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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so VII.a Nafarroakoa | ||
가문 | 세메노 왕조 | |
생몰년도 | 1157년 ~ 1234년 4월 7일 | |
출생지 | 나바라 왕국 팜플로나 | |
사망지 | 나바라 왕국 투델라 | |
재위 기간 |
나바라 왕국의 국왕 | 1194년 - 1234년 |
아버지 | 안초 6세 | |
어머니 | 카스티야의 산차 | |
형제 | 나바라의 베렝겔라, 수리아(블랑슈) | |
배우자 | 툴루즈의 콩스탕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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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 17대 국왕. 한때 스페인의 모든 기독교 왕국을 다스리던 세메노(히메네스) 왕조는 그의 치세를 끝으로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후 나바라 국왕은 프랑스계 가문이 독식한다.2. 생애
1157년경 나바라 국왕 안초 6세와 레온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의 딸인 산차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나바라의 베렝겔라와 수리아가 있었다. 당대 사료에 따르면, 키가 매우 크고 힘이 셌다고 한다. 《푸아티에 백국의 역사(History of the Counts of Poitier)》에 따르면, 그는 1177년 팜플로나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가한 리처드 왕자와 친분을 맺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대 사료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전혀 없기에, 대다수 학자들은 푸아티에의 역사의 저자가 당시에 유행하던 낭만주의적 역사 서술에 입각하여 꾸며낸 이야기로 추정한다.1192년, 잉글랜드 국왕이며 나바라 왕국의 동맹자였던 리처드 1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던 중 폭풍에 휘말려 표류했다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의 영지인 빈에서 생포된 뒤 뒤른슈타인 성에 갇혔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는 이 때를 틈타 로슈 성을 포함한 일부 앙제 요새들을 공략했다. 안초는 리처드와 결혼한 딸 베렝겔라의 지참금으로 받아낸 수입을 지키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푸아티에로 가서 프랑스군과 맞섰다. 이후 풀려난 리처드가 푸아티에에 왔지만, 1194년 6월 28일 안초 6세 사망 소식을 접한 안초 왕자가 나바라로 돌아갔기 때문에 두 사람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함께 싸우는 일은 없었다.
나바라로 돌아간 뒤 안초 7세로서 즉위한 그는 선대 국왕이 나바라 왕국에 대항하고자 아라곤 왕국-레온 왕국-포르투갈 왕국이 결성한 우에스카 동맹에 가담했던 것과는 달리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고 싶지 않아 동맹을 파기하고 카스티야 왕국과 화해했다. 1195년 가을 무와히드 왕조의 침략에 직면한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 8세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나 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이, 알폰소 8세의 카스티야군은 레온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알라르코스 전투를 감행했다가 무와히드 왕조군에게 완패했다. 알폰소 8세는 나바라 왕국군이 제때 오지 않아서 패배했다며 책임을 그에게 떠넘겼다. 이에 격분한 안초 7세는 무와히드 왕조와 동맹을 맺은 뒤 카스티야 왕국을 공격해 소리아와 알마잔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알폰소 8세는 앞선 전투의 참화로 인해 대응할 여력이 없었기에 상당한 배상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나바라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19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라르코스 전투 소식을 듣고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세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레온, 아라곤, 카스티야, 그리고 나바라 왕국에 특사를 보내 하나로 뭉쳐서 무슬림에 맞서 싸우라고 촉구했다. 이에 국왕들은 타라조나 인근에 모여서 통합 논의를 했지만 서로의 입장차가 너무 커서 무산되었다.
1198년 알라르코스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던 야쿱 알 만수르가 안초 7세에게 마그레브로 와서 자신을 도우라고 권고하자, 안초 7세는 무와히드 왕조와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직접 마그레브로 향했다.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는 칼라타유드에서 만나서 안초 7세가 없는 사이에 나바라 왕국을 반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알폰소 8세는 1199년 가스테이스(현재 스페인 바스크 지방 알라바 주의 주도 비토리아)를 포위 공격해 1200년 1월에 공략했으며, 뒤이어 알라바, 두랑갈데와가, 기푸스코아 지방을 빼앗았다. 안초 7세는 마그레브에서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듣고 급히 귀국했지만, 무와히드 왕조가 내전에 시달리던 중이어서 원군을 보내주지 못했기에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을 상대로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안초 7세는 리처드 1세에게 외면당했다. 당초 리처드 1세는 베렝겔라와 결혼했을 때 나바라 왕국이 위급해지면 군사적 원조를 보내기로 약속했지만, 그는 1196년 봄에 남프랑스 자작들로부터 리처드 1세와 전쟁을 벌일 때 지원을 해주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낼 정도로 리처드 1세를 적대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리처드는 자신을 도와달라는 안초 7세의 호소를 무시했다. 그러다 1202년, 리처드 1세는 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에 평화와 상호 협력을 위한 협약을 맺으라고 권고했다. 안초 7세는 리처드 1세가 제시한 협약서에 서명했고, 1207년 10월 29일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카스티야 왕국이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그대로 인정받는 대신 더 이상 나바라 왕국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과달라하라 협약을 맺었다.
1212년 교황청의 강한 압력을 받은 안초 7세는 무와히드 왕조와 맺었던 동맹을 해지하고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레온 왕국, 성전 기사단이 연합한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무와히드 칼리파인 무함마드 앗 나시르의 천막을 보호하는 쇠사슬을 끊는 등 상당히 활약했다. 이후 아버지가 시작한 팜플로나 대성당 건설을 마무리짓고 투델라의 에브로 강 위에 고딕 양식의 다리를 건설했으며, 인구 조사를 실시해 세금을 보다 많이 거둬들이려 노력하는 등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은 툴루즈 백작 레이몽 6세의 딸 콩스탕스였다. 1200년 콩스탕스와 이혼한 그는 새 아내를 맞이했다. 그가 맞이한 두번째 여인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일부 문헌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딸 클레망스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문헌에서는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유수프 2세의 딸이라고 기술했다. 그는 두 아내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러다 오른쪽 다리에 정맥류 궤양이 생긴 이래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 비만이 심해지자, 그는 이를 부끄러워해 투델라에 은거했고, 여동생 수리아(블랑슈)가 샹파뉴에서 와서 1229년 사망할 때까지 나바라 왕국의 행정을 맡았다. 또한 큰누나 베렝겔라는 1230년에 사망했고, 안초 7세는 1234년 4월 7일 투델라에서 궤양과 관련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세메노(히메네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상파뉴 백작 티보 3세와 수리아(블랑슈)의 아들이자 안초 7세의 유일한 조카였던 티발트 1세(샹파뉴 백작 티보 4세)가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