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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cc21> | |||
오스트리아 제국 초대 황제 프란츠 1세 Franz I |
|||
프란츠 2세의 초상화[1], 프리드리히 폰 아멜링 작(作) |
|||
출생 | 1768년 2월 12일 | ||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 |||
사망 | 1835년 3월 2일 (향년 67세) | ||
오스트리아 제국 빈 | |||
재위기간 | 오스트리아 대공[2] | ||
1792년 3월 1일 ~ 1835년 3월 2일 | |||
신성 로마 황제& 로마왕 | |||
1792년 7월 5일 ~ 1806년 8월 6일 | |||
오스트리아 황제 | |||
1804년 8월 11일 ~ 1835년 3월 2일 |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국왕 | |||
1815년 6월 9일 ~ 1835년 3월 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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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cc21> 가문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 |
이름 |
프란츠 요제프 카를 (Franz Joseph Karl) |
||
아버지 | 레오폴트 2세 | ||
어머니 |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루이사 | ||
형제자매 | 마리아 테레지아, 페르디난도 3세, 마리아 안나, 카를, 알렉산더 레오폴트, 요제프, 마리아 클레멘티나, 안톤 빅토어, 마리아 아말리아, 요한, 라이너 요제프, 루트비히, 루돌프[3] | ||
배우자 |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 (1788년 결혼 / 1790년 사망) |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1790년 결혼 / 1807년 사망) |
|||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루도비카 (1808년 결혼 / 1816년 사망) |
|||
바이에른의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공주 (1816년 결혼) | |||
자녀 | 루도비카 엘리자베트, 마리아 루도비카,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레오폴디네, 클레멘티나, 요제프 프란츠, 마리아 카롤리네, 프란츠 카를[4], 마리아 안나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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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또한 독일 연방의 초대 의장이자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의 왕, 보헤미아 왕국의 왕.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프란츠 2세'이며,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로서는 '프란츠 1세'이다.
대공국이었던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격상시켜 황제가 된 이유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위에 올라 자신과 동일한 지위에 오르자 황제 칭호를 한 개 더 추가하여 상대적 우위에 오르고자 하는 유치한 심리만은 아니었고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1804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1806년까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를 겸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은 이중 황제(Doppel Kaiser)로 불린다.
2. 생애
2.1.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가 되는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1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로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백부 요제프 2세가 아들이 없기에 일찍부터 첫 아내인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5]와 함께 10대 초반부터 빈으로 불려와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1792년 아버지가 죽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각 국가에서 군주로 승인되었고,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이에 다른 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반 프랑스 정책을 펼쳐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지원했으나 희대의 먼치킨 나폴레옹에게 줘터지는 바람에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롬바르디아와 라인강 서안의 제국 영토를 상실했다. 그 이후로도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간 사이에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와 함께 잠시 선전하기도 하지만 1799년 러시아가 이탈하고 나자 결국 굴복하고 1801년 뤼네빌 평화조약을 맺고 라인강 서안과 이탈리아반도의 영토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과 뤼네빌 평화조약(1801)의 대가로 기존 신성 로마 제국은 진짜로 껍데기만 남았는데 라인강 좌안의 기존 신성 로마 제국 영토는 모두 프랑스에 합병되고 기존의 제후들은 라인강 우안에서 영토적 보상을 할 것이란 합의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자신이 승인한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신이 황제로 있는 제국의 서쪽에 위치한 제후들 영지를 몽땅 프랑스에게 바치고, 이 과정에서 영지를 잃어버린 제후들은 니네끼리 알아서 보상을 해주든 말든 하라 이거였다. 물론 황제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고 주교령, 제국 기사령 등 황제가 이제껏 영향력을 행사한 제국 내 영토들은 사실상 싹 사라지고 영토 보상을 받은 제후들마저 몽땅 프랑스 편으로 붙어 버렸다. 거기다가 황제 선거권이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들 중에 라인 강변의 성직제후 마인츠, 트리어, 쾰른 선제후가 없어졌다.[8] 나폴레옹이 사실상 독일의 주인 행세를 하며 오스트리아 코 앞의 제국도시 레겐스부르크에서 '독일 제국 대표자 회의'를 열어서 기존 없어진 선제후[9] 4개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꼬붕들이자 위성국가들을 멋대로 선제후로 삼아버렸다.
구체적으로 오스트리아 몫은 프란츠의 동생 페르디난도 3세가 다스리던 토스카나 대공국이 프랑스에 합병당해 에트루리아 왕국이라는 괴뢰국이 되면서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을 선제후 겸 대공국으로 승격시켜 토스카나를 잃어버린 페르디난도 3세에게 대토보상으로 주었는데 그치고 나머지 5개 선제후들은 바덴[10]은 대공국으로 승격. 뷔르템베르크, 레겐스부르크, 헤센카셀 역시 프랑스의 위성국이었다. 바이에른과 작센[11]은 역시 프랑스에 줄을 서 선제후 자리 중 과반수가 프랑스의 위성국이었으며 마지막으로 기댈만 한 프로이센 역시 영국이 동군연합 중이던 하노버를 집어삼킨 후 쭉 중립으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직 황제인 프란츠의 손을 들어줄 선제후는 프란츠 본인이 들고 있는 보헤미아 국왕과 동생이 얻은 잘츠부르크 대공, 달랑 2장밖에 없었기 때문에 유사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위 계승은 이미 물건너 갔다.
2.2. 오스트리아 제국 수립
그 와중에 한창 천하무적의 위세를 자랑하던 나폴레옹이 1804년에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자 프란츠의 합스부르크 가문 측에서는 대표 작위인 오스트리아가 기존 신성 로마 제국 내의 대공국으로 격하되어 유사시 듣보잡으로 여기던 독일 소국보다 낮아지고, 나폴레옹 또는 그의 하수인의 신하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기존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대체하여 합스부르크를 대표할 만한 직위인 '오스트리아 황제'를 칭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동군연합으로 통치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 에르데이 대공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 등을 합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웠다.
당연하지만 프란츠가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를 보고 단순하게 자존심이 상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는 신성 로마 제국 안과 밖에 모두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워진 뒤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처럼 신성 로마 제국에도 속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모두 속하는 지역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어차피 두 제국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양쪽에 속해도 문제는 없었다.
참고로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국'은 독일어로 다르게 표기했다. 전자는 Reich(라이히)라고 하는 데 반해 후자는 Kaiserthum(카이저툼, 현재의 철자법으로는 Kaisertum)이라고 했다. 오스트리아(Oesterreich, 현대 철자 Österreich. 외스터라이히)라는 단어에 이미 'Reich'가 들어 있기 때문에 동어 반복을 피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도 구분하려고 Kaiserthum이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명목상으로는 선제후에 의해 선출되는 황제지만, 오스트리아 황제는 세습 황제였다.[14]
오스트리아 황제 즉위 당시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의 황제 칭호의 상대적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유럽의 다른 나라 왕들한테도 황제로 즉위하라고 권유했지만, 권유를 받은 왕들은 그게 별 실효성이 없는 유치한 대응법이라면서 무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인 18세기 말 영국 일각에서도 조지 3세에게 칭제를 권유했으나 조지 3세 본인이 거절한 바 있다.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2.3. 이어지는 좌절
프랑스와 영국 간의 아미앵 조약이 깨지고 영국이 동맹을 제의하자 러시아와 같이 편을 먹고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일으켰다. 역시나 기세는 좋았지만, 울름 전투에서 주력을 허무하게 잡혀먹고 오스트리아에서도 발리고 결정적으로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해체되었다. 1806년에는 나폴레옹이 6월쯤 프랑스 황제이자 라인 동맹의 보호자 자격으로 프란츠에게 7월까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포기하지 않으면 선전포고한다는 최후 통첩을 받고 자진해서 제국 해체를 결의했다. 제국을 해체한 시점에는 이미 라인 동맹은 전부 신성 로마 제국을 탈퇴해서 회원국이라곤 18세기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항한 프로이센 왕국과 친척 잘츠부르크 공국[15]밖에 안 남았다.프란츠 인생 최악의 순간.jpg[16]
하지만 이제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프란츠 1세는 근성을 발휘하여 영국의 비밀 지원 등을 받으며 순식간에 군비를 재건하고 동생 카를 대공이 군대를 맡아 나폴레옹과의 전훈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이에 힘입어 1809년에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을 중심으로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고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그간의 군제개혁에 힘입어 나폴레옹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선전하며 나폴레옹의 오른팔인 장 란 원수를 전사시키는 등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러시아나 프로이센 등 다른 열강의 도움 없이 사실상 단독으로 프랑스에 대항 중인 상태[17]여서 상황은 계속 불리해져갔다.
설상가상으로 1810년에는 자신의 장녀 마리아 루도비카를 나폴레옹에게 시집 보냈다.
2.4. 회심의 복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겨우 목숨만 건진 채 돌아오자 초기에 관망했는데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적은 병력으로 용감하게 나폴레옹에게 상처를 입히고 영국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자 1813년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참전했다. 트라헨베르크 계획을 세워서 프랑스로 돌아오는 나폴레옹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독일땅에 완전히 몰아내고 기세를 몰아 프랑스 영토에서도 승리하며 한풀이에 성공했다. 1815년 빈 회의 이후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를 지지했다.2.5. 국내 정치
그의 국내정치는 보수주의와 반동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프란츠 2세를 포함한 모든 유럽의 군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에 따라 황제는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형태의 급진주의에 불신을 가지고 신경질적이고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일례로 1794년 오스트리아군 내에서 자코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반란시도가 발각되었을 때 프란츠 2세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당시 헝가리 궁정백이자 조사담당자이던 황제의 동생 알렉산더 레오폴트 대공마저도 “진상 규명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신중해야한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반란의 주모자 2명은 사형에 처해졌고, 가담했던 다른 장교들 역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다시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였다.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 프란츠 2세는 제국 내에 유럽에서 가장 철저한 비밀경찰을 운영하였고 곳곳에 검열을 시도하였다.[20] 이러한 감시와 검열은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전쟁영웅인 테센 공작 카를 대공 역시 검열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런 검열과 감시와는 반대로 카를 대공의 군사적인 능력은 인정하고 있었기에 동생에게 군대에 관하여서는 별다른 통제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제국참모부와 야전 지휘관들에게도 적절한 권한을 주어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직후 평시의 지도자가 된 그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약화된 가톨릭 교회를 키우는 데 힘쓰는 한편,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다.[21] 신기술도 적극 도입해 도나우 강에 증기선을 띄우고 철도를 건설하는 등 산업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프란츠 2세 (Kaiser Franz II./I.) |
<colbgcolor=#fff3e4,#331c00>
레오폴트 2세 (Kaiser Leopold II.) |
<colbgcolor=#ffffe4,#323300>
프란츠 1세 (Kaiser Franz I. Stephan) |
|
로렌 공작 레오폴드 (Léopold, Duc de Lorraine) |
|||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22] (Élisabeth-Charlotte d'Orléans) |
|||
마리아 테레지아 (Kaiserin Maria Theresia) |
|||
카를 6세 (Karl VI)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퓌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
|||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María Luisa de España) |
|||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
|||
펠리페 5세 (Felipe V) |
|||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Elisabetta Farnese)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von Sachsen) |
|||
아우구스트 3세 (König August III.)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23] (Maria Josepha von Österreich) |
3.2. 아내와 자녀
총 4명의 아내로부터 4남 9녀의 자녀를 두었고 그들 중 2남 5녀만이 20세가 될 때까지 생존했다.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von Württemberg) | ||||
1녀 |
루이즈 엘리자베트 여대공 (Erzherzogin Louise Elisabeth) |
1790년 2월 18일 | 1791년 6월 24일 |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Maria Teresa di Borbone-Due Sicilie)[24] | ||||
2녀 |
프랑스인의 황후 마리 루이즈 (Marie-Louise, impératrice des Français) |
1791년 12월 12일 | 1847년 12월 17일 |
나폴레옹 1세 슬하 1남[25] |
아담 알베르트 폰 나이페르크 슬하 1남 2녀 |
||||
샤를르네 드 봉벨 | ||||
1남 |
페르디난트 1세[26] (Kaiser Ferdinand I.) |
1793년 4월 19일 | 1875년 6월 29일 | 사보이아의 마리아 안나 공주[27] |
3녀 |
카롤리네 레오폴디네 여대공 (Karoline Leopoldine, Erzherzogin) |
1794년 6월 8일 | 1795년 3월 16일 | |
4녀 |
카롤리네 루이즈 여대공 (Karoline Luise, Erzherzogin) |
1795년 12월 22일 | 1797년 6월 30일 | |
5녀 |
브라질의 황후이자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레오폴지나 (Maria Leopoldina, Imperatriz consorte do Brasil e Rainha Consorte de Portugal) |
1797년 1월 22일 | 1826년 12월 11일 |
페드루 4세 슬하 3남 4녀[28] |
6녀 |
살레르노 공작 부인 마리아 클레멘티네 (Maria Klementine, Prinzessin von Salerno) |
1798년 3월 1일 | 1881년 9월 3일 |
살레르노 공작 레오폴트[29] 슬하 1녀 |
2남 |
요제프 프란츠 대공 (Josef Franz, Erzherzog) |
1799년 4월 9일 | 1807년 6월 30일 | |
7녀 |
작센의 왕세자비 카롤리네 페르디난데 (Karoline Ferdinande, Prinzessin von Sachsen) |
1801년 4월 8일 | 1832년 5월 22일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
3남 |
프란츠 카를 대공 (Erzherzog Franz Karl) |
1802년 12월 17일 | 1878년 3월 8일 |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30] 슬하 4남 1녀[31] |
8녀 |
마리아 안나 여대공 (Marie Anna, Erzherzogin) |
1804년 6월 8일 | 1858년 12월 28일 | |
4남 |
요한 네포무크 대공 (Johann Nepomuk, Erzherzog) |
1805년 8월 30일 | 1809년 2월 19일 | |
9녀 |
아말리아 테레지아 여대공 (Amalia Theresia, Erzherzogin) |
1807년 4월 6일 | 1807년 4월 9일 | |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루도비카 (Maria Ludovika Beatrix von Österreich-Este)[32] | ||||
자녀 없음 | ||||
바이에른의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공주 (Prinzessin Karoline Auguste von Bayern)[33] | ||||
자녀 없음 |
4. 기타
1938년에 그의 일생과 업적을 담은 V. 비볼의 <프란츠 황제>가 출간되었다.상당히 가정적인 성격이었다고 하지만 자주 재혼하고 딸을 원수에게 시집보냈다고 해서 가정에 무관심했다는 설도 있다. 첫 번째 아내인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는 딸만 낳고 사망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재혼했다고 해도, 두 번째 아내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에게서는 7명의 자녀를 낳았는데도 곧바로 재혼했다.
동생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친절한 면모를 보였다. 카를 대공의 부인인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타가 이른 나이에 죽자 개신교 신자였던 그녀를 카푸친 교회에 안장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고, 또다른 동생인 요한 대공이 평민 여성과 귀천상혼으로 결혼하려는 것도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나중에는 허락했다.[34]
장녀 마리아 루도비카가 원수 지간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결혼해서 낳은 외손자가 나폴레옹 2세이다. 원수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딸의 아들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2세를 끔찍히 아꼈다고 한다. 사실 친아들들이 터무니없이 변변찮은 것도 한 몫했다. 거기다 총명한 데다 외모까지 수려한 외손자를 더더욱 끔찍이 아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렇게 아끼던 손자 나폴레옹 2세는 1832년에 20살을 갓 넘긴 나이로 프란츠보다도 먼저 사망했고, 손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프란츠 2세도 그로부터 3년 후인 1835년에 세상을 떠났다.
재미있게도 조카손녀인 사보이아의 마리아 클로틸데[35]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조제프 보나파르트[36]와 결혼했다.
아버지 레오폴트 2세의 막내여동생이 바로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로 그녀는 프란츠 2세의 막내 고모가 된다. 앙투아네트의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프란츠 2세의 조카로 혼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촌 지간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하려 하지 않고 내버려 둔 죄책감 때문인지[37] 고종사촌인 마리 테레즈에게는 매우 잘 대해주었다고 한다. 마리 테레즈를 자신의 동생 카를 대공과 결혼시키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리 테레즈는 어머니의 죽음을 방관한 외가인 합스부르크 왕가보다는 친가인 부르봉 왕가로 돌아가길 택했고 결국 친사촌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와 결혼했다.
현재 독일의 국가인 Deutschlandlied, 일명 독일인의 노래는 요제프 하이든이 프란츠 2세에게 헌정한 황제 찬가의 멜로디를 사용하고 있으며, 황제 찬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는 1918년 11월까지 제국의 국가로 사용되었다. 또한 그 곡조는 제국이 붕괴한 후 1919년에 들어선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에서도 1929년부터 파시즘 정권이 독재 체재를 강화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면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사라진 1934년까지 <끊임없이 축복받으세(Sei gesegnet ohne Ende)>라는 제목으로 국가로 사용되었으며 헌법 개정 후 들어선 오스트리아 연방국의 국가로도 1934년부터 나치 독일에게 합병당하는 1938년까지 쓰였다.
[1]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관은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관으로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더이상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쓸 수는 없었기에 대신 새롭게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관을 쓴 모습의 초상화다.
[2]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3]
일명 루돌프 대공.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제자로 유명하다.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7번은 이 자에게 헌정되었는데, 때문에
대공(Erzherzog)이라는 부제로 더욱 유명하다.
[4]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버지
[5]
일찍 사망해서 황후는 되지 못했다. 이후 장가를 세 번이나 더 갔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오이겐 공작은
프로이센군 육군 대장으로
7년 전쟁과
바이에른 계승 전쟁 당시
프리드리히 대왕과 함께 싸웠다. 참고로 언니는
러시아 제국
파벨 1세의 황후인데 그녀의 언니를 황후로 추천한 사람 역시
프리드리히 대왕과
예카테리나 2세다. 거기다 이 사람의 외가 쪽으로는 외할아버지는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손자고 외할머니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이다. 이모들 중 하나는 심지어 숙질혼을 해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남동생인 페르디난트 왕자와 결혼하는데 이 사이의 아들이 나폴레옹 전쟁 당시 주전론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정작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벌어진 잘펠트 전투에서 전사한 프로이센 지휘관인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왕자다. 거기다가 남자 형제 중 넷이 군대에서 복무했는데 오빠 셋은 프로이센 육군 대장이고 동생 하나만
오스트리아군이다.
[6]
토스카나 대공국은 동생이 물려받아
페르디난도 3세로 즉위했다.
[7]
아버지 레오폴트 2세는 비록 친할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 편애로 인해 고모 마리 앙투아네트와 사이가 막 좋진 않았으나 그래도 여동생이고 함께 어린시절을 지낸 사이였지만 프란츠 2세는 고모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10대일때 태어나고 바로 프랑스로 시집을 가서 어린시절 봤던 기억도, 조카와 고모라는 혈연의 정도 없다시피 한 것도 컸다.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들이자 프란츠 2세의 큰 아버지인
요제프 2세와 아버지
레오폴트 2세 둘 다 당시의 군주치고도 일찍 세상을 떠난거라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심한 불운이 겹친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16세기에
잉글랜드 왕국에서
아라곤의 카탈리나도 어머니인
이사벨 1세가 50대 초반에 남편인
페란도 2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헨리 8세의 냉대를 고스란히 당하기만 해야했다. 아버지 페란도 2세가 카탈리나의 불안정한 안위를 방관했기 때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성인이 되고난 뒤의 마리 앙투아네트와도 편지로나마 지속적으로 교류한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8]
마인츠, 트리어, 쾰른 모두 라인강 좌안 (서안)에 있는 도시이고 라인강 좌안의 도시들이 싹다 나폴레옹에게 넘어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9]
프로이센은 1795년 바젤 평화조약으로 일찍 물러나면서
영국과
동군연합 중인 하노버의 점유를 허가 받았고
하노버 선제후국도 사실상 없어졌다. 그런데 정작 프로이센은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오스트리아 대공국-보헤미아 왕국과 함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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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강변 서안 영토를 조공으로 바치고 종이 호랑이 신세가 된 옛 주인 오스트리아의 역외 영토인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를 포함하여 라인강 우안 8배의 대토보상을 받아서 가장 출세했다.
[11]
뷔르템베르크, 작센, 바이에른은 역시 나폴레옹에 줄선 대가로 나폴레옹의 강요를 받아 프란츠 2세가 왕국으로 승격하는 데 동의했다. 프로이센이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한 특수 사례라 쳐도 제국에 왕국령을 여럿을 승인한 것은 사실상 제국은 끝났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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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 국가화가 가속화되었고 특히나 세력이 컸던 4명의 세속제후인
브란덴부르크,
작센,
팔츠,
바이에른 등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성했다. 특히 브란덴부르크는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을 형성하였고, 이것이 발전하여 결국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다.
[13]
이전까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한데 합친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밀라노 공작 등 여러 나라들의 군주를 겸하는
동군연합에 불과했다. 최근에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보편적인 용어는 아니며 오스트리아 제국 성립 이전에는 오스트리아가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 대공국(현
오스트리아 공화국 영토에
잘츠부르크주를 빼고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의
쥐트티롤,
고리치아,
트리에스테를 넣으면 얼추 맞는다)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14]
다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의
카를 7세를 제외하면 1453년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거의 준세습했다.
[15]
허울뿐인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자 그냥 오스트리아에 흡수시킨다. 역시 현재 오스트리아령이다.
[16]
보면 알겠지만 노골적으로 프란츠는 '빛', 나폴레옹은 '어둠'에 속하는 구도를 잡아 '악(어둠)의 화신'에게 대항하는 '선(빛)의 군주' 구도를 확립하고 있다. 이런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허용될 정도로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가 극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7]
참고로 이때 프랑스 제국의 인구는 동시기 러시아 제국을 능가하는 명실상부한 유럽대륙 제1의 강대국이었다.
[18]
프로이센은 작센, 바이에른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다.
[19]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본대로 차출된 포병대는 프랑스 본대와 함께 동귀어진하고 마크도날의 10군단에 배속된 병력은 탈영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렇게 전투 없이 짱박혀 있다만 왔는데도 추위, 질병 등의 비전투 손실이 커서 3만 3천 명 중 2만여 명만이 돌아왔다.
[20]
아버지인
레오폴트 2세가 토스카나 대공이던 시절
토스카나 대공국은 유럽 내에서 독보적인 비밀경찰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성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21]
큰아버지인
요제프 2세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음악에 관심이 많아 음악의 군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22]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딸이다.
[23]
요제프 1세의 딸이다.
[24]
외삼촌
페르디난도 1세와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의 장녀로 외사촌 겸 고종사촌이다.
[25]
나폴레옹 2세
[26]
신성 로마 제국이 존속되었다면 페르디난트 5세가 되었을 것이며, 실제로 헝가리 국왕 및 보헤미아 국왕으로서는 페르디난드 5세, 페르디난트 5세이다.
페르디난트 4세는
페르디난트 3세의 아들로
독일왕이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동생
레오폴트 1세가 차기 황제가 되었다.
[27]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3녀이다.
[28]
마리아 2세,
페드루 2세 등
[29]
페르디난도 1세의 5남이자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외손자이다. 클레멘티나에겐 오촌 숙부(아버지 프란츠 2세의 사촌)가 된다.
[30]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5녀이다.
[31]
프란츠 요제프 1세,
막시밀리아노 1세,
카를 루트비히 대공 등
[32]
1787년
12월 14일 ~
1816년
4월 7일. 숙부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의 막내딸로 친사촌이다.
[33]
셋째 며느리
조피 대공비의 언니이자 사위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의붓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의 처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결혼하게 된 이유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라인 동맹에 가담한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먼저 차녀
카롤리네 아우구스테를 프란츠 2세와 결혼시키고, 3녀
엘리자베트 루도비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결혼시키고 5녀
조피까지 프란츠 2세의 아들인
프란츠 카를 대공과 결혼시켰기 때문이다.
[34]
요한과 결혼한 안나 플로흘(Anna Plochl 1804~1885)은 우체국장의 딸로 평민이었는데, 프란츠 2세는 요한과의 결혼을 허락하면서 그녀에게 메란 백작부인이라는 귀족 작위까지 주었다. 다만 명백한
귀천상혼이어서 요한과 안나의 외아들인 요한 슈테판은 합스부르크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메란 백작 직위만 받았다.
[35]
친조카
사르데냐의 왕비 아델라이데(동생 라이너 대공의 딸)의 장녀이다.
[36]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의 삼남.
[37]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란츠 2세가 2살이 채 되기도 전에
루이 16세와 결혼해서 프랑스로 건너갔기 때문에 얼굴 볼 일도 없었고 그로 인해 가족으로서의 정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레오폴트 2세도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어린 시절만 잠깐 같이 보냈을 뿐 서먹한 사이인 건 매한가지였지만
바렌 사건 이후 여동생 가족이 처형당할 위기에 몰리자 급사하기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협상을 시도할 정도로 가족으로서의 애정은 확실했기 때문에 그런 아버지의 유지를 따르지 않았다는 후회는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