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그레이엄 수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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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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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 ||||
초대 바클레이 ☆ |
2대 맥케나 ☆ |
3대 왓슨 ★★☆ |
4대 애시워스 ★ |
5대 맥퀸 ★ |
|
6대 패터슨 |
7대 케이 ★ |
8대 웰시 |
9대 테일러 |
10대 샹클리 ( 샹클리 체제) ★★★☆ ★★★ |
|
11대 페이즐리 ( 페이즐리 체제) ★★★★★★ ★★★★★★★★ |
12대 페이건 ( 페이건 체제) ★★★ |
13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1기)) ★★★ ★★ |
13대(대행) 모란 ( 모란 체제) |
14대 수네스 ( 수네스 체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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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에반스 ( 에반스 체제) ★ |
15·16대 에반스· 울리에 ( 에반스·울리에 체제) |
16대 울리에 ( 울리에 체제) ★★★★★ |
17대 베니테스 ( 베니테스 체제) ★★★ |
18대 호지슨 ( 호지슨 체제) |
|
19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2기)) ★ |
20대 로저스 ( 로저스 체제) |
21대 클롭 ( 클롭 체제) ★★★★ ★★★ |
22대 슬롯 ( 슬롯 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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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미어 리그 / ★
FA컵 / ★
EFL컵 / ☆
EFL 챔피언십 ★ UEFA 챔피언스 리그 / ★ UEFA 유로파 리그 / ★ UEFA 슈퍼컵 / ★ FIFA 클럽 월드컵 |
[[그레이엄 수네스| |
|
제15대 감독 그레이엄 수네스 |
|
<colbgcolor=#d00027><colcolor=#fff> 감독 |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그레이엄 수네스 / 제15대 감독 |
코치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니 모란 (수석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이 에반스 (수석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필 브루스마 (코치)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스티브 하이웨이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필 톰슨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존 베니슨 (유스 코치)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론 예이츠 (스카우트) |
주장 |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니 웰런 / 제38대 주장 (1990~1991)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마크 라이트 / 제39대 주장 (1991~1993)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존 반스 / 제40대 주장 (1993) [[웨일스| ]][[틀:국기| ]][[틀:국기| ]] 이안 러쉬 / 제41대 주장 (1993~1996) |
계약 기간 |
1991년
4월 16일 ~
1994년
1월 28일 (2년 9개월/ 1019일) |
계약 종료 (성적 부진에 따른 상호 협약 해지) | |
연봉 | 미상 |
전술 스타일 |
킥 앤 러시에 기초한 속공 축구 ┗ 4-4-2, 4-4-1-1 포메이션 |
역대 전적 | 157경기 66승 45무 46패 (승률 42%) |
우승 경력 | 1991-92 FA컵 (우승) |
[clearfix]
1. 개요
리버풀 FC의 제15대 감독 그레이엄 수네스 체제를 정리한 문서.2. 감독 선임 과정
1990-91 시즌 도중 케니 달글리시가 참사의 후유증으로 감독직을 사임하자, 리버풀은 부트 룸의 일원이었던 로니 모란을 임시 감독으로 선임하여 혼란속의 팀을 다잡고자 했다. 그러나 모란은 정식 감독이 되기를 거부했고 결국 리버풀은 모란이 소방수 역할을 하는 동안 새로운 감독을 구해야했다. 당시 리버풀은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 이래 계속해서 리버풀 출신의 내부 인사들로 감독직을 계승하며 성공해오고 있었기에 전통을 이음과 동시에 구단 철학의 연속성을 위해 또 한번 리버풀 출신의 인사를 선임하길 원했다.그리고 당시 레인저스 FC에서 유망한 젊은 감독으로 떠오르던 그레이엄 수네스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수네스는 레인저스를 이끌고 좋은 선수들을 발굴해 스코틀랜드 리그의 지배자 셀틱 FC에게 우위를 보이며 도메스틱 더블을 달성하는 등, 좋은 지도력으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또한 그는 붉은 제국을 이끈 스코틀랜드 3인방 중 한 명이자, 위대한 주장이었던 팀 레전드로서 리버풀을 잘 아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에 리버풀의 보드진과 리버풀 노엘 화이트 회장은 수네스를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결국 1991년 4월 16일, 리그 5경기를 남긴 채 수네스가 리버풀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케니 달글리시 체제와 모란 대행 체제에 대한 내용은 리버풀 FC/달글리시 체제(1기) 문서 참고하십시오.
3. 연혁
3.1. 1990-91 시즌
수네스는 리그 5경기를 남겨둔 상태에서 팀에 부임했으나, 당시 리그 2위로 떨어져 리그 우승에서 미끄러지고 있던 리버풀의 상황을 돌려놓지 못했다. 수네스는 4월 20일에 열린 리버풀 감독 데뷔전에서 노리치 시티를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었고, 이후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35라운드에서도 3-0 대승을 거두어 순조롭게 리버풀 커리어를 시작하는듯 했다. 그러나 이후 36라운드와 37라운드에서 첼시 FC와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패배하였고, 이후 38라운드 최종전은 승리하긴 했으나 3승 2패로 시즌을 마무리, 리그 2위에 그쳤다. 그러나 이미 아스날 FC의 리그 우승이 30라운드를 기점으로 확실시되었기에 해당 시즌은 시즌 말미에 부임한 수네스의 역량이 성적을 좌우할 수 없었다.3.2. 1991-92 시즌
달글리시 체제를 거치며 상당히 고령화되어있던 스쿼드를 물려받은 수네스는 리빌딩을 진행해야했다. 붉은 제국의 터줏대감이자 스코틀랜드 3인방 중 하나였던 앨런 한센은 무릎 부상으로 1991년 여름에 은퇴했고, 리버풀 전성기를 이끌었던 베테랑들인 피터 비어슬리, 게리 길레스피 또한 떠나갔다. 겨울에는 스티브 맥마흔까지 이적했다. 이에 수네스호는 당시 리그 내 이적료 레코드를 세우며 마크 라이트와 딘 손더스 듀오를 더비 카운티로부터 영입했고, 마크 월터스, 롭 존스 등을 추가로 데려와 스쿼드 개선에 나섰다. 또한 스티브 맥마나만과 제이미 레드냅을 필두로하여 미드필더진의 세대교체에도 주력했다. 더불어 수네스는 선수단 문화를 개혁하기로 결심하여 훈련 세션을 완전히 뒤바꿨으며, 선수단에 새로운 규율을 공포하여 강한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1] 또한 구단 선수단과 소통하고 있던 과거 레전드들의 출입에 압박을 가해 선수단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그러나 이러한 개혁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수네스의 리버풀은 달글리시 체제의 영광을 이어가지 못하고 리그에서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리버풀은 처음에는 늘 그래왔듯이 우승을 향해 순항하는 듯했다. 그러나 리그 중반까지 이길 경기를 비기고 비길 경기를 패배하며 계속해서 부족한 경기력을 이어갔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즈 유나이티드에 밀려 순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또한 수네스가 같은 선수만 계속 기용하며 로테이션을 거의 돌리지 않는 바람에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나 결국 막판에 연패를 거듭, 27라운드를 기점으로 완전히 부진에 빠져 후반기에만 7패를 기록하고 말았다.[2] 결국 수네스의 리버풀은 16승 16무 10패 승점 64점, 리그 6위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골득실차는 단 7골에 불과했고 특히나 원정에서의 기록이 너무나 좋지 못했다.
헤이젤 참사 이후 처음으로 진출하게 된 UEFA컵에서는 1라운드와 2라운드에서 모두 원정을 떠나 패배했으나, 홈에서의 대승에 힘입어 3라운드로 진출, 3라운드에서는 가뿐하게 2승을 챙기고 8강에 올랐다. 그러나 리버풀은 8강에서 제노아 CFC에게 일격을 얻어맞고 무기력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리그컵에서는 4라운드에서 3부 리그의 피터버러 유나이티드 FC를 만나 충격적인 패배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그러나 FA컵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리버풀은 4라운드와 5라운드에서 재경기를 치르며 꾸역꾸역 준결승까지 진출했고, 준결승에서도 포츠머스 FC를 만나 재경기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끈질긴 승부를 펼쳤다. 결국 결승에 진출한 수네스호는 1992년 5월 9일에 열린 결승전에서 선덜랜드 AFC를 상대로 2-0 승리, 통산 5번째 FA컵 우승을 달성하는 쾌거를 올렸다.[3]
첫 풀 시즌을 치른 수네스호는 리그에서 6위로 떨어지며 1964-65 시즌 이후 리그 최저 성적을 기록하여 자존심을 구겼고, UEFA컵과 리그컵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했으나, FA컵에서는 고군분투 끝에 우승을 챙기며 성과를 냈다. 그러나 리빌딩의 일환으로 영입된 선수들의 부진과 불안한 성적으로 경기력이 흔들렸기 때문에, 과감한 개혁으로 인한 여파와 더불어 수네스에 대한 신뢰는 다소간 들리기 시작했다. 또한 해당 시즌 4월, 수네스는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았고, 로니 모란이 감독 대행으로 시즌 마지막 일정을 치러야했다.[4] 리버풀은 감독이 없는 와중에도 분전하여 FA컵 4강전에서 포츠머스를 격파하고 결국 FA컵 결승전에서 이겨 우승을 차지하는 등 선전하긴 했으나, 문제는 병실에서 발생했다. 당시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인 더 선이 수네스의 병실을 방문하였다가 수술 후 휴식 중 팀의 승리 소식에 어린 딸과 함께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찍어서 1면 기사에 올렸던 것. 이 기사를 본 리버풀 팬들은 격노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더 선은 지난날 힐스버러 참사로 수백여 명의 리버풀 팬 사상자가 생겼을 때 리버풀 팬들을 비하하고 모욕하는 기사를 실어 리버풀 팬들의 공적이 된 언론사였기 때문이다.[5] 이에 수네스는 경기장 밖에서 팬들의 신임을 크게 잃게 되었다.
3.3. 1992-93 시즌
수네스호는 프리미어 리그 시대가 개막함에 따라 새롭게 시즌을 준비하였고, 지난 시즌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준 딘 손더스를 과감히 방출, 레전드 레이 호턴까지 내보내면서 스쿼드 리빌딩을 이어갔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골키퍼 데이비드 제임스를 영입해 브루스 그로벨라를 대체했고, 폴 스튜어트, 토르벤 피시니크 등의 선수들을 영입해 선수단을 강화했다.그러나 리버풀의 부진은 이어졌다. 수네스호는 채리티 실드에서 리즈 유나이티드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고, 리그 개막전에서 패배한 뒤, 10라운드까지 단 2승에 머무르며 부진에 빠졌다. 이후 리그 중반에는 다시 경기력이 올라오는듯 싶었으나 수네스는 계속 시대에 뒤쳐진 전술을 고집했고, 리버풀의 주포 이안 러쉬 마저 컨디션 난조로 득점에 부진을 겪었다. 이에 리버풀은 20라운드를 기점으로 30라운드까지 단 1승에 그치는 엄청난 졸전을 거듭, 급기야 리버풀의 성적은 바닥을 찍어 3월이 될 무렵에도 15위에 머물렀다. 그래도 다행히 러쉬가 막판에 11골을 몰아치는 등 분전하며 이후 후반기에 약간 경기력을 다시 끌어올렸고, 결국 또 다시 6위로 리그를 마무리했다. 16승 11무 15패 승점 59점으로 지난 시즌보다 더 좋지 못한 성적이었으며 득실차는 다시 7골에 머물렀다.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진출한 컵위너스컵에서는 2라운드에서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게 완패하여 무력하게 탈락했고, FA컵에서는 디펜딩 챔피언답지 못하게 3라운드에서 볼튼 원더러스에게 잡혀 떨어졌다. 리그컵에서도 좋지 못한 경기력은 이어졌고, 4라운드에서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재경기 끝에 탈락했다.
수네스호는 연속으로 리그 6위에 그쳤고, 지난 시즌 FA컵 우승의 성과와 다르게 모든 컵 대회에서 매우 부진한 성적으로 떨어져 점점 강한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팀의 경기력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은채 리빌딩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다. 심지어 이번 시즌을 앞두고 팔아버렸던 손더스는 아스톤 빌라로 떠나 활약하며 빌라를 우승 경쟁에 합류 시켰고, 그의 대체자로 영입한 스튜어트는 부상으로 신음하며 부진을 이어갔다. 수네스는 팀 레전드로서 기대했던 모습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며 점점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팬들은 지난 시즌 더 선 사건으로 인해 수네스를 비난하고 있었고, 결국 이 시즌을 기점으로 상당수의 리버풀 팬들이 수네스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그러나 보드진은 여전히 레전드인 수네스를 신임하고 있었고, 그는 경질 여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감독직을 이어나갔다.
3.4. 1993-94 시즌
성적 부진으로 인해 유럽 대항전에 진출하지 못했음에도 수네스는 꿋꿋하게 리버풀 감독직을 이어나가면서 계속해서 부분적으로 리빌딩을 진행했다. 이에 1993년 여름, 나이젤 클러프가 영입되는 등 공격진의 보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해당 시즌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시즌 초반에 1군으로 월반하여 데뷔한 로비 파울러의 존재였다. 리버풀은 젊은 선수들의 수혈로 인해 활기를 받으며 시즌을 준비하게 되었다.그렇게 시작된 1993-94 시즌, 리버풀은 리그 개막 후 3연승을 달리면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고 반등의 기미를 보이는듯 했다. 그러나 희망도 잠시, 수네스호는 6라운드를 기점으로 부족한 전술 역량을 노출하면서 4연패의 늪에 빠졌고, 곧바로 중위권으로 추락했다. 그 이후 리버풀은 박싱 데이 전까지 다시 순위를 올리긴 했으나 계속해서 너무 많은 무승부를 거두며 5위권에 그치고 있었다.
국내컵에서의 부진도 이어졌다. 수네스호는 리그컵에서도 윔블던 FC를 상대로 4라운드에서 조기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FA컵이었다. 리버풀은 FA컵 3라운드에서 브리스톨 시티를 만나 재경기까지 펼쳤고, 결국 1-0으로 패배하는 졸전을 펼쳤다. 결국 이 경기를 끝으로 리버풀의 보드진은 인내심을 잃었고, 수네스는 상호 협약 해지를 통해 팀을 떠났다. 사실상의 경질이었다.
수네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트 룸 출신의 또 다른 핵심 코치 로이 에반스가 시즌 중반에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에반스는 방향을 잃은 팀의 부진을 막지 못했다. 28라운드 이후 후반기에 진입하자 리버풀은 연패 행진을 거듭, 결국 리그 마지막 15경기에서 9패를 당하는 졸속한 경기력으로 리그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7승 9무 16패 승점 60점의 끔찍한 성적이었으며, 득실차는 4골에 불과했다. 리그 8위는 빌 샹클리가 2부 리그에 있던 팀을 이끌고 승격한 직후 시즌이었던 1962-63 시즌 이후 최저 성적이었으며, 해당 시즌은 60년대 1부 리그 승격 후 최악의 시즌이되었다.
로이 에반스 체제에 대한 내용은 리버풀 FC/에반스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4. 공격 포인트 순위
5. 시즌별 주요 성적
그레이엄 수네스의 시즌별 주요 성적 |
||||||||||
시즌 | 리그 | FA | EFL | CS | UCL | UEL | CWC | ICC | 감독 | |
1990-91 시즌[6] |
2위 (▼ 1) |
- | - | - | - | - | - | - |
케니 달글리시 ↓ 로니 모란(대행) ↓ 그레이엄 수네스 |
|
1991-92 시즌 |
6위 (▼ 4) |
우승 (5회) |
4R | - | - | 8강 | - | - | 그레이엄 수네스 | |
1992-93 시즌 |
6위 ( = ) |
3R | 4R | 준우승 | - | - | 2R | - | ||
1993-94 시즌[7] |
6위 ( = ) |
3R | 4R | - | - | - | - | - |
그레이엄 수네스 ↓ 로이 에반스 |
6. 평가
케니 달글리시를 이어 레전드 출신의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졸속한 전술 및 경기 운영 능력과 너무 강압적인 선수단 통제로 팀 개혁에 실패하며 결과적으로 붉은 제국의 명맥을 끊고, 길고 긴 암흑기를 열어버린 감독.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고 구단을 혁신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빌 샹클리 시대 이후 최악의 리그 성적을 거듭하면서 결국 리그 8위라는 승격 이후 역대 최악의 성적만을 남겼다. 또한 헤이젤 참사의 징계가 끝나며 본격적으로 유럽 대항전에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된 중요한 시기에 리그에서의 끔찍한 부진으로 인해 무력하게 시간을 날리며 구단의 침체기가 시작되는 계기를 만들었다.수네스는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스타일로 강하게 팀의 기강을 잡으려고 했으나, 이것이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는 프리미어 리그로 변화하며 새로운 시대에 발맞춘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빌 샹클리로부터 이어진 독자적인 전통과 역사를 이어오던 리버풀에도 분명히 개혁이 필요한 시기기는 했다. 그러나 수네스의 너무 강압적이었던 스타일은 라커룸의 선수들 뿐 아니라 코치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수네스는 경기 직후 다혈질적인 성격을 내보이며 선수단에게 고함치기 일쑤였고[8] 선수단의 식단과 문화를 너무 갑작스럽게 통제하여 선수단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9] 특히 그는 과거 팀 동료이기도 했던 선수단과 사이가 틀어져 이안 러쉬와 같은 베테랑 선수들마저 수네스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주급 관련해서도 내부적인 갈등이 있었다.[10]
또한 수네스는 훈련 체계도 완전히 바꾸어 짧고 굵게 집중하는 스타일의 전통적인 훈련 방식을 없애고 훈련 시간을 크게 늘렸다. 이러한 훈련 방식의 변화는 기존 부트 룸 출신의 로니 모란, 로이 에반스 코치의 불만을 샀다. 기존 코치진은 샹클리 시절부터 지속되어온 훈련 루틴의 변화에 거부감을 느꼈으며, 선수단의 부상을 우려했다.[11] 또한 리버풀은 샹클리 시절부터 안필드로 출근해 다 같이 모여 멜우드로 이동하고 이후에 다시 안필드에서 점심을 먹고 퇴근하는 훈련 루틴을 진행해왔는데, 수네스는 안필드가 현대화됨에 따라 선수단이 멜우드에서 모든 훈련 스케줄을 진행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결정적으로 수네스는 안필드의 증축 및 리모델링을 진행하면서 메인 스탠드 라커룸 옆에 붙어있던 부트 룸을 없애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샹클리 시대부터 팀에 기여해온 모란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고, 수네스는 코치진과의 갈등을 빚어야만 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1992년 4월에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았을 당시 더 선을 통해 병실의 모습을 비춤에 따라 리버풀 팬들로부터 어마어마한 비판을 받았으며[12], 많은 팬들에게 상처와 실망을 안겼다. 이러한 행보는 부트 룸을 해체하고 과거의 유산을 청산하는 행보와 맞물려 세간의 비난을 샀고, 점차 수네스는 구단 내외로부터 신임을 잃어갔다. 이러한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조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팀의 성적이 제대로 나왔어야 당위성을 가질 수 있었으나, 수네스는 결정적으로 전술 능력이 부족한 감독이었고, 구시대적인 축구와 낡은 4-4-2 시스템의 지속으로 인해 좋지 못한 성적을 거듭했다.[13] 또한 리빌딩에도 실패하여 이적 시장에서의 선수 영입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경기를 읽고 선수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능력도 부족해 이안 러쉬 등의 주축 선수들이 전성기 나이에서 내려오자 부족해지는 팀의 전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에 현대 축구에 발맞춰 팀 문화를 혁신하고자 노력했음에도 수네스는 명백하게 실패한 개혁가로 남게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는 대륙 축구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져있었고, 식단과 훈련 체계, 선수단 관리 부분에서 수네스가 시도한 개혁은 사실 명백히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14] 그러나 그 개혁의 방식이 너무 권위적이고 독단적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선수단에 적용되지 못했으며 많은 관계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무엇보다도 경기장 내에서의 모습이 좋지 못했기에 지지를 받지 못했다.[15] 이에 프리미어 리그 시대 이후 90년대 리버풀의 부진은 상당 부분 수네스에게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수네스가 만약 리버풀의 성적을 상위권으로 유지시키고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면, 리버풀이 오랫동안 리그 우승을 못하고 중위권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평이다. 하지만 1991-92 시즌에 거둔 FA컵 우승은 나름 의미있는 업적이었으며, 수네스 휘하에서 스티브 맥마나만, 제이미 레드냅, 로비 파울러 등의 유망주들이 발굴되어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점은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다.
[1]
음주를 완전히 금지하고 선수단 식단을 통제하는 등의 개혁이 수네스 아래에서 있었다.
[2]
이는 후술할 수네스의 심장병으로 인한 공백으로 인한 결과이기도 했다.
[3]
그러나 후술할 심장병 문제로 결승전은
로니 모란이 대행으로 지도했다.
[4]
리그 마지막 7경기와 FA컵 준결승 재경기를 모란이 대행했고, FA컵 결승에는 수네스가 일부 업무에 복귀하여 라인업을 직접 짰으나 경기장에는 모란이 들어갔다.
[5]
이 사건 때문에 리버풀 팬들은 물론 같은 도시를 공유하는 에버튼 팬들까지 더 선을 매우 혐오한다. 실제로 더 선은
머지사이드 지역에서 판매되지도 소비되지도 않는 신문이며, 현재까지도 리버풀의 어떤 관계자도 더 선과는 일절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6]
시즌 중도 부임
[7]
해임 당시 성적
[8]
당시 리버풀의 핵심 미드필더였던 얀 몰비의 증언에 따르면, 패배 후 분에 못 이긴 수네스가 라커룸에서 유리병을 거울에 집어던져 유리가 박살났던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9]
1970~80년대 잉글랜드에는 선수단이 음주를 즐기며 경기 피로를 풀고 음식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었는데, 이탈리아 생활을 통해 대륙적인 선진 문화를 배운 수네스는 이러한 음주 문화를 완전 금지했으며, 기름진 식단도 통제되었다.
[10]
수네스 체제에서 새로 영입된 선수들이 고주급을 받자 기존 선수단이 불만을 표출했고, 수네스는 축구보다 돈을 밝히는 선수단을 비판했다. 특히 수네스는 후에 자서전에서
이안 러쉬와 레이 호턴이 영입생 마크 라이트가 그들보다 더 많은 주급을 받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며 자신을 압박했다고 주장했다.
[11]
실제로 수네스의 첫 풀 시즌에 리버풀 선수단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아킬레스건 부상자가 생겼다고 한다.
[12]
과거
힐스버러 참사의 원인이 리버풀 훌리건에게만 있다며 왜곡 보도를 펼치고, 리버풀 팬들이 사망자의 시체를 뒤져서 금품을 갈취했다는 내용 등의 허위 사실을 유포한 황색 언론이다. 이에 리버풀은 물론 지역 라이벌인 에버튼 팬들 또한 매우 혐오하는 언론이며,
머지사이드 지역에서는 절대 소비되지 않는 언론이다. 실제로 리버풀의 모든 관계자들은 더 선과의 인터뷰 및 접촉이 엄격하게 금지되어있다.
[13]
비슷한 시기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부임하여 과거 문화를 바꾸고 강력한 규율을 다잡은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 감독
알렉스 퍼거슨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퍼거슨도 혁신가였지만 결정적으로 게임 결과로 자신의 개혁을 증명했다.
[14]
음주를 금지하고 식단을 관리하는 것과 훈련장과 경기장을 분리하는 조치 등은 현대 축구에서 당연한 것이다. 또한
부트 룸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아쉽지만 결국 안필드 리모델링 또한 구단 현대화에 있어 필요한 조치이기는 했다.
[15]
이에 대해서 수네스는 훗날 자서전에서 자신이 리버풀 감독을 하는 동안 압력을 줄곧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부임 당시 리버풀 선수들 전원이 30세 이상이었고 그중 상당수는 이미 노쇠화되고 있었다. 그는 이들을 내보내고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기 위해 리빌딩을 필요로했고, 보드진도 동의해 그가 원하는 선수를 영입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보드진이 영입해준 젊은 선수는 별로 없었고, 리빌딩도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부상이 너무 잦아서 로테이션을 돌리기 에는 부적절했다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물론 그의 항변은 어느 정도 일리있지만 그렇다 하여 그전까지 잉글랜드의 우승권 구단인 팀을 한순간에 중위권으로 전락시킨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의 후임인
로이 에반스와
제라르 울리에가
스티븐 제라드,
마이클 오언,
제이미 캐러거 등 유스 출신 선수들을 1군에 데뷔시켜 소기의 성공을 거둔 것만봐도 수네스의 항변이 변명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