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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 I. Szent Istvá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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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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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975년(추정) |
헝가리 대공국 에스테르곰 | |
사망 | 1038년 8월 15일 (향년 62~63세) |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 |
재위 | 헝가리 대공국의 대공 |
997년 ~ 1000년 | |
헝가리 왕국의 왕 | |
1000년 ~ 1038년 8월 15일 | |
배우자 | 바이에른의 기젤라 |
자녀 | 오토, 성 임레 |
아버지 | 게저 |
어머니 | 셔롤트 |
형제 | 유디트, 일로나, 그리말다 |
서명 |
[clearfix]
1. 개요
헝가리 왕국의 초대 국왕이자 헝가리의 성인. 여러 부족 국가가 난립하던 헝가리를 통합하고 진정한 가톨릭 국가로 이끌어낸 인물이다.2. 생애
수 세기 후 그의 생애를 다룬 헝가리와 폴란드 연대기는 각각 967년, 969년, 975년의 3가지 출생년도를 제시했다. 현대 학자들은 세 연대기 모두 그가 997년 헝가리 대공이 되었을 때 아직 매우 어렸다고 밝힌 것을 근거로 975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출생지 역시 불확실하다. 11세기 헝가리 왕국의 성직자인 하르트비크가 기술한 연대기에서는 그가 에스테르곰의 순교자 성 이슈트반의 성당 옆집에서 태어났다고 기술되었다. 다른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 게저의 궁전이 위치한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그가 속한 아르파드 가문은 896년 초 아르파드가 시메온 1세의 불가리아 제1제국과 페체네그의 협공을 피해 판노니아 대평원으로 마자르족을 인도한 이래 대대로 마자르족의 지도자로 군림했다. 아버지 게저는 972년 헝가리 대공이 된 이래 친척과 귀족들을 상대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해 잔인한 인물로 악명이 높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에 지속적인 공세를 감행해 큰 타격을 입히고 판노니아 일대 상당수를 공략하는 등 군사적 역량은 탁월했다. 어머니 셔롤트는 마자르 부족 연맹에서 헝가리 대공 다음으로 높은 지위인 줄라(gyula)의 딸로 어렸을 때 어머니 율라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여자 형제로 유디트, 일로나, 그리말다가 있었다.
초명은 바지크(Vajk)로, 그에 대한 초기 기록에서는 항상 이 이름으로 기술되었다. 프라하의 주교인 성 아달베르트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아달베르트 주교에게 교육받았고 994년에서 996년 사이에 세례성사를 받아 이슈트반(István)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반면 케페스 연대기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온 테오다투스가 그의 대부를 맡아 교육시켰다고 한다. 하르트비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때 라틴어에 통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두 연대기에는 그가 왕자에 걸맞은 교육을 받았다고만 언급되었다.
게저는 그가 14살 또는 15살일 때 마자르 족장과 전사들을 소집한 뒤 그가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발표하고 모두에게 충성 서약을 하라고 지시했다. 995년경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딸 기젤라와 결혼했다. 바이에른 샤이에른 수도원에 보존된 연대기에 따르면, 결혼 의식은 샤이에른 성에서 열렸고 성 아달베르트가 중재를 맡았다고 한다. 기젤라는 바이에른 기사들과 함께 헝가리로 왔는데, 이중 몇몇은 토지를 받고 헝가리에 정착했다. 그들은 이때부터 그의 든든한 측근 세력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 게저가 살아있는 동안 니트라 공국의 영주를 맡았다.
997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에스테르곰에서 회의를 소집한 뒤 추종자들로부터 헝가리 대공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트란스다누비아 남부 지역의 영주였던 코파니(Koppány)가 자신의 아버지 '대머리 제린드'와 게저가 체결한 협정에 따라 자신에게 헝가리 대공 직위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게저의 아내 셔롤트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했다. 코파니는 게저 시절에 억압받았던 마자르 귀족들을 끌어모았고, 이슈트반은 이에 맞서 아내가 이끌고 온 바이에른 호위대와 함께 헝가리 정규군과 독일 기사들을 소집했다. 코파니는 그의 군대와 함께 북부 트란스다누비아를 침공하여 각지를 약탈했다. 이에 이슈트반이 그를 향해 진격했고, 양측은 베스프렘 인근 셰드 계곡에서 맞붙었다.
반나절 동안 이어진 격전 끝에, 이슈트반이 코파니가 이끄는 경기병대를 격파했다. 코파니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슈트반은 시신을 매장해야 한다는 헝가리의 불문법을 무시하고 계곡에서 그대로 썩게 내버려두라고 명했다. 이는 대공의 권위에 불복종하는 자의 말로를 모두에게 보여줌으로써 다시는 반란을 꿈도 꾸지 못하게 하려는 정치적 술수였다. 그는 뒤이어 코파니의 영지를 공략하고 부하들에게 토지를 분배했으며, 코파니의 옛 부하들에게 판노할름 수도원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강요했다.
999년, 이슈트반은 판노할름 수도원장을 로마로 파견했다. 하르트비크 연대기에 따르면, 교황 실베스테르 2세는 판노할름 수도원장을 접견한 뒤 헝가리를 가톨릭 국가로 봉헌하겠다는 이슈트반의 의지를 전해듣고 매우 기뻐하며 헝가리 왕으로 봉하고 강복했다고 한다. 75년 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그가 나라 전체를 교황에게 헌납했다며 헝가리를 교황령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슈트반 생전에 발행된 공식 문서에서는 이를 입증하는 내용이 적히지 않았다. 그는 헝가리 왕이 된 뒤 첫 번째로 반포한 법전 서론에서 자신을 하느님의 은혜로 통치하는 왕이라고 칭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 역시 그가 헝가리 왕이 되는 것에 동의했다고 한다. 오토 3세는 1000년 8월 14일부터 1001년 2월 15일까지 로마에 머물렀으니, 이때 판노할름 수도원장을 교황과 함께 면담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관식의 날짜는 불확실하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000년 12월 25일 또는 1001년 1월 1일에 대관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페크스 주교의 헌장에 따르면, 1009년 8월 23일은 이슈트반 왕의 통치 9년차였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대관식은 1000년 8월 23일에서 1001년 8월 22일 사이에 거행되었을 것이다. 11~12세기에 보관된 헝가리 왕실 등록부에 따르면, 이슈트반의 통치 기간은 37년 7개월 14일이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날짜는 1038년 8월 15일이므로, 대관식 날짜는 1001년 1월 1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하여 헝가리의 초대 왕이 된 그는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해 1002년 또는 1003년에 트란실바니아의 통치자이자 삼촌인 율라 3세와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승리를 거둔 그는 율라의 가족들을 투옥하고 소금 광산을 몰수했으며,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 왕국에 병합하고 그곳에서도 기독교 개종 사업을 단행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개종을 거부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율라는 탈옥에 성공한 뒤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에게 망명했다. 이후 1014년부터 1018년까지 폴란드와 헝가리의 전쟁이 벌어졌다. 폴란드군은 한때 모라바 강까지 진출하여 헝가리를 압박했다. 그러다가 키예프 루스와의 전쟁이 터지자, 볼레스와프 1세는 이슈트반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헝가리에게 빼앗았던 모든 영토를 이슈트반에게 돌려주는 대신 일부 헝가리 병력을 지원받았다.
그는 두 개의 부족국가들을 상대로도 공세를 벌였다. 케파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불가리아인과 슬라브인의 지도자인 케안(Keán)과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케안이 트란실바니아 남부에서 할거하는 부족장이었다고 추정한다. 이슈트반은 1003년경 케안을 주살한 뒤 케안의 옛 영지에 자신을 따르는 관료를 선임했다. 그는 1008년경에 흑마자르와도 전쟁을 벌였다. 남동부 트란스다뉴비아에 거주하는 이들은 대다수 마자르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상황에서도 고유의 신앙을 고집했다. 그는 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그들의 영토에 페크스 교구를 설정하고 1009년 8월 23일 교황 특사 아초에게 이곳을 맡겼다. 또한 이 시기에 컬로처 대교구가 설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무력을 통해 영역을 확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결혼 동맹을 통한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그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누이를 "마트라의 숲에 있는 큰 땅"의 지배자인 쿠만인 족장 어버 샤무엘과 결혼시켰다. 이를 통해 어버 샤무엘의 영역도 헝가리 왕국에 통합되었으며, 이슈트반은 그 대가로 어버 샤무엘에게 팔라토이스판(궁전 백작) 직책을 하사하고 중책을 맡겼다. 어버 일족은 이슈트반 왕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또한 1009년에 또다른 누이인 그리말다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오토 오르세올로의 결혼을 이끌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헝가리는 이 결혼을 통해 동로마 제국과의 오랜 갈등을 정리하고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102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콘라트 2세가 이슈트반의 처남이자 베네치아 도제인 오토 오르세올로를 공격해 베네치아에서 축출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헝가리의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1029년 바이에른군이 콘라트 2세의 지시에 따라 피슈차 강과 라이타 강 사이의 헝가리 영토를 여러번 급습했다. 이슈트반은 이에 대응하여 바이에른 영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1030년 6월, 콘라트 2세가 라바 강을 건너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슈트반이 청야전술을 사용해 적을 굶주리게 한 뒤 비엔나 근처에서 철수하던 독일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양자는 1031년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했다.
1028년, 모로스 지역[1]에서 강력한 부족 국가를 수립한 아즈토니[2]와 이슈트반의 전쟁이 발발했다. 이슈트반은 아즈토니가 기독교로 개종했는데도 7명의 아내를 둔 점을 들어 여전히 이교를 따른다고 비난하면서, 차나드에게 군대를 맡겨 아즈토니를 무찌르게 했다. 차나드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모로스로 진격해 아즈토니를 주살했고, 이슈트반으로부터 그곳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차나드 교구가 이곳에 설치되었고, 1030년에 겔레르트가 첫 주교로 선임되었다. 아즈토니를 토벌하는 데 성공하면서, 헝가리 왕국은 판노니아 대평원과 카르파티아 분지를 포괄하는 지역강국이 되었다. 그는 이 드넓은 영토를 여러 카운티로 나누고, 왕실 관리인 이슈판(ispan)을 영주로 세웠다. 카운티의 중심에는 성이 세워졌다. 또한 각지의 카운티에 교회를 세우고 가톨릭 개종 사업을 강력히 실시해 헝가리를 진정한 가톨릭 국가로 거듭나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두 권의 법전 이라스미벳(írásművet)을 반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전은 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법전을 차용했지만 헝가리 현지 사정을 고려해 조금씩 변형했다. 가령, 이 법전에서는 10개의 마을을 하나로 묶고 성당을 한 채 짓고 사제를 지원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주일 및 의무축일 미사 참례 준수를 의무화했으며, 모든 백성은 죽기 전에 사제를 불러서 종부성사를 받아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 유족들은 사제가 지정한 기간 동안 금식해야 했다. 또한, 그는 은화를 독자적으로 주조해 현물거래가 일반적이던 헝가리 왕국이 화폐경제를 수용하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유목 생활에 전념핟던 헝가리인들이 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 생활을 하도록 권고했고, 추종자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분배해 정착을 유도했다.
이슈트반은 아내 기젤라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오토와 임레를 낳았다. 하지만 오토가 유아기 때 죽었기 때문에, 임레가 사실상 외아들이었다. 그는 베네치아 출신의 베네딕토회 수도사 제라르에게 아들을 엄격히 교육시키게 해 차기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게 했다. 여기에 아들에게 헝가리 왕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열거한 훈계문을 작성했다. 그는 이 훈계문에서, "헝가리 왕은 반드시 가톨릭 신자여야 하며, 귀족과 성직자들의 조언을 귀담아듣고 백성을 온유하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임레는 불행히도 1031년 9월 2일 헤기쾨츠첸티엠레(현재 루마니아 산팀레우)에서 사냥하던 중 멧돼지의 뿔에 찔려 죽었다. 그는 이 사고에 큰 충격을 받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임레 사후 차기 후계자로는 이슈트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니트라 공작이었던 바줄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그는 바줄이 경박하고 어리석으며 가톨릭 신앙도 두텁지 못하니 왕위를 이을 그릇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전임 베네치아 도제 오토 오르세올로와 자신의 누이 그리말다의 아들인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일타이크 연대기에 따르면, 이에 반감을 품은 바줄은 네 명의 귀족을 꼬드겨 왕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했고, 이슈트반은 네 귀족들의 팔을 자르게 한 뒤 바줄의 두 눈을 멀게 했다. 여기에 바줄의 세 아들 레벤테, 언드라시, 벨러를 체포하려 했지만, 이들 모두 국외로 달아났다. 반면 바줄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들의 치하에서 쓰여진 후기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이슈트반은 바줄을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지만 그의 아내 기젤라를 포함한 바줄의 적들이 왕의 사절이 도착하기 전에 바줄의 눈을 멀게 하고 귀구멍을 납으로 채워버렸다고 한다.
이슈트반은 1038년 8월 15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설립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헝가리 왕국은 수십년간 내전과 이교도들의 반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다가 바줄의 손자인 라슬로 1세가 1077년 모든 정적을 물리치고 헝가리 왕위에 오르면서 혼란이 종식되었다. 1083년 8월 20일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3. 평가
그의 특출난 인물상과 그의 (국가 통합과 번영을 위한) 모든 필수적인 행보들이 그가 왜 성인이 되었고 왜 헝가리에서 엄청난 명성을 갖고 있는지 설명해준다.
His outstanding character and his all-essential activities give explanation why he became a saint and why he has great reputation in Hungary.
Kirs, Eszter. "Saint Stephen's Legacy, Immigration and Foreign Policy in Hungary in X-XIst Century." Miskolc J. Int'l L. 1 (2004): 1
His outstanding character and his all-essential activities give explanation why he became a saint and why he has great reputation in Hungary.
Kirs, Eszter. "Saint Stephen's Legacy, Immigration and Foreign Policy in Hungary in X-XIst Century." Miskolc J. Int'l L. 1 (2004): 1
헝가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헝가리에서 존경받는 인물.
헝가리의 1만 포린트 지폐의 도안이며 그의 왕관은 헝가리의 국장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매년 8월 20일 그의 시성일은 헝가리 건국 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3] 웅장하기로 이름난 부다페스트의 성 이슈트반 대성당 역시 이 인물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 이 대성당에는 이슈트반 1세의 오른손으로 알려진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ősök tere) 14인의 동상 위인 중 1명이며, 그의 동상은 헝가리 전역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근현대 헝가리의 드레드노트인 테게토프급 전함 4번함 SMS 센트 이슈트반의 함명 역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루트비히 반 베토벤의 모음곡[4] '슈테판 왕'이 이슈트반 1세를 모티프로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비슷한 형태의 합창이나 나레이션이 포함된 모음곡 중 다른 베토벤의 유명한 작품이라면 에그몬트가 있는데, 이 곡 또한 역사적 인물이었던 빌럼 판 오라녜의 조력자였던 에흐몬트 백작 라모랄 반 가베르를 모티프로 한 것.
[1]
정확히는 모로스 강 유역으로, 현대의 바나트 지역이라는 것이 유력하다
[2]
인종이 불분명하다. 보통 페체네그인 또는 쿠만인으로 여겨지는데, 헝가리 사학계에서는 하자르족 또는 페체네그족 또는 쿠만족으로 어쨋든 유목민이라 보며, 루마니아 사학계에서는 반대로 블라흐족 토착인으로 본다.
[3]
국가주도의 기념일로도 기념하고 있지만
민족 명절로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밤에는
헝가리 국회의사당에서 불꽃놀이도 한다.
Az államalapítás ünnepe라고 한다.
[4]
현대에는 주로 서곡만이 연주된다
[5]
애초에 이슈트반이
스테판에서 따온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