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6 05:41:11

앙리 1세(예루살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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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enry_2_of_Champagne.jpg
예루살렘 왕국의 제10대 공동 국왕
즉위명 앙리 1세 (Henri I)
이름 앙리 드 샹파뉴 (Henri de Champagne)
출생 1166년 7월 29일
프랑스 샹파뉴 백국 트루아
사망 1197년 9월 10일
예루살렘 왕국 아크레 (향년 31세)
매장지 예루살렘 왕국 아크레 거룩한 십자가 교회
가문 블루아 가문
배우자 이사벨 1세 (1192년 결혼)
자녀 마르그리트, 알리스, 필리파
부모 아버지 샹파뉴 백작 앙리 1세
어머니 마리 드 카페
종교 로마 가톨릭
재위기간 1192년 5월 5일 ~ 1197년 9월 10일 (5년 4개월 5일)

1. 개요2. 생애3. 사후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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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루살렘 왕국의 제10대 공동 국왕으로 샹파뉴 백작으로는 앙리 2세(Henri II de Champagne)다.

예루살렘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의 세번째 남편이며 1192년부터 1197년까지 예루살렘의 공동 국왕이었지만 그 칭호를 이용한 적은 없다.

2. 생애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와 마리 드 카페[1]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조부모는 루이 7세 엘레오노르 다키텐이며 고모할머니는 루이 7세의 세번째 왕비이자 필리프 2세의 어머니인 샹파뉴의 아델이었다.[2] 이후 1171년 이사벨 드 에노(Isabelle de Hainaut)와 약혼했지만, 그녀가 친당숙인 필리프 2세[3]와 결혼하자 블루아 가문 전체가 이 경우없는 파혼에 매우 분노했다. 필리프 2세의 어머니이자 앙리의 고모할머니인 아델도 이사벨과 그녀의 가족들까지 매우 적대하였고 프랑스 궁정에는 살얼음판같은 긴장이 감돌았다. 이후 아버지 앙리 1세가 1181년에 사망하면서 샹파뉴 백국을 물려받아 샹파뉴 백작 앙리 2세가 되지만 나이가 어려서 어머니 마리 드 카페가 1187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1190년 앙리는 예루살렘이 이슬람에게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십자군에 종군하기로 결정, 만약 귀환에 실패하면 동생 티보가 샹파뉴 백국의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하고 동쪽으로 향했다. 그는 친당숙 필리프 2세와 외삼촌 리처드 1세[4]가 주도하는 제 3 차 십자군에 참가한 것이다. 당초 그는 필립 2세가 도착 전에 아크레 포위 전에서 프랑스 측 기사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1세의 납치에 관여한 그룹의 1명으로 알려져있다. 이사벨은 콘라드 델 몬페라토와 결혼하기 위해 당시 남편 토롱의 영주 옹프루아 4세 드 토롱에게 이혼 동의를 얻고 싶었다. 앙리는 외조부모 통해 콘래드와 친척 사이였다.

이후 원정에서 앙리는 리처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1192년 리처드 1세는 앙리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아크레에서 티레로 보냈다. 예루살렘 왕 콘라드 델 몬페라토를 선출하도록하기 위해서이다. 앙리는 곧 아크레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콘라드 1세는 암살 교단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겉으로는 콘라드의 대관식이 준비되었던것 같지만 콘라드의 장례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앙리는 과부에다 콘라드의 유복자까지 임신한 이사벨 1세와 약혼했고, 두 사람은 콘라드 1세가 암살당한지 불과 8일 만에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어떤 연대기에서는 로맨틱하게 묘사된다. 이사벨은 죽은 남편 콘라드 1세 보다 20세 이상 연하의 앙리의 육체적 매력에 끌려 앙리와의 결혼을 타진 한 것이다. 결혼 당시 그녀는 콘라드 1세의 아이(마리 드 몬페라토)를 임신하고 있었다. 결혼은 추문 투성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왕국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남편을 얻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또한 앙주 가문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이사벨과 프랑스 왕가인 카페 가문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앙리의 결혼은 두 파벌의 적대 관계의 종식에도 한몫했다. 영국의 플랜태저넷 가문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던 이사벨의 이복 언니 시빌라 여왕의 남편 기 드 뤼지냥은 리처드 1세가 앙리를 지지하자 예루살렘 왕위 청구를 포기하고 대가로 키프로스 섬을 획득한다. 앙리와 이사벨과의 사이에서 마르그리트, 알리스, 필리파 등, 세 딸이 태어났고 이중 장녀 마르그리트가 요절하면서 실질적으로 두 딸을 두었다.

1197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는 살라딘 사후 아이유브 제국을 분열시킨 상속 투쟁을 틈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고 성지 원정을 결정했다. 1197년 8월 독일에서 첫 원정대가 아크레에 상륙했다. 그런데 지휘 계통이없는 기사들은 시내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그들은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갈릴리로 보내지지만 간신히 참사는 면했다. 한편 이집트의 술탄 알아딜은 야파를 포위하고 함락시켰다. 9월 10일, 앙리는 구원군 파견을 명령하지만, 아크레에 있는 자신의 궁전 1층 창문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다른 사본마다 여러가지 설이있다. 대부분은 창문의 격자 또는 발코니에서 그가 추락했다고한다. 스칼렛이라는 이름의 꼬마 하인도 앙리의 매달린 소매를 잡고 같이 떨어졌다. 다른 이야기는 앙리가 퍼레이드를 창문에서보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있다. 그 때, 피사 공화국의 일행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면서, 그 뒤로 발을 헛디뎌 균형을 잃어 버렸다고한다. 정확하게 무슨 상황이든 앙리 분명하게 살해되었다고 여겨진다. 대퇴골 골절을 한 하인은 외부에 위기를 알렸지만, 그 후 그는 부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3. 사후

앙리 1세의 사후 미망인이 된 이사벨은 곧 기 드 뤼지냥의 형이자 키프로스의 왕 애므리 드 뤼지냥과 4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재혼했다. 앙리의 재산을 상속받은 장녀 알리스는 바로 위에 서술된 애므리의 아들로 의붓남매인 위그 드 뤼지냥과 결혼했고 그는 곧 키프로스의 3대 국왕이 되었다.

앙리 1세는 샹파뉴 백작령에 몇 가지 문제를 남겼는데 예루살렘 원정과 자신의 결혼 자금을 위해 돈을 많이 빌린 부분과 사후 샹파뉴 백작위의 상속 문제였다. 원래 샹파뉴 백작위는 앙리의 남은 두 딸들인 알리스와 필리파 중 하나에게 상속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1213년 앙리의 조카인 샹파뉴 백작 티보 4세의 지지자들은 교황의 사절에게 이사벨 1세와 그녀의 첫번째 남편 옹프루아 4세의 혼인 무효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사벨은 옹프루아와의 혼인을 무효화한 뒤 콘라드 1세와 재혼했고 그의 사후 앙리 1세와 두번째로 재혼했는데 그때에도 옹프루아는 생존해 있었다. 티보 4세의 지지자들이 하는 주장에 의하면 이사벨과 앙리의 결혼은 중혼이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알리스와 필리파도 적자가 아닌 서자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립되면 예루살렘 왕국의 적통이 서자에게 흘러들어 감에 따라 여파의 심각성이 커질 수도 있다보니 부정되었다. 콘라드와 이사벨의 유복자인 마리아의 정통성과 그녀의 자손이 예루살렘 왕위를 계승할 권리는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었다. 마리아가 적자라면 그녀의 이부동생들인 앙리와 이사벨의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티보 4세는 사촌들인 알리스와 필리파에게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서 샹파뉴 백작령을 정식으로 인수해야했다.

4. 가족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1세 사이에서 3명의 딸을 얻었다.

마르그리트 드 블루아(Marie de Blois) - (1193년 ~ 1205년) 요절.
알리스 드 블루아(Alix de Blois) (1195, 96년 ~ 1246년) - 키프로스 왕 위그 1세(Hugues de Lusignan),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5세(Bohémond V, prince d'Antioche), 라울 드 수아송(Raoul de Soissons)과 결혼
필리파 드 블루아(Philippe de Blois) (1197년경 ~ 1250년) - 에라드 드 브리엔(Érard de Brienne)과 결혼


[1] 루이 7세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딸. [2] 즉, 루이 7세는 후처의 조카를 전처 소생의 딸과 결혼시킨 것이고 아델은 친조카를 의붓딸과 결혼시킨 것이다. [3] 아버지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의 고종사촌. [4] 어머니 마리의 이부남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