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8:57:28

이안 러쉬

이안 러쉬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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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리버풀 FC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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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앰버서더
Liverpool Football Club Ambassa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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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러쉬
Ian Rush
본명 이언 제임스 러시[1] MBE
Ian James Rush MBE
출생 1961년 10월 20일 ([age(1961-10-20)]세)
웨일스 덴비셔 세인트애서프
국적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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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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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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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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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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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신체 180cm / 체중 79kg
직업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d00027,#191919> 선수 체스터 시티 FC (1978~1980)
리버풀 FC (1980~1986)
유벤투스 FC (1986~1988)
리버풀 FC (1986~1987 / 임대)
리버풀 FC (1988~1996)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6~1997)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7~1998)
셰필드 유나이티드 FC (1998 / 임대)
렉섬 AFC (1998~1999)
시드니 올림픽 FC (1999~2000)
코치 리버풀 FC (2003)
감독 체스터 시티 FC (2004~2005)
기타 리버풀 FC (2010~ / 앰버서더)
국가대표 73경기 28골[2] ( 웨일스 / 1980~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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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00027> 등번호 웨일스 대표팀 - 9
리버풀 FC - 9[3]
유벤투스 FC - 9
리즈 유나이티드 FC - 9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 8
가족 조카손자 오언 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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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은퇴 이후6. 기록
6.1. 대회 기록6.2. 개인 수상6.3. 개인 기록6.4. 수훈
7. 여담

[clearfix]

1. 개요

웨일스 국적의 前 축구 선수. 리버풀의 전성기인 붉은 제국에서 '킹 케니'라 불렸던 케니 달글리시와 다이나믹 듀오를 이뤘던 스트라이커이다. 리버풀 FC 클럽의 최다 득점자이자, 단 둘 뿐 유러피언 골든슈 수상자이기도 하다.

2. 클럽 경력

1978년 당시 2부리그 팀인 체스터 시티에 입단하여 1980년 FA컵 3라운드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를 2-0으로 꺾으면서 선수로써의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1980년에 리버풀로 입단하게 되었다.[4]

리버풀 입단 초기에는 별 성과가 없었으나 1981년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와의 풋볼 리그 컵 재경기에서 데이비드 존슨이 부상을 당하자 당시 감독인 밥 페이즐리는 러쉬에게 케니 달글리시와 함께 앞쪽을 맡으라고 지시를 했고, 본격적으로 주전에 올라 달글리시가 골을 넣는데 공헌했다. 이어서 팀 통산 346골을 터뜨렸고, 리그 우승 4번, FA컵 1번, 유러피언컵 2번, 리그컵 4연패 등 총합 11개의 트로피를 거머쥐기도 했다. 특히 1983/84 시즌은 러쉬의 전성기였는데, 당시 그가 47골을 기록하면서 유럽의 스타로 발돋움하자 1984년에 SSC 나폴리에서 그를 낚아채려 했으나 나폴리는 마라도나로 관심을 돌렸다.

1985/86 시즌에 리그 우승-FA컵 우승 더블을 따낸 활약으로 1986년에 유벤투스 FC와 계약을 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전 소속팀인 리버풀로 임대되어 30골을 터뜨렸다. 리버풀 팬들이 그를 붙잡아두려고 했으나 유벤투스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유벤투스에서도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1988년에 케니 달글리시 감독에 의해 당시 최고 영입료인 280만 파운드로 러쉬를 불러들였다. 이때는 존 올드리지와 피터 비어즐리가 러쉬의 대체재였기 때문에 때를 기다리다 1989년 에버튼 FC와의 결승전에서 FA컵 결승전에서 교체 선수로 2골을 올리며 부흥기를 맞았고, 1993년부터는 주장으로 활약하면서 젊은 로비 파울러의 멘토로써 파울러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했으며, 1995년에 리그컵(코카콜라 컵)을 따내기도 했다.

러쉬는 "붉은 제국"이라고 불렸던 전성기 리버풀에서 달글리시[5]와 함께 다이나믹듀오로 불렸다. 또한 리버풀에서 각종 개인상과 팀우승을 모조리 경험했으며, 리버풀에서의 골기록은 통산 346골로 잉글랜드 내의 한 클럽에서의 득점기록으로 단독 1위이다.

1995/96 시즌을 끝으로 정든 리버풀을 떠난 뒤 리즈 유나이티드 FC,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등을 거치다가 2000년에 호주의 시드니 올림픽 FC에서 은퇴했다.

이후 2006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3. 국가대표 경력

1980년 5월 21일에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데뷔했으며 1996년까지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는 동안 73경기에 출전하면서 28득점을 기록했다. 참고로 그가 세운 대표팀 출전 기록은 한동안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전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6]

1991년 6월 5일에 열린 독일과의 UEFA 유로 1992 예선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웨일스는 독일에 승점 1점 차로[7] 본선 진출 티켓을 넘겨주고 만다. 그가 대표팀에서 뛰는 동안 웨일스는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UEFA 유로 1984,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UEFA 유로 1988,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UEFA 유로 1992, 1994 FIFA 월드컵 미국 예선에서 모두 탈락했다.

러쉬는 클럽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가대표팀에서는 단 한 차례도 메이저 대회 본선에 출전하지 못한 비운의 축구 선수 중 한명이었다.[8]

4. 플레이 스타일

이안 러쉬는 패스를 잘하거나 상대를 손쉽게 제치는 테크닉은 없었으나 타고난 득점감각을 가지고 있던 공격수였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의 장점은 스트라이커로서 가져야하는 대부분의 능력을 타고났다는 점에 있었다. 볼터치가 매우 간결해서 좋은 퍼스트터치를 바탕으로 반박자 빠른 슈팅의 달인수준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준족의 주력에 신들린듯한 위치선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시 수비수들이 너무 막기 힘들어 해서 귀신(The Ghost)이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다.

플레이 스타일덕에 게르트 뮐러와 많이 흡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9] 플레이메이킹 능력이 없진 않으나 소속팀에 월드 클래스 플레이메이커가 있었기 때문에 득점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도 비슷하다.[10]

문서내에서 계속 언급되는 달글리시와의 조합은 역대급 다이나믹듀오라고 불리며 스트라이커-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정석적인 모델이 되기도 한다. 당시에 플라티니를 제외한다면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수준에 가까웠던 달글리시와 최고의 득점력을 자랑했던 러쉬와의 조합이 당시 리버풀의 감독이었던 밥 페이즐리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클럽내 최전성기인 "붉은제국"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5. 은퇴 이후

은퇴 이후 2003년에 리버풀로 돌아와 잠깐 스트라이커 코치로 활약하다 2004년에 친정팀인 체스터 시티의 감독으로 한 시즌간 역임했고, 현재는 축구 전문가로 TV에 자주 출연중이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개인 기록

6.4. 수훈

7. 여담

  • 웨일스 대표팀 동료이자 리버풀의 더비 라이벌 에버튼 FC의 주전 골키퍼였던 네빌 사우스올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러쉬가 유벤투스로 이적 후 가진 친선 경기에서 러쉬는 사우스올을 상대로 전반에만 해트 트릭을 기록해 사우스올의 자존심을 박살내버린 적이 있었는데 이 경기 하프 타임 때 사우스올은 러쉬에게 다가가 넌지시 한 마디를 건넸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탈리아로 좀 꺼져 줄래?였다고.
  • 의외로 러쉬는 어릴적 에버튼의 팬이었다(...). 그런데 상기한대로 에버튼에 너무 강한 나머지 머지사이드 더비의 최고 득점자라는게 아이러니한 편. 리버풀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는데도 자꾸 떠나려고 했던게 에버튼팬이어서 그런게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로 말을 하는 편이다.
  • 러쉬 이후의 9번 스트라이커들은 리버풀내에서 미묘한 평가를 받는 편이다. 리버풀의 '원더 보이' 마이클 오언은 구단에 역대급 통수를 쳤고, 그 페르난도 토레스도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줬지만 기간이 짧았으며 폼이 떨어진 후 라이벌 팀 첼시로 이적하면서 잡음을 빚었다. 비교적 이러한 논란에서 벗어나는 9번은 러쉬가 직접 튜터를 해줬던 로비 파울러 정도인데 파울러 또한 잔부상에 시달리면서 다소 아쉬웠다는 평가가 있다. 그 이후의 9번 계보로는 앤디 캐롤, 이아고 아스파스, 리키 램버트, 크리스티안 벤테케가 있는데, 이 선수들은 리버풀의 암흑기를 더 어둡게 만들었을 뿐이었으며 시간이 지나 9번을 이어받은 호베르투 피르미누가 2010년대 후반부터 좋은 활약을 펼쳐주고 있기는 하지만 정통 스트라이커가 아닌 폴스 나인 역할인데다 리버풀 커리어 말미엔 폼이 많이 떨어진 모습을 보여 과소평가를 받고있는 편이다. 물론 루이스 수아레스 라는 EPL 역대급 시즌을 보낸 걸출한 스트라이커가 있었지만, 수아레스도 리버풀 시절에는 핵이빨 사건이나 인종차별 논란 등 실력과는 별개로 인성적인 면에서 문제가 많았고 9번 역할을 맡긴 했지만 배번은 7번이었다.[12] [13]
  • 2011년 7월에 리버풀의 유소년 아카데미 홍보대사자격으로 내한한 적이 있으며 한국축구에 긍정적인 발언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당시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박지성에 대해서 근면한점과 성실한점을 극찬하며 유소년들이 본보기 삼아야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 22세 연하와 핑크빛 열애 중 이다.
  • 2021-22 시즌 리버풀 1군에 콜업된 오언 벡이 이안 러쉬의 조카손자이다.


[1] /ˈiən dʒeɪmz rʌʃ/ [2] 대표팀 역대 득점 2위 [3] 9번 외에 7, 8, 11, 12, 14, 15, 16번을 사용한 적도 있다. [4]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에 에버튼 FC의 팬이었다고 한다. [5] 달글리시는 1985년부터는 리버풀에서 선수겸 감독이었다. [6] 지금은 크리스 건터, 가레스 베일, 웨인 헤네시 등 웨일스 축구의 황금세대 선수들이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러쉬의 기록을 추월했다. [7] 독일은 승점 10점, 웨일스는 승점 9점을 기록했다. [8] 이는 같은 나라의 라이언 긱스도 마찬가지다. [9] 물론 경기당 골기록은 뮐러가 어느 선수와도 비교가 불허하긴 하다. [10] 뮐러의 경우에는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있었고 러쉬에겐 그레이엄 수네스가 있었다. [11] 1977~1996 [12] 상단에 기재된 마이클 오언도 리버풀 시절 9번 역할이었지만 등번호는 10번이었다. [13] 현재 이 선수들 중 리버풀 공식 사이트에서 구단 레전드로 평가 받은 선수는 러시를 제외하고 파울러,오언,피르미누 단 3명뿐이다. 이 중 오언은 팬들에게 실질적인 레전드 취급을 받지는 못하는 편이고 토레스 수아레스는 리버풀에서 활약한 기간이 짧아서 제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