-34-85 전차 60대와 SU-76M자주포 30대, 모터사이클 60대를 인계받은 뒤 기갑전력을 강화시켰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은 2개 전차사단을 편성하기 위해 소련에 T-34 전차 500대 분량의 판매를 요청했다. 이때 T-34 전차를 구매할 대금으로 철광석과 금괴, 은을 비롯한 각종 광물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500대의 T-34 전차는 2개 전차사단을 편성할 수 있는 수량이지만 소련 군사고문단이 미 군사고문단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전차기동이 유럽과는 달리 불편하다고 판단해 항공기 지원으로 바꾸고 절반 가량인 총 242대의 T-34 전차를 인수해 제9 전차여단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이 T-34전차는 전쟁 초기에 대전차화기가 모자라던 국군에게 엄청난 위협이였고 북한군이 엄청난 속도로 진군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이 가지고 있던 대전차화기는 무반동총, 2.36인치(66mm) 바주카, 6파운더의 미국 라이센스 57mm 대전차포였는데 무반동총과 바주카는 측면에서 트랙을 끊어 전투불능을 시키는 격파[12] 전과를 얻는게 최선인 수준이었고 57mm 대전차포는 철갑탄도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으며[13] 철갑탄을 쓰더라도 500m 밖에서는 그 어떤 피해도 줄 수 없고 320m 근처까지 끌어들여야 정면 관통이 가능한 부족한 화력이었다.
개전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유일한 기갑차량이었던 M8 그레이하운드 37mm M6 포로 T-34를 저지해보려는 시도가 있었고, 철갑탄을 발사하여 T-34의 궤도를 파괴하여 소수의 T-34를 격파(궤도파괴=기동불능=전투력 상실=격파)할 수 있었으나 37mm 포도 통상사격으로는 전차의 무한궤도 정도나 파괴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위력부족이며, 그나마 철갑탄까지 부족한데다가, 매복 후에 1대가 무한궤도를 사격한 후 전차의 조종수가 전차 전면에 있는 조종수 해치를 여는 순간 그 곳에 핀포인트 사격을 가하는 특이한 사항이 아니면 실질적인 파괴가 불가능하므로 결국 적 전차의 반격으로 손해만 입고 말았다.
문제는 당시 한반도에 초기에 투입된 미 육군도 보병용 대전차화기는 대한민국 국군의 것과 거의 동일했다는 점이다.
다른 곳에 갈 필요도 없이 이 문서에서도 많이 증거 자료를 찾아 볼 수 있듯 미군은 이미 2차대전 당시 소련에게서 T-34-76을 받아와서 그 스펙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 T-34로 T-34의 이런저런 장단점에 대해 충분히 테스트도 해보았다. 당시 미군 지휘부도 T-34 전차에 대해 엔진필터가 안 좋으니 소련 공업기술력과 장갑재 관련 사항들을 다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 한국 특유의 산악지형까지 합쳐져 미국은 한국 같은 산악지형에 전차는 필요없고 T-34 같은 전차는 바주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전력으로 오판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이 수없이 바주카로는 도저히 T-34 전차를 상대할 수가 없다고 보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이를 무기의 능력부족이 아닌 대한민국 국군의 낮은 훈련도 때문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미 육군 중 최초로 전투에 돌입한 스미스 특임대대는 처음에는 자신만만 했으나 바주카로 아무리 쏴도 파괴가 불가능하자 대혼란에 빠진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미국은 특임대가 출동했으니 북한군이 쫄거나 이들이 공세를 멈추기를 기대했으나 그런 것은 없었고 곧 전투에 투입된 스미스 특임대는 T-34의 측면에서 궤도를 끊는 것과 후면에서 엔진을 멈춰서 총 4대의 전투력을 일시적으로 상실시켜 격파한 것 외에는 아무런 전과를 내지 못했는데 특히 정면에서는 T-34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패하고 말았으며 북한군은 '미제놈들 별거 아니다'라는 인상을 주는 바람에 더더욱 기고만장해지며 쾌속 진격을 하게 되었다.
이 전투로 미국은 미군이 사용해도 바주카로는 도저히 T-34를 상대로 실질적인 전과를 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스펙상으로는 바주카로도 T-34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지만 바주카의 집중사격에도 T-34가 버텨내는 결과가 나왔으니 스탈린이 북한에 장갑을 더 두껍게 한 T-34를 보냈다는 소문[14]이 퍼졌고, 이후로도 탄두가 오래된 불량품이었다는 등의 설이 존재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다소 미스터리지만 어쨌건 미국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T-34를 상대할 만하면서도 좀 더 배치하기 용이한 병기를 찾게 되는데 이것이 일본에 있던 75mm 포 탑재 경전차인 M24 채피로 일단 저렴한 데다가 가까운 일본에 이미 배치되어 있어 재배치가 용이했고 구형 셔먼과 동등한 수준의 75mm 포를 갖춰서 75mm 장착형 셔먼 전차가 독일의 3, 4호 전차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T-34 역시 상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며 경전차라 가볍고 빠르기 때문에 산지에서 운용하기도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50년 7월 4일 빠르게 배치된다.
단, 설령 채피가 역부족임을 알았다고 한들, 전후 군축에 영향으로 주일미군의 부품 수급도 제때 되지 않아 돌려막기를 하거나 오키나와 등의 격전지에 유기된 장비들을 수거해서 동류전환하는 처지였다. 그럭저럭 부대 단위로 굴러가던 채피를 제외하면 셔먼과 퍼싱의 가동률은 % 가 아니라 다섯 손가락으로 세야 했었을 만큼 막장이었기 때문에 선택지는 채피밖에 없었다.[15]
채피가 배치되자 땅에 떨어져 있던 대한민국 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다시 솟아올랐고 미군 채피 전차병들은 기세좋게 T-34와 전차전을 벌였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채피 부대는 T-34와의 모든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겪게 된다. 심지어 T-34 1대가 반파되는 동안 채피 7대가 몰살당하는 등 압도적인 열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채피의 75mm 포는 T-34를 실질적으로 전혀 관통하지 못했으며 기것해야 T-34 한두 대의 궤도를 끊어서 잠시 진격을 멈추는 정도의 전과가 다였다.
예상과 달리 채피가 처참한 교전비로 T-34에게 아주 간단하게 털려 나가자 이를 예상하지 못한 미국은 당황하며 뒤늦게야 한국 지형은 쓸모가 없니, T-34의 성능이 어떠니 하는 주장을 완전히 버리고 가능한 한 빨리 대량의 전차를 쏟아붓는 데 열중하게 되는데 이 사건 이후 배치되는 것이 2차 대전 말기에 생산되었던 최신형 전차 M26 퍼싱과 76mm 포를 장착한 M4A3E8으로 이 전차들은 대거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이로 인해 M26 퍼싱은 2차대전에서 티거 전차 등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전차여서 셔먼보다 더 좋은 화력과 내구성을 갖춘 전차였고 퍼싱전차를 필두로 한 미국 기갑부대는 T-34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었다. T-34와 같은 체급인 이지에잇 셔먼도 76mm구경 전차포 덕에 T-34/85의 장갑을 뚫을수 있었고 승무원들은 2차대전에서 셔먼 조종이 다수인 베테랑 전차 승무원들이였기에 신들린 조종과 빠른 판단력으로 우월한 전적을 내는 등 개전 초기 채피의 참극을 완전히 씻어낼 수 있었다. 이어서 센추리온 Mk.III, M46 패튼 같은 전차들이 배치되자 T-34는 초반의 기세를 완전히 잃고 UN군 전차에게 압도적으로 패퇴하고 만다.
개전 초기 한국 육군은 대대급 훈련을 받은 부대가 최정예였던 시절이었을 만큼 훈련도가 부족했고 전차에 대한 무지도 겹쳐 일방적으로 밀렸다. 갓 태어난지 얼마 안 된 한국 육군은 사기도 낮고 준비도 부족했던 만큼 많은 걸 바랄 수 없었다. 당장 전차를 격파했다고 알려진 사례의 상당수가 SU-76M 같은 상부개방형 자주포였을 정도로 당시의 한국 육군은 전차와 자주포도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포천 전투에서 미군에게 공여받은 대전차포로도 어쩌지 못하자 결국 화염병이나 수류탄을 집어들고 궤도나 해치 안에 쑤셔넣는 속칭 육탄돌격으로 처절한 전술[16]로 대항해야 했다. 것도 그럴 것이 전차의 기관총 사격 화망을 무릅쓰고 접근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전술로, 거의 자살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실제 전과를 확인해 봐도 실질적인 피해는 줄 수 없었던 것 같다. 1952년에 집계된 256대 파괴전과 중 전차포 97(37.9%), 북한군 유기 63(24.6%), 로켓포 및 무반동총 35(13.7%), 항공기 29(11.3%), 포병 28(10.9%), 수류탄 3(1.2%), 미군 지뢰 1(0.4%)다.
또한 미약하나마 L-4, L-5, T-6같은 연락기나 훈련기도 간이 무장을 달거나 후방석 승무원이 폭탄 등을 던져 T-34를 몇대 해치웠다.[17]
물론 육탄특공에서 크게 성공한 경우들도 있는데 이때는 T-34의 약점부위를 정확하게 알고 공략하여 전차를 무력화시켰다. 일단 해치가 열려있을 경우 안에 수류탄이나 화염병을 던져넣는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었고, 해치가 잠겼을 경우엔 궤도에 박격포탄을 밀어넣어 파괴해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포탄이 불발이 날 경우는 취약한 엔진 상판부위를 노리기도 했고, 연막 등을 이용해 관측을 방해하여 강제로 해치를 열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도로정비가 되지 않아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좁은 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앞을 보지 못하고 마구 운전하다가 전차가 돈좌 또는 전복돼서 기동력을 상실하면 치명적이었다. 국방부 전쟁사 관련 다른 기록들에 따르면 T-34의 또 다른 취약부위는 관측용 잠망경이었는데, 여기에 진흙을 발라 앞을 가리는 방식으로 무력화한 사례도 있다. 수기 잠망경 부분이 의외로 마무리와 내구도가 허술해 전차에 달려있는 보수용 망치나 돌 등으로 강하게 때리면 비틀려서 공간이 생기는데, 이 약점을 이용해서 공격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기타 참고자료 다른 취약점은 통풍구 부분이었는데 이곳을 노려 안에다 수류탄이나 화염병 등을 집어넣는 방식의 공격도 행해졌다.
그러나 북한 육군의 전차운용 방식과 훈련미숙 등의 병크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소모되던 중 미 육군이 M4A3E8에 이어서 본격적으로 M26 퍼싱이나 M46 패튼 등의 고성능 전차를 투입한 이후엔 풍비박산이 났다. 만약 북한 육군이 개전 초의 절대우세에 전차를 집중적으로(일명 기갑웨이브) 운용했다면 낙동강 전선이란 말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국군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북한 육군의 전차운용은 능숙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초기의 탱크 쇼크 효과에 맛을 들인 북한 육군은 전선 강행돌파시에 전차를 자주 동원했다. 이는 소련군의 작전기동군 교리에서 많은 점을 참조한 것이나 문제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 충분한 화력지원과 후속 증원부대의 신속한 투입이라는 점은 빼먹고 기습과 탱크 쇼크의 시너지만을 고집하여 충분한 화력지원 없이 전차와 자주포, 보병만 일회성으로 덜렁 보내곤 했다. 전사를 살펴보면 야간에 전차나 자주포가 뜬금없이 튀어나와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필사적인 항전을 펼치는 사례가 많이 발견되지만 포격이 동반되거나 돌파구를 후속부대가 확장하여 전선 깊숙히 침입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에 반해 한국전쟁 초기의 혼란을 수습한 대한민국 국군은 낙동강 전선이라는 천혜의 방어막과 UN군의 막강한 지원화력을 십분 활용, 강행돌파 예상지점에 화망을 미리 구축해놓고 T-34가 걸려들기만 하면 문자 그대로 있는 화력을 모두 끼얹어 버렸다. 특히 낙동강 방어전 당시 북한 육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절까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적화통일을 이루고자 초조하게 서두르고 있었기에 이는 큰 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으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이후 북한 육군의 전차는 미 육군의 M26 퍼싱이나 M46 패튼, 영국 육군의 센추리온 전차 등의 고성능 전차들에게 다 터져나갔다.
그 영향으로, 전쟁이 소강기에 들어갈 시점이 되면 대한민국 국군은 이지에잇 셔먼이나 퍼싱 여러대와 보병들이 서로를 엄호하며 이동했는데, 북한군은 끽해야 이 차량 한대에 보병 30명이 달라붙어 이동했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추가적으로, 북한군의 전차는 1950년 겨울 즈음엔 거의 전부 소모된 상태였으나, 중공군이 개입할 당시 T-34-85와 IS-2를 챙겨 참전해서 전선에는 계속 나타났다.
UN군은 T-34-85를 "캐비어 깡통"이라 불렀는데, M26 퍼싱이나 M46 패튼 등의 신형 전차에게 무자비하게 포탑이 사출되어 활활 불타며 격파당하는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3.5인치(89mm) 슈퍼 바주카의 보급에 힘입어 바주카포로도 전차의 전면에서 충분한 타격을 줄 수는 있게 되었다. 물론 미 육군의 퍼싱이나 영국 육군의 센추리온 같은 신형 전차들이 왔으니 T-34-85는 더이상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T-34는 현재 한국 육군의 전략, 전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전차로 K-1 전차의 개발과 배치를 위시한 대한민국 국군 전차전력의 강화엔 이 T-34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한국전쟁 초기 T-34를 앞세운 북한 육군의 빠른 공세에 아무 것도 못하고 밀려난 경험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군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그것이 국방과학연구소가 주도하는 각종 신형 전차와 대전차무기의 개발과 배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나 강원도에서 볼 수 있는 대전차 방호벽 또한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북한 육군 기갑부대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있는 것이다.
3.1.1. 폭풍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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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작전 당시 남하 중인 조선인민군 육군 소속 T-34-85 |
3.1.2. 서울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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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함락 당시 시내로 진입한 조선인민군 육군 소속 T-34-85 ''321번차''[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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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가지를 행진하는 조선인민군 육군 소속 T-34-85 대열과 선두에 선 조선인민군 육군 소속 T-34-85 ''132번차''[19] |
3.1.3. 춘천-홍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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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고개 전투 당시 국군의 육탄돌격으로 인해 격파된 조선인민군 육군 제2군단 소속 T-34-85 |
춘천-홍천 전투에서 패배하며 인민군은 전쟁 수행에 크나큰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는 부산으로 정부 수반과 피난민들이 떠날 수 있도록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3.1.4. 대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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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투 당시 미 육군 제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격파한 조선인민군 육군 제105땅크사단 1소대 소속 T-34-85 지휘차량[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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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함락 당시 시내로 진입한 조선인민군 육군 소속 T-34-85[21] |
3.1.5. 낙동강 전선
3.1.5.1. 왜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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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전투 직후 미 육군에게 노획당한 조선인민군 육군 소속 T-34-85 |
3.1.5.2. 창녕·영산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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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전투 당시 오봉리에서 격파당한 조선인민군 육군 산하 제4사단 소속 T-34-85 "322번차" |
3.1.6. 인천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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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 당시 김포 비행장에서 미 해병대에 의해 격파된 조선인민군 육군 소속 T-34-85[23] |
3.1.7. 9.28 서울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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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 서울 수복 당시 미 해병대 산하 제1사단에 의해 격파된 조선인민군 육군 소속 T-34-85 & SU-76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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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제7사단 32보병연대 산하 1중대 노획 T-34-85 "니노치카" 437번차[24] |
3.1.8. 폭찹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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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지원군 육군 제4전차연대 소속 T-34-85 네임드 차량 "인민영웅전차" 215번차[25] |
이하는 중국인민공화국국방부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215번 전차에 대한 내용.
1953년 7월 중국인민지원군은 여름 반격을 개시했고 우리 전차 2사단 4연대 2중대는 미 육군 스옌동의 베이산 진지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는 중대의 평범한 병사로서 215호번차의 영웅적인 위업을 목격했다. 당시 215번은 의용병 67사단 200연대에 미리 배속되어 베이산 스옌동 남쪽으로 몰래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6일 공격 명령을 받은 215번 전차는 먼저 벙커에서 뛰어 나와 스옌동의 베이산을 향해 돌진했다. 적군은 215번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모든 화력을 사용했다. 장마철이라 땅이 진흙 투성이였는데 아쉽게도 215번 전차가 분화구에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고 흙먼지가 배플을 넘었다. 적의 위치에서 불과 1km 거리에 있어 숨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생존을 위해 전차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싸울 것인가? "양아루" 전차장과 그의 동료들은 탱크와 공존하고 죽는 것을 선택했다. 적의 집중 포격, 폭우 속에서 차량 전체의 지휘관들은 야간 엄폐물과 지형을 결합하여 215번을 작은 고분으로 위장하고 적의 코 밑에 그대로 숨었다.
둘째 날 저녁, 8자구대전법[26]을 펼치려던 찰나, 346.6 고지대에 갑자기 적 전차 3대가 나타났다. 즉시 제거하지 않으면 베이샨을 방어하는 보병들이 큰 손실을 입게 될 것이었다. 포수 "쑤즈창"은 신속하게 적 탱크의 위치에 맞춰 포를 조준했고 전차장 "양아루"가 명령을 내렸다. "쏴!". 적의 포병이 재빨리 나에게 반격하자 215호가 완강하게 대응했고, 또 한 발의 포격이 있었고, 적의 두번째 전차에도 불이 붙었다.
나머지 탱크들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급히 벙커에 숨어있던 215호가 10발 이상을 연이어 폭파해 벙커를 산산조각냈고, 적 탱크의 몸통도 두 갈래로 쪼개졌다. 치열한 전투 끝에 215번 전차가 완전히 노출되자 적군은 215번을 향한 광란의 반격을 시작했다. 속담에 군인은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조종수였던 "첸웬쿠이"는 밤이라 시야가 어두운 것을 이용해, 그 자리에서 탱크에 시동을 걸고 스로틀을 세게 높인 다음 천천히 스로틀을 낮춰서 엔진 소음이 커졌다가 작아지게 하였고 적들은 우리 전차가 이미 퇴각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215번호차의 후퇴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집중 사격을 했다. 215번호차는 탈출에 성공했다.
7월 9일 상급 명령이 철회되었다. 수렁에 빠진 215번을 빨리 구출하기 위해 전우들은 잡초와 진흙을 스스로 묶고 적의 소이탄에 그을린 산비탈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쓸만한 통나무를 찾아 끌고 갔다. 산허리에서 다양한 두께의 통나무가 하루에 70개 이상 수집되었고, 연대 공병중대 8분대의 협력으로 마침내 215번 전차가 깊은 진흙 구덩이에서 구출되어 전장에서 성공적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미국의 침략전쟁과 한국원조를 위한 전쟁[27]에서 215번 전차는 적 중전차 5대 파괴, 차량 1대 부상, 적 박격포 9대, 차량 1대 파괴, 적 벙커 26개, 터널 1개, 지휘소 1개 파괴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보병 전투 임무로 7회. 그의 뛰어난 군사 공적을 인정하여 중국 인민의용군 사령부는 215번 전차에 "인민영웅전차"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수여했다.
오늘날, 영광스럽게 퇴역한 215번 전차는 사람들이 방문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중국 인민 혁명 군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7월 6일 공격 명령을 받은 215번 전차는 먼저 벙커에서 뛰어 나와 스옌동의 베이산을 향해 돌진했다. 적군은 215번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모든 화력을 사용했다. 장마철이라 땅이 진흙 투성이였는데 아쉽게도 215번 전차가 분화구에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고 흙먼지가 배플을 넘었다. 적의 위치에서 불과 1km 거리에 있어 숨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생존을 위해 전차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싸울 것인가? "양아루" 전차장과 그의 동료들은 탱크와 공존하고 죽는 것을 선택했다. 적의 집중 포격, 폭우 속에서 차량 전체의 지휘관들은 야간 엄폐물과 지형을 결합하여 215번을 작은 고분으로 위장하고 적의 코 밑에 그대로 숨었다.
둘째 날 저녁, 8자구대전법[26]을 펼치려던 찰나, 346.6 고지대에 갑자기 적 전차 3대가 나타났다. 즉시 제거하지 않으면 베이샨을 방어하는 보병들이 큰 손실을 입게 될 것이었다. 포수 "쑤즈창"은 신속하게 적 탱크의 위치에 맞춰 포를 조준했고 전차장 "양아루"가 명령을 내렸다. "쏴!". 적의 포병이 재빨리 나에게 반격하자 215호가 완강하게 대응했고, 또 한 발의 포격이 있었고, 적의 두번째 전차에도 불이 붙었다.
나머지 탱크들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급히 벙커에 숨어있던 215호가 10발 이상을 연이어 폭파해 벙커를 산산조각냈고, 적 탱크의 몸통도 두 갈래로 쪼개졌다. 치열한 전투 끝에 215번 전차가 완전히 노출되자 적군은 215번을 향한 광란의 반격을 시작했다. 속담에 군인은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조종수였던 "첸웬쿠이"는 밤이라 시야가 어두운 것을 이용해, 그 자리에서 탱크에 시동을 걸고 스로틀을 세게 높인 다음 천천히 스로틀을 낮춰서 엔진 소음이 커졌다가 작아지게 하였고 적들은 우리 전차가 이미 퇴각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215번호차의 후퇴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집중 사격을 했다. 215번호차는 탈출에 성공했다.
7월 9일 상급 명령이 철회되었다. 수렁에 빠진 215번을 빨리 구출하기 위해 전우들은 잡초와 진흙을 스스로 묶고 적의 소이탄에 그을린 산비탈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쓸만한 통나무를 찾아 끌고 갔다. 산허리에서 다양한 두께의 통나무가 하루에 70개 이상 수집되었고, 연대 공병중대 8분대의 협력으로 마침내 215번 전차가 깊은 진흙 구덩이에서 구출되어 전장에서 성공적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미국의 침략전쟁과 한국원조를 위한 전쟁[27]에서 215번 전차는 적 중전차 5대 파괴, 차량 1대 부상, 적 박격포 9대, 차량 1대 파괴, 적 벙커 26개, 터널 1개, 지휘소 1개 파괴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보병 전투 임무로 7회. 그의 뛰어난 군사 공적을 인정하여 중국 인민의용군 사령부는 215번 전차에 "인민영웅전차"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수여했다.
오늘날, 영광스럽게 퇴역한 215번 전차는 사람들이 방문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중국 인민 혁명 군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해당 일화에 따르면, 미군은 M4A3E8 혹은 M46 패튼과 병력수송장갑차를 투입한 것으로 보이며 미군측 기록에는 장갑차량의 전투 중 손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해외에서도 앞뒤가 안 맞고 너무 과장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예시로 월드 오브 탱크의 해외 유명 유저였던 "사일런트스토커(SilentStalker)"가 작성한 관련 글을 참고하자.
3.2. 1953년 동독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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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포츠담 광장에서의 진압용으로 투입된 소련 육군 소속 "93번차"[28] |
3.3. 헝가리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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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 진입한 헝가리 인민군 소속 T-34-85C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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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혁명 당시 진압용으로 투입된 소련 육군 소속 T-34-85 (D-5T) 후기형 "833번차"[29] |
3.4. 피그만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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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만 침공 당시 보병들과 함께 진격하는 T-34-85CZ 중대[30] |
하지만 배치가 막 끝난 쿠바군의 T-34-85와 IS-2는 도합 20량 밖에 되지 않았고, 포는 122mm 곡사포 사단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반면, 이에 맞서는 반정부군은 최신 경전차인 M41 워커 불독 5대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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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34-85CZ에서 하차하는 피델 카스트로[31] |
피델 카스트로가 작전 통수권을 맡았고, 해가 저물자 밀리티아노 장군 산하의 보병 대대는 마침 제 시간에 도착한 여러 T-34-85 전차의 지원을 받아 플라야 라르가 방향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섬의 늪지대에 진입이 불가능했던 탱크들은 고속도로를 따라 일렬로 움직여서 진격 중이었다. 이때 2506 여단은 전차 중대가 진입하는 것을 포착하자 미군에게 받은 3문의 바주카로 34명의 병사들을 처치했으며, 카스트로 산하의 쿠바군은 잠시 후퇴했다.
익일인 18일, 122mm 곡사포를 이용한 포격 이후 쿠바군은 다시 방어전을 시작했다. 아침 10시 30분까지 T-34-85들은 플라야 라르가의 해안으로 가서 해안에 상륙하려하는 상륙정들을 공격했다. 2506 여단은 급하게 SOS를 쳤으나, CIA는 그들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어 결국 상륙하기도 전에 2506 여단은 M41 워커 불독 5대를 사용하지도 못한채로 바다 속에 수장시킬 수 밖에 없었다.
전세가 확실히 기운 4월 19일 오후 5시 30분에 쿠바군은 2506 여단의 마지막 방어 지점인 플라야 기로나에 공세를 가했다.
플라야 기로나에 처음으로 진입한 것은 T-34-85 전차 중대였고, 이 중 최선두 전차에는 사령관인 피델 카스트로 본인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이는 군대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함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카스트로 본인이 이 일에 매우 분노하며 반란군놈들을 직접 전차를 끌고 가서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고 싶어 하였기에 이런 선택을 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플라야 기로나에서 반정부군의 마지막 두대의 워커 불독이 격파되면서 침공은 반정부군의 대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침공 당시 쿠바군의 기갑차량 피해는 6대의 T-34-85 전차가 격파되는 것에서 그쳤으며, 반정부군은 모든 기갑차량을 망실하면서 쿠바군의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3.5. 중동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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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 시기 이스라엘 방위군이 노획한 T-34-85CZ와 SD-100 |
3.5.1. 수에즈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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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위기 당시 유기된 이집트 육군 소속 T-34-85CZ |
3.5.2. 6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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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전쟁 당시 시나이 반도에서 격파된 이집트 육군 소속 ISU-152와 T-34-85CZ |
그러나 혁혁한 전과는 세우지 못하였고,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티기를 시전했으나 이스라엘군의 숏이나 M-50, M-51에 대다수가 격파당하고 시리아군은 패주하였다.
3.5.3. 욤 키푸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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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 키푸르 전쟁 당시의 이집트 육군 소속 T-34-85CZ[32] |
3.6. 프라하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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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 당시 진압용으로 투입된 불가리아 인민군 소속 T-34-85CZ "112번차" |
3.7. 1974년 키프로스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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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키프로스 쿠데타 당시의 키프로스 육군 소속 T-34-85CZ |
3.8. 키프로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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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육군 소속 T-34-85CZ (M2H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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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된 키프로스 육군 소속 T-34-85CZ (M2HB), 1974년 7월 |
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같았고, 실제로도 튀르키예군들은 구식전차를 몰고나온 키프로스 방위군을 비웃었다.
그러나 전투 결과 키프로스 방위군은 T-34-85CZ 12대를 손실했지만, 튀르키예군의 패튼은 무려 19대가 파괴되었다.
하지만 개떼같이 몰려오는 수량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고, 방어전에 실패하며 퇴각하게 되었다.
교환비로 치면 손실은 키프로스가 더 컸으나 군사력이 훨씬 우위에 있던 튀르키예에게는 엄청난 굴욕이었다.
한 줌도 안되는 매우 적은 수량의 구식전차가 MBT를 상대로 맞붙어서 동급의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었는데, 특히 남키프로스의 전차병들은 예비군 수준의 훈련만 받아서 질적으로 매우 빈약하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나름 강국의 정규군인 튀르키예군을 상대로 큰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은 침략당하여 절망에 빠져있던 키프로스 시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큰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3.9. 레바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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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내전 당시의 레바논 아랍군 소속 T-34-85C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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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렬 중인 시리아 육군 소속 T-34-122[33] |
투입 된 일부 차량은 이스라엘 방위군에게 노획 당하기도 했으며, 대다수의 차량들은 전차전보다는 자주포 용도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3.10.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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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당시의 베트남 인민군 육군 소속 T-34-85M1 |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의 베트남 인민군 육군 소속 T-34-85M[34] |
정글의 특성상 대형 전차는 활약하기 힘들었기에 크기가 작은 T-34들이 기습을 하고 도망치는 등 일종의 대전차 자주포 역할을 행했다.
부활절 공세나 1975년 남베트남 몰락 당시에도 북베트남 전차 전력의 일부로 일선에 투입되었다.
3.10.1. 라오스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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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내전 당시 격파당하고(앞) 사격 준비중인(뒤) 베트남 인민군 육군 소속 T-34-85, 1972년 |
3.11. 로디지아-부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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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지아-부시 전쟁 당시 로디지아 육군 노획 짐바브웨 인민혁명군(ZIPRA) 소속 T-34-85M |
3.12. 예레반 동물원 코끼리 탈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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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반 동물원 코끼리 탈출 사건 당시 코끼리 "보바" 사살 작전에 투입된 소련 육군 소속 T-34-T |
3.13.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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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의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육군 소속 T-34-85M "230번차" |
아프간 전쟁이 소련의 철수로 종결된 후에는 남겨진 차량들이 수습되어 9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3.14. 베트남-캄보디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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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캄보디아 전쟁 당시의 베트남 인민군 소속 T-34-85M |
한때 북베트남의 동맹이었던 크메르 루주 정권의 폴 포트는 국경 내에서 베트남인과 캄보디아 내의 친베트남 공산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으며 심지어 베트남에 대한 소규모 공습을 시작하게 된다.
1977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2주년 기념일에 크메르 루주 군대는 베트남 군대가 느슨해질 시기를 이용하여 베트남을 침공해 수 백명의 베트남 시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그 후 약 1년 동안 긴장이 고조되었고 베트남에 대한 산발적인 도발이 지속되었는데, 이에 베트남 측에서도 1978년 6월 공군을 동원하여 캄푸치아의 목표물을 폭격하기 시작하는 반격에 나선다.
동년 연말, 캄푸치아군은 75,000명의 군인을 캄푸치아 남부-베트남 북부 국경지대에 배치하는 도발을 지속했고, 결국 베트남에서는 분노하여 단기간 내에 민주 캄푸치아군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장기적으로는 크메르 루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선전포고를 한 뒤 공격을 감행했으며, 이 때 당시 불과 몇 년 전에 영광스럽게 베트남의 통일을 주도했던 T-34-85가 다시 한번 참전하게 되었다.[36]
오합지졸인 캄푸치아군은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1979년 1월 7일 베트남군이 수도 프놈펜에 진입하여 민주 캄푸치아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설립시켰다.이후 1989년 베트남군이 철수하며 전쟁이 끝이 났다.
베트남군의 T-34-85는 일선에서 싸우지 않고 후방에서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3.15. 중국-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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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월전쟁 당시의 베트남 육군 제407전차연대 산하 2중대 1소대 소속 T-34-85M[37] |
1979년, 민주 캄푸치아가 무너지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베트남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중국은 민주 캄푸치아와 동맹 관계에 있었기에, 이를 묵과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을 침공하게 되었다.
이때 당시 중국군은 북부에 주둔한 베트남군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을 세웠지만, 이미 10년 전 베트남전 당시 미국에게도 이겼을 정도로 게릴라전에 도가 튼 베트남군은 오히려 T-34-85를 이용해 중국군에게 우회 타격을 하고 재빠르게 도망치거나 하는 등의 전법으로 역으로 중국군을 수세에 몰리게 하는 대활약을 하였으며, 1979년 3월 5일, 침공은 지지부진했던데다가 피해가 심해지자 중국 측에서는 " 목표를 달성했다"라고 발표하고 빠르게 철수하게 되면서 중월전쟁에서 베트남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비단 베트남군 뿐만 아니라, 중국군 측에서도 제54군단 산하 제11기갑여단에 배속되었다고는 하나, 실질적인 전투 없이 후퇴하였다고 전해진다.
3.16. 앙골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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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 내전 당시 격파된 앙골라 인민해방군 소속 T-34-85M[38] |
전량 T-34-85M으로, 혁혁한 전과는 세우지 못했는지 찍힌 사진 중 다수가 격파되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군에게 노획된 것이다.
3.17.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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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 육군 노획 앙골라 인민해방군 육군 소속 T-34-85M |
3.18. 오가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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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획한 에티오피아 육군 소속 T-34-85M을 수리하는 소말리아 육군 정비병[39] |
3.19. 우간다-탄자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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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탄자니아 전쟁 당시의 우간다 육군 소속 T-34-85CZ |
이밖에도, 이디 아민과 친한 사이였던 무하마르 알 카다피가 리비아군에 명령하여 T-34-85CZ 소대를 국경지대에 배치하였으나, 전투 없이 복귀시켰다고 한다.
3.20. 루마니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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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혁명 당시의 루마니아 인민군 소속 T-34-85 |
4. 현대전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난 이후에도 수많은 차량들이 각국의 소속으로 활약했다. 이 중에는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헌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차량도 있으며, 전란의 화마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중이다.4.1. 걸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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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를 진압중인 소방전차 빅 윈드(Big Wind) |
이라크가 다국적군의 항공작전을 방해하려고 쿠웨이트의 유전에 자주포를 동원한 포격으로 화재를 일으켰는데, 일반적인 소방차로는 도저히 화재를 진압할 수 없게되자 헝가리의 MB 드릴링이라는 회사가 이전에 소련군이 퇴역한 전투기에서 엔진만 떼어내 물청소를 한다는 사실에 착안, 쿠웨이트 정부에 달려가 구상한 계획을 설명했고, 찬 밥 더운 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던 쿠웨이트에서는 당장 헝가리에 치장되어있던 T-34-85를 가져와서 개조를 허용했다고 한다.
이후 일반 소방차가 진압하기 힘든 화재를 가뿐히 제압하며 그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4.2. 유고슬라비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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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의 세르비아계 소속 T-34B |
유고 연방군은 소련과 라이센스 계약을 통해 T-34를 수천대 보유하고 있었고, 할리우드 영화 철십자 훈장(영화)에 나오는 T-34는 모두 유고슬라비아에서 로케이션을 한 것일 정도로 관리도 잘하고 있었는데, 유고 연방이 일부 붕괴되면서, 대다수의 T-34는 유고슬라비아에 의해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이나 스릅스카 공화국 손에 넘어갔고, 내전에 사용되었다.
내전의 성격상 중화기가 쓰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병들을 상대로 의외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유고 내전에 동원된 T-34-85들은 유고 내에서 자체적으로 개조한 것으로, 일명 T-34B라고 불리운다. 이 T-34B는 T-55의 보기륜과 야간 투시 장비, 그리고 M2 중기관총을 장착한 사양으로 원본보다 더 높은 전투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가로, 참전 차량들의 사진을 보면 고무로 된 장갑판이 부착된 차량이 많은데, 이는 공장 내의 컨베이어 벨트를 절단하여 리벳 등으로 접합한 것으로, 기록에 따르면 40mm 박격포탄과 12.7mm 중기관총은 물론 RPG-7까지도 막아낸 적이 있다고 한다.
4.2.1.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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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당시의 크로아티아 육군 소속 T-34B 네임드 차량 "꼬마 백구 (MALO BIJEL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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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당시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소속 T-34B |
4.2.2. 보스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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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전쟁 당시의 보스니아 공화국군 산하 제7군단 7군사경찰 대대 노획 T-34B[42] |
4.3. 모잠비크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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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잠비크 내전 당시 격파된 모잠비크 육군 소속 T-34-85CZ |
4.4. 헝가리 반정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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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T-34-85C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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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시위대 T-34-85CZ 기동 영상 |
이에 대해 흔히 아무 관리도 되어 있지 않던 T-34에 기름을 넣었더니 움직이는 경이적인 신뢰성을 보였다는 잘못된 정보가 많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고, 박물관에서 관리 다 해놓고 기름까지 채워 정비해놓아서 가동 준비가 되어 있는 차량이었다. 다만 아무나 시동을 걸지 못하게 배터리를 빼놨을 뿐. 그런데 마침 시위대에 지나가던 헝가리군 T-34 조종수였던 노인이 있었는데 이 퇴역 군인이 배터리 없이 시동거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T-34에는 비상시에 공기압으로 시동을 걸 수 있는 장치(CONSTRUCTION AND ACTION OF COMPRESSED AIR STARTING SYSTEM 문단)가 있다.[44]
시위대는 마침 시위도 한창이겠다 싶었는지 타고 나와서 다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시물이었기에 엔진은 있었더라도 포탄이나 기관총탄은 없었으므로 사격은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동영상을 보면 인명 피해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운전자의 실력이 수준급인데 위의 조종수 출신 할아버지께서 직접 조종하셨기 때문이다.
이 탱크는 수백 미터를 시위대와 함께 행진했다고 하며, 고무탄과 최루탄을 막는 등 시위대에게 유용하게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흥분한 시위대들이 너무 많이 올라타고 몰려드는 바람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다는 조종수 노인의 판단하에 전차는 유기되었고, 후에 경찰들은 빈 전차에다 수 많은 최루탄을 쏟아부은 다음 이 전차를 회수했으며 전차는 엔진을 제거한 후 다시 박물관에 돌아갔다고 한다.
한편 전차를 조종한 노인은 다음날 체포되었다가 조사 뒤에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한다.
4.5. 예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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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에 진입한 예멘 육군 소속 T-34-85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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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 중인 예멘 육군 소속 T-34-85M |
4.6. 리비아 내전
4.6.1. 제2차 리비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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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리비아 내전 당시 트리폴리의 리비아 육군 소속 T-34-85CZ[45] |
4.7.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4.7.1. 돈바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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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간스크 인민 민병대 소속 T-34-85M 네임드 차량 "안트래치트를 위하여!" 135번차[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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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34-85M 135번차 시동 영상 |
현재 해당 차량의 행방은 불명이다.
4.7.2.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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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러시아 육군 노획 T-34-85 (76mm 기반) "227번차"[47] |
우크라이나의 도시 리시찬스크에서 전시용으로 주추 위에 올려져 전시되던 T-34-85 한 량[48]이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주추에서 내려진 후 주차되었다가 러시아군에 노획되어 바리케이드 및 기만용으로 배치되었으며, 이 밖에도 직접 참전하지 않았지만, 일부 개체가 러시아군의 공격에 의하여 손상을 입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2차 세계대전 중 라이벌이었던 4호 전차 또한 이로부터 1여년이 지난 2023년 10월 기만용으로 투입되며, 양 측 모두 기갑전력의 심각한 부족을 겪고 있다는 설이 점차 부상하고 있다.
[1]
제112번 공장 생산분으로, 초기형이다.
[2]
아르메니아 SSR에서 기부한 돈으로 112번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3]
1945년 2~3월 프랑케나 근처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183번 공장 생산차량이다.
[4]
1944년 7월 촬영된 사진이다.
[5]
독일의 쉬르첸처럼 만들어진 때부터 있는 게 아니고 현지에서 임기응변으로 침대 스프링을 뜯어서 개조한 것이다.
[6]
1945년 5월 2일 촬영된 사진이다.
[7]
1944년 8월 촬영된 사진이다.
[8]
1945년 8월에 촬영된 사진이다.
[9]
제183번 공장 생산 차량이며, 1945년 9월 13일 다롄 시내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10]
피격당하여 여단 소속 전차장인 수포닌 중위는 즉사하고 나머지 승무원들은 중상을 입어 기동 불능 상태였다.
[11]
174번 공장 생산 차량이다. 참고로 이 사진은 한국사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진 중 하나이기도 하다.
[12]
격파라는 용어를 듣고나서 이를 마치 적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는 식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격파란 적의 전투력 상실을 의미할 뿐이며 적을 완전히 파괴하든 당장 전투력만 상실시키든 똑같이 격파라 할 수 있다. 6.25 초기 바주카로 측면에서 T-34를 격파했다는 전과를 찾아보면 어김없이 바주카로 측면에서 T-34를 격파했으나 곧 북한군이 회수해갔다는 내용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어있는데 이 경우 실제로 T-34를 파괴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으며 북한군에 회수되었다면 수리하여 재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실질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 한다.
[13]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는 철갑탄 자체가 없었다고 하지만 정작 대전차포 운용병들의 회고에는 철갑탄을 써서 격파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철갑탄보다 고폭탄을 더 많이 받았다고 이야기하는걸로 봐서 충분한 수량은 아니었던 듯 싶은데, 실제로 개전 당시 사단 화력 부족으로 연대 지원화기로 사용했었던 터라 고폭탄은 넉넉했으나 철갑탄 보유량은 1문 당 70여 발만 지급해 줄 수 있을 수준이었다.
[14]
이후 노획해서 재 봤는데 똑같았다.
[15]
그나마 퍼싱은 어찌저찌 몇 대를 굴러가게끔 만들었는데, 일본 현지의 공작기기를 이용해서 급조한 부품을 쓴 탓에 부산항에 하역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고장났다는 기록도 있다.
[16]
이로 인해 대전차 총검술 전술이라는 말이 있으나 일본제국은 당시 국군보다 대전차화기를 개발할 수 있었음에도 안 하다가 인명 갈아넣기로 간 것이지만 국군은 대전차화기를 개발할 여건조차 안 되었고 T-34를 타고 북한군이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으로 밀고 들어오니까 유일한 수단인 육탄전술로 간 것이다.
[17]
항공기에 의한 기갑 차량 격파 전과는 국가를 가리지 않고 과장이 많을 수 밖에 없었으니 감안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빠른 속도로 한번 공격 후 지나가는 공습의 특성상 피해 평가와 적 장비 식별을 정확히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폭탄과 로켓탄 덕에 밑에는 연기와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적은 십중팔구 공황에 빠져 흩어지니 격파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단단한 장갑으로 보호받는 전차는 직격탄이 아니면 쉽게 완파당하지 않았고 전차가 아닌 차량(6.25 발발 전 북한은 T-34 뿐만 아니라 SU-76도 공여받았고 전차처럼 전선에서 보병을 지원하는 용도로 운용했는데, 이는 적 장비 식별에 혼란을 더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미 파괴된 차량을 가동 중인 적 전차로 오인하는 경우도 흔했다. 2차 대전 중 동부 전선에서 특히 대전차 확산탄, 37mm/40mm 기관포, 심지어 50mm 대전차포나 75mm 야포 등 각종 항공기 탑재용 대전차 무기가 사용된 것이 이러한 교훈을 통한 각종 연구 때문이었고, 6.25 전쟁 중에는 의외로 네이팜으로 엔진룸부터 승무원 탑승 공간까지 싹 태워버리는 게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 기갑에 대한 공습이 이러한 문제를 딛고 지상군의 전과를 넘어설 정도로 높은 치명도와 정확도 높은 피해 평가가 같이 이뤄지기 시작한 시점은 LGB, 매버릭, TOW 등 효과적인 유도 무장과 타게팅 포드, 레이더 등을 활용한 표적 및 전과 확인이 실전에서 널리 쓰인 걸프전부터라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럼에도 코소보 사태 때는 작정하고 숨어 다니며 각종 기만용 더미(통나무, 판자, 풍선 등을 갖고 만든 가짜부터 이미 전력으로써의 가치는 없는 구형 기갑 차량 등)를 뿌려대는 세르비아군과 세르비아계 민병대에게 제대로 낚여 전과를 실제보다 몇 배 이상 오판하였다.
[18]
2010년 KBS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서 캡쳐한 화면이다.
[19]
2010년 KBS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서 캡쳐한 화면이다.
[20]
포탑에 써 있는 글귀는 "1950년 7월 20일 윌리엄 딘 소장의 지휘하에 격파됨 (KNOCKED OUT 20 JULY 50 UNDER THE SUPERVISON OF MAJGEN W.F. DEAN)"으로, 1950년 7월 20일 촬영된 사진이다.
[21]
서울 함락 당시 사진이라는 말도 있으나,
이 링크의 사진을 보면 대전 함락 당시 사진으로 추정된다.
[22]
실제 전투에서 이런 경우는 공세종말점에 다다르거나, 혹은 패퇴시에나 발생하는데 사단장 정도의 상급 지휘관이 적과 직접 싸울 정도로 당시 미 24보병사단은 상황이 매우 안 좋았다.
[23]
1950년 9월 17일 촬영된 사진이다.
[24]
제183번 공장 생산 차량이다.
[25]
183번 공장 생산분이다.
[26]
八자형으로 된 포위망을 적에게 벌린 후에 적이 포위망에 들어오면 닫아버려 섬멸하는 방법.
[27]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미국의 침략에서 북한을 도와준 원조라고 생각한다.
[28]
제183번 공장 생산 차량으로, 1953년 6월 17일에 촬영되었다.
[29]
앞에는
IS-3이고, 뒤에는
PT-76이다.
[30]
1961년 4월 19일 촬영된 사진이다.
[31]
1961년 4월 17일에 촬영된 사진이다.
[32]
이스라엘 "아제론" 방송국에서 편성한 욤 키푸르 전쟁 관련 프로그램에서 발췌하였으며, 자막 내용은 이렇다. '(중략)...그리고 우리는 아침에 서로 교대하였습니다. "어이, 좋은 아침이네."'
[33]
1982년 촬영된 사진이다.
[34]
1969년 촬영된 사진이다.
[35]
1959년 소련이 기증한 T-34-85가 북베트남군의 첫 전차였다.
[36]
이 때 당시에는 T-34-85 뿐만 아니라 T-55나 PT-76, 남월군으로부터 인수받은 M113, M48 패튼, M41 워커 불독도 같이 참전했다.
[37]
1979년 2월 촬영된 사진이다.
[38]
2000년 경 촬영된 사진이다.
[39]
1978년 3월 촬영. 제112번 공장 생산차량으로, 서소말리해방전선(WSLF)에게 공여하기 위해 수리 중인 모습이다.
[40]
당시 우간다군이 가지고 있던 모든 T-34-85였다고 한다.
[41]
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시민들을 사살해야하는 입장에 놓인 그가 결국 정신적으로 버티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라고 2005년 부검 결과 확인되었다.
[42]
1995년 여름경에 촬영된 사진이다.
[43]
당시 사회당이 선거에서 총선에서 승리한 뒤로 공약과 다르게 복지정책의 축소를 감행하면서 반발을 샀고, 거기에 스캔들까지 터지면서 시위가 거하게 터졌고, 결국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이 대패하고 말았다. 시위가 잠잠해진 뒤로도 결국 사회당은 지지율이 낮은 상황이었고 2008년 금융위기까지 터져서 2010년 선거에서 대패하고 그 과실을
오르반 빅토르가 땄다.
[44]
가솔린 엔진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디젤 엔진은 압축착화 기관이라는 특성 상 이런 장치가 달릴 수 있었다. 조금 더 설명하면, 가솔린과 디젤 둘 다 연소실에 연료를 분무기처럼 흩뿌려 불을 붙이지만 그 방식이 가솔린은 스파크이고 디젤은 압축열로 다르기 때문에, 디젤 엔진의 경우 배터리가 없어도 공기압으로 압력을 만들어주기만 한다면 시동을 걸 수 있다. 탱크 뿐만 아니라 웬만한 디젤 엔진 자동차는 배터리가 방전되더라도 내리막길 등을 이용한다면 공기압을 강제로 주어 시동을 걸 수 있다.
[45]
2017년 촬영된 사진이다.
[46]
포탑 양측에 새겨진 글귀는 "Антрацит(안트래치트)"로, 우크라이나 남부의 도시를 뜻한다.
[47]
2022년 7월 중순 리시찬스크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48]
1943년 독일군으로부터 리시찬스크를 해방하기 위한 전투에 참전한 차량이며, 전후 T-34-85M으로 개량되었다가 1971년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해당 단차의 원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