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23:30:56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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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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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왕국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Jiří z Poděbrad
파일:1280px-Jan_Vilímek_-_Jiří_z_Poděbrad_a_z_Kunštátu.jpg
제호 체코어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Jiří z Poděbrad)
출생 1420년 4월 23일
보헤미아 왕국 포데브라트 성
사망 1471년 3월 22일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재위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1458년 3월 2일 ~ 1471년 3월 22일
배우자 슈테른베르크의 쿠니군데 (1441년 결혼 / 1449년 사망)
로슈미탈의 얀카 (1458년 결혼)
아버지 빅토르 보체크 스 쿤슈타트 이 포데브라트
어머니 바르텐베르크의 아네슈카
누이 엘리슈카, 마르케타
자녀 보체크, 빅토르, 바르바라, 인드르지흐, 카테리나, 즈덴카, 인드르지흐, 베드르지흐, 아네슈카, 루드밀라

1. 개요2. 생애3. 사망과 사후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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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체코 역사상 처음으로 왕족 가문이 아닌 귀족 가문에서 선출된 왕이었으며, 얀 후스의 종교 개혁 정신을 신봉하면서도 가톨릭 신자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노력했다.

2. 생애

1420년 4월 23일 보헤미아 왕국 포데브라트 성에서 출생했다. 증조부 보체크 1세는 보헤미아 왕국을 기반으로 삼아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한 카를 4세의 왕실 궁재로서, 쿤슈타트와 포데브라트 성을 수여받고 가문을 개창했다. 아버지 빅토르 보체크는 후스 전쟁 시기에 후스파 장성으로서 얀 지슈카와 야코프 프로코프 휘하에서 활약했다. 특히 아우시크 전투 때 수적으로 우세한 후스파 십자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어머니는 바르텐베르크 출신의 아네슈카로 전해지나 자세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누이로 엘리슈카[1], 마르케타[2]가 있었다.

1427년 1월 초 아버지 빅토르 보체크가 아우시크 전투의 승리를 견인한 지 반년 만에 사망한 뒤, 친척이자 리슈니체의 영주인 헤럴트의 양육을 받았다. 1434년 14살 때 양형파와 가톨릭 연합군의 군영에 들어가서 타보르파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리파니 전투를 참관했다. 17살 때 지방 의회에 들어갔고, 합스부르크 왕조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된 것에 반발해 하이네스 프타첵 스 피르크슈타인의 주도하에 폴란드 왕자 카지미에시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보헤미아 후스파 귀족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 1438년 알브레히트 2세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보헤미아로 쳐들어가자, 그는 타보르에서 여러 인사들과 함께 농성해 격퇴했다.

1439년 폴란드 왕국 내에서 카지미에시 왕자를 보헤미아 왕위에 앉히려고 했던 귀족 집단이 내전에서 패배하고 후스파에 지극히 적대적인 인사였던 크라쿠프 주교 즈비그니에프 올레시니츠키가 정권을 장악한 뒤 카지미에시 왕자의 보헤미아 왕위 선출을 백지화해버렸다. 하지만 이르지를 비롯한 보헤미아 반란군 인사들은 여전히 알브레히트 2세에 항거했다. 그러던 그해 10월 27일 알브레히트 2세가 헝가리 국왕으로서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네스메이에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알브레히트 2세는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내 엘리자베트가 아들을 낳으면 오스트리아를 물려주며,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귀족들에게 태어날 아들을 국왕으로 선출해주고 아내와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5세에게 섭정을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엘리자베트는 알브레히트 2세 사후인 1440년 2월 22일에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를 낳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였던 오스트리아 공국은 갓난아기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알브레히트 2세의 유언에 따라 프리드리히 5세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보헤미아 왕국은 칠리 백국의 백작 울리히 2세가 이끄는 가톨릭 귀족들이 유언을 집행하려 했지만, 이르지를 비롯한 후스파 귀족들은 이에 불복종했다. 1440년 후스파 반란군이 보헤미아 동부 일대를 장악한 뒤, 그는 볼레슬라프스코의 주지사로 선임되었다. 1444년 후스파 반란군을 이끌었던 하이네스 프타첵이 사망한 뒤, 그가 반란군 지도자가 되었다. 1448년 6월 24일, 그는 보헤미아 내 가톨릭 세력 수장으로서 라디슬라우스를 받든 올드르지흐 2세 스 로쥼베르크와 협상한 끝에, 볼레슬라프스코의 주지사로 공인되었다.

1448년 8월 말, 이르지는 올드르지흐 2세가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5세가 독일왕 프리드리히 3세로 선출되어 대관식을 치르는 여정에 동행한 틈을 타 프라하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동보헤미아군 9,000명은 쿠트나호라 인근에 집결한 후 프라하로 진격해 9월 3일 프라하 인근에 당도한 후 성벽의 방어력이 약한 두 지점을 공략했다. 프라하 방위를 맡았던 멘하르트 2세 스 흐라데츠와 수비대는 한동안 항전했지만 끝내 압도되었고, 동보헤미아군은 프라하에 입성하고 멘하르트 2세 등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때 프라하에 살던 빈민들이 혼란을 틈타 유대인 게토를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후스파 신학자 얀 로키카나가 보헤미아 내 모든 성직자의 관리자로 선임되었다.

1449년 2월 8일, 로쥼베르크 가문을 위시로 한 가톨릭 귀족들은 스트라코니츠카 연합을 결성해 이르지에 맞섰다. 이후 양측은 1년간 몇 차례 무력 충돌을 벌이다가 1450년 6월 4일 로키칸 전투에서 이르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스트라코니츠카 연합이 저항을 포기하고 그 해 6월 11일 블치테아나 평화 협약을 체결하면서 갈등이 마무리되었다. 이후 이르지는 독일왕 프리드리히 3세와 협상한 끝에, 라디슬라우스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보헤미아 섭정으로 선임되었고, 후스파가 보헤미아에서 무제한적인 자치권을 누리는 것을 용인받았다. 1452년 4월 27일 프라하 의회에서 정식으로 보헤미아 섭정에 선임되었고, 보헤미아 교회 대표자들도 그에게 복종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1453년 에 있던 라디슬라우스를 찾아간 이르지는 그로부터 보헤미아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받았고, 얀 로키카나가 프라하 대주교로 인정받게 했다. 그 대가로, 그는 라디슬라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6년 동안 섭정을 맡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 해 10월 28일, 라디슬라우스는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두 사람은 곧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일설에 따르면, 라디슬라우스는 개인적으로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고, 그는 라디슬라우스를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이르지는 그동안의 내전으로 파괴된 보헤미아를 재건하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보헤미아 귀족들의 토지 소유권을 검토하는 위원회를 설립했다. 또한 지역 법원을 주재하고 귀족간의 분쟁을 해결했으며, 무역 발전을 지원하고 쿠트나 호라에서 금 채굴을 재개하게 했다. 또한 가톨릭과 후스파 모두를 공정하게 대해 서로 화목하게 지내도록 노력했다.

1457년 11월 23일,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17세의 나이로 프라하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보헤미아 왕위를 놓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의 동생이었던 튀링겐 방백 빌헬름 3세,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등이 경합했다. 이에 이르지는 1458년 2월 스스로 보헤미아 왕위에 입후보했고, 프라하에서 며칠간 회의가 이어진 끝에 그 해 3월 2일 그가 만장일치로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후스파 뿐만 아니라 보헤미아 내 가톨릭 지지자들도 그를 지지했는데, 이는 그가 섭정으로서 자신들을 공정하게 대한 것에 감명을 받았기도 했고, 외국 통치자가 선출되는 것에 극도로 반대하는 민중의 감정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보헤미아 주변의 군주들은 이단이 왕위를 차지했다며 이르지의 집권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치 초기부터 이웃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우선 라디슬라우스에게 체포된 뒤 프라하로 끌려왔던 마차시를 석방시킨 뒤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집권하게 해주는 대신 자신의 딸 카테리나와 결혼시켰다. 1459년 4월 25일에는 에거에서 작센 선제후국 베틴 가문 사람들과 협상한 끝에 자신의 딸 즈덴카를 프리드리히 2세의 차남 알브레히트와 결혼시키고, 빌헬름 3세의 딸 우르줄라를 자신의 아들 중 하나와 약혼시키기로 했다. 빌헬름 3세는 보헤미아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고, 이르지는 작센 내의 보헤미아 영토를 작센 공작이 보헤미아 왕국 내에 소유하고 있던 성 및 마을과 교환하기로 하며 작센과 보헤미아의 국경을 확정하였다.[3] 1459년 7월, 이르지는 브르노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협상한 끝에 보헤미아를 영지로 수여받고 선제후 지위와 보헤미아 국왕으로서의 특권을 확인받고, 아들 빅토르를 후계자로 공인받는 대가로, 프리드리히 3세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을 차지하는 것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1461년 카테리나와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결혼이 성사된 뒤에는 마차시 편으로 돌아섰다.

이르지는 후스 전쟁의 종식을 이끌어낸 바젤 공의회의 준수를 보장하는 한편, 다수의 후스파 신도와 소수의 가톨릭 신도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보장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종교적으로 관대했다. 본인은 후스파였지만, 아내로 맞이한 슈테른베르크의 쿠니군데와 로슈미탈의 얀카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종교가 아닌 능력에 따라 고문을 선택했으며, 마르틴 마이어, 안토니오 마리니, 하임부르크의 예호르 등 외국인들도 있었다. 또한 도시 개발을 지원하고 금 채굴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보헤미아 왕국의 경제 발전을 촉진했다.

그러던 1462년, 교황 비오 2세가 이르지에게 이단인 후스파를 탄압하라고 촉구했다. 이보다 앞서, 이르지는 1458년 5월 7일 대관식 전날에 아내 안카와 함께 헝가리 주교들과 만나서 자신이 교황에게 복종할 것이며 신앙의 일치를 수호하고 이단자들을 박해하겠다고 비밀리에 약속했다. 교황청은 이르지가 후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돌아선 것으로 해석했지만, 이르지 본인은 후스파는 이단이 아니라 정통 교회의 일원이라 여기고 다른 종파들을 이단으로 규정해 탄압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르지는 교황에게 후스파는 이단이 아니라 정통 교회의 일원임을 분명히 알리고 얀 로키카나를 프라하 대주교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하고자 포스투피체의 즈데네크 코스트카가 이끄는 특사를 로마에 파견했다. 그러나 비오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462년 3월 31일 후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상황이 이와 같이 전개되자, 이르지는 유럽 가톨릭 통치자들 사이에서 동맹을 확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르노블의 인문주의자이자 심복인 안토니오 마리니의 조언에 따라 1462년 5월에 <전 기독교계의 평화 확립을 위한 조약>을 창안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국가 주권 원칙, 불간섭 원칙,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의 분쟁 해결 원칙에 따라 지속적인 평화를 공고히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전유럽이 연합하여 "기독교인의 가장 완고한 적"인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 기독교도의 옛 터전을 되찾아야 했다. 연합에서는 '갈리아', '게르마니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 큰 단위로 조직된 주들이 각각 한 표씩 행사했다. 이때 '갈리아'는 여러 국가들로 구성된 다른 주들과는 달리 프랑스 왕국만 해당했기에, 프랑스가 이 연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다만 교황이 이 연합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마리니는 2년간 베네치아 공화국, 프랑스 왕국, 부르고뉴 공국, 폴란드 왕국,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을 비롯한 독일 영방 국가들을 잇따라 방문해 자신의 계획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작센을 비롯한 독일 군주들과 폴란드와 프랑스 군주들은 이 계획을 호의적으로 평가했지만, 베네치아인들은 교황 없이는 아무것도 하기를 거부했고, 마차시 1세 역시 동의하지 않았다.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에 대한 적대 의식이 강했기에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연합은 성사되지 않았고, 단지 1464년 5월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이르지간의 양자 우호 조약만 성사되었다.

한편, 이르지는 해외에서 보헤미아인의 나쁜 평판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처남인 로슈미탈과 블라트나의 야로슬라프 레프가 이끄는 '보헤미아 기사단'을 파견했다. 40명의 대표단에 52마리의 말과 1대의 보급 마차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1465년 11월 26일 프라하에서 출발해 독일, 부르고뉴,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를 거쳐 14개월 만에 보헤미아로 돌아왔다. 그들은 들리는 곳마다 기사도를 준수했고, 군주를 위해 값비싼 선물을 바쳤다. 그 결과 각국 민중들로부터 호의적인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지만, 유럽 정계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464년, 비오 2세는 후스파 박해를 시행하지 않는 이르지를 교회 법정으로 소환했다. 그가 이에 불응하자, 1465년 비오 2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바오로 2세는 보헤미아 가톨릭 영주와 도시들에게 이르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이에 일전에 이르지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하는 데 공헌했지만 이르지의 궁정에서 점차 소외된 것에 반감을 품고 있던 슈테른베르크의 즈데네크 코노피슈츠키가 1465년 11월 젤레나호라 성에서 가톨릭 귀족들을 소집한 뒤 젤레나호라 연합을 결성해 이르지에 공개적으로 대항했다.

이르지는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한다는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초기에는 그들에게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는 교황과의 화해를 추구했고, 해외에서 지원을 구했으며, 젤레나호라 연합 인사들과 협상했다. 1466년 7월, 이르지는 모든 유럽 군주들에게 선언문을 발표해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고 가톨릭과 후스파의 화해와 평화를 촉구했으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의 딸 우르줄라와 아들 올드르지흐의 결혼을 협상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교황청의 단호한 의지에 반대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1466년 12월 23일, 바오로 2세는 교황청 콘시스토리에서 이르지를 파문하고 회의에 참석한 4,000명에게 이 사실을 전 유럽에 널리 알리게 했다. 이르지는 이단자, 위증자, 신성 모독자로 낙인찍혔으며, 그에 대항하는 십자군이 선포되었다. 또한 이르지와 후손들은 보헤미아 왕위와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결국 이르지는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1467년 봄 젤레나호라 연합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다. 이리하여 발발한 내전에서, 보헤미아 민중은 그동안 선정을 베풀었던 이르지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독일 연방 제후 대부분도 이르지를 타도하려고 십자군에 동참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고,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도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하는 걸 용인하겠다는 교황청의 제안에 불응했다.

그 결과, 이르지는 교황의 요구에 따라 소집된 소규모 십자군 부대를 어렵지 않게 격파했고, 젤레나호라 연합을 공격해 코노피슈트, 체스키 슈테른베르크 성을 공략했다. 이에 즈데네크 코노피슈츠키를 비롯한 젤레나 호라 연합 인사들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으로 도주했다. 이르지는 여세를 몰아 아들 빅토르에게 군대를 맡겨 십자군의 집결지인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3세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에게 독일왕으로 선출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주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468년 3월 31일, 마차시 1세는 보헤미아에 선전포고하고 오스트리아로 진군해 보헤미아군을 몰아낸 뒤 모라바와 슬레스코를 침공했다. 이로 인해 모라바 대부분이 헝가리군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르지는 폴란드 왕국의 국왕 카지미에시 4세에게 보헤미아와 헝가리 사이의 평화 조약을 중재해준다면 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 왕자를 후계자로 지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이 제안에 혹해 마차시 1세에게 평화조약을 맺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이르지는 보헤미아 전역에 침략자를 몰아내자고 선포해 민중의 열띤 호응을 얻어내고 병사들을 대거 모집한 뒤 반격에 착수했다. 1469년 2월, 이르지는 빌레모프에서 헝가리-크로아티아군과 가톨릭 반란군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포위했다. 이후 마차시 1세와 어느 오두막에서 만나 협상을 벌인 끝에, 마차시 1세로부터 후스파와 교황청의 화해를 중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포위를 풀어줬다. 그러나 2달 후인 1469년 5월 3일, 마차시 1세는 보헤미아 가톨릭 교회로부터 보헤미아 국왕에 선출되었다.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 1세를 받들었고, 보헤미아 본토는 이르지를 계속 지지했다. 1469년 중순, 마차시 1세는 이르지가 이끄는 군대를 슬레스코에서 몰아냈다. 그해 7월 27일, 이르지의 아들 빅토르가 베셀리 나드 모라보우 전투에서 헝가리-크로아티아군에게 사로잡혔다. 하지만 마차시 1세는 11월 2일 우에르슈브로드에서 보헤미아군의 급습을 받고 패주했다.

3. 사망과 사후

1471년 초, 이르지는 아들 빅토르가 헝가리에서 옥고를 치르는 상황에 깊이 상심한 끝에 중병에 걸렸다. 그는 그 해 3월 22일에 프라하에서 사망했고, 프라하성 내의 성 비타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이르지의 큰아들 인드르지흐가 2달간 임시로 통치를 행사했고, 5월 27일 보헤미아 의회가 브와디스와프 왕자를 보헤미아의 새 국왕 블라디슬라프로 추대했다. 교황 특사 로렌초 로베렐라는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마차시가 보헤미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제국의회를 개최해 이를 묵살하고 블라디슬라프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이후 보헤미아는 블라디슬라프와 마차시 1세간의 보헤미아 왕위를 둘러싼 전쟁과 후스파와 가톨릭 세력간의 내전으로 오랫동안 혼란에 빠졌다가 1478년 올로모우츠 조약이 체결되어 블라디슬라프의 집권이 마차시 1세에게 용인되면서 겨우 수습되었다. 그러나 후스파 왕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증오심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이어졌다. 30년 전쟁 발발 후인 1623년, 가톨릭군은 보헤미아 반란군을 제압하고 프라하에 입성한 뒤 성 비타 성당 전면을 장식했던 이르지의 동상과 묘비를 파괴하고 이르지의 유해와 프라하 대주교 얀 로키카나의 유해를 광장에서 불태웠다.

1896년, 체코 조각가 보후슬라프 베드리히 요제프 슈니르히가 포데브라트에 이르지의 승마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17년 초, 제2 체코슬로바키아 소총병 연대가 러시아에서 창설되었을 때 그의 이름을 따서 '이르지 연대'로 명명되었다. 1964년, 유네스코는 이르지의 유럽 연합 계획을 유럽연합의 기원 중 하나로 규정했다.

4. 가족

  • 슈테른베르크의 쿠니군데(1425 ~ 1449): 보헤미아 귀족인 슈테른베르크의 스밀의 딸.
    • 보체크 4세(1442 ~ 1496): 포데브라트 영주. 정신 문제가 있어 보헤미아 왕위 후계자 후보 명단에서 일찌감치 배제되었다.
    • 빅토르(1443 ~ 1500): 뮌스터베르크 공작, 오파바 공작.
    • 바르바라(1446 ~ 1469): 리페의 인드르지흐와 초혼, 로노프의 얀과 재혼.
    • 인드르지흐(1448 ~ 1498): 뮌스터베르크 공작, 클라드스코 백작
    • 카타리나(1449 ~ 1464):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의 왕비. 14세에 임신 사산 끝에 사망함.
    • 즈덴카(1449 ~ 150): 작센 선제후 에른스트의 동생 알브레히트 공작의 부인.
  • 로슈미탈의 얀카(1430 ~ 1475): 보헤미아 귀족인 로슈미탈의 얀의 딸.
    • 올드르지흐(1452 ~ 1492): 클라드스코 백작.
    • 베드르지흐(1453 ~ 1458): 요절.
    • 아네슈카(? ~ ?): 왈라키아에서 결혼한 것으로 추정됨.
    • 루드밀라(1456 ~ 1503): 호이누프와 스트젤린 공작 프리데리크 1세의 부인.

알브레히트와 즈덴카는 두 아들 게오르크와 하인리히 형제를 낳았다. 이중 하인리히의 아들이 슈말칼덴 전쟁 당시 베틴 가문의 종가인 에른스트계의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배신한 마이센의 유다 모리츠이다. 모리츠는 자녀 없이 죽어 동생 아우구스트가 선제후가 되었지만 작센 선제후국 작센 왕국을 통치한 베틴 가문의 알브레히트계는 그의 후손들인 셈이다.


[1] 1422 ~ 1501, 두베와 리페의 인드르지흐의 아내 [2] 1425 ~ 1476, 제베렉과 플레인의 보후슬라프의 아내 [3] 이 국경은 유럽에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국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