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15:37:44

케니 달글리시

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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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기사 서임자 (여성)
GBE 파일: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_.jpg
찰스
스콧 셰링턴

(1922)
에드워드
빅터 애플턴

(1946)
KBE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b160a24b08857219efc111189b9773d.jpg
프레더릭 벤팅
(1934)
에드먼드 힐러리
(1953)
게오르그 솔티
(1971)
시드니 푸아티에이
(1974)
찰리 채플린
(1975)
앨프리드 히치콕
(1980)
밥 호프
(1998)
앤드루 와일스
(2000)
로저 무어
(2003)
팀 버너스리
(2004)
조너선 아이브
(2012)
Knight Bachelor 파일:knightbachelor.jpg
아이작 뉴턴
(1705)
찰스 라이엘
(1848)
찰스 휘트스톤
(1868)
조지프 리스터
(1883)
아서 코난 도일
(1902)
W. S. 길버트
(1907)
프랜시스 골턴
(1909)
프레더릭
G. 홉킨스

(1925)
무하마드
자파룰라 칸

(1935)
오언 리처드슨
(1939)
알렉산더 플레밍
(1944)
랠프 리처드슨
(1947)
로런스 올리비에
(1947)
존 길구드
(1953)
칼 포퍼
(1965)
알프 램지
(1967)
쉬리다스 람팔
(1970)
제임스 블랙
(1981)
마이클 아티야
(1983)
클라이브
싱클레어

(1983)
렉스 해리슨
(1989)
V. S. 나이폴
(1990)
더크 보가드
(1992)
로저 펜로즈
(1994)
팀 라이스
(1994)
캐머런 매킨토시
(1996)
폴 너스
(1999)
리처드 브랜슨
(2000)
숀 코너리
(2000)
톰 커트니
(2001)
믹 재거
(2002)
벤 킹슬리
(2002)
리들리 스콧
(2003)
조너선 색스
(2005)
케네스 브래너
(2012)
안드레 가임
(2012)
다니엘
데이 루이스

(2014)
패트릭 헤드
(2015)
마크 라일랜스
(2017)
제임스
래트클리프

(2018)
톰 무어
(2020)
마이클 호턴
(2021)
마틴 에이미스
(2023)
CBE + Knight Bachelor 파일:knightbachelor.jpg
데이비드 린
(1953)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1959)
알렉 기네스
(1959)
스탠리 매튜스
(1965)
맷 버스비
(1968)
알렉 이시고니스
(1969)
에른스트
곰브리치

(1972)
리처드 애튼버러
(1976)
존 밀스
(1976)
월터 윈터보텀
(1978)
데이비드
애튼버러

(1985)
윌리엄 골딩
(1988)
피터 유스티노프
(1990)
이안 맥켈런
(1991)
안소니 홉킨스
(1993)
데릭 제이코비
(1994)
바비 찰튼
(1994)
사이먼 래틀
(1994)
조지 마틴
(1996)
마이클 갬본
(1998)
아서 C. 클라크
(1998)
엘튼 존
(1998)
이안 홈
(1998)
존 엘리엇
가디너

(1998)
톰 피니
(1998)
나이젤 호손
(1999)
알렉스 퍼거슨
(1999)
프랭크 윌리엄스
(1999)
마이클 케인
(2000)
폴 스미스
(2000)
바비 롭슨
(2002)
앨런 파커
(2002)
앨런 베이츠
(2003)
그레고리 윈터
(2004)
트레버 브루킹
(2004)
제임스 다이슨
(2007)
크리스토퍼 리
(2009)
브래들리 위긴스
(2013)
존 허트
(2015)
칼 젠킨스
(2015)
로드 스튜어트
(2016)
레이 데이비스
(2017)
빌리 코놀리
(2017)
배리 깁
(2018)
마이클 페일린
(2019)
데이비드 수셰이
(2020)
샘 멘데스
(2020)
스티브 맥퀸
(2020)
로저 디킨스
(2021)
조너선 프라이스
(2021)
존 부어만
(2022)
브라이언 메이
(2023)
OBE + Knight Bachelor 파일:knightbachelor.jpg
어니스트 섀클턴
(1909)
윌리엄 브래그
(1941)
리처드 돌
(1971)
잭 브라밤
(1978)
지미 새빌
(1990)
클리프 리처드
(1995)
트레버 맥도날드
(1999)
스털링 모스
(2000)
재키 스튜어트
(2001)
톰 존스
(2006)
테리 프래쳇
(2009)
패트릭 스튜어트
(2010)
밴 모리슨
(2015)
앤디 머리
(2017)
가즈오 이시구로
(2018)
마이클 모퍼고
(2018)
MBE + Knight Bachelor 파일:knightbachelor.jpg
폴 매카트니
(1997)
제프 허스트
(1998)
니콜라스 윈턴
(2003)
닉 팔도
(2009)
링고 스타
(2018)
케니 달글리시
(2018)
루이스 해밀턴
(2021)
}}}}}}}}}}}} ||
케니 달글리시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파일:리버풀 FC 로고.svg

12대, 19대
파일:블랙번 로버스 FC 로고.svg

30대
파일:뉴캐슬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23대
파일:셀틱 FC 로고.svg

대행

블랙번 로버스 FC 역대 감독
돈 맥케이
(1987~1991)
케니 달글리시
(1991~1995)
레이 하포드
(1995~1996)

셀틱 FC 역대 주장
빌리 맥닐
(1963~1975)
케니 달글리시
(1975~1977)
대니 맥그레인
(1977~1987)
}}} ||
케니 달글리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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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FWAlogo.png
1978-79 · 1982-83
파일:pfa_new_logo.png
파일:프리미어 리그 심볼.svg
베스트팀
파일:pfa_new_logo.png
1978-79 · 1979-80 · 1980-81 · 1982-83 · 1983-84

1983 Ballond'or
수상
미셸 플라티니
2위
케니 달글리시
3위
알란 시몬센
}}} ||
케니 달글리시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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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00003E, #00003E)"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3E> 파일: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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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D2C5A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케니 달글리시 102회 1971.11.10 1986.1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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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tic FC Greatest ever team
(3-3-2-2)
ST
달글리시
파일:UEFA EURO SCO.png
(1969~1977)
ST
라르손
파일:UEFA EURO SWE.png
(1997~2004)
LM
레녹스
파일:UEFA EURO SCO.png
(1961~1978)
(1978~1981)
RM
존스톤
파일:UEFA EURO SCO.png
(1962~1975)
LCM
올드
파일:UEFA EURO SCO.png
(1955~1961)
(1965~1971)
CM
맥스테이
파일:UEFA EURO SCO.png
(1981~1997)
RCM
머독
파일:UEFA EURO SCO.png
(1959~1973)
LB
게멜
파일:UEFA EURO SCO.png
(1961~1971)
CB
맥닐
파일:UEFA EURO SCO.png
(1957~1975)
RB
맥그레인
파일:UEFA EURO SCO.png
(1970~1987)
GK
심슨
파일:UEFA EURO SCO.png
(1964~197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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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소속 기간 출장 득점
<colbgcolor=#fff> GK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패키 보너 Packie Bonner 1978~1998 641 0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로니 심슨 Ronnie Simpson 1964~1970 188 0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존 팔론 John Fallon 1958~1972 195 0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존 톰슨 John Thomson 1926~1931 188 0
DF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짐 크레이그 Jim Craig 1965~1972 231 6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대니 맥그레인 Danny McGrain 1967~1987 663 8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타미 게멜 Tommy Gemmel 1961~1971 418 63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로이 에이킨 Roy Aitken 1975~1990 672 52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빌리 맥닐 Billy McNeill 1957~1975 790 35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존 클락 John Clark 1958~1971 316 3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바비 에반스 Bobby Evans 1944~1960 537 11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알렉 맥네어 Alec McNair 1904~1925 641 9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조크 스타인 Jock Stein 1951~1957 148 2
MF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바비 머독 Bobby Murdoch 1959~1973 485 102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폴 맥스테이 Paul McStay 1981~1997 677 72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버티 올드 Bertie Auld 1955~1961
1965~1971
275 79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타미 번스 Tommy Burns 1973~1989 503 82
FW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지미 존스톤 Jimmy Johnstone 1961~1975 515 130
파일:스웨덴 국기.svg 헨리크 라르손 Henrik Larsson 1997~2004 315 242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스티비 찰머스 Stevie Chalmers 1959~1971 406 231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케니 달글리시 Kenny Dalglish 1969~1977 320 167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바비 레녹스 Bobby Lennox 1961~1978
1978~1981
586 277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지미 맥메너미 Jimmy McMenemy 1902~1920 516 164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패트시 갤러처 Patsy Gallacher 1911~1925 464 192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존 휴즈 John Hughes 1959~1971 383 188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지미 맥그로리 Jimmy McGrory 1922~1937 448 469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샌디 맥마혼 Sandy McMahon 1890~1903 217 177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지미 퀸 Jimmy Quinn 1900~1915 331 217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윌리 월러스 Willie Wallace 1966~1971 232 134
출처: 셀틱 FC 공식 홈페이지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d00027><tablebgcolor=#d00027> 파일:리버풀 FC 로고.svg 리버풀 FC
명예의 전당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55555,#aaaaaa
구분 헌액자
1890 맷 맥퀸
Matt McQueen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해리 브래드쇼
Harry Bradshaw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00 잭 콕스
Jack Cox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알렉스 레이스백
Alex Raisbeck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10 아서 고다드
Arthur Goddard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에프라임 롱워스
Ephraim Longworth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20 도날드 맥킨리
Donald MacKinlay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엘리샤 스콧
Elisha Scott
파일:북아일랜드 국기.svg
1930 고든 호지슨
Gordon Hodgso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지미 맥도걸
Jimmy McDougall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40 잭 발머
Jack Balmer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빌리 리델
Billy Liddell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50 알버트 스터빈스
Albert Stubbin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앨런 에이코트
Alan A'Court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60 로저 헌트
Roger Hunt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론 예이츠
Ron Yeats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70 이안 캘러한
Ian Callagha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레이 클레멘스
Ray Clemenc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80 케니 달글리시
Kenny Dalglish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앨런 한센
Alan Hansen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90 이안 러쉬
Ian Rush
파일:웨일스 국기.svg
존 반스
John Barne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2000 제이미 캐러거
Jamie Carragher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스티븐 제라드
Steven Gerrard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참고 사항
* 각 년대별로 2명을 헌액한다.
출처: 리버풀 FC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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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비상임 이사
Liverpool Football Club Non-Executive Director
Celtic FC Greatest Ever Team
Celtic FC Official Legend
파일:Dalglish-19995637-1-1275x720.jpg
케니 달글리시
Sir Kenny Dalglish
본명 케네스 매시슨 달글리시
Sir[1] Kenneth Mathieson Dalglish, MBE[2]
출생 1951년 3월 4일 ([age(1951-03-04)]세)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체중 73kg
주발 오른발
직업 축구 선수 ( 중앙 공격수[3]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경영인
소속 <colbgcolor=#d00027> 선수 셀틱 FC (1968~1969 / 유스)
셀틱 FC (1969~1977)
리버풀 FC (1977~1990)
감독 리버풀 FC (1985~1991)
블랙번 로버스 FC (1991~199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7~1998)
셀틱 FC (2000 / 감독대행)
리버풀 FC (2011~2012)
경영 블랙번 로버스 FC (1995~1997 / 풋볼 디렉터)
셀틱 FC (1999~2000 / 풋볼 디렉터)
리버풀 FC (2013~ / 비상임 이사)
국가대표 102경기 30골[4] ( 스코틀랜드 / 1971~1986)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5px"
{{{#!folding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colbgcolor=#d00027> 역대 등번호 스코틀랜드 대표팀 - 7, 8, 9
셀틱 FC - 8, 9
리버풀 FC - 7[5]
별명 킹 케니 (King Kenny)
가족 아들 폴 달글리시
}}}}}}}}} ||

1. 개요
1.1. 상세
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감독 경력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6.1.2. 개인 수상6.1.3. 개인 기록
6.2. 감독
6.2.1. 대회 기록6.2.2. 개인 수상
6.3. 서훈
7. 여담8.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케니 달글리시는 모든 면에서 케빈 키건보다 뛰어난 선수였다."[6][7]
알렉스 퍼거슨
스코틀랜드의 前 축구 선수, 축구 감독. 현재는 리버풀 FC의 비상임 이사직을 맡고 있다.

1.1. 상세

이견이 없는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로 평가 받는 인물로 20년간의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셀틱 FC 리버풀 FC 두 팀에서만 뛰었으며, 리버풀 팬들에게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참고로 두 팀 모두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다. 셀틱 팬들로부터는 '킹 케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1969년에 셀틱 FC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했으며, 1977년에 리버풀 FC로 이적한 뒤 1985년부터 리버풀의 선수 겸 감독으로 있었으며, 1990년에야 선수 생활을 은퇴하게 된다.[8] 힐스버러 참사의 여파로 리버풀 감독직에서 사임했으며, 1991년 당시 2부리그에 있던 블랙번 로버스 FC의 감독으로 취임한 뒤 1995년에 블랙번 로버스로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위업을 이룬다. 1997년에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감독으로 취임하였으며, 1998년에 사임. 이후 2000년 셀틱의 임시 감독을 맡았으며 2011년 로이 호지슨의 뒤를 이어 리버풀의 임시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 2011년 5월 12일, 정식 감독이 되었지만, 한 시즌만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이후 리버풀의 비상임 이사로 활동중이다.

2. 클럽 경력

케니 달글리시의 선수시절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1986, ITV)

2.1. 셀틱 FC

파일:b25lY21zOjdiMTAyNmU1LWVmNTAtNGFhYy1iMDc3LTQyMTI1YzRiNzcyMDo5YmIxNTkxZC03MzZlLTQyYjctODAwNi0xYzIyMmMyOGU3Y2U=.jpg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엔지니어의 아들로 태어나 레인저스의 서포터로서 자랐다. 밀튼 뱅크 초등학교에서 골키퍼로 축구를 시작했으며, 이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리버풀 FC에서 트라이얼을 받았으나 입단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본인이 응원하던 레인저스에 입단하기 위해 몇번이나 입단을 신청했으나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1967년에 다름아닌 레인저스의 최대 라이벌 셀틱 FC와 임시 계약을 체결하며 본격적인 축구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첫 시즌을 컴버널드 유나이티드에서 임대생활로 보내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한 시즌동안 37골을 넣으며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당시 셀틱의 감독 조크 스타인은 달글리시에게 한 시즌 더 임대를 떠나 실력을 갈고 닦을 것을 제안했으나, 달글리시가 프로 계약을 정식으로 맺기를 원했고 결국 다음해 셀틱과 정식 계약을 맺어 프로 선수가 된 달글리시는 1968년 스코티시 리그컵 8강전 해밀튼 아카데미컬과의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1군 데뷔전을 치룬다. 하지만 1968-69 시즌, 그는 아직 무르익지 못한 실력에 의해 리저브에서 주로 출장하면서 17경기 4골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그 다음 시즌에는 약간 더 처진 위치로 포지션을 변경해 31경기에서 19골을 기록, 리저브 팀의 리그와 컵 더블을 견인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셀틱의 리저브 팀은 달글리시 외에도 대니 맥그레인, 조지 코넬리, 루 마카리, 데이비드 헤이 등 대단한 잠재력을 일찍이 평가받은 걸출한 유망주들이 즐비해 '퀄리티 스트리트 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리저브 팀에서의 활약에 의해 1969-70 시즌 1군 경기에 종종 얼굴을 비췄으며, 1971-72 시즌에는 리저브 팀에서 시즌 23골을 넣으며 라이벌 레인저스와의 리저브 컵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대단한 활약을 이어갔다.

리저브 팀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 후 1971-72 시즌에는 마침내 셀틱의 1군 팀에 자리잡게 되었다. 1971년 8월 4일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드펌 더비에서 패널티킥으로 득점을 올리며 화려한 데뷔골을 기록한 후, 해당 시즌 53경기에 출장하여 29골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셀틱은 달글리시의 등장에 힘입어 리그 7연패를 달성했으며 스코틀랜드컵도 들어올렸다. 그 다음 시즌에는 모든 대회에서 39골을 기록하며 셀틱 최다 득점자에 올랐고, 셀틱은 리그 8연패를 달성했다. 1973-74 시즌에는 팀과 함께 리그 9연패와 컵 더블, 유러피언컵에서는 4강까지 올라서며 절륜한 활약을 이어갔다. 1974-75 시즌에는 리그 연패에 실패했으나 컵 대회에서 우승을 챙길 수 있었다. 이후 1975-76 시즌에는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해당 시즌 셀틱은 감독 조크 스타인이 자동차 사고로 팀에서 이탈하여 12년 만에 무관의 시즌을 보냈다. 1976-77 시즌에는 리그와 컵 더블을 다시 이뤄냈는데 이 시즌에도 날카로운 공격력을 과시해 모든 대회에서 27골을 집어넣었다.

셀틱에서 통산 320경기 출장에 167골이라는 뚜렷한 활약을 올린 달글리시는 당대 유럽 강호들의 구애를 받기 시작했고, 1977년 당시 리버풀 감독인 밥 페이즐리에 의해 440,000파운드의 금액에 영국 내 이적료 기록을 갱신하며 리버풀 FC로 이적하게 되었다.[9][10]

2.2. 리버풀 FC

1977년, 리버풀의 첫 번째 전성기를 이끌던 리그 최고의 공격수 케빈 키건 함부르크 SV로 떠나보낸 밥 페이즐리와 리버풀은 팀의 새로운 간판이 되어줄 선수를 찾아나섰다. 이때 선수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던 밥 페이즐리 감독의 눈에 띈 선수가 바로 당시 셀틱에서 에이스로 거듭나고 있던 케니 달글리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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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페이즐리 감독은 당시 잉글랜드 축구계 최고의 이적료였던 44만 파운드를 투자해 달글리시를 안필드로 데려왔고, 천문학적인 이적료와 더불어 팀의 간판선수였던 키건의 대체자라는 꼬리표 덕에 달글리시는 수 많은 관심과 기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달글리시는 곧 그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게 된다.

1977년 8월 13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채리티 실드에서 데뷔한 달글리시는, 일주일 후 8월 20일 미들즈브러 FC와의 리그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고, 데뷔시즌부터 리그 20골을 포함, 시즌 31골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선수로 단번에 거듭나게 되었다. 키건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활약을 펼친 그는 팬들과 구단의 기대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선수였고, 결정적으로 해당시즌 유러피언 컵[11] 결승전에서 그레이엄 수네스의 패스를 받아 결승골을 집어넣으며 팀의 유러피언 컵 2연패를 이루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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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즌에도 달글리시의 활약은 이어졌다. 1978-79 시즌에는 리그 21골을 포함 모든 대회에서 25골을 집어넣으며 팀 내 최다 득점자로 활약하여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 했고, 해당 시즌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잉글랜드 풋볼 리그를 폭격했다. 1982-83 시즌까지 달글리시는 1980-81 시즌을 제외하고 리그 전 경기에 출장했으며, 전 시즌 20골 이상을 기록하는 등 엄청난 경기력과 득점력을 보여주었다. 1980-81 시즌에는 약간 주춤하며 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에 실패했지만 해당 시즌 팀을 유러피언 컵 결승으로 이끌어 결국 본인의 통산 두 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렸고, 리그 컵까지 우승해 더블을 달성했다. 1981-82 시즌부터는 다시금 득점포를 가동하여 이안 러쉬와 함께 공격진을 이끌었는데, 이 시기 최전방에서 팀의 득점을 책임지는 러쉬와 한 칸 아래에서 공간을 파고들어 수비진을 농락하는 달글리시의 투톱조합은 잉글랜드와 유럽 최고의 공격진으로 이름을 날렸고, 구단 역사상 최고의 공격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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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유럽 축구 역사에 있어 최강의 언더독으로 불리는 노팅엄 포레스트가 유러피언 컵 2연패 등 대기록들을 세우며 리버풀을 압박했지만, 케니 달글리시- 그레이엄 수네스- 앨런 한센으로 이어지는 스코티시 코어 라인에 더해 신예 이안 러쉬의 활약, 구단 역사상 최고의 풀백 필 닐과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 등이 만든 강건한 수비라인을 보유하고 있던 리버풀은 1980년에서 1984년까지 유러피언 컵 2회, 리그 3연패, 리그컵 우승 3회 등을 기록하며 유럽 축구를 지배했다. 이 시기 달글리시는 1982-83 시즌 PFA 올해의 선수와 더불어 1983년 발롱도르 2위에 오르며 명실상부 붉은 제국의 왕으로 군림했고 1983-84 유러피언컵에서는 팀을 이끌어 AS 로마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본인의 세 번째 빅 이어이자 구단의 통산 네 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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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84-85 시즌에는 득점력의 감소와 함께 팀도 에버튼 FC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었고, 약간의 하락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유럽에서 여전히 강력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1985년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서 터진 헤이젤 참사[12]로 인해 구단의 운명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조 페이건 감독이 고령의 나이로 인해 사임했고, 참사로 인해 어수선해진 팀의 분위기를 잡아줄 적임자를 찾고 있던 구단에게 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달글리시는 적임자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85-86 시즌부터 달글리시는 선수 겸 감독의 신분으로 리버풀을 이끌게 되었다.

1985-86 시즌 달글리시는 리그 21경기에 선발로 나섰고, 첼시 FC와의 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며 팀의 통산 16번째 우승을 자축했다. 이후 에버튼 FC과의 FA컵 결승에도 선발로 출전하여 더블을 달성했다.그 다음 시즌에는 리그에 18경기 출전, 6골을 득점해 여전히 선수로서 경쟁력있는 모습을 보였으나 점차 젊은 선수들을 위해 출전을 양보했고, 감독직에 더 전념하게 되었다. 1987-88 시즌과 1988-89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2경기씩 출전하는데에 그쳤으며, 1989-90 시즌에는 1990년 5월 5일에 더비 카운티 FC와의 리그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하며 본인의 선수 커리어 마지막 경기에 출전하였다. 마지막 득점은 1987년 4월 18일 노팅엄 포레스트를 상대로 터트린 안필드에서의 리그 득점이었다. 1990-91 시즌부터는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감독직만을 맡게 되었다. 리버풀에서는 총 515경기에 출전하여 172골을 기록했다.

3.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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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1월 10일, UEFA 유로 1972 예선전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교체 출전하여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1년 뒤인 1972년 11월 15일, 덴마크와의 월드컵 예선전에서는 데뷔골을 기록했다. 이후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 승선하여 에선 3경기에 모두 출장하였고 팀을 이끌어 1승 2무로 선전했으나 골득실에서 밀려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1975년 이후로는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주포로 자리잡아 팬들에게 기억될만한 플레이를 남겼다. 1976년 잉글랜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한 햄든 파크에서의 경기와, 1977년 잉글랜드 웸블리에서 만나 득점하여 2-1 승리를 견인한 경기가 손에 꼽힌다.[13]

이후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의 전성기를 선봉에서 이끌었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서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동점골을 기록하여 3-2 역전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후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월드컵에서는 모두 본선 진출에 실패하여 아쉬움을 남겼고,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는 22인 최종 명단에 합류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 1986년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장 기록인 102경기를 소화했으며, 30골을 기록하여 데니스 로와 함께 국가대표팀 최다 득점자에 올랐다. 15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1986년 11월 12일 햄든 파크에서 열린 룩셈부르크와의 UEFA 유로 1988 예선전에서 3-0으로 승리를 이끌며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마지막 득점은 1984년 11월 14일, 스페인을 상대로 월드컵 예선전에서 3-1로 승리한 경기에서 나왔다.

4. 플레이 스타일


최전방에서부터 측면과 2선 전역을 소화할 수 있는 전천후의 포워드였으나, 리버풀에서 활약할 당시 스트라이커인 이안 러쉬의 아래 처진 위치에서 세컨드 스트라이커 롤을 맡았을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최전방 공격수가 수비진을 끌고 들어갔을 때 생기는 박스 근처의 공간에서 당대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로 명성이 높았다.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첨예한 슈팅력에서 나오는 결정력. 감아차는 기술적인 슈팅에서 발등에 얹혀서 때리는 슈팅에 이르기까지 왼발과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상당한 완성도를 보였다. 이에 선수 커리어 초창기 셀틱에서부터 리버풀 커리어 초반부에 이르기까지는 팀 내 주 득점원으로 활약했다. 특히 리버풀에서 러쉬가 등장하여 투톱으로 가동되기 이전에는 포워드진 중앙과 측면에서 모두 활약하며 위치를 가리지 않고 박스를 타격하여 훌륭한 생산력을 선보였다. 특히 측면에서 공을 몰고 들어가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고 감아차기로 골을 기록하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다.

그러나 처진 위치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였던만큼 선수로서의 최대 장점은 기술적인 온 더 볼 능력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굉장히 빠른 스피드를 보유하는 동시에 정교한 드리블 능력까지 보유하고 있었기에 상대 수비진 사이로 직접 볼을 운반하며 박스 안으로 돌파하는 플레이를 즐겼다. 당대 최고의 드리블러였던 맨유의 레전드 조지 베스트는 달글리시의 능력이 레알 마드리드 최고 레전드인 디 스테파노와 비슷하다고 평했을 정도. 이에 이안 러쉬라는 걸출한 주포가 팀에 가담하자 포워드 전역에서 자유도를 부여받고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세컨드 스트라이커 롤을 소화할 수 있었다. 1선의 플레이 메이커로서 달글리시는 팀의 결정적인 찬스를 만드는 찬스 메이커였으며, 달글리시가 직접 공을 가지고 박스 근처에서 보여주는 재기넘치는 퍼포먼스는 리버풀이 공격 과정에서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는 이유였다. 특히 당대 이안 러쉬와 더불어 순간적으로 공격진에 가담하는 그레이엄 수네스와 펼치는 연계플레이는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는데, 그 중심에 있던 달글리시의 활약으로 리버풀은 '붉은 제국'이라고 불리우는 잉글랜드 클럽 역대 최고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활동량이 많고 근면성실한 멘탈을 가지고 있어 수비 가담 또한 훌륭한 편이었으며, 175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점프력이 상당해 헤더가 위협적이었고, 꽤 많은 헤더 득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리버풀로 이적하여 33세까지 한 시즌을 제외하면 리그 전 경기에 출장해 지속적으로 시즌 두 자릿수 득점을 유지하는 등, 경기 소화력과 내구성, 꾸준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다재다능함과 날카로운 득점력, 절륜한 기술력으로 인해 당대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플레이 스타일로 따지자면 리버풀에서의 전임자인 케빈 키건과 상당히 유사하나, 리버풀에서 퍼포먼스의 완성도는 더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된다.

5. 감독 경력

5.1. 리버풀 FC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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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니 모란, 로이 에반스 두 참모와 함께

1985년 34살의 나이로 조 페이건의 뒤를 이어 당시 헤이젤 참사로 인해 어수선했던 리버풀의 선수 겸 감독에 임명되었다. 당시 리버풀은 빌 샹클리 이후 부트 룸 출신 코치들을 연이어 내부 승격시켜오며 팀의 연속적인 퍼포먼스 유지에 집중해왔는데, 달글리시의 경우 부트 룸에 정식으로 합류한 코치는 아니었으나 선수로서 다년간 리버풀을 대표하며 부트 룸에 상주하는 코치들과도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구단의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 중 하나였기에 즉각 감독으로서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페이건의 사임과 참사의 영향에 의해 부정적인 전망들도 다수 있었으나 1985-86 시즌 리그와 FA컵을 동시에 재패하며 달글리시는 붉은 제국의 연속성을 당당하게 이어갔다. 당시 에버튼의 경쟁을 물리치고 리그에서는 2점차로 구단 통산 16번째 우승을 차지했으며, FA컵에서도 결승전에서 에버튼을 꺾으며 머지사이드의 강자가 누구인지를 각인시켰다. 이 시즌 달글리시는 잉글랜드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본인의 첫 감독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보냈다.

다음 시즌인 1986-87 시즌은 주포였던 이안 러쉬 유벤투스로 떠나보내면서 전력이 약화되었고, 리그컵 결승에서 아스날 FC를 만나 패하며 무관에 그쳤으나, 직후 1987-88 시즌에는 피터 비어즐리, 존 반스, 존 알드리지, 레이 호튼 등 우수한 선수들을 수급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리그를 재패했다. 이 시즌 달글리시의 리버풀은 거의 전 시즌 동안 1위를 유지하였으며, 1988년 2월 21일 에버튼에게 발목을 잡히기 이전까지 모든 대회에서 37경기 무패[14]를 달리는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줬다. 이후 리버풀은 40경기에서 단 2패에 그치며 리그 4경기를 남겨두고 팀 통산 17번째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1987년에는 FWA로부터 공로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하지만 1988년 FA컵 결승전에서 약체로 평가받던 윔블던 FC에 패배를 당하며 더블에는 실패했다. 이 시즌 달글리시는 본인의 통산 두 번째 잉글랜드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1988-89 시즌에는 이안 러쉬가 복귀했고, 새롭게 전력을 가다듬어 다시금 트로피 사냥에 나섰다. 달글리시의 리버풀은 1989년 FA컵 결승전에 3시즌 연속으로 진출했고 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우승 경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1989년 4월 15일 팀 역사상 최악의 사고인 힐스보로 참사가 발생했다. 헤이젤에 이은 이 충격적인 참사로 인해 달글리시는 깊은 슬픔에 빠졌으며, 사고 수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시간을 보냈다.[15] 참사를 책임지고 수습하는 모습에 의해 당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으나 결국 참사의 아픔은 그의 커리어에 깊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리버풀을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고 이후 리버풀은 FA컵 결승에서 에버튼을 만나 3-2로 승리했지만, 아스날 FC과의 리그 경쟁에서는 동력을 잃어 아쉽게 리그 우승은 놓치고 만다.

이어진 1989-90 시즌에는 참사의 아픔을 이겨내 다시 리그의 왕좌에 올랐다. 이는 팀 통산 18번째 우승이었으며, 이 시즌이 끝난 뒤 달글리시는 세 번째 잉글랜드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참사의 후유증은 서서히 달글리시를 갉아먹고 있었고, 결국 달글리시는 1990-91 시즌 도중에 감독직에서 물러나며[16] 리버풀에서의 감독 생활에 쉼표를 찍게 되었다. 1991년 2월 22일,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FA컵 5라운드 경기에서 라이벌 에버튼과 4-4로 비긴 지 이틀 만의 결정이었다. 사임 당시 구단은 리그에서 3점 앞서며 1위를 달리고 있었다. 달글리시는 "만약 리버풀이 제가 감독으로 돌아와주길 기다린다면, 저는 돌아올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정들었던 안필드를 떠났다.

참사로 인해 마지막에 고통받는 시간을 보냈으나, 달글리시는 헤이젤 참사로 위급상황에 빠진 팀을 수습하여 감독으로서도 훌륭한 역량을 보였고, 리그 우승 3회와 FA컵 2회 우승, 리그컵 1회 우승을 장식해 붉은 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불태웠다. 케니 달글리시는 선수 시절과 감독 시절을 합해 리그 우승 8회, FA컵 우승 2회, 유러피언 컵 3회, 리그컵 4회, 채리티 쉴드 5회, 유러피언 슈퍼컵 우승 1회를 달성하며 전설적인 커리어를 안필드에 수놓았다. 이후 달글리시는 2019-20 시즌 위르겐 클롭이 리버풀을 30년 만에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시키기 전까지 리버풀을 1부 리그에서 우승시킨 마지막 감독으로 남아있었다.

5.2. 블랙번 로버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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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셔우드와 함께

이후 셰필드 웬즈데이 FC에서 감독직 제의가 오지만 이를 거절한 케니 달글리시는 축구팬들을 놀라게 하며 2부 리그의 블랙번 로버스 감독으로 취임한다. 취임한 바로 그 해 블랙번 로버스를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킨 후 달글리시는 잭 워커 회장이 다져놓은 탄탄한 자금을 바탕으로 1992년, 사우스햄프턴 소속의 앨런 시어러를 영입했고 승격 첫 해를 리그 4위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마치게 된다.

바로 다음해를 맨유에 이어 2위라는 성적으로 마쳤으며, 1995년에는 극적인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는 블랙번의 81년만의 리그 우승이었다. 이후 케니 달글리시는 블랙번의 고문위원장에 임명되었으나 1996년 상호 합의하에 블랙번을 떠나게 된다.

5.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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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취임 기자회견장에서 회장인 존 홀 경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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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시절 동료인 테리 맥더모트 코치와 함께

그리고 1997년 1월에 갑자기 물러난 케빈 키건의 뒤를 이어 케니 달글리시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케니 달글리시 취임 당시 4위였던 뉴캐슬은 시즌을 2위로 마감하여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성공하였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바르셀로나전 3-2승리를 포함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13위라는 리그 성적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기에 이른다.

5.4. 셀틱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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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휴식을 취하던 케니 달글리시는 1999년부터 친정팀인 셀틱의 단장으로 일하다가 2000년 2월, 자신의 리버풀 시절 제자인 존 반스가 감독직에서 해임되자 자신이 임시 감독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 해 스코티쉬 리그컵에서 에버딘을 2-0으로 물리치며 우승을 달성하고, 셀틱이 2위로 그 해 시즌을 마감하면서 케니 달글리시의 임시 감독 생활은 끝나게 된다.

5.5. 리버풀로의 귀환

그 후 오랜시간 감독직에서 물러나 있던 달글리시는 2009년 리버풀 감독인 라파엘 베니테스의 제의를 받아 리버풀 유소년 아카데미의 관리를 책임지게 됨과 동시에 리버풀 FC의 대사직을 겸하게 된다. 2010년 6월 베니테스가 리버풀의 부진에 책임을 지고 경질됨과 함께, 케니 달글리시는 자신이 팀을 맡을 것을 구단 수뇌부에 건의하지만 팬들의 바람과 본인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로이 호지슨이 부임하게 된다.[17]

하지만 호지슨이 부임한 이후 리버풀의 성적이 좋아질 기미는커녕 더 추락하기에 이르자 팬들이 경기장에서 케니 달글리시를 연호하기 시작했고, 결국 리버풀에 존 헨리 구단주가 부임한지 얼마 지나지않아 로이 호지슨이 해고되었다.

5.6. 리버풀 FC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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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지슨이 2011년 1월 8일 리버풀을 떠나게 됨에 따라 달글리시는 19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위해 시즌이 종료될 때까지 리버풀 FC의 임시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달글리시의 복귀 첫 번째 경기는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FA컵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이었다.[18] 비록 이른 시간대의 페널티킥 판정으로 인해 1-0으로 패하긴 했지만 달라진 경기내용으로 인해 팬들로 하여금 앞으로의 시즌에 대한 기대를 품게 했으며, 리그 23라운드 울버햄튼 원정에서 3-0으로 승리하면서 복귀 후 첫 승을 신고하게 된다. 이어진 겨울 이적시장에서 앤디 캐롤 루이스 수아레스의 영입과 함께 첼시전 1-0 승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 3-1 승리[19], 맨체스터 시티전 3-0[20] 승리를 포함해 감독 대행 취임 후에 이전 호지슨 시절과 비교해 확실히 달라진 리버풀FC의 모습을 보여줬다. 부임 이후의 활약으로 3년 계약을 체결하며 정식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정식 감독 취임 후 반년이 겨우 지나자마자 바로 팬들에게 폭풍같이 까이고 있는데 이유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엄청나게 많지만 크게 몇개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 하울 메이렐레스를 붙잡지 않은 점: 10-11 시즌 리버풀의 원동력은 스티븐 제라드도, 토레스도 아닌 하울 메이렐레스였다. 그런데 11시즌이 끝나자마자 리버풀은 메이렐레스를 이적 시장 마지막날 첼시에 12M에 팔아버렸다. 물론 이 이적은 메이렐레스의 의지가 강력했기 때문에 성사되었던 딜이었긴 하지만 10-11 시즌 팀에 가장 크게 기여했던 선수를 너무 쉽게 내준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형성되었다.[21] 만약 메이렐레스가 첼시에 가서 버로우를 탔다면 모를까 첼시에서 알짜배기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약이 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루카스 레이바가 시즌 아웃된 상황에서 리버풀 팬들은 더더욱 하울을 그리워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부상등의 문제는 원체 예측하기 힘든 요소이기도 하고, 여기까지는 달글리시의 리빌딩이라 칠 수 있다.
  • 시대착오적 뻥축구: 공간점유와 압박, 패스워크가 전술적 대세로 떠오른 와중에도 롱패스와 역습 위주의 90년대식 전술에만 의존했다. 그 결과 매일같이 상대의 볼 점유에 휘말리다 중원을 내주며 간단하게 실점하고, 공격시에는 뻥축만 반복하다가 제풀에 지치는 과정만 시즌 내내 반복되었다. 감독 취임 당시 거의 10년이나 지나 일선에 복귀했기 때문에 현대의 전술적 추세를 따라잡기 어려우리라는 세간의 우려가 그대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 이적시장 대참사: 리버풀을 인수한 존 헨리는 달글리시에게 무려 1억 유로의 이적자금을 제공했다. 돈싸움이 리그의 대세로 떠오른 이상 이 이적자금은 리버풀이라는 팀의 운명을 건 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달글리시는 이 자금을 앤디 캐롤, 조던 헨더슨[22][23], 스튜어트 다우닝, 찰리 아담 등 쓸데없이 고평가된 잉글리쉬 선수들에게만 퍼부었고 그 선수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전원 폭망하고 말았다(그나마 달글리시의 유일한 영입 성공작이라 불리는 호세 엔리케는 공교롭게도 영국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엔리케도 다음 시즌에는 신나게 삽을 들고 있다!). 챔피언스 리그 진출 실패+저조한 리그 순위로 상금 감소+거액의 이적료와 주급 지출이 겹치면서 리버풀의 투자여력은 사실상 무너져내렸고 무능한 선수들이 고액의 주급을 수령하며 주급체계마저 붕괴하고 말았다. 돈은 돈대로 쓰고 팀의 전력과 잠재력마저 형편없이 약해버져버린 것, 어찌보면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실제로 달글리시의 퇴임 후의 2012-2013 시즌 이적시장에서 리버풀은 전례없을 정도의 절약정책을 펴게 된다.

천만다행으로 호세 엔리케 루이스 수아레스[24]가 잘해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찰리 아담의 경우 스탯은 잘 쌓는데 실속이 빵점이라는 평이 지배적이고,[25][26] 토트넘 전 참패와 노리치 - 스완지 전 홈 무승부로 인해 달글리시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떨어진 상태다. 게다가 영국 FA가 수아레스를 인종차별 혐의로 기소했기 때문에 앞으로 있을 공청회에서 수아레스의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치명적인 전력 누수가 발생한다.

물론 알론소가 떠나고 팀의 기둥이었던 캐러거와 제라드가 하락세인 상황에서 리빌딩은 불가피하고, 그 리빌딩을 위한 과정은 적절한 가격[27]의 젊은 선수들의 영입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10-11 시즌 후반기에 보여준 케니의 용병술은 팬들에게 상위권 재진입이라는 꿈을 꾸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성적에 대한 중압감은 점점 무거워졌으며, 가뜩이나 상위권 팀들과 달리 유럽 국제 대회를 치르지 않는다는 이점[28]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라는 점에서 케니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거기에 기껏 데려온 600억짜리 공격수가 벤치워머로 남아있다라는 것은 케니에게 정말 골칫덩어리로 남아버렸고, 여기에 루카스의 시즌 아웃으로 인해 박싱데이를 앞둔 리버풀에게 상당히 어두운 전망만이 보이고 있다. 추가로 최근 팀의 이 여러모로 뭐한 짓들만 골라서 하는지라 한번 정신차리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팀 선수인 루이스 수아레스의 인종차별발언 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발언과 대처가 큰 비난을 불러모으고 있다.[29] 그 때문에 실망한 팬들도 적지 않고 경기력도 여전히 강팀에게는 강하고 약팀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등, 그야말로 진퇴양난. 그나마 9년만의 칼링컵 우승으로 6년 무관의 한을 풀긴 했지만 비중이 낮은 대회라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정작 중요한 리그에서는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며 또다시 7위, 아니 이제는 7위권도 위협받을 상황에 놓여있다. 뭐 칼링컵 우승 덕분에 다음 시즌은 UEFA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얻긴 했지만 4강 전문팀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여기에 그놈의 잉글랜드 집착병이 도지면서 정작 훌륭한 외국인 선수들을 외면하는 바람에 팬들의 속은 계속 타들어가고 있다. 그 밖에 시즌 FA컵 결승에 오르긴 했지만 첼시 FC에게 1:2로 패하면서 준우승에 그쳤다.

퀸즈 파크 레인저스전의 어메이징[30]한 패배 전후로 Red And White Kop, 국내의 T.P.T.P. 같은 리버풀 팬사이트에서도 케니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아직까지는 레전드로 믿어보자는 의견도 많지만 점점 불신이 커지는 중. 심지어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의 복귀 떡밥을 미는 팬들도 있다.

결국 리버풀은 마지막 스완지시티 원정 경기마저 패배하면서 8위로 리그를 마감했다. 그것도 9위 풀럼과는 승점도 같아서 골득실까지 따져야 했다. 리버풀의 골득실 +3. 풀럼은 -7.

리그를 마친 후,경질하네마네 연임하네마네등의 설이 분분하다가 결국 한국 시각으로 2012년 5월17일 새벽에 공식적으로 경질되었다. # #

참고로 경질된 후, 보상금을 받았는데 트위터에서 그가 그 보상금을 팀의 이적자금에 보태쓰라고 거절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콥들을 감동시켰으나 그 다음날, 그게 사실이 아니며 그가 보상금을 전액 수령해갔다는 사실이 지역지 리버풀 에코를 통해 확인되었다. 보상금 수령 자체는 달글리시 개인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앞선 오보때문에 모양새가 더 우습게 된 것은 사실이다.

물론 해당 시즌 감독으로서는 대실패였지만 그래도 감독 대행으로서 로이 호지슨 경질 이후 파탄 상태였던 팀을 수습하면서 나름 2012년 리그컵 우승으로 6년 무관 행진을 끊은 공도 있고[31], 선수 시절과 감독 1회차에 쌓은 업적들이 있기에 침체기와 암흑기에 졸전을 펼친 감독들과는 궤를 달리하며 변함 없이 구단의 레전드로 남게 되었다.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1.3. 개인 기록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6.3. 서훈

7. 여담

  • 유럽 대륙 최악의 스포츠 경기 참사들로 꼽히는 1971 아이브록스 참사, 헤이젤 참사, 힐스보로 참사 현장에 모두 있었다. 아이브록스 참사 당시에는 셀틱의 리저브 팀 멤버로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고, 헤이젤 참사가 있던 1985년 유러피언 결승에서는 선수로 출전했다. 힐스보로 참사 당시에는 리버풀의 감독직을 맡고 있었다.
  • 오래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감독직을 쉬고 있던 탓에 전술 감각이 떨어져 있을 거란 걱정이 많았다. 일각에서는 모자란 부분은 스티브 클락 코치를 위시한 코치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낙관하는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걱정은 정확하게 맞았다. 그냥 뻥축만 하는 데다 위기 상황에서 번뜩이는 교체도 전혀 기대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나마 들만한 장점은 선수단 사기에 미치는 부분. 어린 선수들에게 농담을 섞어가며 긴장을 풀어주는 장면도 볼 수 있고, 인터뷰에서 보여주는 말빨은 그야말로 팬들에게 닥치고 킹케니 찬양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만들었다. 다만 루이스 수아레스의 문제와 관련된 인터뷰나 대처로 인해 언론을 잘 다룬다는 말은 더 이상 하기 어려울 듯.[35] 게다가 팀의 성적도 나쁘고 경기력도 엉망인데 계속 초점을 빗나가는 인터뷰만 반복함으로써 팬들조차 뒷목을 잡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 인재 관리자 유형의 감독으로 동기부여에 뛰어난 유형이지 탁월한 전술가라거나 밀도있는 훈련으로 팀을 발전시키는 유형의 지략가는 아니었다. 현역 시절에 쌓아놓은 명성만으로도 선수를 수월하게 영입할 수 있었고, 선수가 스스로 경기를 풀어가게 하는 스타일이다. 리버풀 1기 시절엔 전임자로부터 이어받은 패스와 움직임을 기반한 축구를 한 반면 블랙번에서는 개인 기량이 제한적인 선수들로 최전방에 해결능력이 좋은 앨런 시어러 크리스 서튼에게 공을 연결하는 스타일의 축구를 했다. 이러한 단순한 스타일로 블랙번에서는 우승할 수 있었으나 전술이 다양화된 2010년대 프리미어리그에서는 그러한 방식으로 다시 성공을 가져올 수 없었다.
  • 부인은 마리나 달글리시인데, 유방암을 앓고 완치된 이후 유방암 기금 마련을 위해 마리나 달글리시 재단을 세워 유방암 환자들의 치료 기금 마련에 힘을 쏟고 있다. 부인 마리나는 이 노력을 인정받아 2009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해, 부부가 모두 MBE 수훈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안 러시의 회고에 의하면 한성격 하는 인물로 보인다. 언젠가 러시가 팀 페스티벌에서 마리나의 얼굴에 케이크를 문대는 장난을 쳤는데 마리나는 그 이후 러시를 볼 때마다 한동안 케이크를 던져댔다고 한다. 마리나의 복수는 그에 그치지 않아서 러시의 양복에 간지럼 가루를 뿌려놓은 적도 있었다. 이때문에 러시는 인터뷰 도중에 계속 몸을 긁적여야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마 인터뷰어가 자신을 덜 떨어진 놈으로 생각했을 거란 추측은 덤. 마리나에 관한 러시의 회고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누구든 마리나 달글리시를 건드리지 마세요"
  • 이후 리버풀과 글래스고 지역에서는 케니를 Knight Bachelor[36] 기사작위에 서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후 2018년 6월 서훈명단에 Knight Bachelor 대상자로 올라 'Sir' 칭호를 쓰게 되었다.
  • 리버풀에서 해임된 지 17개월 만에 리버풀로 복귀해 리버풀 구단의 비상임이사 직책을 맡게 되었다. 기사
  • 한편 헤이젤 참사에 대한 회고록에서 아래와 같은 옹호성 발언을 해 많은 욕을 먹었다.
"리버풀 팬들의 행동을 용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편이 계속 자신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을때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I can't condone the action of some Liverpool fans but it is difficult not to react when the opposing supporters are throwing missiles at you.)"


"만약 그들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일어날 지 알았다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고, 영국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보복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이탈리아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 모두 반드시 후회해야 합니다.(If they had foreseen the dreadful consequences, or thought what terrible things might unfold, I'm sure the stones would never have been thrown by the Italians and that the English retaliation would never have occurred. Every single one of them, both Italian and English, must have regretted it.)"
회고록 전문
한 마디로 자기들도 피해자란 소리. 이외에도 뜬금없이 헤이젤 참사와 1년 전 AS 로마와의 유러피언 컵 결승전을 연결지으며 이탈리아인들은 먼저 리버풀 팬들을 폭행한다고 하지를 않나 유벤투스 서포터들이 먼저 돌을 던지고 도발했다고 하지를 않나 경기장을 제공한 벨기에 측과 UEFA까지 걸고 넘어지는 등 축구팬들에겐 적반하장으로 밖에 안 보일 내용으로 가득하다.
  • FIFA 20에 신규 아이콘으로 추가되었다.
  • 2020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4월 10일에 검사를 받아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확진 당시에는 무증상이었다고 한다. 검사 전부터 집에서 자가격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촉자는 없다고 한다. 리버풀 구단 공식 발표 다행히 4월 13일에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다. #
  • 2021년 현재는 잉글랜드 8부리그 팀인 머린 AFC의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 별명은 가수다. YNWA를 부른 게리 마스덴이란 가수와 닮았다는 이유로 그러한 별명이 붙여졌다.

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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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스태프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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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진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구단주 파일:미국 국기.svg 존 헨리 John William Henry ll
의장 파일:미국 국기.svg 톰 워너 Tom Werner
회장 파일:미국 국기.svg 마이클 고든 Michael Gordon
CEO 파일:미국 국기.svg 빌리 호건 Billy Hogan
CEO[1]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마이클 에드워즈 Michael Edwards
CCO[2]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벤 라티 Ben Latty
COO[3]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앤디 휴즈 Andy Hughes
이사 파일:미국 국기.svg 마이클 이건 Michael Egan
비상임이사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케니 달글리시 Kenny Dalglish, MBE
실무진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스포팅 디렉터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리처드 휴즈 Richard Hughes
리서치 디렉터 파일:미국 국기.svg 윌리엄 스피어맨 William Spearman
데이터 과학 총괄 파일:웨일스 국기.svg 다피드 스틸 Dafydd Steele
리서치 개발 및 통계 연구원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팀 와스켓 Tim Waskett
리서치 엔지니어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마크 하울렛 Mark Howlett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마크 스티븐슨 Mark Stevenson
영입 및 스카우팅 총괄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데이브 팔로우즈 Dave Fallows
수석 스카우트 파일:북아일랜드 국기.svg 배리 헌터 Barry Hunter
스카우트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마크 버칠 Mark Burchill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시에나 오브리엔 Sienna O'Brien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존 도슨 John Dawso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마이크 크롬튼 Mike Crompto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카일 월뱅크스 Kyle Wallbank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마크 고워 Mark Gower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스콧 러셀 Scott Russel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크리스 윌킨슨 Chris Wilkin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앤디 세이어 Andy Sayer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엔드류 오브리엔 Andrew O'Brien
파일:덴마크 국기.svg 마드스 예르겐센 Mads Jørgen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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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국기.svg 스벤 도라제크 Sven Dworaczek
파일:프랑스 국기.svg 라시드 칼리피 Rachid Khlifi
파일:브라질 국기.svg 다슬러 마르케스 Dassler Marques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페르난도 트로이아니 Fernando Troiani
파일:미국 국기.svg 라파엘 클라이언토 Raphael Cilento
파일:세네갈 국기.svg 실뱅 은디아예 Sylvain N'Diaye
아카데미 디렉터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알렉스 잉글소프 Alex Inglethorpe
코치진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감독 파일:독일 국기.svg 위르겐 클롭 Jürgen Klopp
수석 코치 파일:독일 국기.svg 페터 크라비츠 Peter Krawie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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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디벨롭먼트 코치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비토르 마투스 Vítor Matos
골키퍼 코치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욘 아흐터베르흐 John Achterberg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잭 로빈슨 Jack Robinson
파일:브라질 국기.svg 클라우지우 타파레우 Claudio Taffarel
피트니스 및 컨디셔닝 총괄 파일:독일 국기.svg 안드레아스 코른마이어 Andreas Kornmayer
회복 및 퍼포먼스 총괄 파일:독일 국기.svg 안드레아스 슐룸베르거 Andreas Schlumberger
피트니스 코치 파일:북아일랜드 국기.svg 코널 머터 Conall Murtagh
보조 피트니스 코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조던 페어클러프 Jordan Fairclough
재활 피트니스 코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데이비드 라이딩스 David Rydings
경기 및 선수 분석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대니얼 스피어릿 Daniel Spearritt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조엘 보너 Joel Bonner
상대 분석관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그렉 매티슨 Greg Mathieso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제임스 프렌치 James French
U-23 감독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배리 루터스 Barry Lewtas
U-18 감독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마크 브릿지윌킨슨 Marc Bridge-Wilkinson
의료진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팀닥터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조나단 파워 Jonathan Power
보조 팀닥터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사라 린제이 Sarah Lindsay
정골의학 총괄 파일:벨기에 민간기.svg 프리제스 반덴 오웰레 Frigyes Vanden Auweele
물리치료 총괄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리 노브스 Lee Nobes
선임 재활 물리치료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조 루이스 Joe Lewis
선임 퍼포먼스 물리치료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크리스 모건 Chris Morgan
물리치료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스티브 릴리 Steve Lilley
마사지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폴 스몰 Paul Small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미셸 허드슨 Michelle Hudson
마사지사 겸 스포츠 치료사 파일:일본 국기.svg 와타나베 모토노리 Watanabe Motonori
기타 스태프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영양사 파일:독일 국기.svg 모나 네머 Mona Nemmer
장비 관리 코디네이터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브렌던 매킬더프 Brendan McIlduff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리 래드클리프 Lee Radcliffe
그라운드 관리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데이브 맥컬록 Dave McCulloch
스포츠 심리학 고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리 리차드슨 Lee Richardson
출처: 리버풀 FC 공식 홈페이지 / 마지막 수정 일자: 2024년 3월 13일

[1] CEO of Football, 축구 부문 CEO [2] Chief Commercial Officer, 최고 상업 관리자 [3] Chief Operating Officer, 최고 운영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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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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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초대
바클레이& 맥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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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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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
애시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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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맥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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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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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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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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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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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샹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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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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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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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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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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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수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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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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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대
에반스& 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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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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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지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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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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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5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 받았고 2018년에 Knight Bachelor에 서임되며 ‘Sir(경)’ 칭호를 받게 되었다. [2] Member, 대영제국 훈장 5등급 [3] 오늘날로 따지면 전통적 스트라이커 바로 밑에 뛰는 세컨드 스트라이커에 가까웠다. [4]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장, 최다 득점자. [5] 7번 외에 6, 12, 14번을 사용하기도 했다. [6] 달글리시는 그가 영입되기 이전, 리버풀의 간판스타이자 유럽 최고의 선수였던 케빈 키건의 대체자였다. 발롱도르를 2회 수상한 선수보다 뛰어난 선수라는 평을 라이벌 팀의 역대 최고의 감독에게 듣게 된 셈. [7] 다만 달글리시는 키건과 달리 발롱도르를 수상(최고 순위 2위)하지 못했는데, 하필이면 본인의 최전성기가 미셸 플라티니와 겹친 것이 까닭이었다. [8] 헤이젤 참사의 여파로 잉글랜드 클럽의 유럽대회 진출이 좌절된 후라 감독으로서의 유럽 무대 데뷔는 2011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9] 당시 페이즐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기전에 빨리 이 글래스고를 떠나는게 낫겠다." [10] 당시 셀틱 팬들은 팀의 간판이자 에이스가 잉글랜드로 떠나는 것에 분개했고, 달글리시가 1978년 8월 셀틱 파크로 돌아와 조크 스타인 헌정 경기에 출전했을 때 관중들의 야유를 받기도 했다. [11] UEFA 챔피언스 리그 [12] 이것때문에 UEFA는 모든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 대항전 출전을 5년간 금지시켰고, 리버풀은 7년이나 출전 금지시켰다. 그것때문에 리그 우승한 에버튼은 유러피언컵에 못 나가게 되었고, 머지사이드 더비는 더더욱 치열해졌다. [13] 이 두 경기에서 득점한 상대 골키퍼가 리버풀 팀 동료 레이 클레멘스였다. [14] 리그 29경기 22승 7무 포함 [15] 당시 감독이었기에 책임을 지고 매일같이 유족들과 만나고, 장례식을 찾아다니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굉장히 피폐해졌다고 한다. [16] 남은 시즌은 수석코치인 로니 모란이 맡았다. 모란은 1965년부터 1998년까지 리버풀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한 전설적인 부트 룸의 일원이었다. 당시 급작스러운 상황에 감독직을 맡았으나 이후 정식 감독이 되기를 거부했다. [17] 이때문에 이것을 결정한 퍼슬로우와 톰 힉스&조지 질레트는 두고두고 까인다. 애초에 이때 후보는 케니, 호지슨, 페예그리니였다. 제정신이 박혀있었다면 호지슨을 고르는 짓은 안해야 했다.그러나 호지슨 이후 부임한 케니의 성적도 별반 나을 것도 없었으며 심지어 돈을 더 많이 쓰고도 그 정도 성적이란 점에서 별 차이 없는 선택. 하지만 페예그리니가 했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저 당시 팬층에서 제일 선호도가 높았던 후보가 페예그리니였다. 킹 케니는 후술되어 있듯이 오랫동안 현장을 떠나있던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고 호지슨은 그동안 보여준 모습만 봐도 팀을 챔스권에 올려놓기에는 답이 없어보였기 때문에. 결국 우려대로 저 두 감독은 팀의 부활에 실패하고 리버풀은 챔스로 돌아가기 위해 브렌던 로저스의 부임까지 기다려야 했다. [18] 이 때 퍼거슨이 케니 달글리시의 귀에 대고 속삭인 첫 마디는 'Welcome Back.'이었다고 한다. [19] 디르크 카윗이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20] 앤디 캐롤이 2골을 기록했다. 리버풀 시절 유일하게 밥값한 경기로 꼽히는 경기였다. [21] 특히 첼시 팬들은 어잌후 리버풀님들 ㄳ요, 리버풀 팬들은 야이 #$!#@$!@#$들아 메이렐레스 왜 팔아 1@#!@$ 소리가 나왔다. [22] 그러나 달글리시 경질 이후를 기준으로 평가할 때, 조던 헨더슨은 매우 뛰어난 영입이라 할 수 있다. [23] 조던 헨더슨은 이후 팀의 주장으로서 핵심 선수로 자리잡았기에 결과적으로 훌륭한 이적이 되었다. 하지만 이적 직후엔 굉장한 삽질을 하며 케니 달글리시의 이적 실패론에 열심히 힘을 실어주던 선수였다. 더군다나 애초에 헨더슨이 살아난 게 케니 달글리시가 사퇴하고 감독이 로저스로 교체된 이후다. 영입 초기에 달글리시가 그를 중앙 미드필더가 아닌 오른쪽 윙어로 썼기때문에 이 부분은 달글리시의 잘못이 커보인다. [24] 루이스 수아레스는 엄밀히 말하면 달글리시가 데려왔다고 하기엔 좀 애매한데, 호지슨이 감독이었던 2010년 겨울 경부터 이미 리버풀과 강력하게 링크가 있어왔고, 호지슨이 임기 말년 시절에 수아레스를 원한다는 인터뷰도 한적이 있다. 달글리시가 수아레스를 영입했다고 하기엔 좀 모호한 면이 있다. [25] 11/12시즌 12월 현재 팀 내 스탯 1위의 선이다. 90분당 0.64의 공격포인트.(2골 7어시) [26] 볼을 소유했을 때는 이를 전개하는 과정이 괜찮은데, 볼을 소유하지 않았을 때의 움직임이 너무 구리다. 특히 이 문제는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후반에 더욱 두드러진다. [27] 존 헨리가 부임했지만 재정 상황이 맨체스터 시티나 첼시처럼 빵빵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캐롤과 같은 영입을 함부로 할 수 없다. [28] 유럽 국제 대회를 치르지 않는다는 것은 리버풀 수준의 팀에게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국내 리그와 컵 대회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EPL의 수익 분배를 감안했을 때 유로파 리그는 우승권에 근접하더라도 리버풀에게 큰 이익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리그 4강에 들어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따는 것이 훨씬 경제성에서 좋은 결과를 낳는다. [29] 물론 팀의 선수에 대해 변명이 필요한건 사실이며 수아레스가 다른 표현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보호가 필요하긴 하지만, 솔직히 지속적으로 수아레스에게 불리한 증언만 나오는 상황이다. [30] 2-0으로 앞서고 있다가 후반에 15분 동안 세 골을 연속으로 내주며 패했다. [31] 이 리그컵 우승이 아니었다면 2019년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무려 13년간 무관 행진을 이어갈뻔했다. [32] Manager of the Year Award [33] 1985년 신년 서훈명단(1985 New Year Honours)에서 선정됐다. [34] 2018년 6월 서훈명단(2018 Birthday Honours)에서 선정됐다. [35] 하지만 이 부분은 후에 인터뷰에서 수아레즈 지지 티셔츠를 입은 것은 선수단의 결정이었으며, 보드진에서 허가가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었다면 더 적게 말했을 것이며, 다른 판단을 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36] 알렉스 퍼거슨, 알프 램지, 스탠리 매튜스, 보비 찰튼, 바비 롭슨 등 '경'으로 불리는 축구인들은 바로 이 Knight Bachelor를 받음으로써 기사가 된 것이다. Knight Bachelor는 대영제국 훈장 등의 '훈장'과는 다른 별개의 특전이며, 서열은 훈장으로 치면 2등급에는 살짝 못미치고 3등급보다는 높게 취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