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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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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오토 왕조 제3대 황제
오토 3세 Otto III |
|||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오토 3세 (Otto III) | ||
출생 | 980년 | ||
독일 왕국 케셀 | |||
사망 | 1002년 1월 23일 (향년 21~22세) | ||
이탈리아 왕국 치비타카스텔라나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황제 | ||
996년 5월 21일 ~ 1002년 1월 23일 | |||
이탈리아 국왕 | |||
996년 4월 12일 ~ 1002년 1월 23일 | |||
로마왕 | |||
983년 12월 25일 ~ 1002년 1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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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아버지 | 오토 2세 | |
어머니 | 테오파노 | ||
형제 | 아델하이트, 조피아, 마틸다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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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어: Otto III (오토 3세)라틴어: Otto III (오토 3세)
이탈리아어: Ottone III (오토네 3세)
오토 3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독일 국왕 겸 이탈리아 국왕이었다.
세 살에 즉위하여 11년 동안 섭정을 받았으며 14세에 친정을 개시했다. 재위 기간 동안 안팎으로 반란과 외침에 시달렸다. 카롤루스 대제를 흠모하여 수도를 로마로 옮기고 카롤루스 대제를 모방한 성을 건설하며 그의 관례를 따라했으나 로마인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피난 와중에 21세의 나이로 급작스럽게 붕어했다.
2. 상세
983년 부왕 오토 2세가 갑작스럽게 붕어하면서 세 살의 나이로 제위를 물려받아 모후 테오파노의 섭정을 받았다. 오토 3세의 치세는 반란과 침략으로 점철되었다. 섭정을 받는 어린 시절에는 독일 국내에서 유력한 제후였던 바이에른 공작의 반란에 직면했다.14세때 단독 통치를 시작했으나 슬라브족과 바이킹족의 침입 및 전염병의 창궐 등으로 순탄치 않은 치세를 보냈다.
카롤루스 대제에 대한 동경이 컸던 소년 황제는 카롤루스 대제를 모방한 정치를 시도했다. 그는 제국의 수도를 로마로 옮겼고, 카롤루스 대제를 모방하여 팔라티나 언덕에 황궁을 건설했다. 또한 카롤루스 대제를 모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 ‘열두 사도의 종’이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도록 했다.
수도까지 로마로 옮긴 오토 3세는 이탈리아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에서 큰 반발에 직면했다. 오토 3세는 자신의 숙부였던 그레고리오 5세를 교황으로 선출시켰으나 로마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여 대립교황 요한 16세를 내세웠다. 오토 3세는 결국 대립교황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세운 교황을 복권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001년 로마에서 젊은 황제에 반발하는 폭동이 일어났고, 이 폭동을 피해 치비타카스텔라나로 피신했던 21세의 황제는 1002년 1월 23일 그곳에서 갑작스레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아직 결혼도 하기 전이었으므로[1] 후사가 없어 6촌 형제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1]
약혼자는
동로마 제국의 공주 조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