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8:18:14

히포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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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Greeks
※ 2009년 그리스 Skai TV 방송이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그리스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알렉산드로스 3세 게오르요스 파파니콜라우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소크라테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리스토텔레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플라톤 페리클레스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콘스탄티노스 카라테오도리 멜리나 메르쿠리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니코스 카잔차키스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호메로스 마노스 하지타키스 레오니다스 1세 히포크라테스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피타고라스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마리아 칼라스 아르키메데스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 엘 그레코 콘스탄티노스 11세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리가스 페레오스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아리스 벨루키티오스 요안니스 메탁사스 니코스 갈리스 게오르기오스 카라이코스 데모크리토스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디오니시오스 솔로모스 야니스 마크리야니스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 야니스 리트오스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테미스토클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투키디데스 유클리드(에우클레이데스) 파블로스 멜라스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아테네의 크리스토둘로스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 테오도로스 자고라키스 디미트리 나노풀로스 무명용사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페이디아스 아리스토파네스 코스티스 팔라마스 에톨리아의 코스마스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소포클레스 니코스 벨로야니스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니콜라오스 마르지오리스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에피쿠로스 알렉산드로스 파파디아만티스 오톤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반젤리스 솔론 클레이스테네스 아이스퀼로스 바실리오스 2세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콘스탄티누스 1세 이온 드라구미스 코스타스 시미티스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테오 앙겔로풀로스 니코스 실루리스 스텔리오스 카잔티디스 차릴로스 플로라키스 에우리피데스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카롤로스 코운 유스티니아누스 1세 라키스 라조폴로스 헤로도토스 다나시스 벤고스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헬레네 글리카츠아흐와일러 카티나 팍시누 알리키 부지욱라키 마르코스 밤바카리스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바실리스 치차니스 피로스 디마스 마노스 로조스 마노리스 글레조스 엘레나 무잘라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필리포스 2세 디미트리스 혼 라스카리나 부불리나 탈레스 프락시텔레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
Hippocrates
파일:히포크라테스.png
이름 <colbgcolor=#ffffff,#191919>히포크라테스 2세
(Ἱπποκράτης Β΄; Hippocrates II)
코스[A]의 히포크라테스
(Ἱπποκράτης ὁ Κῷος; Hippocrates of Kos)
시대 고대 그리스, 페리클레스 집권기
출생 기원전 460년
그리스 코스[A]
(현 그리스 공화국 남에게주 코스)
사망 기원전 370년경 (향년 약 90세)
그리스 라리사[A](추정)
(현 그리스 공화국 테살리아주 라리사)
직업 의사, 학자
종교 고대 그리스 다신교
가족 할아버지 히포크라테스 1세
아버지 헤라클리데스
양자 테살루스, 드라쿠스

1. 개요2. 생애3. 어록4. 히포크라테스 선서5.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1280px-ASCLEPEION_COS_Franck_Devedjian.jpg
히포크라테스가 의술을 행했던 코스의 아스클레피온.
아스클레피온은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시는 신전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기 활동했던 의사. 당시까지만 해도 종교적 신비주의의 일환으로 다루어졌던 의술을 학문적 개념으로 분리하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서양에서 의학의 아버지(Father of Medicine)로 불리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따 오늘날에도 전 세계 의과대학의 졸업식에서 시행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로도 유명하다. 다만, 현재 낭송되고 있는 선서문은 히포크라테스가 선서한 원문이 아니라 194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22차 세계의사회 개정 선언문이다. 기존의 선서 내용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관점에서 작성한 글이다 보니 현대의 도덕 윤리나 사회 요소와는 어긋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의료직에 입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나는 인류에 봉사하는 데 내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
*나는 마땅히 나의 스승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나는 양심과 위엄을 가지고 의료직을 수행한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하여 고려할 것이다.
*나는 알게 된 환자의 비밀을 환자가 사망한 이후에라도 누설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능력이 허락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의료직의 명예와 위엄 있는 전통을 지킨다. 동료는 나의 형제며, 자매다.
*나는 환자를 위해 내 의무를 다하는 데 있어 나이, 질병, 장애, 교리, 인종, 성별, 국적, 정당, 종족, 성적 지향, 사회적 지위 등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
*나는 위협을 받더라도 인간의 생명을 그 시작에서부터 최대한 존중하며, 인류를 위한 법칙에 반하여 나의 의학지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이 모든 약속을 나의 명예를 걸고 자유의지로서 엄숙히 서약한다.[4]

2. 생애

히포크라테스의 생애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간략하게 정리한 그의 삶은 이와 같다. 히포크라테스는 코스 섬에서 태어나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을 여행하여 학식을 쌓았다. 이후 그는 코스 섬에 돌아와 학교를 세워 제자들에게 그의 의학을 가르쳤으며 의학서를 남겼다. 그의 의학서는 이후 <히포크라테스 문헌>으로 엮여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3. 어록

Ὁ βίος βραχὺς, ἡ δὲ τέχνη μακρὴ, ὁ δὲ καιρὸς ὀξὺς, ἡ δὲ πεῖρα σφαλερὴ, ἡ δὲ κρίσις χαλεπή.
Δεῖ δὲ οὐ μόνον ἑωυτὸν παρέχειν τὰ δέοντα ποιεῦντα, ἀλλὰ καὶ τὸν νοσέοντα, καὶ τοὺς παρεόντας, καὶ τὰ ἔξωθεν.
인생은 짧고, 의술(의 길)은 멀며,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경험은 불완전하고, 판단은 어렵다.
따라서 의사는 스스로 옳은 일을 할 뿐만 아니라, 환자와 수행원, 외부인 모두가 협조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Aphorisms》Section 1, Line 1.

위 문장은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로 그의 저서 《잠언집(Aphorisms)》의 머릿말에 실려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 생긴 오역 때문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명언으로 잘못 받아들어져 마치 히포크라테스가 인생을 불사른 예술가였던 것처럼 오인되는 결과를 낳았다. 위 문장의 'Ὁ βίος βραχὺς, ἡ δὲ τέχνη μακρὴ(Ho bíos brachýs, hē dè téchnē makrē)' 부분이 바로 오역의 대상인데, 이를 라틴어로 바꾸면 'Vīta brevis, ars longa', 영어로는 'Life is short, (and) art long,'이 된다. 그런데 영한사전에서 'Art'의 첫 번째 의미는 곧 ' 예술'이므로 번역가가 작가의 정체와 책의 맥락 파악하지 못한 채, 문장 하나만 보고 '예술은 길다'고 번역한 것이 그만 세간에 퍼져 버린 것이다.

문장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téchnē'라는 어휘는 영어 'technique', 'technology'의 어원으로, 영어 단어 ' art' 역시 '예술' 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기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손자병법의 영문명인 'The Art of War'가 ' 전쟁의 예술'이 아니라 '전술(병법)'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문학 역시 'art'로, 인문학사를 B.A(Bachelor of Arts)라고 하며, 리버럴 아츠 역시 '자유 예술'이 아니라 수학과 자연과학을 포함한 '순수과 학문'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히포크라테스 자신이 의학자라는 것을 고려하면, 문맥상 'art(téchnē)'는 예술이 아니라 의술이며 "사람의 인생은 짧은데, 의술을 익히는 것은 오래 걸린다."는 의미로, '소년이로 학난성(少年易老 學難成.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5].)'에 가깝다. 그 뒤의 문장까지 알면 더 명확해지는데,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혹은 '위기는 순식간에 찾아오고'로 번역한 학자도 있다.), '판단은 어렵다.' 이는 의료 현장이 매 순간 실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문장이다.
Everything in excess is opposed to nature.
모든 과도한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다.
《Catholic Morality》 : Selected Sayings and Some Account of Various Religions (1915) by E Comyns Durnford, p. 90.
ἀσκεῖν περὶ τὰ νοσήματα δύο, ὠφελεῖν ἢ μὴ βλάπτειν.
질병을 대할 때는 두 가지를 명심하라. 처치를 하거나, 적어도 해를 끼치지는 말라.
《Of the Epidemics》Book I, Ch. 2. W. H. S. Jone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868. #
일명 '해로움이 없게 하라(Primum non nocere; First, Do no harm.)' 는 격언의 유래로, 이 말이 유명하여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일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그보다 《Of the Epidemics(전염병에 관하여)》에 먼저 등장한 구문이다. 선서에는 이와 비슷하게 "환자가 해를 입거나 올바르지 못한 일을 겪게 하기 위해 그것을 쓰는 것은 금할 것이다." 라는 문장이 있다.

긍정적인 효과를 주지 못할 것 같으면, 적어도 처치를 함으로써 환자의 용태가 나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인데, 사실 옛날에는 말 그대로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일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겠지만 현대 의학에서는 격언의 의미를 확장해서 사용하고 있다. # @ 오늘날에는 환자에게 잠재적인 리스크가 예견되더라도, 그것보다 검사나 처방을 함으로써 얻을 잠재적 이익이 더 크다면 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검사/처방을 통해 환자가 얻을 이익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 또한 환자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술 전 부작용 등에 대한 환자 동의서를 받는 경우가 그러하며, 신약을 사용할 때도 그렇다.
ὕπνος, ἀγρυπνίη, ἀμφότερα μᾶλλον τοῦ μετρίου γινόμενα, νοῦσος.
수면과 각성은 모두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질병을 일으킨다.
《Aphorisms》Section 7, Line 72.
To do nothing is sometimes a good remedy.
때로는 아무 처치도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처치이다.
《A New Dictionary of Quotations on Historical Principles from Ancient and Modern Sources》, H. L. Mencken, 1942.

4. 히포크라테스 선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포크라테스 선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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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ippocraticOath.jpg
12세기 동로마 제국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사본
원전에 가까운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나는 의술 아폴론 아스클레피오스와 휘기에이아와 파나케이아[6]를 비롯한 모든 남신들과 여신들을 증언자들로 삼으며 이 신들께 맹세코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다음 선서와 서약을 이행할 것이다.

내게 이 기술을 가르쳐준 스승을 내 부모와 똑같다고 여기고 삶을 함께 하며 그가 궁핍할 때에 나의 것을 그와 나누고, 그의 자손들을 내 형제와 같이 생각하고 그들이 이 기술을 배우고자 하면 보수와 서약 없이 가르쳐줄 것이다. 의료지침과 강의 및 그 밖에 모든 가르침은 나의 아들과 나를 가르친 스승의 아들 및 의료 관습에 따라 서약하고 선서한 학생들 말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전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환자를 이롭게 하기 위해 섭생법을 쓰는 반면, 환자가 해를 입거나 올바르지 못한 일을 겪게 하기 위해 그것을 쓰는 것은 금할 것이다.

나는 그 누가 요구해도 치명적인 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 그와 같은 조언을 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여성에게 임신중절용 페서리(pessos)를 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삶과 나의 의술을 순수하고 경건하게 유지할 것이다.

나는 절개를 하지 않을 것이고 결석환자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나는 어느 집을 방문하든 환자를 이롭게 하기 위해 방문할 것이지만, 고의로 온갖 올바르지 못한 행위나 타락 행위를, 특히 자유인이든 노예이든 남자나 여자와의 성적 관계를 금할 것이다.

치료하는 중에는 물론이고 치료하지 않을 때조차도 사람들의 삶에 관해 내가 보거나 들은 것은 무엇이든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나는 그러한 것들을 성스러운 비밀이라고 여겨 누설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선서를 이행하고 어기지 않으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평판을 받고 나의 삶과 기술을 향유할 수 있길 기원하고, 내가 선서를 어기고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이라면 이와 반대되는 일이 있길 기원한다.[7]
그의 문헌 중 〈선서〉가 어느 시기에 쓰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까지 여러 주장이 나왔으나, 대개 기원전 5세기나 4세기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밖에도 현재 전해져 오는 것이 과연 원본인가 하는 점이나 훼손이나 가필되었을 가능성, 또 그것이 의무 이상의 구속력을 가졌는지, 누구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 누가 선서를 하였는지, 또 선서를 한 이가 모두 의사였는가 하는 여러 의문들이 남아 있다.

한편 외과 수술이나 낙태용 약을 금지하는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내용은 히포크라테스의 코스 학파가 아닌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만든 것이라고 가정하는 에델슈타인의 관점이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나는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중략)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맹세하며,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도 맹세합니다.
ㅡ 중세 의사이자 역사가이던 이븐 아비 우사이비아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수많은 그리스 문헌들이 번역되면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중세 아랍 사회에서도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5. 여담


파일:히포크라테스 스프.png
  • 음식 중에서 히포크라테스가 환자들에게 건강식으로 만들어서 먹였다고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수프(Hippocrates soup)'라는 음식이 있는데, 1928년 독일의 막스 거슨(Max Gerson) 박사가 식이요법, 해독요법으로 재 발견해서 널리 퍼뜨렸다고 알려졌다. 셀러리, 감자, 토마토, 양파, 파의 밑부분 등의 재료를 사용한다.
  • 초승달 구적법을 증명한 수학자 히포크라테스와는 동명이인으로 출신지를 붙여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코스의 히포크라테스'로 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로 구분한다.
  • 아스클레피오스가 18대 조상이라는 야사도 있다. 그 또한 고대 그리스의 의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자 의술의 신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야사가 퍼진 듯 한데, 동시기의 사람이었던 플라톤도 그런 언급을 했다.

    “Medicine is a science and an art.”

    의학은 학문이고 기술이다.
  • 히포크라테스 문헌은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저작들이 집성되어 후대에 히포크라테스가 쓰여진 것으로 널리 알려진 고문서들을 이른다. 그 중 어느 것이 히포크라테스가 직접 쓴 것인가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히포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한 모종의 학문적 공동체에 의해 향유된 것은 분명하다. 히포크라테스 문헌의 여러 저작은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데, 바로 ' 의학을 학문의 영역으로서 연구하였다'는 점이다. 히포크라테스 문헌에는 " 의학은 과학이다"라는 일관된 사고방식이 드러나 있다. 각 문헌에는 질병의 본성과 원인에 대해, 인체와 우주에 관해, 나아가 처방과 치료의 원리에 관하여 나름의 관점, 즉 어떤 자연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들이 질병에 관해 사색하였던 사상가나 철학자였든 아니면 당시에 환자들을 치료했던 내과의사였든, 이들은 모두 자연철학과 치료기술의 교차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 기본적으로 히포크라테스 파는 환자가 가진 고유의 치유력을 통한 치료를 중시했다. 그리고 악령이 들어 병이 드는 것이란 사고에서 벗어나 환경과 병의 연관성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져 환자에 대한 임상 관찰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큰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당시 서양의 의술은 전반적으로 매우 미성숙한 것으로, 인체의 4가지 체액의 밸런스가 무너져 병이 발생한다는 체액론을 중심으로 환자를 치료하였고, 히포크라테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피를 뽑아내 치료한다는 방혈 개념을 의술에 도입한 것이 히포크라테스였다. 열이 높은 환자에게 이뇨제와 하제를 투입하여 "불순물"을 제거한 후에도 차도가 없으면 피를 뽑았다. 히포크라테스는 방혈에 크게 의존하진 않았으나 후대로 가면서 이에 대한 믿음이 너무 확고해졌고,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방혈은 주요한 치료법이 되어 남용되었다. 물론 이것 모두 미신에 불과했으며 병에 걸린 사람에게 이뇨제와 하제를 투입해 탈진하게 한 뒤 대량으로 방혈하게 만드는 것은 치료는커녕 죽음으로 끌고 가는 행위였다.
  • 감정이 에 기반한다는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감정이나 생각이 심장에서 생겨난다고 믿었는데, 머리를 다친 환자를 많이 봐왔던 히포크라테스는 감정, 생각, 기쁨, 고통이 전부 뇌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p11 참고


[A]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 코스는 에게 해에 접한 섬으로, 아테네와 함께 델로스 동맹을 구성했다. 발칸 반도 가운데에 있는 라리사는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는 친 페르시아 성향의 폴리스로 동맹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이후 아테네와 함께 반 펠로폰네소스 연합에 참여했다. [A] [A] [4] 세계의사회, 〈의료윤리지침〉 (대한의사협회 역) [5] 주희,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 [6] 휘기에이아와 파나케이아는 아스클레피오스의 딸들이다. 휘기에이아는 위생의 여신, 파나케이아는 약학의 여신이다. 위생학을 뜻하는 영단어 '하이진(hygiene)'과 만병통치약을 뜻하는 영단어 '파나세아(panacea)'의 어원도 각각 이들의 이름이다. [7] 히포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 선집〉 (여인석·이기백 역, 나남) [8] 반대로 맨 처음에 실리는 사람은 가가린. [9] 사실 의사면허를 박탈당했기에 정식 의사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