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티거 2를 사열 중인[1] 국방군 제503 중전차대대.
1. 개요
重戦車大隊/Schwere Panzer-Abteilung[2]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독일 국방군, 무장친위대에서 운용한 기갑부대로서 야전군사령부 혹은 군단사령부 직속의 독립부대. 다양한 기갑부대에 배속되었던 3, 4호 전차 및 5호전차 판터와는 달리, 티거, 티거 2와 같은 독일군의 중전차들은 주로 이 부대들에서 집중운용되었다. 최초에는 티거의 생산량이 충분치 않은 관계로 7.5cm 단포신 전차포를 장비한 3호 전차가 편제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별다른 효용성을 입증하지 못했기에 이후에는 중전차만으로 편성되었다. 대전말에는 상황이 어려워지면서부터 몇몇 중전차대대는 판터는 물론이고 헤처, 야크트판터 등도 급한대로 장비하여 운용하였다.
실제 전선에 파견될 때에는 대대단위로 움직이는 경우는 흔치 않았고 일반적으로는 중대 혹은 소대 단위로 쪼개져 전선에 위치한 부대에 배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치 독일은 대전 내내 총 14개의[3] 중전차대대를 운용했다. 비싼 장비를 운용하는 독립부대인 만큼 최정예의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전투에서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중전차대대에서 복무했던 유명인에는 502 중전차대대의 오토 카리우스 중위와 SS 501 중전차대대의 미하엘 비트만 대위, 그리고 503 중전차대대의 쿠르트 크니스펠 기갑상사가 있다. 초기에 편성된 부대에 비해서 후기에 편성된 부대들은 비교적 훈련이나 경험이 부족했으며 이는 전과로도 드러난다. 여담으로 대전 막판에 들어서 독일군은 15번째 중전차대대인 SS제104 중전차대대의 편성도 계획 했으나 이는 장비와 인력 부족으로 취소된다.
2. 부대 일람
2.1. 국방군 소속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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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1 중전차대대
1942년 5월 10일 창설되었으며 502대대보다 먼저 VK 45.01(P)[4]를 지급받기로 되어있었으나 티거(P)가 취소되면서 2번째로 티거를 수령하게 된다. 완편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대본부와 1/2중대가 전황이 급박해진 북아프리카 전역에 보내졌고 튀니지에서 미군을 거의 초토화 시켰다. 어찌된 일인지 3중대 대신 504대대 1중대가 대신 투입되어 1개대대를 편성하였지만 아프리카 군단의 항복과 함께 모두 항복.... 이후 편성된 3중대는 소속 대대가 항복해버려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전차연대 제3대대에 배속되어 동부전선에서 용병으로 뛰게된다. 1943년 9월 본국에 소환하여 다시 3개 중대 티거 45대가 완편되어 501중전차대대는 벨라루스 지역에 전개한다. 1943년 11월 드네프르 저지대 공세에 참가하여 100여대 이상의 적 전차를 격파하지만 보전 연계가 재대로 되지 않아 종국에 중대장 3명이 모두 중상을 입고 대대장 에리히 뢰베(Erich Löwe)가 실종되고 결국 후퇴한다. 이후 신임장교들이 충원되고 벨라루스 지역을 지키지만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때 전멸했다.[5]
생존병을 중심으로 1944년 8월 티거 2 헨셸포탑형 45대를 완편하고 다시 공세를 막으러 출발하지만 이들이 수령한 티거2는 이상하게도 불량이 많아서 전선까지 재대로 도착한건 8대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3대가 알렉산드르 오스킨의 T-34-85에게 털려버렸다.[6] 신임 대대장은 졸전의 책임과 함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발각되어 숙청당했다. 계속되는 졸전과 악재로 1944년 12월 19일에는 아예 500번대에서 제적되어 24기갑군단의 중전차대대라는 뜻으로 제424 중전차대대로 개칭, 재편했으나 기간병은 얼마 남지도 않은데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사기로 전투력은 엉망이었고 1945년 2월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때 폴란드 지역에서 항복한다.[7] 마지막 대대장도 전술에 무능해 본인이 대전차포에 객사하는 등 이 부대 출신 대대장들은 모두 험한 꼴을 보았다. 처음은 화려했지만 마지막은 매우 처량했던 부대로 전해진다. 부대 마크는 호랑이의 옆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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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2 중전차대대
1942년 5월 25일 창설, 최초로 티거를 지급받은 부대로 중전차대대 중 가장 화려한 전과를 만들어냈으며[8] 1942년 8월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전차 에이스인 오토 카리우스, 요하네스 뵐터, 알베르트 케르셔가 복무했던 부대로 유명하다. 북부집단군에 배속되어 주로 북해 해안선을 따라 싸웠으며 일부 중대는 우크라이나 북부에서 싸웠고 동부전선이 다 털리는 상황에서도 북부전선을 지켜내는데 크게 기여한다.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나르바 등의 돌출된 북부집단군을 끈질기게 두들겼지만 오토 카리우스와 502중전차대대의 활약으로 모조리 격퇴했다. 후일 쿠를란드 반도절단[9] 에서 1,2중대는 탈출, 3중대는 남아서 510중전차대대와 함께 쿠를란드 집단군(Heeresgruppe Kurland)으로 재편성. 1,2중대는 동프로이센에서 방어전을 펼친다. 1945년 1월 5일, 1중대의 모든 티거는 2중대에 넘기고 헤처 구축전차를 수령 제511 중전차대대로 재편성되었다. 배편으로 소환된 3중대는 티거2 8대를 수령한다.[10] 3중대는 두어 차례 작은전투 후 와해된다. 2중대는 1945년 3월 말 GD사단의 마지막 티거 2대를 인계받고 가용 티거 총 10대를 확보하지만 4월 중 혈전 속에 6대를 손실한다. 마지막 남은 4대의 티거는 동프로이센 민간인 구출작전에 투입되어 헤라반도 방어중 모두 산화하고 마지막 한줌의 병력이 5월 9일 소련군에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티거1 중전차의 마지막도 이 부대와 함께 한 셈. 부대마크는 매머드.
재미있게도 1944년 초 손실분의 티거 20여대를 요청했는데 서류상의 착오인지 이 요청에 본국에서 배달을 3번 해준 일이 있다. 보낸줄 모르고 또 보내길 반복한 것. 이로 인해 502중전차대대는 티거를 81대까지 장비 한적이 있다고. 그래서 카리우스의 차량 번호도 217번(2중대 1소대 7호차)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11] 차량번호 마킹은 포탑 측면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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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3 중전차대대
1942년 4월 16일 창설었으며 503중전차대대도 티거(P)를 수령할 계획으로 티거(P)로 훈련을 하다가 헨셸 공장에 찾아가서 재교육을 받는 고생을 했다.[12] 압도적인 활약으로 독일 국방군 중전차대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명실공히 2차 세계대전 최강의 전차부대로 보는 사람도 많다.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에 배속되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에 참전한다. 다른 전차부대와 함께 베케 중전차연대(Panzer-Regiment Bäke)로 임시 편성되어 2차 키예프 전투,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등 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펼친다.[13]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탈출[14]한 이후 휴식을 위해 프랑스로 철수, 3중대는 티거2, 1,2중대는 티거를 보충받았으나 노르망디 전투가 발생, 서부전선에 급히 투입되어 굿우드 작전등에 활약하지만 노르망디 전투 기간동안 다시 모든 장비를 상실한다. 1944년 9월 헝가리 독재정권이 소련에 붙으려고 하자 503중전차대대가 재빠르게 기동하여 부다페스트를 제압하기도 하였다. 1944년 12월 21일 3개 중대 모두 티거2를 지급받고 이후 일당백의 활약을 이어가지만[15] 남부집단군에 대한 끊임없는 공세에 시달리며 전차가동률이 떨어져갔고 부다페스트 공방전에서 도시가 함락되며 결국 대대의 주력 병력을 잃게 된다. 이후로 펠트헤른할레 중전차대대[16]로 개편되었다. 전차 격파대수 1위인 쿠르트 크니스펠 상사가 복무했던 부대이기도 하다. 동부전선이든 서부전선이든 굵직한 전투에는 빠지지 않고 참전했으며 전투손실만 보면 113대를 잃는 동안 적전차 1700킬[17], 무려 15:1의 kda를 기록했다. 펠트헤른할레 중전차대대는 오스트리아에서 종전을 맞은뒤 미군에 투항. 그러나 독일 기갑부대의 아이콘인 부대였던지라 많은 대원들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부대마크는 호랑이 머리. 여담으로 티거 2 하면 꽤 유명한 사열식 사진[18] 에 나온 티거 2들은 제503 중전차대대의 티거 2들이다. 놀랍게도 외모를 단정하게 정리한 쿠르트 크니스펠 상사(헤드폰을 야전모에 걸치고 있는 인물)가 찍힌 티거 2의 사열식 영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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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4 중전차대대
1943년 1월 13일 창설. 좀 사연 많은 부대인데, 먼저 편성된 대대본부와 1중대가 제501 중전차대대 3중대를 대신하여 다급하게 튀니지로 보내졌으나 아프리카 군단이 바로 항복하는 관계로 대대본부와 같이 소멸....[19]2중대는 시칠리아 섬에 남겨졌는데 헤르만 괴링 공수기갑사단(Fallschirm-PanzerDivision Hermann Göring)에 배속되어 시칠리아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함포사격과 항공기에 의해 다수가 격파되고, 철수 중 연료부족이나 도해 수단이 없어 결국 모두 자폭했다.[20] 이때 전차 vs 구축함이라는 전대미문의 교전기록을 남겼다. 철수한 2중대 병사들은 재편된 대대본부와 합류하면서 새 티거를 지급받았다. 뒤늦게 편성된 3중대는 501대대의 3중대처럼 그로스도이칠란트 전차연대 제3대대에 보내진다. 1943년 말 흩어진 중대를 본국으로 불러 재편하고 프랑스에 주둔하지만 다시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내져 종전까지 지연전을 펼치다 항복한다. 부대마크는 뿔과 창. 이탈리아 전투를 전담한 부대로 보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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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5 중전차대대
1943년 1월 29일 창설. 쿠르스크 전투를 위해 준비된 부대다.[21] 쿠르스크 전투에서 맹활약 했지만[22] 작전은 실패. 이후 중부집단군의 핵심전력으로 싸운다. 1944년 7월 티거를 모두 반납하고 티거2 완편부대로 거듭난다. 리투아니아, 폴란드 등지에서 방어전을 치르다가 1945년 4월 포위된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 구원을 나섰으나 결국 도시는 함락됐다. 편도행 티켓만 쥐고 온 이들은 포위망을 푸는데 실패하고 근처 메멜지역으로 퇴각, 이후 모두 소련군에 항복한다. 티거 에이스 빌헬름 크나우트 소령이 복무한 부대다. 불리한 전투에 주로 투입되었음에도 전투손실 교환비만 평가하면 503대대나 502 대대에 필적했던 정예 부대로, 503중전차대대와 함께 티거2로 가장 준수한 활약을 했던 부대이다. 아쉽게도 이 부대는 카리우스나 비트만, 크니스펠 등 인지도 높은 에이스가 없고 부대원 전원이 소련의 포로가 되면서 대부분 살아돌아오지 못했던 관계로, 정예임에도 불구하고 502나 503 등에 비해 자세한 전투나 활약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안타까운 부대이기도 하다. 차량번호 마킹은 포신 측면에 했고, 속칭 "생쥐기사"라고 하는 창기병 모양의 마크를 부대마크로 사용하였다.[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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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6 중전차대대
1943년 7월 20일 창설. 남부집단군에 보내졌으나 바로 1944년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서 소련군 중전차연대들과 격전을 치르며 차량들을 소모, 507중전차대대에 잔존 티거를 전부 넘기고 티거2 중심으로 재편된다.[25] 이후로는 서부전선에 보내져 미군을 상대했다. 아르덴 대공세에 투입되었고 루르 포켓에 고립중 1945년 4월 14일 부대해산을 명령받는다.[26] 미군과 많이 싸운 탓인지 사진 자료로 자주 접할 수 있다. 부대마크는 W 모양의 워드아트에 방패를 든 호랑이. 중전차대대의 차량번호 마킹은 대대마다 다른 것으로 유명한데, 506중전차대대의 경우 W마킹의 색으로 중대를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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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7 중전차대대
1943년 9월 23일 창설. 폴란드에 주둔, 우크라이나를 주무대로 활동하였다. 1945년 2월에 퇴각 중 비스와 강을 만나나 도하 수단이 없어 보유한 모든 티거를 포기하고 자폭처리 후 강을 건넜다. 이들은 본국에 돌아와 티거 2로 재편했으나 생산량이 부족했던 관계로 야크트판터등의 다른 전차를 같이 장비한다. 이때받은 티거2는 1945년 사양으로 신형궤도와 개선된 전방휀더가 적용된 모델이다. 이후 미군과 교전하다가 차량을 모두 잃고 체코로 퇴각, 공장에서 헤처 구축전차 10기정도를 확보하고 종전일이 지난 1945년 5월 12일에 미군에 투항했지만 전쟁범죄 혐의가 있었는지, 이 부대원들은 나중에 소련에 넘겨진다. 부대마크는 검과 대장장이가 그려진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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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8 중전차대대
1943년 7월 15일 창설. 가장 불운한 중전차대대이자 가장 졸전한 중전차대대이다. 이 부대를 아는 몆몆 밀덕들에겐 명실상부 티거 브레이커 라는 별명이자 멸칭으로 유명하다. 8월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내졌지만 졸전과 삽질을 거듭[27] 결국 대대장 헬무트 후델 소령이 늑대굴로 불려가 히틀러에게 쪼인트 까이고 잘리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대대장이 바뀌어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아서 안치오 상륙 저지작전에서도 재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기동중 차량을 다수 버린다.[28] 결국 이러한 상상을 초월하는 삽질과 반복되는 한심한 작태에 빡친[29] 히틀러로부터 장비 전부를 504중전차대대에 양도하라 명령받고 중전차대대의 이름을 단 보병전투단으로 싸우다 항복한다.[30] 종전까지 이들이 자폭시킨 티거가 총 손실 78대 중 무려 46대라고 한다. 이 정도면 정말 답이 없는 수준.
이 부대의 재미난 일화가 있는데 이탈리아 전선에서 잘 싸우며 신나게 돌격하던 미군 제 2기갑사단 소속의 셔먼 전차 2대가 결국 위치를 잃고 헤매다가 508중전차대대에 생포당한다. 공짜로 셔먼 2대가 생긴 508중전차대대는 이 셔먼의 포탑, 무장과 통신기 등을 뜯어내고 구난전차로 마개조한다. 이렇게 마개조 된 베르게 셔먼 2대는 티거 견인과 수리도 무리없이 수행했다고...
참고로 부대마크는 물소이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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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9 중전차대대
제22기갑사단의 제204기갑연대 병력을 기간으로 1943년 9월 9일 편성 개시됐다. 창설되자마자 10월 28일, 곧장 동부전선 투입명령을 받았다. 2차 키에프 전투에서 제25기갑사단에 배속되었으나 졸전으로 별 전과 없이 차량 상당 수 손실.[32] 1944년 3월 베케 전투단의 지휘하에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선두에 서서 포위망을 닫으려고 증원된 소련 전차군단 2개를 연달아 갈아버리며 포위망을 열어낸다.[33] 하지만 6월 22일부터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대다수가 격파되었다. 이후 재편을 위해 독일로 귀국하지만 티거2 부대로 재편은 12월부터나 이루어졌다. 게다가 보급받은 최초차량은 아르덴전역을 위해 무장친위대 제501중전차대대로 관리전환이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간신히 편성된 대대는 헝가리 전선으로 보내졌지만, 신품 티거2는 불량품도 많고 정비여건도 되지 않아 2개 중대만 간신히 운용하는 수준이었다. 1945년 3월에는 3 기갑군에 배속되어 봄의 새싹 작전(Operation Frühlingserwachen)을 지원하고, 부다페스트 공방전에 구출부대로 참가하여 종횡무진 활약하며 남부집단군 병사들에게 새로운 특급 소방수로 추앙받는다. 당시의 전과가 후덜덜한데 독일군 구원부대의 공세가 돈좌되는 곳마다 509대대 소속 티거2가 나타나 소련 기갑세력들을 때려눕히고 돌파구를 열어주는가 하면, 건물을 파고 매복한 SU-100에 다른 판터중대가 박살 나자 중대장이 홀로 달려가 건물째로 관통저격을 날려 격파 했다. 1945년 2월 15일 공보에는 「부르메스터 소령이 지휘하는 제509중전차대대는 벌러톤 호수 동쪽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대대는 1월 18일부터 2월 8일까지 10량을 잃으면서 소련 전차와 자주포 203량, 포 145문, 항공기 5기를 파괴하는 등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고 그 기록을 전하고 있다. 부다페스트 함락 이후에는 4월 비엔나 공방전에 참가한다. 하지만 이미 독일본토가 함락되어가며 수리부품과 보급자체가 안되는 상태인지라 전차는 고장나는대로 포기하였고 최후에는 마지막 5량의 가동 티거2를 폭파 처분했다. 5월 9일 저녁 6시에 대대 잔여병력은 카블리츠 남쪽에서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미군에 투항한다. 부대마크는 모노톤의 호랑이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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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 중전차대대
1944년 6월 6일 창설. 동부전선 북쪽 끝에 배치되나 곧바로 바그라티온 작전이 터져 북부집단군이 밀려나면서 쿠를란드 반도에 고립된다. 502중전차대대 3중대와 함께 쿠를란드 집단군에 편성된다. 반도 특성상 충원이 불가능했고 502중전차대대 3중대가 철수하며 차량을 인도 받았지만 손실이 누적됨에 따라 가용차량은 1945년 3월 중순에 15대로 떨어졌다. 정수에 필요한 병력만 남기로 하고 이들은 바이스 전투단(Kampgruppe Wise)으로 재편되었다. 나머지 병력은 배편으로 철수하고 3중대는 4월에는 511대대(1945년 1월 5일 502 중전차 대대는 511 중전차 대대로 재편성되면서 소수의 티거2를 지급받았다. 티거2의 수량이 부족해 티거와 헤처를 혼성장비)와 함께 헨셀사로 직접 찾아가서... 최후에 생산된 티거2를 수령하였다(마지막 생산분은 광폭궤도가 없어서 수송용의 협궤도를 장착하였다. 문어위장이라 불리는 위장무늬가 특징)수령시점 즈음에 독일이 항복한다. 510중전차대대는 영국군에, 반도를 지키던 바이스 전투단은 소련군에 항복한다. 부대마크는 곰이 그려진 방패이며, 본 대대 소속의 티거의 포탑넘버 도색은 궤도 걸이 부분을 피해 포탑 후면 부분에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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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도이칠란트 전차연대 제3대대
1943년 6월 29일 창설되어 국방군 최정예라 할 수 있는 GD사단 안에서도 전차전력의 중핵 역할을 수행 한다. 종전까지의 전투손실 교환비는 무려 16.67정도. 1944년 12월 16일 그로스도이칠란트 중전차대대로 개편. 본 대대의 예하 중대는 제 11중대, 제 12중대, 제 13중대 이렇게 3개 중대로 편성 되었으며, 1944년에 찍힌 사진에서는 티거1 초기형과 후기형을 섞어서 썼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중전차대대는 포탑 넘버링의 앞 부분이 A,B,C로 시작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 알파벳은 각각 11중대, 제12중대, 제 13중대의 중대 넘버링이다. 예를 들어서 A12호 티거는 "제 11중대 제 1소대 2호 차량"이라는 소리가 된다.
참고로 고바야시 모토후미작 무기와 폭약의 겉표지에서 나오는 티거가 바로 그로스 도이칠란트 중전차 대대 소속의 티거1 후기 생산형이다.
2.2. 무장친위대 소속 대대
처음에는 무장친위대 소속 기갑사단들에 좋은 장비를 줄 목적으로 중대 규모의 티거를 지급한데서 출발했으나 이들의 전과가 훌륭했던 관계로 대대규모로 확대한다. 대전말기 어떤 이유에선지 국방군 501,502,503대대의 명칭을 이들에게 부여했다.-
제1 SS기갑군단 전차대대
1943년 7월 19일 창설, 제1 SS기갑사단 'LSSAH' 13중대 등을 흡수하며 SS제101 중전차대대로 개편. 미하엘 비트만이 13중대 시절부터 복무하였던 부대. 주로 서부전선에서 활약하였으며 비트만이 영국군의 셔먼 파이어플라이의 매복 공격에 당해 사망한 곳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차량 대부분을 잃고 티거2를 정비, SS제501 중전차대대로 개편되었다. 이후 그 유명한 요아힘 파이퍼 중령의 '파이퍼 전투단'소속으로 아르덴 대공세 때 활약했으며 벨기에에서 철수한 후엔 헝가리로 이동해 봄의 새싹 작전에 참여한다. 이후 패전 직전까지 소련군과 교전하다 오스트리아로 퇴각하는데, 이 무렵 34대의 생존차량이 있었으나 수리를 못하고 대부분 방기했으며 미군이 주둔하던 알텐마크트에서 항복한다. 여담으로 야크트티거의 생산공장에 찾아가 최후의 야크트티거 2대를 확보했으나 전투에 활용하지는 못했다고....비트만 이외에도 유명한 전차장으로 그의 포수였던 발타자르 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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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SS기갑군단 전차대대
1943년 4월 창설. 제2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소속의 티거 중대에서 출발, SS제102 중전차대대로 알려졌으며 이들은 노르망디 전투에 급파 되어 캉 부근에서 격전을 펼치는등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힌 부대이다. 노르망디 전투 종료시점에 모든 차량을 잃었으며[34] 1944년 말 티거2를 지급받고 SS제502 중전차대대로 재편. 동부전선에 돌아가지만 1945년 4월중 할베 전투 당시 할베 포켓에 고립되고 전멸한다. 502중전차대대는 할베 포켓에서 돌파를 시도하였고 그래도 티거 2가 워낙에 강력한 전차라 소수의 차량들이 돌파에 성공하여 이후 다른 부대들이 본대를 잃은 502대대의 킹타이거가 4월말 우리 부대에 합류했다는 기록들을 남겼다.[35] [36] 이들은 전차를 버리고 엘베강을 건너는 데에 성공해 미군에 투항했다. 전차 에이스로 빌리 페이[3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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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 SS전차연대 제2대대
1943년 7월 1일 창설.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 소속 보병 중대에서 출발했다.[38] 이들의 전과가 화려하다보니 중전차를 지급하고 규모를 키우다가 SS제103 중전차대대로 명명 한 것. 노르망디 전투당시 완편되지 않은 관계로 보유 장비들을 위의 다른 SS대대들에 보급해 주고 대신 티거2 기종전환 훈련에 집중했다. 1944년 12월에서야 드디어 티거2를 지급받고 SS제503 중전차대대로 개편, 비스툴라 집단군(Army Group Vistula)에 보내졌고 동부전선에서 방어전을 치르면서 소모 됐다.[39] 단 4대의 티거2로 수백대의 전차를 격파하며 베를린 북쪽으로 향하는 소련 사단병력의 발을 10여일간 묶는 기행을 벌이는가 하면[40], 1개 소대 병력이 베를린 동부의 작은 마을들을 거점으로 백여대의 전차를 격파하며 베를린의 포위를 저지하였다. 이후 12대의 킹타이거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4호 전차, 3호 돌격포로 베를린 전투에 참가, 제국의사당에서의 전투 등 베를린에서도 수백대의 소련군의 T-34-85, ISU-122, IS-2 등의 전차를 격파하고 분전 했지만 이들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베를린이 항복한 후 킹타이거 5대를 포함한 마지막 생존차량들은 항복명령을 거부, 12군과 함께 엘베강 동쪽에 방어선을 치고 강을 건너 미군에 투항하는 9군 장병과 피난민들을 지키며 소멸했다.[41] 티거 2 에이스 카를 쾨르너 상사가 복무했던 부대이다.
3. 편제 및 차량 번호 부여법
중전차대대는 전장상황에 따라 임시로 4중대가 생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3개 중대가 기본이다. 각 중대에는 3개 소대씩 편제된다. 3개 중대의 각 소대(총 9개 소대)당 4대씩 총 36대, 여기에 중대별로 중대장 직속 차량 2대씩, 대대본부 소속 통신차량 3대, 모두 합하여 45대가 정수가 된다. 수식으로 정리하자면 "[{(4대×3개 소대)+중대장 직속 2대}×3개 중대]+대대본부 3대=45대"차량번호는 3자리로 만들었으며 첫 자리는 중대번호, 두번째 자리는 소대번호, 세번째 자리는 소대소속 차량번호이다. 예를들어 오토 카리우스의 차량 217번은 2중대 1소대 7번 차량이 되고[42] 미하엘 비트만의 차량 212번은 2중대 1소대 2번 차량이 되는 것이다.
대대장에게 배치 된 차량은 S01, 혹은 01과 같은 식으로 2자리로, 중대장 휘하의 차량은 301과 같은 방식으로 소대번호만 0이 된다. 물론 수리 상황에 따라 남의 소대 차량도 당겨 쓰거나 하는 일은 비일비재 했다. 또 부대에 따라서는 에이스 전차장이 그날 그날 상태가 양호한 차량을 골라타기도 하였다.
4. 철십자 훈장 수훈자 목록
등급/서훈 순서로 기술 함.중전차대대 인물은 아니지만 연대급 이상의 지휘관중 중전차대대와 관련 깊은 인물은 ●로 표시함
- 금강석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금강석 이상의 수훈자는 없음)
히아친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 폰 그로스-자우헤운트캄미네츠(Hyazinth Graf Strachwitz von Gross-Zauche und Camminetz)●[43]
훈장번호 11, 국방군 소장, 북부집단군 전차부대 총사령관, 1944년 4월 15일, 관련 공적 나르바 공방전
훈장번호 11, 국방군 소장, 북부집단군 전차부대 총사령관, 1944년 4월 15일, 관련 공적 나르바 공방전
-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4명)
히아친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 폰 그로스-자우헤운트캄미네츠(Hyazinth Graf Strachwitz von Gross-Zauche und Camminetz)●
훈장번호 27, 국방군 대령, 그로스도이칠란드 전차연대 사령관, 1943년 3월 28일, 관련 공적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프란츠 베케 박사(Dr. Franz Bäke)●[44]
훈장번호 49, 국방군 중령, 베케 중전차연대 사령관, 1944년 2월 21일, 관련 공적 제2차 키예프 전투,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미하엘 비트만(Michael Wittmann)
훈장번호 71, 무장친위대-대위, 101중전차대대 2중대장, 1944년 6월 22일, 관련 공적 빌레르보카쥬 전투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훈장번호 119, 무장친위대-중령, SS 1기갑연대 연대장, 1945년 1월 11일, 관련 공적 아르덴 대공세
훈장번호 27, 국방군 대령, 그로스도이칠란드 전차연대 사령관, 1943년 3월 28일, 관련 공적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프란츠 베케 박사(Dr. Franz Bäke)●[44]
훈장번호 49, 국방군 중령, 베케 중전차연대 사령관, 1944년 2월 21일, 관련 공적 제2차 키예프 전투,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미하엘 비트만(Michael Wittmann)
훈장번호 71, 무장친위대-대위, 101중전차대대 2중대장, 1944년 6월 22일, 관련 공적 빌레르보카쥬 전투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훈장번호 119, 무장친위대-중령, SS 1기갑연대 연대장, 1945년 1월 11일, 관련 공적 아르덴 대공세
-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장 (7명)
베른하르드 자우판트(Bernhard Sauvant)
훈장번호 260,국방군 소령, 505중전차대대 대대장, 1943년 6월 28일, 관련 공적 쿠르스크 전투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훈장번호 377, 무장친위대-중령, SS 1기갑연대 연대장, 1944년 1월 27일, 관련 공적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미하엘 비트만(Michael Wittmann)
훈장번호 380, 무장친위대-소위, 제1 SS기갑사단 'LSSAH' 13중대 소대장, 1944년 1월 30일, 관련 공적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에리히 뢰베(Erich Löwe)
훈장번호 385, 국방군 소령, 501중전차대대 대대장, 1944년 2월 8일, 드네프르 저지대 공세중 실종, 전사처리되며 서훈
클레멘스-하인리히 그라프 폰 카게네크(Clemens-Heinrich Graf von Kageneck)
훈장번호 513, 국방군 대위, 503중전차대대 대대장, 1944 6월 26일, 전투 지휘중 중상.[45]
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
훈장번호 535, 국방군 중위, 502중전차대대 2중대장, 1944년 7월 27일, 관련공적 마르나파 전투
요하네스 뵐터(Johannes Bölter)
훈장번호 581, 국방군 중위, 502중전차대대 1중대장, 1944년 10월 10일, 티거 승차 도중 포탄 파편으로 중상
5회 부상으로 황금전상훈장을 받고 종전까지 전차장 양성 교관으로 활동, 교관으로 임명되며 서훈
훈장번호 260,국방군 소령, 505중전차대대 대대장, 1943년 6월 28일, 관련 공적 쿠르스크 전투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훈장번호 377, 무장친위대-중령, SS 1기갑연대 연대장, 1944년 1월 27일, 관련 공적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미하엘 비트만(Michael Wittmann)
훈장번호 380, 무장친위대-소위, 제1 SS기갑사단 'LSSAH' 13중대 소대장, 1944년 1월 30일, 관련 공적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에리히 뢰베(Erich Löwe)
훈장번호 385, 국방군 소령, 501중전차대대 대대장, 1944년 2월 8일, 드네프르 저지대 공세중 실종, 전사처리되며 서훈
클레멘스-하인리히 그라프 폰 카게네크(Clemens-Heinrich Graf von Kageneck)
훈장번호 513, 국방군 대위, 503중전차대대 대대장, 1944 6월 26일, 전투 지휘중 중상.[45]
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
훈장번호 535, 국방군 중위, 502중전차대대 2중대장, 1944년 7월 27일, 관련공적 마르나파 전투
요하네스 뵐터(Johannes Bölter)
훈장번호 581, 국방군 중위, 502중전차대대 1중대장, 1944년 10월 10일, 티거 승차 도중 포탄 파편으로 중상
5회 부상으로 황금전상훈장을 받고 종전까지 전차장 양성 교관으로 활동, 교관으로 임명되며 서훈
일반 철십자 훈장은 2급과 1급을 합쳐서 7~80만, 혹은 2급 230만, 1급 33만여개[46]가 수여되었기 때문에 그 수가 너무 많아 생략.
[1]
전차량이 화차 수송용 협궤도를 장착하고 있다. 따라서 전선으로 출동전 기차에 적재하기 위한 사열을 받고있는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적재를 위홰 화차폭 보다 큰 사이드 스커트도 제거된 상태이다.
[2]
발음은 "슈베레 판처아프타일룽".
[3]
11개는 국방군 소속, 3개는 무장친위대 소속 대대였다.
[4]
속칭 포르셰 티거
[5]
벨라루스는 당시 전선에서 가장 돌출된 지역이었다.
[6]
이 때 노획된 킹타이거 중 한 대는 현재 러시아 쿠빈카 전차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7]
이 항복은
전장의 상황은 모르고 책상에 앉아서 지도만 보고 일선 병력 하나하나를 지시한 히틀러의 대표적 삽질 사례로 60톤이 넘는 티거2들을 전부 늪지대로 보내버렸다. 발이 묶인 이들은 몇차례 탈출을 시도했으나 기동불능에 빠져 결국 항복한 것. 거기다 전임 대대장은 숙청까지 당했으니 이런 정신나간 명령에 거부조차 못한 것.
[8]
종전까지 105~107대의 티거, 8대의 티거2를 지급받고 1400대의 전차와 2000문의 화포를 격파. 전투손실 교환비는 18:1정도.
[9]
현재의 라트비아 서북부지역.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중부집단군을 분쇄한 붉은군대 주력이 그대로 북상을 시도했다. 이에 북부집단군은 황급히 철수를 시도했고 이 두 군세가 충돌한 지점이 바로 쿠를란트 지역이다.
[10]
아카데미과학에서 발매한 최후기형
킹타이거가 이 물건이다.
[11]
정상적인 상황에서 티거 차량 넘버는 소대 정원수인 4번까지이다.
[12]
이는 포르셰 티거가 방산 비리로 발주도 없이 생산 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13]
스코어가 정말 흠좀무하다. 쿠르스크 (3대 손실 385대 격파), 키예프(4대 손실 240대 격파), 코르순 체르카시(5대손실 267대격파), 손실은 대부분 퇴각중 자폭이나 친위대의 오인사격과 같은 이유로 발생했다.
[14]
정비중대가 기습을 당해 수리중인 티거 23대가 노획당하는 참사가 일어난다. 이후 탈출과정에서도 대부분의 차량을 자폭
[15]
이 때부터 부다페스트 공방전 직전까지 비전투차량을 포함 각종 차량 약 1500대 격파
[16]
전차연대장은 베케 전투단을 이끌었던 프란츠 베케 박사.
[17]
전투 일지가 분실되어 1945년 2월까지의 스코어만 확인한 자료이다.
[18]
문서 상단 사진이다.
[19]
이 때 1중대 3소대 1호차 티거를 영국군에게 노획당하는데 이것이 영화
퓨리에 나온 그 유명한 131호차 티거이다.
[20]
1대가 배편으로 퇴각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1]
작전이 연기되면서 쿠르스크 전투 모의 훈련을 엄청나게 했다고 한다.
[22]
적전차 220대 이상 격파. 공세 당시 북익의
발터 모델 휘하 9군의 진격은 지지부진했으나 막판 쿠르스크 전선의 균열을 열었는데 505중전차대대가 이룬 업적이라고 한다.
[23]
기사의 투구가 뾰족하여 생쥐의 주둥이 같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일 뿐, 기사가 생쥐인 것은 아니다!!
[24]
타미야사의 티거 후기형 구형모델의 박스아트(배경이 아직 그려지던 시절의 박스아트)에는 제505 중전차대대 소속의 전차가 그려져 있다. 신형모델에는 제502 중전차차대대 소속 티거가 그려져 있다.
[25]
이들도 포르셰포탑 사양을 다수 인도 받는다.
[26]
발터 모델 원수 최후의 명령 항목 참조
[27]
지형에 대한 이해 없이 기동중에 전차가 과열로 엔진이 폭발하거나, 산악지형의 연비를 생각못하고 기동 계획을 짰다가 그대로 연료가 바닥나 19대의 신품 티거를 자폭시키는 등...
[28]
티거 사진 중
옆으로 자빠져 미군 병사들의 기념촬영 명소로 쓰인 매우 굴욕적인 사진이 있는데 바로 이 부대가 안치오 상륙 저지를 위해 기동 중 삽질로 전복되자 그냥 전투한번 안하고 버리고 간 차량이다.
[29]
당시 티거의 가격은 4호 전차 같은 타 전차들에 비해 2배 정도 더 비쌌고, 전투 불능 판정을 받은 티거도 어떻게든 다시 정비창으로 끌어와 재생시키거나 연합군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으려 자폭시켰다. 이렇게 애지중지하며 쓰는 전차로 졸전을 치른 것도 모자라서 버리고 도망까지 갔으니 히틀러가 화를 안 낼 리가...
[30]
본국에서 티거2를 준다고 했지만 티거 1대와 판터 6대만 도착했다. 1중대가 이를 장비하고 나머지는 보병으로 싸웠다고 한다.
[31]
처참한 전과와 오명덕에 모형으로 접하는게 불가능에 가깝지만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아카데미 과학에서 중기형 티거에 부대마크인 물소 데칼을 넣어주었으니 참고하자. 또한 타미야에서도 자사 후기형 티거에 물소데칼을 넣어준다.
[32]
구데리안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은 훈련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차출되었고, 구데리안은 이에 크게 반발했었다고 한다.
[33]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덧붙이자면 소련군 1개 전차군단(tankovy korpus)는 타국의 1개 기갑사단급 편제이다. 어찌되었건 509대대가 올린 전공이 전설적인 활약인 것임은 틀림없다.
[34]
생존차량은 다수 있었으나 연료부족, 고장, 교량붕괴등으로 모두 손실한다.
[35]
여담이지만 이미 전군이 와해되다시피 하여 연합군에게 항복하려 패주하던 이 시점에서 독일군 보병부대에게 기갑병과의 위상은 상상 이상이었다. 얇은 포위망을 돌파해 주거나 부상병이나 최소한의 보급품 정도는 실어서 후퇴 속도를 올려주거나, 강력한 전투력으로 소련군의 공격으로부터 후위를 맡아 시간을 벌어줄 수도 있기 때문.
[36]
실제로 어떤 판터 전차장의 회고를 보면 단차로 후퇴하던 중 퇴각하던 보병부대와 합류했는데, 보병부대에 상급 장교가 있었음에도 부사관급인 자신이 지휘를 맡았다고. 계급장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전차 승무원복이 곧 권위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들도 티거 2 1대와 합류했는데, 소련군의 매복에 걸렸을 때 그 티거 2가 시간을 벌어줘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 티거 2는 분노한 소련군의 가차없는 화염병 세례에 결국 엔진이 불타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판터도 보병들을 패닉으로 몰아넣은 소련 전차 수 대를 격파하며 대활약했다. 이 회고를 남긴 판터 전차장은 미군 점령지까지 도달해 전차를 파괴하고 항복해 무사할 수 있었다. 이 전차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그 보병들은 소련군에게
전멸당하거나 생포당해
시베리아로 보내졌을 것이다.
[37]
국내엔 유명하지 않지만 전후 생존하여 회고록을 남겼다.
[38]
전차병들이었는데 창설당시엔 잠시 보병으로 편성됐었다.
[39]
9군휘하
11 SS 노트르란트 사단에 다시 합류.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40]
고작 전차4대라고 가볍게 보고 JS-2나 T-34/85, ISU-152들을 회랑으로 축차투입했으나 전부 호랑이 밥이 됐다고 한다. 2개 소대가 로테이션으로 회랑을 사수했다고 하며 그 중 한대의 주인은
카를 쾨르너 상사
[41]
제국의사당의 전투를 이끈 게오르그 디어스의 경우에도 5월 2일
마르틴 보어만 등이 포함된 탈출 그룹을 이끌 던 중 아군의 대전차 지뢰에 기동불능에 빠져 전차를 자폭 처분했다. 이 그룹은 탈출에 실패하고 소련군에 사로잡힌다.
[42]
이는 다소 특이한 경우다. 중전차 대대의 한 소대의 티거 정원은 4대인데 카리우스의 경우는 7이다. 이는 당시 카리우스가 속해있던 502 중전차 대대는 본국에서 계산미스로 티거 전차를 충분히 보충해주고도 무려 3번씩이나 더 보내 준 탓에 임시로 저렇게 소대정원을 늘려서 편제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43]
전차백작이라는 별명이 있는 오토 카리우스의 자서전에 나오는 그분이 맞다. 슈트라흐비츠는 슐레지엔의 유서깊은 영주급 백작 가문 계승자로 귀족 계층의 나치화 포섭에 회유돼서 43년엔 나치당에 가입하고 모든 가족이 전장에 나갔다. 하지만 종전 후 각고의 노력으로 미군에 투항, 별 처벌은 받지 않고, 전쟁으로 영지(동독령 슐레지엔)와 후손을 모두 잃은 그는 시리아 군사고문을 역임하다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무려 40살쯤 차이나는 20세 여성과 결혼하고 서독에서 남은 여생은 잘 지내다 폐암으로 사망했고 지금도 슈트라흐비츠 가문이 이어지고 있다.
[44]
치의학
박사, 당시 유럽은 박사학위를 함부로 주지 않기 때문에 박사 학위자를 부를때는 귀족을 호칭하듯 반드시 박사라고 명시한다. 최종계급은 소장이었으며
국방군최고사령부(OKW) 모두가 그를 전차부대 야전사령관의 최고실력자로 평가하고 포위를 당하는 등 급박한 문제가 발생 할 경우 제일 먼저 투입할 소방수의 역할을 부여했다. 특히나 독일군도 절망적으로 봤던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서 적군의 포위를 열어낸 것은 이 사람의 공이 가장 크다. 연대장급 지휘관이면서도 수 많은 격파수를 기록했으며, 심지어 혼자서
판처파우스트로 적 전차를 격파한 일도 3번이나 있다. 이렇게 동부전선에서 역전의 용사들과 기적을 일으키던 그 조차도 아라쿠르에서는 반 이상이 새로 징집된
소년병인 휘하
판터부대가 전투시작과 동시에 차량을 버리고 도주하는 것을 참담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종전후엔 잠시 미군 포로 생활 후 다시 본업인 의사로 돌아간다.
[45]
덕택에 포로가 되지 않고 종전을 맞는다. 전후 부하들의 명예가 더렵혀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503중전차대대의 활약과 일화들을 모아 회고록을 남긴다. 때문에 503중전차대대의 44년 여름까지의 활약상은 상당히 잘 알려져 있으나 그 이후 부다페스트 전투등의 사료는 부족한 편이다.
[46]
자료마다 수치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