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7 19:20:22

1식 기동 47mm 속사포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일본군 화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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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式機動四十七粍砲
1. 개요2. 제원3. 개발4. 특징5. 관통력6. 파생형
6.1. 1식 47mm 전차포6.2. 기타
7. 배치8. 실전9. 평가10. 후계자

1. 개요

1식 기동 47mm 속사포(一式機動四十七粍速射砲)[1] 일본군이 1941년에 채용한 대전차포며,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약 2,300문이 만들어졌다. 사실상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주력 대전차포다.

2. 제원

  • 포신장 : 2,526.5mm (53.7구경장)
  • 중량 : 800kg
  • 구경 : 47mm
  • 초속 : 830m/s
  • 최대사정거리 : 6,900m
  • 포신부앙각도 : -11도 ~ +18도
  • 포신선회각도 : 좌우 합계 58도
  • 약실 : 수평폐쇄식
  • 사용탄 : 철갑탄, 고폭탄
  • 생산수량 : 약 2,300문

3. 개발

일본 제국 육군은 94식 37mm 속사포의 관통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포신과 약실용적을 포함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개량한 1식 37mm 속사포를 개발하고 여기에 맞는 신형 철갑탄을 개발함과 동시에 보다 큰 구경의 대전차포 개발에 들어갔다.

해당 대전차포의 개발에는 해군이 청일전쟁 당시 어뢰정에 채용한 적이 있었던 47mm 속사포도 참고하였다. 이런 노력끝에 1937년에 시제 97식 47mm 속사포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47mm 구경의 53.5구경장의 포신을 가지고 포구초속 730m/s 정도의 위력을 가진 포로 처음엔 말이 끄는 방식이었으나 1939년 3월에는 트럭 등의 자동차나 장갑차가 고속 견인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차기 속사포 설계에 기초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에서 약체인 국민혁명군 정도만 상대하던 당시의 일본 제국 육군은 더 강력한 대전차포에 대한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해서 채용을 담당하는 군수심의회 뿐 아니라 일선에서도 요구가 없어서 해당 대전차포는 채용되지 않은 채 사라진다.

결국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으로 고쳐 부를 정도로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대패배를 한 경험으로 신형 대전차포와 신형 전차포의 필요성을 인식한 일본군은 채용을 포기한 전작인 시제 97식 47mm 속사포를 기반으로 1939년 9월에 설계에 들어가 1941년 7월에 시제 대전차포를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1식 기동 47mm 속사포였다.

하지만 아직 쓴 맛을 덜보았는지 가제식이라는 채용이 불확실한 상태로 계속 놓아두다가 태평양 전쟁에 돌입한 다음 스튜어트 전차의 쓴 맛을 본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고 1942년 5월에 해당 대전차포는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4. 특징

1식 기동 47mm 속사포는 94식 속사포와 같은 모양으로 개각식(開脚式)의 포가를 장비했다.

가장 큰 특징은 이제까지 94식 37mm 속사포와 시제 97식 47mm 속사포가 군마를 써서 느리게 견인되는 방식이었지만 해당 속사포는 차량으로 고속견인이 가능한 방식이라는 점이다. 챠량으로 고속견인을 하기 위해서는 포신을 탑재하는 대차부터 튼튼한 것으로 교체해야 하며 대차의 바퀴엔 펑크에 강인한 펑크레스 타이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차량으로 고속견인중에 대차가 박살나거나 하는 일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명칭에 기동(機動)이라는 단어가 붙는데 해당 단어는 고속견인이 가능한 기동식 대차에 공기 주입식 고무타이어를 장비해서 차량을 사용해서 고속으로 견인해도 괜찮다는 의미며 속사포(速射砲)는 당시 일본 제국 육군에서 대전차포란 명칭이 방어적인 의미가 있다고 싫어해서 대신 붙인 이름이다.

해당 대전차포가 개발될 무렵에는 대부분의 타국 대전차포들이 고속견인이 가능했고 고무 타이어를 장착한지 오래였다. 따라서 나치 독일의 PaK 36과 같은 일반적인 대전차포와 별로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된다.

그 외에 1식 기동 47mm 속사포는 94식 37mm 속사포처럼 고폭탄도 지급되어 비장갑목표물도 공격이 가능했으며,실용적인 연사속도는 1분당 10발 내외였다.

5. 관통력

1942년 5월에 1식 기동 47mm 속사포가 정식으로 채용될 때 같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텅스텐을 사용한 철갑탄인 텅스텐강 조형탄(タングステン鋼蚤形弾)을 사용한 관통력은 아래와 같다. 해당 텅스텐 철갑탄은 특갑(特甲)이라고 불리는 시제철갑탄의 베이스가 된 탄이다. 예시
1식 기동 47mm 속사포로 텅스텐 철갑탄을 수직각도 장갑판에 사격
거리 제1종 방탄강판
( 균질압연장갑)
제2종 방탄강판
( 표면경화장갑)
0m 85mm 65mm
200m 79mm 55mm
500m 70mm 45mm
1000m 56mm 31mm
1500m 45mm 25mm

1942년 5월에 시제철갑탄인 탄환강 제1종 병제 조형 철갑탄(弾丸鋼第一種丙製蚤形徹甲弾)도 실험한 자료가 남아있다. 해당 철갑탄은 개량을 거쳐서 1식 철갑탄으로 제식화되었으며 관통능력은 1식 철갑탄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한다
1식 기동 47mm 속사포로 1식 철갑탄을 수직각도 장갑판에 사격
거리 제1종 방탄강판
( 균질압연장갑)
제2종 방탄강판
( 표면경화장갑)
200m 72mm 48mm
500m 65mm 39mm
1000m 52mm 28mm
1500m 43mm 20mm

47mm라는 구경을 감안하면 94식 37mm 속사포에 비해서 성능향상폭이 적은 편이며 특히 표면경화장갑만 만나면 성능이 크게 하락하는 점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텅스텐을 사용해도 관통능력이 고작 7mm 증가하는 한심스러운 결과까지 나올 정도니 답이 안나올 지경이다. 그리고 해당 실험결과는 수직장갑에 정확히 명중하는 것이니 실제 전장에서는 경사장갑과 싸워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전에서의 관통력이 더 안좋게 나올 것은 분명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당시의 일본 제국의 기술력 상황상 야금 기술도 부족해서 탄두의 강도도 낮아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으며 그 외에도 철갑유탄의 구조상 내부 작약을 충분하게 넣기 위해서 탄두 내부구조 및 격벽이 전체적으로 얇아져서 포탄이 착탄시 관통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거나 깨지는 문제도 언급되었다.

그래서 전쟁중인 다급한 상황에서 포탄의 개선을 서두른 결과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 제작되었다고 보이는 육군대학교 연구부의 자료에서는 좀 더 개선된 결과가 나온다.
1식 기동 47mm 속사포로 1식 철갑탄을 수직각도 장갑판에 사격
거리 제1종 방탄강판
( 균질압연장갑)
제2종 방탄강판
( 표면경화장갑)
300m 84mm 57mm
400m 81mm 54mm
500m 78mm 51mm

표면경화장갑에 약한 점은 개선이 덜되었지만 전반적으로 관통력이 상승했다는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철갑유탄의 구조를 강화하고 격벽의 두께를 늘려서 착탄시 깨지거나 부러지지 않게 개선한 것이 주요 개선점이라고 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패전한 후 나온 미국 육군성의 1945년 8월의 보고서에서 1식 기동 47mm 속사포의 관통력은 아래와 같이 나온다.
1식 기동 47mm 속사포로 1식 철갑탄을 장갑판에 사격
거리 수직각도 장갑판 수직에서 30도 경사를 준 장갑판
228.6m (250야드) 76mm (3인치) 57mm (2.25인치)
457.2m (500야드) 70mm (2.75인치) 51mm (2인치)
914.4m (1000야드) 51mm (2인치) 36mm (1.4인치)
1371.6m (1500야드) 41mm (1.6인치) 30mm (1.2인치)

그 외에 철갑탄의 탄종이나 명중한 장갑판의 종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5년 12월의 미국 육군 제6군의 정보 자료에 의하면 1식 기동 47mm 속사포로 수직 각도 장갑에 영거리 사격을 할 때는 114.3mm (4.5인치)의 관통력을 보인 사례도 있다고 한다. 수직장갑에 영거리 사격이라 실전성은 전혀 없지만 해당 대전차포로 낼 수 있는 최대위력이라고 보면 된다.

철갑탄을 생산하던 도중에 설계 변경까지 해가면서 개량했지만 성능이 안좋은 이유는 포탄용 강철의 성분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의 철갑탄용 강철은 고작 0.006% - 0.015% 수준의 극미량의 크로뮴만 함유한 그냥 강철이었다. 당시의 나치 독일과 미국은 철갑탄에도 1%의 크로뮴이 포함된 크롬강을 사용하고 있으니 양자간의 격차가 크게 난 것이다.

이런 점을 늦게나마 일본군이 인식하고 새로운 철갑탄을 개발하려고 했지만 때가 늦었다. 1식 철갑탄 이후의 철갑탄들은 모두 프로토타입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특갑(特甲)으로 불리는 텅스텐-크롬강제의 철갑탄은 전쟁 말기쯤 가서야 극소량이 제조되었으며 특을(特乙)으로 불리는 니켈-크롬강제의 철갑탄은 제조가 이루어졌는지 여부조차 불분명하다. 1식 철갑탄의 후속작인 4식 철갑탄은 패전시에 완성품이 약 5,000발, 조립단계인 반제품이 약 30,000발 존재했지만 모두 일본 본국의 생산시설이나 탄약고에서만 발견되었고 실전에 배치되지는 못했다.

6. 파생형

6.1. 1식 47mm 전차포

파일:21134392_2000.jpg
파일:47_mm_type_1.jpg
전차 탑재형 1식 47mm 전차포

일본군의 기준으로 볼 때 관통력이 좋았으므로 전차에 탑재되기도 했다. 일단 97식 치하 신포탑 전차와 1식 중전차인 치헤에 탑재된 1식 47mm 전차포는 1식 속사포의 차량탑재형으로 같은 포탄을 사용했다. 단 1식 전차포는 포신이 짧으며 1식 속사포에 비해 위력이 약간 낮았다.

M4 셔먼과의 대결에서는 1945년 7월에 발행된 미군의 정보 보고서에서 M4A3 기준으로 457,2m 이내 거리부터는 장갑관통의 위험성이 있으니 유의하라는 내용이 있고 초근접사격이라고 볼 수 있는 사정거리 137.1m (150야드)에서 182.8m (200야드)에서 파생형인 1식 47mm 전차포의 사격으로 6발 중 5발이 관통되었다는 보고가 존재한다. 셔먼의 상세종류 및 철갑탄 명중 위치나 탄착 각도등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초근접 매복을 당했을 때 주의해야 한다는 수준이다. 그리고 최근 47mm 전차포탄의 품질이 개선되었다는 이야기도 추가되었다.

M4 셔먼이 초근접 상태에서 관통되는 이유는 셔먼 중 M4A1 M4A4 같은 종류가 전면 방호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M4A1는 설계 결함으로 인하여 전면장갑의 양측이 둥글게 말려들어가는 구조인지라 방호력이 60mm 수준밖에 되질 않았고, M4A4는 전면 관측창의 방호력 문제로 역시 마찬가지로 60mm 수준밖에 되질 않았다. 그리고 셔먼 전차의 초기형은 전면장갑이 57도 각도의 50.8mm이라 방어력이 낮았고 후기형에서야 47도 각도의 63.5mm로 늘어나므로 초기형의 방어력은 의외로 약하다. 그래서 초근접 상태로 매복을 당하면 관통당하는 것이다.

6.2. 기타

  • 1식 47mm 전차포 2형
    치헤용 전차포. 기존의 전차포를 포수가 어깨로 떠받치고 몸을 움직여서 조준을 수정하는 방식에서 타국의 전차처럼 핸들을 돌려서 조준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변경함. 그 외에 포방패의 수정이나 포수용 잠망경을 설치하거나 전차포 격발방식을 전기식으로 수정하는 것등이 포함된다. 전차포로서의 성능은 동일하다.
  • 시제 47mm 단(短) 전차포
    5식 경전차 케호(ケホ)용 전차포. 1942년 9월에 개발을 시작해서 1943년 6월에 시제품을 완성한 후 1943년 10월에 실용시험을 개시하고 1943년 12월에 완성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완성예정이 1945년 3월로 대폭 미루어졌다가 제대로 완성못하고 끝난다. 단(短)이란 이름이 붙은 것처럼 포구초속이 740m/s로 감소하고 포신부앙각도가 -15도에서 +20도이며 포신좌우각도가 좌우 각각 10도 정도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7. 배치

1식 속사포는 전쟁 후반기에 배치되기 시작하여 독립 속사포부대에 배치되었다. 해당 부대는 1개 대대는 대대본부, 3개 중대로 구성되어 각 중대에 4 ~ 6문이 배치되었다. 부대 명칭인 독립이란 군 직속부대란 말을 의미한다. 일부 부대는 1식 속사포의 배치가 늦었기에 94식 속사포를 같이 이용하였다.

8. 실전

개발 당시 최대의 난적으로 평가되던 미군 M3 스튜어트 M2A4 경전차의 50.8mm 전면장갑을 관통하는 성과를 보여서 더 이상 미군 전차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일본군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이 포를 바탕으로 한 47mm 전차포로 기존의 90식 및 97식 57mm 전차포를 교체하는 작업도 약 1,000대 정도로 상당량 진행되었기에 정말로 향후 전차전에서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문제는 포탄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했던 탓에 실전에서는 M2A4 경전차와 스튜어트 경전차의 장갑에 포탄이 착탄하면 포탄 탄두가 깨지는 등의 참상으로 그나마도 관통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빈발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가지 않아 미군은 75mm 전차포를 장착하고 전면경사장갑 50.8mm를 자랑하는 M4 셔먼을 대량생산해서 전선마다 뿌리기 시작했고, 동시기 미군과 태평양 전선에서 같이 싸운 영연방 호주군은 그보다 더한 58mm의 두터울 대로 두터운 전면 떡장갑을 두른 움직이는 성인 마틸다 II 보병전차가 있었다. 47mm 속사포는 500m이내 거리에서는 셔먼 전차의 정면 경사장갑을 관통 가능했다. 문제는 셔먼의 포탑 정면은 근거리에서도 관통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이렇듯 제약이 많은 47mm 속사포는 셔먼 전차와 마틸다 보병전차를 맞상대할만한 대전차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서 해당 속사포를 철저히 위장한 반지하 진지나 동굴에서 은폐 후 셔먼 전차나 마틸다 보병전차의 측면 장갑을 여러대의 속사포가 일제히 노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 경우 셔먼 전차의 측면 장갑은 38mm에 불과해서 700m 거리에서도 격파가 가능했다. 하지만 전방으로 돌격하는 전차가 방어군에게 측면을 보이려면 보통 100m 이내 거리여야 가능하므로 방어진지를 제대로 탄탄하게 구축하지 않으면 셔먼이나 마틸다 1대 잡고 보복의 고화력 총포탄 세례로 전멸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본군은 인명경시사상이 팽배했고, 희생을 완전히 무시한다면 이런 대전차포로도 셔먼을 상대할 수 있기는 했다. 일례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독립 속사포 제 22대대는 1945년 4월 5일 ~ 7일에 걸쳐 85고지 부근에서 정면으로 미군전차에 사격을 개시했는데 그 결과, 전차 5량을 파괴시켰지만 12문 중 10문의 속사포를 잃었다. 그 때문에 대대장 다케다(武田) 소위는 남은 2문을 도로에 좁게 배치하고 가짜 포구를 만들었다.

이는 고육지책으로 적 전차가 이를 보고 두려워 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목적이었다. 여기에 독립 보병 제272 대대는 적의 전차와 같이 따라오는 호위보병을 접근시키지 못하도록 항전했다. 이 방법은 먹혀들어 4월 19일 오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제22 대대의 속사포 외에 제272 대대의 육탄공격, 대공포, 연대포, 지뢰 등으로 미군 제 193전차대대 A중대의 M4 셔먼전차 30량 이상을 공격해 이 중 22량을 격파했다.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 종결까지 합계 147량의 M4 셔먼전차를 파괴했다. 이것만 보면 대전과를 올린 것으로 보이지만 그동안 작전을 위해 죽은 일본군의 수만 최소 수백 명이 넘었으며, 대전차포도 거의 상실하였다. 게다가 이렇게 격파된 전차의 대다수가 즉시 회수되어 수리된 다음 재투입되었고, 미군은 예비전차가 만 단위로 쌓여있었며 제해권마저 장악하여 바다를 통한 전차 수송에 문제가 없었으므로 결국 적 전차의 수를 제대로 줄이지 못했다.

그리고 애초부터 저런 식의 저성능 무기가 셔먼 전차에 이빨이 박히도록 만든 것 자체가 숙련된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갈아서 이룩한 업적이지 무기가 훌륭해서 얻은 성과가 아니다. 일본 제국 육군이 90식 75mm 야포라도 대량으로 양산해서 대전차포 부대에게 대량으로 지급했다면 셔먼과 원거리 교전이 가능해서 성과는 높고 희생은 적었을 것이다. 해당 야포는 프랑스의 1897년식 75mm 야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셔먼 전차의 75mm 전차포 M2–M6과 동급이므로 75mm 전차포 탑재 셔먼전차와 동등한 교전이 가능한데 일본군의 양산능력이 개판이라서 다 날려먹은 것이다.

9. 평가

사실 당대의 47mm 클래스 중에서도 부족한 기술력의 한계로 다소 떨어지는 성능을 보인다. 당장 체코의 스코다사가 만든 4.7 cm KPÚV vz. 38는 100m에서 82mm의 균질압연장갑을 관통했다. 프랑스 제3공화국 47mm APX 대전차포는 1,070kg의 중량에 47×380mm. R탄을 사용해서 포구초속 855m/s로 500m 거리에서 0도 수직장갑을 상대로 89mm를 관통하고 60도 경사장갑을 상대로는 50mm를 관통한다. 철갑유탄과 고폭탄도 보유하며 연사속도도 분당 15발에서 20발이다.

하지만 개발 당시를 기준으로 볼때 그래도 일본군이 만든 것 치고는 엄청난 성능저하 등의 막장사태가 적어서 일본군 입장에서는 그럭저럭 사용할만한 물건이었다.

문제는 일본군이 보통은 할힌골 전투, 잘 해봐야 대전 초반인 1941년까지만 통용될 수준의 대전차포를 가지고 본격적인 75mm급 대전차포가 필요한 제2차 세계 대전 말기까지 1선급 전력으로 굴려먹었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모자란 성능을 병사의 피로 보충하는 막장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에 더해서 수량마저도 부족해서 일선부대에 제대로 지급되지도 못했으며, 포탄 제조도 개판이라 간신히 근접해서 필살의 일격을 먹였더니, 포탄이 깨지는 바람에 관통되지 않아서 적 전차의 75mm 포탄세례를 받는 웃기지도 않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주인과 때와 장소를 잘못 만난 대전차포다. 물론 이것도 없었다면 일본군이 더 막장으로 돌입했겠지만...

10. 후계자

사실 일본육군도 47mm 속사포로는 장래의 대전차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어서 영국의 6파운더 대전차포 보다는 2년 정도 늦기는 했지만 시제 57mm 대전차포를 만들었고, 요구조건도 모두 충족했다. 일단 500m에서 75mm 관통, 1000m에서 65mm를 관통하는 능력을 보였으므로 500m에서 75mm 구형 셔먼의 전면 장갑은 아슬아슬하게 관통 가능했지만(신형 76mm 셔먼은 영거리 사격으로도 전면 장갑 관통 불가) 연합군이 잇달아 중(重)전차를 내놓는 현실로 볼 때 중량당 위력이 낮은 시제 57mm 속사포로는 장래의 대전차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보다 강력한 대전차포를 개발하기로 하고 채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이 대전차포가 채용되지 않은 이유는 양산이 불가능해서다. 원래 해당 대전차포는 1식 중전차 치헤에도 탑재가 예정되었으나, 양산이 불가능해서 결국 치헤도 치하 改와 동일한 무장을 탑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47mm 속사포의 후계자로 일본은 75mm, 105mm 대전차포도 연구하였다. 90식 75mm 야포를 바탕으로 3식 중전차 치누에도 탑재한 75mm 3식 전차포를 비롯해 중일전쟁중 노획한 1929년 모델 보포스 75mm 대공포를 복제한 4식 75mm 대공포를 바탕으로 5식 75mm 대전차포를 만들어 4식 중전차 치토 5식 포전차 나토에 장착한다. 시제 105mm 대전차자주포에 쓰일 시제 105mm 전차포도 제조는 되었지만 차체는 완성도 못한채 패전하고 만다. 나머지 완성된 무기들도 본토 결전을 이유로 일본 본토에만 배치되었고 수량도 매우 적었다. 게다가 일본이 패전하면서 실전경험을 쌓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1식 기동 47mm 속사포는 대량양산된 것 중에는 일본군의 최강 대전차포로 남게 된다.


[1] 정식 명칭은 "1식 기동 47mm 포(一式機動四十七粍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